서울 의존교회130913a,b (일상의 말씀화)―이 근호 목사
서울 의존교회130913a,b (일상의 말씀화)―이 근호 목사
이름 : 김창길(IP:210.2.60.212)
서울 의존교회130913a (일상의 말씀화)―이 근호 목사
오늘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을 봅시다.
살후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말씀이 우리 사람들이 의논해서 지어낸 게 아니죠. 사람들이 야 모여봐라 해서 우리 이제부터 일하기 싫거든 밥도 못 먹게 만들자 하는 식으로 사람들이 의논해서 만든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봐요. 사람들이 의논하고 사람 머리에서 나오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이것을 왜 믿어야 됩니까? 세상이라 하는 것은 사람 좋으라고 있는 거잖아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것을 주장한 사람이 없어요. 주장한 사람이 있으면 맞아 죽습니다. 네가 배부르구나! 배부르니까 이런 소리 하는 구나! 네가 재산 꽤나 있다고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자 네가 악덕 업주야! 하면서 대번에 욕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것이 어느 인간의 머리에서도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없다면 우리는 그런 소리를 무시하면 안 될까요? 좀 터무니 없이 들린다 말입니다.
집에 할머니가 있는데 몸이 아프다. 일을 못한다. 그러면 죽일까요? 할머니! 왜? 일하세요! 허리가 아파서……. 그러면 할머니도 밥 없다! 너무 냉정하고 비정하고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인간도 우리가운데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맙시다! 라는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요.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말은 아무도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사람이 동의하지 않은 말에 왜 사람이 의식하고 신경을 써야 됩니까?
이것은 분명히 둘 중에 하나에요. 하나는 뭐냐 하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하는 그 말이 거북스러워서 이 말을 믿어주는 척을 하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려운데 다시 해 봅시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말을 하나님이 하셨잖아요. 그 말이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싫은데 그 싫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 말 싫어? 듣기 싫어? 먹지도 마!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에 의해서 너 굶어죽어! 하는 말이 듣기 싫은 거예요.
안 굶어죽기 위해서 억지를 부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척들을 하기 위해서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성경에서 빼내지를 못하고 외면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싫은 것이 아니라 내가 밥 못 먹고 굶어 죽을까싶어서 그런 내가 싫어서 이 말씀을 억지로 믿어주는 척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생각이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각에 동의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터치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식대로 살고 하나님은 그런 잔소리를 하든 말던 하나님식대로 하세요. 이 말씀대로 반드시 실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에 이 말씀을 그냥 부담 없이 보고 있는 거예요. 이 말씀은 결코 이루어 지지않는다는 거예요.
장차 주님께서 오실 것이다.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그것은 믿어요. 왜? 우리의 경험상, 우리의 경험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행여나 올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일 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이 말은 이 세상에 밥 못 먹는 사람치고 다 일 했다고 볼 수 없잖아요. 일 안해도 얼마든지 먹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거 누가 먹이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먹이셨다면 이 말씀하고 다르다 말이죠. 일하기 싫어도 잘 먹는 사람이 있고 일 해도 못 먹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이 말씀하고 안 맞으니까 하나님이 그냥 엄포 놓는 거다 그러니까 쉽게 가자! 라는 식으로 이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시하기로 작정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하신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신 것인가, 아니면 이 말씀의 바탕이 어디에서 이런 바탕이 나왔는가을 우리가 생각 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개인의 견해가 아닙니다. ‘일상을 말씀화’ 시키겠다는 의도에서 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도 바울이 믿기는 이 세상은 말씀의 세계이죠.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어느 구석에 가도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진행이 됩니다. 아침에 해 뜨고 해지고 하는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믿어요. 하늘의 별이 떨어지고 지구가 어떻게 되는 것도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일상생활이 있거든요. 일상생활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어떤 꾀를 부리느냐 하면 말씀의 세계 따로, 내 일상세계 따로, 일상생활할 때는 말씀이 잔소리 하지 마세요! 그리고 일상이 끝나고, 하루일과가 끝 난 뒤에 말씀, 성경 봐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내 일상생활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보탬이 되겠느냐를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일상생활은 꿈쩍도 안해요. 이것은 마치 바위섬같아요. 아주 단단해요. 바위섬에는 파도가 치치요. 파도가 친다고 해서 바위가 어머나! 놀래서 바위섬이 딴 데로 이사갑니까? 여기는 파도가 심해서 딴데로 이사가야겠어! 이럽니까? 이런 것 없어요.
말씀이란 파도가 늘 쳐대도 하나님은 말씀대로 해도 일상만큼은 끔쩍도 안하고 버티고 앉아있는게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일상을 위하여 하나님은 나한테 무슨 보탬이 되고 무슨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하는 쪽으로 거래합시다. 우리 흥정합시다. 하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도리어 끔쩍도 않는 것이 일상이 아니고 뭐가 끔쩍도 안한다? 사도 바울은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끔쩍도 안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일상생활 한다는 핑계로 떨어져 나가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일상생활을 말씀화시킨다. 일상생활을 말씀화 시킨다. 일상생활도 말씀의 연장으로 보겠다는 것이 사도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당신은 성경 몇 번 읽었습니까? 나는 100번 읽었습니다. 성경이 있으면 읽는다는 의미가 단어를 소지해서 읽으면 그것은 말이 돼요. 그런데 당신의 일상은 몇 % 말씀화 되었습니까? 이것은 성경 몇 번 봤습니까? 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100번을 보던 천 번을 보던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오전에 제가 누구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갑자기 비가 오는데 내 옷은 다 젖었는데 우산은 작은데 바지도 다 젖었는데 하여튼 간에 갔는데 허은숙 선교사님이 어제 돌아 가셨는데 누가 생전에 설교한 것 아마존에서 방송 촬영했던 것이 나오게 해 놨는데 그 죽는 게 일상이죠.
그러면 성도의 존재의 이유는 누가 죽음을 맞이해서 슬프다 이것은 말씀이 아닙니다. 슬프긴 슬픈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상황을 말씀화 하시겠는가? 이게 지금 관건이거든요. 송재원씨가 그러고 보니까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은데 살 빠진것도 어떻게 말씀화시키지? 성도의 관심사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이라는 것이 어떻게 말씀화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 돼요.
우리가 말씀화 되지 않으면 우리는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환자가 안 아프게 기도를 했는데 기도 응답이 안됐습니다. 그대로 이야기하면 나는 저의 어머니가 안 아프기 위해서 기도를 했는데 돌아가셨습니다.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라고 그 따님이 이야기했어요. 아주 참 훌륭한 따님이에요.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원래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 에서부터 시작해야 돼요.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 일상에 와 버리면 하나님을 믿었다, 예수 믿었다 하는 것이 다 날아가 버려요. 내 일상에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라고 생각한 그 하나님은 없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없어요. 내 보탬이 되고 나를 도움 주고 나 어려울 때 힘주는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왜냐 하면 말씀은 나 도와주는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까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실 거야 라는 것은 꿈쩍도 하지 않는 이 바위섬 같은 일상, 말씀은 버려도 일상은 못 버리겠다는 대단한 집념, 그것을 또다시 폭로된 샘이거든요. 어머니의 죽음앞에서 그분이 복음을 모른다는 게 아니고 솔직한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아파서 돌아가셨는데 내 기도의 응답이 안 될 때 나는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적절하다싶어서 타임을 잡아서 했죠.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느낄 때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그러한 상황이 된 거예요. 자,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면 사람은 아무 것도 안 믿습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할 때 누구를 믿습니까? 자기 자신을 믿죠. 자기 일상을 믿는 거예요. 자기가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는 순간이 하나님이 다루시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날 때에 우리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어요. 착하다고 여겼는데 천하에 못된 인간으로 지적받을 인간으로 사람들에게 공개당할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드디어 너의 일상은 말씀화 되는구나! 라고 하나님은 흐뭇해 하시는 겁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할 때에 일한적도 없이 밥 숟가락 뜰 때에 우리의 입장은 난처합니다. 당황스럽습니다. 많이 당황하셨어요? 일하지 않는데 숟가락 드니까 숟가락 놔! 어디서 밥먹어? 라고 말씀이 우리 일상속에 침투해 버려요. 도대체 밥도 함부로 못 먹어요. 밥 먹기 전에 오늘 밤먹기 위해서 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것을 따질 것 같으면 나는 하나님하고 안 놉니다. 그렇게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 하나님 같으면 내 일상에 천하에 보탬이 안되는 하나님은 나는 인정 못합니다. 라고 나올 때 그것은 어머니의 돌아가신 것처럼 그 순간 하나님은 애초부터 나에게 없는 하나님입니다. 뭐 이익이 있어야 믿지요.
여기 어린 자녀분들, 본인은 어리지 않다고 여기겠지만 다 큰 자녀분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물으면 머릿속으로 계산해요. 가만있어 봐 내가 하나님앞에 이익 받은게 뭘까? 하나님 덕분에 이런 것을 얻었어요 할 때 남한테 믿음 있는 자랑꺼리가 되고 나도 믿음 있는 사람이 되고 머리가 계산이 막 돌아가요. 그거 하나님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분명히 공부 잘하게 기도 했는데 한 문제도 내가 아는 문제가 안 나왔을 때 많이 당황하셨어요? 좋은 거 나오라고 기도 했는데 전혀 안본 거 안 나와서 많이 놀라셨어요? 신입이 이래가 밥 먹고 살겠어요? 그런 하나님 믿고 밥 먹고 살겠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나의 일상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 하면서 다가오실 때 하나님입니다. 내 일상은 나만을 즐기고 나만의 영광과 나의 멋있음과 나의 위대함을 보여 주려는 빌미로서 절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거기에다 쏟아 붙지 않습니다. 압수해 갑니다. 차압해 갑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000그룹의 회장이 있는데 그 회장을 기독교 교회에서는 000장로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분이 13년째 세금을 37억 원을 내지 않았습니다. 세무서에서 그 자택을 방문했습니다. 빌라 문을 안 열어줬어요. 그것 뜯는데 30분 걸렸어요. 뜯고 들어갔는데 회장 부부가 안 보였어요. 어디 갔나 보니까 1층 뜯고 들어가니까 2층으로 도망갔어요. 2층 문이 잠겼어요. 2층 문 뜯는데 1시간 걸렸어요. 그래서 1시간 뜯어서 만났어요. 세금 내에요. 하니까 그 장로가 하는 말이 한푼도 없어요. 말을 끝나자 마자 세무 공무원이 금고를 열어보니 3천만원이 있었어요. 이것은 돈 아니고 뭡니까? 종이입니까? 내꺼 아니고 우리 마누라 것입니다. 거기서 재미있는 것은 일층 뜯으니까 2층, 그 집이 2층집이니까 다행이지 만약에 3층 같으면 3층으로 도피하고 4층 같으면 4층으로 도피했을 거예요. 이 모습이 뭐냐 하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1층 뜯어놓으니까 2층으로 도망가는 겁니다. 2층 뜯으니까 3층으로 도망가는 겁니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