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70이레 논문(다윗 언약)130905-25강b -이 근호 목사
가락-70이레 논문(다윗 언약)130905-25강b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70이레 논문(다윗 언약)130905-25강b -이 근호 목사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의 장군들은 다윗의 나라가 좋지, 다윗의 언약의 나라는 원치 않았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늘 이기게 하니까 그 이기는 게 좋은 거예요. 그런데 언약 앞에서는 죄를 이겨야 돼요. 그렇죠? 십자가가 죄를 이기거든요. 십자가는 죄를 이기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죄를 이기려면 뭐를 알아야 돼요? 죄를 알아야 되죠. 그러면 언약이 우리한테 오는 것은 ‘네 죄가 너를 이겼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이 왔는데 다윗의 부하들은 관심이 딴 데 가 있는 거예요.
아이쿠, 죄를 이기던 어떻든 간에 이 나라가 부강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자신의 무궁화 노선, 자기의 과거, 현재, 그리고 과거 현재가 원인이 되어서 얻어지는 그 결과, 내가 기대한 결과. 다윗의 입장에서는 내가 죄인이 된 것은 내가 죄인 되고 싶어서 죄인 된 게 아니에요. 이건 언약이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가 나는 바로 날 때부터 죄인이다. 벌써 이게 다윗을 중심으로 한쪽은 다윗 언약의 반대파가 생기고 다윗은 어쩔 수 없이 다윗 언약 편에 서게 되고, 이런 상태가 나중에 등장하겠죠. 역대 상 말고 역대 하에 들어가면 그게 죽 나오겠죠. 사무엘하에 보면 그게 나오거든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다윗은 구원받았습니까? 그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고 다윗 언약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관심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윗 언약이 무엇인가? 역대 상 21장 보겠습니다. 사실은 그전에 잠간 언급하고 가실게요.^^ 여기 역대 상 11장에 보게 되면 그 전체 내용이 뭐냐 하면 11장 10절에 “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두목은 이러하니라” 해서 다윗의 용사들이 나와요.
또 역대 상 11장 26절에 보면 “또 군중의 큰 용사는 요압의 아우 아사헬과 …” 죽 군대장관들 이름이 나오죠.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다윗 옆에 뭐가 자꾸 모인다? 용사들이 모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아시면 되고요.
그 다음에 역대 상 15장 1절에 보면 이번에는 “다윗이 다윗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궐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위하여 장막을 치고” 그 다음에 3절 죽 나오는 게 뭐냐 하면 거기 레위지파도 나오고 제사장들 나오죠. 그러면 한번 봅시다. 다윗 주변에 뭐가 있다? 용사들 포진돼 있고 또 하나님의 언약궤 주변에 뭐가 있다?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모였죠.
그러면 다윗의 나라 언약의 나라는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용맹한 무사들도 있고 그 다음에 언약궤에 제사를 지내야 될 하나님의 제사장들도 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 낸 취지가 뭐냐 하면 이겁니다. 국가가 어떻게 발생되느냐 하는 거예요. 국가가 어떻게 발생되느냐, 이거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발생되는가와 같은 이야긴데 국가가 어떻게 발생되느냐 하면 정답은 이거에요. 전쟁입니다. 전쟁!
세상 나라도 마찬가지고 전쟁이 없으면 나라가 안 돼요. 전쟁이 없으면 계속 외부에서 전리품이 투입되질 않습니다. 그러면 국가가 자체적으로 이룰 수 있는 걸 자체적으로 생산해야 되는데 그게 사람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자체적으로 그게 안 돼요. 치과 병원이 잘 되려면 옆에 있는 치과가 망해주면 돼요. 망해주면 그쪽 가는 손님이 이쪽으로 오는 거예요. 그쪽에서 노리는 것도 ‘니가 망해라.’ 이렇게 되는 거죠.
자체적으로 아무리 기술이 늘어도 저쪽 가서 뺏어오지 아니하면 자체적으로 생산이 안 됩니다. 세상 국가도 마찬가지에요. 국가는 전쟁을 통해서 생기는데 더구나 다윗의 나라는 이 전쟁을 누가 유발시키느냐 하면 아까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죠. 이 다윗은 들러리라. 하나님께서 뭔가 전쟁을 자꾸 유발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쟁을 유발시킬 때 뭐가 생긴다? 이스라엘이라는 다윗 왕국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점을 다윗이 알고 다윗은 그걸 누구 공로로 돌립니까? 언약궤 중심으로 해서 ‘이건 하나님의 공로입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만약이 아니고 실제지만 사탄이 있다고 합시다. 악마는 하나님의 전쟁 때문에 투입된 개념이고 또 실제로 그런 게 실체죠. 그럼 악마는 방법이 뭡니까? 하나님은 전쟁은 승리해서 언약의 나라를 만든 거라면 사탄은 반대로 그 나라를 부수는 것이 사탄의 일이겠죠.
자. 그러면 사탄이 늘 이기게 하시는 그 이스라엘을 무슨 수로 그 나라를 부숩니까? 역대 상 21장 봅시다. 지금 제가 하는 주제는 다윗의 언약이 무엇이냐, 그걸 지금 파악하는 거예요. 다윗의 언약은 이겁니다. 이건 안 되고 다윗의 언약이 원인이 돼서 생긴 게 나라거든요.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냐를 통해서 언약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지금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21장 1절에 보면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이스라엘 숫자를 헤아리게 하는 거예요. 참, 사탄이 하는 일이나 하나님이 하는 일이나 하여튼 인간 쪽에서는 종잡을 수가 없어. 뭐 사탄이 와서 ‘너 다윗 따르지 말고 다른 나라로 가.’ 이래야 우리가 야, 이스라엘 나라 망했다. 이게 우리 방법이거든요. 우리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사탄이 뭘 알고 있어요? 이게 사탄이 뱀 같아. 똑똑해요. 사탄은 하나님이 뭘 싫어하는가를 미리 땡겨서 아는 존재가 사탄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도록 하나님이 다루시는 사람에게 격동시키면 그건 사탄의 전략은 성공한 게 되겠죠. 사탄은 다윗 보고 뭘 하게 하느냐 하면 인구조사를 시키는 거예요. 자기 백성 숫자 헤아리는 거예요. 계산기가 어디 폼으로 있습니까? 계산기는 계산하는 게 계산기잖아요. 주판은 계산하려고 있는 거잖아요. 백성들 숫자 세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누가 답변해 보세요. 자기 백성의 숫자를 세는 것이 그것도 왕이 자기 백성 숫자 세서 군대와 세금 문제를 통계를 내야 되니까 그게 뭐가 나빠요? 아예 처음부터 우리는 모를 일입니다.
그것과 다윗 언약이 무슨 관계있느냐? 그것을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숫자를 헤아릴 때 다윗이 숫자를 헤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없는 거예요. 없는데 사탄이 와서 중간에 개입해서 ‘너는 숫자 셀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이렇게 격동을 시킨 겁니다. 그럼 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이스라엘 나라가 다윗 언약의 나라인데 사탄이 임해서 이 나라가 다윗, 나의 나라라고 간주하게 만들죠.
그런데 좀 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지만 하나님께서 사탄으로 하여금 그렇게 미혹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그것을 이미 예상을 하시고 조치를 하신 거예요. 왜냐 하면 다윗의 나라를 다윗 언약의 나라로 만들려면 이 다윗부터 해서 이 나라가 망해야 됩니다. 망하는 데는 사탄이 제격 이예요. 욥기에도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사탄보고 지시하죠. ‘어이’ 가서 누굴 미혹하라? 욥을 미혹하라고 지시를 내리잖아요. ‘해봐. 해봐. 해, 해봐.’ 지시를 내리잖아요. 지금도 사탄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왜, 천사이기 때문에.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 미혹해야 돼요. 우는 사자와 같이 택한 자라도 미혹을 해야 됩니다. 이건 사탄의 본인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 이예요.
그래서 아까 동영상 할 때 정답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완성’이라 했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성된 게 정답 이예요. 예수 안에서는 아니오, 가 없고 모두가 예수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예, 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윗의 나라가 다윗 언약의 나라로 옮길 때 언약의 주인공은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다윗의 나라에서 예수님의 나라로 옮길 때는 반드시 필히 뭐가 들어가야 된다? 사단이 개입을 해줘야 돼요. 이 사단이 개입을 하는데 이게 바로 사단이 뭐냐 짐승입니다. 이제 느부갓네살하고 연결되죠. 느부갓네살이 짐승 돼야 될 이유가 이게 다윗 언약의 체제 안에, 시스템 안에서 똑같은 원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을 다니엘에서 풀어서는 안 되고 다윗 시대 때 사탄이 어떻게 작용하느냐를 그걸 찾기 위해서 지난 시간 내내 이야기한 거예요. 원형이 다윗 시대에 이미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게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이 시대 2013년 이 시대 , 우리 시대 이야기에요. 지금도 사탄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활동한다고 하면 안 되죠. 어떤 원리에 의해서, 어떤 체제에 의해서, 어떤 원칙에 의해서 움직이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되죠. 그걸 알아야 복음을 전할 게 아닙니까? 사탄? 이건 이러해.
다시 한 번 돌아가서 다윗은 자기가 백성의 숫자를 셀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 숫자를 헤아리겠어요? 안 헤아리겠어요? 안 헤아리죠. 자기는 왕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다윗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 되게 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숫자 헤아릴 권한이 다윗이고 뭐고 우리한테는 있다? 없다? 아예 없는 거예요. 원인이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냥 결과물이죠.
그런데 다윗은 차고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이 다윗이 나빠서가 아니라 누가 그렇게 했다? 사단으로 하여금 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신 것이죠. 왜냐 하면 다윗은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다윗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러면 목사님, 다윗 빼고 예수님 바로 오죠? 다윗 빼고 예수님 바로 와 버리면 다윗이 저지른 죄가 누락이 되는 거예요. 다윗이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죄를 드러내 줘야 그래야 백성들이 ‘아! 더 이상 내가 내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게 맞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수긍이 돼야 되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하는 거예요.
예수님 앞에 있던 엘리아, 아브라함 이 사람들이 다 필요 없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이 했던 그 죄들이 지금 겹겹이 켜켜이 우리 안에 지금 차곡차곡 쟁여 있어요. 뜯어보면, 제모해보면 털 뽑아보면 아브라함 털 나오고 이삭 털 나오고… 우리는 다윗도 들어있고 바리새인 털도 들어있고 온갖 털이 다 들어있어요. 구약에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것이 우리 안에 꽉 적체(積滯)돼 있다니까요. 전부 다 겹겹이 눌려져 있어요.
그래서 엘리야(세례요한) 보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남자 중에 최고다. 하면서 엘리아 들으면 기분 좋겠지만 그 다음 이야기가 엘리아 기분 나쁘게 만들죠. 천국의 어린아이라도 너보다 더 많이 안다. 엘리아는 엘리아 시대만큼 죄를 알지만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그보다 더 깊은 죄를 알죠. 깊은 죄! 세례요한 당시에는 가능성이 있지만 신약에는 아예 가능성이 없어요.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함으로서 이미 땅! 땅! 땅! 확정난 거예요.
놀라운 것은 사탄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겁니다. 어디를 치면 이스라엘이 무너진다는 걸 알아요. 몇 명 죽었느냐 하면 역대 상 22장 14절, 7만 명 죽었어요. 7만 명 죽은 그 시점도 사실은 다윗이 그만, 그만해서 죽은 거예요. 왜, ‘잘못은 내가 했는데 왜 저 죄 없는 사람을 죽이십니까? 그만해 주세요.’라고 하니까 ‘됐다. 어이, 천사’ 그걸 망나니라 해요. 칼 들고 막걸리 먹고 칼에다 거품 물고 무조건 미쳐서 사람 모가지 치는 사람 있잖아요. 망나니, 망나니 역할 하는 천사들이 ‘그만 해라. 많이 먹었다. 그만해라.’ 그래서 그친 게 7만 명이예요. 다윗 하나 때문에 7만 명 날라 간 거예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벌 줄 때 3지선다형으로 골라잡으라 했어요. 골라잡을 때 3년 동안 기근이 있든지, 네가 3달 동안 대적에게 패하여 가든지 온역이 사흘 동안 유행하든지, 니 맘대로 하라 했죠? 참, 하나님께서 이런 게 어려운데 하나님께서 이미 사탄에게 말려든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냐 하면 ‘니 맘대로 하라’ 니 맘대로 하라 하는 것은 자유 의지를 선택하는 그 말이 아니고, ‘어떤 걸 선택해도 니는 이미 사탄에게 말려든 그 면면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셨죠.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실 때 다윗 자체가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가치가 없죠. 다윗은 그냥 이기게 하는 목격 자에 불과하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여기 와서 숫자를 본인이 헤아렸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게 아니고 하나님 잘~ 믿는 내가 왕이기에 얻어진 결과라고 본 거예요. 메시아도 아닌 게. 그냥 메시아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지금 예수님께서 활동하는데 뭔가 앞에 불쑥 허락도 없이 ‘까꿍‘ 하고 기어 나온 거예요. 그래서 ’에이 씨‘ 하고 눌러버린 겁니다. 이거 눌러 버릴 때 7만 명 싹 죽은 거예요.
그렇다면 다윗은 뭐냐 하면 나의 행동이 뭘 유발했다? 이 땅에서 죽음인데 그냥 죽음이 아니고 처벌에 입각한 죽음을 유발한 거죠. 그렇다면 이 땅에서 인간들이 죽은 이유가 뭡니까? 아담의 죄 값으로 모든 인간은 전부 다 홍수에 쓸려가는 벼 이삭처럼 한번 홍수가 확~ 오게 되면 전부 다 벼들이 한쪽 방향으로 쫙~ 쓰러져 있죠. 큰물이 그렇게 했죠. 바로 지금도 우리 위에 큰물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동일한 방향으로 죽어 마땅합니다. 그게 바로 아담의 힘입니다. ‘내 안에 아담의 힘 있다.’ 이 말은 ‘나 죽어야 된다.’ 그런 뜻 이예요. 우리 안에 아담의 힘 작용합니다. 우리 힘을 이길까요? 못 이길까요? 못 이깁니다. 그럼 누가 이깁니까?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 다른 말로 하면 진짜, 진짜 아담을 성경에서 두 자로 뭐라 하느냐 하면 ‘아들‘ 아들이 이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기신 분이여, 죄를 이기신 분이여, 죄를 이겨서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이여, “사망이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지금 죽어가고 있는 내 사망과 상대해서 예수님 이름으로 우리는 이긴 거예요. 내가 예수 이름으로 이긴 게 아니고 주님의 이름이 내 이름을 차고 들어와서 죽어가는 내 이름을 살려 낸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 이름을 부르면 안 되죠. 누구 이름 불러야 됩니까?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 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죠. 다윗은 자기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 숫자를 헤아린 거예요. 그러면 사탄의 전략은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을 내 인생에서 한 순간이라도 삭제하고 지워버리는 전략, 그것이 우리가 알고자 하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해결을 내 이름으로 내 명예로 내 자존심으로 해결하겠다. 요거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순간.
그런데 성령께서 주의 이름을 들이대시면 ‘아하! 내가 사탄의 종이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그 다음에 봅시다. 드디어 다윗 언약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다윗이 오르난에 가서 타작마당을 돈 주고 사죠. 사고 거기서 뭘 드립니까? 제사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징벌을 거두었다 이야기합니다.
자, 다윗 언약의 결론은 뭐냐, 질문이 다윗 언약의 결론은 뭡니까? 라는 질문도 되지만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가지고 이기고, 또 이기고 또 이기게 하셨습니까? 와 같은 질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힘으로 이겼다고 생각했죠. 다윗이 용사가 많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힘으로 다윗을 이기고 또 이기게 한 것이 아니고 장차 다윗이 드려야 될 하나님 앞에 번제의 힘, 죽음의 힘, 다윗은 그 자리에서 의인으로 투입됩니까? 죄인으로 투입됩니까? 죄인. ‘나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 내가 들어서 삭제시켰습니다. 숫자 세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죽여 버렸습니다. 숫자가 확 빠졌습니다. 다 나 때문입니다.’ 하는 그 죄인이 남을 죽게 만든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때 바로 죄인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체결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가 없어져요. 죄가 없는데 육신의 죄를 누구한테 짊어지게 했다? 육신의 죄를 그 아들에게 짊어짐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으로만 모든 것이 응축이 돼요. 그래서 언약의 혜택을 받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때부터 아들이 돼요. 물론 양자지만 아들 이예요.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지옥 가죠. 왜냐 하면 그 나라는 천국은 아들만 모이는 아들의 나라기 때문에 그래요.
이 이야기가 로마서에만 덜렁 나오면 안 돼요. 이게 구약이 있어줘야 돼요. 로마서에만 달랑 나오면 ‘예수 믿으면 아들 된대.’ 이게 뭐야? 사탄이 개입되고 다윗은 숫자 헤아리게 되고 다윗은 ‘나 때문에 백성 죽었습니다.’ 하고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내가 죄인입니다.’ 할 때 그 죄인의 입장에서 값을 가지고 할 때 그 모습이 십자가 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다윗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죄인의 모습으로서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데 그 기능을 위하여 언약이 다윗에게 미리 덮친 겁니다. 우리는 나중에 덮쳤고 십자가 이후에 우리는 언약이 덮쳤고 다윗은 미리 덮쳤죠.
자, 그러면 여기서 빠진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언약궤가 뭐냐? 여기 역대 상 21장 끝에 보면 거기에 “장막과 번제단이 그 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으나” 이렇게 돼 있죠. 거기서 번제를 드리는데 언약궤는 다윗의 죄를 충분히 나타났을 때 비로소 언약궤가 한 곳에 모읍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다윗을 통해서 다윗 언약의 정체가 나타났죠. 다윗은 죄인으로서 이스라엘 왕이었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 나서서 이스라엘 왕으로 삼을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될 경우에만 그걸 이스라엘이라고 하나님의 예정된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그 다윗 이후에 성전은 어디로 가느냐? 산으로 올라가 버려요.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장차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그쪽 노선으로 KTX처럼 날라 가 버려요. 다윗은 성전을 지었습니까? 못 지었습니까? 성전을 못 지은 거예요. 성전을 못 짓고 성전은 장차 오실 예수님 소관으로 이미 연결돼 버렸습니다. 참 오늘 골치 아프다. 여러분 이거 이해하려고 하는데 난 모르겠고….
그 다음에 언약궤가 안치되는 것은 그 다음에 솔로몬이 태어나서 솔로몬이 언약궤를 한 장소에 성전에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 언약궤를 여기다 안치를 했습니다. 자, 하나님은 고정됐죠? 이 하나님이 고정된 것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그림자’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그림자를 그림자로 보지 못하고 이걸 성전의 실체라고 오해를 한 거예요.
그럼 실체는 어디 갔습니까? 실체는 어디로 갔죠? 실체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어요. 하늘로 올라가면서 장차 그리스도가 와서 성전을 만들잖아요. 올라가면서 여기서 꽃가루인지 뭔지 모르지만 뭘 떨어뜨려요. 떨어뜨린 중에 하나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그리고 예레미야, 이사야, 이쪽(밑)에는 성전이 고정됐다고 생각하니까 여기서 나온 것은 뭐냐, 왕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올라가서 떨어진 것은 누구냐 하면, 이건 선지자들 이예요. 그럼 그 다음부터는 무엇과 무엇의 전쟁입니까? 아까 전쟁할 때 했죠? 다윗은 항상 이기죠. 누굴 이겨요? 다윗에게 언약이 있기 때문에, 언약궤가 있기 때문에 다윗은 항상 이기게 하잖아요. 그렇잖아요. 언약궤는 고정되면 안 돼요. 하여간 이건 하나님이 스스로 고정해야 되지, 사람이 고정시키면 안 돼요. 하나님이 스스로 고정되는 것은 지상에 고정되는 것은 고정해봐야 그림자입니다. 실체로 고정되는 것은 건물이 아니고 가건물도 아니고 벽돌로 된 건물이 아니고 인격 이예요. 인격!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고정된 성전입니다. 뭔 뜻인지 여러분 대충 감은 오죠?
지금 솔로몬들이 오해한 것이 오늘 날 교회가 오해한 거와 똑같은 거예요. 역사와 전통, 무궁한 과거 현재를 계속 유지하는 겁니다. 다윗이 고생해서 성전 못 지은 거 우리가 지었다. 그러니까 이 성전을 아끼세. 이거는 인간들이 아는 과거 현재 그대로 땅겨온 미래입니다. 미래는 누가 만들어요? 언약이 만들지 우리가 만들지 않아요.
그런데 성전이 분명히 있었고 성전에 누가 왔습니까? 주의 이름이 오셔서 분명히 약속을 했어요.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되면 병도 낫고 가뭄도 해소되고 전쟁을 이기게 해주겠다. 회개하면 해주겠다는데 회개를 누가 합니까? 회개할 인간이 있어야지. 회개해서 네 죄를 알고 기도하면 응답해주겠다는데 죄를 아는 사람이 없어요. 죄를 아는 위인이 없다니까요.
죄를 안 사람은 있어요. 스스로 아는 사람은 없어요. 죄를 알게 한 사람은 누구냐 하면 유명한 요나지만, 요나는 어느 계열에 속합니까? 왕의 계열이 아니고 누구 계열이죠? 선지자 계열 이예요. 예레미야가 성전에서 울었죠. 예레미야는 천상회의를 본 사람 이예요. 무슨 계열 이예요? 선지자 계열 이예요. 세례요한이 예수님 올 때 뭐라 합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했죠. 세례요한은 왕 계열 이예요? 선지자 계열 이예요? 선지자 계열입니다. 오실 엘리야가 세례요한 이예요. 말라기도 마찬가지고.
이 선지자는 천상회의를 본 사람입니다. 미가야도 마찬가지고. 예레미야에 나오잖아요. 넌 보지도 못하고. 꼭 서울 안 가본 인간들이 서울 가본 사람한테 이긴다고. 세상이 그래요.
세상은 고정중심입니다. 고정된 게 있어서 힘의 구심점이 있어야 돼요. 왕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왜, 권력의 핵심이 있어야 단결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선지자는 땅에서 고정된 걸 찾습니까? 하늘에 고정된 걸 찾아요? 하늘에 고정된 걸 찾아요.
이왕 어려운 거 해봅시다. 히브리서 4장, 어제 설교할 때 언급했지만 이건 시간 관계 상 자세히는 못했어요. 히브리서 4장 3절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돼 있죠. 그 다음에 “믿지 않는 사람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 다음에 “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세상이 창조할 때부터 일이 이루어졌다.” 이 말이 무슨 말 이예요? 이미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완성됐다. 이 말이거든요. 이거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요. 선지자에게 성전은 우리 보기는 오실 예수님이지만, 선지자한테는 이미 그것이 오실이라는 말은 역사 속에서는 통하지만 묵시에서는 이미 그 자체가 창세 때 이미 완성된 걸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가 눈 꿈쩍도 안 하는 거예요. 돌을 던져도. 니가 오늘 밤에 어디 간다? 낙원에 간다.
이미 구원은 완성된 거예요. 완성된 것이 역사 속에서는 이렇게 시간적 흐름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시간적 흐름 속에 있으면서 완성을 쳐다보는 것은 선지자들에게 성령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미 아셨고 이미 부르셨고 이미 의롭다 하시고 이미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를 우리는 이미 알게 되었죠. 이미 우리는 그 신분이기 때문에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어떤 위험이라도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자.‘ 가 아니라 이미 우리는 그걸 알고 있죠. ’알고 있다.‘를 확인하기 위해서 환란과 핍박과 기근이 들이닥치게 되죠. 스데반 집사처럼! 다윗처럼! 그럼 다윗도 이미 구원받았네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사탄에게 유혹 받아서 숫자를 세고 죄인의 입장에서 그 오르난 타작마당에 서야 되는 겁니다. ’저 때문에 백성들 죽었습니다. 그런 죄인입니다.‘ 하고 서는 그것이 이 지상에서의 언약체결 현장입니다. 매일같이 언약체결 하세요.
자, 더 나아가 봅시다.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나는 모친의 죄 중에 잉태했습니다.’ 이게 하늘로 올라간다고요. 이게 선지자로 가버립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뭐라 합니까? ‘하나님 나 이 일 안 하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그대로 본 걸 하니까 남들이 나보고 욕한다고 하던데요. 내가 미쳤다고 욕 얻어먹어가면서 이 일 못하겠습니다.’라고 할지라도 나는 해야 되겠죠? 그렇죠?‘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주여 왜 자꾸 저를 힘들게 하십니까?’ 그런 뜻 이예요. ‘좀 정상적인 생활하게 해주시옵소서. 왜 저를 힘들게 합니까?’
제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할게요. 남쪽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이름도 안 나와요. 그 사람이 북쪽에 와서 여로보암한테 예언하죠. ‘장차 요시야 왕이 당신을 죽인다.’ 하고 후딱 말하고 내려가려고 하니까 붙잡잖아요. 아이크, 재산 줄게. 모든 걸 다 원하는 대로 줄 테니까 계속 예언해 달라. 나는 당신(왕)을 도와주기 위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내려갔거든요.
그 말이 뭐냐 하면 앞으로 장차 오실 선지자는 왕과 좋은 나라, 이 다윗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그런 이스라엘 되라고 선지자 온 게 아니라는 것을 남쪽 선지자가 와서 언급을 해요. 그런데 북쪽의 선지자라 하는 것은 왕을 도와서 하나님 앞에 복 받는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이 그것도 북쪽 선지자, 가짜 선지자의 특징이라 말이죠. 그러니까 가짜 선지자가 뭐라고 꼬시느냐 하면 ‘나도 같은 신학교 나왔습니다. 나 총신 나왔어요. 나도 안수 받았습니다.’ 이렇게 꼬셔서 하나님의 계시에 당신 오게 되면 물과 떡을 주라고 했습니다.‘ 하니까 남쪽 선지자가 하는 말이 ’그래요? 내가 너무 교만하면 안 되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 했는데 맞아 나만 계사 받은 게 아닌가보다. 예, 주의 뜻이라면 할 수 없죠.‘ 하고 가는데 난데없이 그 근처 동물원이 있었는가 동물원에서 탈출한 사자가 와서 뜯어먹었는데 이 사자가 배고파서 먹은 게 아니고 사람을 죽여 놓고 서울 멧돼지와 똑같아요. 먹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어요. 그 사자가 주의 사자입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앞으로 올 선지자는 절대로 왕과 타협해야 된다? 안 된다? 타협을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대립된 관계를 이어나갈 것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어렵더라도 참으세요. 나라가 둘로 남쪽, 북쪽 갈라졌잖아요. 북쪽에서 보면 우리는 북쪽, 너희는 남쪽이라고 보잖아요. 그게 오해라니까요. 북쪽도 아니고 그 다음에 남쪽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북쪽이고 남쪽이고 간에 둘 다 고정된 성전을 주장하는 한 장차 오실 그리스도가 날라 가는 이 성전을 모르는 한 그 사람은 둘 다 나중에 멸망될 나라입니다. 그 사실을 남쪽에서 올라 온 선지자 그걸 알았어야 돼요? 몰랐어야 돼요? 그런 사명을 감당해야 돼요. 나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다. 엘리아가 그 사명을 감당했잖아요.
좀 더 이야기 해봅시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언약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이걸 뭐라 했다고요? 이게 바로 그림자죠. 자, 여러분 물어볼게요. 그림자를 추적하면 실체 알 수 있다? 없다? 없죠. 그게 딜레마에요.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그림자라고 했으면 지상에 있는 그림자는 얼룩이잖아요. 지상의 그림자는 얼추 맞출 수 있어요. 그림자가 가만히 있으면 ‘서 있구나.’ 까불락 대면 ‘춤추고 있구나.’ 이렇게 얼추 맞출 수 있는데 그림자는 2차원이고 평면에 있고 실체는 3차원이기 때문에 맞기는 확실히 맞지는 않지만 요새는 컴퓨터가 발달했으니까 2차원 가지고 3차원 뽑아낼 수 있잖아요. 그래픽으로.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이 그림자는 실체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어제 수요일에도 했지만 시간 관계상 그걸 설명을 못했는데 여기서 해볼게요. 안식일은 뭐라 했습니까? 안식일은 그림자다. 자, 안식일이 그림자라면 안식일은 무슨 개념이냐? 시간개념이죠. 안식일은 시장에서 2근에 500원에 안 팔죠? 안식일이라 하는 이것은 실체가 없죠? 시간이니까. 그런데 안식일을 가지고 그림자라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그림자의 실체는 뭐냐, 안식일의 실체는 뭐냐? 우리가 성경에는 벌써 해답이 나와 있는 걸 압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러니까 안식일이 그림자라면 실체는 뭐냐 하면 그리스도 몸이 되는 거예요.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정답입니다.
그럼 한번 맞춰 봅시다. 참 곤란하다. 곤란해. 특정 시간은 그림자다. 그런데 실체는 뭐냐 하면 어떤 몸이니까 육체 아닙니까? 육체죠. 시간이 그림자와 실체를 이렇게 우리는 이게 납득이 되는데 삼각뿔이 있다면 여기 그림자가 있고 이렇게 이해가 되는데, 시간과 어떤 33살 먹은 아저씨의 신체와 어떻게 연결되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 세계에서. 없죠. 없으면서 믿기는 뭘 믿어?? 이해도 안 되면서 그냥 막 들이댔습니까?
어떤 메카니즘 때문에 어떻게 그림자가 일치된 거예요? 해결의 힌트는 있습니다. 힌트는 아까 이야기했어요. 그림자에서 실체로 갈 수 있다? 없다? 안 되죠.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인간이 있잖아요. 인간 속에 시간 개념이 있으니까 시간 자체가 이게 그림자가 될 수 없고 시간 자체가 우리를 대변하는 이게 이미 실체에 포함이 돼 버려요. 우리는 늘 과거 현재 미래 항상 우리 안에 포함을 시키고 있어요. 시간 따로 뽑아낼 수 없다니까요. 그림자라 하는 것은 뭡니까? 실체에는 그림자가 없고 땅에 얼룩이 질 때 그림자가 되는데 시간을 그림자 만들려면 이 그림자를 얼룩을 담아 놓는 짐이 따로 있어야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제가 수요일 날 설교하는데 권사님한테 ‘권사님 이해됩니까?’ 하니까 권사님 말이 참 현명한 대답을 하셔요. ‘집에 가서 또 들어볼 거예요.’ 그래서 음성 녹음하길 잘했구나 생각이 드는데. 이게 제가 애먹이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지금 성경 골로새서 2장 16절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안식일은 그림자니까 그 뒤에 나온 말이 “믿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고 싶어. 왜, 이 몸이 시간이 포함돼 있으니까. 차라리 안식일 주일 날 하루 쉬고 구원받는 게 편하지, 아휴, 하루 쉬고 구원하고 얼마나 수월합니까? 하루 쉬고 구원받고 천국 가고, 오늘밤 낙원에 있으리라. 그게 더 낫지 않습니까?
오늘은 일요일 시작, ‘오늘 아무 노동하지 마라. 11시 59분, 땡! 구원받았다. 얼마나 쉬워요? 바로 그 방법을 했던 것들이 바로 너희 애비가 뭐다? 사탄이다. 사탄은 뭐를 안다? 사탄은 예수 주의 이름을 못 믿게 만드는 것, 그 대신 뭘 믿게 하는 것? 내가 시간 지키고 내가 율법 행하는 이걸 계속 고수함으로서 이스라엘을 와르르 무너지게 하는 방법을 사탄이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사탄의 종들이 교회를 장악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 뜻 이예요. 진짜 안 믿는 사람은 ’나가라. 귀찮다. 하여튼 안 믿으면서 천당 오는 것 귀찮으니까 내가 마귀 쫙 깔아줄 테니까 다 따라 가.‘ 그래서 주일 지켜서 구원받고 십일조 해서 구원받고, 선교회비 내서 구원받고, 회개해서 구원받고.
여러분, 시간에서 예수님 밑으로 건너올 수 없어요. 왜냐 하면 시간을 지켜봐야 내가 내 지킨 게 되니까 나의 육체를 포기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 2장에서 방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육체로부터 그림자를 보여주는데, 그림자부터 실체가 안 되니까 예수님이 육체로부터 그림자로 날라 가는데 날라 갈 때 어떻게 날라 가느냐, 여기 세 자, 십자가에 우리를 죽여 버립니다. 그냥 죽이는 게 아니고 죽여 버려요. 날마다!
골로새서 2장 한번 봅시다. 내가 목 아픈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이거 풀어야 돼요. 나만 답답한가? 여기 2장 11절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여기 몸을 벗는다는 말은 육체를 죽여 버려라 이 말 이예요. 그러니까 ‘말씀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죽은 놈입니다.’ 죽은 놈이 시간을 계산한다? ‘오늘은 주일이고 오늘이 안식일이다.’ 그것도 죽여 버려라 이 말이죠. 왜 그 자체가 주의 십자가의 늘어진 그림자 속에 얼룩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일 지킵니다. 십일조 지킵니다.’ 이 자체가 십자가의 늘어뜨린 그림자에 속하거든요. 그런 짓 하는 그림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고 맨날 주일 생각하고 십일조 생각하는 나는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분명히 방금 그 말 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 하느냐 하면 ‘십일조 하고 주일 성수하는 나는 죽었고‘ 하니까 이건 되게 좋아해요. 왜, 이제는 교회 안 가도 되고 이제 헌금 안 해도 구원받으니까 그런데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건 뭡니까?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데 지가 살았네. 십일조 안 하는 지가 살았고 교회 안 가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지가 살아버렸어요. ’나는 십일조도 안 하거든요. 교회도 안 가요.‘ 자랑이라.
주님이 살아있어 나는 다윗처럼 ‘나는 항상 나 때문에 피해보는 사람 많습니다.’ 하는 죄인으로 살아야 그게 언약체결이 되는데 이거는 언약이 체결되는 게 아니고 언약을 알아버렸어. 정답을 외워버렸어요. 뭘, 우리 모습입니다만 또 성령께서 또 가만 안 두시니까 천만다행입니다. 성령께서 그걸 완전히 ‘에이’ 하고 파스 붙여서 그 털을 확 뽑아버리죠. 하면 고따위 식으로 생각하는 그것도 죄에 불과한 것을 깨닫게 하시죠. 깨닫게 하시는 것은 성령의 몫이지 우리가 스스로 우리 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다니엘까지 와야 되니까. 아까 얼른 했는데 다시 해봅시다. 성전은 고정돼 있고 언약궤 있죠. 사람들은 뭘 믿는다? 눈에 보이는 걸 믿죠. 왜, 구체적이니까. 법궤니까. 상자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약속하기를 ‘이 성전에 와서 회개하고 기도하면 응답하겠다.’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상자 있죠. 성전 있죠. 이건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누가 지킨다? 하나님 자체가 지킨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홀라당 불타버렸네. 그러면 성전 짓겠다는 시편의 약속, 다윗은 어디 갔느냐? 이건 다니엘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지죠. 주어지게 되면 선지자의 내용이 뭐냐 하면 다윗 자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다윗 족보, 다윗 가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는 어떤 건물에 속하지 않고 내가 친히 만들은 성전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다윗 자손, 다윗 후손 이예요. 그러면 솔로몬이겠네요. 왜냐, 다윗의 아들이 솔로몬이고 솔로몬 다음에 누구? 르호보암이고 그런 사람이겠네요. 아니에요. 후손은 후손부터 먼저 만들어 놓고 소급해서 따라옵니다.
다윗의 자손이 누굽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 누구에요? 오실 메시아죠. 메시아부터 그게 실체니까 그림자를 추적해 나가보면 흔히 다윗 자손이라고 여겼던 것은 육적이었고 영적인 자손은 따로 소급해서 나오는데 그건 우리가 알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알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 숨겨놓았으니까. 그건 족보에 나타나지 않아요.
여기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보면 “바벨론 이거한 후에“ 하고 스룹바벨 나오죠. 몇 개 나오다가 그 다음부터는 안 나와요. 그 다음에 마리아, 요셉이 등장해요. 그걸 로마서에서 ‘남은 자’라 해요. 남은 자!
왜 몰라요? 역사적인 과거 현재 이 노선을 고집하는 사람에게 어떤 특정 인간을 알아버리면 그걸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하거든요. 그건 가짜죠.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은 우리의 족보에다 억지로 집어넣을 수 있는 대상이 안 됩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우편의 양아, 네가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 할 때 양이 뭐라 합니까? ‘아, 그때 제가 물 줄 때 이렇게 했습니다.’ 합니까? 아니면 뭐라 합니까? 경상도 말로 ‘어데예? 언제?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이상하다. 저는 한 기억이 없는데.’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은 지금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제가 언제 주를 위해 살았습니까? 저는 죄 진 것밖에 없는데.’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를 전할 때 우쭐댔겠습니까? 자기가 멋있다고 여겼겠습니까? 다윗을 항상 이기게 하실 때 다윗이 좋았겠습니까? 무섭습니다. ‘제가 뭔데 제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이렇게 사용하십니까?’ 그 고백이 스데반 집사와 같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우리가 믿지만 돌아서면 뭔가 내가 뭐라고 뭔가 할 수 있다고 가치 있다고, 주께서 저를 반드시 들어 쓰셔야 된다고 고집부리는 교만을 부립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언약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그동안 쓰게 하신 것도 주께서 십자가를 알게 한 것이 하나님의 묵시적인 십자가의 능력인 것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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