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3강, 마태복음 44강(성령의 예언, 옛것과 새것) 130926
사도행전 53강, 마태복음 44강(성령의 예언, 옛것과 새것) 130926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공은주(IP:218.♡.193.179)
13-10-14 08:19
대전2013926-행20장1절(성령의 예언)53강 -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사도행전20장1절,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요. 그리고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었어 하는 옛날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그게 아니에요. 터키가 이리 있고 에베소에 이리 있는데 20장에서 배를 타고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하면, 다메섹이 있어요. 요새 말로 하면 다마스커스, 지금 한창 내전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인데 옛날 구약의 이름은 아람나라에요. 아람나라가 북이스라엘을 굉장히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아람나라와 북쪽 이스라엘과 관련된 유명한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엘리사, 그 전에는 엘리야입니다.
엘리야, 엘리사 그 이후의 선지자와의 차이점이 뭐냐, 엘리야, 엘리사는 글을 남기지 않았어요. 글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글을 남기지 않은 대신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기적을 일으키게 되면 그 기적을 일으킬 때 굉장히 좋지요. 물이 없어서 못 먹었는데 가루를 넣어서 마셨다든지 또 오병이어 비슷한 거 이렇게 해서 사람들을 먹였다든지 그리고 과부 아들에게 하니까 아들이 살아났다든지 밀가루 통이 화수분처럼 계속해서 가득 차는데 이런 기적적인 것이 일어나는데 엘리사 중에서 유명한 것이 아람나라 장군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 고친 거, 정말 신기하죠. 도대체 요단강에다가 무슨 물질을 풀어 놨기에 문둥병이 치료가 되는 겁니까? 뭘 풀었기에? 오메가3을 풀어놨는지.
그런데 엘리야, 엘리사의 기적을 들을 땐 좋다 싶지만 그 때 뿐이에요. 사람이 하루 살고 그만 살게 아니잖아요. 사람이 한 번 기적 맛을 보게 되면 사람의 인간성 다 버려 놉니다. 그 다음부터는 정상적인 것이 기적인 줄 모르고 은혜인 줄 모르고 꼭 획기적인 일이 일어나야 그게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 같고 그냥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하는 것은 은혜 아닌 줄 알고 기본인 줄 아는 그런 건방이 생겨요. 하여튼 하나님이 줘도 문제라, 인간은.
그래서 엘리야, 엘리사 이후에 선지자들이 누구냐 하면, 이사야, 예레미야 이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글을 남겨요. 글을. 기적은 짜릿하고 좋은데 글을 남기게 되면 잠만 오고 지루하고 글을 남겨야 뭘 하거냐 이리 하는데 기적은 한 번 지나가면 그만이죠. 글을 남기게 되면 그건 심판용입니다.
십계명에 뭘 남겼지요? 십계명 자체가 글이죠. 이 글을 남기면 계속해서 계약문서처럼 일이 있을 때마다 들이 댈 수 있어요. “봐, 니 저주 받아도 마땅하잖아. 바로 이 짓 했잖아.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벌 받아.” 이게 글로 되어있으면 항상 들이 댈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선지자 말씀이 글로 됐다는 말은 이미 이스라엘은 망했다. 이리 보시면 됩니다. 이미 심판 받아 망했다. 오늘날 신약성경이 완성 됐지요. 세상은 이미 끝났다. 욕을 하던 분노를 하던 이미 세상은 끝난 거예요.
어제 수요설교 들으신 분 있어요? 아쿠아리움 이야기했지요. 바다 속에다가 투명유리 만들어서 그 안에는 공기통하고 사람들 왕래하고 그 주변에는 온통 상어, 고래, 온갖 고기들을 투명한 곳을 바라보니까 마치 바다 속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제 딸이 동영상으로 그걸 봤어요. 그걸 보고 화상통화하면서 하는 소리가 그거 입장료 45,000원이래요. 바다 속처럼 수족관 만든 게 아쿠아리움이거든요. 그거 보면서 성도가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저주 받아야 될, 그 저주의 무게가 물 무게에요. 바다 속의 물의 압력, 이 저주의 압력을 그 투명한 터널 속에서는 견딜 수가 있고 버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이미 용서받은 자가 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자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저주나 심판이 없어요.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면, 나를 공경하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미 과거완료에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겼느니라. 그 다음 문제는 말씀이 심판용이라는 거예요. 심판용이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걸 몰라요. “아, 나 진짜 구원받았어!” 구원받은 것만 좋아하지 말고 “어이, 너!” “예” “이미 너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이고, 좋아라” 좋아라가 아니라 너는 이제부터는 문자된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존재한다는 자체가 외부세력에 대한 심판기준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똑같이 살아가는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어떤 인물이 있다는 것은 나머지는 뭐한다는 말입니까? 그냥 자동적으로 사망에 저주에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저주받으며 그냥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제가 보고 있는 책에 그림이 있어가지고 유럽 중세사인데 지옥으로 가는 길이란 그림이 있어요. 여기에 보면 그 당시 중세 때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에 마귀들이 사람들을 몰치고 빨리 지옥으로 가! 하고 데려가는 요 모습을 보니까 설명이 뭐냐 하면, 현세에서의 신분에는 차이가 있으나 사후의 지옥으로 가는 길은 신분의 귀천이 없는 평등한 길이다. 라는 해설이 나와 있어요. 상당히 맞는 말이지요. 그 당시에는 계급이 얼마나 양반, 쌍놈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그런데 지옥 가는 길은 어떻다고요? 아주 평등한 공평한 그러니까 하나님은 껍데기는 일체 고려대상이 안됩니다.
신분이 뭐며 어떤 옷을 입었으며 일체 구분하지를 않습니다. 그걸 이렇게 하니까 우리는 굉장히 새롭게 들리지만 이미 로마서3장23절에 나와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너무나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돼 있어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모든 사람이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모든 자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으면, 그게 목사가 되던 장로가 되던 심지어 절에 가든 중이 되던 상관없어요. 다 지옥 갑니다.
요 문장을 만약에 우리가 믿게 되면 우리는 이 시대의 심판과 사망과 생명의 기준용도로 우리가 활용 당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에게 말씀이 없으면 아까 로마서 3장이나 5장 말씀은 뭐냐 하면, 아담이 죄를 지었으면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이 말씀이 만약에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도 역시 껍데기고 중요한 것은 안에 있는 그 말씀이 문서 됐으면 그걸 가지고 오늘날 우리시대를 선지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 선지자 계보가 어떻게 흘러와서 오늘날까지 이른 것을 아시죠.
문서 선지자가 기적, 기적하다가 엘리야 시대도 사실은 기적, 기적했지만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 지진이 나타나지 않고 큰 소리 바람 불어서 나타나지 않고 모든 게 고요하게 끝난 줄 알았는데 뭔가 세미한 음성가운데서 주께서는 세미한 음성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사람소리야? 이게 바람소리야? 내가 안 들은 거 맞지? 들었어? 들었나? 할 정도로 세미한 음성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봤잖아요. 엘리야 같은 경우는 자기가 기적을 베풀었잖아요. 자기가 하는 일에 기적을 베풀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로 다른 사람들이 혜택을 입었는데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누구한테 혜택준 게 아니고 단독적으로 하나님과 만나게 돼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렇다면 “이사야, 아저씨!” “예” “누구 만났다면서요?” “예, 하나님 만났습니다. 죽을 뻔 했습니다. 나는 정말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됐으면 우리한테 어떤 혜택이 있는데?” 이사야가 그런 혜택을 봤다고 다른 사람한테 혜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혜택 없어요. 혜택 없고 아, 이 세상이 지옥이구나 하는 그것을 일깨워주는 혜택만 있습니다.
당신이 40년 60년 70년 사는 이 세상이 사실은 지옥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여정이었고 일생이었습니다, 를 이제야 말한다. 그걸 일러주는 일러 받는 혜택, 그런 혜택이 있을 뿐이에요. 새삼스럽게 추가적으로 기적을 해서 배부르고 이런 거 없어요. 이미 문서 선지자가 되면 이미 그런 혜택은 없어요. 아, 멸망되어야 되는구나!
십자가 된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자기 집에 연금을 더 탔습니까? 어떻습니까? 더 좋은 무덤에 묻혔습니까? 아무 혜택 없어요. 다만 알게 된 것은 내가 강도 짓한 것보다 내가 살았던 세상이 나보다 더 강도였다는 사실, 이 세상이 날 그렇게 만들었고 나는 어쩔 수 없다는 그 사실, 이걸 알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 거죠. 보너스 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특별대우 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누구냐를 알았으면 그걸 발각되었으면 그 자체가 행운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었잖아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만나고 난 뒤에 그들에게 준 혜택 없어요. 그냥 만난 거예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혜택 뭐가 있어요? 죽도록 고생했는데. 40대 매 맞은 거. 이 땅에서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아, 나는 죄인 중에 괴수고 주님은 이 죄인 중에 괴수를 내 힘으로는 안 되는 그 구원을 주께서는 이미 하셨다고 통보해 주는 사실을 자기는 기분 째지지요. 그야말로 사람이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자기 생명을 얻는 것이 낫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장사가 어디 있어요? 돈 주고도 못 사는 영생을 얻었으면 남는 장사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 왔다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받은 혜택 뭡니까? 앞으로 니 속에서 생명수가 나오리라하는 물 길러서 소유해야 될 내가 우물이 된다는 사실은 생각도 못했지요. 나는 물을 길러야 될 입장이지, 물이 나온다는 생각은 못했거든요. 주님께서는 물 길러 간 여인에게 물이 나오도록 만들었으니까 아마 설사 나도 물 나올 겁니다. 그 속에서 영생의 물이 나오니까 세상에 이런, 주께서 이러한 사용함을 당했다는 그 사실은 소속이 다른 겁니다. 그걸 선지자라고 합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심판을 선포하는 겁니다. 왜 심판이냐? 문서가 문서화된 말씀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문서화된 말씀은 미래에 대한 확정을 말하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해요. 심지어 토정비결 봐도 벌벌 떠는데, 토정비결이 문서화되어 있잖아요. 6월 달에는 목성 성을 갖은 목사나 이런 인간을 만날 것이다. 이리 나올 때 이 사람은 빼도 박도 못해요. 6월 달에서 이런 성을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문서화 되어 있다는 것은 변동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성경은 문서화된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소요가 일어나서 가보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 막으십니다. 이리 가지 말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위로 가요. 수리아, 요새 말로 시리아로 갈 때 3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기를 공모하므로 이 당시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3대 축제가 있어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스라엘 3대 축제가 있습니다. 이건 참고로 지나가면서 말씀드릴게요. 그 3대 축제를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왜 만들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차 오실 것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당겨서 예수님의 긴 그림자처럼, 석양의 긴 그림자처럼 구약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3대 절기로서 표현한 겁니다.
유월절이라 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맥추절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거든요. 탄생을 의미하는 거예요. 탄생을 의미하고 성장과정이고 수장절은 오순절이거든요. 드디어 모든 십자가로 완성한 걸 의미하는 겁니다. 유월절은 어린양입니다. 어린 예수입니다. 어린 예수를 잉태했다는 것은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보잖아요. 사도바울은 그리 보지 않고 예수님이 죽음 속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한 인식의 변화가 깊이 있는 변화지요. 우리는 사람이 태어났으면 우리가 애들보고 애들 돌잔치에서 아이고, 죽었다가 태어났군요. 이런 소리 안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었다가 태어남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의 출생으로부터 새로운 죽었다가 산자만이 구원받는다는 새로운 역사를 이 세상에다가 죽음 속에서 새롭게 계시하는 겁니다. 그 계시하려면 몽땅 이 세상을 자신의 죽음 속에 다 담아야 되는 겁니다. 이 예는 좀 과격한 예가 되겠습니다만 이해하기에는 적절할까 싶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린애가 크레용12가지 색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아빠, 내가 그림 그릴 테니 봐봐.” 그런데 아빠는 예술가에요. “아빠, 크레용 요거 가지고 이렇게 그리고 요렇게 그리면 돼?” 하니까 애보고 “잠깐 비켜.”하고 아빠가 크레용을 전부다 냄비에다가 다 녹여버립니다. 녹이면 시커먼 한 가지 색깔 나오지요. 그 색깔가지고 비키게 하고 그 도화지에 그려버리면 그 안에 12가지 색깔이 시커멓게 그리는 그림 안에 다 포함되겠지요. 예수님이 바로 이렇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섬기면 되겠지요? 저 하나님 잘 섬겨요.” “비켜. 비켜.” 아담 속에 있는 의인은 하나도 없나니 다 죄인밖에 없지요. 죄인이 무슨 하나님을 섬깁니까? 십일조? 십계명? 안식일? 비켜! 비켜! 그거 이미 다 끝났어. 끝났어! 안 돼! 해버리고 그 모든 색깔을 다 녹여가지고 예수님자신이 죽음에서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처음부터 주님께서 죽었다가 태어나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사실을 사람들은 몰라요. 모르는데 이 사실을 누가 아느냐 사탄은 알아요. 사탄은 알기 때문에 아기예수 태어났을 때에 진짜 죽음을 쥐고 있는 죽음의 권세를 가진 악마가 2살 아이 밑에는 다 죽이잖아요. 이것은 헤롯의 뜻이 아니지요. 악마, 악마의 뜻이라는 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헤롯이 아니고 악마가 배후에서 작용하는 거예요. 이것이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보통 인간으로 보지만 누구는 보통 인간으로 볼 수 없습니까? 사탄은 알아요. 당신은 우리를 멸망하려 오신 분 맞습니다. 라고 했고 예수님이 가는 사도바울이 가는 길에도 저 사람은 구원의 길을 열기위해서 오신 사도다. 하고 외치다가 에이~씨, 귀신아 좀 조용히 해라. 하는 대목이 있지요.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고 당신은 아들입니다, 하니까 나와! 그런 소리는 지금 할 시기가 아니야. 라고 하면서 뭔가 인간들은 빠지고 영적인 안목을 가진 분들끼리 그런 쫓기듯 서로 통하는 게 있어요.
아기예수가 죽음을 유발한다. 아기 예수가 가는 곳에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숨어있던 마귀도 자기 정체를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그런 새로운 환경을 만드는 겁니다. 마치 봄철에 쟁기가지고 밭을 갈게 되면 밑에 있던 흙이 위로 올라오잖아요. 가니까. 주님이 마치 이 고요한 땅에다가 평화로운 땅, 이 세상에다가 쟁기로 죽 긁어버리는 겁니다. 긁어버리니까 속에 안 들키려고 여겼던 악마적인 악마의 요소들이 마구 발악을 하면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제자들이 이런 이야기하거든요. 예수님께서 그런 거 좋아하지 말고 니 생명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걸 좋아하라. 도무지 이 세상에 어떤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대화 그거 안다고 해서 돈 되지도 않는 대화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성경에 가득 차 있는데 내가 보기에 사람들이 목사들이 재주도 참 좋아. 이것 가지고 돈 축복을 엮어지는 그런 경로가 없는데 그냥 세상은 죽었고 살아있는 것은 예수님이 갈아 놓은 그 노선에만 생명이 있을 뿐이지 그 나머지는 다 죽는 거예요.
그러면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생명은 죽음이란 이 밭 밑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출생하면서 아기 예수 태어나면서 이 생명이 바깥으로 솟아서 나왔고 그걸 감추기 위해서 같이 악마가 인간을 배후에서 작용했던 것들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2살밑의 애들을 죽이려고 했고 마구 공격했고 결국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이는데 성공했잖아요. 마귀들이.
껍데기 말고 숨어있는 영적 의미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 20장하면서 찾아내자 이 말입니다. 그냥 사도바울은 이리 갔다. 여기 갔다. 저기 갔다. 무슨 의미 있어요. 왔다 갔다 어지럽기만 하다 말이지요. 그래서 일반 주석에서는 신학에서도 이걸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 주석과 신학자들이 이 사람들이 성령 받은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지식을 전하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궁금해요? 궁금하면 알려줄게. 시리아 쪽으로 못가가지고 위쪽으로 갔습니다. 자, 됐지요? 진도 나갑시다. 옛날 에베소에서 있었던 거, 이순신 장군 어디 놀러 간 것 까지 왜 알아야 되는데요. 사도바울 어디 가는 거 우리가 왜 알아야 됩니까? 성경에 나와 있잖아요. 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것은 배후에 영적인 투쟁과 전쟁이 깔려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에 의한 영적인 해석입니다. 문자로 해석하지 말고 영으로 해석하라는 겁니다.
문자로 해석하는 것 가지고 현재 발달된 것이 기호학이라는 거예요. 기호학인데 상징과 의미 이런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전에 이야기했는데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이야기하겠습니다. 어쨌든 간에 위로 올라갑니다. 위로 올라가면서 마게도냐를 다녀서 가기를 원한다. 자, 마게도냐가 이쪽이에요. 배를 타고 건너가면 4절에 보면, 마게도냐에 있는 지명들이 나와요. 데살로니가 사람 있지요. 제일 먼저 드로아 가고 죽 둘렀다가 에베소 안 가고 15절에 밀레도에 와요.
14절에 보면,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밀레도인데 옛날에는 밀레토스해서 대전 시민 강의에서 밀레토스학파가 나와요. 지금도 밀레토스 있어요. 여기 온 다음에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바로 못 갔느냐, 세 가지 축제 있다고 했지요. 축제를 할 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다 모입니다. 모임에서 뭘 갖느냐 하면, 국가적 정체성을 가집니다.
북한에서 김일성 생일을 강조하는 이유가 북한의 모든 사상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이어받거든요. 하나의 종교잖아요. 그럼 평양 대 광장에서 행진함으로 말미암아 어떤 의미냐 하면, 우리 생각과 적들이 뚜렷해지는 효과가 있어요. 내가 누구냐를 아는 동시에 그로 인하여 우리 생각과 다른 것들은 우리의 주체사상을 붕괴시키려는 미 제국주의의 사고방식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고 적이 뚜렷하게 등장하지요.
사람이 적이 뚜렷하게 등장하게 되면 그걸 공격함으로 말미암아 내부의 불만들이 정치적으로 해소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학교 내에 학생들의 폭력이 있고 문제가 있잖아요. 만약에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이라면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가 하면 애들에게 골프 팀, 야구팀, 뭔가 핸드볼 팀을 만들어버려요. 팀을 만들어서 자기 학교 이름을 축구팀을 만든다면 축구이름으로 애들 전교생들을 운동장에서 응원하게 하면 그 축구팀이 없을 때는 서로 뜯고 욕하고 하다가 그 때 통합적으로 비례초등학교 대 대전 중앙초등학교 축구팀 같으면 그때부터는 중앙초등학교는 원수에요. 완전히 김일성나라에요. 죽여라. 그러면 이쪽은 자동적으로 뭐가 돼요? 단결이 되는 거예요. 이게 교장선생님의 그런 안목을 가지고 학교를 빛낼 수 있는 어떤 운동 팀을 만드는 거예요. 예산이야 교육청에서 주겠으니까. 코치하나 인건비 받아가지고 하는 거예요. 애들을 하나의 단결을 목적으로 적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3가지 절기를 뭐로 이용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게 아니고 우리는 죽어도 여호와와 함께, 살아도 여호와와 함께 라는 팀웍을 자랑하는 그러한 결집력을 보여주는 기회로 삼은 겁니다. 여기에서 적이 누구냐 유대인들이 모여 있던 수백만의 유대인들은 다 여기 터키부터 사도바울이 다녔던 그 때 만났던 유대인들이 여기에 와서 어떤 소문을 내는가 하면 사도바울 죽여라!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원수다. 배신자, 하나님의 사랑의 배신자, 우리의 유대교의 배신자 영원히 돌로 쳐 죽여야 되는데 아직도 살아서 돌아다닌다. 그 소문이 벌써 퍼졌어요. 퍼졌으니까 할 수없이 이것은 타이밍을 다시 맞추기 위해서 위쪽으로 한 번 갔다가 가기는 이쪽으로 다시 갑니다.
가면서 하나의 어떤 효과가 있다면 그것은 이쪽이 예루살렘이 있는 초창기 교회가 있어요. 처음에 교회가 예수님 십자가부터 시작하니까 지리적으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그 다음 나머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했지요. 그 본산, 기독교의 본산, 예루살렘, 예루살렘이 상당히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사도바울은 그 이야기를 듣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헌금을 모아가지고 그 헌금을 전달하는 새로운 임무를 하나 더 가지고 이쪽으로 갑니다. 갈 때, 이걸 잘 알아야 돼요. 이미 하나님의 성령은 사도바울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사도니까. 교회가 하는 것은요, 우주를 초월한 교회라 하는 것은 처음의 기초는 예수님이고 그 위는 사도요, 그 다음에는 선지자, 교사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도가 죽고 난 뒤에 성경이 완료가 되기 때문에 누구든지 더 이상 말씀을 추가하거나 뺄 수가 없게 돼 있어요. 그래서 모든 것은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우리 마음속에 줍니다.
이걸 로마서 10장에 보면, 이미 그걸 예언했어요. 니가 어디 가서 기독교를 보겠다. 예수님을 만나겠다. 기적을 보겠다고 하지 말라. 이 말씀이 요새말로 니 코 앞에 있는데 뭘 먼데 가냐, 이 말씀을 마음으로 믿어버리면 니가 구원을 받는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너가 구원을 받는다, 이리 되어 있어요. 성경말씀에. 말씀이 니 앞에 있으니. 사도의 말씀의 자체에 사도의 권위가 아니에요. 이것은 성령의 권위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에요. 사도요한에게 예수님이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주잖아요. 사도요한만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이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이리 되어 있어요. 그 외는 복이 없다 이 말이에요.
그것은 분명히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문자화된 말씀이 우리 속에 박히게 되면 우리는 활용 당한다 했지요. 내가 구원받았다는 문제는 잊으세요. 내가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은 구원 못 받았다는 뜻밖에 안 되거든요. 이것은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이미 사용을 하면 그 자체 관계가 이미 구원의 관계에 돌입된 겁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 이렇게 해버리면 구원받은 걸로 해가지고 모든 게 마무리되는데 성령은 그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것이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일에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활용을 당해요. 이제부터 우리 몸이 우리 몸이 아니고 우리 속에 말씀을 집어넣어준 주님의 몸이 되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귀해서 우리를 우리 뜻대로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첫 째 시간에 사도행전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인간들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이 뭉개 버린다는 겁니다. 인간들의 모든 생각들을 갈궈 뭉개 버려요. 그 도시에 콘크리트해가지고 글자 크게 들어가지 마세요. 써가지고 아직까지 마르지 않았으니 들어가지 마세요. 해놓잖아요. 일주일 뒤에 가보세요. 개발자국 나있지. 개는 몰라요. 개에게 들어가지 마세요. 하면 알았어요, 깽깽하는 그런 개 없습니다. 우리 동네에 공원도 마찬가지에요. 깨끗이 다 해놨는데 보면, 하여튼 개 발자국이 있어요. 우리가 난 인생 요렇게 살겠다하면 벌써 주님의 성령의 발자국이 다 뭉개 놨어요. 콘크리트 타설한 거 다 밟아놨어요.
사도 쪽에서 원 쪽을 공격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이쪽에서 항상 시대적으로 앞서니까 우리가 낫다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헌금을 모아서 이렇게 했다 하면 헌금한 사람이 이쪽(원 쪽)보다 위대하다가 아니라 헌금을 누가 하게 했느냐, 성령께서 주님께서 하게 하셨지요. 여기는(원 쪽) 지금 헌금을 받을 입장이다 말이지요.
성경에서는 반드시 사랑이라 할 때는 반드시 주는 자가 있고 받는 자가 있을 때 사랑이 형성되는 겁니다. 그냥 사랑은 없어요. 그냥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에요. 그냥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내 정서에 관한 거고 항상 우리는 사랑 주는 자가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사랑 주는 자가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사랑을 받기만 해야 할 사람이에요. 받는 것도 못해. 줘도 못 받아요. 우리는 사랑을 받기만 하는 그러니까 야구에서 예수님이 투수고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포수에요. 앉아서 받는 사람 있잖아요. 여자분들 야구 아시죠? 야구에는 9명이 있는데, 던지는 사람이 있고 중간에 서서 혼자서 외롭게 투수 있고 포수로 받는 사람이 있어요. 완전무장해가지고 앉아있는 사람은 한사람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다 서있어요. 우리는 이렇게 앉아서 오는 사랑을 받을 뿐이에요. 그래야 우리가 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 되고 그래야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겁니다.
포수가 앉아있는 게 아니고 뒤에 서가지고 지가 공 던지면 야구 자체가 안돼요. 야구 안 되면 지금 유현진도 없습니다. 4승도 없고 보너스 4억도 날아가 버리고 없어요. 그걸 하나님의 게임이라 하지 않고 저는 지난 설교에서 구원의 방정식이라 했거든요. 방정식이라 하는 것은 어떤 변수를 집어넣어도 딱 그 틀에서만 논다는 것이 방정식이잖아요. 구원에도 하나님의 방정식이 있어요. 사랑의 방정식이 뭐냐 하면, 주님은 그냥 사랑을 주시는 분이고 구원받는 사람은 도로 던지는 게 아니고 받기만 하는 거예요. 도움 주고받는 것은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오성과 한음이 그 둘이 주고받는 거지 우리는 그냥 받기만 하는 거예요. 받기만.
받는데 또 받으면 두 배, 그러면 이건 really가 되는 거예요. 진짜로? 진짜에요. 우리는 항상 받는 쪽이에요. 그렇다면 지금 여기는 가뭄 들었잖아요. 원래 복음이 예루살렘부터 시작됐잖아요. 예루살렘과 유다와 했던 그 복음이 지금 예루살렘은 핍박받고 지금 곤란에 처해 있고 오히려 저 쪽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말이죠. 그 듬뿍 받은 사랑이 오히려 강물이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흘러서 어디까지 내려갔습니까? 예루살렘까지 간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이 자기가 수리아에서 예루살렘에 가가지고 이걸 그대로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과 반대입니다. 인간은 받아서 신에게 나아가려하는데 자기를 성장시키려는 그런 본성적인 희망이 있어요. 지금보다 더 크고 위대하게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뭉개버리고 날마다 우리를 더욱 더 납작하게 만들고 작아지게 만들어요.
군에 졸병이 가니까 사관이 하는 말이 “야, 니 땅을 봐!” 졸병들이 땅을 봤지요. “뭐가 보이냐?” “예, 땅이 보입니다.” “그래, 니는 군대생활에서 니 밑에는 땅 밖에 없어. 그런 마음으로 해.” 그리 말한다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뭐냐, 사랑이라 하는 것은 성립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슨 자? 사랑을 받는 자가 되어야 되겠지요. 사랑은 받는 자이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점점 더 점점 더 받아도 염치없이 또 받아야 되고 받은 데다 또 두 배 세배 리얼리, 리얼리, 리얼리, 계속 받아야 되고 받아야 되고 또 받아야 될 그런 입장이라 말이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다가 사랑을 전함으로서 사도바울은 우위에 있고 예루살렘은 밑에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이거에요. 헌금을 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고 헌금을 받는 것도 사랑이고 받는 것도 전달하는 것도 이것도 사랑이다. 그러니까 남이 주거든 덜렁 받으세요. 받는 것도 사랑입니다. 한 번 체면세운다고 하다가 돌아서서 받을 걸 하고 후회하지 말고. 줄 때 주의 사랑이라고 얼른 받으세요. 줄 때는 고맙다고 받아야 돼요. 남편들은 잘 못해요. 남자인양 남자는 하늘이라 하는데 이 사랑 앞에서는 하나도 소용없습니다. 남편 앞에 땅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땅되어야 돼요. 누구나 그래야 우리는 항상 사랑받아야 돼요. 예수님의 오병이어처럼. 계속 나오고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영생도 한 번 주고 마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영생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영생받기 위해서 계속 우리는 아무것도 영생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라는 것을 자기 자신이 그냥 받기만 하는 처지에 있음을 알아야 돼요. 그게 성도로서 유일한 행운입니다.
그 다음 봅시다. 20장 22절 봅시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밀레도에 있으면서 에베소 교인들을 못 만나잖아요. 만났어요. 어떻게 만났느냐 하면, 밀레도에 있으면서 에베소 장로를 불렀어요. 만나고 싶다 해서 좇아왔거든요. 와서 예루살렘 가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하면서 사도바울이 22절에 보면,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아~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갈 수밖에 없다는 이게 정해진 코스에요.
성령께서 주변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의 미래 될 일을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 예언을 했어요. 참 성령께서 신기하지요. 자기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의 예언을 한 거예요. 왜냐 하면 사도바울은 사도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의 중심에 서 있으니까. 그 사도의 모든 일정이 일생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실내용 구원의 방정식 만들기 그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미리 정답을 말씀드릴게요. 구원의 방정식은 이렇습니다.
태어났다. 죽었다. 살았다. 간단한 거예요. 태어났다, 죽었다, 죽을 때 수명 다해서 죽는 것은 반드시 안 되고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서 하나님의 예언에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취지에 따라서 죽을 때만 삽니다. 길이 있는데 아까 가양에 보니까 터널이 두 군데 있어요. 일반 국도선에 있고 고속도로 두 군데에 있어요. 남들 보기에는 이 앞에서 보면 같은 터널을 가는 것 같지만 옆에서 보면 다르거든요. 사람은 아이고, 다 태어나면 늙어죽게 마련이야, 문제는 늙어죽기 마련인데 그 죽음이 어느 터널을 통과한 죽음이냐가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죽는 죽음, 그걸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십자가로 죽는다. 이리 되는 거예요.
십자가라는 터널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은 자에게만 십자가의 혜택, 영생의 혜택을 보고 그렇지 않고 죽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죽음으로 죽기 때문에 그 죄는 그대로 살아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다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때는 지옥에 가는 부활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죄가 그대로 살아나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의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강도처럼 죄로 죽었지만 의로 태어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 사람의 부활은 하나님이 이렇게 의롭다는 증거물로 태어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이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 가는 증거물로 태어나게 되어 있어요.
사람은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다 부활하는데 하나는 선한자의 부활로, 악한자의 부활로 나오거든요. 죽는 건 다 죽는데 죽기 전에 어느 쪽으로 죽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럴 것 같으면 목사님, 인생을 왜 삽니까? 많은 사람이 물어보죠. 인생은 기회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거예요. 마지막 때가 이르기 전에 때가 이르기 전에 십자가 믿으라고 우리 인생 살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기회를 하나님에게 부여받은 거예요.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오늘 키웠다 했잖아요. 우리는 아궁이 들어갈 들풀과 마찬가지에요. 내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요. 어떤 졸음운전으로 박혀서 죽을지 모르겠어요. 어쩠든 간에 사고 두 번 났다고 세 번째 안 난다는 법은 없거든요. 그런데 이 기회, 그야말로 문자적인 말씀, 말씀이 문자로 우리 속에 박힐 수 있는 기회, 우리는 말씀을 위해서 내가 있지 나를 위해서 말씀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그 기회, 애초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서 태어났지, 내 오래 살려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그걸 알 수 있는 기회, 그 기회를 지금 우리가 부여받은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계속해서 하는 말이 23절에 보면,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아이고, 사도바울님 가면 죽습니다. 잡혀 죽습니다. 아, 당신도 그래? 나도 그런 계시 받았어. 아 당신도 그래? 나도 그래. 각 성에 돌아다니는 이유가 사도바울이 각 성에 돌아다니면서 자기 앞일을 성령에 의해서 알게 된 사람들한테 소식을 미리 듣는 거예요.
그러니까 24절에 다 같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 이야기 듣고 하는 말이 사도바울님 거기 가지 마세요. 하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이 사람들아, 내 생명이 귀 하냐, 복음이 귀 하냐, 생각이 있으면 좀 깨달아라 이 말이에요. 복음이 귀하다면 내 생명은 안 귀한 거예요. 태양 앞에 촛불 켜보세요. 그 촛불의 값어치가 납니까? 그 태양 앞에, 빛나는 태양 앞에 촛불을 켰는지 안 켰는지 몰라요. 캄캄할 때는 후레시도 밝지만 밝은 빛 앞에서는 소용없잖아요.
나는 쇠해야 되고 주님은 흥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지시는 내가 복음 때문에 살았는데 또 내가 나를 살리려고? 내가 미쳤어? 그건 복음을 안 믿는다는 뜻이잖아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복음이 있는 게 아니고 복음 살리기 위해서 내가 있는 겁니다. 내가 복음을 위한 소모품이 된다는 거 이거 세상에 이렇게 영광스러운 그러한 사명이 또 어디 있겠어요. 참 하나님께서는 용의주도해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사도님, 가면 죽습니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일부러 성령을 통해서 그들에게 미리 놀라운 염려를 유발시켜 놓고 그 분위기를 띄워 놓고 거기에 대해서 아마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이 그렇게 했기에 안 갈 거야, 라고 짐작하는 가운데서 사도바울은 반전이 일어나면서 그러니까 여러분, 복음이라는 것이 여러분들이 그렇게 아끼는 사도의 목숨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가야 합니다.
라면 맛도 국물까지 마셔야 맛이 나는 것처럼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이라도 훅! 하고 복음의 맛을 마셔주시기 바랍니다. 죽을 때까지. 뭐 한80살아 놓고, 90 돼가지고 나 이제 예수 안 믿을란다, 하지 말고. 중요한 것은 사랑이거든요. 사랑은 주는 자가 따로 있고 우리는 어떤 입장이다? 그냥 받기만 하는 거예요. 몇 년 동안? 몇 년이 뭡니까? 심지어 죽는 것도 사랑받는 건데. 죽는 것도 사랑인데요. 헌금 하는 것도 사랑이요, 받는 것도 사랑이고 받은 헌금을 전달하는 것도 사랑이고 그러니까 예루살렘보다 우리가 더 세다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누구 안에 있다? 다 같이 주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헌금 우리가 줬다고 하지 말고 주께서 직접 여러분에게 헌금을 줬다고 그렇게 생각하세요, 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은 헌금을 전달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상당한 중요한 대목이 있는데 아깝지만 다음에 하고 마무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에 24절 보세요. 수능시험이라 하고 언어영역입니다. 나의 ( )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할 때 ( )에 뭐가 들어갈까요? ①번 돈 ②번 명예 ③번 가족 ④번 내 생명 뭡니까? ④번.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복음을 위하여 마지막 남은 국물까지 홀딱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와버리면 우리는 철저하게 복음에 의해서 다뤄지는 그것이 왜냐, 사랑을 받은, 일방적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류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75.♡.146.206)
13-10-16 17:05
대전2013926-마13장51절(옛것과 새것)44강 -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3장 51절하겠습니다. 신학자마다 난해한 구절이라고 하는데 난해한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뭐냐 하면,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뭐가 난해한 구절인가 하면 52절 보면,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하는 요 대목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대목을 해봅시다. 이 대목에서 행동이 나오지요. 집주인이 어떤 행동을 하지요. 뭔가 곳간에서 바깥으로 뭔가 가지고 나오지요. 가지고 나오는데 가지고 나온 게 뭘 가지고 나오지요? 새것과 옛것을 가지고 나오는 행동, 액션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곳간이 이리 있고 곳간 안에는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우리는 밖에 나와야 새것인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이미 새것과 옛것이 함께 들어있다는 요 대목이 난해한 거예요. 새것에서 ‘새’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딱 등장해야 비로소 새로운 것, new, 새로운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주님한테는 역사 속에 나오지 않더라도 아직 등장하지 않더라도 새것, new라는 말을 예수님이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인간이 알고 있던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 론 있잖아요. 시간 론. 이 시간 론에 예수님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너희들의 시간 론을 내가 엎을 거야. 이런 뜻이다 말이죠. 너희들은 지나간 것만 옛것이고 현재 새로 나타난 것만 새것이라 여겼는데 나는 너희들이 옛날이라고 여기는 그 속에 이미 새것이 담겨있는 식으로 나는 일을 할 거야. 따라서 너희들의 이런 시간 론을 갖고 있다면 내 말을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 말은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너희들이 알아들으라고 내가 액션,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알아듣든 너희가 알아듣지 못하던 상관없이 꾸준하게 내 일에 대해서는 진척이 있다, 라는 일방적인 선언을 하시는 겁니다. 좀 더 깊이 나가봅시다. 그렇다면 옛것과 새것이라고 했는데 왜 이것을 옛것과 새것이라고 했는가 하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야기하고 지금까지 제자들이 이야기하고 구약의 모든 것은 현시점에서 인간들은 이것이 옛것이라고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옛것이라는 것은 지나간 일, 지나간 것, 지나간 것이라고 누가 언급하느냐, 바로 인간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홍해사건 봅시다. 홍해가 갈라졌다. 옛것입니까? 새것입니까? 우리에게는 옛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새것으로 만들어 낼게.” 라고 하는 거예요. 이제 이해되시지요. “이상하다. 홍해는 지나갔어. 지나간 거야. 홍해사건 두 번 없어. 끝났어.” “아니야. 내가 새것으로 만들어 내겠다.” “그러면 예수님, 어느 것이 새것이고 어느 것이 옛것입니까?” 물으면 예수님은 “너희들이 옛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몽땅 새것으로 바꿀 수도 있다.” 는 겁니다. 그러면 옛것은 없었습니까? 몽땅 새것이고 몽땅 옛것으로 만들어 내는 식으로 내가 일을 할 것이다, 라는 겁니다.
노아 봅시다. 노아방주. 노아방주 홍수 난 것. 분명히 옛것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것을 새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면 노아 방주는 옛것이 사라지는가? 아니지요. 노아 방주를 옛것으로 남기면서도 이것을 새것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바탕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이사야 41장 4절 보면,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여기까지 봅시다. 이 세상의 모든 창조의 일을 누가 했고 누가 이루었습니까? 하나님이 묻고 있잖아요. 우리는 알 턱이 없지요. 몰라요. 추상적으로 하나님이 하셨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구체적으로 물어요.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태초에도 있었고 나중에도 있을 분, 나중에 있을 분이 처음부터 있었다면 처음부터 있은 그 안에 나중에 있을 분으로서의 처음도 함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들이 과거에 있을 때는 미래는 오지 않았다. 이런 의식이 하나님한테는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안 통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옛것과 새것을 섞어서 한 곳간에 같이 들어있다고 언급하신 것은 바로 구약에서 말하는 그 여호와, 여호와에게만 해당되는 모든 사항이 이제는 현실로 나 이 예수를 통해서 현실화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보기에 사람이에요. 사람이라면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을 따라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증거 같은 것은 확실하지요. 예수님도 늙는다는 것. 예수님이 나이 서른 살 됐을 때에 아무리 봐도 2살 때의 모습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지나간 걸로 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보기에는 분명히 예수님도 늙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걸로 보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인간들이 예수님을 볼 때 이런 존재론적 바탕으로 예수님을 믿고자한다면 인간이 존재 속에 예수님도 끌어당기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주님에게 허용이 안 되고 깨달았느냐, 하는 것은 너희들이 알지 못한다는 뜻이고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인간에게 다가설 수밖에 없거든요. 나 여기 있으니까 주님이여 내편 되게 하옵소서. 존재론적 인식이거든요. 나 여기 존재하니까 이 존재 좀 어떻게 처리해 주시고 어떻게 잘되게 해주세요. 나 여기 존재 있는 거 아시지요? 보이시지요? 하나님, 나 어떻게 좀 잘하도록 해주세요. 라고 요구할 때 주님께서는 여기에 합세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주님의 존재가 우선이고 이것을 붕괴시키는 거죠.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니가 생각한 그 증거는 오류다. 하나의 예를 들면 블랙박스에 담긴 것은 조작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경찰에서는 그걸 증거물로 하는데 택시회사에서는 그걸 조작한다 말이지요. 자기 택시회사가 했을 때 빨리 들고 와가지고 블랙박스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해가지고 증거 내라하면 가짜내가지고 회사에 손해 끼치지 않도록 작업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거고 이 블랙박스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평생 사는 것은 전부다 블랙박스에 저장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항상 내 존재를 생각하기 때문에 내 일생의 경험을 우리는 오류로 저장해요. 머리속에는. 내 위주로 저장한다 말이지요. 내 위주로 저장하기 때문에 천국가게 되면 기가 막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걸 미리 알아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동안 내가 무슨 일을 했으며 그 경험한 것이 머릿속에 들어오면서 그냥 들어오는 법이 없고 전부 다 내 잘남, 내 존재의 정당성 그러니까 나는 더 살아야 돼, 라는 욕망과 한 통속이 돼가지고 잘못된 입력으로 저장이 되니까 원래의 블랙박스에 대한 의미와 해석과 전부 다 너무나 일방적으로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그걸 우리는 뭐라 하느냐 하면, 그걸 ‘과거’라고 하는 거예요.
어거스틴 이라는 사람을 대전 시민 대학에서 이야기할 건데 시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의 영혼이 조작한 것이다, 이리 보면 돼요. 시간이라 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의식에 불과하지 실제로 시간은 없다고 보면 돼요. 시간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그냥 우리 의식의 내부에 시간의식이 흐를 뿐이지, 실제로 시간 같은 것은 없다. 이리 보는 겁니다. 최초의 현상학적 시간 론을 주장한 사람이다, 이리 보이거든요. 나중에 보면 후설에 현상학적 시간 론 나와요.
여기서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쉽게 합시다. 노아 방주가 옛날에 있었어! 나는 분명히 기억해. 나는 분명히 믿어. 노아방주가 있었다는 것을. 이렇게 해도 이건 노아방주의 의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기억해버리면 노아방주 기억한 내가 이미 나는 내 시간을 긍정하게 되고 그러면 나는 이것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옛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속성이 우리에게 발휘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니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노아방주를 옛것으로 생각한 니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나는 노아방주를 새것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데 너는 노아방주를 새것으로 못 끄집어내니까 재주가 없으니까 너는 너 자신을 믿는 식으로 나를 믿어서는 믿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나를 믿듯이 예수를 믿는 것은 신앙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갈 때 까지 가봐야지요. 그럼 인간이 제자들이 갈 때까지 가보는 게 뭐냐 하면, 결국 인간은 죽잖아요. 죽고 난 뒤에는 기억이고 뭐고 스톱이 되지요. 스톱이 된다면 그 다음 조치는 누가 조치합니까? 죽은 인간이 지가 잡아당기고 아야 합니까? 손을 놔버리잖아요. 손 놓고 난 뒤에 살려주고 안 살려주고는 누구의 권한입니까? 그 다음부터는 옛것과 새것을 일방적으로 끄집어내는 주님의 소관이잖아요. 죽은 너희를 너 자신을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미 새롭게 새 피조물로 만들어내겠다는 새것의 의미를 담아버리면 너는 나로 인하여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이게 구원의 방정식입니다. 구원의 원리에요.
구원의 원리의 기초는 뭐냐 하면, 내가 믿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이것은 나 잘남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핑계거리에 증빙거리밖에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하고 십일조하고 봉사하는 거 전부 다 누구 좋아라고 합니까? 나 왜 이리 잘났지? 나는 미치겠어! 이것은 교회 가는 것뿐만 아니고 결혼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심지어 결혼 안한 것도 마찬가지에요. 당신 왜 결혼 안합니까? 나 결혼하기 싫어. 왜? 내가 하기 싫으니까. 정답은 성경에서 배워요. 왜 결혼 안했습니까? 결혼 안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봅니다. 분명히 정답이거든요. 정답이긴 정답인데 얼굴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수녀보고 당신은 왜 결혼 안합니까? 주의 뜻으로 이렇게 수녀 되게 했습니다. 속으로 ‘그래요. 당신이 장 동건 만나면 그 소리 하겠습니까?’ 솔직하게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없어서 하다보니까 못했는데 이제는 남자가 나오면 결혼할 용의가 있습니다. 솔직하게 얘기해요. 솔직하게.
왜냐 하면 육신의 본성은 서로의 S극과 N극이 당기게 돼 있어요. 이걸 누가 말립니까? 당기는데. 서로에게 나는 저 사람이 싫어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저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경우에는 그만 우리사이 놓자할 경우에만 이쪽으로 당겨집니다. 그래서 부부사이는 같이 재미나게 사시는 것은 아직까지 더 좋은 상대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남편보다 더 좋은 남자 없고 여자가 없다는 조건하에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무슨 조치를 내릴지 장담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에 내가 한평생 부부가 헤어지지 않고 잘 살았습니다. 말하는 그것도 블랙박스를 잘못 해석한 결과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주께서는 옛것이라고 합니다. 항상 옛것은 실수요, 오류요, 문제성이 있습니다. 우리 자체가 옛것이에요. 옛 아담이고. 아담본성이고.
예수님은 본인이 새것이 되어서 내 것을 나누어주면, 사랑은 그냥 받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사랑받을 때 내가 하는 사랑과 받는 사랑과 분류를 시켜보세요. 내가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사랑이 있을 때는 주께서 주신 사랑이 100%맞습니다. 불신자들은, 성령 없는 사람은 그게 없어요. 교회봉사해도 지가 다 알아서 했어요. 지가 믿음 좋아서 지가 했어. 그러니까 신자가 아니잖아요. 믿는 것은 자기밖에 안 믿으니까. 자기 잘남을. 그저 우리는 옛것위에 새것이 덮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얀 도화지라 생각하지 말고 까만 도화지라 생각하고 거기다가 주께서 하얀 페인트칠을 하신다고 생각하면 아주 적절하지요. 나는 죄밖에 없는데 거기다가 하얀 하나님의 의를 뿌리면 우리가 자랑할 것은 자기 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이런 죄를 용서해주신 주님의 의밖에 없잖아요.
누가복음 18장13절에 보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이 왜 있겠어요? 까만 도화지라. 까만 도화지 돼야 하얀 게 튀어나잖아요. 하얀 게 팍팍 튀어나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얀 걸 까만데다 끌어 잡아 당겨가지고 누리끼리 하게 만들었어요. 까만 것도 아니고 하얀 것도 아니고 누리끼리하니.
우리교회에 누가 질문 좀 해줬으면 하는 질문이 어제 질문을 했어요. 막 사는 게 뭐냐고 질문을 했어요. 제가 얼마나 반갑던지.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막 사는데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막사는 것과 인간 본인이 보기에 막사는 두 가지가 있는데 본인이 보기에 막사는 것에 대해서는 막사는 것도 지 하고 싶은 데로 살기 위해서 핑계대고 막살고 그것도 문제고, 막 안 살기 위해 절제해도 그것도 문제고, 어쨌든 시선자체가 지 잘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여 제가 막 살아도 되지요? 또 막살아도 구원받지요? 내가 막 안 살고 노력하면 구원받지요? 어쨌든 간에 관심은 자기밖에 없으니까 이래도 문제되는 거예요.
주님의 시선을 보게 되면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우리는 막 사는 게 되기 때문에 그럴 경우에는 주여, 막 살게 되는 것밖에 안 되는 것을 알게 하여주심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래 살아도 막살고 저리 살아도 막살고 그러니까 막산다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것 때문에 삐져서 간 사람도 많지요. 그것에 대해서 이 근호 목사는 막산다 하는데 자기는 막 살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는 그것도 이상한 사람이죠. 자아가 끼어들면 문제가 생겨요. 자아가 끼어들면. 블랙박스가 해석이 엉뚱한 게 막 나와요. 택시회사에서 조작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냥 블랙박스는 시커멓게 되어 나오는 대로 그냥 그리세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일거수일투족이 주님께서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에 내가 일으키고 싶어서 생긴 사건이 아니고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에 주께서 알아서 처리하십니다.
다시 한 번해봅시다. 13장.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요.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해요.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천국의 서기관들은 제자들입니다. 너희들 말이야, 이제 내 말 깨달았지? 예!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희들은 뭐하느냐 새것과 옛것, 구약과 신약을 곳간에서 끄집어내게 된다는 겁니다. 그 내서 뭐 할 건데? 내서 지킨다는 말입니까? 해석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목사가 이렇게 설교하니까 교인들 보기에는 진짜 말씀 그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리고 앞으로 교인들에게 할 일이 생겼어요. 뭐냐 하면, 구약도 보고 신약도 보고. 그러면 자기는 뭐가 되고? 충실한 하나님의 충성된 제자 된 서기관이 되고.
천국의 서기관 같으면 보통 공무원 몇 급입니까? 5급 서기관이죠. 얼마나 높아요. 문자적 해석하니까 갑자기 직급이 높아져요. 몇일 전에 교회에 등록해놓고 갑자기 5급 공무원 고급공무원이 됐어요. 고위직 돼 버렸어요. 성령을 안 받는 목사가 성령을 안 받은 교인보고 하니까 다들 저희들끼리는 전부다 동의할 수밖에 없지요. 이 제자들이 나중에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목자를 치니까 양들이 다 도망갔어요. 4급 서기관들, 5급 서기관들 다 도망갔어요. 도망간 천국백성.
구약, 신약 백날 해봐야 아직 이때는 신약 나오지도 않았어요. 집주인이 액션 합니다. 집주인이 새것과 옛것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새것과 옛것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노아방주를 봅시다. 노아방주에서 옛것은 옛날에 노아가 있었는데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서 그래서 그들은 살아났고 나오자마자 재물을 바쳐서 하나님이 흠향하셔서 그제부터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있어서 농사가 잘 됐습니다. 하는 이야기 이건 옛것에 속하는 것이고 새것을 이야기하면, 노아방주는 누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되고 노아도 예수님이 되고 거기에서 나와서 잡은 제물도 예수님이 되고 모든 것이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만이 새것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말은 베드로전서에 보면 나와요.
베드로전서3장 20~21절 보면,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노아의 날에 방주 예비할 동안에 나오지요. 노아 때 방주할 동안에 8명만 구원 얻었지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고 너희 구원하는 표라 했지요. 그런 이 모든 행동은 누가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거죠. 블랙박스를 가지고 와서 누가 해석하신 겁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입장에서 그 노아방주를 블랙박스를 해석을 다시 하는 거예요.
노아방주는 블랙박스 맞잖아요. 실제 일어났으니까. 그것을 경험했던 노아도 몰랐고 그 뒤 후손도 몰랐고 아무도 몰랐는데 새것 되는 예수님이 오셔서 그 블랙박스를 다시 끄집어내서 다시 해석해버리니까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관여하신 거예요. 노아구원에 대해서 예수님이 관여해서 결국 노아도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노아만 관여하고 오늘날 대전 땅에 사는 우리는 관여 안합니까? 역시 주께서도 우리를 관여하는데 우리는 눈만 뜨면 내 인생은 내가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