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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하나님의 인도하심 130925우리교회에스겔

하나님의 인도하심 130925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스겔 20:40-44)

이근호

13-09-25 21:25

하나님의 인도하심

2013년 9월 25일 본문 말씀: 에스겔 20: 40-44

(20:4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에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에서 너희 예물과 너희가 드리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20:41)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흩어진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여러 나라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20:42) 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20:43) 거기에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

(20:44)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약은 뭔가 이동하고 있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나와서 바벨론 나라로 포로잡혀 가고 거기서 다시 나와 약속의 땅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하나님께서는 책임지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신약은 이런 이동이 없습니다. 특정 지점이나 특정 시간을 준수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냥 매일같이 되풀이되고 제자리 뛰기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난다고 하십니다. 어디 이동하지도 않습니다. 특정 날짜를 준수하지도 않습니다. 일상의 반복적인 삶이 곧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으로 전달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구약의 말씀이 어떻게 반복적인 일상의 삶 속에 녹아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문제를 더욱 간추려 정리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어떻게 오늘날 성도들의 반복적 삶 속에서 완성된 형태로 정리할 수가 있을까요? 구약에 나오는 이동하는 이스라엘 모습은 곧 ‘하나님의 이름’의 이동성으로 야기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되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범죄한 그 땅에서, 다른 땅으로 이동시키고, 그 땅 마저 정죄하므로서, 정죄받을 땅에서도 죄가 없어진 백성만을 자기백성으로 간주하고 죄가 없는 땅으로 주의 이름이 이동되는 겁니다. 이러한 이동성이 과연 신약 시대에 실제로 완성했느냐를 살펴봐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5:2-3에 보면,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신약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동성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이동성은 현실적으로 설정이 불가능합니다. 구원이 마무리된 상황을 구약적 이동성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해내신 그 모든 것이 이 현실세상을 낯선 구조로 변형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한 쉬운 예를 들면, 바다 속에다 아쿠아리움을 만들어놓은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아쿠아리움은 해저 테마수족관을 말합니다. 투명한 터널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투명한 벽 너머로 사방팔방, 물고기들이 헤엄치면서 바닷속 세계를 마음껏 펼칩니다. 관람객들은 여유롭게 그 투명한 터널을 지나가면서 바닷속 전부를 파악할 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표현은 이동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요한계시록 관점으로 전환시켜 보면, 성도는 어디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투명한 터널 안에서 영원한 반복적으로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터널 안에서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은 없습니다. 이사야 41:4을 보면,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처음과 나중이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곧 주의 이름 안에는 시간에 따른 자체적인 달라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동일한 원칙과 원리로서 구원의 방정식을 적용시키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 적용에 따라 바깥에 다양한 변화를 야기시킵니다.

예수님이 바로 오실 ‘주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미리 에스겔 시대에 작용해서 ‘주의 이름’으로 행하신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이든 에스겔 당시에 포로잡힌데서 귀환한 백성이든 간에 동일한 의식을 지니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남입니다.

바다 속 아쿠아리움 속에 거니는 관람객들처럼, 주변을 짓누리고 있는 그 깊은 바닷물은 무게는 곧 하나님의 진노의 무게로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투명한 유리벽을 통해서 온갖 바다고기들이 뛰놀고 헤엄치는 것을 분명하고 늘 생생하게 느끼면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성도의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진노임을 알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난무하는 세상 한복판을 성도는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홀로 있는게 아닙니다. 그 진노로부터 막아주시는 ‘주의 이름’과 함께 있습니다. 투명한 터널 속 성도 곁에는 바다 속의 해초나 물고기는 전혀 없습니다.

단지 안전한 ‘그리스도 십자가 안’일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구약 말씀을 대단히 오해했습니다. ‘주의 이름’이 뭔지를 몰랐기에 ‘말씀의 완성형’도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본국으로 귀향해서 소산물의 첫열매를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면서 받는다는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첫열매’란 예수님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 받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받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본국 귀향은, 예수님(주의 이름)의 일대기를 통해서 볼 때, 곧 죄의 세계에서 의의 세계로 귀향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에서 생명으로 귀향입니다.

요한복음 5:24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소산의 첫열매를 드린다든지 특정 지점으로 이동해서 주거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신 일이 아닙니다.

즉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이 세상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특별한 영적 영역을 따로 마련하시는 것에 성공하시고 바로 그 영역 속에서 오늘 에스겔 본문 말씀을 다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 외에 아무 것도 없는 자에 한해서 마태복음 7:22-23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온통 저주받을 짓들로 충만함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9-26 22:36

58강-에스겔20장 40-44(하나님의 인도하심)13092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0장 40절에서 4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0:40-44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찌라 거기서 너희 예물과 너희 천신하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중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의 흩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열국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내가 너희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고 거기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을 인하여 스스로 미워하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계획이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체험되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체험되어진다는 말은, 이 성경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그 일하심이 성도의 인생 속에 스며들게 되면 성도가 일기장을 쓸 때 오늘 본문의 내용이 일기로 나와야 됩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성도의 인생이란 자기가 일구어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하심의 결과로서 성도의 인생이 장만되거든요. 그렇다면 에스겔 20장의 이 본문의 흐름, 이 진행과정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이 뜻대로 실시한다면 성도라는 우리의 인생도 방금 언급한 이 내용이 성도 안에 반복해서 일어나야 되겠지요.

그러면 그 일어나는 것을 성도가 캐치해서 일기를 쓸 때 그 내용이 그대로 일기장에 적히는 것이 앞뒤가 맞고 정상적인 이야기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오늘본문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인도하여 첫 열매로 받으시고 흩어진 열국 중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것인데 그때 너희들이 너희 죄에 대해서, 너희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미워할 것이다.’ 그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 스스로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이 내용이 오늘 본문이잖아요.

그러면 이것이 일기장에 그대로 나와야 된다는 말이지요. “오늘은 맑음. 아침 일찍 회사에 갔다. 회사에 가서 이 몸과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기도했다.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회사라는 곳이 내가 영원히 살 천국은 아니었음을 또 다시 깨닫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사에서 남한테 지지 않기 위해서 내 이름을 위해서 남과 경쟁했다. 점심시간쯤 되어서 나를 돌아보니 내가 왜 그리 미워지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행동과 죄에 대해서 주의 이름께서 우리를 용서했기에 하루를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

일기가 그렇게 되어야 되거든요. 나로부터 출발해서 내 영광으로 돌아오는 일기가 아니라 나로 출발하는 것도 기대하되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주님이 친히 나를 건져내야만 구원될 정도로 우리는 스스로 밉상 될 수밖에 없는 행동과 일상의 사고방식이 하루 일과를 통해서 계속 발산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일기장에 낱낱이 적으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큐티입니다. 말씀은 옳은데 그 말씀에 따라 붙이지를 못하는 우리 죄악 된 육신의 모습을 상호비교해서 병행해서 기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게 될 때 우리가 뭘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 우리 인생이란 것은 내일 되면 또 이 생활의 반복이거든요.

분명히 우리는 제자리 뛰기 같고 뭔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발전보다도 그냥 제자리에서 되풀이되는 현상인 것으로 보이는데 에스겔에 보게 되면 어떤 지점에서 다시 다른 지점으로 뭔가 이동하는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하는 방정식이 뭐냐는 겁니다. 방정식, 어디에 적용해도 다 같은 원칙을 찾아내는 것,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 원칙을 찾아내야 되겠지요. 찾아내는 그 작업 중에 하나가 우리의 생활은 매 일상 같은 생활인데 성경 본문에는 뭔가 이동한다는 느낌, 이쪽에 살다가 다른 쪽으로 가고, 이렇게 이동한다는 점에서 반복되는 우리의 삶과 일체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방정식으로 하려면, 우리 일기장속에 주님의 뜻이 늘 담겨 있으려면 우리는 고정되어 있는데 성경말씀은 뭔가 우리를 이동시키고 데리고 다닌다는 거예요. 21세기에 이스라엘은 별 의미 없잖아요. 그 팔레스타인 땅은 의미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에스겔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본문말씀을 알기 위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야 되는 겁니까? 첫째. 과거로 돌아간다. 두 번째, 이 말씀이 지금의 현재가 되고 있다. 어느 쪽입니까? 지금 현재가 되고 있다는 말이지요. 현재가 되고 있으려면 그냥 현재가 되고 있다고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반복적인 삶을 사는데 이 에스겔의 말씀은 어떤 특정지역이 있어요.

“너희의 흩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열국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내가 너희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분명히 특정 지역이 있다는 말이지요. 특정지역에 있는 과거의 이야기를 반복적인 오늘날에 어떻게 방정식으로 일치시킬 수 있는가, 그 방법이 뭔지를 생각해 봐야 되겠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약간 도발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본문 40절에 중간에 보면 “거기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찌라 거기서 너희 예물과 너희 천신하는…….” 천신이란 것은 새롭게 드린다는 뜻입니다. “너희 천신하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라고 했을 때 거기 첫 열매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본문에 첫 열매를 아무리 살펴봐도 서른세 살 먹은 목수의아들은 안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이 첫 열매가 예수님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구약의 과거의 지리적이고 시간적인 제약 속에서 어딘가 찾아 헤매야 돼요.

성전 짓고 그 지어놓은 예배당에서 뭘 바친다는 구약적사고방식속에, 사실은 이단이죠, 그런 구약적사고방식속에 여전히 매여 있으면서 그것을 구원의 방정식이라고 움켜쥐고 있다는 말이지요. 구원의 방정식, 그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구원의 방정식은 우리가 뭘 한다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의 모든 요구조건이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합당하게 다 이루어졌습니다. 여기42절에 보면 “내가 너희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이 말씀이 오늘날 지금 우리에게 적용되려면 어떤 아가씨가 회사 출근하다 말고 비행기타고 이스라엘로 가야돼요. 이 말씀대로 하려면 일단 더러운 바벨론 땅으로 갔다가 바로 비행기 타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할까요? 만약에 아가씨가 아침에 출근하다 말고 인천공항으로 가서 국제선비행기 타고 이스라엘로 가서 에스겔 20장의 이 말씀대로 “내가 너희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해서 그 인도하는 땅이 이스라엘이고 인도받아야 되는 땅은 바벨론 땅이고, 바벨론인 이란을 갔다가 다시 이스라엘로 다시 가면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겁니까?

그렇게 하려면 그 아가씨는 그것만 하면 안 되고 자기의 첫 열매, 자기의 텃밭에 농사지은 것들, 호박이나 강냉이나 고추 같은 것들이나 양을 키운다면 양의 첫 새끼를 가져가야 됩니다. 빈손으로 가면 안돼요. 호박잎사귀 떼 가지고 이스라엘로 가서 성전에 바쳐야 됩니다. 그래야 에스겔 본문말씀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그렇게 할까요? 그것이 구원의 방정식이고 구원의 원리입니까? 앞에 첫 열매는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해서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첫 열매가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뒤에 나오는 “내가 너희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이 개념전부가 새롭게 바뀌어야 돼요.

열국들이 오늘날 220여의 나라, 그것이 열국이 아니고 땅도 지상의 어느 특정지점을 하나님이 맹세한 땅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첫 열매도 우리가 받는 봉급 10퍼센트도 아니고 그 다음에 41절의 “너희의 흩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낼 때에” 여기서도 흩어진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에스겔에서 지리적으로 흩어져 있는 사람을 실제적으로 바벨론이나 앗수르에 잡힌 사람들을 본국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온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더라도 이것을 오늘날 성령 안에서는 이 말씀이 그대로 반복해서 되풀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반복해서 되풀이한다는 그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는가를 물으신다면 요한계시록 1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5장 2, 3절에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고 찬양을 합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하려면 거문고 있어야 되고 기타도 있어야 되고 불이 섞인 유리바다가 실제로 있어야 해요. 그런데 불이 섞인 유리바다는 실제로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어요. 우리보고 해석 제대로 하라는 거예요. 우리보고 기존의 해석했던 그 의식과 사고방식을 수정하라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구약말씀이 이해가 잘되나?” “잘 되지요.” “어떻게 이해되는데?” “이해될 수밖에 없지요. 자기백성이 팔레스타인 땅에 살다가 바벨론에 가서 살다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흩어진 이스라엘 혈통들을 모아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약속의 땅에서 사는 것, 그게 뭐가 어렵습니까? 그렇게 해석하면 끝나지요. 그게 옳은 해석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서 에스겔을 보신다면, 지금 에스겔을 다 그렇게 해석하거든요, 그렇게 하면 그것이 틀렸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석하고 싶어 하는 네 자신이 바뀌어야 된다는 겁니다. 네가 그런 마음이 바뀌지 않는 이상 ‘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정식을 원해.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이 뭔지가 궁금해.’ 백날 궁금하고 방정식을 원해도 그것은 구원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뭔가 수정이 필요하지요. 이게 안 바뀌니 십일조를 첫 열매라고 해서 바치고 있고 구약적사고방식이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을 수정하는 과정, 방법에서 첫 번째로 이야기한 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5장 2, 3절의 말씀을 이야기한 겁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의 시간에는 우리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구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우리 성령 받은 신약의 성도라면, 예수를 진짜 믿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성령 받아서 진짜 예수 믿게 된 사람이라면 우리의 안목이 인간들의 시간관에서 탈피, 탈출해야 됩니다.

이사야 41장 4절에 보면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이 없는데 우리는 괜히 시간을 따지면서 과거는 어떻게 현재는 어떻게 미래는 어떻다고 따져버리면 문제는 에스겔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걱정하지 말아야 될 것을 가지고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아까 요한계시록 15장 2절의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아직 그런데 가보지 않았는데 아쿠아리움이 있어요. 바다의 풍광을 투명한 유리를 통해서 볼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이 있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니 투명한 터널이 있어요. 그 주변에는 온통 전청과 벽체가 다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서 바다 속을 걸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물이 투명하게 있는 그 벽 때문에 다 비치지만 물이 들어오지 않고 말끔합니다. 공기도 물론 있고요. 오징어, 상어가 헤엄치는 것이 다 보이는 거예요. 유리벽 무너지면 바닷물에 잠겨서 다 죽겠지만 스릴 느끼면서 보는 것이 있답니다.

자기 머리 위로 상어니 고래니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이는 바다 속의 생생한 체험을 하는데 그게 아쿠아리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 삶이 그런 거예요.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그러니까 이것은 이방나라만 생각하지 말고 현재 이 모든 세상을 바다라고 보고 우리는 투명한 터널 속에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함께 길을 가고 있다고 봅시다. 그러면 그 투명한 유리벽에서 온갖 유혹과 시험이 다 온다는 말이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같은 것이 막 화살을 쏘고, 우리를 조롱하고 노리듯이, 온갖 성공과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 마치 상어가 노니는 것 같은 그 한복판을 걸어가는 거예요.

걸어가면서 우리는 뭘 보느냐 하면, ‘아, 저기서 까불고 있는 저 사람은 백화점의 저 화려한 명품 백 때문에 저렇게 하나님도 버리고 저게 좋아서 저걸 사는 재미로 삼는구나. 저쪽 사람은 노름 빛이 팔천만원인데 엄마 재산 탐내서 엄마 죽이고 형도 죽였구나.’ 이런 것을 터널 지나가면서 다 보는 거예요. 이게 터널이라는 것이 중요해요. 터널 속에는 시간이 없어요. 우리가 지금 시대가 아니고 백 년 전의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조선시대에 한명회는 어떻게 살았고, 김종서는 어떻게 살았고……, 우리가 조선시대에 살았든, 신라시대에 살았든, 김유신이 어떻게 살았든, 선덕여왕이 어떻게 했든 간에, 그 시간 없는 터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마치 유리바다 안을 통과하는 것처럼 거기서 어린양과 더불어 사는 겁니다.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이 터널 이야기를 앞당겨서 에스겔 그 당시의 성도한테 적용시켜 봅시다. 그러면 에스겔 당시의 일반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비록 바벨론에 잡혀가지만 언젠가는 주와 함께 올 것이다.’라고 할 거예요. 그것은 예수 안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와 봐야 또 마찬가지입니다. 와 봐야 바리새인 되고 사두개인만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보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가 오늘날 똑같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로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고마워한다고 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인데요, 22절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할 때에 그 때에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걸 아쿠아리움으로 봅시다. 지금 우리는 상어도 놀고 새우도 놀고 갈치도 노는 그 한복판을 지나갑니다. 우리의 몸은 물에 안 젖고 말끔해요. 왜, 터널이기 때문에 물이 스며들지 않아요.

그런데 투명하게 보이는 곳을 보니까 어떤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전도하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설교하고 주의 이름으로 예배당 세워서 목회하고 있고 주의 이름으로 선교사 보내고 있더란 말이지요. 그것을 보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밉상과 핍박과 유혹을 받는지 알 수가 없어요. 저쪽 보니까 어떤 상어는 예수 믿고 부자 되어서 거들먹거리고 있는 상어도 있고 이쪽 보니까 예수 믿고 병 낫는다고 안수하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밝히 볼 수 있는 거예요. 왜냐, 예수 안에서는 모든 것이 무장해제 되고 예수 안에서는 오직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십자가용서 외에는 어떤 것도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을 용납을 안 해요.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 빼놓고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우리 곁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예수 안이라는 터널만 빈 몸으로 무장해제 된 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우리가 이걸 행했습니다. 5년 전에 뭘 행했고 10년 전에 뭘 행했습니다.” 그런 것을 완전히 다 털려서 우린 완전히 강도만난 사람 같아요. 다 털리고 당장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고 아무것도 지킬 수 없고 아무것도 지킬 줄 모르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매 비로소 바깥 풍경을 보니까 비로소 옛날에 내가 살았던 그 모습들을 지금 터널 안에 못 들어온 사람들이 부지런히 종교생활 하고 소위 신앙생활이라고 한답시고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의 눈으로 관람하고 관광하듯이 다 보게 하시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들어서 “너희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분명히 언급했거든요. 권능 있는 말씀이에요. 악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했고 그 악한 열매는 뭐냐,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실제로 쫓아냈어요.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습니다.” 실제로 권능을 행했어요.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습니다.” 실제로 선지자노릇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구원의 능력도 아니고 그냥 폼 잡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목격하면서 이 터널을 가게 하신 겁니다.

이 터널 속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저 반복밖에 없어요. 그 터널 안에서 일기장을 쓸 때 우리는 뭘 쓰는가? “주님이여, 내가 터날 밖의 저 모습을 보니까 내가 지금 내 육신으로 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군요. 하지만 이 터널, 오직 그리스도 안에,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한테는 세상에서 난 죽은 자고 저쪽 사람은 십자가로부터 죽은 자로 인정받을 것이고, 그 사람들 보기에 나는 이 터널 안에 있으면서 이미 죽은 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자, 그들 보기에는 죽은 자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영생을 얻은 자로서 살아갑니다.”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겁니다.

방금 이 터널이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이게 얼마나 무서울까요? 저는 요나를 봅니다. 요나가 바닷물 속에 들어갈 때 그는 바다의 무게를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죄에 대한 진노였습니다. 그런데 물고기 속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무거운 하나님의 진노도, 이 그리스도 터널 안에 있을 때는 아주 가뿐하게, 그 진노를 진노라고 충분히 언급하면서도 우린 진노를 받지 않고 진노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으로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일같이 반복되는 겁니다.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에 진노가 오늘도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는 고백을 내 뱉으면서 매일같이 똑같은 생활, 똑같이 영광 돌리고 똑같이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저 바다에서 바다 속에 있는 터널로 이미 옮겨졌습니다. 옮겨졌기에 우리는 바다가 어떤 모습의 바다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세상을 너무나 잘 아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에스겔에 나오는 ‘너희의 첫 열매를 받을 것’이라는 이 첫 열매는 우리가 땅에서 난 수확의 첫 것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을 그 터널 안에서 비로소 마음껏 정답이라고 외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열방이라는 것은 세상 전부를 말하는 것이고 약속의 땅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예수 안이 바로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런가?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여기서 ‘내 이름을 위하여.’ 할 때 바리새인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인줄로 알았어요.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내 이름’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게 사도바울도 성령 받고 난 뒤에 그 사실을 알았어요. ‘아, 이게 여호와의 이름인줄 알았는데 나사렛 예수가 바로 여호와니까 그렇다면 에스겔 20장 44절에 나오는 내 이름이 곧 주님의 이름이구나.’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앞에 있는 40절, 41절, 42절, 43절을 뒤에 있는 이름이 다 이루었어요. 그 이룸 안에 우리가 함께 놓여 있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40절, 41절, 42절, 43절,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다 이루어진 거예요. 주와 함께 있으면 모든 성경말씀은 다 이룬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해석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구약 해석을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여기 ‘내 이름’에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해석이 절로 온전하게 다 되는 거예요. 예수 이름을 안 집어넣으면 우리는 기다려야 됩니다. ‘또 언제 천국가지?’ 기다려야 돼요. 기다린다는 말은 우리에게 따로 나의 역사, 나의 시간을 또 쥐고 있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 에서는요, 아까 본 이사야 41장 4절의 말씀처럼 ‘태초에도 나요 나중에도 나요 지금도 나요’ 그 창조하신 하나님이 바로 주님이고 옛날 홍해를 갈랐던 그 주님이고 모세와 함께 있던 그 주님이 주님이요, 베드로와 함께 있고 엘리야와 함께 있던 그 주님이 주님이고 그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있고. 성령 받게 되면 이것이 인정이 되는 겁니다. 그만큼 십자가라는 것이 우리 예상 밖의 놀라운 변화를, 우리가 예상하지도 못할 그 이상의 놀라운 우리 입장의 변화를 우리에게 제공해 줬습니다. 바로 십자가라는 게.

우리가 십자가의 깊은 뜻을 잘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안다고 해놓고는 또 내 역사, 착해야 되고, 어때야 되고, 또 따지고, ‘오늘도 안 착해서 벌 받았다.’ 이렇게 해서 불안- 불안 하게 살아가는데 불안하게 살 것도 아니고 이미 끝난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십자가를 제대로 알아버리면 아까 그 바다 속의 터널처럼 그곳이 바로 십자가 안이고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베푸는 모든 혜택을 공유하고 같이 즐기고 있고 같이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십자가를 너무 작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가 우주의 전부에요, 전부. 이 우주의 전부라는 말이지요.

진노가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상관없어요. 저 상어가 내 속에 있지 않고 저 고래가 내 옆에 없다 할지라도 내 곁에 그리스도의 사랑만 함께 있다면, 그 용서만 함께 있다면 저 새우가 없고 저 멸치나 갈치가 없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둑이 터졌다고 봅시다. 둑이 터졌다고 본다면 눈으로 보던 그 세상 것이 내 곁에 오게 되면 우리는 고래, 상어, 하고 쥐고 있겠지요. 쥐면 뭐합니까? 그것자체가 하나님의 진노고 저주인데.

오르고 또 올라가, 아파트 넓은 것 사고 차도 새로 두 대 더 사고 세상 권력도 쥐고, 그러면 뭐합니까? 주식 값도 올라가, 삼성그룹에 취직하고, 그러면 뭐합니까? 그게 저주인데, 그게 세상과 함께이고 ‘그리스도와 함께’가 아닌데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처럼 따로 구분되는 거예요. 구분 되어서 ‘저게 바로 하나님의 저주, 진노의 증거물이다. 저건 축복도 아니야. 저건 죄짓는 거야. 저건 육신의 안목과 마귀의 유혹이야.’라고 바라볼 수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리, 그 자리만 마련된다면 교회가 있든 없든 그것은 우리한테는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다 이루었는데요, 뭐.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이미 도착지점에 와 있는 겁니다.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어요. 제발 세상 좀 안 부러워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안 부러워하면서. 그런 입장에서 우리는 마음껏 세상을 좀 보시기 바랍니다. TV도 보시고 보면서 ‘아, 저게 바로 저주받은 모습이구나.’ 뉴스 보면서 ‘저렇게 저주받는구나.’ 이걸 볼 때에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진노에서 그 진노를 막아준 예수님의 십자가가 매일같이 새롭게 고마워질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성령 받고 제자들도 성령 받고 스데반집사도 성령 받았는데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만끽하면서 세상 부러워하지 않고 늘 기쁘고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저희들도 그렇게 살도록 날마다 성령께서 새로운 안목으로 저희들에게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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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3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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