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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09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6-삼위일체와 어거스틴자유게시판[신학]

201309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6-삼위일체와 어거스틴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9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6-삼위일체와 어거스틴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는 어거스틴 이야기해봅시다. 그렇게 삼위일체가 종결되어서 본성은 두 개고 위격은 하나에요. 마지막 결론은 예수그리스도는 로고스가 육신이 된 게 아니고 말씀이 사람이 됩니다. 사람과 인간이 한 위격 속에 있으면서도 혼합되거나 섞이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그러니까 삼위일체는 신비지. 그러면 신비가 구원합니까, 아니면 예수의 피가 구원합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신비를 믿으라고 했습니까? 뭐가 눈앞에 보인다? 십자가가 보인다.

십자가가 뭡니까? 바로 헬라주의철학에서 나오는 이것으로 헬라인들은 지혜를 원하고 유대인들은 실제로 하나님이 살아있으면 모든 게 기적이라는 기적을 원하지만 우리가 전할 것은 예수님 못 박혀 죽은 십자가밖에 없어요. 나는 너희들이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강도가 됐던 창녀가 됐던 상관없어요. 구원받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어요. 부활도 아니에요. 오직 십자가밖에 없어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거스틴이라는 분이 앞에 삼위일체 시대를 거쳐 왔는데 뭔가 진짜 천재라면 삼위일체 문제 있다고 나와야 될 건데 아까 끝에 약간 이야기했잖아요. 천주교에서 이단을 말하기를 어떻게 핍박이 왔을 때 예수님을 배신해놓고 세례를 줄 수 있느냐? 과연 그 세례가 하나님 주신 세례냐. 못 믿겠다. 그 이단 도나투스란 이단이었어요. 사실은 이단이 아니고 소수파지요. 우리나라에서 보면 재건파. 순교도 하지 않은 목사한테 안수 받은 목사는 다 엉터리다.

거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아니다. 교회를 완전하다고 보면 안 돼. 이게 두 개의 도성, [하나님의 도성]이란 책. 그 내용이 천국이냐, 교회냐, 세상이냐? 이 셋이 어떻게 다른가? 여기서 어거스틴이 강조한 것은 역사성, 역사의 단회성이거든요. 역사는 흘러간다는 거예요. 그냥 묵시가 아니고 역사를 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천국이냐고 하지 마라. 계속 가자. 이 교회가 천국이라고 하지 마라. 어차피 교회란 부족하고 미흡하다. 완전한 것은 하나님의 도성이지만 그 완전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었기에 따라서 교회는 세상적인 안목에서 완전함을 본다면 미흡하지만 완전한 하나님 입장에서 교회를 세웠다는 점에서 교회는 완전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말은 어렵지만 말 되지요.

하나님의 도성이란 책에서 어거스틴은 관점을 두 개의 관점으로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그전까지 삼위일체논쟁이 있었지요. 삼위일체논쟁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권력적으로 정리정돈 끝났어요. 삼위일체 안 믿으면 무조건 이단이에요. 그 다음에 삼위일체가 정리되었으니까 삼위일체를 내용으로 품으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 되겠지요. 만두피 만들고 만두 속 만들었습니다. 만두가 되려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피에다 속만 포장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배당 교회 해놓고 정통적인 교회가 되려면 삼위일체만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이단인지, 삼단인지 또 다시 논쟁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때부터 생긴 것이 바로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교회가 타락했다는 이 말도 기존 교회사에서 이야기한 것이고, 제가 보기에는 타락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타락할 필요가 없어요. 인간이 원래 그런 거예요. 그동안 아닌 척 했을 뿐이지 제 성질부리는 겁니다.

게르만족이 위에서 내려왔어요. 어거스틴 당시에 왕국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게르만족이 내려온 것은 위에 훈족이란 게 있어요. 몽고족이 우랄산맥 넘어서 지금의 헝가리, 폴란드를 치고 들어옵니다. 헝가리란 나라이름이 훈족에서 온 거예요. 그래서 치고 들어오니까 위에 덴마크, 노르웨이, 현재 독일에 살던 게르만족이 밀리니까 살기 위해서 남쪽나라로 내려온 거예요. 게르만족이 여러 종족으로 나누는데 그 중에 반달족이 갈 데 없어서 알프스 산 넘어서 이태리와 막 넘어오고 아프리카 북쪽까지 카르타고까지 로마제국 전체를 침공했습니다.

그럴 때 로마는 313년 밀라노칙령에 의해서 기독교는 이미 로마 국교로 됐지요. 국교는 뒤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됐지만 사실은 그전에 313년에 밀라노칙령에 의해서 기독교 국가로 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 안 믿으면 공무원시험을 못 치니까. 요즘 그랬으면 교회는 신이 나겠지요. 아마 이명박 전 대통령이 원했던 것이 그게 아니었던가 싶어요. 기독교 국가를 만드는. 기독교 국가면 뭐합니까? 나라 다 빼앗겼는데.

나라 다 빼앗겨서 게르만족이 그냥 밥 먹기 위해서 들어와 보니까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게 아니고 문화와 아름다운 종교로 산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많은 주교를 데려와서 네가 믿는 종교를 가지겠다고 해서 아리우스 계열의 기독교가 드디어 생겼습니다. 거기서 나온 게 프랑코 왕국이 생겨요. 현재 프랑스라고 보면 돼요.

이태리 있고 이쪽은 프랑스, 내려가면 스페인, 영국 있고, 위쪽에 덴마크, 스칸디나비아 여기까지 기독교가 퍼진 거예요. 이쪽은 비잔틴 제국이라 해서 476년인가 그때에 나라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자기는 로마제국이라 버티고 있고 동로마제국은 거의 천 년까지 계속 가요. 기독교 교황은 땅덩어리 하나 얻었어요. 쭈그리고 앉아 있고. 그러니까 교황은 중요하지 않고 왕이 기독교의 수장 노릇하는 그런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어거스틴 입장에서는 이런 판에 그 기독교 신자들에게 말하기를, 사실 어거스틴이 죽은 것도 반달족 침공으로 죽었어요. 이런 판에 이야기할 것은 이 나라가 눈에 보이는 세계가 결코 영원한 천국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뭘 준비해야 되느냐? 교회 다니지 말까? 그것도 아니라고 했잖아요.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으니까. 여기서 어거스틴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선과 악에 대해서 분명히 알지 아니하면 신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삼위일체논쟁에서 개인의 선과 악은 이야기 안 하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성부, 성자, 성령 이야기지요. 그게 정리되고 난 뒤에 이제는 그것은 만두 속처럼 교회가 그걸 안으면 교회지요. 일단 교회가 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교회가 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이제는 개인적이고 내부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일종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 모른 체 할 수 없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도덕적인 문제는 결국 선과 악에 대해서 규정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는 선이 무엇인가? 이것은 교회에 다니나 안 다니다 다 이야기해요. 선은 다른 게 아니고 하나님이 선이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니까. 문제는 선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악이 어디서 생기느냐는 문제에요. 악의 원천이 뭐냐는 겁니다. 조르아스터교가 나온 마니교에서는, 어거스틴이 한 때 심취했다는데, 선한 신이 있고 악한 신이 따로 있는데 그 둘이 투쟁하고 있다는 겁니다. 엠페도클레스란 철학자가 기원전 400년경에 있었어요. 그쪽은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대립으로 돼있다. 4원소가 대립한다고 했어요. 헤라클레이토스도 그렇게 이야기했고. 선과 악은 대립하는 것이다. 원천은 악한 신 따로 있고 선한 신 따로 있다고 본 거예요.

악한 신 따로 있고 선한 신 따로 있으면 결국은 신은 그 자체가 선하지 않은 게 돼요. 이 세상에 악이 있으니까.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이런 게 있잖아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그런데 악이 왜 있느냐 말이죠. 이걸 만약에 주교나 설교자가 정리해서 알려주지 아니하면 이것은 교인들로 하여금 제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악의 문제를 언급하게 됩니다.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제일 먼저 전제되는 게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정박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까? 정박아의 특징은 웃는 거예요. 정박아가 빨간불에 건널 때 경찰이 “벌금 3만원입니다.” 하면 헤헤 웃지요. 바보 아니야. 끝나는 문제지요. 갓난애가 오줌을 못 가린다 해서 애를 팰 수 없는 거예요. 능력 자체가 오줌 가릴 수 있는 능력이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와 선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려면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바보나 어린애 되면 안 되잖아요. 분명히 선을 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을 택했을 때는 지옥이라는 게 있고 심판과 저주가 의미가 있잖아요. 맴매한다가 의미가 있다고. 저주가 맴매 정도가 아니지만 영원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데.

제가 얼마 전에 안식일에 나무하는 이야기했잖아요. 안식일에 나무했으면 우리 같으면 “안식일에 나무했네요. 법에 어긋났으니까 벌금 5만원. 다음부터는 하지 마세요.” “내가 살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다음부터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이렇게 계도하든지 벌금 물리든지 하면 되는데 어떻게 했습니까? 죽여 버렸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안식일에 나무하고 말고 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어요. 그리고 죽을 때 모세가 일가친척 아는 사람들 있으니까 죽더라도 당신 명예를 생각해서 따로 돌로 쳐 죽인 게 아니고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돌 던져서 죽이지요.

그러면 돌 던진 사람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왜 던졌는지도 모르고 던졌다. 모세가 던지라고 해서 던졌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모세가 던지라는 게 율법이지 안식일을 지키라가 율법이 아니겠지요. 목사가 십일조 하세요가 율법입니까? 십일조 하라가 율법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신구약에 십일조 하라고 안 나오지요. 그냥 안식일에 나무했으면 욕하세요. 욕은 하겠는데 저 사람 어떻게 해야 돼요? 죽여 버리세요. 이것도 되는데 직접 돌을 들고 안식일에 나무를 하다니 하고 때려죽인다는 말은 결국 뭔 뜻입니까?

요한복음 8장에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할 때 그 사람들이 돌로 쳤습니까? 안 쳤지요. 그런데 민수기에서 돌로 쳐 죽이거든요. 돌을 율법대로 쳐 죽일 때 안 치는 것도 죄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율법대로 살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율법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남이 어겼을 때 그 처벌에 과감하게 다가설 수 있는 자격자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없게 한 줄 알아요? 오직 누구만 처벌자와 심판주가 됩니까? 오직 예수님이죠.

그런데 인간은 법을 줘도 법을 못 지키는 거예요. 교회사에서 사람들이 교회법을 만들었어요. 교회법을 만든 자체가 결국은 말씀은 생각 안 하고 말씀 생각하는 대신 교회의 법을 지킴으로서 선한 사람이 되겠다는 거예요.

어거스틴이 볼 때에 삼위일체로 이미 교회가 됐습니다. 이미 내부인테리어 끝났어. 삼위일체만 지탱하고 유지하면 무조건 구원되는 교회인 줄 동의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교회가 선해야 되고 악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자유의지로 뭘 할 건데요? 엄마가 저녁하면서 “젓가락 치우고 포크 하나씩 쥐라.” “엄마 왜 포크 쥐는데?” “피자 사왔다.” 포크를 쥐라는 말은 젓가락으로 먹을 저녁이 아니고 피자, 빵, 그런 음식이란 말이잖아요.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이 말은, 자유의지가 있을 경우에만 진정한 자유가 된다는 거예요. 여기서 자유란 죄에서부터 벗어난 것을 말하는 거예요. 자유의지가 없으면 죄에서 벗어나는 삶은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정박아가 그냥 웃으면서 밥 흘리면서 먹을 때 그게 과연 자유겠느냐?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인간을 만들었겠느냐? 그게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흘리지 말고 똑바로 먹어야지. 이게 자유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 주신 죄에 대한 자유란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실제로 전에는 죄를 지었던 의지로 포크로 실제로 착한 일만 골라서 해내는 그러한 열매를 맺을 때 그게 진정한 하나님이 원하는 자유라는 겁니다. 동의해보실래요?

어거스틴을 루터와 캘빈과 기독교가 좋아하는 마음에 드는 이유를 알겠지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해줘서 자유의지로 악을 택하지 않고 선을 집을 때 누구의 자존심과 인격이 폼이 나겠어요? “내가 예수 믿는 값을 하는구나. 성경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라는데 딱 바로 나네. 다른 사람은 예수 믿기만 하는데 나는 믿고 거기에 합당한 선한 거룩한, 거룩이란 베드로전서에 나오듯이 거룩하라 했으니까 거룩한 삶을 실제로 사니까 예수 믿는 성도된 보람이 여기 있네. 전에는 욕을 하던 입술로 이제는 혀와 입술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시와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 나야말로 성령이 임하고 구원된 사람이 아니고 또 누가 있겠는가. 정말 기쁘다.”라는 죄에서 벗어났다는 자유가 그것을 제공해야 그게 온전한 신학이라는 것이 어거스틴의 자유론입니다. 어거스틴을 안 좋아할 수가 없지요.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교회란 세상적으로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님 봐서는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부족하고 미흡한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곳에서 점점 더 훈련받고 깨우치게 되면 하늘로 올라가는 바구니로 충분하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너무 실망하지 마라. 그럴수록 우리는 교회 가야 된다. 부족하지만 교회에서 훈련받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러한 자유론에서 악은 뭐냐? 악이란 나쁜 짓이 아니고 선에 대한 모자람, 절대 선에서 빼기 3, 빼기 5, 빼기 7처럼 이 모자란 부분이 악이 되는 거예요. 큰 피자판 중에서 누가 좀 뜯어먹었어. 뜯어먹은 이게 바로 악이 돼요. 그러면 나머지는 피자입니까, 피자 아닙니까? 피자지요. 뜯겨도 피자잖아요. 인간이 나쁜 짓을 했습니다. 그러면 방금 이 방정식에 의하면 악이란 선이 약간 뜯겨나간 거죠. 그럼 이 사람은 나중에 예수 믿고 뜯겨난 부분을 자유의지로 메우면 되잖아요. 끝까지 참으시면서. 애초부터 악은 없어요. 선만 있는 거예요.

초승달이 달은 원래 신발 같은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애들이지요. 그런데 조금만 학교 다닌 사람은 이건 햇빛이 안 비쳐서 그런 거고 원래 달은 보름달이 원래거든요. 보름달은 선이고 초승달은 이것도 선인데 점선만큼은 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거스틴부터 하나님은 거론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은 거론할 필요 없어요. 삼위일체로 정리되어 해답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 필요 없고, 이제부터는 한 국가에서 한 교회에서 어떻게 인간이 인간답게 하나님 뜻에 따라서 선하게 살고 질서를 잡을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겁니다. 인간은 얼마나 윤리적일 수 있느냐?

어거스틴은 스콜라신학의 아버지지요. 그 다음부터 모든 신학은 이미 삼위일체를 알아서 이미 구원받은 우리가 실생활에서 각처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가에 집중해서 신학이 전개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영국사람 펠라기우스 논쟁이 교재에 있습니다. 84페이지에 펠라기우스 이론이 나오는데 먼저 말씀드릴게요. 어거스틴이 스스로 고백하기를 나는 이것에 대해서 모르겠다는 문제가 있어요. 인간의 영혼은 어디서 생겼느냐 하는 겁니다. 유전된 것이냐, 창조된 것인가, 창고 있다가 그때마다 빼내는 식이냐? 호빵 만들 때 밀가루 반죽에 앙꼬 넣잖아요. 밀가루는 부모로부터 오고 창고에 있는 영혼을 떼어 집어넣고 돌리고 뒤집고. 주전자에 밀가루 붓고 이것은 인간의 육체, 그 다음에 영혼 하나 떼어 집어넣으면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되는 이런 거냐. 그 문제에 대해서 자기는 확답을 못하겠다고 한 게 있어요.

우선 펠라기우스 주장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속에 영혼을 줬는데 그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줬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했어요. 인간에게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자질이 있다고 해야지 만약에 인간이 행한 것이 죄가 된다고 해버리면 인간은 그 소리 듣고 본성상 선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악을 행해서 교회나 사회에 국가에 해악을 끼치는 분위기로 몰아가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펠라기우스는 영국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현재 튀니지 북아프리카 사람입니다. 어차피 전부 다 로마 내에 있는 사람이니까.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플라톤의 상기설을 이용하되 자기는 조명설을 주장한 거예요. 플라톤의 상기설은 뭐냐 하면, 손에 만지는 뭔가 있다는 거예요. 뭔가 손에 잡히는 게 있는 거예요. 왜 있으냐? 이 말입니다. 여기 있는 내가 배고프다. 이러면 안 되고 배고픈 네가 왜 있느냐는 질문을 하자는 거예요. 왜 있어요? 모기 있다. 모기 왜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모기가 다른 데서 왔겠지. 날아온 모기가 다른 데는 왜 있었는데? 그것 말고 다른 데 또 있겠지? 다른 데 또 왜 있는데? 만드신 분이 있겠지.

여기서 더 나가봅시다. 왜 똑같지 않으냐는 문제에요. 왜 똑같지 않느냐와 왜 똑같으냐? 둘 다 질문이 돼요. 왜 우리는 모기가 아니냐? 인간도 모기도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하나님은 한 분이잖아요. 데미우르고스, 창조자가 하나에요. 창조자가 만들 때 왜 모기와 인간과 다르냐는 첫째 그 문제. 왜 인간들끼리는 똑같느냐는 그 문제. 하여튼 희한한데 다 시비 걸어요. 궁금하니까.

플라톤은 말하기를 그것은 형상이 달라서 그렇다. 모기라는 개체보다도 모기 형상이 먼저 하늘나라 창고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게 이데아 세계에요. 그 형상을 모방해서 모기가 나왔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왜 모기가 아니냐? 우리는 인간 형상 따로 있는 거예요. 인간 형상에서 우리가 인간이 되었다. 인간들끼리 닮은 이유가 똑같은 인간 형상을 분배하기 때문에 각자 속에 있는 어떤 이념의 세계, 추상의 세계, 관념의 세계가 준 형상이 있기 때문에 형상 있는 사람끼리는 언어로 대화가 가능한 거예요.

언어가 그런 것이 아니고 나중에 플라톤 이후에 윤리도덕 문제가 나옵니다. 그 당시 폴리스라 해서 도시국가니까 도시국가가 참주정치, 지도자 명령에 무조건 따랐던 그런 시대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반발한 것이 민주제도였어요. 오야봉한테 굴복하기 싫다는 거예요. 그전에 굴복한 이유는 농사 잘 됐거든요. 회사 월급 잘 주면 파업 안 합니다. “니가 사장이야.” 나올 때는 이미 월급이 시원찮다는 그런 뜻이에요. “니가 원장이면 다야.” 이렇게 나올 때는 제대로 대우 안 해준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그 당시에 기근이 있어서 제대로 백성들이 만족을 못하니까 날 때부터 귀족이야.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담은 귀족이 아니었다. 아담은 농사지었지 아담은 귀족이 아니었다는 이 말은 중세 때 농민들이 반란 일으킬 때 하는 구호가 그거에요. 언제 아담이 놀고먹었느냐. 아담은 밭 갈았지 너 같이 놀고먹지 않았다.

플라톤이 그런 이야기하면서 지도자 필요 없다. 이제는 내 주먹 내가 흔든다. 천안함 영화를 찍든 간섭하지 마라. 내 영화 내가 찍고 한다. 뭐 수사하지 마라? 수사한다. 권은희, 나는 내가 수사하겠다는 거예요. 나라가 뭔가 하나가 잡아줄 때는 법이 무서워서 빌빌거리면서 나쁜 짓 안 했는데 “누가 나한테 간섭해. 제 때 먹을 것도 안 주면서, 월급도 안 주면서 치워라. 내가 알아서 한다.” 하고 범죄가 일어나고 개판 된 거예요.

프로타고라스란 사람이 이런 소리했어요. 사람이 만물의 척도다. 꼭 불교 같아. 내가 옳고 그른 것은 누가 정한다? 이건 내가 정한다. 거기에 화가 난 사람이 소크라테스에요. 프로타고라스를 소피스트라 하는데 지식 팔아먹고 돈 받는 사람들인데 소피스트란 그 당시에 민주주의가 되다보니까 말발 센 사람이 법을 어길 수가 있어요. 말발 가르치는 학원 원장들이 소피스트에요. 돈 받고. 그걸 듣고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사람이 만물의 척도라고? 내가 물어볼게. 돼지가 만물의 척도라고 하면 기분이 좋나?” 사람이 만물의 척도라고 했잖아요. 그럼 모든 것은 사람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런 논리라면 멧돼지가 만물의 척도라고 왜 못 하느냐? 할 말이 없지요. 왜 할 말이 없을까요? 사람이 만물의 척도라 할 때는 결국은 내 자존심만은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네가 돼지다 이 말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은 돼지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지렁이가 만물의 척도라 하면 기분 좋으냐고 묻는 거예요. 소크라테스 똑똑하죠.

플라톤은 인간의 형상 속에 혼이 들어있어요. 그 혼은 원래 창조 속에 있었기 때문에 애들이 무지하다가 나중에 커서 그 이야기네. 10년 전에 누가 이야기했던 것을 이제 아네. 이게 상기설이에요. 애들이 오토바이 탈 때 교통순경이 와서 “너, 면허증 있어, 없어?” “없습니다.” “왜 없어?” “젊으니까요.” 나중에 크면 알아. 그런데 그 애가 10년 뒤에 교통사고 내게 되면 그때 교통신호를 지켜야 된다는 걸 알지요. 어릴 때는 그걸 미처 몰랐네.

상기설, 상기하자 육이오! 기억된 것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우리 속에 이미 있지요. 이미 있는데 계기가 안 되서 미처 발견 못한 걸 상기설이라 합니다. 인간에게 영혼이 주어질 때는 원천을 플라톤은 하늘나라 형상이라 했지요. 개혁주의신학을 신학교 때 뭐라고 배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 중에서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을 배웠지요. 신학교수들은 플라톤이 뭔지 몰라요. 그냥 은혜만 주면 납득되면 진리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게 플라톤철학입니다. 어거스틴보다 더 못해요. 그게 상기설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으면 우리가 미처 몰랐을 뿐이지 우리 안에는 항상 선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다만 포크가 문제인데 이제는 우리가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선을 행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어거스틴 입장에서 선하려고 한다면 뭘 생각해야 됩니까?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착해질 수 있다. 나는 찬양할 수 있다. 나는 감사할 수 있다. ‘있다’ 자기중심 있잖아요.

그래서 플라톤의 사상에 의하면 굉장히 긍정적이에요. 신은 선하지요. 선한 요소가 우리 속에 삽입되었지요. 우리는 자체적으로 선하지요. 우리가 미처 모르는 것은 악을 저지르는 이유는,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며, 우리가 얼마나 원초적으로 착한 존재며,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며, 우리는 나를 사랑하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된다는 지금 청소년 훈계할 때 하는 지도자들이 하는 이야기들, 교양강좌에서 강사들이 하는 이야기들, 그게 플라톤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이 플라톤 공부 하나, 안 하나 상식에 의해서 하는 거죠. “청소년들이여, 여러분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마세요. 여러분은 고귀한 존재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세요. 자기를 고귀하다 하세요. 나는 귀하다, 나는 귀하다. 함부로 몸 굴리면 안 돼.”라고 하시면 그 다음부터 상기설에 의해서 그 사람은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나서 국가와 인류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훌륭한 사람이 된다.

이 사상을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한테 배웠어요.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차선책입니다. 절대를 인간은 몰라요. 다만 두 번째 할 수 있는 대로 착한 일을 해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내가 진리라고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찾아가서 따지는 겁니다. 이게 진리라면 어떻게 됩니까? 답 못하잖아요. 니 꼬라지를 알라. 이 무지한 놈아. 그래서 네 자신을 알라는 델피스트에 나오는 격언을 소크라테스 때문에 유명해진 거예요.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차선책, 인간은 항상 뭔가 최선을 다했다 하더라도 최고의 선이 아니고 차선책. 그래야 계속해서 이데아 세계, 형상의 세계에 닮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까. 이게 어거스틴에 의하면 날마다 선을 자기의 강한 집념과 의지로써 악을 줄여나가면 선으로 변하는 그런 희망을 줄 때 그 교회와 국가는 미래가 보장되는 겁니다. 비전이지요.

여러분 이것이 특정 신학이 아니고 우리의 타고난 본성이에요. 타고난 본성을 틀을 맞추어서 논리적으로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어거스틴의 조명론은 뭐냐? 내가 보기에는 플라톤이 맞는 것 같은데 조명론은 뭐냐?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겁니다. 간만에 듣는 복음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의를 행할 수 없다는 겁니다. 루터가 좋아할만 하지요. 개신교가 좋아할만 하지요.

아까 펠라기우스는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다 했고, 어거스틴은 우리는 날 때부터 죄밖에 행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원죄를 이야기한 사람은 어거스틴이에요. 처음에 동방교회에서는 원죄를 주장하지 않았고, 터툴리안 쪽에서 약간 주장했을 뿐인데 희미하게 했고, 어거스틴은 확실하게 했어요. 인간은 죄인이다.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빛처럼 찾아오는 거예요. 빛을 비추는 건 조명이지요. 조명을 비추면 저건 내가 한 게 아닌데 주님이 하신 건데. 빛이 하신 거니까 은총이죠. 그래서 어거스틴은 은총을 이야기했고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선한 행함을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이건 복음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복음 아닙니다. 왜 복음 아니냐 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면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제대로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이제는 제대로 선한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어거스틴입니다. 개혁주의 성화론이에요.

이제 개신교 신학자들이 사도 바울 하다가 중간에 생략하고 어거스틴에서 너무 많이 뛰어서 갑자기 캘빈에 안착하고 그걸로 끝났지요. 어떤 점에서 그렇게 했을까요? 이 어거스틴의 논리가 굉장히 복음적으로 보이지만 이거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기어이 자신의 가치를 이리저리 돌리고 어떡하든지 간에 기어이 좋은 쪽으로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은 인간의 야심.

그런데 방금 한 어거스틴의 주장 있잖아요. 우리 속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은총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거예요. 은총을 안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지옥 가야 되고 은총 받은 사람만 천국 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어거스틴이 주장한 예정론입니다. 어거스틴이 그전에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논쟁하다보니까 예정론은 생각 못했는데 어거스틴이 본격적으로 인간의 윤리도덕을 이야기하면서 예정론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론을 하다보니까 조명 받지 못한 사람은 지옥 가야 되고, 이 사람들은 왜 조명 못 받았느냐 하면 처음부터 멸망당하기로 작정했기 그렇습니다.

어거스틴에서 예정론 나오지요. 그 다음에 은총론 나오지요. 그 다음에 은총 받은 사람은 받고 그냥 있으면 됩니까? 죽어있던 자유의지가, 악을 행하던 자유의지가 날이 갈수록 거룩한 행실을 맺을 있기 때문에 선하게 되겠지요. 다 되네. 다 되지요. 그러니까 개신교 입장에서는 어거스틴 이후의 신학은 필요치 않은 거예요.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지난 시간에 부산 공부할 때 어거스틴이 성경해석을 어떻게 한다 했습니까? 삼위일체로 해석한다 했지요. 성경 본문을 삼위일체로 해석한다는 자체가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에 어긋나지요. 모든 말씀은 누굴 겨냥합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이야기하는데 어거스틴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해석해야 돼요. 그게 만두 속이기 때문에. 결국 어거스틴이 노리는 것은 교회가 교회다울 때만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교회다. 그걸 눈으로 보고 싶은 거예요. 왜 보고 싶은데? 봐야 믿어지니까. 누가 예수 믿고 착한 일하면 그걸 보고 “나도 교회 가서 저 사람처럼 착해져야지.”라고 할 때만 교회가 전도가 되고 부흥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내가 온 것은 아버지 뜻을 이루려왔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맡겨준 사람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다 찾는 거지요. 옆에 사람 교회 가서 착했기 때문에 내가 교회 다녀야지.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왔다 합시다. 여러분 보세요. 이 집사님이 착하니까 저 사람이 따라서 교회 왔잖아요. 왜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까? 라고 설교해야 돼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일방적으로 십자가로 피로 그 다음에 그냥 왔다고 하면 안 되지요.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줬기 때문에 왔다고 하면 한 사람 전도했다고 자랑하려하다가 칭찬받으려고 생각하다고 그 설교 앞에서 한 사람 데려온 그 사람도 죄인이 돼야 되겠지요. 목사는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해야 된단 말이죠.

그런데 어거스틴은 그런 쪽으로 설교하는 게 아니고 모든 게 예수님 중심, 십자가 중심이 아니고 삼위일체 중심으로 하는 거예요. 집사님이 교회 온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 할 때 그 선은 십자가 선이 아니고 우리가 존재한다는 선이에요. 그래서 결론 내리면 어거스틴은 결국 존재론이며 그 존재론은 헬라철학에서 나온 존재론입니다.

루터는 그 존재론의 한계를 느꼈어요. 그래서 루터는 온전하게 시도하진 못했습니다만 스스로 십자가 복음을 유지하는 기능론으로 바꾸려고 잠시 시도한 흔적이 보여요. 다른 사람들은 그걸 이해 못하지요. 존재론 같으면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성경에서는 뭐냐? 택한 백성은 주님이 알아서 택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기능이 와서 그렇지 내가 어떤 존재가 됨으로써 준비돼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착하구나. 십자가로 구원해줄게.” 이런 식으로 구원되는 건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예수님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주시니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만 용서만 우리 눈에 보이도록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이렇게 십자가와 그 죄만 이야기할 수 있는 복음 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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