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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0906b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제사장언약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30906b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제사장언약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906b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제사장언약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언약을 통해서 구원하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언약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원하지만 이건 우리의 분수 넘어서요. 우리는 선악과 따먹고 이왕 죽은 존재에요. 주님께서는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거예요. 쓰레기 같은 죽은 존재라고 건져서 아들을 아들답게 주로 높이는데 활용하시겠다는 계획이 제사장 세움입니다.

제사장 세우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제사장 세워서 우리 구원받는 걸 생각한다면 그걸로 언약은 종결돼야 돼요. 그런데 언약은 과정입니다. 모세언약은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 다음에 다윗언약이 있고 그 다음에 마지막 언약은 따로 남아있습니다. 예수님 대에 와야 더는 언약은 없어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구나. 그런 뜻이 아니고 예수님의 언약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고 모든 구원, 모든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일임돼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관계성이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나라에 참여되는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거기서 예수님께 면류관 반납하면서 “우리는 애초부터 주님을 위해서 만들어져야만 했던 그런 존재였군요.”라고 영원토록 주님이 누리는 복락에 영광에 같이 누림 받는 그런 식으로 지금 주의 계획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 계획 우리가 알아버렸네. 그러면 우리가 할 게 없잖아. 할 게 있어요. 왜냐하면 그런 계획을 우리가 누릴 때 우리는 제사장이 아니거든요. 제사장은 레위지파니까. 우리는 일반 단지파일수도 있고, 또는 시므온지파라고 합시다.

이런 사람이 모세언약으로 해서 장차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그럼 백성 됩니다. 다 알았네. 그럼 할 것 없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안 좋아요. 왜 그러냐 하면, 언약에 의해서 우리가 덮쳐져야 되는데 우리는 언약을 구경한 셈이 돼요. 마치 언약을 수족관에 있는 상어처럼 “이번에 들어온 상어 봐라. 잘 논다. 헤엄치는 것 봐라. 다 봤나? 집에 가자.” 이렇게 돼버려요.

어떤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수족관의 상어 노는 것처럼 우리는 관람하고 아멘, 할렐루야 한 소리하면 이건 뭡니까? 그거는 주님 따로 우리 따로 하나가 안 돼요. 이 땅에서 주님과 하나 안 되면 죽어서도 하나 될 수 없어요. 죽어서 천국 갈 사람은 이 땅에서 주님과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그걸 디모데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로잡힌 자.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만이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거든요. 그렇다면 수족관 유리를 깨야죠. 유리벽을 통해서 따로 분리돼있던 상어가 쏟아지는 물과 더불어서 상어는 죠스가 돼요. 우리를 요나처럼 자기 뱃속에 집어넣지요. 그걸 거룩한 제사장 나라, 제사장이 전 영역을 통치하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통치했을 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제사장이 피범벅이죠. 제사장이 여기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참고 있어요. 제사장이 피범벅 된 것은 양의 피, 소는 제물용이니까 따로 빼놓고. 양 두 마리 잡아서 그 피를 한 마리는 활동영역에다 뿌리고 한 쪽은 몸에다 뿌리는 거예요. 제사장 나라라고 해놓고는 실은 제사장이란, 양은 짐승이잖아요. 양은 짐승인데 제사장은 실제 인간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의 인간이지요. 양에 의해서 뒤범벅이 된 장차오실 양처럼 살아야 되는 그런 인간 존재, 이렇게 돼버리면 제사장도 본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죽음이 산 자를 지배하는 양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 시간에 뭘 해결해야 되느냐 하면, 양과 제사장의 결합의 메커니즘, 결합방법의 경로, 그 다음에 제사장이 양 피를 뒤집어써서 거룩하게 됐다고 해서 진 바깥에 있는 일반백성들에게 효과가 전달되는 프로세스를 모르면 우리는 그냥 관광객이 되겠지요. 한 집안 식구가 아니라 남의 집안 식구. 골목에 가다가 둘이 싸우면 저 집 또 싸운다. 저 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나와 별개의 문제, 예수님 나라와 나와 별개의 문제가 된다면 그 사람은 예수밖에 있는 사람이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전달되는가? 하나의 힌트는 있어요. 내 쪽에서 제사장 쪽으로 접근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차단돼있어요. 착하게 산다, 바르게 산다, 구제한다, 헌금한다, 백날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주도권은 양으로부터 제사장, 제사장으로부터 우리한테 전달되는 방식이 돼야 되는데 그 방식은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됩니다. 양의 이동경로에요.

이 양이 어디서 성막 안까지 들어오게 되었지요? 어디서 키운 양입니까? 하늘에서 양이 마구 쏟아집니까? 그 양이 어디서 놀던 양입니까? 이것은 죄인 된 백성들이 자기 죄를 씻기 위해서 집에서 양을 키워요. 그러니까 출애굽의 연속성이에요. 집에서 키우던 양, 그 양 중에서 제일 실하고 깨끗하고 흠 없는 양을 가져가게 되면 벌써 양의 시작점이 제사장 쪽이 아니고 양의 이동경로가 예수님께서 구유에 출생할 때의 경로를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차오실 예수님이 동방박사와 만날 때의 모든 모습들이 제사장과 더불어 제사장에 속한 모든 백성들이 아기 예수 태어나서 죽어서 승천할 때까지 무대에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 보여주는 무대를 둘로 나눠요. 성막 안의 무대와 성막 바깥의 무대로 나눕니다. 성막 안에는 어린 양의 피로 이미 뿌렸지요. 제사장 위임식 할 때 위임식이 하루에 끝나잖아요. 그러면 위임식 끝나면 그 다음부터 제사장 아닙니까? 부부가 결혼식 마치면 부부 끝났습니까? 본격적으로 시작하지요. 성막에 양의 피를 받아서 뿌리게 되면 그 지역만 거룩한 지역이 돼요. 이것은 자동적으로 성막 바깥은 더러운 영역이 돼요. 죄 지었다고 더러운 게 아니고 거룩이 등장하게 되면 거룩이 빠진 부분은 전부 다 더러움이 되는 겁니다. 이 더러움은 죄 지어서 더러움이 아니고 언약적 더러움이에요. 언약이 출몰해서 비로소 밝혀진 구역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는 이유도 없이 죄인이에요. 이게 언약적 죄인이고, 그리고 예수님이 죽었을 때 우리는 함께 죽었고 할 때 언약적 죽음이고, 예수님이 살아날 때 우리는 살았다. 이건 언약적 생명입니다. 모든 것은 뭔가 우리한테 다가오는 게 있어야 되고 이질적인 것이 있어야 돼요. 내가 궁리하고 내가 노력하고 내가 고생했고 내가 투자했고 내가 힘들여 농사짓고 이것 말고 내가 평생 수고한 것 말고 만나처럼 그냥 주는 것 있잖아요. 만나가 노동해서 얻은 과자부스러기는 아니란 말이죠. 일체 노동을 정지시키고 너희들에게서 나온 수고의 양식은 없는 상태에서 만나만 먹여서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까지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나님은 하셨다.

그렇다면 만나의 광야가 울산이라면 우리는 밥도 먹고 피자도 먹지만 진짜 생명은 천국과 관련된 양식을 먹어야 우리가 천국 백성 되는 거예요. 천국과는 상관없이 살찌는 용으로, 또는 살 빼는 용으로 먹게 되면 똥배와 관련 있지 천국과 관련 없잖아요. 시체와 관련됐습니다. 그걸 저는 이질적이다.

매일 살면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뭔가 이질적이에요. 따지고 보면 그런 논리로 성립이 안 되는데 뭔가 나를 자꾸 다른 데로 빼돌리는 느낌,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나도 가고 싶은데 이상스럽게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을 못 가게 만들고 자꾸 사람들이 떨어져나가는 그런 좁은 길, 외로운 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 발 다쳐도 아무도 안수기도도 안 해주는 뭔가 나 혼자 가는 그쪽 그것도 내가 일부러 그 길 가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내 인생이 내 손에서 움직이지 않다는 느낌 있잖아요. 다 아시죠. 느낌 아니까. 말로 설명할 수 없지요.

그런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출애굽기 29장에서 제사장 위임식 해서 양 잡고 그 양은 제공된 것이 바로 속된 영역에서 거룩한 영역으로, 속된 영역을 거쳐서 제사장이 안수해줘야 돼요. 경비대대 검문 안 거치면 양이 거룩한 곳에 못 들어오거든요. 들어오면 그 양은 죽잖아요. 죽고 난 뒤에 양으로 들어왔던 효력이 제사장을 통해서 바깥으로 다시 나와야 된단 말이죠. 그 메커니즘이 성립돼야 돼요. 그 메커니즘을 성립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또 하나 더러운 곳을 만들었습니다. 성막이 있고 성막 다음은 더러운 곳이죠. 깨끗한 곳이 구별됐으니까 자동적으로 나머지는 더러운 곳이 돼요.

그런데 레위기 14장에 보면 여기다 하나 더 만들었어요. 이건 이쪽에도 못 오는 사람들 누구 게요? 문둥병 환자에요. 문둥병 걸린 사람은 진 밖으로 쫓아냅니다. 저주를 보여주는 인형이 되니까 자진해서 들어오면 차버려요. 그러면 영원히 못 들어옵니까? 여기서 이질적이란 말을 했잖아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사람들은 몰라요. 문둥병자 본인은 알아요. 보이지 않는 치료의 광선(말라기에 나오는), 자비와 용서의 광선이 사람들은 몰라요. 그냥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게 되면 이 문둥병자로 하여금 찾아가도록 조치를 하게 돼있습니다. 이 문둥병에 빨간 색칠을 해놓으면 마치 오늘날 온도계의 수은의 역할을 하면서 바로미터, 하나님의 자비가 어느 정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문둥병은 용서받았다고 가만있으면 안 돼요.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을 낫게 했잖아요. 병 고침의 기적을 받은 열 명 중에 구원받은 사람은 달랑 한 명인데 왜 구원받았지요? 이상하다. 내가 낫을 병이 아닌데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한데 왜 나았지? 이건 이질적이야. 내가 기도해서 나을 것 같으면 다시 나한테 회수하겠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나는 이 저주에서 풀려야 될 가치가 없는 쓰레기 같은 존재인데 왜 낫게 했느냐 말이죠. 출처를. 이게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거예요. 산성설교 마치고 내려가니까 주님도 바빠. 피곤해 죽겠는데 내려가자마자 문둥병자가,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럴 때 주님께서 문둥병 낫고 내빼지 말고 문둥병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당시 율법으로 자비의 원천이 나왔던 곳을 찾아가라. 문둥병이 나았을 때 대한 규정대로 예물을 준비해서 제사장에게 가서 문둥병이 나았다고 예물을 드리게 되면 모세언약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셈이 되겠지요. 예수님이 문둥병을 낫게 함으로써 그 모세언약은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지키는 게 아니고 그 모세언약을 누가 가져가서 누가 홀로 완성합니까? 앞으로 예수님의 인생 경로가 그 문둥병마저도 저주에서 풀리게 하는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나왔음을 마지막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할 때까지 그 길을 가시는 와중에 그런 사건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을 포기해야 돼요. 하나님 믿지 말아야 돼요. 예수님 믿어야 돼요. 하나님 믿으면 수족관의 상어밖에 안 돼요. “하나님, 오겡끼데스까. 거기 잘 계시지요. 나는 울산바닥에서 하나님 덕분에 잘 먹고 잘 삽니다.” 이게 뭐예요. 우리의 죄를 매일같이 모세언약에 입각해서 새 언약에 입각해서 이 같은 죄인도 예수님 피를 품고서 우리는 용서받은 원천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될 그런 문둥병 환자 용서받은, 치료된 이미 나아버린 문둥병 환자로서 살아야 될 입장이 일주일 한 번씩 교회 와서 인사하고 밥 먹고 가버리고. 헌금 몇 푼하고. 자기 세계, 황금의 제국 따로 숨겨놓고.

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발을 못 빼느냐 하면 못 빼도록 하나님이 조치하십니다. 울산이 나를 힘들게 한다. 다른 데 가보자. 다른 데 그 동네 울산이에요.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돈 좋아하는 세상이 빠지게 한 이유는, 우리의 구원과 영생과 용서는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요, 그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그 혜택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찾아가는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 노릇으로 사용되게 하시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전도하는 그 길은 곧 사도 바울이 구원받는 그 길입니다. 생명의 면류관 받기 위해서 가는 그 길이 다른 사람한테는 복음의 향기를 받는 그런 기회가 되지요.

어떤 사람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담배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고. 사람마다 개성이 있기 때문에 눈 감고도 방금 누가 왔는지 알아요. 향수 냄새로. 집안에 남편이 다녀갔는지는 방에 들어가 보면 안다 안 합니까. 육감까지 아니더라고 후각만 있으면 알아요. 이건 남편 냄새다. 이건 둘째 아들 냄새고, 첫째 놈 냄새고.

고린도후서 2장에 복음은 믿는 자에게는 향수다. 결국은 사도 바울은 향수병을 가지고 온 몸에다 처바른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망하는 자에게는 그게 향수가 아니고 악취.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동일한 인간인데 어떤 사람한테는 향기로 풍기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똥냄새로 풍기느냐 말이죠. 어떤 사람은 담배냄새가 그렇게 좋다 하거든요. 나는 담배냄새가 싫어요. 술 냄새도 싫고. ktx 타고가면 술 먹은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온 객실에 술 냄새 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요. 술 안 먹은 나는 대번 느껴져요. 내가 취한 것 같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속에 물들게 하는 것은 나에게서 나온 사랑을 공짜로 입은 사랑을 되찾는 예수님의 솜씨를 멋들어진 마술 같은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서 끝까지 우리로 세속에 물들게 만들어버려요. “가만있어. 내가 너를 건져줄게. 착하지 마, 멋지게 살지 마. 가만있어. 내가 너 같은 인간도 살려줄게.” 왜? 그래야 메커니즘이 나오니까. 잘난 놈 살아버리면 지 자랑하잖아요. 그런 것 기존교회에 많거든요. 지 사랑하는 사람들.

고 옥한흠 목사 4주기 기념식을 사랑의 교회에서 하는데 거기에 오정현 목사가 수염 폼 나게 길러서 미망인과 같이 앉았어요. 그 사람이 박사학위 표절 사건으로 징계 먹어서 자숙의 시간을 갖는 중인데 미망인에게 견뎠다고 상주는 시간에 어떤 선교사가 마이크를 빼앗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떴어요.

제가 뭘 느꼈느냐 하면, 여러분. 사랑의 교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새순교회도 없고 우리교회도 없어요. 없어도 구원받으면 되잖아요. 왜 새순교회 있고 사랑의 교회 있어서 구원되려고 하는 그게 뭐냐? 그건 따로 거룩한 공간을 우리끼리 거룩한 공간이라고 만드는데 그걸 만들어버리면 우리는 교회의 증인되지 예수님의 십자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았어요. 그러면 됐잖아요. 뭘 더 원해요.

이걸 변증법이라 하는데 제사장이 잘못 되면 백성을 통해서 꾸짖고 백성이 잘못 되면 제사장이 꾸짖습니다. 사실은 둘 다 문제 있어요. 문둥병 환자도 그냥 무상으로 용서받는데 사람들은 문둥병 환자를 자기는 문둥병 안 걸렸다고 해서 깔보고 무시하는 거예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무시하지 말라 했잖아요. 그걸 무시하게 되면, 내가 무시하는 그 인간을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버린다고 나온다고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던지 간에 세속인 것은 마찬가지고 세속에서 거룩으로 벗어나는 것은 주께서 거저주시는 자비에요. 거저주시는 자비를 여러 번 강조하는데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께서 거저주시는 자비는 아무리 어떤 형식과 제사법으로도 포착이 안 됩니다. 포착은 안 되는데 나중에 끝나고 난 뒤에 흔적을 포착을 해요. 자비가 날아오는데 양궁선수들이 쏘는 화살은 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는 게 보인다고요. 그런데 자비가 날아오는 건 보이질 않아요. 이미 꽂혀버린 사람은 그때부터는 남은 몰라도 자기는 찾아가면서 다른 보기에는 낯선 이상한 짓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날아가는 것은 안 보여도 찾아가는 것은 보이죠.

그 찾아가는 걸 포착한 것이 레위기 14장에 나옵니다. 그 연극에서 몇몇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하여튼 구약은 연극이에요. 주인공인 예수님이 빠져있으면서 배후에서 언약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그냥 배우들이에요. 첫 번째 주요 등장인물, 문둥병자. 두 번째 제사장 나옵니다. 끝입니까? 거기에 사람은 아닌데 하나님의 용서의 메커니즘을 후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두 마리의 산 새가 나와요. 이 넷이서 뭘 해요? 할 게 없잖아요.

두 사람과 새 두 마리가 뭘 하느냐 하면, 문둥병자는 저주받았는데 지금은 나았어요. 저주받은 사람은 일반 텐트촌에 못 들어가고 진 밖에 나가 있어야 돼요. 더러워서 너무 더러운 곳에 아예 저주받은 이방인 구역에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깨끗하게 나았어요. 그러면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되겠지요. 자비가 쏟아지는 성막 쪽으로 점차 나와야 되겠지요. 나오는데 지 마음대로 가면 안 돼요. 거기에 경비대장이 있어요. 그 역할을 제사장이 하는 거예요.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당신은 나았다면서요?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검문합니까? 나는 피를 뒤집어썼거든요. 나는 거룩한 곳에서 활동하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을 대리한 사람이거든요. 그 당시의 하나님이라고 보면 돼요. 제사장 말 안 들으면 안 되잖아요. 제사장 만나는 것이 사랑의 원천을 찾아가는 하나의 길목이지만 일단은 만나야 되겠지요.

그러면 등장인물이 두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새 두 마리는 뭘 할 거냐? 이 넷이 모여서 보여주는 것이 죽음의 파티. 죽음이 우리를 살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연극의 주제가 죽음입니다. 그냥 죽으면 안 돼요. 언약적 죽음. 언약이 효과 보려면 죽음의 모습이 아니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요. 반드시 언약은 죽음으로써 다가오는 겁니다. 새 두 마리 중에서 한 마리가 죽습니다. 그러니까 등장인물 넷 중에서 일단 사람 둘은 빠집시다. 더 핵심적은 것은 새 두 마리죠. 새 두 마리에서 일어난 일을 먼저 보시고 2막에서 인간 투입합시다. 새 두 마리 역할을 두 인간이 그 자리를 메워서 투입하는 거예요.

한 마리는 죽습니다. 흐르는 물에 들어가 죽은 새의 피를 날갯죽지에 발라서 날려 보내요. 그러면 그 새는 처음에는 날갯죽지에 피 없는 새였는데 피 없는 새가 피 발린 새로 날아갔을 때 일반 사람들이 보면, “저게 뭐야? 저 새나 이 새나 마찬가지잖아.” 그 새가 그 새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문둥병자 나와. 문둥병 걸려. 그 다음에 진 밖에 쫓겨나가. 그 다음에 다시 문둥병 나았어. 제사장 검사해. 문둥병 나은 것 맞습니다. 제사장이 검사만 하면 안 돼요. 검사만 하면 의사가 돼요. 판사가 돼야 돼요.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것 맞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증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문둥병 되게 한 당사자 맞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문둥병에게 주목해야 돼요. 이제는 거기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문둥병에 걸렸다가 멀쩡하게 된 것은 새 한 마리가 피 바르고 날아간 것과 똑같지요.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인물, 새 두 마리, 제사장, 문둥병 이 네 종류의 역할을 다 합치면 예수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스스로 버림받았다가 사흘을 못 가서 다시 아버지가 되찾아가 버린 거예요. 하지만 그 예수가 그 예수가 아닌 거예요. 같은 예수인 줄 알고 제자들이 만지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서 올라가지 않았다. 이건 예수님 혼자만 아는 이야기지 제자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요. 그 얼굴이 그 얼굴이고 식사도 곧잘 해요. 맛있게 고기 먹습니다.

그래서 쓸데없이 중세 때 신학자들은 내기를 했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먹었던 물고기의 배설물은 과연 똥이냐, 아니냐는 그 논쟁을 한 거예요. 수도원에 앉아서 어지간히 할 짓도 없어요. 맨날 포도주 먹고 그 생각만 한 모양이라. 중세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은, 바늘에 천사가 몇이나 앉나 한 것은 사람들 꼬시기 위해서 한 거예요. 사람들은 신기한 걸 원하니까. 뭔가 신기한 걸 주게 되면 저사람 똑똑한 게 많이 안다고 당길 게 아닙니까. 꼬셔서 수도원 부흥하려고 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지금 교회는 없는 거예요. 제사장은 있잖아요. 없는 겁니다. 제사장이 있을 때는 문둥병이 나타날 때 제사장이 있는 거예요. 한 번 제사장은 영원한 제사장 아니거든요. 제사장 역할이라는 것은 진짜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께서 일하심에 따라서 제사장 역할을 할 뿐이기 때문에 제사장 역할을 할 때 나는 제사장이니까 이러면 안 되고, “주여, 주님이 아직도 제사장 하시는군요.” 오히려 제사장이 자기를 비우고 고백을 해야 돼요.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하다 죽었어요. 제사장이 아니라 해야 되는데 한 번 제사장은 영원한 제사장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잘렸어요. 그것도 참혹하게 죽잖아요. 불을 다루는 사람이 불에 데어 죽는다. 이것은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사람이 그 일에 전문직이 돼버리면 안이해지잖아요. 제사장들이 멸망하게 된 이유가 바리새인 짓을 너무 많이 했어. 원래 신입은 긴장하는 법인데 너무 오래 노털 돼버리면 긴장을 안 해요. 분명히 울산 중공업 데모하는 인간들 신입이 아닌 것 같아. 너무 노털들이야. 너무 많이 알아. 그때 첫사랑을 잊어버렸어. 첫사랑 회복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교회 없다. 어제까지 받은 사랑은 어제까지만 유효할 뿐이지 오늘 사랑은 오늘 은혜 받아야 되고 날마다 주께서 주셔서 되는 거기지만 그걸 먹는 즐거움, 만나 먹는 즐거움이 늘 새롭게 할 때 우리는 늘 나의 것이 아니고 늘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늘 우리는 겸손해지겠지요.

아직까지 해결 안 된 게 있어요. 해결 된 게 뭐냐 하면, 문둥병이 자기 원천을 찾아가는데 중간에 새 두 마리를 만났지요. 결국 새 두 마리가 마중 나왔다고 보면 되는데 한 마리는 죽고 또 한 마리는 죽은 동료 때문에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창공을 향하여 날아갔습니다. 물론 그 피는 곧장 마르겠지요. 하지만 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문둥병, 제사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걸 레위기 제사법에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오고 오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의미를 새겨주는 겁니다.

하나님, 살아있네! 그런데 그냥 살아계신 것이 아니고 언약적으로 살아있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살아있고 만약에 하나님 살아계신 것 아니까 됐고 우리도 따로 살아있다면 그 사람들, 이스라엘은 멸망당합니다. 죽어있어요. 같이 언약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같이 살아야 될 건데 나를 위해서 예수님 이용한다든지 그러면 안 돼요. 그것은 중심축이 자기 쪽으로 전환되고 말았어요.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슬픈 것도 전부 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유발된 하나의 사태들입니다. 하나의 사건들이에요. 남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그러면 마지막으로 창세기 15장 봅시다. 옛날에 제가 썼던 [교회를 넘어서]란 책에서 이 대목을 언급하면서 아직도 뭔가 해결되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게 있어요. 창세기 15장 8절 말씀입니다.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이 대목을 보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제물에 의미를 두느냐 하는 겁니다. “그냥 잡아. 잡은 네 성의를 봐서 아브라함언약을 이루게 할게.” 하면 되는데 왜 유독 제물에 구체적인 지시를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하나님이, 명령하신 하나님이 지상에 연착륙하실 때는 이 제물의 내용에 부합되는 식으로 이 땅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으로 알면 되는 겁니다.

지금 갑자기 출애굽기 하다가 창세기로 돌아갔느냐 하면, 제물과 인격이 어떻게 결합되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제물과 인격이 결합되는 방법을 안다면, 제사장이 하는 모든 행동이 지금 진 밖에 있는 백성들에게 용서라는 효력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같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거든요. 먼저 제물이 제사장을 어떻게 다루느냐? 그 방식으로 바깥에 있는 백성들도 같이 다룬다고 본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안 것은 제사장 복장입니다. 위임식할 때 복장 챙기죠. 그 복장에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린 게 있어요. 물어볼게요. 이게 제사장 본인의 구원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자체가 구원받기 위함입니까? 이것은 제사장을 위함이 아니에요. 우리가 제사장이라면 뭘 염두에 둬야 하느냐 하면,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만 유익되라고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사명자로 부여받은 겁니다.

고린도전서 13장 7절. 사랑은 견디는 것이다. “(사랑은)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드느니라” 그런데 모든 게 뭐냐 하면 사람들은 오해해요. “그래 나 잘되라고 하는데 구원받으려면 견뎌야 돼.”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나 좋으라고 견디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오기고 집착이고. 진리를 위하여 진리를 살리기 위해서 한 몸 논개처럼 바치리라. 그래서 견디는 거예요. 진리만 있다면 저는 죽어도 괜찮아요. 그런 뜻에서 견뎌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은 내 능력이 아니고 은사로 주어지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출애굽기 하면서 제사장의 능력이 바깥에 전해지느냐 하면 이것은 은사가 돼야 된다고. 은사는 어디서 생산합니까? 하늘에서 주어지는 거지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영원하다. 그것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제사장에서 열두 지파가 적혀있습니다. 앞에는 보석 하나마다 열두 하나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걸 민수기 3장에 보면 레위지파는 따로 독립해서 다른 열두 지파의 대속물이 돼요. 그러니까 일대일 대응이 돼요. 레위지파 하나, 저쪽 백성 지파 하나 이런 식으로. 숫자가 같다는 말이 아니고 열둘을 통합하면 12:1로 비슷하게 대표가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맏아들이지요. 신약에서 로마서 8장에 보면 누굴 맏아들이라 합니까? 맏아들이니까 예수님이죠. 그렇다면 출애굽기 13장 1절에 보면, 출애굽할 때 애굽의 장자 다 죽었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 장자는 살아남았잖아요. 살아남은 게 아닙니다. 삽으로 홀랑 파 가요. 방금 출애굽에서 살아남은 장자 있지요. 있습니다. 안 그래도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했는데. 인사고 뭐고 그 얘 데려와요. 하나님 겁니다. 당신 것 아닙니다. 빼앗아 가요.

육신에 속한 인간을 빼앗아서 그 육신을 살릴 수 있는 대표자, 장자로서 특별에 관리에 들어갑니다. 누가? 출애굽 당신의 장자가. 그 역할을 레위지파가 해요. 그냥 가면 안 되고 어깨에 앞에다 열두 지파의 이름을 적어놓지요. 이건 대변자, 대리자, 대표자가 돼요. 저쪽은 구경만 할 뿐이고. 제사 잘 드리면 공짜로 복 받고 제사 잘못 드리면 저주받고 그 판이에요. 그 대신 십일조 내서 팍팍 밀어줘야 되고. 굶어죽지 않도록.

이렇게 될 때 이 언약이 모세언약인데 그 앞에 아브라함언약이 있었거든요. 아브라함언약에서 장자는 누굽니까? 바로 아브라함 본인이지요. 본인이 뭘 바친다? 주님께서 지적한 삼 년 된 암소, 염소 바쳤잖아요. 결국 아브라함 자신이 제물과 이미 일체가 되는 거예요. 그걸 신약에서 아브라함 안에 나 있다. 또는 요한복음에서는 아브라함이 누굴 보기를 원했다?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

결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제물은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언약의 제물의 구체화된 인격은, 제물은 양이잖아요. 산비둘기 아닙니까. 이걸 인격화 구체화시킬 때는 아브라함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세 명의 천사가 나타나서 아브라함은 자기 좋은 줄 알았지요. 아브라함은 그냥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들러리에요. 하여튼 하나님은 철저하게 빼먹을 것은 다 빼먹어요. 철저하게 아브라함을 활용합니다.

이삭이라는 약속의 아들을 주기 전에 먼저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바쳐서 이삭에게 준 약속과 네가 처음 제물 쪼개놓고 한 약속과 같은 노선이라는 사실을 믿어라 이 말입니다. 이삭과 이쪽 제물 노선이 일치가 되면 제물과 인격이 일치가 될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제물과 인격이 같이 갑니다. 제사장 있지요. 흠 없는 양 두 마리 같이 가다가 마지막 예수님 당시에 합체가 되어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제물이고 예수님이 제사장이고 예수님이 성전이고 예수님이 히브리서에 보면 모든 게 완성이 되고. 그래서 모든 언약은 예수님의 새 언약, 피와 살.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느니라. 이게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서 확실하게 누가 뭐래도 현실이라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더 이상 마귀야 그 입 다물어. 십자가가 있는데 무슨 신학이 필요하고 무슨 구구한 철학이 필요합니까. 내일 철학 강의해야 되는데^^ 십자가는 창기도 구원하고 강도도 구원해요. 강도 구원할 때 십자가 동창회. 각자 자기 십자가 지고 오게 되면 십자가 동창회.

그것을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 세상에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는데 그 성전의 벽돌로 들어오려면 너도 십자가 지고 들어와야 된다. 더러운 문둥병 환자가 어떻게 누구 덕분에 용서받고 천국 가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맏아들 되시는 장자 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효력을 언약이라는 아브라함언약 안에서 이삭처럼 새롭게 출생된 자기 때문에 더도 덜도 말고 우리는 성도 맞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 안에는 언약이 활발하게 작열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안의 현실이 진짜 현실이고 우리가 생각한 현실은 모방한 인간들이 지어낸 현실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영적 눈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 말 할 것 없이 십자가가 이미 눈에 보이기에 더 이상 마귀의 꾐에 빠지지 않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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