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20130829-행19장23절(신화와 복음)52강 - 이 근호 목사
대전20130829-행19장23절(신화와 복음)52강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79)
대전20130829-행19장23절(신화와 복음)52강- 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는 아주 희한한 일이 있었지요.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사도바울과 비슷하게 흉내 내다가 진짜 된 통으로 누구한테 걸렸느냐, 마귀한테 걸려가지고 마귀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딱 걸렸지요. 귀신이 뭘 아느냐 하면, 사도바울도 안다는 겁니다. 귀신이 예수님도 알고 사도바울도 아는 겁니다. 방향이 이러면 안돼요. 귀신은 예수님도 알고 사도바울도 안다. 요거는 되는데 예수님과 사도바울을 내가 알기 때문에 귀신도 나를 알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논리를 끌어나가지 마세요. 이런 근거는 없습니다. 귀신이 예수도 사도바울도 안다, 이렇게 했을 때는 우리 쪽에서는 이것을 예수님을 안다, 이렇게 들어가면 안 되고 귀신 쪽으로 들어가야 돼요. 괜히 지가 잘난 체 해가지고 귀신도 나를 알아 모신다 이리 되면 곤란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귀신도 알 것 같으면, 천사도 알고 다 알잖아요. 그런데 왜 그리 고생시켜요? 이렇게 하나님이 알아주는 분 같으면 이 세상에 복음 전하는데 좀 편하게, 복음이 귀하니까 귀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월하게 전할 수도 있게 하시는데 마치 사도바울한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니 문제는 니가 알아서 해! 나는 몰라. 방치하는 것처럼 되게 고생을 많이 하거든요. 오늘 그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귀신도 알아 모시는 분이고 예수님도 알아 모시는데 고생을 왜 이리 많이 시키느냐, 그것은 사도바울을 일부러 고생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서 하나님의 종들을 힘들게 하시는 겁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버려야 될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기대나 낙을 찾기는 곤란하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어디 내 사활을 걸고 모든 걸 올 인하고 거기다가 행복을 얻으려고 찾으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이것은 다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기차가 지나가듯이 시골 역을 그냥 가듯이 그냥 우리는 빠져 나오는 것으로 생각해야 되지, 눌러 앉아서 승부 보려고 여기서 인생의 가치를 다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 마세요.
가다보면 뒤에서 박는 수도 있고 흘러가다보면 어차피 빠져나온 거니까 “아휴, 혼났다.” 강원도의 환선굴이 참 멋있지요. 굴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굴 같은데 거기서 한 번 살려고 해보세요. 거기서 살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피서지 계곡이 그렇게 좋잖아요. 거기서 사흘만 살아보세요. 집이 그립지. 피서는 그냥 다녀가는 거예요. 이 세상은 누구의 시처럼 그냥 이 땅은 그냥 놀러 소풍 왔다가 가는 거예요. 다녀가는 거죠. 이러한 것은 삶의 지혜인데, 이 지혜는 고생가운데 우러나오지, 배워서 되는 건 아닙니다. 실소 몸으로 인생을 그렇게 힘들게 살아보는 가운데서 자포자기하듯이 인생을 세상을 달리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공부 박 세게 한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태리가 이리 있고 그리스가 있고 터키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중해. 여기에 섬이 하나 있는데, 크레타 섬, 여기는 키프레스 섬, 크레타 섬은 BC1000년경쯤 됐어요. 유럽문명의 시작이 크레타문명이 시작된 거예요. 지금 유럽이 잘 살잖아요. 처음에 발판이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하잖아요. 크레타문명 여기서부터 시작된 겁니다. 이 크레타문명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이라크지요. 거기서 문명이 전파되어서 확산된 겁니다. 이 크레타문명 이 쪽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지금 이곳을 다녀가는 거예요. 여기에 에베소가 있습니다.
오늘 할 사도행전 19장 21절입니다. 에베소가 여기 있는데, 사람을 어디에 보내느냐 하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 가기를 원한다. 마케도니아가 있고 이 밑에 지방을 아가야 지방이라 해요. 사람을 이렇게 보내고 와서 예루살렘에 가서, 간 것은 이쪽이 하도 교회가 생활이 어렵다고 하니까 헌금을 모아서 사도바울이 전달해주고 거기서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배를 타고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 그리고 더 계시 받은 것에 의하면 제일 끝의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사도바울의 계획이었지요. 어디까지는 확실한가 하면, 니가 로마에 서리라 까지 주님께서 계시를 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주님께서 자기를 풍랑을 이끌던 말던 간에 자기는 로마에 간다. 여기까지는 계획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AD50년경이라 보면 됩니다. 이렇게 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이렇게 갔다가 이렇게 갔다가 굉장히 쉬운데 하나님께서 사도바울로 하여금 이렇게 갔다가 저렇게 갔다가 하면서도 여기에 자꾸 뭔가 부딪치게 만들어요. 인생을.
곱게 KTX처럼 선로에 철길을 좍 미끄러지듯이 가는 것이 아니고 가기는 가되 힘들게 빡빡하게 만들어서 가게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내가 복음을 전했다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했다가 아니라 복음이라는 것은 내가 소유할 수도 없고 내가 찾아가도 내가 찾아갈 수 없는 곳에 복음이 있어요. 내가 찾지도 않았는데 복음 쪽에서 나를 쥐고 있다면 나는 내가 쥘 수 없는 것에 의해서 쥠을 당하는 수동성입니다.
나는 복음을 쥐고 내 맘대로 복음을 외치고 싶은 게 내 심정인데, 그렇게 되면 누가 주인공이에요? 복음이 주인공이 아니고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지요. 나는 복음 전도 잘한다. 나는 목사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실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 때문에 너는 이런 고난을 받아야 돼! 그렇게 되면 네가 생각한 복음과 복음이 주인공이 된 복음과 차이가 날까요? 안 날까요? 엄청난 차이가 나는 거예요. 내가 전하는 천국은 사실은 천국이 아닙니다. 내가 전하는 천국은 지옥이에요.
그런데 천국이 나를 잡아서 자기 세계로 끌림을 당할 때는 우리는 내가 생각한 천국을 포기를 해줘야 돼요. 우리가 생각한 천국은 항상 기본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한 기본이 뭐냐 하면, 행복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버릴 위인이 없어요. 세상의 모든 과학과 철학에 핵심은 달랑 하나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느냐.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론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있어요. 인간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란 사람이 행복에 대해서 할 때, 그 사람이 제안한 방법이 뭐냐, 행복이란 덕이 있으면 복을 받게 되어있다 해서 덕을 중요시했어요. 그 뒤에 나오는 두 파의 흐름이 있어요. 스토아 라는 게 성경에 나오지요. 스토아학파와 에피크로스 학파가 사실은 비슷한데 자기들끼리는 갈라졌어요. 두 개의 파가 행복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안건을 제안했어요.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자기를 포기함으로서 행복한 것. 왜냐 하면 행복이라 하는 것은 달성하기에는 끝도 한도 없으니까 도대체 행복을 얻기 위해서 뭔가 가져야 되는데 가져도 막상 가져보니까 별 흥미를 못 느끼잖아요. 하늘에 파랑새가 멋있어 보이는데 막상 파랑새를 손에 쥐고 보니까 똥 냄새 나는데요. 이건 내가 원했던 행복이 아니잖아요. 아하, 행복이란 간단한 거다. 욕심만 버리면 되는 거죠. 그걸 불교에서는 집착과 집념만 버리면 행복해지는 거예요. 이게 불교에요. 불교란 집착을 버리면 되는 거예요. 집착만 버리면 행복은 절로 굴러 들어오게 돼 있어요. 이게 스토아학파에요. 스토아학파 = 불교, 같은 거예요. 그럼 상당히 소극적이지요.
에피크로스학파는 뭐냐 하면, 현재만 생각하라. 이게 행복이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미래를 앞당겨 당겨서 생각하기 때문에 불행한데,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현재만 생각해 버리면 행복한 것이다. 인기 얻었어요. 두 파가. 대단한 인기를 얻었어요. 왜냐 하면, 듣는 사람들이 자기의 머리실력으로 아무리 끄집어내도 그 두 가지의 이론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그러면 한 번 두 개를 겹쳐봅시다. 겹쳐보면 어떻게 되겠어요? 사실은 두 개를 겹칠 때 사람의 머리는 스토아, 불교 쪽인데 몸은 에피크로스 쪽이에요. '그래,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오늘만 즐기자. 오늘만 즐기면 행복하다.‘ 행복할 수 없는 거예요. 죽음이 죽음을 미리 당겨서 하게 되면 불행한데, 죽을 때는 꽃이 지듯이 그냥 이름도 모르고 시도 때도 없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을 때 죽을 지라도 하루 행복하고 내일행복하고 매일같이 행복하면 그 행복이 누적이 되면 그것이 곧 행복한 인생이 되니까 죽음을 미리 당겨서 걱정한다는 것은 바보짓이니까 그래서 이것은 편한 것을 즐기자 이런 거예요.
요번 수련회할 때 전도서에 나왔지요. 허무한 세상에 어떻게 살라 했습니까? 제 강의에 나옵니다. 허무한 세상에서 사는 방법은 육의 즐거움은 뭐로 처리하라? 육의 즐거움은 육으로 처리하라. 육의 즐거움을 사람들은 오인해서 육의 즐거움을 정신적으로 해탈해서 하려하는데 이것은 아주 어설픈 사람이에요. 정신은 육의 즐거움을 대체할 수 없어요. 육의 즐거움은 육으로 해결해야 돼요. 신경 쓰인다. 술 한 잔 마시면 돼요. 아주 간단한 방법 놔두고 도 닦을 필요가 없어요. 이게 전도서에 나오거든요.
니가 괴로우냐? 아내와 함께 술 마시고 즐거워하라. 이게 하나님이 주신 일정부분의 행복입니다. 이걸 분복이라 해요. 그러니까 요렇게 알았으니까 여러분이 행복하려면 방금 요 이야기 들었지요. 방금 요 들은 이야기를 잊어버렸어요. 그게 행복입니다. 행복할까를 생각하면 이미 행복은 멀어져요. 행복할까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제가 늘 하는 말 있잖아요. 그냥 막 사세요. 그냥 막 살면 되는 거예요. 막 살게 되면 이 땅에서 나만 막 사는 게 아니고 저 쪽에도 막 살잖아요. 서로 막 살다보면 서로 어느 정도의 경계선이 부딪치는 선이 있겠지요.
요 앞에 울타리 보세요. 개 지 맘대로 살잖아요. 니는 니 맘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다가 이 경계선만 있으면 일단 협상 본 거죠. 세상이 이런 거예요. 세상은 전부를 가질 필요 없이 내가 막 살다보면 내가 자제할 필요 없어요. 저 쪽에서 자제가 들어오게 돼 있어요. 밤중에 바이올린 켜게 되면 이웃집에서 시끄럽다고 벽치게 되어 있어요. 고 때만 멈추면 되는 거예요. 살기 참 편하지요. 굉장히 쉬운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의 행위가 타인에게 피해를 줄 때 그 경계선까지만 있는 거예요. 나의 행위가 타인에게 피해를 줄 때, 이 타인이 예민한 사람 같으면 경계선은 그만큼 좁아지겠지요. 발을 조금만 굴러도 위층에서 조용히 걸읍시다, 대번 나오니까 좁아지는데, 그런데 이 세상에는 예민한 사람은 없고 다 등신 같은 사람만 있으면 그 때는 나의 영역이 커지는 거예요. 형제간에 있어서 동생이 바보 같으면 형은 마음껏 자유를 누립니다. 쥐어 패도 아무소리 못해요. 부모에게 이르지 못해요. 그런데 동생이 굉장히 예민하면 형이 오히려 밀리게 돼서 형이 젊은 날이 굉장히 괴로워져요. 동생 기가 세면. 그래서 탈 구스타프 융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혼자 하겠다하는 것은 지 생각이고 인생이란 더불어 사는 건데, 어떻게 더불어 사는가 하면, 내 속에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있는데 내 속에 여성성이 강한 사람은 이 땅에서 말 못하고 그냥 참으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그 사람의 역량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성성 있는 사람이 남성 형 흉내 내지 말고 그저 찔찔 짜면서 천사처럼 살라 이 말이죠.
남성 형을 갖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남을 패야 사는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어요. 남을 힘들게 하고 괴롭혀야. 그런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융은 왜 남자, 여자를 하지 않는가 하면, 남성 여성이라 하는가 하면, 남자라 할지라도 여성 같은 사람이 있고, 여자라 할지라도 남자 같은 사람이 있어요. 껍데기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여자는 누구한테 기어 붙어야 살고, 남자는 누구한테 지배해줘야 살맛이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종의 애들이 하는 퍼즐 있지요. 조각이 다 다르잖아요. 맞춰보면 모나리자 그림 나오잖아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면 자기들끼리 다 맞추어서 살게 돼 있다 그 말이에요.
이것이 바로 지금 복음과 사도바울이 싸우려고 하는 스토아, 그것이 사도바울이 갔던 로마, 그리스, 이 그리스도 BC60년경에 이미 로마에 점령이 됐어요. 터키 전부 다 모든 사람의 생각은 이미 일치됐습니다. 스토아로. 인간의 사는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을 위해서 어떻게 사는가? 그냥 자기 성질대로 사시면 그것이 그 자체를 수용하면 되는 거예요. 성질대로 살면 자기 뜻대로 안되잖아요. 그 때는 누구한테 맡기느냐, 신에게 맡겨 버리자. 그래서 그 당시에 이걸 다신의 세계, 이 이론을 다신론이라 합니다. 이게 무슨 세계냐, ‘신화의 세계’에요.
신화의 세계의 특징 4가지가 있습니다. 첫 째는 자연에 대한 매혹, 자연이 주는 풍요함과 그리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신화를 섬기는 것은 다신을 섬기는 것은 자연에 대한 매혹이 있어서 그래요. 두 번째는 자연에서 오는 공포심,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을 갖고 있어요. 지금도 어부들은 배타고 나갈 때, 풍어제 하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공포심. 풍랑에 배 뒤집어지면 다 죽잖아요. 공포심 때문에 신을 섬기는 거예요. 세 번째가 상당히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중요한 건데, 인간의 멈출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열정, 인간의 감정, 그래서 로마신화는 전부다 신들이 인간적인 것 같아요. 로마의 신은 신이 아니고 인간의 내면의 모습이다. 신들이 질투하고 신들이 서로 싸우고 신들이 여자를 두고 서로 차지하려고 쟁투하고 신들이 서로 속이고 신들이 서로 미워하고 사실은 미움과 질투와 이런 것은 신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혼란스러운 어두운 누구의 내면입니까? 우리 인간 자체의 내면을 외향적으로 바깥으로 외면화시켜 버리면 그게 신화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로코코, 바르코 모든 신의 그림들을 보면 서양미술사를 보게 되면 거기에 계속 신화가 나와요. 신화의 그림을 그렸거든요. 여러 가지 신화들이 나오는데 그 신들을 보면서 자기의 내면의 평정심으로 삼는 거예요. 혼란을 신의 혼란으로 해가지고 이걸 신탁으로 돌리고 잠재우면 나머지 떠오르는 것은 아름다움과 그리고 평정심과 온유함과 고상함이 식혜의 밥알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것만 남지요. 나의 진짜 모습은 떠오르고 있는 진선미, 아름다운 것 추구하고 고상한 거 추구하고 선한 거 추구하는 이게 나의 진짜 진면목이라고 보여주기 위해서 신화를 이렇게 하는 겁니다.
네 번째가 뭐냐 하면, 영웅숭배에요. 이 영웅숭배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까지 퍼졌습니다. 지금 요 4가지 자연에 대한 매력이 있어요. 아름다운 거, 인간은 갖지 못하는데 신은 갖은 것, 예를 들어서 새가 날거든요. 나도 한 번 날아 봤으면. 이런 자연적인 매혹이 신화가 되고, 신화가 구체화되면 과학이 되고, 비행기까지 만들게 됐잖아요.
자연의 공포심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제물’받치는 거예요. 그래서 제물이 있는 곳에 신이 있어요. 신이 있고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제물을 바치면 반드시 그 곳에 신이 있게 돼 있어요. 인간 쪽에서 제물을 바치게 되면 거기에 신에서부터 뭐가 오는가 하면, 신탁이 옵니다. 신탁이라 하니까 상당히 동화책에 나오는 거 같지만, 성경에서 신학적 개념으로 바꾸면 뭐가 됩니까? 신의 계시겠지요.
그러면 여기에 제물 바치는 것은 순박한 일반 평민들이라면 여기에 신탁을 내리는 분들은 누굽니까? 아주 이걸 거룩한 사람이라 해요. 거룩한 제사장이 되겠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여신들, 열린 음악회에 나오는 여자 아나운서 있지요. 그것처럼 올림픽 할 때, 햇불 점화할 때 여신들 그런 사람들이 일과가 뭐냐 하면 신탁하는 거예요. 신탁내릴 때 뭘 고려하겠습니까? 제물의 값어치를 보고 ‘얼마나 바쳤노?’ ‘아이고, 많이 바쳤구나!’ 점괘를 좋게 내리겠지요. 이것은 서양뿐만 아니고 동양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양의 문자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무당들이 만든 거예요. 무당들이 문자를 어떻게 만드느냐, 거북이 등뼈에다가 쇠꼬챙이로 그려봐요. 그러면 지 맘대로 죽죽 갈라지겠지요. 갈라지면 “이번 전쟁은 우리가 승리하겠습니까?” “아, 이번 전쟁은 포기하는 게 낫겠습니다.” “가만있어보자, 결혼날짜를 언제하면 좋을까?” 이런 것을 전문적으로 이걸 보고 하는데 거북이 등짝은 지 맘대로 갈라지지만, 사실은 주 독권은 누가 가지고 있어요? 해석자에요. 그 해석자가 뭐냐 하면, 언어와 기호의 문자의 발명자인 동시에 해석자가 되겠지요. 의미를 제공한자가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그들은 바로 그 당시에 임금을 도와서 지식층의 최고 권력을 유지하는 겁니다. 현재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수 천년동안 진행되고 있어요. 카스트제도의 직급이 뭡니까? 바로 언어를 산스크리트어 언어를 집어넣은 거예요. 언어로 해서 신과 인간 사이에 중개 작업을 하는 겁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모든 동양이고 서양이고 간에 인간은 항상 이러한 자연 속에 살기 때문에 자연이 주는 횡포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반드시 뭘 찾을 수밖에 없다? 신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걸 흔히 말해서 종교라고 하는데 오늘날 교회 어떻습니까? 똑같지요. 교회 목사가 이 짓 하고 있다니까요.
교회 목사라 해서 별난 줄 압니까? 교회 목사가 어떻게 처신하느냐 하는 것은 교회 목사 본인이 정하는 게 아니에요. 찾아오신 고객님들의 요구에 따라서 그렇게 맞춰줘야 돈이 나오는 거예요. 교회가 돈이 있어야 교회가 돼요. 바로 이런 세계에 대해서 지금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도 엉터리고 저것도 엉터리라면 그러면 복음은 왜 엉터리가 아닌데? 라는 질문이 의문점이 반드시 나와야 되겠지요. 복음은 왜 이러한 종교에 포함되지 않고 신탁과 계시에도 포함되지 않고 이렇게 많은 신이라는 것에 하나님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사도바울이 본인이 원하는 인생을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신을 알아서 어떻게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그러한 노림수 심보 이런 것은 일체 허용될 수 없습니다. 일체 인정을 못 받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어디 가느냐, 어디 가는 게 아니에요. 그냥 떨어지지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인간이 만든 가상세계입니다.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간은 언어로부터 갇혀있기 때문에 갇힌 상태에서 천국을 그려봐야 이것은 천장의 타일처럼 그냥 자기 이미지만 세상에서 누렸던 그 이미지만 여기서 자기 그림으로 그냥 꿈으로 그릴 뿐이지 여전히 이 세계에서는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유일하게 빠져나오신 분이 계신데 바로 사도바울이나 베드로가 전했던 복음 뭐냐 하면, 죽었다는 사실이에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일만에 살아났거든요. 이 살아남이 여기서 말하는 살아남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한 사실이에요. 요 삼일이라는 단절기간이 굉장히 중요한데 요 삼일이라는 단절기간은 호세아에 나오는 예언대로 된 겁니다. 요 삼일이라는 단절기간은 이 땅에서 죽었다가 이 땅에서 삼일 만에 살아난 그 단절 삼일이 아닙니다. 요 삼일은 이 세계에서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다른 세계와의 단절을 삼일에다가 연결시킨 겁니다. 요걸 가지고 뭐냐 하면, 이걸 ‘언약적 단절’이라고 저는 이렇게 명칭을 붙이고 싶어요. 언약적 단절을 제가 처음으로 썼는데,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언약을 앞장세워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 배후에 대해서는 인간은 모르게 돼 있어요.
예를 들면, 이쪽 주머니에 돈이 얼마 있는지 아시는 분은? 모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런 식이라니까요. 낌새라도 있으면 되겠는데 인간이 모르는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이 다가설 때, 그게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이. 사람이 노아 당시에 악했다. 악했는데 이 악한 것을 어떻게 처리할까? 사람들보고 물었어요. 악한 것을 어떻게 처리할까? 방주 만들어 구원한다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어요? 노아 본인도 몰랐던 거예요. 노아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이고. 그게 언약이에요. 노아언약이에요. 노아언약이라는 것은 몰라요.
언약이란 개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천국이라는 것, 지옥이라는 것, 그게 다 허구라는 겁니다. 언약은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그런 천국은 그건 우리가 일방적으로 하나의 희망처럼 우리 아이디어에서 나온 만든 건데, 그 만들은 재료는 이 세상에서 들은 것 가지고 만든 거니까 아무 효과 없습니다.
천국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단절을 통해서 주어질 때,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요 주어진 이것을 제가 얼마 전에도 강의했습니다만,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가려고 자기 목숨 내놓을 때 예수님 하는 말이 “너는 죽어도 내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 분명히 언질을 했습니다. 그 말은 뭐냐, 죽어도 이 단절을 극복할 수 없다. 니 목숨 바쳐도 이 단절을 건너갈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니는 죽으면 그냥 죽는 것이지 죽었다고 해서 천국 도착하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그 뒤에 나온 말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그냥 집에 가 있거라, 된 거죠. 그 다음에 베드로 입장에서는 천국 가는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는데, 언약에 약속이 있어요. 약속이 뭐냐, 처소가 마련 안됐다는 거예요. 처소 마련 안됐다는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해요.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 마련되면 다시 너한테 올게. 지금은 처소가 마련 안 된 거예요. 처소가 마련되어야 천국 간다는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온 아이디어입니까? 이건 누가 알고 있었어요? 어느 인간도 아는 인간이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 혼자 자기들끼리 꼬불치고 있는 거예요. 이걸 사도바울은 창세전부터 숨겨진 비밀이라고 했는데.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어요. 아무도 몰라요. 예수님께서 처소가 마련되면 마련됨과 동시에 마련됐다는 소식과 동시에 그 소식이 전달된 사람에게만 이미 그 처소가 있다는 거예요. 이미 네 처소가 마련되었음이란 통보를 해주면 이것은 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미.
마련됐기 때문에 통보하는 것이지 의사 물어보고 새삼스럽게 알았어, 내가 마련해 줄게. 이런 건 없어요. 처소가 마련되면 너희를 거기로 데려가게 하겠다.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보혜사라 해요. 보혜사가 오는데 보혜사란 말이 어렵지요. 보혜사인데 요즘말로 번역하면 간호사에요. 간호사를 니한테 주겠다고 하는 말은 우리를 무엇으로 보느냐, 완전히 치매환자로 보는 거예요. 3등급이상 치매환자로. 집에서 나가 안 들어오는 치매환자. 이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해요. 집이 어딘지 몰라요. 다 잊어버렸어요. 며칠 전에 우리 어머니가 큰 아들보고 “아저씨, 누구세요? 나하고 연애하려고 여기 왔어요?” 잠시 데려가려고 하는데. 그러니 제가 가서 “어머니, 제가 누굽니까?” “니가 맏이지.” “이 아저씨는 몰라. 누군지 모르겠어.” 안 찾아오니까 단기기억에서 다 깨진 거예요.
간호사, 보혜사가 꼭 우리와 마찬가지에요. 교회 간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고 백날 교회가도 능력 없는 목사만 있을 뿐이고 더 능력 없는 장로만 있을 뿐이고. 같은 교인들끼리 똑같은 치매환자들끼리 모이면 뭐 하는데. 찬양한다고 구원 받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예배 참석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누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되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만 오는 게 아닙니다. 아까 방금 뭐라 했습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반드시 그 안에 뭐도 있다? 니 자리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너는 이미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니가 살라고 준 세상이 아니고 너보고 죽으라고 준 세상이라는 거예요. 행복? 행복 같은 소리하네. 이 세상에서 행복은 왜 노려요. 이걸 바로 한 자로 성경에서 ‘복’이라고 합니다. 전혀 우리의 행복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기를 뭐만 전하는가 하면, 다른 거 다 떼어버리고 쉽게 전하면 예수님은 죽었는데 사흘 만에 부활했다. 죽은 이유는 모든 인간은 이 세상과 더불어 이미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옥 같은 죽은 세상을 통보하기 위해서 하나님도 같이 뛰어내려서 같이 죽은 거예요.
따라서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데 예수님 홀로 성령의 힘을 입어 빠져나와서 우리에게 통보해 주었다는 겁니다. 사도행전17장30절을 봅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이게 사도바울의 복음의 핵심이에요. 행복하세요! 행복하소서! 이거 전하려고 돌아다닌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행복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면 삶의 보람이 있고 가정이 행복합니다. 이거 전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교회가 훌륭한 아버지 만들기 그런 짓하는 게 교회가 아닙니다. 화목한 가정 만들기 그런 게 교회가 아니에요. 교회는 이것밖에 없어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거기서 행복을 얻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떻게 행복해질까 하는 그 발상 자체를 포기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목 졸라 죽인 세상에 거기서 무슨 행복을 원하느냐 이런 식이지요. 진짜 좋으신 분이 다녀갈 때, 이렇게 실형을 당했는데 다른 인간이야 실형당해도 마땅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제 수요일날 이야기했잖아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떨어졌잖아요. 그걸 보면서 아휴, 다행이다 이리 하는데 이걸 다행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했지요. 떨어져야 마땅한데 이 대전 시내에 떨어져야 마땅한데 왜 안 떨어지고 비슷한 비가 오고 이게 왠 은혜지! 이리 되어야 된다 말이지요. 유황불 안 떨어진 것을 이상히 생각하지 말고 떨어지는 게 정상인데 안 떨어지는 것을 오히려 “아, 참, 하나님이 계속 사랑해 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 말이지요. 덤프트럭이 와가지고 박으면 사실은 온 식구가 죽는 게 정상인데, 아이 둘은 멀쩡하고 부부는 병원에 다니고, 요 정도가 좀 이상하다 생각이 안 드나요? 이게 범사에 감사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낮아져야 범사에 감사하겠습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 하잖아요. 제일 밑바닥까지. 예수님 오시기 전에 제일 밑바닥까지 간 사람이 욥이에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제일 위에 산 사람이 솔로몬이었어요. 솔로문은 요강도 금이었습니다. 숟가락도 금이고. 세계에서 재벌해도 솔로몬만큼 화려하게 산 사람이 없어요.
사람이 비참하다, 비참하다 하지만 욥처럼 그렇게 비참하게 산 사람이 없어요. 욥이 당한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솔로몬보다 더 화려한 분이 욥보다 더 낮은 십자가까지 복종하시고 다녀가심으로서 현재 너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정체가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지요. 죄 용서 받았거든 더는 기대하지 마세요. 죄 용서 받았거든 다른 기도 응답은 욕심입니다. 용서받으면 됐지, 더 이상 뭘 더 원해요. 다른 걸, 기대하고 기도한다는 자체가 죄 용서는 이제 시답지 않다는 뜻이거든요. “에이 씨, 이런 거 말고, 내가 원하는 거 달라니까.” 죄 용서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이런 거 주지 말고 우리 아이 지금 고3인데 수능 점수 팍팍 올려줘서 재수 안하게 해 달라, 그런 거나 기대하게 된다 말이지요. 그러니 교회 가보세요. 교회가 지옥이 다른데 없습니다. 온 지옥을 다 모아났어요. 그 기도하는 꼬라지하고는.
예배시간에 기도하고 당회장부터 조국통일까지 민족통일까지 다하고 이 석기 그 놈 잡으라고 기도까지 다 할 건데. 앞으로. 장로부터 그런 기도를 해. 복음은 하나님의 명예라 했지요. 하나님의 자존심입니다. 이 복음 때문에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아들이 베풀어준 마지막 찬스와 그 혜택을 하나님의 순정한 심정을 그대로 니가 거기에 풍덩 빠져버려라. 그러면 세상의 시답지 않은 그것 가지고 니가 마음 빼앗길 일은 없다 이 말에요. 사도바울이 그런 것을 증거 하니까 어떤 소동이 일어났느냐 하면, 19장 22절부터 41절까지 전체 내용을 한꺼번에 확 갑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전하니까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뭐하는가 하면, 아데미라는 여신이 있어요. 아데미라는 여신을 모시는 큰 정각, 신전이죠. 신전을 에베소에다가 크게 지었습니다. 왜 에베소에서 아데미라는 신전을 지었느냐 하면, 그 당시 그리스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로마가 커져서 그리스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가 로마한테 세금을 바치고 로마에게 잘 보이려면 로마 사람들이 믿는 신을 같이 숭상하는 티를 내게 되면 여기는 세금혜택을 많이 받게 돼 있어요. 실제로 에베소는 세금혜택을 많이 받았어요. 여기 아데미라는 신전을 세웠기 때문에.
그 아데미라는 신전이 이게 어떤 신인가 하면, 여신인데요. 서양미술사에 보면 이리 되어 있어요. 하체는 사람인데 몸체는 불룩 불룩 튀어나온 멍게같이 온통 애기한테 젖 주는 여자의 젖가슴으로 온통 범벅이 된 그런 여신이 있어요. 이걸 흔히 말해서 다산의 여신이라 해요. 원래 쓰스라 해요. 아데미하고 같은 뜻의 쓰스입니다. 아데미신이 쓰스에서 나왔는데, 쓰스라는 게 일본 회, 쓰시가 아니고 이것은 제우스에서 나온 쓰스인데, 제우스가 뭐냐 하면, 제우스신이 처음에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아까 유럽의 크레타 문명에서 나왔다 했지요. 그 문명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메소포타미아 현재 이라크와 이집트에서 건너온 거예요. 건너 올 때 이 쪽 신, 팔레스타인 신의 최고신이 뭐냐 하면, 엘이라는 신입니다. 엘 신은 이것은 추상적인 신이에요.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는 손 떼고 하늘나라에서 팔짱 끼고 점잖게 있는 신입니다. 그러면 이 엘 신이 있고 엘 신 밑에 CEO 일종의 실용적인 신이 있어요. 최고의 신은 항상 추상적이기 때문에 숫자로 하면 1이에요. 1이 있지만 1은 세상에 변화가 많으니까 어떻게 깨져야 돼요? 1은 다양성으로 깨져야 되거든요.
동양에서는 태극이 있지만 태극에서 음양이 갈라지잖아요. 항상 변화가 있기 때문에 음양의 조립에 의해서 2,4,8,16...좍 퍼진다 말이지요. 점치는 사람들 그런 거 가지고 점쳐요. 엘이라는 추상적인 신은 어디 가있느냐 하면, 현재 이란에서 제일 높은 아라라신 그 위에 가있고 그 밑에 농토 짓는데 실용적으로 쓰여 지는 그러니까 전담반이라 할까, 부서별로 전담하는 실용적인 신이 있어요. 그 신이 바로 바알신입니다. 구약성경에 바알신은 그렇게 나와도 바알신이 무슨 신인 줄 알아먹어야 성경을 이해를 해야 되는데, 바알을 섬겼더라, 바알을 섬겼더라 했는데 지금 우리는 바알을 안 섬기잖아요. 바알이라는 것은 잘 듣지도 않고 그러면 우리는 우상숭배 안하는 셈이 된 거네요.
그 당시에는 산업시대가 아니고 농토, 농경시대입니다. 노동집약적 산업이 농경시대를 하면서 계급이 생긴 겁니다. 그 계급에서 아까 말한 카스트제도, 성직자들이 지배하면 국가가 안정이 된다 해요. 안정이 되면서 나중에는 법이 나오지만. 여기 바알의 신은 곡물의 신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에게 잘 보여야 농사가 잘됩니다. 그래서 참 희한한 게 옛날 사람들이 희한한 게 사람은 태어나 죽는데 태양은 도무지 죽지를 않네요. 태양은 영원해. 그 태양신이 뭐냐, 제우스에요. 신의 특징은 인간은 소멸해도 신은 영원하다. 그런데 태양만 영원한 게 아니고 영원한 게 또 있어요. 밤만 되면 나오는 게 있네. 북극성, 북두칠성, 사람들은 아까 그걸 자연의 매력이라 했어요. “아이고, 나도 살고 싶어, 씨!” 뭐처럼? 저 별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애인이 죽으면 어디에 간다? 하나의 별이 되어서 올라간다 해요. 별은 금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변에는 가스로 되어 있어서 살지도 못해요. 그 애인 찾지도 못해요. 죽어도 거기에 없어요. 거기에 잘 계십니까? 백날해도 없어요. 그거 찾는 이유가 사실은 옛날 자기 모습이 그리워서 안부 묻지, 죽은 남자가 그리워서 사는 게 아니고 그 때가 좋았다 그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 그리워서 하는 겁니다. 자기 애인이 하늘의 별이 되어 있을 것이라 하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애인이기 때문에 그렇지, 지가 미워하는 여자 같으면 절대로 별이 안 되지요. 별이 떨어져야 돼요. 그래서 좋은 사람은 별이 되고 악한 자는 별이 돼도 땅에 떨어져야 되고.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마귀는 뭐처럼 떨어진다? 별처럼 떨어지고. 12제자가 예수님과 갈 때,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더라 하지요. 그 당시의 문화입니다. 그 당시 문화의 모습으로 주님의 복음을 썼지요. 문화일 수밖에 없는 게 언어자체 그 뒤에 보면 뭉치가 있거든요. 모든 개념은 언어라는 게 문화의 피부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가 뭐냐 하면, 관습입니다. 관행, 관습,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 무조건 그렇다는 거예요.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야. 왜 그런데? 하면 문화야! 우리 시집의 문화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게 우리의 전통이야! 이건 끝난 문제거든요. 그래서 남자가 하늘이고 여자가 땅이기 때문에 여자가 키 크면 안 된다니까요.
이 기능적 신들을 굉장히 사람들은 좋아했습니다. 이사 가는 신은 따로 있고, 밭 맬 때 신 따로 있고, 추수할 때 신 따로 있고, 씨 뿌릴 때 신 따로 있고, 그 때마다 일 년 스케줄을 할당을 해줘요. 2월은 삼신할머니, 애 전문 산부인과 쪽이에요. 일 년 스케줄을 하는 거예요. 신께서 일 년 단위로 돌고 돌게 만들었으니까. 태양신은 매일 그대로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태양을 바라보면서 있고 그리고 누구 말 들어야 돼요? 태양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 태양이 그냥 태양이 아니고 실제로 비 내리게 하고 태양이 비구름 바꾸니까 사람들은 꼼짝 마라, 하는 식으로 태양신의 모든 에너지 속에 우리는 갇혀있는 꼴이 되는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수력발전, 화력발전, 원자력발전 그거 다 어디서 나온 겁니까? 지구는 에너지 어디서 나온 거예요? 과학적으로 태양에너지지요. 안드로메다에서 받은 거 아니잖아요. 태양에서 나왔잖아요. 태양의 흑점이 안 좋으면 비행기도 못 뜨잖아요. 그 정도로 우리는 태양에 민감하니까 이것을 옛날식으로 바꿔보자 말이지요. 그럼 우리는 이 자연에서 꼼짝 마라, 하는 식으로 하더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자연의 말을 잘 들으려면 뭘 바친다 했습니까? 제물 바치는데 이 제물 할 때, 은감실, 은장색이라 하는 게 있어요. 은감실이라 하는 것은 안치되어 있는 중요한 장소 지성소 있고 은으로 만든 모형 아데미가 있어요. 쓰스가 있어요. 쓰시란 말은 제우스에서 떨어진 것, 원래 쓰스가 못 생긴 여자가 된 이유가 운석에서 나와요. 운석은 어디서 떨어집니까? 하늘에서 떨어졌지요. 하늘은 누가 살고 있는 동네입니까? 신들이 사는 동네지요. 신들이 사는 동네에서 운석이 떨어졌다는 말은 신이 있어가지고 위에서 장난치다가 휙 하고 던지니까 신의 세계에서 던진 부스러기가 하나 뚝 밭에 떨어졌으니까 그것은 뭡니까? 신에서 떨어졌으니까 신의 세계의 일부니까 요거만 쥐고 갔다 빌면 우리의 영혼은 어디로 갈 수 있다? 신의 기호에 따라서 하늘나라 가는 겁니다.
하늘나라 간다는 말은 뭐냐 하면, 늘 자연에서 시달리는 생애를 이런 신과 함께 살고 싶다는 인간의 종교적인 여망을 표현한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필요한 것이 신전 필요하지요. 제사장 필요하지요. 모형 필요하지요. 그 다음에 제물이 필요하거든요. 신은 반드시 먹인 게 있어야 신이 기분이 좋아져요. 꼭 이렇게 제물을 바쳐야 좋아져요. 만약이 큰 일이 생겼다 하면 푼돈 가지고는 안 되고 큰일이다 싶으면 아예 그 왕이 자기 아들까지 내놔야 돼요. 시시하게 촌의 노인하나 죽여 가지고는 신께서 이게 성의가 없구나! 나오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왕이 다 결정해가지고 제 아들 바치겠습니다하고 아들 바치면 신께서 감동하사 가뭄 때 갑자기 비구름이 쏴하고 쏟아지면서 과연 우리의 왕은 신과 인간 사이를 중매하는 신적 존재라는 것을 확인이 되고 그 왕의 아들이 대를 이어서 왕이 될 확률이 높아지는 거예요. 이제는 쿠데타를 백성들이 허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져요. 그래서 왕들은 자기 재임기간에 어떻든 간에 자기가 신편에 서있다는 것을 세뇌시킬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다 만들어내요. 거기에 필요한 것은 무당들이 바람잡이 역할을 해줘야 됩니다.
조선시대에 궁중의 비화, 비사에 보면 다 그런 거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종묘사직을 그렇게 중요시 여깁니다. 종묘사직이 뭐지요? 종묘사직이라 하는 것은 중국에서 온 전통인데요. 왕가의 왕들의 무덤입니다. 지금도 종로4가에 가면 종묘사직이 있습니다. 종묘사직을 통해서 어디 감히 범접치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일반 백성들은 감히 신의 자리를 넘보지를 못했어요. 감히. 그렇게 권위가 있어줘야 나라가 안정이 됩니다. 쥐나 개나 왕 다되면 힘만 있으면 다 왕 되려고 하면 나라가 약해지면 외지에 침략을 당하니까 그걸 지키기 위해서 왕이 권위가 있어야 돼요. 이게 참 아이러니한데요. 대통령이나 국가의 수장이 권위가 있기 위해서는 독재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독재가 안 되면 외세가 넘보게 돼요. 다른 나라들이 얏잡아 본다니까요. 나라가 하나를 구심점으로 해서 강해지면 독재는 될지언정 다른 나라가 단결심을 보고 함부로 넘볼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해 버리니까 이 사람들이 장사가 안 된 거예요. 그래서 19장에 보면 데메드리오가 뭐냐 하면, 여기에 작은 새끼 여신 아데미 만드는 대장으로 사업 협회장이에요. 사업협회장이 자기 부하들과 같이 동업자들과 같이 이 사도바울이 전하는 것 때문에 우리의 장사가 안 된다. 여기서 물러가게 해달라고 누굴 잡았는가 하면, 19절에 보면 바울과 같이 다니는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라는 두 사람을 연극장으로 가서 잡아 죽이려고 할 때, 어떤 사람은 사도바울보고 가지 말라 했어요.
32절에 보면, 유대인 너희들도 우리 아데미 선전에 동참하지 않았잖아! 이리 나온 거예요.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왜 기독교인들이 한 것을 왜 우리 보고 하느냐 해서 33절에 보면, 알렉산더라는 변호사를 내세워가지고 니가 알아서 처리해라 해서 내밀었거든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왜 가만히 있는 우리보고 공격해! 하면서 변호사 내세우면서 그 변호사가 누굴 불렀는가 하면, 35절에 서기장을 불러서 한마디로 경찰서장을 불러서 저 사람들이 유대인보고 공격하더라 하니까 서기장이 하는 말이 “여러분, 우리가 이 에베소가 아데미 신전을 섬기기 때문에 많은 혜택을 받고 있고 아데미 전각을 지키는 전각지기로서 우리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정신을 좀 차리고 진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동할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고 따질 것을 따져보고 합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전각을 훼손하지도 않았고 도적질 하지 않았으니까 빨리 풀어주시고 빨리 정신 차립시다.” 하고 통제에 들어갔어요. 그게 41절까지 내용입니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사도바울에 의해서 에베소에 문화적 충돌이 벌어졌잖아요. 벌어졌을 때에 갑자기 누가 도와줬다? 거기에 복음을 모르는 유대인들이 오히려 유력한 사람들이 되어가지고 사도바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그렇게 조치를 했을 때, 복음 전하는 사도바울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야, 참, 천국을 곱게 갔으면 좋겠는데 꼭 복음 전하면 소동이 벌어지게 만드는 이 세계. 그러니까 뭔가 쑤시면 거품이 일어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로 에베소에서 이러한 소동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10분 쉽시다.
질문 중 바알에 대하여.
바알은 곡물의 신인데, 기능적 신으로 보시면 됩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바알, 무역하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신이 있지요. 어부에게는 다른 신이 또 있고. 어떤 바알이 많은 것은 대다수 농사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알 신은 뭐냐 하면, 곡식은 겨울 되면 죽어도 봄 되면 다시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바알 신에게 잘 대하게 되면 이번 올해 농사도 잘될 것이라 보는 겁니다. 엘 신은 이미 만들어 놓고 밑에 있는 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해놓고 그 밑에서 하는 신은 개인적으로 협상이 가능한 신으로 기능적인 신이 바알신입니다. 아데미 같은 경우에는 젖이 많기 때문에 애를 못 낳는 사람이 빌면 애를 낳을 수 있는 그런 신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신화적 세계에 주님은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