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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3. 8. 23) 1강자유게시판히브리서

광주 강의(2013. 8. 23) 1강

이름 : 서경수(IP:218.159.161.108)

광주 강의(2013. 8. 23) 45-1

에스겔 44장 9절 말씀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지요. 성소는 하나님과 인간이 유일하게 만나는 지점입니다. 누가 이것을 정했는가 하면, 야곱이 형에게 쫓겨나서 벧엘에서 잠을 잤어요. 그 때 꿈에 사다리가 나타났지요. 이 사다리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옛날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바벨탑을 쌓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바벨탑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바벨탑으로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사다리를 내려 보내 하늘과 연결되도록 했습니다. 여하간 야곱에게 꿈으로 이런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꿈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이 세상 현실이 두 종류로 구분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난 현실이 진짜 현실입니까, 아니면 꿈이 깼을 때가 현실입니까? 꿈이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꿈은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꿈을 꾸지 않더라도 밥 먹고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지요? “야곱의 언약이 없으면 못 살 거야. 난 죽고 싶어.”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야곱이 꿈을 꾸므로 말미암아 야곱으로 하여금 무엇을 접하게 되는가 하면, 꿈속에 나오는 현실,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는 ‘비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비밀인가 하면 ‘감추어 놓은 비밀’입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면 에베소서에 보면 ‘창세전부터 감추어 놓은 비밀’입니다. 즉 택한 백성에게만 알려주시고 지옥 갈 사람에게는 절대 알려주시지 않는 그 비밀이 언약을 통해서 야곱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세상 사람이 말하는 현실도 온 몸으로 다 느끼고, 동시에 언약이 자아내는 그 현실도 느낍니다. 이 두 가지가 다 나오는 것이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다.’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만약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그럼 당신은 밥 안 먹나? 먹잖아. 그렇다면 당신이 식사를 할 때 당신이 먹은 거야, 아니면 그리스도가 먹은 거야?”

바울의 답변은 “너희들은 두 개의 현실이 같이 있다는 것을 몰라. 너희들이 아는 현실은 하나 뿐이야.”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뭐든지 내가 하는 거예요. 내 인생 내가 사는 거지요. 그런데 꿈이 현실인 자들의 인생은 누가 살게 합니까? 하나님이 야곱을 언약의 사람 이스라엘로 만들어 냅니다.

강의 전에 ‘허무’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이미 처소가 마련되어 있으니까 성령이 찾아오는 것이나 야곱이 꿈을 꾸는 것이나 같은 거예요. 사실 그 내용은 성령이 오게 되면 전부를 알고, 야곱처럼 꿈으로 알게 되면 부분만 아는 거예요. 히브리서 1장에 나오지요. ‘옛날에는 부분으로 알게 해 주셨는데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알게 하셨다.’ 감춰놓은 그 비밀로 인하여 우리는 성도로 부름을 받고, 이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생명책에 기록된 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사람들이 이해하는 이야기를 하면 이쪽 사람들이 마치 구원 받는 사람처럼 사기를 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사기 치지 않으면 목회가 안 되는 세상입니다. 사기 친다는 말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들을 제공함으로 교회가 융성해지는 그런 판이 되기 때문에 계속 사기를 치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택한 백성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 골라서 해야 됩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다리가 왔고, 그 끝이 하늘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이곳을 ‘하늘의 문’이라고 했지요. 이 ‘하늘의 문’을 에스겔 44장 9절에서는 ‘성소’라고 했어요.

성소는 거룩한 공간, 특이한 장소입니다. 특이한 장소가 나중에 성전이 부서진 후에는 특이한 사건으로 전환되어 우리 몸이 성전 되게 하는 효과를 줘요. 하여튼 야곱의 언약에 의하여 하늘의 비밀이 땅에 내려오고, 그 비밀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는 그런 지정된 장소가 성소입니다. 그런데 이 성소에 못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마음과 몸이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못 들어와요.

몸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표피를 칼로 자르면 그것이 할례니까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마음의 할례는 어떤 칼을 사용하면 됩니까? 마음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은 육신을 붙잡을 수 있지만 마음은 육신에게 붙잡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인간을 장악해요. 그래서 인간이 자기 몸을 붙들고 수술하듯이 마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하려면 이미 할례를 받은 분이 와서 우리 마음을 다뤄야 됩니다. 내 마음은 내 육신의 뜻대로 다뤄지지 않아요. 자기 마음을 자기가 알아서 다루는 것 같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절대로 안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사람의 육신의 욕구보다 더 범위가 크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이 미운데 안 미워하려고 노력한다는 자체가 우습지요. 왜? 이것은 밉다는 말이거든요. 자기가 미워하는 탤런트가 드라마에 나오면 그 드라마는 보기 싫어요. 왜 미운가? 미운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며느리 셋 중에 첫째 며느리가 미워 구박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말립니다. 왜 며느리를 미워합니까? 그냥 미워요. 내 마음 나도 몰라요.

반대로 좋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데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그냥 좋아요. 북한의 김정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좋다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끊어내는 것은 피동적으로 당할 뿐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은 이미 마음에 할례를 받았던 그분에 의해서만 마음의 할례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가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의 할례는 성사되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은 허무한 것만 지향합니다. 성도가 아닌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30년 예수 믿었지만 역시 내 인생은 내가 가꾸는 것이지 누가 와서 내 인생을 살아주는 것은 아니었어. 하나님도 이제 놓고 싶다.” 이것이 성도 아닌 자의 마지막 솔직한 고백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성도는, “그래, 평생 내가 주님께 욕만 돌리고 평생 주님 미워하다가 이제 주님 품에 안기는군요.” 이렇게 고백합니다. 평생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짓밖에 안 했는데 결국 나는 주의 품에 안길 때, 누가 누구를 미워하는 것을 ‘왜 미워하냐?’고 따지지 못하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을 ‘당신은 왜 그를 사랑하냐?’고 따지지 못하는 것처럼, 내 마음이 주의 품에 안긴다는데 누가 시비를 겁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주님께 욕이 되는 짓뿐이었는데 이런 인간이 주의 품에 안기게 되니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모든 영광은 주님이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네가 성령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리라.” 공짜로 주신 것을 아는 거예요. 우리가 생산한 것 말고 공짜로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가 했다.”고 하는 것은 성령의 일이 아니고 “내가 한 것도 없는데 공짜로 받았다.”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 44장 9절에 나오는 몸의 할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림을 보세요. 이건 에스겔 45장 내용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그림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여기 중앙에 검은 부분이 성소입니다.

성소란 감추어진 현실과 나타난 현실이 이어지는 특이한 공간입니다. 현실이 감춰져 있어요. 현재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감춰진 것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인생 자체가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몸이 실체인줄 아는데 사실은 그림자입니다.

누가 움직이니까 우리 몸이 움직이는 거예요. 나의 본체가 움직이니까 내가 움직입니다. 나의 본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움직이시니까 성도가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야곱이 알았지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꿈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런데 꿈은 자기 능력 밖입니다. 꿈을 통해서 진짜 현실을 주사기로 약물 주입하듯이 주입하니까 야곱은 자기가 생각한 인생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현실을 살아가게 되지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야곱을 이해 못하게 됩니다.

나중에 야곱이 손자에게 손을 어긋맞겨 머리에 안수하니까 요셉이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창48:18).” 라고 했어요.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이해 못했습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현실이 진짜 현실이다. 그래서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현실은 대비되고 서로 공격하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너는 몰라.’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그런 악한 힘에 의해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것이 현실이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현재 우리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은 오히려 반대되는 현실이고 진짜 현실을 공격하는 그런 속성을 가진 현실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지요. 그게 성소입니다.

성소 주변에 제사장을 위한 땅이 있습니다. 이게 1만 척입니다. 그 위에 레위인의 땅이 있습니다. 이것도 1만 척. 그 다음에 왕의 땅이 있고, 요단강과 지중해가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에스겔 49장에 보면 나중에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하나님이 이야기한 성전이 성령에 의해서 지어져서 완공될 때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모양새라는 것입니다.

이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늘나라와는 좀 다르지요? 계시록에서는 지중해도 없고, 요단강도 없고, 왕의 땅도 따로 없고, 레위 지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에스겔에서는 왜 이런 것을 거론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모양이라고 했을까요?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최종적인 천국의 지도를 땅에 그려놓고 그려진 도판을 떠내서 그것을 그대로 하늘에 올라가서 붙이고, 그 외에 남은 땅은 성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 유일한 완성된 성소가 하늘로 올라가버리면 이 지상에는 없는 거예요. 성소가 없으면 그곳은 지옥이고 불바다가 됩니다.

그러면 잔디를 떠내듯이 성소를 떠내서 하늘나라로 올라가면 하늘나라의 어느 지점에 박힙니까? 그런데 하늘나라에는 이것이 없어요. 하늘나라에 이것이 박히는 것이 아니고 땅의 세계가 하늘나라로 올라가면서 하늘나라가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사람이 있는 이곳을 땅이라 하고, 사람들이 닿을 수 없는 위쪽을 하늘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인식은 ‘인간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45장에서 땅에다 하나님의 지도를 그렸지요. 성소가 있고, 1만 척의 제사장 땅, 또 레위인의 땅, 왕의 땅, 그리고 백성들 땅. 이런 지도를 그렸잖아요. 그러면 ‘이 지도를 떠내서 하늘로 올라갈 때 하늘나라 어디에 이것이 있겠는가?’ 라고 질문을 했지요? 그런데 인간이 생각했던 이런 하늘나라는 없어요.

처음부터 인간이 생각했던 하늘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거예요. 죽으면 영이 되고, 혼이 되어서 하늘로 간다고 조작한 거예요. 이런 하늘나라는 없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땅과 대비(반대)되는 것입니다. 반대 개념에서 음이 있고 양이 있어야 양쪽 다 설명이 되듯이 땅에 인간이 있으면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땅과 하늘이 합쳐야 구조적으로 꽉 찬 느낌이 든다고 하는데, 이것은 땅에서 조작한 것입니다.

제가 ‘하늘나라가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하늘나라가 없다는 것이고, 진짜 하늘나라는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숨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숨어 있는 하늘나라가 내려온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 자체를 숨어있는 나라가 배척해 버립니다. 연극할 때는 넓은 저택도 있고 강물이 흐리기도 하지만 나중에 보면 천에 그림을 그려놓기도 하고, 또 합판으로 집을 만들어 놓기도 했지요. 연극에서는 칼싸움 하고 전쟁을 했지만 연극이 끝나면 배경으로 그린 천을 거둬버리면 좀 전에 있었던 모든 배경이 사라져 버리지요.

그동안 인간들이 하늘나라를 상상했던 것을 예수님이 둘둘 감아서 없애버려요. 그러면 그 자체가 허공이고 허무한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 하늘나라 이 모든 것은 없는 거예요. 지옥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 천국은 어디서 생기느냐? 심판 사건이 일어날 때 새롭게 돌출되는 거예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나쁜 짓하면 심판 받고, 착한 일하면 천국 간다.’라고 여기는데 이것은 연극 무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돌돌 말아서 태워버려야 해요. 인간이 생각하는 심판은 심판이 아니고 진짜 심판주가 오셔서 심판을 행할 때 비로소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이 분류가 돼요. 중요한 것은 사건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존재할 정당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내가 존재하는 것은 존재할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다.’고 여기는데, 그런 정당성은 없어요.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존재, 인간을 지은 것은 심판행위가 포함된 창조다.’ 인간은 심판을 빼버리고 그냥 창조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유(有)로 시작해서 유(有)로 계속 갑니다. 내가 없어져야 하고, 내가 심판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인간이 죽으면 없다고 하는 것은, 유(有)에서 나온 것입니다. 현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無)를 생각하는 거예요. 무는 이미 있다는 것을 전재로 한 개념입니다. 있는 것이 사라질 때 그것을 무라고 지칭하자고 해서, 유를 유답게 의미를 주기 위해서 무를 등장시킨 거예요.

그렇게 되면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지 심판이 아닙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토기장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사람들이 불쾌하게 생각했겠어요? 토기장이가 나를 만들었다면 결국 우리는 토기에 불과하지요. 사람들은 자신이 토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창의성을 발휘하기 때문에.

나는 토기장이 노릇을 하고 싶지 토기는 싫어요. 내가 나를 만들고 싶지 누가 나를 일방적으로 만들었다면 내 권한은 한계가 생기게 됩니다. 그 한계가 싫은 거예요. 나는 만들었다는 것을 빌미로 계속 나에게 간섭하는 것도 싫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도 싫어요.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로 자식에 대해 계속 간섭하게 되면 자식은 못 견딥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빨리 성장해서 부모로부터 독립하기를 학수고대하지요. 이게 바로 인간이 둘둘 말려야 할 천의 무늬인 것입니다. 인생은 허공에 쓴 낙서입니다. 열심히 뭔가를 썼는데 나중에 보니까 헛된 서판에 쓴 거예요.

그러면 천국과 지옥은 어디에 있는가? 그림을 다시 봅시다. 이 그림대로 에스겔에 나옵니다. 언약이 쓰여지면 하늘나라로 갈 때 이것을 그대로 만드신 분이 계십니다. 이 허무한 세계에 오셔서 사역하시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이 전부가 언약을 완성하시는 일입니다. 언약 완성은 에스겔을 완성하신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에스겔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이것을 완성하시고 올라가시면 비로소 생기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는 아무도 몰라요. 예수님만 아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 대답이 “너는 올 수 없는 곳이야.” 이 말은, 현재는 없는 곳,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만들어야 올 수 있는 곳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만들어놓고 집어넣는 거예요. 만들어놓고 집어넣는데 베드로가 이 나라를 어떻게 알고 따라간단 말입니까? 지난 수련회 강의에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y=x. 이것을 그대로 확장시켜서 미래에도 이대로 간다고 짐작을 해요. 이 원리를 ‘동일화’라고 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자아입니다. 그런데 y=x로 가다가 변곡점이 발생하지요. 즉 y=-x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때 동일화가 깨지면서 자아가 깨어집니다.

자아가 깨어진다고 하는 자체는 이미 이것이 응고된(딱딱하게 굳어진) 거예요. 자신은 자기 인생을 살았지만 주님이 변곡점을 발생시키면 이것은 순간적인 사건이 되는 겁니다. 자기 인생을 70년 혹은 80년 살았기에 굉장히 오래 산 것 같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한 순간에 휙 지나간 사건에 지나지 않아요.

호수에 독수리가 날아와서 물고기를 낚아 챌 때 우리는 이것을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호수에서 어떤 아줌마가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고 이 사건 때문에 앞의 독수리 사건은 잊어버리게 되지요. 오늘 뉴스에 온갖 사건이 있어도 며칠 후면 다른 사건 때문에 오늘 사건은 잊어버립니다.

전두환 추징금 때문에 계속 떠드는데, 큰 사건이 발생하면 전두환 이야기는 묻혀버려요. 내가 80여년 살다가 죽는 사건이 나에게는 최고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은 후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갑자기 죽게 된다면 내가 죽은 것은 아무도 기억 못해요. 인간은 복잡하게 고민하면서 오래 살아도 나중에 치매가 오면 그 모든 삶은 한 경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점’이란 시간의 테두리에 찍힌 한 순간 혹은 찰나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33년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인생이 33년입니까, 한 경점입니까? 한 경점, 다시 말하면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 앞에서 우리 인생은 얼음이 됩니다. 별 것 아닌 경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주님을 어떻게 섬길까?’ 하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 내가 섬기려면 나는 경점이 되면 안 되고 길게 늘어나야 됩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아침에는 주님을 섬겨도 오후에는 주님을 미워했다면 어느 지점을 나의 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자아는 y=x의 그래프입니다. 이것이 응고되면 이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제가 [게그 콘서트]를 보면서 뇌리에 박힌 것이 있어요. “잠시만요. 보라 언니, 바람 새고 가세요.”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데, 그 모든 흐름을 ‘잠시만요.’하는 그것에 굳어져 버려요. 내가 인생을 얼마나 어떻게 살았던지 “잠시만요. 십자가 한 번 보고 갈게요.”하는 그 순간,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합류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에스겔에 나오는 성전이 우리 생각에는 ‘언제 성전에 찾아가고, 언제 제사장 만나서 인사하고, 언제 제사 드리고 하지?’ 이런 모든 것이 고민 되겠지요? 그런데 주님은 “잠시만요. 십자가 한 번 보고 가세요.” 할 때 이 모든 것은 끝납니다.

십자가 안에 이 모든 것이 사건화 되어버립니다. 성령 받아서 십자가를 알게 되면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들이 십자가 안에 이미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죄인이고, 죄인에 대해서 에스겔을 완성하신 주님께서 이 말씀대로 우리를 성소화 시켜버리면 끝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에스겔 44장 9절에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했지요. 제가 묻습니다. 신약 시대의 이방인은 누구입니까? 성소가 사건화 되면 십자가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방인은 누구입니까? 십자가 복음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죠. 이들이 성소에,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에스겔의 해석을 아주 깔끔하게 해결했지요?

10절 봅시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주를 떠났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은 ‘그 죄악을 담당’해야 하는데 누구 그 일을 합니까? 다른 레위 지파가 합니까, 우리가 합니까, 누구 해요? 나는 죄를 담당할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외삽, 항상 나를 동일화시키고 자아가 나중에 잘 되기를 바라는 것 밖에 없어요.

나는 나의 존재의 정당성을 내포하고 있어요. 이것은 너무나 일방적인 생각이에요.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살 가치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의 창조 안에는 창조를 없앨 수 있는 심판 기능이 있어요. 예수님은 심판주로 오셨거든요. 이미 심판 기능이 있는데 우리는 이 심판을 빼버립니다. “감히 누가 날 심판해?”

우리는 y=x로 항상 미래에 대해서는 내가 잘 되는 쪽으로 생각해요. [러브레터] 영화를 예로 들면서 설명했지요. “오깽끼데스까?” 산을 향하여 ‘거기 잘 계십니까?’라고 한 것은, 등산 가서 죽어버린 옛날 남자 친구가 그리워서 옛 친구 집 주소로 편지를 보내니까 답장이 왔잖아요. 여자가 왜 편지를 보냅니까? 남자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남자를 사랑했던 자기의 행복했던 순간 때문에 편지를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현실이란 자기 확대입니다. 자기 의미의 확대를 사람들은 현실이라고 합니다. 평생 나는 주님께 욕만 보이다가 나중에는 금방지게도 주님 품에 안깁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담당자가 필요한데, 죄 담당자가 누굽니까? 이 에스겔 말씀처럼 담당하신 그분이 장차 에스겔을 완성하시면서 오게 하셔서 죄 있는 우리가 하나님과 통하는 성전, 성소, 벧엘이 되게 하시는 그 원대한 시나리오가 에스겔에 이렇게 나와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3. 9. 9. 09:21 녹취 마침)

첨부파일 : 45-1.hwp (48.0K), Dow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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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