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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제사장 언약 130906강의고린도후서

제사장 언약 130906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한윤범(IP:14.♡.134.60)

13-09-11 11:20

20130906a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제사장언약
(강의:이근호 목사)

내용은 제사장 위임식입니다. 제사장 위임 안 하면 우리한테 구원이 없는 겁니까?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서 처음 안다 하고 전혀 성경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고 단지 어렴풋이 하나님 믿어야 되겠다는 그것만 알고 교회 왔다고 칩시다. “아저씨는 하나님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그럼 잘 다니세요.” “예.” “하나님 인정합니까?” “인정합니다.” “열심히 착하게 살고 교회 잘 다니시고 교회 말 들으면 구원받습니다.” 이게 얼마나 간편합니까? 얼마나 수월해요.

하나님 인정하니까 죽어서 하나님 계시 곳에 합류 될 수 있다. 나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설마 버릴 리야 있겠는가? 나는 아버지가 누구고, 내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알기 때문에 다시 집에 오게 되면, 아버지가 내 아들이 이제 왔어 하고 영접해 줄 거니까. 그런 관계에서는 제사장 위임식이 왜 필요한 거죠? 오히려 귀찮지 않습니까? 뭔가 간단하게 처리할 문제를 제사장 위임식이 들어와서 출애굽기 29장 때문에 복잡하게 되면 사람들 구원하는데 지장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어요.

그럼 뜸 들이지 말고 정답부터 이야기해야 되겠지요. 구원은, “너, 거기 있나?” “있습니다.” “건져줄게.” 이게 아니라 구원은 없는 데서 구원이 돼요. 그러면 제사장 위임식은 모조리 다 걷어서 전부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언약궤와 블레셋이란 나라가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전에 수련회에서 이야기했지요. 만났을 때 이 블레셋이란 민족이 개입니까, 코끼리입니까, 캥거루입니까, 낙타입니까? 사람이지요. 그러면 이들이 사람인 게 확실하니까 사람과 언약궤가 만났다. 웃사가 언약궤 만질 때 코끼리가 아니고 두더지가 아니고 사람이죠. 사람이 언약궤를 만났는데 웃사가 언약궤 만졌다고 죽었지요. 그럼 도대체 언약궤에서 후쿠시마 방사능 나옵니까?

성경에서 언약궤가 심판입니다. 사람을 모조리 죽이는 상자에요. 언약궤가 블레셋이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들은 살아도 산 게 아니고 그냥 죽었다고 보면 돼요. 그리고 블레셋이 언약궤를 모셔 가려다가 잘못 만져서 많이 죽었잖아요. 엄청 죽었지요. 언약궤는 감당이 안 됩니다. 상자라 해서 이게 반짇고리 그런 상자가 아니에요. 이것은 여기서 왜 하나님이 인간 전부를 죽은 존재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하다. 그 정당성이 언약궤 안에 담겨 있습니다. 방금 제가 언약궤 이야기한 게 어렵다면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언약궤 정신이 완성된 게 십자가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한 사람이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라고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언약궤가 블레셋이란 사람을 만날 때 죽였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왜 살았습니까? 그게 산 게 아니죠. 언약궤 만지다가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서 언약궤 주변에 경비대대, 경비원들이 필요한 거예요. 경비원도 죽을 수 있지요. 워낙 언약궤가 무서우니까. 그 경비원 하라고 아예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완전히 경비원으로 세웠는데 그 지파를 레위지파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처음에 한 걸 다시 이야기해볼게요. 나, 여기 있고 나 하나님 인정합니다. “목사님, 저 하나님 인정해서 교회 나왔습니다.” “그래요? 그럼 하나님 잘 믿으시고 착한 일 많이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이 만드신 걸 믿습니까?” “믿습니다.” “믿으면 하나님과 나중에 만나게 돼요.” 왜 이렇게 우리가 전부 다 납득이 되고 쉽게 갈 수 있는 문제를 왜 그렇게 안 하는 거예요? 제사장 위임식이 왜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냥 쉽게 하면 많은 숫자가 천국 갈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언약궤가 상당히 무서워요. 사람 죽이는 데에요. 사람을 저주해버리는 곳이에요. 언약궤는 누가 지키느냐 하면, 천사 두 분이 뚜껑에서 언약궤를 지킵니다. 천사가 어느 정도 무서우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지진, 기근, 전염병을 유발합니다. 그리고 천사보다 더 무서운 천사는 사탄이에요. 사탄은 허락도 없이 들락날락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일곱 귀신 지 마음대로 와요. 비밀번호 필요 없어요. 그냥 들어와요. “들어오지 마세요.” 하고 부적 붙여봐야 소용없어요. 들어와서 뭐 하느냐? 들어와서 예수 못 믿게 하는 거예요.

이미 인간은 거래 다 끝났습니다. 이미 사탄 손에 다 넘어갔기 때문에 인간이 영생을 얻겠다는 발상 자체가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이건 말도 안 돼요. 자기 주제파악도 못하면서 영생을 얻겠다니. 교회 있는 게 사기 같아. 영생 얻지도 못하는데 교회 세워놨단 말이죠. 그러면 유일하게 구원되는 교회는 언약궤를 모셔야지. 그러면 제사장은 살잖아요. 제사장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인데 제사장, 레위인 다 살았잖아요. 그 사람이 그냥 인간이 아닙니다. 뭘 뒤집어썼어요.

출애굽기 29장 1절 봅시다. “너는 그들에게 나를 섬길 제사장 직분을 위임하여 그들로 거룩하게 할일이 이러하니 곧 젊은 수소 하나와 흠 없는 수양 둘을 취하고” 수양 두 마리가 29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두 마리가 한 마리씩 따로 처리돼요. 두 마리 다 죽고 피 내는 건 맞는데 한 마리는 제사장이 놓여야 될 그 자리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소비되는 양이에요. 제사장 말고. 제사장이 걸어 다니고 평소에 활동해야 될 구역을 거룩으로 청소하는데 소비해요.

다른 한 마리 양은 제사장 신체에다 뿌립니다. 여기서 난해한 게 뭐냐 하면, 난해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언약궤가 선악과 따먹은 인간 다 죽여 버려요. 생명나무는 인간에게는 해당 안 되고, 이래나저래나 인간은 죽기 마련인데 하나님께 선악과 따먹어서 이왕 죽는 인간으로 하여금 뭘 뽑아내려고 하느냐 하면, 인간이 미워도 인간이 싫어서 저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 상대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인간 속을 통해서 정말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아들, 예수님을 우주의 주로 등극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뽑아내는 겁니다.

쉽게 하면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다. 그래서 생명나무 못 가게 만들었다. 이런 모든 절차가 인간을 살려주려는 게 주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들을 하나의 모자이크로 써먹기 위한 용도로써 활용하는 겁니다. 일종에 애피타이저. 미스터피자 같으면 피자만 주는 게 아니고 접시 두 개 주지요. 그것은 샐러드 무한리필 되잖아요. 그 샐러드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미스터피자가 피자집이지 샐러드 바는 아니거든요. 샐러드란 애피타이저로 피자 맛을 돋우기 위해서 소모용으로 쓰이는 거예요.

그 소모용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이왕 다 죽는데 언약궤 옆에서 언약궤를 사수하는 경비원 역할을 하는 사람들한테는 뭔가 새로운 것이 투입하게 되면 언약궤 구역을 돌아다녀도 안 죽네. 신기하네. 레위지파도 아닌 웃사가 만지니까 저주받아 죽었어요. 이것은 저주받아 죽은 거예요.

라면을 끊일 때 냄비를 손으로 쥐면 뜨거우니까 아까운 라면 버리고 냄비 버리고 안 사람한테 꾸중 듣고 그래요. 뜨거울 때는 뭔가 해야 되잖아요. 언약궤를 다룰 때는 조심한다고 언약궤가 만족스러워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궤가 심판을 내뿜으니까 그 심판을 만족할 만큼의 심판의 만족성을 돋워줘야 돼요. “맞습니다. 언약궤는 심판하는 게 합당합니다.” 하고 언약궤의 심판성을 고스란히 살리는 쪽의 증거물을 제사장이 받아버리면 언약궤가 상자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언약궤 정신이 어떤 인격체, 살아있는 인간에게 덮치면 그 제사장은 장차 죽어야 될 인간이 살 수 있는 메시아의 출현과 관련돼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포함되어 있느냐? 모세언약 안에 이 내용이 포함돼있어요. 그러면 묻겠습니다. 모세언약에만 포함됐겠습니까, 아브람언약에도 포함됐겠습니까? 언약이란 언약에는 모두 포함돼있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언약에는 뚜렷하지 않는가? 이게 뚜렷하려면 점차 인간의 죄가 포도주 숙성하는 것처럼 죄가 숙성해야 돼요. 어디까지 숙성해야 되는가? 죄의 원수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나타날 때까지 숙성해야 돼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상대 안 합니다. 우리는 상대할 대상도 아니에요. 여자의 후손은 누구와 싸우지요? 뱀의 후손이잖아요. 이게 하나님의 원수가 우리 아니에요. 따로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에 어리석게 말려든 인간이고. 따먹으라고 하니까 좋다고 따먹었고. 실제로는 인간 뒤에 숨어있어요. 인간을 앞장 세워서 자꾸 죄를 짓게 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우리가 말하는 그런 죄가 아니고 언약 위반을 죄라 합니다. 그럼 언약이 없으면 죄가 없겠네요? 언약이 없으면 죄가 없어요.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어요. 그러니까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 인간은 죄가 뭔지 모르면서 죽어가면서도 “내가 왜 죽지? 신이시여, 내가 이렇게 착한데 왜 죽습니까? 하나님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내가 왜 죽어야 돼. 이렇게 예쁘고 잘난 내가 왜 죽어야 되는데.” 죽는다는 것은 모든 걸 놔버리는 거거든요. 무의미한 걸로. 지금까지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았습니까. 죽는 순간에 그 의미 있는 것, 훈장들 전부 놔버려야 돼요. 내가 왜 마지막을 처참하게 그렇게 장식해야 됩니까.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런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죽음을 앞당겨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죽음이 그토록 비참하지 않으려고 하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했어요. 상당히 예리하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매를 미리 맞는 거예요. 매를 미리 맞으면 나중에 진짜 매 맞을 때는 의연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이 날 죽일 줄 알았어. 남들은 벌벌 떨지만 나는 이미 알기 때문에 의연하겠어.”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그런다고 해서 죽음이 너는 못 이기겠다고 넘어갑니까?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율법이 가미돼야 돼요. 율법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죽음은 무엇과 연관돼있단 말입니까? 죽음은 나의 의연한 대처와 연관돼있는 줄 알았는데 성경에 보니까 하여튼 성경은 우리의 모든 아는 것을 완전히 쓰레기로 처리해버려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배설물로 여긴다 했는데. 성경에서 우리의 죽음은 율법과 관련돼있어요. 하나님께서 죽이시면서 그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더욱더 날카롭게 활용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쓰레기는 쓰레기인데 그걸 재활용하는 방법을 찾는 것처럼.

예를 들어서 비닐이라든지 폐 쓰레기를 공장에서 비닐 다시 만들고 화장지 다시 만들잖아요. 바인더 기계에 들어가는 페트병의 아픔은 전혀 고려 안 하고 녹이고 부셔버리죠. 우리는 죽을 지경인데 주님께서 죽어가는 우리를 활용하는 거예요. 율법이 이만큼 독하게 선하다는 것. 그리고 죄라는 걸 용서한 적이 없다는 하나님의 일관된 성질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우리는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우리의 몸 하나, 우리 죄 지은 것 하나 전혀 버릴 게 없습니다. 죄를 많이 지어야 지옥 불 불쏘시게라도 할 수 있지요.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그래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가 거기서 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만든 것은 버리질 않아요. 영원히 살려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악한 자는 악한 자의 부활로 나오고 선한 자는 선한 자의 부활로 나오지요. 죽이지 않아요.

이것이 바로 언약궤 또는 모세언약을 영원무궁하게 빛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빛내기 위해서.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 본인밖에 몰라요. 하나님 본인밖에 몰라서 많이 당황하셨습니까? 섭섭하십니까?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하나님은 하나님 본인밖에 모른다는 것이 같이 즐거워지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을 안 받아놓고도 받은 척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나님밖에 모르고 우리를 쓰레기 만들어서라도 활용하는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상당한 불쾌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가룟 유다를 생각해봅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 적금 부은 것 만기에 찾았습니까?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얻은 게 뭐예요? 잠시 하늘에서 귀신 떨어지는 그런 마술인지 재주부리는 것? 그것도 주님 권능인데. 만나를 누가 내리지요? 하나님이 내리잖아요. 그런데 만나 줍는 것은 사람이지요. 결국 인간이 만나를 주우면서 뭘 느끼게 됩니까? 나의 개성 있는 인생이라는 게 도대체 있어요? 없는 거예요. 철저하게 종속적이에요. 세상에 똘마니도 그런 똘마니 없어요. 하나님께서 용돈 줄 때 봉투에 넣어 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서로서로가. 그런데 돈을 던져버리는 거예요. “주워라.” “아이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게 인간의 품위입니까. 안 줍고 말지 뭘 그 짓을 하느냐 말이죠. 하나님 똘마니도 아니고 말이죠.

우리가 성경을 안 보고 교회만 다니니까 교회는 신사들의 친목 모임이에요. 나름대로의 인격적인 멋을 부리면서 온 사람들이에요. 아까 이종호 목사님 이야기하면서 등대교회도 멋까지 부리는구나. 구제까지 하고. 얼마나 멋을 부리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되는 겁니까? 자기들이 일상 가정집에서 라면 하나 끓이는 것도 주워 먹는 일용할 양식인데 그것은 자기가 노동해서 번 당당한 거고. 교회에 헌금하는 것은 생색내는 용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내몰린 것은 거지되기 싫은 사람은 다 죽인다는 뜻이에요. 실제로 다 죽었어요. 달랑 몇 사람 남았습니까?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는 다 죽었어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얼마나 배알도 없는 인간인지 자기들은 메뚜기 같고 저쪽은 장대 같잖아요. 얼마나 위험한 곳입니까. 무장도 하지 않은 채 DMZ 넘어와 보세요. “아바이 동무 어디서 왔어?” 하고 잡아서 아오지 탄광에 집어넣습니다. 얼마나 위험한 곳이에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 약속에 미친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발상입니다. 차라리 갈렙과 여호수아 빼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람이에요. 물론 각자의 개성들은 살아있어요.

광야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들어오기 싫거든 들어오지 말라는 겁니다. 참 이게 복음인데 어떤 사람들은 욕한다니까. “들어오기 싫어? 들어오지 마!” 이게 광야입니다. “나 싫어서 원망하고 싶지? 그래 좋아. 오지 마.” 똥배짱도 그런 배짱이 없습니다.

지금 제사장은 분명히 사람 맞지요. 제사장이 활동하는 직장의 바닥 청소, 복장 청소. 제사장은 지금 하나님의 모형으로 서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바비인형인데 좀 멋있어야 되잖아요. 제사장이 지금 피와 기름을 뒤집어쓴 모습, 이게 장차오실 진짜 하나님의 모습니다. 그걸 미리 앞당겨서 제사장이 피를 뒤집어썼습니다. 그런데 그 피가 어디서 생산된 피입니까? 아까 29장에서 제물이죠.

제사장 위임식이 이렇거든요. 일단 제물 준비해요. 그 다음에 목욕합니다. 그 다음에 예복 착용해야 되지요. 그 다음에 기름 붓습니다. 관유라 해서 괜찮은 향기를 섞어서 만든 게 있어요. 그 다음에 세 가지 제사를 드리는 게 있어요. 이게 절차입니다. 어쨌든 간에 이 29장 절차에서 하나님께서 뭘 만들어서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 보고 싶지?” “보고 싶습니다.” “보여줄게.” “어디 계신데요?” “봐라.” 양 잡아서 제사장에다 피를 발라 버리죠. 또 한 마리 양은 잡아서 제사장이 활동하는 바닥에 다 뿌리고. 그 바닥이 완전히 피 바닥이 돼버렸지요. 이 피 바닥, 이분이 하나님이라니까. 장차오실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을 상상하십니까? 인물 잘 생기고 뭐 어떻고.

왜 피냐 물으시면, 언약궤 자체가 심판을 심판답게 하는 그 취지를 담아있는 게 언약궤이기 때문에. 그래서 언약궤에는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뭐 없이는 못 들어간다? 천사가 완전히 세퍼트에요. 지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년에 한 번씩 피 없이는 못 들어가고, 살았니? 죽었니? 그것 표시하기 위해서 방울을 달아요.

이것은 이렇게 산다가 아니라 사고방식을 그렇게 하지마세요. 이렇게 하면 제사장이 살 수 있다가 아니라 어떻게 거룩하고 무서운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있더란 말인가? 오히려 기이하게 여겨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이 누굴 만납니까? 야곱이 옆집 아저씨 만납니까, 동장 만났습니까, 경찰서장 만났습니까, 옛날 담임선생 만났습니까, 누굴 만났습니까? 하나님을 만났어요.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만난 하나님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이지요. 만나고 난 뒤에 일성이, “죽을 뻔했다. 죽을 뻔했는데 살았다.” 실은 죽은 거예요. 죽었기 때문에 이름이 바뀐 거예요. 그 이름으로는 못 살거든요. 살 수 있는 이름이 있어야 돼요.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었잖아요.

그 이스라엘의 기능은 야곱이 하는 기능이 아닙니다. 장차오실 예수님이 앞당겨서 하는 기능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이름이에요. 임마누엘은 누구 이름이지요? 예수님 이름. 여호와이레 이름 누구지요? 예수님 이름. 이스라엘 이름은 누구지요? 예수님. 이삭 이름은? 예수님. 오실 엘리야가 누굽니까?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자식? 아브라함의 자손. 자손이란 아버지의 성을 따게 돼있어요.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 그 안에는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의인된다는, 아브라함이 언약을 믿을 때 믿음으로 의인된다는 그것을 그대로 유지시켜 온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아들을 아들답게 주로 만들기 위해서 계속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린다는 그런 기능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몸소 죽어서 몸소 살아나셨는데 그냥 살아나는 게 아니고 반드시 뭐가 투입되느냐? 언약대로 살아나야 돼요. 결국 언약대로 살아나게 되면 누가 사는 거예요? 언약이 죽었다가 언약이 살아나는 거예요. 사람은 사라져도 언약은 영원하리. 이런 취지가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너는 언약을 위해서 만들어졌어.”라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그 언약의 모든 완성은 예수님의 주 되심이지요. 모든 만물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때 그때가 제일 흐뭇해요. 제일 기분 좋을 때가 바로 그 점입니다. 사람들이 아들을 영화롭게 할 때. 그걸 요한복음 5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들을 공경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있고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도 없느니라. 모든 심판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겼기 때문에.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유대인이 뭘 못하느냐 하면, 아버지 자리에서 어느 자리로 중심이동이 안 됩니까? 하나님 자리를 포기해야 되는데 하나님을 안 믿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진짜 아버지가 거기 계신 거예요. 하나님이 여기 있는데 아들 주신 게 아니고 여기 있는 하나님은 가짜고, 인간이 만든 허구고, 예수님 계신 곳에만 예수님이 아버지라 하는 진짜 하나님이 거기 있는 거예요.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로 갈 자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 이 바꿔치기가 인간의 능력으로 안 되는 겁니다. 그 안 된다는 말을 오늘 본문대로 하면 우리가 죽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냥 죽어버리면 안 되고 언약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돼요. 언약에 의해서 죽고 언약 안에 내장돼있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예수님의 일관된 기능이 작용하게 되면 우리는 그냥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언약 안에서 우리는 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내가 제안하는 것 같다. 제가 제안하는 게 아니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지금 하나님 포기하고 예수님 믿자 하는 게 제가 제안하는 게 아니고 지금 한국교회가 그걸 제시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걸 제시하면 교인들 한 명도도 안 남아요.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안 남아요. 하나님 먼저 믿고 부록으로 따라오는 게 예수라고 현재 있는 것도 맞고 다만 누락된 게 예수님인데 거기다 갖다 붙이면 그게 온전히 하나님이 되고 삼위일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무너져야 돼요. 그럼 하나님이 무너지게 되면 그동안 하나님과 맺었던 부동산 계약이 깨져버려요.

계약체결을 다시 하는데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아무나 대표자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지목된 사람만 계약체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예수님만이 아버지와 계약체결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모세언약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계약 됐잖아요.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십계명 더하기 어린 양 잡으라는 제사법. 이래서 계약체결 됐거든요. 그런데 율법을 더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함이라. 이 말은 새삼스럽게 죄 지으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죄 지을 수 있는 역량이 많아요. 그걸 하나님이 율법을 줘서 정리하겠다 이 말입니다.

옛날 우리 집에 할아버지가 계추를 했거든요. 할아버지가 대구시 비산동 유지에 속해요. 계추하게 되면 비산동 서문시장에서 논다는 사람은 다 왔어요. 큰 방에 음식차려 놓고 하는데 신발 벗고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신발이 이것저것 섞여 있잖아요. 나는 할아버지한테 칭찬받으려고 심심해서 같은 신발끼리 맞춰서 정돈을 하게 되면 100% 손님들이 칭찬해요. 우리 할아버지는 권위적으로 칭찬하는 법이 없어요. 속으로 칭찬하는 법이 뭐냐 하면, 손님들이 나한테 칭찬하게 되면 할아버지의 자존심이 살잖아요.

율법이란 새삼스럽게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어지럽게 놓여있는 죄를 율법으로 정리정돈 해주는 거예요. 옛날 은행에 동전 세는 기계 없을 때 나무판에 동전 크기만큼 구멍을 내서 한꺼번에 부어서 흔들면 10원짜리가 구멍에 들어가잖아요. 알지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정리정돈 하는 거예요. 정리정돈 하는 기계가, 새로운 언약이 투입되게 되면 그전까지는 발각되지 않은 깊은 죄가 다 걸려드는 거예요.

모세언약 시대 입장에서 보게 되면 사람들은 제사장 안 섬기고 제사 안 드리는 것이 죄다. 그 죄에 대해서 벌을 받는다. 십계명대로 안 살면 벌 받는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십계명대로 지키면 벌 안 받고 축복이 주어진다고 그렇게들 생각했던 그 시절입니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 죄가 신약 때까지 들통 나기 전의 이야기에요.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하고 계약 상대자가 안 돼요. 죄인이니까. 우리에게 살려줄까, 말까? 우리가 그런 이야기 들을 상대자가 못 됩니다. 죄 문제와 죄 해결 문제는 따로 있어요. 예수님이십니다. 그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그 비밀을 폭로했어요. 분명히 했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모든 관건은 다 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병이어를 통해서 기도하니까 떡이 무한대로 나오잖아요. 그건 떡 먹으라는 말이 아니고 모든 하나님의 중심은 내가 중심이니까 내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는지 목격하고 내가 죽는 그것이 하늘에 구멍이 뚫리는 구원받는 영생 얻는 유일한 만나, 하늘의 산 떡, 생명의 떡인 것을 눈치 채란 말이거든요. 하나님의 일은 다른 게 아니고 하나님이 보낸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 일이라고 요한복음 6장 29절에 분명히 이야기했다고요.

예수님께서 네가 무슨 일을 하는 게 하나님 일이 아니고 나 믿는 게 하나님 일이다. 내가 일 해버리면 그 사람이 중심이 돼버리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내 구원의 중심을 나에게 일임한 적이 없어요. 내 구원을 내가 알아서 챙겨야 된다는 것을 우리한테 통보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내가 알아서 구원받을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주님이 구원하면 구원되고 주님이 구원 안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이 날 구원했어.”라고 모든 공로를 주님께만 돌리도록 돼있습니다.

그걸 모세언약식으로, 오늘 본문 식으로 하게 되면, 제사장 옷에다 피와 기름을 발라서 그리고 제사장이 다니는 거기에 어린 양의 피가 뿌려져서 그 거룩이 주어졌을 때 거기서 활동하는 제사장과 거룩한 장소 때문에 누가 이스라엘로 유지된다, 하나님이 우릴 떠나지 않는다? 바로 그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거예요. 그걸 그 당시로 표현하면, “우리는 모세언약 때문에 산다.”라고 되는 겁니다.

듣고 보면 이야기가 굉장히 간단합니다. 그런데 간단하게 들리려면 뭘 포기해야 돼요?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챙겨야 될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성령을 받은 상태에서 이것을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는군요. 정말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쁨이 방문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식이 애 먹이고 마누라 바가지 긁고 물가는 오르고 추석대목인데 경기는 없지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굶어죽으라고 작심을 하신 것 같아요. 주님이여, 저를 굶어죽으라고 작심을 하셨지요? 맞다. 굶어죽어. 구원문제는요? 구원문제는 네 소관이 아니지. 굶어죽든, 거지 나사로처럼 기왓장으로 종기 긁다 죽든, 그 사람은 그것 긁어서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집에서 주무시다 구원받고. 어쨌거나 구원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없다 이 말입니다. 그건 예수님 소관이지요.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참 우리끼리였으면 좋겠어요. 배타적 집단이 됩니까?

이스라엘에 제사장이 있다고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참 좋았지요. 하지만 블레셋, 다른 민족은 어떻습니까? 놀고 있네. 저희끼리 구원받는데. 웃기지. 얼마나 놀림을 받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어떻게 다루시냐 하면 모든 무장을 해제시켜버립니다. 인간적으로 믿을만한 구석을 하나도 없게 만들어요. 그리고 강대국 사이에 안치를 시켜요. 그러면 주변나라가 어떻게 봅니까? 저거 한 주먹이면 끝나네. 마지막 남은 초밥이에요. 누구든 먼저 손댄 사람이 가져가는 거예요. 그렇게 유도하셔요.

그런데 그게 고슴도치인 줄 누가 알았습니까. 손대다가 가시에 찔려서 파상풍으로 죽어버리는데. 바짝 언약의 독이 올라 있는데 언약에 독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손댔는데 사실은 언약을 손댄 거예요. 블레셋 사람들은 바보 같아. 폭탄을 자기 나라에 들고 갔어요. 전쟁에서 죽은 인간보다 염병 들어 죽은 인간이 더 많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블레셋이 언약궤 때문에 난리 칠 때 원래 갖고 있어야 될 이스라엘이 겁을 내고 있어요. 저거 이상한 물건이다. 과연 누가 저걸 인도해낼까? 겁을 낼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갈굴 나라가 없어요. 이 땅에. 그걸 이스라엘이 믿으면 왕 같은 나라로서 강대국 사이에 버티고 살아남을 거고 주님이 있다는 걸. 만약에 그 믿음을 외면해버리면 날름 가져가는 나라가 임자가 돼요. 바라기는 새순교회 성도님들이 고슴도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짝 언약적 독이 올라있는, 물었다 하면 독에 찔려야 됩니다. 파상풍 걸리든지 해야 돼요.

다시 정리해봅시다. 제사장 위임식 이야기입니다. 제사장 없이도 구원할 수 있는데 왜 제사장 두십니까? 그 이유는 너희들이 구원받을 입장이 못 되는 인간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너희들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이 제사장 모습을 하고 있는 장차오실 예수그리스도가 주라고 진짜 우주의 주님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희들 민족만큼은 앞당겨서 장차오실 예수님의 긴 그림자가, 석양의 그림자가 미리 비치는 거예요.

그러면 오실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 봐라. 피범벅이 됐지요. 피를 뒤집어쓰고 오신 겁니다. 그런데 그 피가 양에서 나왔어요.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에요. 그 다음에 난해한 게 어떻게 제물과 인간이 만나느냐? 이 문제입니다. 정말 어려운 문제에요. 양 하나 잡아서 피 칙칙 뿌리면 나도 제사장 되겠네요. 아무나 아저씨 여기 오세요. 어린 양 피 바르세요. 그러면 제사장 됩니까? 안 되거든요. 훈장 단하고 해서 적들이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훈장 대신이 강력한 레이저무기 있으면 적들이 무서워 도망가지요.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피를 바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하나님 내부에서 조율이 이미 끝난 어떤 결론부분, 이런 인간은 죽어도 살려야 된다는 결론부분이 미리 앞당겨서 제사장과 결부돼있어야 돼요. 그냥 제사장만 결부돼있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제사장만 구원받으면 안 되거든요. 다른 백성은 다 지옥 가면 안 되잖아요. 제사장에 일어났던 그 상황이 진 밖에 있는 성문밖에 있는 다른 백성에게 죄 용서로써 능력이 이어지게 할 요소가 제사장 위임식 안에 담겨있어야 한다는 내용도 두 번째 시간에 해봅시다.

한윤범(IP:14.♡.134.60)

13-09-11 11:21

20130906b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제사장언약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언약을 통해서 구원하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언약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원하지만 이건 우리의 분수 넘어서요. 우리는 선악과 따먹고 이왕 죽은 존재에요. 주님께서는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거예요. 쓰레기 같은 죽은 존재라고 건져서 아들을 아들답게 주로 높이는데 활용하시겠다는 계획이 제사장 세움입니다.

제사장 세우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제사장 세워서 우리 구원받는 걸 생각한다면 그걸로 언약은 종결돼야 돼요. 그런데 언약은 과정입니다. 모세언약은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 다음에 다윗언약이 있고 그 다음에 마지막 언약은 따로 남아있습니다. 예수님 대에 와야 더는 언약은 없어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구나. 그런 뜻이 아니고 예수님의 언약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고 모든 구원, 모든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일임돼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관계성이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나라에 참여되는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거기서 예수님께 면류관 반납하면서 “우리는 애초부터 주님을 위해서 만들어져야만 했던 그런 존재였군요.”라고 영원토록 주님이 누리는 복락에 영광에 같이 누림 받는 그런 식으로 지금 주의 계획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 계획 우리가 알아버렸네. 그러면 우리가 할 게 없잖아. 할 게 있어요. 왜냐하면 그런 계획을 우리가 누릴 때 우리는 제사장이 아니거든요. 제사장은 레위지파니까. 우리는 일반 단지파일수도 있고, 또는 시므온지파라고 합시다.

이런 사람이 모세언약으로 해서 장차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그럼 백성 됩니다. 다 알았네. 그럼 할 것 없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안 좋아요. 왜 그러냐 하면, 언약에 의해서 우리가 덮쳐져야 되는데 우리는 언약을 구경한 셈이 돼요. 마치 언약을 수족관에 있는 상어처럼 “이번에 들어온 상어 봐라. 잘 논다. 헤엄치는 것 봐라. 다 봤나? 집에 가자.” 이렇게 돼버려요.

어떤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수족관의 상어 노는 것처럼 우리는 관람하고 아멘, 할렐루야 한 소리하면 이건 뭡니까? 그거는 주님 따로 우리 따로 하나가 안 돼요. 이 땅에서 주님과 하나 안 되면 죽어서도 하나 될 수 없어요. 죽어서 천국 갈 사람은 이 땅에서 주님과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그걸 디모데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로잡힌 자.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만이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거든요. 그렇다면 수족관 유리를 깨야죠. 유리벽을 통해서 따로 분리돼있던 상어가 쏟아지는 물과 더불어서 상어는 죠스가 돼요. 우리를 요나처럼 자기 뱃속에 집어넣지요. 그걸 거룩한 제사장 나라, 제사장이 전 영역을 통치하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통치했을 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제사장이 피범벅이죠. 제사장이 여기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참고 있어요. 제사장이 피범벅 된 것은 양의 피, 소는 제물용이니까 따로 빼놓고. 양 두 마리 잡아서 그 피를 한 마리는 활동영역에다 뿌리고 한 쪽은 몸에다 뿌리는 거예요. 제사장 나라라고 해놓고는 실은 제사장이란, 양은 짐승이잖아요. 양은 짐승인데 제사장은 실제 인간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의 인간이지요. 양에 의해서 뒤범벅이 된 장차오실 양처럼 살아야 되는 그런 인간 존재, 이렇게 돼버리면 제사장도 본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죽음이 산 자를 지배하는 양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 시간에 뭘 해결해야 되느냐 하면, 양과 제사장의 결합의 메커니즘, 결합방법의 경로, 그 다음에 제사장이 양 피를 뒤집어써서 거룩하게 됐다고 해서 진 바깥에 있는 일반백성들에게 효과가 전달되는 프로세스를 모르면 우리는 그냥 관광객이 되겠지요. 한 집안 식구가 아니라 남의 집안 식구. 골목에 가다가 둘이 싸우면 저 집 또 싸운다. 저 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나와 별개의 문제, 예수님 나라와 나와 별개의 문제가 된다면 그 사람은 예수밖에 있는 사람이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전달되는가? 하나의 힌트는 있어요. 내 쪽에서 제사장 쪽으로 접근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차단돼있어요. 착하게 산다, 바르게 산다, 구제한다, 헌금한다, 백날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주도권은 양으로부터 제사장, 제사장으로부터 우리한테 전달되는 방식이 돼야 되는데 그 방식은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됩니다. 양의 이동경로에요.

이 양이 어디서 성막 안까지 들어오게 되었지요? 어디서 키운 양입니까? 하늘에서 양이 마구 쏟아집니까? 그 양이 어디서 놀던 양입니까? 이것은 죄인 된 백성들이 자기 죄를 씻기 위해서 집에서 양을 키워요. 그러니까 출애굽의 연속성이에요. 집에서 키우던 양, 그 양 중에서 제일 실하고 깨끗하고 흠 없는 양을 가져가게 되면 벌써 양의 시작점이 제사장 쪽이 아니고 양의 이동경로가 예수님께서 구유에 출생할 때의 경로를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차오실 예수님이 동방박사와 만날 때의 모든 모습들이 제사장과 더불어 제사장에 속한 모든 백성들이 아기 예수 태어나서 죽어서 승천할 때까지 무대에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 보여주는 무대를 둘로 나눠요. 성막 안의 무대와 성막 바깥의 무대로 나눕니다. 성막 안에는 어린 양의 피로 이미 뿌렸지요. 제사장 위임식 할 때 위임식이 하루에 끝나잖아요. 그러면 위임식 끝나면 그 다음부터 제사장 아닙니까? 부부가 결혼식 마치면 부부 끝났습니까? 본격적으로 시작하지요. 성막에 양의 피를 받아서 뿌리게 되면 그 지역만 거룩한 지역이 돼요. 이것은 자동적으로 성막 바깥은 더러운 영역이 돼요. 죄 지었다고 더러운 게 아니고 거룩이 등장하게 되면 거룩이 빠진 부분은 전부 다 더러움이 되는 겁니다. 이 더러움은 죄 지어서 더러움이 아니고 언약적 더러움이에요. 언약이 출몰해서 비로소 밝혀진 구역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는 이유도 없이 죄인이에요. 이게 언약적 죄인이고, 그리고 예수님이 죽었을 때 우리는 함께 죽었고 할 때 언약적 죽음이고, 예수님이 살아날 때 우리는 살았다. 이건 언약적 생명입니다. 모든 것은 뭔가 우리한테 다가오는 게 있어야 되고 이질적인 것이 있어야 돼요. 내가 궁리하고 내가 노력하고 내가 고생했고 내가 투자했고 내가 힘들여 농사짓고 이것 말고 내가 평생 수고한 것 말고 만나처럼 그냥 주는 것 있잖아요. 만나가 노동해서 얻은 과자부스러기는 아니란 말이죠. 일체 노동을 정지시키고 너희들에게서 나온 수고의 양식은 없는 상태에서 만나만 먹여서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까지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나님은 하셨다.

그렇다면 만나의 광야가 울산이라면 우리는 밥도 먹고 피자도 먹지만 진짜 생명은 천국과 관련된 양식을 먹어야 우리가 천국 백성 되는 거예요. 천국과는 상관없이 살찌는 용으로, 또는 살 빼는 용으로 먹게 되면 똥배와 관련 있지 천국과 관련 없잖아요. 시체와 관련됐습니다. 그걸 저는 이질적이다.

매일 살면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뭔가 이질적이에요. 따지고 보면 그런 논리로 성립이 안 되는데 뭔가 나를 자꾸 다른 데로 빼돌리는 느낌,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나도 가고 싶은데 이상스럽게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을 못 가게 만들고 자꾸 사람들이 떨어져나가는 그런 좁은 길, 외로운 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 발 다쳐도 아무도 안수기도도 안 해주는 뭔가 나 혼자 가는 그쪽 그것도 내가 일부러 그 길 가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내 인생이 내 손에서 움직이지 않다는 느낌 있잖아요. 다 아시죠. 느낌 아니까. 말로 설명할 수 없지요.

그런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출애굽기 29장에서 제사장 위임식 해서 양 잡고 그 양은 제공된 것이 바로 속된 영역에서 거룩한 영역으로, 속된 영역을 거쳐서 제사장이 안수해줘야 돼요. 경비대대 검문 안 거치면 양이 거룩한 곳에 못 들어오거든요. 들어오면 그 양은 죽잖아요. 죽고 난 뒤에 양으로 들어왔던 효력이 제사장을 통해서 바깥으로 다시 나와야 된단 말이죠. 그 메커니즘이 성립돼야 돼요. 그 메커니즘을 성립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또 하나 더러운 곳을 만들었습니다. 성막이 있고 성막 다음은 더러운 곳이죠. 깨끗한 곳이 구별됐으니까 자동적으로 나머지는 더러운 곳이 돼요.

그런데 레위기 14장에 보면 여기다 하나 더 만들었어요. 이건 이쪽에도 못 오는 사람들 누구 게요? 문둥병 환자에요. 문둥병 걸린 사람은 진 밖으로 쫓아냅니다. 저주를 보여주는 인형이 되니까 자진해서 들어오면 차버려요. 그러면 영원히 못 들어옵니까? 여기서 이질적이란 말을 했잖아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사람들은 몰라요. 문둥병자 본인은 알아요. 보이지 않는 치료의 광선(말라기에 나오는), 자비와 용서의 광선이 사람들은 몰라요. 그냥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게 되면 이 문둥병자로 하여금 찾아가도록 조치를 하게 돼있습니다. 이 문둥병에 빨간 색칠을 해놓으면 마치 오늘날 온도계의 수은의 역할을 하면서 바로미터, 하나님의 자비가 어느 정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문둥병은 용서받았다고 가만있으면 안 돼요.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을 낫게 했잖아요. 병 고침의 기적을 받은 열 명 중에 구원받은 사람은 달랑 한 명인데 왜 구원받았지요? 이상하다. 내가 낫을 병이 아닌데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한데 왜 나았지? 이건 이질적이야. 내가 기도해서 나을 것 같으면 다시 나한테 회수하겠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나는 이 저주에서 풀려야 될 가치가 없는 쓰레기 같은 존재인데 왜 낫게 했느냐 말이죠. 출처를. 이게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거예요. 산성설교 마치고 내려가니까 주님도 바빠. 피곤해 죽겠는데 내려가자마자 문둥병자가, “예수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럴 때 주님께서 문둥병 낫고 내빼지 말고 문둥병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당시 율법으로 자비의 원천이 나왔던 곳을 찾아가라. 문둥병이 나았을 때 대한 규정대로 예물을 준비해서 제사장에게 가서 문둥병이 나았다고 예물을 드리게 되면 모세언약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셈이 되겠지요. 예수님이 문둥병을 낫게 함으로써 그 모세언약은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지키는 게 아니고 그 모세언약을 누가 가져가서 누가 홀로 완성합니까? 앞으로 예수님의 인생 경로가 그 문둥병마저도 저주에서 풀리게 하는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나왔음을 마지막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할 때까지 그 길을 가시는 와중에 그런 사건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을 포기해야 돼요. 하나님 믿지 말아야 돼요. 예수님 믿어야 돼요. 하나님 믿으면 수족관의 상어밖에 안 돼요. “하나님, 오겡끼데스까. 거기 잘 계시지요. 나는 울산바닥에서 하나님 덕분에 잘 먹고 잘 삽니다.” 이게 뭐예요. 우리의 죄를 매일같이 모세언약에 입각해서 새 언약에 입각해서 이 같은 죄인도 예수님 피를 품고서 우리는 용서받은 원천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될 그런 문둥병 환자 용서받은, 치료된 이미 나아버린 문둥병 환자로서 살아야 될 입장이 일주일 한 번씩 교회 와서 인사하고 밥 먹고 가버리고. 헌금 몇 푼하고. 자기 세계, 황금의 제국 따로 숨겨놓고.

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발을 못 빼느냐 하면 못 빼도록 하나님이 조치하십니다. 울산이 나를 힘들게 한다. 다른 데 가보자. 다른 데 그 동네 울산이에요.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돈 좋아하는 세상이 빠지게 한 이유는, 우리의 구원과 영생과 용서는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요, 그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그 혜택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찾아가는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 노릇으로 사용되게 하시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전도하는 그 길은 곧 사도 바울이 구원받는 그 길입니다. 생명의 면류관 받기 위해서 가는 그 길이 다른 사람한테는 복음의 향기를 받는 그런 기회가 되지요.

어떤 사람은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담배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고. 사람마다 개성이 있기 때문에 눈 감고도 방금 누가 왔는지 알아요. 향수 냄새로. 집안에 남편이 다녀갔는지는 방에 들어가 보면 안다 안 합니까. 육감까지 아니더라고 후각만 있으면 알아요. 이건 남편 냄새다. 이건 둘째 아들 냄새고, 첫째 놈 냄새고.

고린도후서 2장에 복음은 믿는 자에게는 향수다. 결국은 사도 바울은 향수병을 가지고 온 몸에다 처바른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망하는 자에게는 그게 향수가 아니고 악취.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동일한 인간인데 어떤 사람한테는 향기로 풍기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똥냄새로 풍기느냐 말이죠. 어떤 사람은 담배냄새가 그렇게 좋다 하거든요. 나는 담배냄새가 싫어요. 술 냄새도 싫고. ktx 타고가면 술 먹은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온 객실에 술 냄새 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요. 술 안 먹은 나는 대번 느껴져요. 내가 취한 것 같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속에 물들게 하는 것은 나에게서 나온 사랑을 공짜로 입은 사랑을 되찾는 예수님의 솜씨를 멋들어진 마술 같은 솜씨를 자랑하고 싶어서 끝까지 우리로 세속에 물들게 만들어버려요. “가만있어. 내가 너를 건져줄게. 착하지 마, 멋지게 살지 마. 가만있어. 내가 너 같은 인간도 살려줄게.” 왜? 그래야 메커니즘이 나오니까. 잘난 놈 살아버리면 지 자랑하잖아요. 그런 것 기존교회에 많거든요. 지 사랑하는 사람들.

고 옥한흠 목사 4주기 기념식을 사랑의 교회에서 하는데 거기에 오정현 목사가 수염 폼 나게 길러서 미망인과 같이 앉았어요. 그 사람이 박사학위 표절 사건으로 징계 먹어서 자숙의 시간을 갖는 중인데 미망인에게 견뎠다고 상주는 시간에 어떤 선교사가 마이크를 빼앗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떴어요.

제가 뭘 느꼈느냐 하면, 여러분. 사랑의 교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새순교회도 없고 우리교회도 없어요. 없어도 구원받으면 되잖아요. 왜 새순교회 있고 사랑의 교회 있어서 구원되려고 하는 그게 뭐냐? 그건 따로 거룩한 공간을 우리끼리 거룩한 공간이라고 만드는데 그걸 만들어버리면 우리는 교회의 증인되지 예수님의 십자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았어요. 그러면 됐잖아요. 뭘 더 원해요.

이걸 변증법이라 하는데 제사장이 잘못 되면 백성을 통해서 꾸짖고 백성이 잘못 되면 제사장이 꾸짖습니다. 사실은 둘 다 문제 있어요. 문둥병 환자도 그냥 무상으로 용서받는데 사람들은 문둥병 환자를 자기는 문둥병 안 걸렸다고 해서 깔보고 무시하는 거예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무시하지 말라 했잖아요. 그걸 무시하게 되면, 내가 무시하는 그 인간을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버린다고 나온다고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던지 간에 세속인 것은 마찬가지고 세속에서 거룩으로 벗어나는 것은 주께서 거저주시는 자비에요. 거저주시는 자비를 여러 번 강조하는데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께서 거저주시는 자비는 아무리 어떤 형식과 제사법으로도 포착이 안 됩니다. 포착은 안 되는데 나중에 끝나고 난 뒤에 흔적을 포착을 해요. 자비가 날아오는데 양궁선수들이 쏘는 화살은 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는 게 보인다고요. 그런데 자비가 날아오는 건 보이질 않아요. 이미 꽂혀버린 사람은 그때부터는 남은 몰라도 자기는 찾아가면서 다른 보기에는 낯선 이상한 짓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날아가는 것은 안 보여도 찾아가는 것은 보이죠.

그 찾아가는 걸 포착한 것이 레위기 14장에 나옵니다. 그 연극에서 몇몇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하여튼 구약은 연극이에요. 주인공인 예수님이 빠져있으면서 배후에서 언약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그냥 배우들이에요. 첫 번째 주요 등장인물, 문둥병자. 두 번째 제사장 나옵니다. 끝입니까? 거기에 사람은 아닌데 하나님의 용서의 메커니즘을 후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두 마리의 산 새가 나와요. 이 넷이서 뭘 해요? 할 게 없잖아요.

두 사람과 새 두 마리가 뭘 하느냐 하면, 문둥병자는 저주받았는데 지금은 나았어요. 저주받은 사람은 일반 텐트촌에 못 들어가고 진 밖에 나가 있어야 돼요. 더러워서 너무 더러운 곳에 아예 저주받은 이방인 구역에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깨끗하게 나았어요. 그러면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되겠지요. 자비가 쏟아지는 성막 쪽으로 점차 나와야 되겠지요. 나오는데 지 마음대로 가면 안 돼요. 거기에 경비대장이 있어요. 그 역할을 제사장이 하는 거예요.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당신은 나았다면서요?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검문합니까? 나는 피를 뒤집어썼거든요. 나는 거룩한 곳에서 활동하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을 대리한 사람이거든요. 그 당시의 하나님이라고 보면 돼요. 제사장 말 안 들으면 안 되잖아요. 제사장 만나는 것이 사랑의 원천을 찾아가는 하나의 길목이지만 일단은 만나야 되겠지요.

그러면 등장인물이 두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새 두 마리는 뭘 할 거냐? 이 넷이 모여서 보여주는 것이 죽음의 파티. 죽음이 우리를 살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연극의 주제가 죽음입니다. 그냥 죽으면 안 돼요. 언약적 죽음. 언약이 효과 보려면 죽음의 모습이 아니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요. 반드시 언약은 죽음으로써 다가오는 겁니다. 새 두 마리 중에서 한 마리가 죽습니다. 그러니까 등장인물 넷 중에서 일단 사람 둘은 빠집시다. 더 핵심적은 것은 새 두 마리죠. 새 두 마리에서 일어난 일을 먼저 보시고 2막에서 인간 투입합시다. 새 두 마리 역할을 두 인간이 그 자리를 메워서 투입하는 거예요.

한 마리는 죽습니다. 흐르는 물에 들어가 죽은 새의 피를 날갯죽지에 발라서 날려 보내요. 그러면 그 새는 처음에는 날갯죽지에 피 없는 새였는데 피 없는 새가 피 발린 새로 날아갔을 때 일반 사람들이 보면, “저게 뭐야? 저 새나 이 새나 마찬가지잖아.” 그 새가 그 새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문둥병자 나와. 문둥병 걸려. 그 다음에 진 밖에 쫓겨나가. 그 다음에 다시 문둥병 나았어. 제사장 검사해. 문둥병 나은 것 맞습니다. 제사장이 검사만 하면 안 돼요. 검사만 하면 의사가 돼요. 판사가 돼야 돼요.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것 맞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증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문둥병 되게 한 당사자 맞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문둥병에게 주목해야 돼요. 이제는 거기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문둥병에 걸렸다가 멀쩡하게 된 것은 새 한 마리가 피 바르고 날아간 것과 똑같지요.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인물, 새 두 마리, 제사장, 문둥병 이 네 종류의 역할을 다 합치면 예수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스스로 버림받았다가 사흘을 못 가서 다시 아버지가 되찾아가 버린 거예요. 하지만 그 예수가 그 예수가 아닌 거예요. 같은 예수인 줄 알고 제자들이 만지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서 올라가지 않았다. 이건 예수님 혼자만 아는 이야기지 제자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요. 그 얼굴이 그 얼굴이고 식사도 곧잘 해요. 맛있게 고기 먹습니다.

그래서 쓸데없이 중세 때 신학자들은 내기를 했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먹었던 물고기의 배설물은 과연 똥이냐, 아니냐는 그 논쟁을 한 거예요. 수도원에 앉아서 어지간히 할 짓도 없어요. 맨날 포도주 먹고 그 생각만 한 모양이라. 중세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은, 바늘에 천사가 몇이나 앉나 한 것은 사람들 꼬시기 위해서 한 거예요. 사람들은 신기한 걸 원하니까. 뭔가 신기한 걸 주게 되면 저사람 똑똑한 게 많이 안다고 당길 게 아닙니까. 꼬셔서 수도원 부흥하려고 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지금 교회는 없는 거예요. 제사장은 있잖아요. 없는 겁니다. 제사장이 있을 때는 문둥병이 나타날 때 제사장이 있는 거예요. 한 번 제사장은 영원한 제사장 아니거든요. 제사장 역할이라는 것은 진짜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께서 일하심에 따라서 제사장 역할을 할 뿐이기 때문에 제사장 역할을 할 때 나는 제사장이니까 이러면 안 되고, “주여, 주님이 아직도 제사장 하시는군요.” 오히려 제사장이 자기를 비우고 고백을 해야 돼요.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하다 죽었어요. 제사장이 아니라 해야 되는데 한 번 제사장은 영원한 제사장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잘렸어요. 그것도 참혹하게 죽잖아요. 불을 다루는 사람이 불에 데어 죽는다. 이것은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사람이 그 일에 전문직이 돼버리면 안이해지잖아요. 제사장들이 멸망하게 된 이유가 바리새인 짓을 너무 많이 했어. 원래 신입은 긴장하는 법인데 너무 오래 노털 돼버리면 긴장을 안 해요. 분명히 울산 중공업 데모하는 인간들 신입이 아닌 것 같아. 너무 노털들이야. 너무 많이 알아. 그때 첫사랑을 잊어버렸어. 첫사랑 회복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교회 없다. 어제까지 받은 사랑은 어제까지만 유효할 뿐이지 오늘 사랑은 오늘 은혜 받아야 되고 날마다 주께서 주셔서 되는 거기지만 그걸 먹는 즐거움, 만나 먹는 즐거움이 늘 새롭게 할 때 우리는 늘 나의 것이 아니고 늘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늘 우리는 겸손해지겠지요.

아직까지 해결 안 된 게 있어요. 해결 된 게 뭐냐 하면, 문둥병이 자기 원천을 찾아가는데 중간에 새 두 마리를 만났지요. 결국 새 두 마리가 마중 나왔다고 보면 되는데 한 마리는 죽고 또 한 마리는 죽은 동료 때문에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창공을 향하여 날아갔습니다. 물론 그 피는 곧장 마르겠지요. 하지만 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문둥병, 제사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걸 레위기 제사법에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오고 오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의미를 새겨주는 겁니다.

하나님, 살아있네! 그런데 그냥 살아계신 것이 아니고 언약적으로 살아있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살아있고 만약에 하나님 살아계신 것 아니까 됐고 우리도 따로 살아있다면 그 사람들, 이스라엘은 멸망당합니다. 죽어있어요. 같이 언약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같이 살아야 될 건데 나를 위해서 예수님 이용한다든지 그러면 안 돼요. 그것은 중심축이 자기 쪽으로 전환되고 말았어요.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슬픈 것도 전부 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유발된 하나의 사태들입니다. 하나의 사건들이에요. 남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그러면 마지막으로 창세기 15장 봅시다. 옛날에 제가 썼던 [교회를 넘어서]란 책에서 이 대목을 언급하면서 아직도 뭔가 해결되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게 있어요. 창세기 15장 8절 말씀입니다.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이 대목을 보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제물에 의미를 두느냐 하는 겁니다. “그냥 잡아. 잡은 네 성의를 봐서 아브라함언약을 이루게 할게.” 하면 되는데 왜 유독 제물에 구체적인 지시를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하나님이, 명령하신 하나님이 지상에 연착륙하실 때는 이 제물의 내용에 부합되는 식으로 이 땅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으로 알면 되는 겁니다.

지금 갑자기 출애굽기 하다가 창세기로 돌아갔느냐 하면, 제물과 인격이 어떻게 결합되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제물과 인격이 결합되는 방법을 안다면, 제사장이 하는 모든 행동이 지금 진 밖에 있는 백성들에게 용서라는 효력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같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거든요. 먼저 제물이 제사장을 어떻게 다루느냐? 그 방식으로 바깥에 있는 백성들도 같이 다룬다고 본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안 것은 제사장 복장입니다. 위임식할 때 복장 챙기죠. 그 복장에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린 게 있어요. 물어볼게요. 이게 제사장 본인의 구원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자체가 구원받기 위함입니까? 이것은 제사장을 위함이 아니에요. 우리가 제사장이라면 뭘 염두에 둬야 하느냐 하면,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만 유익되라고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사명자로 부여받은 겁니다.

고린도전서 13장 7절. 사랑은 견디는 것이다. “(사랑은)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드느니라” 그런데 모든 게 뭐냐 하면 사람들은 오해해요. “그래 나 잘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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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3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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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