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44강, 45강) 생존과 하나님, 정답 130905
유튜브(44강, 45강) 생존과 하나님, 정답 130905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44강
45강
유일자(IP:116.♡.234.248)
13-09-09 08:57
44강-YouTube강의(생존과 하나님)130905-이 근호 목사
성경에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그냥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상대로 해서 ‘건져 줄게’ 가 아니라 어떤 틀을, 환경을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히십니다. 덮어 씌우죠. 그 환경을 구원에 적합한, 구원을 설명할 수 있는, 좀 더 깊이 이야기 하면, 구원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환경의 틀을 하나님이 따로 제작해서 우리에게 덮어 씌우는 겁니다.
‘너 거기 있어 내 건지러 갈게.’ 가 아니라, 너 거기 있어라. 내가 하늘나라에서 만들어진 그 틀을 가지고 우리에게 덮어 씌우면, 그 덮어 씌어진 환경을 통해서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따로 생각해놓은 구원이 우리에게 덮치게 되는 겁니다.
그걸 구약에선 광야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 바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광야라는 생활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 좋은 땅에 바로 넣어 주지 않고, 왜 광야라는 그런 환경을 거치게 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생각했던 하나님, 또는 구원에 대해서 이걸 교정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이기에 그들은 구원과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교정이 되어야 되는가. 그들은 애굽에서 그들이 습득한 몸에 익힌 것은 생존이었습니다. 생존을 가지고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라고 그렇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오해들을 하면서 애굽에서 그냥 무작정 나왔던 겁니다.
그래서 생존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따로 준비해온 생존과 관계없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 되기 위해서는 광야라는 틀 속에서 그들은 생존이 생명이라는 그런 생각이 삭제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싸우십니다. 백성들은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생존을 책임져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생존하고자 하는 의식을 버리지 아니하면, 생명은 아예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실제로 그들 중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 단지 두 사람 빼놓고는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나머지기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생존의식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인간인 이상 살고 싶어 하죠. 하지만 그들은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생존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광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양식을 달라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익숙했던 음식을 제공한 것이 아니고, 만나를 제공했습니다. 그 만나를 제공할 때 지겹도록 먹었습니다. 40년 동안 만약에 만나가 먹기 싫다고 안 먹어 버리면 달리 먹을게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구차 없이 만나를 주워 먹었는데 이 만나가 없는 날이 있어요. 광야에서.
없는 날이 무슨 날이냐. 안식일입니다. 안식일 날은 만나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만나가 없는 날을 통해서 그냥 기존의 보통날에 만나 주어 먹을 때 ‘그래 양식이야 생존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어.’ 라는 생각, 그 사고방식 자체를 이걸 완전히 교정해야 되는 겁니다. 살기 위해서 만나를 먹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만나 주시는 그 하나님 자체를 위해서, 우리는 애굽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나왔다는 생각을 그들은 가져야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나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의식을 가지고 나왔지만, 광야 40년을 통해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갖고 있던 그 새로운 뜻을 위하여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 위주로 살던, 애굽에서 살던 사고방식을 버려야 되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욥기 1장 21절에 보면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았습니다. 자식도 빼앗고, 그리고 가진 재산도 다 빼앗았습니다. 그럴때 우리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 자식 없이, 가진 것 없이 저보고 어떻게 생존하란 말입니까?’ 라고 생존문제를 거론하면서 하나님께 원망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걸 빼앗긴 욥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탄이었습니다. 사단은 분명히 빼앗아 가면 하나님께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고 욥도 그런 종류의 인간일 뿐입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하나님 앞에 내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욥이 뭐라고 고백하느냐하면, 어이구 내 재산, 어이구 내 자식 10명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다가 주목하느냐하면,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라고 여호와,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나됨의 주체라는 겁니다. 우리는 평소에 내가 주체가 되어 가지고, 이 주체를 내가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 내 가족과 내 가정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 여전히 내가 쥐어야 되고, 사수해야 될 주인공과 주체는 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모습을 사탄이 똑똑히 지켜보고 관찰하고 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요. 내가 어떻게 이 땅에서 밥 먹고 사느냐 그게 관심사가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가지고 어떻게 액션, 행동에 나서느냐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흥분할 것도 없어요.
지금 미국에 야구 메이저리그에 류현진 선수가 유명한 투수로서 공을 던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많은 청, 장년들은 류현진 선수가 1승 1승 보낼 때마다 어떤 희망을 느낍니다. 삶의 의욕을 느낍니다. 근데 이러한 사실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류현진 선수가 한국을 대표해서 공을 잘 던지는 그것을 지금 13승 했는데, 14승, 15승 이렇게 하고자 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싶어 해요.
그리고 한번 1차 할 때마다 우리는 흥분합니다. 그것은 ‘나는 살아야 되겠다.’ 뭘 하기 위해서. 류현진 선수가 저렇게 공을 잘 던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 살아야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1승 할 때마다 흥분하고, 만약에 1승을 못하면 실망과 좌절을 느낍니다. 우리는 세상을 볼 때에, 내가 더 살아야 될 것은, 내가 흥분할만한, 내가 기뻐 외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우리는 계속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세요. 욥은 자신이 (?)하고 싶은게 아니라, 욥에게 궁금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가지고 어떻게 주체자로서 이 세상을, 현실을 만들어가고 이끄시는가, 그게 욥의 믿음이었고 그것을 보고 사탄은 깜짝 놀라는 겁니다. 사탄이 오히려 좌절하고 실망하고 있는 거예요.
욥이 하는 이런 고백을 보고, 아니 보통 사람들은 다 자기 생존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야? 그게 사는 목적 아니야? 자기가 그리워하고,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나는 더 살아야 돼. 나는 더 살아야 돼. 하는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평상적인 일상인데 욥은 말하기를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우리 같으면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그리고 주신 것을 빼앗아 가지 않는 하나님이라서 나는 믿고 싶어. 이것이 보통 인간인데 욥은 말하기를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를 주신 것은, 바로 우리가 생존해야 된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방해하는 거밖에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실 때, 만나를 주신 자가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애굽에서 익숙한 그것을 가져버리면 우리는 생존하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이용할 밖에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나의 세계, 나의 현실만 믿게 돼요. 그거는 사탄이, 마귀가 원하는 바입니다. 광야를 통해서 우리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보고자 하는 흥분에 휩싸이지 마시고 주께서 살아 있으면, 우리도 덩달아 사는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관계 속에 놓여 있을 때 우리는 죽어도 사는 영생을 얻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유일자(IP:116.♡.234.248)
13-09-09 08:59
45강-YouTube강의(정답)130905-이 근호 목사
제목은 “정답”입니다. 수능에 정답 있죠. 입사시험에도 정답이 있고, 이 인생의 정답이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정답을 캐치했다. 정답을 이미 알아버렸다. 그러면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꼬이더라도 슬퍼하거나 좌절할일이 없을 겁니다. 정답을 아는 것하고, 정답을 차근차근 알아가고 그걸 얻고자 하는 거하고 이것은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어떤 내용이 있는가 하면, 성경은 하나님 뜻인데,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정답을 알고자 하면, 이게 모르게 되어 있어요. 듣고자 하면, 안 들리게 되어 있고, 보고자 하면, 못 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서, 또는 사람의 기대하는 기적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은 그 모든 실험은 다 실패로 끝났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헬라인들은 지혜를 원하고,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나.” 나는 너희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그 방식으로 내가 너희에게 정답을 알려 주겠는데, 그 정답은 그냥 정답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라는 말을 왜 구태히 그렇게 성경에서 강조하냐하면, 우리가 아담의 죄에서 타고 태어난 육신으로서는 정답을 알 길이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고걸 달리 이야기하면, 죄지은 인간이, 이미 죄를 품고 있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 그 죄를 해결할 방식은 인간에게는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알고자하면, 더 꼬이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그럴수록 정답이 무엇인지 상당히 근질근질하죠. 단도입적으로 정답이 무엇인가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완성.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어거스틴은 이것을, 정답을 하나님의 선이라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악한 것도 선을 위하여 존재했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선, 하나님의 완성입니다. 모든 것이, 일어난 것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고, 다 예수 안에서는 예가 되고, 예수 안에서는 아니오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것은 안 일어나고 싶은 일입니다. ‘하나님 이런 일은 일어났음 좋겠는데, 이런거는 될 수 있으면 안 일어났음 좋겠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일어나기 싫은, 아니오 라고 하고 싶은 일하고, 예라고 하는 일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데 그건 정답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정답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있어서는 악마가 설치든, 사탄이 설치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선이라는 말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가 말을 잠시 바꾸겠습니다. 그게 뭐냐. 완성입니다.
우리는 이미 완성된 그 안에서 누리고 있는 입장입니다. 우리 보기에 나쁜 것도 다시 깨보면 뒤에 선의 손길이 나있고, 우리에게 이거는 좀 안 일어났음 좋겠다 싶으면 그 뒷부분에 연결해보면 다 하나님의 선한 뜻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선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완성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들이 닥치는가, 그게 궁금하시겠죠? 이 점이 어렵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면, 옷가게 들어가서 옷을 고를 때, 그 옷들을 전시를 해놨습니다. 그러면 길가는 행인이 옷 살까, 말까 하면서 진열된 옷을 봅니다. 볼 때 여러분은 그냥 덜렁 삽니까?
옷이 옷걸이에 놓여 있으면 거기다가 자기가 상상한 자기의 얼굴과 몸체를 상상해서 그 옷과 대비하는 마음속의 작업을 먼저 합니다. 자 그럴 때 저 옷이 하나있고, 나를 거기다 비추어 볼 때 그 나의 모습이 실제로 있는 내 모습과 과연 같을까요?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항상 옷과 대비 할 때는, 자기가 상상한, 자기가 상상하고 싶은데로 거기다가 자기 모습을 그려서 대비합니다. 보통 30세 정도. 20대 같으면 10대. 항상 자기를 좋게 여겨서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옷을, ‘이제 됐어. 저 옷은 어울려.’ 하고 보면, 주변에서 당신 나이에 비해서 옷이 안어울립니다. 할 때에, 어디가 잘못 됐습니까.
바로 내가, 나를 상상한 내가 그것을 뭔가 착각 속에서, 내가 계속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진작 내 자신에 대해서 나를 모른다는 겁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나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오류를 범했냐하면, 하나님의 선한 뜻을 할 때, 하나님 쪽에서 선한 뜻을 가져다주는 것은, 우리는 관심이 없이,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러면 분명히 선하신 분이니까 내 쪽에서 여러 가지 시나리오 계획을 잡아 놓고,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니까 내 뜻을 이루어 주시겠지요?’ 라고 이렇게 고집을 부리게 돼요. 이것을 저는 나의 노선이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설정해놓은 나의 노선에다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니까 무조건 편들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의 선한 뜻이 무엇이냐. 로마서 8장 29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거는 하나의 노선 이예요. 그리고 그 노선 끝에는 우리가 있는게 아닙니다. 그건 맏아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하나님께서 마련한 시나리오요, 노선 이예요. 우리는 거기에 말려든것 뿐이예요. 지금 우리는 평소에 사는 것이, 남이 귀한 것이 아니요, 내가 귀한 겁니다. 내가 귀하기 때문에 나를 귀하게 여기는 쪽으로 선하신 하나님을 도용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근데 성경은, 우리가 귀한 것이 아니고, 맏아들의 영광스러움이 예수님의 영광이 귀한 겁니다.
그 귀한 노선은 우리의 노선이 철거 돼야 돼요. 우리의 뜻은 철거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한게 뭐냐 하면, 너는 미리 정해졌어. 이미 너는 창세전부터 정해졌어. 이 사실을 네가 갖고 있는 재산보다 더 귀히 여겨야돼. 그리고 이미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님을 위해서 너는 부름 받도록 돼있어. 이 귀한 것은 네 가정에 애가 공부 잘하는 것보다 이게 더 귀해.
우리 노선은, 내 집에 애가 공부를 잘해서 서울 법대 나와서 판사가 될 때, 나의 시나리오에 내 자식 공부 잘 시켰다는 멋진 계획이 있을 때, 나 자신의 영광은 한껏 높아지는 거죠. 근데 그것이 예수님의 영광하고는 관계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내가 기분 좋을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하나님도 같이 기뻐할 거라는 그런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의 완성이 아니예요. 그건 선하심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거든요. 어떤 부자가 자기 시나리오대로 농사가 너무 잘 되었어요. 농사가 너무 잘되었으니까 자기 예상된 시나리오를 하나 덧붙였습니다. 창고를 짖겠다는 거예요. ‘농사 잘 되었어. 그 다음에 창고 지었어. 그리고 난 뒤에 이만하면 됐다. 이만하면 나한테는 완성이고, 선이다.’ 하고 잠을 잤을 때 그날 밤 축시에, 이른 새벽 1시 사이에 그 영혼을 하나님께 데려가면 그 모든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우리가 안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자되도 죽습니다. 죽을 때 차라리 ‘하나님 저 부자 되었습니다.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는 것도 하나님이니까 차라리 내 목숨 가져가시옵소서.’ 왜, 이미 정하신자고, 이미 부르신 자고, 이미 의롭게 된 자고 이미 영광스럽게 해서 그것이 예수님 공로로 의해서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것을, 주님의 노선에 포함되었다면 죽으신 것도 하나님의 선하신 완성이라면, 차라리 죽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주께 영광이 되는 그 편이 저한테는 영광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된 것도 감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설정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연결된 하나님의 노선입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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