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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3 대구강의 13] - [피 99] - 사건화강의[피]

[13 대구강의 13] - [피 99] - 사건화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3 대구강의 13] - [피 99] - 사건화

13,07,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92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성도가 기대하는 생명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이미 하늘나라에 감추어 놓으셨다.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너희는 죽었고 !!

여기 나오는 이 골로새서 3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승천하셨다" 라는 것은, "예수님이 혼자서 하늘나라에 가셨다" 라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승천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성도의 진짜 생명이 이미 예수님과 더불어서 하늘에 감추어지게 만들었다" 라는 것인데, 즉 성도의 생명이 하늘에 있게 만든 요인이 예수님의 승천 안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아저씨가 에베레스트에 올라갔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도 같이 올라가 있는 것인가? 엄청 추운데 어떻게 올라가느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가 미국에 갔다고 하면, 한국에 있는 우리도 같이 미국이 간 것인가? 아니라는 말이다. '믿습니다' 라는 것을 천 번이나 한다고 해서, 어디 한국에 있는 사람이 미국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 나도 조금 있다가 예수님처럼 올라가겠지 ??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승천을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이 땅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상식과 같은 것이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어떻게 여기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살다가 올라가셨으니, 나도 조금 있다가 올라가겠지"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있다가 올라가는 것과, 이미 우리의 목숨이 하늘에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즉 "이 목숨이 그대로 이 땅에서 유지되다가 죽으면 이 목숨이 영생으로 변해서 주님과 함께 산다" 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어떤 야심이나 종교적 욕망과 관련이 된 것이지, 성경 이야기라는 아니라는 것이다.

◈ 다시, '너희는 죽었고' !!

그러면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골로새서 3장 3절을 다시 읽어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라고, 즉 "너희는 이미 죽었고" 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는 이미 죽었다" 라는 의미를 먼저 수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 자기가 이미 죽었다는 것은 수용하지 않고, 나중에 천국에 가서 살 궁리만 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일방적으로 오독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너희는 이미 죽었고" 라는 것 다음에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이미 이 땅에서 죽었다" 라는 것을 규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그것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여기가 하늘이고 또 여기가 땅이라고 하면,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너희는 이 땅에서 이미 죽었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보면 지금도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주부는 집에서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말이다. 그리고 여름이면 덥다고 차를 몰고 휴가를 간다는 말이다.

◈ '전부 다 죽었다' 라는 것을 정리할 수 있어야 !!

그러면 그런 것을 두고 우리가 어떻게 "전부 다 죽었다" 라고 정리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받아들이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교회에도 못 가는데, 시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살아있으니 교회에 모이고 하는 것이지, 죽었으면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다. 그런데도 성경은 죽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는데, 그 살아있는 자기 자신이 주님을 잘 섬겨야 하겠다고 하는 인식은, 그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하고, 나는 나대로 하겠다" 라고 갈라졌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의 이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해와 달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는데, 우리가 만들지 않았으니 하나님이 아니라면 누가 만들었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못하는 게 없으시니, 홍해바다 정도는 갈라지게 하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하여금 물위를 걷게 하셨다" 라고 하면, 하나님이니 그 정도는 하실 수 있다고 우리는 인정한다는 것이다.

◈ 믿습니다, 믿습니다 ??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남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는 곧잘 믿는다고 하는데, 그런데 막상 자기에게 부딪치면 어떻게 되는가? 즉 "너는 죽었다" 라는 것을 우리는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실감치 못한다고 하면,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전부가 다 구라고 거짓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나는 죽었다" 라는 것부터 규명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하면 그게 과연 자기 쪽에서 설명이 가능한지, 그것부터 한번 따져보자는 말이다. 만약에 "나는 죽었다" 라는 것을 자기가 믿게 된다면, 하지만 일단 자기가 살아있어야 믿는 것도 있고 소망하는 것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죽었다" 라는 것을 자기가 믿게 된다고 하는 것은, "나는 비록 죽었다고 해도, 그렇게 죽었다고 하는 것을 믿어주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죽은 척은 하겠지만, 일단 자기가 살아있으니 "너는 죽었고" 라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그런 살아있는 생물체로서 우리는 작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쪽에서 "나는 죽었고" 라는 것을 설명할 때, 기껏해야 우리는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죽었다고 하는 것을 믿어주는 자기는 아직 살아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나는 죽었고" 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제가 방금 설명한 게 맞는 말인가? 즉 "'나는 죽었고' 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바탕은 죽으면 안 되고 살아있어야만, '나는 죽었고' 라는 말씀에 나에게 들어온다" 라는 논리가 성경적으로 볼 때 맞는 논리인가? 물론 틀렸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쪽에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이 골로새서 3장 3절부터 곡해해서 수용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어떻게 되었던 간에 내가 살아있는 것은 맞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바탕, 그 출발부터가 걸러먹었다는 것이다. 즉 "살아있는 것이 더 살기 위해서, 그리고 죽어서 더 좋은 곳에 가기 위해서 아무튼 지금은 죽으면 안 되고 살아있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가 죽어서 공동묘지에 가 있다고 하면, 귀도 닫히고 눈도 닫히고, 사실 닫힌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썩어서 문드러져있는데, 박테리아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니 감각적으로 들어서 두뇌에 축적할 수 있는 모든 생물적 활동이 중지된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이미 시체가 되어서 딱딱한 돌맹이처럼 되어 가는데, 그렇게 뼈만 남아있는데, 거기에 가서 "너희는 죽었고" 라고 하면, 그 뼈다귀가 듣고는 "아멘!" 이라고 할 수 있는가? 차라리 의자에게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의자야, 너는 죽었다" 라고 하면, 의자가 "아멘!" 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놀라서 자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죽었다" 라는 것을 믿기 위해서라도, 물론 죽은 척은 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았다" 라는 것이다. 즉 죽었다는 것을 수용하는 상태에서 자기는 살아있어야 한다고 우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지금 파리 한 마리가 돌아다니면서 괴롭히고 있는데, 자기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ㅋㅋ). 누가 좀 잡았으면 좋겠는데, 당장 파리채가 없어서 곤란하지 싶은데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파리가 아니라 성경말씀이라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나중에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하겠는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 라는 것을 우리는 믿는데,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양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도 믿고 말이다. 우리가 그런 것을 다 믿으면서 골로새서 3장 3절에 나오는 "너희가 죽었고" 라는 말씀을 믿을 수 있는지,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지금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너희가 죽었고" 라는 성경말씀을 믿지 못한다고 하면, 우리가 "홍해바다를 건넌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장차 올 마지막 심판도 믿습니다" 라는 것이 거짓말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아니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율법에 있어서, "율법은 하나라도 어기면 모든 것을 어기는 것이 된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다른 것은 믿고 이것은 믿지 않는다" 라고 하는 그 자체가 우리의 선택사항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전부 다를 믿든지, 아니면 전부 다를 믿지 않든지, 그렇게 되는 것이지, 일부는 자기가 알아서 믿고, 일부는 남겨두었다가 나중에 믿는, 그런 것이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레 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레 6:2)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 곧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 잡거나 강도질 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레 6:3)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에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레 6:4)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빼앗은 것이나 늑봉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얻은 유실물이나
(레 6:5)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 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제가 지금까지 강의한 취지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 쪽에서 '너희는 죽었고' 라는 것이 해석이 된다는 것인가? 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라는 것인데,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나는 죽었다. 죽지 않았다" 라는 것을, 그것을 우리가 숨을 쉬는 유무를 가지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출발하려고 한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율법은 사건을 형식화시킨 것이다 !!

그러면 성경에서 "너희는 죽었고" 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그것을 바로 '사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사건으로 기준으로 해서 "너희는 죽었고" 라는 것이 발생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사건을 둘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부터 조금 어려우니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율법은 사건을 형식화시킨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어떤 사건을 형식화시켰는고 하니, "사람을 죽이면 범죄다" 라는 것인데, 즉 6계명에 보면 "살인하지 말라"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게 서로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A 라는 사람이 B 라는 사람을 살인하면 범죄인가? 아닌가? 물론 범죄인데, 그렇다면 자기가 남을 죽이면 범죄인가? 아닌가? 물론 범죄인데, 목사님이 누구를 죽여도 역시 범죄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A가 B를 죽이면 범죄다" 라는 것에 어느 누구를 집어넣어도 나오는 것은 범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일반화가 된 형식을 갖춘 하나의 율법이라는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라는 것도 다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서 A가 백화점에 놓여있는 어떤 B를 보고 탐을 내었다고 하면 그게 곧 탐심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십계명에 어긋나니 범죄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백화점에 있는 물건을 탐내면 범죄인가? 아닌가? 그것도 역시 범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탐내지 말라" 라는 말씀을 지켰다고 치면, 우리는 일단 "A가 B를 탐내면 범죄다" 라는 형식 속에 들어가야 하겠는가? 말아야 하겠는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들어간다는 말은, "내가 무엇을 탐내면 나도 역시 범죄자임을 각오합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게 일반화가 되고 정형화가 된 논리 속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 만약에 내가 15년 동안 탐을 내지 않았다고 하면?

지금 제가 논리적으로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닌데(ㅋㅋ), 틀렸으면 틀렸다고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율법의 형식 속에 우리가 들어가 있다고 하면, 만약에 자기가 15년 동안 탐을 내지 않았다고 치면, 물론 그럴 리도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만 15년이 지난 그 다음 날에 탐을 내면, 그러면 그때만 범죄를 한 것인가? 아니면 15년 동안도 범죄를 한 것인가? 아니 처음부터 말이다.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닌데, 이런 경우에 도대체 언제부터 범죄한 것인가? 15년이 지난 다음날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범죄를 한 것인가? 왜 처음부터 범죄한 것인고 하니, 우리의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 율법 속에 이미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율법 속에 이미 들어가 있는데, 그 율법이 일반화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자기가 탐을 내면, 그것을 그때부터 범죄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는 탐을 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속성이 있음을 알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탐내지 말라" 라는 것을 율법 속에 집어넣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율법이 우리를 덮쳤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율법을 지킨다" 라고 하는 것을 보류해야 하는데, 즉 자기가 15년 동안 율법을 지켰는데, 그런데 "내일도 내가 지킬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보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일은 어길 수 있기에 말이다.

그래서 "율법으로 의롭다" 라고 하는 것을 말이 안 되는데, 주님께서는 이미 아시는데,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이미 알고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서 "나는 율법을 지켰습니다" 라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율법을 어긴 것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취지를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 사건이, 일반화가 되고 보편화가 !!

저는 이러한 사건을 두고서 '일반적인 사건'으로 보는데, 즉 율법이 사건 속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이 일반화가 되고 보편화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만 이 율법 속에 누가 들어왔는고 하니, 예수님이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 속으로 들어오셨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율법을 어겼는가? 지켰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는데, 그런데 여기서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율법은 어긴 자에게만 저주하게 되어있는데, 맞지요? 율법에는 반드시 두 가지 면이 있는데, 즉 지킬 경우에는 축복이고 어길 경우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명기 28장에 나오는데, 즉 "율법을 지키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지만, 만약에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복을 받아야 하는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율법 속에 들어왔지만 율법을 온전히 지켰으니, 그래서 죄가 없으니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 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
(신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신 28: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신 28:17)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신 28: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신 28: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그런데 십자가에서 도대체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게 성경말씀에 분명히 나오는데 말이다. 과거에 제가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라고 하니, 저의 면전에서 그것을 두고 따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

하지만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분명히 뭐라고 하는가? 여기에 보면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림으로서 어디 아래에 있다는 말인가? 저주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누가 따지든 말든 분명히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면 이것은 어디에 위배가 되는가? 죄가 없으신 분이 저주를 받았으니, 그러면 율법을 어긴 자에게만 저주가 내리게 되어있다고 하는 그 원칙과, 그런데 율법을 어기지 않더라도 율법 안에서 저주를 받게 된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게 곧 십자가 사건인데 말이다.

◈ 그러니 십자가 사건은?

그러면 이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사건이 아니라 무슨 사건이 되는가? 매우 특수한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어기지 않더라도 율법 안에서 저주를 받게 된 사건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율법을 어긴 자에게만 저주가 내리게 되어있는데 말이다.

방금 읽었던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니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서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앞에 있는 단서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를 위하여"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즉 자기의 택한 백성을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 특수한 사건으로 이전(移轉)을 !!

그렇게 예수님이 저주를 받게 되면, 여기서 이게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 아까 제가 "율법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일반화가 된 사건 속에 있는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특수한 사건으로 우리가 이전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전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우리에게 있는 "율법은 이렇게 해서 저주를 받는다" 라는 인식자체, 그것이 우리에게서 출발했다고 하면, 그것을 우리가 포기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살아있으니, 살아있는 내가 '너희는 죽었고' 라는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나는 아직도 살아야 돼" 라고 하는 것을 포기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화된 사건이고 우리의 상식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성경에서 "너희는 죽었고" 라고 하는 것은 우리 쪽에서 출발하면 해석이 불가능하고, 즉 일반화가 된 사건에서 출발하면 안 되고 어디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 특수한 사건에서 출발하게 되면, 우리는 심장이 아무리 펄떡펄떡 뛰어도 우리는 이미 죽은 상태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해석되어야 !!

바로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남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입각해서 모든 성경말씀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될 때 "너희는 죽었고" 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서 진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만약 진실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 다음에 우리 생명은 어디에 있게 된다는 말인가?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분명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전혀 실감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는 것이 말이다.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자기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

다시 말해서, "나는 죽은 것이 맞습니다" 라는 사람에 한해서 그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는 것이 바로 진실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건을 증명하고 증거하기 위함인데, 그래서 이런 사태가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아직도 내 심장이 뛰고 있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데, 그러니 나는 살아있는 것이 맞습니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이 뭐라고 하고 하나님이 뭐라고 해도 나는 살아있는 것이 맞습니다" 라고 하게 되면,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증거되지 않는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자기는 지금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길지 몰라도, 즉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해도, 그렇게 해서 자기 희망과 소망과 포부는 언급될지 몰라도,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취지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즉 새언약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

좀 더 나가서 생각해보면, 성도가 살아가는 목적이 자기의 구원이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오류이고 미신이고, 성경내용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성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인데, 그건 성령이 임해야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면 뭐라고 하는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는고 하니,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고 하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고 그냥 꼬불쳐두고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를 증거하는 경우도 있을 수 없고 말이다. 성령은 그냥 공짜가 아닌데, 성령이 오게 되면 과거의 자기를 증거하던 삶을 이제는 접어야 하는데,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그러면 성령이 오기 이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가?

그러면 무엇을 전제로 하게 되는가? 성령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그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성령을 받지 않았을 때, 즉 성령이 오기 이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이 먼저 분명하게 규정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가? 성령이 오지 않으면 우린 누구를 증거하는고 하니, 바로 자기 자신을 증거하게 되는데, 그렇게 살다가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을 증거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는데, 자기를 증거하면서 산 것이 어떤 세월이며, 어떤 형태인지, 그것을 감춘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증거하면서 살았다고 하는 것이 혹독하게 느껴져야, 그 다음에 성령의 개입으로 인해서 달라져야 할 위상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 예를 들고 말고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사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란 말이다.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것이 말이다. "나는 사도신경도 외웁니다. 예수님도 믿습니다. 전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십일조도 했습니다" 라고 하는,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서 "너희는 죽었고" 라고 하시니, 그러면 우리는 그 다음부터 "너희는 죽었고" 라는 것을 자기 안에 담아놓고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식으로 바꾸려고 하니, 기껏 나오는 아이디어가 무엇인고 하니, "저는 골로새서 3장의 '너희는 죽었고' 라는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니 살려주세요" 라고 하면서,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죽었고' 라는 말씀을 내가 믿습니다. 그러니 그 믿는 나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든지 제발 좀 살려주세요. 그렇게 해서 나중에 천국에 가게 해주세요" 라는 요청을 하게 될 때, 그 사람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전혀 주님에게 있는 게 아니라,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귀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간에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게 바로 성령이 오기 이전의 우리 형편이라는 것이다.

◈ 특수한 사건이 아닌, 여전히 일반적인 사건에 머물러 !!

다시 말해서, 특수한 사건으로 가야하는데, 그런 특수한 사건으로 가지 못하고, 여전히 일반적인 사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건에 머물러 있게 되면, 누가 누구를 살리는고 하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어떤 행동을 해서, 그 가미된 행동으로 인해서 자기를 살려내는 방식 외에는 다른 어떤 구원의 방식도 생각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어떻게 해서든 간에 자기 자신을 절제하고 관리를 해서, 어떻게 조지든지 간에, 철야기도회에 매일 매일 나가든지 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사는 것은 자기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를 어떻게 교체를 하든지 해서, 그 여부에 따라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는 안목에서 우리는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그것은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한 것이지 말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성경을 그렇게 해석을 하는데, 즉 "하나님이여, 저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말이다. 우리의 질문 자체가 바로 그러한데, "제가 어떻게 저에 대해서 조치하면, 제가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니 철저하게 모든 아이디어가 여전히 누구에게 머물러있는가?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승천하심의 결과로서 !!

하지만 교재 292페이지를 다시 보면 "성도가 기대하는 생명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이미 하늘나라에 감추어 놓으셨다"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 '승천'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승천하심으로 나타난 결과가 뭔고 하니,"너희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졌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성도가 기대하는 생명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이미 하늘나라에 감추어 놓으셨다.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러니 예수님의 승천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오늘 아침에도 음식 쓰레기차가 왔는데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우리는 토큰을 집어넣고 음식 쓰레기를 넣고서 빠지면, 그 음식 쓰레기차는 토큰을 끄집어내고 음식 쓰레기를 넣고 떠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쓰레기차를 뒤따라가면서 "저도 거기에 쏟아 부어주세요" 라고 하는가? 음식 쓰레기 더미에 말이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쓰레기차는 음식 쓰레기만 회수하면 되는데, 그 음식 쓰레기를 버린 사람까지 덩달아 집어넣어서 회수하는 쓰레기차는 없다는 것이다. 어디 음식 쓰레기 속에 들어가서 죽을 일이 있는가? 메탄가스에 취해서 말이다.

◈ 우리의 생명이 예수님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을 하실 때는 음식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 아니라, 음식 쓰레기 속에다 아예 우리를 처박아 넣어버리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우리의 생명이 하늘에 앉혀지려고 하면, 우리 생명이 예수님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야하는데, 같이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과 같이 타서 우리 생명이 거기에 안착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상에 있는 우리의 생명이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같이 올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하면, 그렇게 올라갈 때 우리의 목숨이 무엇으로 바뀌는고 하니,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우리의 목숨이 생명으로 바뀌는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목숨이 생명으로 바뀌는 현상을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살펴보기 이전에 먼저 13장을 보면, 거기에서 베드로가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 제가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게 우리가 평소에 주고받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냐는 것이다. (오잉, 평소에 그런 목숨 이야기를?)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 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 자기는, 자가 엄마와 내가 물에 빠지면 누구를 건져내지?

예를 들어서, 연애하는 청춘남녀가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여자가 남자에게 묻기를 "당신은 당신 엄마와 내가 물에 빠지면 누구를 건져내겠어요?" 라고 말이다. 그러면 남자는 "그건 물론 당신이지" 라고 하지 싶은데, 그래도 여자가 남자의 대답에 확신이 없어서 다시 묻기를, "그러면 당신 엄마는 어떻게 되지요?" 라고 하니, 남자가 하는 말이 "우리 엄마는 해녀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제가 왜 이런 썰렁 개그를 하는고 하니,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당신이 죽는 곳까지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보통 두 글자로 '사랑'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어느 선까지만 하고 그 다음부터는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하는가?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갈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칭찬했는가? 아니면 황당해했는가? 예수님은 많이 당황해하셨는데, 왜냐하면 "니가 무슨 자격으로 내 있는 곳에 오는가?" 라는 것이다. 수제자의 자격인가? 오히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사탄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 아직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기에 !!

요한복음 14장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즉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고 "베드로야, 너는 내가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 순교를 하더라도 안 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제가 목숨을 바쳐서 가겠습니다" 라고 하니,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말이다. 왜 베드로가 목숨을 바쳐도 합류가 되지 않는고 하니, 아직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소가 말이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는데, "불수레를 타고 올라간 엘리야는 어디로 갔는가?"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처소가 마련되지 않아서 안 된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보지 않았던 에녹은 어디로 가있는가? 그리고 모세는 어디로 가있느냐는 것이다.

◈ 왜 그들은 예수님의 별세를 이야기했는가?

그때 변화산에서 누구누구가 나타났는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인데,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담화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고 치면, 그렇게 예수님이 죽지 않은 게 모세와 엘리야에게 거북스럽고, 왜 예수님은 꼭 죽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여기서 조금 전에 던진 문제가 풀리는데, 즉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우리의 생명이 하늘에 감추어진 그 내막이, 여기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서로 대화하는 내용 가운데 풀린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죽지 않으면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처소를 획득할 수 없다" 라는 것을 이미 모세와 엘리야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죽어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는 말이다. 즉 인간은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공간적으로 볼 때, 이 땅에 살다가 죽으면 우리 인간의 혼은 어디로 가는가? 짐승의 혼은 아래로 떨어지고, 인간의 혼은 하늘로 올라간다고, 그게 전도서에 나온다는 것이다.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전도서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죽어서 하늘에 올라가도 그게 천국이 아니고, 천국은 새언약이 완성되는 상태가 곧 천국이라는 것이다.

(전 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다짐하는 의미에서 다시 하겠는데 말이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가 나흘만에 살아났는데, 그러면 그게 부활의 첫 열매인가? 그 이전에 베드로의 장모를 예수님께서 살려주셨는데, 그러면 베드로의 장모가 부활한 것인가? '야이로' 라는 회당자의 딸이 죽었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 "소녀야, 일어나라" 라고 하니, 그 소녀가 "아이쿠, 잘 잤다" 라고 하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 예수님만이 첫 열매 !!

그러면 그게 부활인가? 부활이 아닌데, 그러면 무엇인가? 그냥 소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부활의 첫 열매는 누구의 몫인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첫 열매인데, 그러면 시간적으로 예수님보다 먼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무엇이 되는가?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니 베드로의 장모는 무엇이 되고, 엘리야는 무엇이 되느냐는 것이다.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서 하늘에 올라갔는데, 죽지도 않고 올라갔는데 말이다. 그렇게 올라가서 도대체 어디에서 대기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어디 고객상담센터에서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의 상식은 무엇인고 하니, "죽으면 곧 영생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여기서 정말로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기를 바라는데,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하나님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채로 생명나무를 먹게 되면 영원히 저주받은 상태로 살기 때문에 생명나무로 막는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지상에서 하늘을 생각하지 말고, 이미 아담이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이야기를 한다고 여기면, 그러면 우리가 모세나 엘리야의 '예수님의 별세' 이야기가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땅에서 목숨이 끊어지고 말고 하는 것은, 물론 그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심각하지만, 즉 그게 장례식장에서 심각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전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지상에서의 삶이 조금 더 연장되고 말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죽어서 음부에 갔느니라 !!

성경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천국에 가는가? 마는가?" 라는 것이지, "죽어서 어디에 모이는가?" 라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그냥 '음부' 라고 하는데, 즉 "죽어서 음부에 갔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욥 21:13)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

다윗은 죽어서 어디에 갔는가? 물론 음부인데, 다윗이 천국에 들어간 시점이 언제인고 하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을 때, 그때 비로소 다윗은 하늘나라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천국이 없는데, 왜냐하면 아직 새언약이 완성되지 않아서 말이다.

천국은 반드시 새언약이 완성되어야, 즉 모든 율법이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저주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특수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이어져야 하는데, 즉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이 말이다. 그러한 특수한 사건이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무엇을 배척하는고 하니,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종교적 상식을 차버린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하면, "나는 숨을 쉬고 있기 때문에 살았고, 그렇게 산 내가 어떤 조치를 해야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으면 나는 천국에 간다. 그런 조치를 하면 나는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는, 그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닌데, 그것은 종교의 일종이라는 말이다.

◈ 그게 아니야 !!

천국은 그렇게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그렇게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특수한 사건이 우리에게 덮쳐서 우리의 일반적인 사건이 모독을 받아야 하는데, 즉 우리가 하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가 주님에게 모독과 질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야!" 라고 말이다.

베드로가 "예수님, 죽기까지 제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칭찬을 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질타를 하셨는데, 즉 "그런 식으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너는 가봤자 엘리야나 모세처럼, 혹은 에녹처럼, 혹은 다윗처럼 음부에 있을 뿐이다" 라는 것이다. 이미 죽은 성도들처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이다.

왜 그런가? 처소가 없기 때문인데, 그러면 처소를 누가 만들어주어야 하는가? 1번 타자로 예수님께서 만들어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처소가 만들어지게 되면,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천국에 가는가? 그 순서가 다음과 같은데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놓아두고, 그러니 구약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갈 때 따라오던 여호수아를 중간에 두고 모세만 먼저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데,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를 다 놓아두고 먼저 예수님이 올라가셔서 말이다.

◈ 성령이 임하게 되면 !!

그렇게 첫 번째 예수님이 혼자 올라가시고, 두 번째로는 처소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세 번째가 없으면 안 되는데 말이다. 세 번째로 성령이 오게 되고, 그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듯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라고, 그렇게 처소를 마련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러니 혼자 달랑 천당에 간다는 개념은 종교적인 욕구이고 상식이지,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이야기하면서 빠트린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주님 혼자 단독으로 올라가시고 그리고 처소를 마련하시고, 그렇게 마련이 되었다는 증거로서 성령이 오신다는 것이다. 마련이 되지 않으면 오지 않는데, 처소가 마련되었기에 성령이 오신다는 말이다.

그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라고 하는데, 즉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신 분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자이다" 라고 세례요한을 통해서 증거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3절에 보면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다.

(요 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요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 주님은 처소는 어떻게 마련하시는가?

그러니 "성령을 준다" 라고 하는 것은, 이미 여기에 모든 것이 다, 즉 "처소가 확정되었다" 라는 통보사항으로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는데, 그러면 제가 빠트렸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러면 처소는 어떻게 마련하는가?" 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면 안 되는데 말이다.

주님께서 처소를 어떻게 마련하는고 하니, 먼저 일단은 베드로고 야고보고 간에, 사람이라는 사람은 다 빠져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처소를 마련하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실은 이렇게 모두 다 빠지고 방치한다는 것 자체가 기여가 되는데, 주님의 일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엄마가 맛있는 요리를 하려고 하는데 철없는 딸이 옆에서 보탠다고 하면서 거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때는 엄마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니는 도와주지 않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엄마가 요리를 하는데 있어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일에 기여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구원이 또렷하게 보일 수 있도록, 그렇게 말끔하게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것게 아니라 우리가 설치게 되면, 주님의 공로가 깔끔하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가 기여하고 보탠 그 공로가 자랑스러워서 환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사람의 육신적 삶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누구를 증거한다고 했는가?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데, 즉 자기를 남에게 자랑하고 과시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그게 계속해서 살아있는데, 그래서 걸핏하면 무엇을 하나 얻은 것을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고 으시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깔끔하지를 않는데, 즉 주님께서 하신 혼자만의 공로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자식도, 손 안의 자식 !!

제가 여러분에게 하나 물어보겠는데, 사람이 자기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름다운가? 아니면 손 바깥에 있는 것이 아름다운가? 손 안의 자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역시 자기 손에 있을 때가 좋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하늘이 아름답고 태양이 좋아도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낳은 자기 자식이라도 가까이 있을 때가 좋은 것이지, 비록 잘 되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있어도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는데, 손자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자식들이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을 때 부모로서 자식을 키운 보람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러시아로, 미국으로, 또 아프리카로 이민을 가버리면 전혀 보람을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가 관련될 때 비로소 진선미(眞善美)를 느끼게 되는데, 즉 자기 믿음, 자기 소망, 자기 사랑이 중요한 것이지, 주님의 믿음, 주님의 소망, 주님의 사랑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것이 될 때, 자기의 것으로 퍼담을 때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뷔페에 가더라도 음식이 푸짐하게 있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게 자기 접시에 가득 담기게 될 때 비로소 안심을 하고 마음의 평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육신적인 삶인데, 우리 인간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진다 !!

아무튼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처소를 만들 때 어떻게 만드시는가?" 라는 것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성경구절이 하나 들어가는데,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진다" 라는 것이다. 양들이 서로 일치단결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게 스가랴 13장에 나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시 인용한 것인데 말이다.

(마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렇게 쳐서 양들이 흩어지니 목자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소를 만들 때 누구만 남는가? 성부와 성자만 남고, 성자로 하여금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돋우어 주는 분이 개입하게 되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부, 성자, 성령께서 처소 만들기를 완료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특수한 사건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일반화된 사건 속에서 자기 자신의 행동을 믿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사건에 의해서 자기가 구원을 받았음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게 곧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내용 속에는 예수님이 이룬 모든 것이 다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가 아닌, '인간에 대해서' !!

어떤 사람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묻기를, "목사님은 글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을 하실 때 인간을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하십니다' 라고 하셨는데, 그게 같은 말이 아닙니까?" 라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다시 설명을 해주었는데, 즉 "하나님의 일은 '인간을 통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하십니다" 라고 말이다.

문장은 굉장히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난해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해서' 라고 하니까 어려운데, 그러니 그냥 '인간에서' 라고 하면, 즉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장소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서' 일을 하지, '인간에 의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 안에서 일을 벌리는데, 그렇게 일을 벌리는 주체자가 하나님이라고 하지를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특수한 사건이라고 하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면 관념상의 하나님이 되고 마는데, 그냥 무심코 불러보는 하나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주하게 일하시고 어떤 열매가 있는데,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이 하셨죠?" 라고 하면 무엇이 그만 빠지고 마는가? 그동안 하나님이 해오셨던 특수한 사건의 요소가 우리 믿음의 내용 속에 남아있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을 증거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되면 안 되고, 하나님의 특수한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그 안에서 우리는 이미 죽었는데, 그렇게 죽은 놈이 어떻게 죽은 자기 자신을 증거하느냐는 것이다. 죽은 놈이 무슨 자기 행동을 증거하는가? 즉 "나는 이렇게 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죽은 자는 제 아무리 찔러도 반응이 없는데,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특수한 사건의 몫이기 때문에, 그러니 죽은 자가 나서서 "내가 알아서 잘 믿었다" 라고 하는 것은 반칙이라는 것이다.

◈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자인 에스겔을 데리고 어디로 가는가? 해골이 있는 곳으로 가는데, 그것도 축축한 해골이 아닌 바짝 마른 해골에게로 말이다. 축축하면 구더기라도 생길 수 있는데, 하지만 바짝 마른 해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묻는데, "에스겔아, 이 마른 해골이 살겠는가?" 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에스겔조차도 여기서 배제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에스겔은 자기 생각을 말할 수가 없는데, 이것은 말을 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혀 말도 안 되는데 일인데, 그것도 바짝 마른 해골이 말이다. 그래서 에스겔은 "주의 말씀이 알아서 하시겠지요" 라고 나오는데, 그러니까 해골들에게 힘줄이 생기면서 각각의 자기 자리를 찾아서 들어간다는 것이다. 갈비뼈는 갈비뼈대로, 엉덩이뼈는 엉덩이뼈대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갑옷을 입고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 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 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 그게 곧 구원을 받은 양상 !!

그 양상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구원을 받는 양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일종의 구원모델인데, 우리도 똑같은 양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해골을 빼놓고는 다 주님이 하신 것인데, 지금 입고 있는 블라우스도 그렇고 말이다. 사실은 해골도 주님의 것인데, 해골에게 찾아와야 하니 말이다. 해골마저 주님의 것으로 하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오직 주님만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 출발점이 무엇인고 하니, "너희는 죽었고" 라는 것인데, 그러면 왜 죽었는가? 우리가 보기에 우리 자신이 숨을 쉬고 있어서 죽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이미 우리는 죽은 것이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 자체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놓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서 처소를 마련하셨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나는 죽더라도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할 때, 주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기가 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미 죽었으니 말이다. 죽은 놈이 새삼스럽게 죽는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이미 죽여놓고 그러면 이 죽은 인간을 어떻게, 즉 해골인데 이 해골을 어떻게 살려내는지, 그 몫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몫이라는 것이다. 전혀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하늘나라에 갔던 아브라함도 그렇고, 엘리야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물론 여기 베드로도 그렇고, 전부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그 특수한 사건에 근거해서 그들의 생명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즉 주님과 함께 죽은 자만이 주님과 함께 그 생명을 공유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십자가에 죽지도 않고 자기가 독립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겠다고 한다면, 그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죽을 때도 오직 그리스도의 사건에 의해서 죽어야 하는데, 자기가 자살을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리스도의 특수한 사건에 의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수한 사건에 의해서 말이다.

◈ 여러분, 태어날 때부터 죽었습니다 !!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리스도의 사건에 의해서 언제 죽습니까? 사자라도 몇 마리 풀어야 합니까? 아니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용광로 속에 들어가든지 해야합니까? 어떤 계기로 죽어야 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 태어날 때부터 죽었습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 방향성이 죽음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하는데, 아무리 염색을 해서 숨기려고 해도 말이다(ㅋㅋ). 하지만 그게 자기 뜻이 아닌데, 우리는 겉으로 덮을 뿐이지 속에서는 계속해서 희게 하는 염색체가 작용해서 나중에는 아예 무너지게 한다는 것이다. 팔다리가 무너지고, 허리가 무너지고, 또한 간이 무너지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내려앉고 주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죽었는데, 그렇게 "이미 죽었다" 라는 말에 우리가 새삼스럽게 화들짝 놀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우리를 하나의 사건화를 시켜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의 자기 사건 인식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려고(?) 하는데, 하지만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뭉쳐서 사건화를 시켰다는 말이다.

◈ 변곡점(變曲點)과 주먹밥 !!

예를 들어서, 6.25때 먹던 밥이 주먹밥인데, 그런데 그 6.25가 지나고 나면 따로 국밥이라는 것이다. 밥 따로, 국 따로, 반찬 따로 말이다. 그런데 6.25 때는 그것이 뭉쳐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뭉칠 때만 사건이 되는데, 즉 주님께서는 우리는 30대, 40대를 따로 보지 않고 처음부터 뭉쳐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뭉쳐버리니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것을 '변곡점'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건의 반대말이 일상인데, 이 일상에는 역사가 있는데, 히스토리가 말이다. 즉 시간의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다가 꺾어지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을 두고서 '변곡점'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A가 있고 B가 있고, 그리고 꺾어져서 C가 있다면, A에서 B로 동일한 질(質)로 계속해서 된다고 하면, 그것을 두고 역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기억, 혹은 추억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때문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때문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라고 한다면, 이게 나오는 문장인고 하니, 심수봉이 부른 노래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ㅋㅋ). 이게 무엇인고 하니,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해서 나온 말인데, 그렇게 동일한 질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아래에서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변곡점에서 그만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여기 사건 앞에 있는 것들은 주먹밥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먹밥이 되어서 똘똘 뭉쳐지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담으로 둘러 쌓이게 되어서, 안과 밖에 그만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안과 바깥이 말이다.

이 안을 로마서 5장에서(?) '아담 안에서' 라고 표현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는 죄인이다" 라고 할 때는,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때문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동조하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전혀 아니라, "니가 어제가 되었던 오늘이 되었던 간에, 그게 언제이든 간에 '아담 안' 이라는 주먹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라고 하는, 그런 안목으로 성경말씀을 우리에게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동일한 질로 보게 되면 100으로 성경말씀을 오해하게 되는데, 그래서 그런 동일한 질로 보는 것을 똘똘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똘똘 말게 하는 것을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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