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제사장의 나라 130823
왕과 제사장의 나라 130823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관리자(IP:203.♡.42.222)
13-08-24 11:46
서경수(IP:218.♡.161.108)
13-09-09 16:53
광주 강의(2013. 8. 23) 45-1
에스겔 44장 9절 말씀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지요. 성소는 하나님과 인간이 유일하게 만나는 지점입니다. 누가 이것을 정했는가 하면, 야곱이 형에게 쫓겨나서 벧엘에서 잠을 잤어요. 그 때 꿈에 사다리가 나타났지요. 이 사다리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옛날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바벨탑을 쌓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바벨탑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바벨탑으로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사다리를 내려 보내 하늘과 연결되도록 했습니다. 여하간 야곱에게 꿈으로 이런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꿈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이 세상 현실이 두 종류로 구분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난 현실이 진짜 현실입니까, 아니면 꿈이 깼을 때가 현실입니까? 꿈이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꿈은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꿈을 꾸지 않더라도 밥 먹고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지요? “야곱의 언약이 없으면 못 살 거야. 난 죽고 싶어.”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야곱이 꿈을 꾸므로 말미암아 야곱으로 하여금 무엇을 접하게 되는가 하면, 꿈속에 나오는 현실,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는 ‘비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비밀인가 하면 ‘감추어 놓은 비밀’입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면 에베소서에 보면 ‘창세전부터 감추어 놓은 비밀’입니다. 즉 택한 백성에게만 알려주시고 지옥 갈 사람에게는 절대 알려주시지 않는 그 비밀이 언약을 통해서 야곱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세상 사람이 말하는 현실도 온 몸으로 다 느끼고, 동시에 언약이 자아내는 그 현실도 느낍니다. 이 두 가지가 다 나오는 것이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다.’ 바울의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만약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그럼 당신은 밥 안 먹나? 먹잖아. 그렇다면 당신이 식사를 할 때 당신이 먹은 거야, 아니면 그리스도가 먹은 거야?”
바울의 답변은 “너희들은 두 개의 현실이 같이 있다는 것을 몰라. 너희들이 아는 현실은 하나 뿐이야.”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뭐든지 내가 하는 거예요. 내 인생 내가 사는 거지요. 그런데 꿈이 현실인 자들의 인생은 누가 살게 합니까? 하나님이 야곱을 언약의 사람 이스라엘로 만들어 냅니다.
강의 전에 ‘허무’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이미 처소가 마련되어 있으니까 성령이 찾아오는 것이나 야곱이 꿈을 꾸는 것이나 같은 거예요. 사실 그 내용은 성령이 오게 되면 전부를 알고, 야곱처럼 꿈으로 알게 되면 부분만 아는 거예요. 히브리서 1장에 나오지요. ‘옛날에는 부분으로 알게 해 주셨는데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알게 하셨다.’ 감춰놓은 그 비밀로 인하여 우리는 성도로 부름을 받고, 이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생명책에 기록된 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사람들이 이해하는 이야기를 하면 이쪽 사람들이 마치 구원 받는 사람처럼 사기를 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사기 치지 않으면 목회가 안 되는 세상입니다. 사기 친다는 말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들을 제공함으로 교회가 융성해지는 그런 판이 되기 때문에 계속 사기를 치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택한 백성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 골라서 해야 됩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다리가 왔고, 그 끝이 하늘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이곳을 ‘하늘의 문’이라고 했지요. 이 ‘하늘의 문’을 에스겔 44장 9절에서는 ‘성소’라고 했어요.
성소는 거룩한 공간, 특이한 장소입니다. 특이한 장소가 나중에 성전이 부서진 후에는 특이한 사건으로 전환되어 우리 몸이 성전 되게 하는 효과를 줘요. 하여튼 야곱의 언약에 의하여 하늘의 비밀이 땅에 내려오고, 그 비밀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는 그런 지정된 장소가 성소입니다. 그런데 이 성소에 못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마음과 몸이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못 들어와요.
몸이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표피를 칼로 자르면 그것이 할례니까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마음의 할례는 어떤 칼을 사용하면 됩니까? 마음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은 육신을 붙잡을 수 있지만 마음은 육신에게 붙잡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인간을 장악해요. 그래서 인간이 자기 몸을 붙들고 수술하듯이 마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하려면 이미 할례를 받은 분이 와서 우리 마음을 다뤄야 됩니다. 내 마음은 내 육신의 뜻대로 다뤄지지 않아요. 자기 마음을 자기가 알아서 다루는 것 같으면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절대로 안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사람의 육신의 욕구보다 더 범위가 크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이 미운데 안 미워하려고 노력한다는 자체가 우습지요. 왜? 이것은 밉다는 말이거든요. 자기가 미워하는 탤런트가 드라마에 나오면 그 드라마는 보기 싫어요. 왜 미운가? 미운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며느리 셋 중에 첫째 며느리가 미워 구박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말립니다. 왜 며느리를 미워합니까? 그냥 미워요. 내 마음 나도 몰라요.
반대로 좋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데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그냥 좋아요. 북한의 김정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좋다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끊어내는 것은 피동적으로 당할 뿐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은 이미 마음에 할례를 받았던 그분에 의해서만 마음의 할례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가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의 할례는 성사되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은 허무한 것만 지향합니다. 성도가 아닌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30년 예수 믿었지만 역시 내 인생은 내가 가꾸는 것이지 누가 와서 내 인생을 살아주는 것은 아니었어. 하나님도 이제 놓고 싶다.” 이것이 성도 아닌 자의 마지막 솔직한 고백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성도는, “그래, 평생 내가 주님께 욕만 돌리고 평생 주님 미워하다가 이제 주님 품에 안기는군요.” 이렇게 고백합니다. 평생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짓밖에 안 했는데 결국 나는 주의 품에 안길 때, 누가 누구를 미워하는 것을 ‘왜 미워하냐?’고 따지지 못하고, 누구를 사랑하는 것을 ‘당신은 왜 그를 사랑하냐?’고 따지지 못하는 것처럼, 내 마음이 주의 품에 안긴다는데 누가 시비를 겁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주님께 욕이 되는 짓뿐이었는데 이런 인간이 주의 품에 안기게 되니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모든 영광은 주님이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네가 성령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리라.” 공짜로 주신 것을 아는 거예요. 우리가 생산한 것 말고 공짜로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가 했다.”고 하는 것은 성령의 일이 아니고 “내가 한 것도 없는데 공짜로 받았다.”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 44장 9절에 나오는 몸의 할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림을 보세요. 이건 에스겔 45장 내용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그림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여기 중앙에 검은 부분이 성소입니다.
성소란 감추어진 현실과 나타난 현실이 이어지는 특이한 공간입니다. 현실이 감춰져 있어요. 현재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감춰진 것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인생 자체가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몸이 실체인줄 아는데 사실은 그림자입니다.
누가 움직이니까 우리 몸이 움직이는 거예요. 나의 본체가 움직이니까 내가 움직입니다. 나의 본체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움직이시니까 성도가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야곱이 알았지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꿈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런데 꿈은 자기 능력 밖입니다. 꿈을 통해서 진짜 현실을 주사기로 약물 주입하듯이 주입하니까 야곱은 자기가 생각한 인생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현실을 살아가게 되지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야곱을 이해 못하게 됩니다.
나중에 야곱이 손자에게 손을 어긋맞겨 머리에 안수하니까 요셉이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창48:18).” 라고 했어요.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이해 못했습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현실이 진짜 현실이다. 그래서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현실은 대비되고 서로 공격하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너는 몰라.’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그런 악한 힘에 의해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것이 현실이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현재 우리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은 오히려 반대되는 현실이고 진짜 현실을 공격하는 그런 속성을 가진 현실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지요. 그게 성소입니다.
성소 주변에 제사장을 위한 땅이 있습니다. 이게 1만 척입니다. 그 위에 레위인의 땅이 있습니다. 이것도 1만 척. 그 다음에 왕의 땅이 있고, 요단강과 지중해가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에스겔 49장에 보면 나중에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하나님이 이야기한 성전이 성령에 의해서 지어져서 완공될 때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모양새라는 것입니다.
이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늘나라와는 좀 다르지요? 계시록에서는 지중해도 없고, 요단강도 없고, 왕의 땅도 따로 없고, 레위 지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에스겔에서는 왜 이런 것을 거론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모양이라고 했을까요?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최종적인 천국의 지도를 땅에 그려놓고 그려진 도판을 떠내서 그것을 그대로 하늘에 올라가서 붙이고, 그 외에 남은 땅은 성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 유일한 완성된 성소가 하늘로 올라가버리면 이 지상에는 없는 거예요. 성소가 없으면 그곳은 지옥이고 불바다가 됩니다.
그러면 잔디를 떠내듯이 성소를 떠내서 하늘나라로 올라가면 하늘나라의 어느 지점에 박힙니까? 그런데 하늘나라에는 이것이 없어요. 하늘나라에 이것이 박히는 것이 아니고 땅의 세계가 하늘나라로 올라가면서 하늘나라가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사람이 있는 이곳을 땅이라 하고, 사람들이 닿을 수 없는 위쪽을 하늘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인식은 ‘인간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45장에서 땅에다 하나님의 지도를 그렸지요. 성소가 있고, 1만 척의 제사장 땅, 또 레위인의 땅, 왕의 땅, 그리고 백성들 땅. 이런 지도를 그렸잖아요. 그러면 ‘이 지도를 떠내서 하늘로 올라갈 때 하늘나라 어디에 이것이 있겠는가?’ 라고 질문을 했지요? 그런데 인간이 생각했던 이런 하늘나라는 없어요.
처음부터 인간이 생각했던 하늘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거예요. 죽으면 영이 되고, 혼이 되어서 하늘로 간다고 조작한 거예요. 이런 하늘나라는 없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땅과 대비(반대)되는 것입니다. 반대 개념에서 음이 있고 양이 있어야 양쪽 다 설명이 되듯이 땅에 인간이 있으면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땅과 하늘이 합쳐야 구조적으로 꽉 찬 느낌이 든다고 하는데, 이것은 땅에서 조작한 것입니다.
제가 ‘하늘나라가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하늘나라가 없다는 것이고, 진짜 하늘나라는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숨어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숨어 있는 하늘나라가 내려온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 자체를 숨어있는 나라가 배척해 버립니다. 연극할 때는 넓은 저택도 있고 강물이 흐리기도 하지만 나중에 보면 천에 그림을 그려놓기도 하고, 또 합판으로 집을 만들어 놓기도 했지요. 연극에서는 칼싸움 하고 전쟁을 했지만 연극이 끝나면 배경으로 그린 천을 거둬버리면 좀 전에 있었던 모든 배경이 사라져 버리지요.
그동안 인간들이 하늘나라를 상상했던 것을 예수님이 둘둘 감아서 없애버려요. 그러면 그 자체가 허공이고 허무한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 하늘나라 이 모든 것은 없는 거예요. 지옥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 천국은 어디서 생기느냐? 심판 사건이 일어날 때 새롭게 돌출되는 거예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나쁜 짓하면 심판 받고, 착한 일하면 천국 간다.’라고 여기는데 이것은 연극 무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돌돌 말아서 태워버려야 해요. 인간이 생각하는 심판은 심판이 아니고 진짜 심판주가 오셔서 심판을 행할 때 비로소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이 분류가 돼요. 중요한 것은 사건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존재할 정당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내가 존재하는 것은 존재할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다.’고 여기는데, 그런 정당성은 없어요.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존재, 인간을 지은 것은 심판행위가 포함된 창조다.’ 인간은 심판을 빼버리고 그냥 창조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유(有)로 시작해서 유(有)로 계속 갑니다. 내가 없어져야 하고, 내가 심판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인간이 죽으면 없다고 하는 것은, 유(有)에서 나온 것입니다. 현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無)를 생각하는 거예요. 무는 이미 있다는 것을 전재로 한 개념입니다. 있는 것이 사라질 때 그것을 무라고 지칭하자고 해서, 유를 유답게 의미를 주기 위해서 무를 등장시킨 거예요.
그렇게 되면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지 심판이 아닙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토기장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사람들이 불쾌하게 생각했겠어요? 토기장이가 나를 만들었다면 결국 우리는 토기에 불과하지요. 사람들은 자신이 토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창의성을 발휘하기 때문에.
나는 토기장이 노릇을 하고 싶지 토기는 싫어요. 내가 나를 만들고 싶지 누가 나를 일방적으로 만들었다면 내 권한은 한계가 생기게 됩니다. 그 한계가 싫은 거예요. 나는 만들었다는 것을 빌미로 계속 나에게 간섭하는 것도 싫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도 싫어요.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로 자식에 대해 계속 간섭하게 되면 자식은 못 견딥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빨리 성장해서 부모로부터 독립하기를 학수고대하지요. 이게 바로 인간이 둘둘 말려야 할 천의 무늬인 것입니다. 인생은 허공에 쓴 낙서입니다. 열심히 뭔가를 썼는데 나중에 보니까 헛된 서판에 쓴 거예요.
그러면 천국과 지옥은 어디에 있는가? 그림을 다시 봅시다. 이 그림대로 에스겔에 나옵니다. 언약이 쓰여지면 하늘나라로 갈 때 이것을 그대로 만드신 분이 계십니다. 이 허무한 세계에 오셔서 사역하시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이 전부가 언약을 완성하시는 일입니다. 언약 완성은 에스겔을 완성하신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에스겔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이것을 완성하시고 올라가시면 비로소 생기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는 아무도 몰라요. 예수님만 아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 대답이 “너는 올 수 없는 곳이야.” 이 말은, 현재는 없는 곳,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만들어야 올 수 있는 곳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만들어놓고 집어넣는 거예요. 만들어놓고 집어넣는데 베드로가 이 나라를 어떻게 알고 따라간단 말입니까? 지난 수련회 강의에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y=x. 이것을 그대로 확장시켜서 미래에도 이대로 간다고 짐작을 해요. 이 원리를 ‘동일화’라고 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자아입니다. 그런데 y=x로 가다가 변곡점이 발생하지요. 즉 y=-x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때 동일화가 깨지면서 자아가 깨어집니다.
자아가 깨어진다고 하는 자체는 이미 이것이 응고된(딱딱하게 굳어진) 거예요. 자신은 자기 인생을 살았지만 주님이 변곡점을 발생시키면 이것은 순간적인 사건이 되는 겁니다. 자기 인생을 70년 혹은 80년 살았기에 굉장히 오래 산 것 같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한 순간에 휙 지나간 사건에 지나지 않아요.
호수에 독수리가 날아와서 물고기를 낚아 챌 때 우리는 이것을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호수에서 어떤 아줌마가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고 이 사건 때문에 앞의 독수리 사건은 잊어버리게 되지요. 오늘 뉴스에 온갖 사건이 있어도 며칠 후면 다른 사건 때문에 오늘 사건은 잊어버립니다.
전두환 추징금 때문에 계속 떠드는데, 큰 사건이 발생하면 전두환 이야기는 묻혀버려요. 내가 80여년 살다가 죽는 사건이 나에게는 최고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은 후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갑자기 죽게 된다면 내가 죽은 것은 아무도 기억 못해요. 인간은 복잡하게 고민하면서 오래 살아도 나중에 치매가 오면 그 모든 삶은 한 경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점’이란 시간의 테두리에 찍힌 한 순간 혹은 찰나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33년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인생이 33년입니까, 한 경점입니까? 한 경점, 다시 말하면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 앞에서 우리 인생은 얼음이 됩니다. 별 것 아닌 경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주님을 어떻게 섬길까?’ 하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 내가 섬기려면 나는 경점이 되면 안 되고 길게 늘어나야 됩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아침에는 주님을 섬겨도 오후에는 주님을 미워했다면 어느 지점을 나의 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자아는 y=x의 그래프입니다. 이것이 응고되면 이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제가 [게그 콘서트]를 보면서 뇌리에 박힌 것이 있어요. “잠시만요. 보라 언니, 바람 새고 가세요.”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데, 그 모든 흐름을 ‘잠시만요.’하는 그것에 굳어져 버려요. 내가 인생을 얼마나 어떻게 살았던지 “잠시만요. 십자가 한 번 보고 갈게요.”하는 그 순간,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합류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에스겔에 나오는 성전이 우리 생각에는 ‘언제 성전에 찾아가고, 언제 제사장 만나서 인사하고, 언제 제사 드리고 하지?’ 이런 모든 것이 고민 되겠지요? 그런데 주님은 “잠시만요. 십자가 한 번 보고 가세요.” 할 때 이 모든 것은 끝납니다.
십자가 안에 이 모든 것이 사건화 되어버립니다. 성령 받아서 십자가를 알게 되면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들이 십자가 안에 이미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죄인이고, 죄인에 대해서 에스겔을 완성하신 주님께서 이 말씀대로 우리를 성소화 시켜버리면 끝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에스겔 44장 9절에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했지요. 제가 묻습니다. 신약 시대의 이방인은 누구입니까? 성소가 사건화 되면 십자가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방인은 누구입니까? 십자가 복음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죠. 이들이 성소에,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에스겔의 해석을 아주 깔끔하게 해결했지요?
10절 봅시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주를 떠났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은 ‘그 죄악을 담당’해야 하는데 누구 그 일을 합니까? 다른 레위 지파가 합니까, 우리가 합니까, 누구 해요? 나는 죄를 담당할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외삽, 항상 나를 동일화시키고 자아가 나중에 잘 되기를 바라는 것 밖에 없어요.
나는 나의 존재의 정당성을 내포하고 있어요. 이것은 너무나 일방적인 생각이에요.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살 가치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의 창조 안에는 창조를 없앨 수 있는 심판 기능이 있어요. 예수님은 심판주로 오셨거든요. 이미 심판 기능이 있는데 우리는 이 심판을 빼버립니다. “감히 누가 날 심판해?”
우리는 y=x로 항상 미래에 대해서는 내가 잘 되는 쪽으로 생각해요. [러브레터] 영화를 예로 들면서 설명했지요. “오깽끼데스까?” 산을 향하여 ‘거기 잘 계십니까?’라고 한 것은, 등산 가서 죽어버린 옛날 남자 친구가 그리워서 옛 친구 집 주소로 편지를 보내니까 답장이 왔잖아요. 여자가 왜 편지를 보냅니까? 남자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남자를 사랑했던 자기의 행복했던 순간 때문에 편지를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현실이란 자기 확대입니다. 자기 의미의 확대를 사람들은 현실이라고 합니다. 평생 나는 주님께 욕만 보이다가 나중에는 금방지게도 주님 품에 안깁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담당자가 필요한데, 죄 담당자가 누굽니까? 이 에스겔 말씀처럼 담당하신 그분이 장차 에스겔을 완성하시면서 오게 하셔서 죄 있는 우리가 하나님과 통하는 성전, 성소, 벧엘이 되게 하시는 그 원대한 시나리오가 에스겔에 이렇게 나와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3. 9. 9. 09:21 녹취 마침)
서경수(IP:218.♡.161.7)
13-09-18 18:31
광주 강의(2013. 8. 23) 45-2
제가 첫째시간에 인생을 하나의 사건으로 응축시켰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긴 인생을 한 점의 사건으로 만든 이유가 인생을 다루는 언약이 사건으로 찾아와서 모든 성경을 완성시키기 때문에 사적인 자기 인생으로 성경 말씀에 다가서면 이것은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제 나이가 45세 인데 방금 에스겔 말씀을 봤는데 이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에스겔 말씀을 자기가 45년 살았던 그 인생에 포함시키게 되는데 이것은 사건이 아니라 그냥 긴 자신의 인생이 될 뿐입니다.
“오늘은 디모데전서를 보았습니다. 그 말씀대로 지키겠습니다.” 한다면 자아의 동일성이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언약이 사건화 되기 때문에 거기에 마중 나오는 인간도 사건화 시켜서 응축을 시킵니다. 그렇게 해야 말씀이 제대로 적용이 돼요.
다시 정리를 하면, ‘내 인생을 이만큼 살았다.’고 하지만 “잠시만요. 성경 보고 갈게요.”하는 그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던 그 모두는 죄가 되고, 언약은 그 죄를 담당해 주는 겁니다.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죄의 사건 안에 우리 인생을 집어넣어야 돼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제대로 보는 안목입니다. 자기 인생을 언약 사건 속에 집어넣고 보는 이것이 성경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본다면 이렇게 할 수 있지요. 그림을 다시 봅시다. 여기에 성소가 있습니다. 성소를 우리에게 지키라고 한다면 지킬 수가 없지요. 여기 제사장 땅으로 포위되어 있고, 그 위에 레위 지파가 있고, 이쪽에 왕이 있고. 이 자체가 에스겔에서 이야기한 언약의 완성입니다.
왕이 있고, 레위 지파의 제사장 있고, 성소 있고. 제사장 자체가 레위 지파이기 때문에 이것은 모세 언약이라 할 수 있고, 왕은 다윗 언약이고, 성소는 하나님과 유일하게 소통하는 지점이고. 다윗 언약과 모세 언약과 성소가 결합된 상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구성한 천국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생을 사건화 시켜야 한다고 했어요. 사건화 시키면 사건은 점이기 때문에 여기에 개입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긴 인생이 아니고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면 내가 내 인생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펼쳐주실 거예요.
예수님 오시는 것도 하나의 사건입니다. 출생, 성장, 죽음, 부활 이 모두가 십자가 사건으로 봅니다. 그러면 이 사건에서 에스겔 전체 내용이 어디로 집약되겠어요? 십자가 사건으로 집약되면서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이것이 에스겔 내용대로 펼쳐지겠지요. 그러면 우리가 관여할 것은 없으니까 빠지고, 여기서 레위지파와 왕이 결합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것이 그대로 펼쳐지는 이 내용만 두 번째 시간에 설명하면 에스겔이 다 설명이 됩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인생은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한 이유를 이해했을 줄 믿습니다. 우리를 여기에 관여시키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죄인일 뿐입니다. 그림으로 보면 우리는 성읍에 있지 성소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제 주장에 시비를 걸 사람이 있습니다. “레위 지파가 있고, 제사장도 있고, 왕이 있는 것은 사실 아닌가? 이 사람들만은 개입이 되어야지 이 사람들마저 다 빼버리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완성이 되는가?”라고 주장할 수 있지요.
그 점은 이렇게 설명이 됩니다. ‘왕은 신을 가리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왕이 나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가려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처음에는 왕이 없었지요. 이스라엘이 국가적 단위로 등장하는 것을 출애굽 때입니다.
이번 겨울수련회 때는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를 주제로 강의할 계획입니다. 야곱의 12아들 중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것이 야곱에서 나온 꿈이 요셉을 꿈대로 이끌어서 국무총리가 된 거예요. 따라서 애굽의 나라 상황은 그냥 들러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만큼 언약이 중요한 거예요.
언약 자체가 사건이라면 요셉에게 일어난 사건들은 언약 사건에서 파생된 사건입니다. 에스겔의 성전을 보면, 레위인의 땅이 있고, 제사장의 땅, 왕의 땅이 있지요. 이것은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들입니다. 물론 여기에 동원되는 제사장이나 왕도 사건이지만.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물어야 합니까? 왕이 있기 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이들을 이끈 것은 누구입니까? 모세입니까, 모세의 지팡이입니까? 지팡이죠.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했지요. 그 때 지팡이가 뱀이 되었지요.
그러면 모세는 지팡이가 일으킬 사건에 예속된 인생이 됩니다. 즉 모세가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고 지팡이가 주도권을 쥐는 거예요. 아말렉 전쟁에서도 지팡이를 올리니까 이기고, 내리니까 지고. 홍해를 가를 때도 지팡이를 물에 대니까 바다가 갈라졌고, 반석에서도 지팡이로 치니까 물이 나왔고. 이처럼 모세는 지팡이에 종속된 것입니다.
지팡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뭔가? 뱀과의 전쟁, 창세기 3장 15절의 하나님의 약속이 지팡이를 통해서 실행해 나가십니다.
왕이 오기 전에는 왕이 없었지요. 달리 표현하면 ‘왕이 없어도 되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왕이 없을 때 누가 인도했는가? 제사장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 나라’ 왕의 역할을 하는 제사장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한 거예요. 그러면 왕은 필요가 없어요.
초반에는 왕 없고 제사장만 있었는데 중간에 왕이 생겼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사장이 있고, 나중에 왕이 등장했고, 십자가 사건이 터지면 왕은 없어지고 제사장으로 가야 됩니다. 이런 순서를 거쳐야 됩니다. 지상에서 이런 순서를 거치는데 실제로 어떻게 거치는가?
제사장이 있을 때 사실은 왕이 있었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왕입니다. 사무엘상 8장에 보면 백성들이 왕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왕을 구하는 것은 나의 왕 됨을 거부하는 몸짓이다.” 이렇게 봤습니다. 여하간 백성들의 요청대로 하나님이 왕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면 왕이 몇 명입니까? 하늘에 하나님이 왕으로 있고, 지상에 또 왕이 있어요.
제사장이 있는데 왕이 또 생겼다는 것은 제사장이 제사장 역할을 못했다는 불신의 모습으로 왕을 준 거예요. 제사장에 제대로 못한 죄가 더욱 더 커지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왕을 준 것입니다. 이전에는 제사장이 범죄했는데 이제는 왕이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왕을 주셨는데 첫 번째 왕 사울이 제거되지요. 그러면서 진짜 왕(다윗)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왕입니까, 아닙니까? 왕이지요. 왕에 있는 왕을 왕1로 하고, 사울을 왕2로 합시다. 먼저 세워진 왕(사울)이 1이 되어야지 왜 2가 되는가? 진짜 하나님이 택하신 왕은 다윗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다윗 언약’이라고 하지요.
다윗 언약이 2(사울)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보세요. 다윗 왕은 자기를 부인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죠. 그런데 사울 왕은 보이지 않는 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계속 공격하지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계속 쫓아다니잖아요. 이 때 하나님이 나서서 다윗 왕을 보호하십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왕이 하나님을 공격한다는 것은 기존의 제사장들 역시 하나님을 공격한다고 볼 수 있고, 제사장이 이렇다는 것은 백성들이 이런 것을 방치했기 때문이고, 결국은 백성들도 하나님을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온 나라가 다윗을 공격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왕 되심을 믿는다는 것은 다윗처럼 고난과 시련을 당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세상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어쨌든 사울 왕은 다윗을 공격했고, 하나님은 사울 왕을 죽이고 다윗을 왕으로 세웁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탐냈고 나단 선지자는 그런 다윗 왕을 죄인이라고 지적했지요.
그러면 지상 왕의 진면목은 뭔가 하면, 모든 인간들이 다 죄인인 것을 대표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상에 왕을 준 거예요. 진짜 지상에 왕 같은 사람은 누구냐?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 역할을 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악한 자가 지배하는 허무한 세상인데, 이 허무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은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의 가문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겠다.”
그렇다면 다윗에게서 나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솔로몬이죠. 솔로몬과 더불어 죽은 우리야가 나와요. 솔로몬은 산 사람이고, 우리야는 죽은 사람이죠. 다윗이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어야 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꺾어진 뼈로 죽어야했던 사람은 우리야죠. 그러면 장차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실 때는 어느 계통으로 오십니까?
다윗을 통해서 두 갈래 길이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야 쪽으로 가십니다. 그러면 자칭 살아있다고 여기는 솔로몬 쪽은 어떻게 돼요? 다윗이 품고 있는 죄의 모습을 보여주는 쪽으로 갈 것이고, 그런 죄인도 용서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쪽은 죽은 자의 계통으로 가겠지요. 그런데 죽은 자이기에 족보가 없고, 족보는 산 사람(솔로몬) 위주로 갑니다.
마태복음 1장 6절에 보면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고 했고, 그 뒤에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다윗은 ‘남의 아내와 관계해서 솔로몬을 낳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품고 있던 죄지요. 그 죄가 어디로 가는가 하면, 11절에 “바벨론으로 이거”하지요.
그러니까 여기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요람,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요시야 이 모든 왕들은 이 세상이 바벨론, 즉 죄악의 도성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쪽으로 이스라엘을 끌고 갑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가면서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제가 강의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 왕을 세운 것은 진짜 왕을 가리기 위함이라고. 백성들 입장에서 솔로몬 왕이 등장하면 솔로몬 왕을 의지하겠지요. 그리고 르호보암 왕이 등장하면 르호보암을 의지하고, 아비야 왕이 등장하면 아비야를 의지하겠지요. 이렇게 인간 왕을 의지하는 것은 어디에서 배태된 것입니까? 처음부터 그들은 바벨론이었다는 겁니다. 짐승의 나라였어요.
짐승의 나라들이 왕을 통해서 자기 자아를 확대시키는 방법으로 신에게 접선을 시도하는 거예요. 이걸 이스라엘을 통해서 제대로 보여주셨는데, 이런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아니면 우리의 본색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을 빙자해서 이 바벨론같은 세상에서 자기 몸 하나 성공해 보겠다고 설칩니다.
그래서 나보다 더 힘이 강한 자를 만나면 그 힘에 굴복합니다. 왜냐? 계속 살아남기 위함입니다. 이 계통이 바로 산 자의 계통입니다. 우리야의 계통은 마태복음 1장 16절에 나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살려고 오신 분입니까, 죽으려고 오신 분입니까? 죽으려고 오신 분입니다.
지금까지의 강의를 요약하면 ‘죽음이 실체’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본 모습이에요. 그렇게 보고 싶은 내 모습, 증명사진을 찍고 포토샵을 해서 예쁘게 꾸며도 그것은 내 모습이 아닙니다. 평생을 살아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정확한 내 모습이 나와요. 죽은 자가 내 모습입니다.
살아있으니까 내 모습을 그리워하는데, 죽으면 ‘내 모습이 어떤가?’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죽은 자는 소유의 권리가 없어요. 이 세상이 노름판이 된 이유가, 각자의 소유가 있기 때문에 상대의 소유를 내 소유로 만들기 위해 게임을 하는 거예요.
[황금의 제국]이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토스토예프 스키의 “까라마죠프의 형제들”을 각색해서 나오는데, 그 작품의 내용은, 아버지가 개판이니까 자식도 개판인데, 그 개판인 자식 중 괜찮은 아이가 하나 있어요. 그게 이상한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이 그 작품의 주제입니다. 머리가 비상하죠?
뭐가 비상하냐 하면, 사람들이 훌륭한 자식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자체가 현실을 모르는 사고방식이란 거지요. 토스토예프 시키의 안목으로 보면. 이 사람은 모든 것을 역으로 가요. ‘사람은 왜 그렇게 악하지?’라는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 사람은 왜 이렇게 착하지?’ 이것이 정확한 질문이라는 거예요.
나쁜 부모 밑에서 나쁜 자식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테 착한 아이가 나온다는 것은 진짜 축복이라는 겁니다. 토스토예프 스키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해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불행한 일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를 축복으로 본다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 때 그것이 진정한 축복이지 세상적인 성공은 축복이 아니라는 주장을 합니다.
[황금의 제국]이란 드라마에서 기업을 나눠 가질 때 어떻게 하면 내 지분을 더 많이 가질 것인가의 게임을 하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각자 살 권리가 있고, 소유할 권리도 있고, 더 많은 소유를 확보하기 위해 게임을 하는데 그 게임판 자체가 사실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세상은 죽은 자의 중심이고 산 자는 허구입니다. 진짜 이 세상의 핵은 죽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를 우리야가 주관한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야는 그 때 그 시대에 주관했지요. 왜냐하면, 우리야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 미리 앞당겨 보여진 사람입니다. 이것을 지난 수련회에서 실패와 실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이 실이 노아고 아브라함이고 모세고 그렇단 말이지요. 이 실을 다시 감아서 회수하면 실패로 모입니다.
마태복음 족보는, 이미 바벨론에서 자칭 겨우 살아남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실은 죽음과 저주와 심판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모여든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바벨론에서 나오는 그 다음 족보는 뭐냐 하면, 죽음의 족보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자체에서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죽어야 나오는, 그야말로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바벨론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겁니다.
산 자는 바벨론에서 빠져 나올 수 없어요. 출(出) 바벨론이 안 돼요. 왜냐하면, 아까 솔로몬을 산 자라고 했지요?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든 것은 바벨론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로 오는데 제 옆에 앉은 30세쯤 되는 여자의 전화 벨 소리가 굉장히 시끄러웠어요. 전화 벨에서 나오는 음악이 “살아있네, 살아있어--” 이런 가사의 노래였어요. 얼마나 크게 해 놓았는지 짜증이 났어요.
살아있는 인간들은 모여서 판돈 걸고 도박을 합니다. 인생 자체가 도박이에요. 이 세상 자체가 도박판이기 때문에 생산은 없어요. 상대의 것을 빼앗아야 내 소유가 증가해요. 산 자들의 게임은 자신이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라고 믿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나 스데반 집사는 못 죽어서 환장한 사람 같아요. 돌이 날아올 때 히죽 웃었는지 모르겠어요. 사도 바울은 죽는 것이 소원이었고. 사실 이들은 죽은 채로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죽음을 아는 사람이죠.
이것이 첫째 시간에 말씀드린 ‘감추어진 현실’입니다. 야곱에게 알려준 감추어진 현실. 이 때부터 야곱은 자신을 위해 살 수가 없었어요. 이스라엘을 위해서 야곱은 양보해야 될 그런 인생을 살아갑니다. 야곱은 사라지고 속에서 이스라엘이 튀어나오고. 이름은 이스라엘이고 자기 몸은 야곱이고. 그러니까 죽었다는 겁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순간이 언제인가 하면, 창세기 37장 34절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언약을 받게 된 야곱은 무슨 경험을 경과하게 됩니까? 사랑하는 자식이 죽는 경우를 만나야 돼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는 경험을 했듯이.
아브라함도 이삭도 그런 경험을 했고, 야곱도 자식이 죽는 경험을 했고, 오늘날 모든 성도들도 내 대신 예수님이 죽는 십자가를 경험을 함으로써 비로소 그 사람은 죽어있기 때문에 영원히 산 자, 영생을 얻는 자가 됩니다. “잠시만요. 십자가 한 번 보고 갈게요.” 늘 십자가를 보고 가세요.
십자가를 보고 가면 우리는 이미 살았음을 압니다. 왜? 바벨론에서는 이미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가 되어야 비로소 산 자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1장에서 바벨론에서 구원 받을 사람은 산 자로는 탈출할 수 없고 바벨론에서 죽은 자가 되어야 죽은 자가 되었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바벨론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왜,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기 위해서 바벨론이 있기 때문에. 혹시 바벨론에서 성공한 사람 있습니까? 성도는 바벨론에서 성공할 수 없어요. 바벨론에서 성공하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성공한 자신에게 미련과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가 이 바벨론에서 성공했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조치하십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는데, 예수 이름의 뜻이 뭡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여기에서 ‘저희 죄’라고 해놓고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보면 그것이 바벨론으로 되어 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여기 마태복음 1장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바벨론화 된, 소위 산 사람끼리의 권력 투쟁의 장이 된 헤롯이 왕이 된 짐승의 나라, 바벨론의 대행체에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어떤 식으로 구원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에서 어떻게 구원 되는 겁니까? 이것은 상당히 난해한 문제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죄는 지었는데, 그 죄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구원이 되는 것입니까? 이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이미 죄에 묻혀 버렸습니다. 큰 눈이 내려 눈 속에 묻혔습니다. 그 눈에서 어떻게 나오지요? 갇힌 사람에게는 방법이 없어요.
우리는 이 세상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외에는 다른 곳이 없습니다. 성공을 하든지 실패를 하든지 이 세상에서 버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죄가 문제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급선무기에 죄 문제는 나중 문제입니다. 죄 문제를 나중 문제로 취급하는 우리를 어떻게 죄에서 건져낼 수 있느냔 말이지요. 우리는 죄에 대해 관심도 없는데 무슨 수로 건져 냅니까?
왕이 있고, 제사장이 있죠. 왕의 땅이 있고, 중간에 성소가 있고, 제사장의 땅이 있습니다. 지금 왕이 있다는 것은 제사장들이 뭔가 부실하거든요. 그렇다면 지금 인간적인 아이디어를 내 봅시다. 제사장이 잘못 되었을 때, 제사장에게 “야, 똑바로 해!”라고 충고하고, 제사장들은 모여서 “야, 우리 정신 차리자.” 이렇게 하면 됩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 해결될 것 같으면 왕이 오지도 않았어요. 이미 왕이 왔다는 말은 제사장이 자체적으로 죄를 회복할 수 있는 역량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장이 있을 때 점선으로 하늘에 왕이 있다고 했지요. 이건 아주 쉬워요. 하나님이 왕이니까, 왕께서 제사장 언약을 주셨기에 책임을 져도 왕이 책임지는 방향으로 나가면 되는 거예요.
처음부터 왕은 있었잖아요. 그래서 왕이 등장하셔서 제사장에게 똑바로 하라고 지시하면 이 제사장이 회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옆에 붙어있는 이 왕은, 여기에서 에스겔 44장을 봅시다. 1-2절에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 동향한 바깥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히었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3절에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못 들어옵니다. 왜냐? 여호와가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리로 들어옵니다. 왕이 들어와서 음식을 먹지요. 그러면 해결 되었지요? 그러면 제사장이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한 해결책은 왕이 나서면 되는데, 그동안 나선 왕은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왕은 자기가 산 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이 똑바로 제사장을 관리하면 옛날 다윗 왕의 시절처럼 된다고 나선 왕들이 솔로몬, 르호보암이었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실패 정도가 아니고 모조리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몰아넣은 거예요.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데 왕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상 섬기지 마세요.”라고 하면, 백성들은 “우상을 같이 섬기지 않으면 당신을 왕으로 인정 안 할거야.” 이렇게 나오면, 왕은 “알았소. 나도 같이 섬길거요.” 이런 식입니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자기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건너편 산에 우상 산당을 지었어요. 솔로몬이 왜 그런 짓을 했어요? 그는 1,000명의 처첩이 있었어요. 이 여자들이 전부 자기 종교를 들고 왔어요. 그들을 위해 궁궐을 지어주었어요. 솔로몬의 전도서에 보면 ‘아내가 천 명이 되어도 다 헛되다.’는 고백을 해요. 말년에.
인간 왕은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안 되고, 여호와 본인이 직접 왕이 되는 수밖에 없어요. 에스겔 44장에서 제사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있다는 자체가 왕이 잘못된 것인데, 잘못된 왕을, 주께서 다윗을 줌으로 말미암아 제사장이 제 위치를 찾을 수 있도록 조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이 다윗 왕 자체가 죄인 중의 괴수라.
죄인에게서 나온 왕들은 역시 죄인입니다. 그러면 이 다윗을 살리고 솔로몬을 살릴 수 있는 것은 다윗 때문에 죽은 사람이 있어요. 누구입니까? 우리야지요. 이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이 태어나면서, 죽은 자에 의해서 살았다고 우기는 자를 살리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이 왕이 오는데, 에스겔에 보면 여호와가 다윗의 백성들 통해서 왕으로 온다고 되어 있어요. 에스겔 37장 24절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고 했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고 그들은 백성이 된다고 했지요.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되시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가 다 풀리지요? 왕이 와서 제사장을 똑바로 하도록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제사장이 없어요.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이 있었잖아요? 그 사람들은 자칭 자신을 산 자로 여긴 겁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을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이 사람들을 죽은 자로 만들어야 겠지요.
이 사람을 죽은 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먼저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냥 자살해서는 안 되고 소위 살았다고 여기는 사람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식으로 죽은 자가 되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살았다고 하는 자들이 주님 보시기에는 죽은 자요, 정작 산 자는 이 땅에 와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분이 산 자라는 인식을 가지면 그 다음에 모든 제사장들은 제사장이 아니고 죽인 죄인에 속하는 겁니다.
따라서 에스겔 44장, 45장에 나오는 천국 꾸미기에 그들은 전혀 들어갈 자격이나 권리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에스겔 45장의 그림은 어떻게 성취할 겁니까? 베드로전서에 보면 재미있는 것이 나옵니다. 2장 7절에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천국 가려면 누가 누구를 버려야 돼요? 산 자에 의해서 버림을 받아야 되겠지요.
우리 자신이 구원 받으려면 누가 버려야 돼요? 내가 나를 버려야지요. 그것이 자기 부인이잖아요. 내가 나를 매일같이 버려야 되지요.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죄인아, 죄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죄인이지?” “주인님이 제일 죄인입니다.” 이것을 매일 확인해야 돼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죽을 인간이니?” “주인님이 죽을 인간입니다.” “그렇지?” ‘잠시만요. 십자가 보고 갈게요.’ 매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죄인인 것을 알아야 돼요.
죄인인 근거가 뭐냐 하면, 우리는 내가 살아있고, 살아있다는 것은 나에게 소유와 권리가 있고. 이것 가지고 어디에 써먹으려고 합니까? 세상이라는 노름판에서 나의 판돈을 걸고 게임을 해서 [황금의 제국]을 이루려고 분투 노력하는 나입니다. 그러나 저녁에 집에 와서는 다시 거울 앞에 섭시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죽을 놈이니?” “주인님이 죽을 놈입니다.”
제가 거울 앞에서 물어보라고 했는데, 주기도문을 암송해 보세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벌써 거지 아닙니까. 소유 없지요, 매일 얻어먹지요. 그 다음에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란 뜻이지요.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나 ‘나는 죄입니다.’라는 거예요. 그 죄를 알 때 우리는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본래의 피조물 모습으로 살아 갈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왕이 우리를 성소에 붙여주는, 우리가 바로 레위인이고, 죽은 제사장을 대신하는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백성입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모든 언약과 예언을 바로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실현시킨 거예요. 우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주께서 실현시키십니다. 사람들은 자꾸 이 세상에서 은혜 받으려고 하는데 이 세상은 우리가 은혜 받는 영역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 받는 곳인데 우리는 만날 교회 와서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라고 해요. 주님께서 얼마나 짜증나겠어요?
이 세상은 주님이 은혜 받으려고 만든 세상인데 내가 거기에 끼어들려고 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가 아니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그 방식은 에스겔 45장에 나오는 이 그림, 이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이것을 접어버리면 나중에 점이 되지요. 점은 사건이 되지요. 이 사건은 십자가죠. 십자가의 주름진 것을 펼치면 에스겔 44장이 되는 겁니다. 에스겔은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미리 이렇게 예언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순간만 보지 말고 전부를 다 알기를 원합니다. 다 아시는 주님께서 알아서 십자가 지셨사오니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이미 생명을 얻은 자로써 꿀리지 말고 누구한테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구경하듯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는 마음으로 편하게 세상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9. 18. 15:24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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