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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전130725b-마13장41절(미래에서 오신 주님)42강-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태복음

대전130725b-마13장41절(미래에서 오신 주님)42강-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대전130725b-마13장41절(미래에서 오신 주님)42강-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은 마태복음 3장 41절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마태복음 13장 비유는 많이 난해하기 때문에 어차피 난해하게 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에 대해서 인간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간에 대해서 미래에서 시간을 채웠다. 미래의 것이 시간을 채우는 거예요. 미래의 것이 계속 날아오는 거죠. 미래의 것이 날아온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 인간적으로 봐서는 미래의 인자가, 예수님께서 천사들을 보낸다고 돼 있지만, 주님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이미 천사를 보내시는 주님이 이미 현재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강조되죠.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나중에 뭐 할 거냐. 가 강조되는데 ‘예수님이 나중에 하실 그분이 이미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비유로 이야기하잖아.’ 가 강조되는 겁니다. 어떤 기적과 어떤 일을 고대하는 것과 그 일을 행사하시는 분이 지금 함께 있을 때 어느 것이 기쁘고 어느 것이 안심이 되고 어느 것이 편하게 되는 겁니까? 이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뭐냐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갖겠다고 할 때는 주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갖다 줄 때 좋은 거예요.

예를 들면 여기 빵이 있는데 내가 빵이 먹고 싶을 때 어떤 사람이 ‘야, 내가 30분 후에 내가 빵 줄게.’ 할 때는 ‘고맙습니다.’ 하잖아요. 그런데 뭐가 고맙습니다. 할 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아직 고맙기는 일러. 30분 후에 줄 때 고맙다고 해. 알겠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건 인간적인 생각이고.

주님께서는 빵? ‘내가 줄게.’라고 했을 때 우리로 하여금 뭘 노출시키기를 원하느냐 하면 ‘역시 주님보다 빵이 더 좋아.’라는 생각을 니 갖고 있었지?‘ 요걸 폭로시키는 주님이란 말이죠. ’너는 빵을 맛있게 먹는 너 자신이 너한테 중요하지, 이 예수에 대해서는 너보다 덜 중요하지? 그렇지?‘라고 묻는 것이 이 비유의 뜻입니다. ’니는 그냥 맨날 니 먹는 것만 생각하지? 먹는 것만!‘ 이런 뜻이다 말이죠. ’나는 뒷전이고 맨날 먹는 거 주니까 나 좋다, 좋다 하지, 내가 먹을 거 안 주면 나 싫어할 거지?‘ ’녜‘

그 말을 왜 이 비유로 푸느냐 하면 인자가 천사를 보내줄 때 사람들은 전부 다 백이면 백, 오해를 합니다. ‘야, 천사가 온대. 나는 천사와 함께 나풀나풀 선녀 옷을 입고 하늘나라 갈 것이고, 저 나쁜 인간들은 지옥 보낸다.’ 이렇게 할 때 그 순간은 자동적으로 본인은 마땅히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전제하고 기분 좋아하잖아요. 그 생각이 잘못된 생각인 거예요.

주께서 오셔야 지옥 갈사람, 천국 갈 사람이 구분된다는 생각을 안 하고 ‘마땅히 나는 천국 갈사람 마땅하고 나를 천국 보내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차후에 오시는 것이 제대로 일이 잘 돌아가는 겁니다. 이게 옳은 겁니다.‘ 라고 우리가 우격다짐처럼 우리가 일방적으로 그걸 우리가 주장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주장의 판을 뒤집어엎겠다는 것이 주님의 비유의 취지입니다. 진짜 어렵죠? 누구 맘대로? 그게 비유의 핵심은 집사님 이야기한 대로 ’누구 맘대로, 흥!‘ 요게 비유의 핵심 이예요.

‘내가 이런 말 하면 너 기분 좋지? 기분 좋든지 안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 사랑한다는 예수를 너희들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기분 좋을 때는 언제고 배반할 때는 또 언제입니까? 그만큼 그동안 내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제자들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 몸을 갖고 있었어요. 그게 아담에 속한 몸입니다. 이걸 사도바울은 아주 응축을 해버려요.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죄를 범했으며 아담 한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모든 사람에게 죄가 이른 것처럼” 로마서 5장에서 그걸 함축적으로 이야기한 건데 그걸 실타래 풀리듯이 솔솔 풀리게 되면 마태복음 13장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복음서와 사도바울의 편지들은 이렇게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게 결합이 딱 되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비유의 말씀을 할 때 이젠 내 입장을 일단 접어버립시다. 그걸 괄호를 치자. ‘나’라는 것을 괄호를 치는 거예요. (나)를 이렇게 괄호를 쳐보면, ( ) 없는 게 되죠. ( )를 철학에서는 판단중지, 판단중지라 하는 것은 옛날 그리스 철학에도 나왔어요. 피타고라스 이런 사람들이 판단중지라 했는데 이걸 행위주의라 해요. 행위주의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거예요. 과연 그런가? 과연 그럴까?

소크라테스가 델피에 신전이 있는데 신전의 글귀를 인정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니 자신을 알라.’라고 했죠. 소크라테스가 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런 뜻 이예요. ‘여러분, 저는 내가 누군지 모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시는 분 계십니까?’ 이런 뜻 이예요. 이게 더 무섭죠? ‘나는 아니까 니 나한테 배워‘ 이보다도 ’나 모르거든요. 혹시 아시는 분 손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한 수 배우겠습니다.‘ 이게 더 무서운 거라니까요. 그럼 저쪽에서 ’그럼 그거 알아서 뭐하는데?‘ 할 때 그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이 모르게 되면 그것이 죄를 짓습니다. 무지가 죄가 되는 거예요.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거예요. 그 의미는 뭐냐 하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돌아가게 돼 있는데 우리 인간이 무지몽매하니까 세상의 자연이치와 신의 위치와 신의 질서, 신이 하는 법칙과 우리가 무지하니까 무지한 상태에서 지 맘대로 살 거잖아요? 지 맘대로 하니까 이게 원래 하나님의 뜻과 우리 맘대로 하는 것과 맞을 리가 없죠. 그럼 고생은 누가 합니까? 자기가 진땅 고생하니까 그게 인간의 고생하는 인간이 괴로워하는 근본 문제가 자기가 무지해서 나온 거라 이렇게 보는 겁니다. 따라서 혹시 자연의 이치가 있으면 서로 의견을 나눠봅시다. 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사도행전 할 때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사도바울은 ‘여러분 나 모릅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던가요? ‘나는 죄인이다.’라고 이야기했지, ‘내가 무지하기 때문에 죄인이다.’ 했습니까? 그러지는 않죠. 죄인이기 때문에 무지한 게 아니고 죄인이라는 그 자체를 아는 것 자체가 이게 하나님의 성령의 은총, 은사다 이렇게 보는 거죠. 소크라테스는 내가 무지하기 때문에 죄인 되었고 어쨌든 간에 죄에서 벗어나서 바로 정의롭게 살자. 이게 인간의 목적이라 보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뭡니까? 인간의 목적은 딴 게 아니고 내가 죄인 됨을 아는 게 목적 이예요. 내가 죄의 종인 것을 아는 것, 죄는 나의 주인이고 시키는 대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가 익히 아는 것, 이 아는 이것이 바로 주어진 축복이고 기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종이가 있다면 소크라테스는 종이에다 깨알같이 착한 것, 옳은 것만 채우는 것, 여기다가 착하고 바르게살기, 이 종이가 사각형이 이게 내 인생이라면 내 인생에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항상 겸손하게 사는 이것이 올바른 것이고.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이 종이(인생)에다 구멍을 뚫는 겁니다. 판에다 구멍을 뚫어서 내가 착하게 산다는 자체가 구멍이 뚫려야 되고 폭파돼야 된다는 사실을 아는 이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달라도 너무 다르죠?

소크라테스는 교육이 중요해요. 1살부터 19살까지는 아직까지는 배워야 되니까 교육을 시켜서 의인이 되게 되면 시민사회에 봉사해야 되고 기여해야 되고, 그 공동체의 발전, 지혜를 유지시켜서 더욱 더 후손들을 키워야 될 책임이 있으니까. 국가의 발전은 딴 거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한 가정에서 부모가 됐으면 자녀를 키워야 되잖아요. 키워낼 때 교육도 시켜야 되고 밥도 먹여야 되고 그래야 자식이 커나가니까 요것은 기본적으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예수님은 뭡니까? ‘자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구멍을 뚫습니다. 자식 낳아봐야 죄고부모야 죽은 자고 나도 같이 죄인 가운데 같이 죽어가고 있고 결국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왜 죄냐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소크라테스는 항상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가지만.

사도바울이나 성령에 의해서는 이미 그리스도가 덮쳤다는 자체가 종말이다 말이죠. 죄 아닌 것이 없고 의인은 전혀 없고 천사가 오든 누가 오든 우리는 당해야 싸고, 오히려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그 자체가 뭔가 ‘주님 혹시 계획에 차질이 있었던 거 아닙니까? 오류 아닙니까? 할 정도로 오히려 화들짝 놀라야 될 일입니다. ’그래, 너는 천국 가게 되었어.‘ ’주님, 혹시 주님이 행정적 착오 아니십니까?‘ 오히려 되 물어야 될 입장이라 말이죠. ’어떻게 저 같은 인간이 창녀보다 못 되고 깡패보다 못한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이 구원받습니까?‘ 이게 강도가 하는 그 고백, 창녀가 하는 고백, 전부 다 이게 성령에 의해서 오는 것은 바로 니가 믿고 안 해서가 아니라 니 안에 너와 내가 너를 용서하는 내가 너와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그 혜택이 사랑의 혜택, 자비의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모든 사람을 강퍅케 함은 주께서는 긍휼로 구원하고자 함이라. 미술시간에 전에 이야기했지만 다양한 색깔을 밑에 깔아요. 그 위에 시커먼 크레파스 가지고 한층 더 깝니다. 그 다음에 면도칼로 긁어내면 예상 못한 여러 가지 오색 색깔이 튀어나오듯이 주께서 우리를 날마다 누룽지 긁듯이 긁어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우리 죄를 긁어보니까 창세전에 구원받았다는 소식 이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하는 작업을 주님이 알아서 할 뿐이고, 그 결과물로 나온 게 성도가 나오잖아요. 성도가 자기 구원을 위해서 애쓴 게 하나도 없고, 그냥 주께서 다가와서 주님 자기 작품이라고 긁어보니까 그 결과가 뭐냐 하면 주님의 이름에 기록됐다는 사실이 이게 드러나면서 우리는 ‘아! 구원받은 사람이구나.‘ 하는 걸 아는 거예요. 날마다 감사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그걸 뭐냐 하면 그걸 수동적이라 해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우리는 주님 앞에서 수동적입니다. 그래서 이 해석도 우리한테는 수동성이 포함이 돼 있는 해석으로 우리에게 주어져야 되겠죠. ‘기다렸습니다. 오시옵소서.’ 가 아니라 천사가 와서 활동을 하다 보니까 들통 난 것이 ‘너는 천국 가기로 돼 있는 사람.’이라고 들통 난 그 결과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말은 이렇게 어려운데 사실은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게 되면 아주 길게, 길게 이야기를 풀어서 길게 늘어뜨려서 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와서 어린양의 피 발랐다면 살려내도 전부 이 모든 게 뭡니까? 모세가 애굽에 안 가려고 하는 것을 모세에게 지팡이 손에 쥐어주고 가게 하는 것, 쥐어 준 지팡이를 던져 보니까 이게 뭐가 되고? 뱀이 되고, 엄마야, 하고 놀랐는데 ‘다시 쥐라’ 해서 다시 쥐니까 다시 도로 지팡이 되고, 이 모든 일들이 모세는 그냥 수동적 이예요. 모세만 수동적이 아닙니다. 모세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그 사람도 하나님에 의해서 수동적이 되죠.

그럼 능동적인 것이 뭐냐 하면 구약 이스라엘에서 그게 뭐냐 하면 이걸 언약이라 합니다. ‘너희들은 언약이 백성이기에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무슨 짓도 너희에게 할 것이다.’ 율법을 드러내기 위해서 안식일 날 나무하는 사람을 죽여야 됩니다. 모세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노아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노아는 방주를 뚝딱뚝딱 혼자서 만들고 있고 아무도 관심도 없고 지 혼자 만들고 있는 거예요.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죠? 꿈을 품고 사는 사람이 아름다운 게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을 품고 사는 사람이 아름답다. 노아는 심판을 품고 사는 사람 이예요. 아벨의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하나님의 무서운 가인에게 지적한 그 심판을 아벨이 품고 있다는 점에서 감사하죠. 아벨이 살아있으면 살아있을수록 지가 하나님 앞에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들통 날거니까 그게 두려워서 가인은 누굴 죽입니까? 동생 그 증거물을 자기의 심판 성을 알려주는 그 사람을 제거함으로서 ‘누가 나보고 죄인이라고 해? 죄인 아니야.’ 라고 하기 위해서 몰래 죽이잖아요. 죽이니까 가인이 하는 죄, 그 심판 성이 아벨의 품속에는 죽음으로 이게 장착이 되면서 가인의 죄를 품고서 죽은 자가 아벨입니다. 남의 죄 때문에 죽은 자가 아벨이니까 예수님은 아벨의 노선을 따라서 이 땅에 오신 분이예요. 이게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의 정신 이예요.

사울이 다윗을 창으로 던져서 죽여야 될 이유는, 그리고 다윗은 사울한테 그런 수모를 당하고 쫓겨 가는 이유는 다윗을 위해서가 아니고 다윗 언약을 위해서! 다윗은 사무엘하 2장, 3장 죽 뒤에 보게 되면 다윗은 분명히 약속합니다. “니가 어디를 가든지 너를 승리케 할 것이다.” 한번 찾아볼까요? 사무엘하 5장 19절에 보면 다윗이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그 다음에 8장 6절에 보면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8장 14절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되 온 에돔에 수비대를 두니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그러면 다윗은 자기 자랑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더욱 더 할 수 없는 거예요. 본인이 알아요. 이거는 자기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날이 갈수록, 갈수록 더 느끼는 겁니다. 늘 이기게 했기 때문에 만약에 졌다고 해도 이건 왜 지게 합니까? 말을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왜, 수동적이기 때문에.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주실 때 ‘고맙습니다.’ 말 자체도 잘못된 말 이예요. 주실 때 ‘고맙습니다.’ 할 수가 없어요. 수동적이기 때문에. 주실 때 고맙다는 말은 뺏어 가면 안 고맙다는 말밖에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해야 되지, 좋을 때는 조건보고 감사하면 안 된다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언약을 위해서! 그저 다윗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면 안 돼요. 다윗은 훌륭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안 만나서 그렇지, 다윗이 골리앗 말고 골리앗 손자, 갓난애하고 싸워보세요. 그건 다윗 보고 욕할 거예요. ‘애하고 상대하라.’ 이럴 겁니다. 마치 하나님이 골리앗을 상대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골리앗 키가 6규빗인가 한데 1규빗이 46센티미터이니까 거의 3미터가 되죠. 그러니 이런 덩치와 만나는 것도 다윗이 알고 있어요. 이것도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만난 것이지, 내가 잘하나 못하나 자기는 처음부터 수동성이기 때문에 잘하고 못하고가 안 되는 거예요. 물론 이 이야기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한테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니 왜 요즘 공부 안 해?’ ‘수동성인데요.’ 이러면 또…ㅎ ‘주께서 공부 못하는 것으로 항상 이기게 하십니다.’ 하면 골치 아프죠.

이 수동성은 개인이 자기 스스로 수동성을 만들어 갈 수는 없어요. 이건 언약의 능력이 와야 되지 사적으로 수동성을 부르게 되면 뭣을 원하느냐 하면 결국은 보상을 내달라 합니다. ‘많이 참았잖아요.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데도 주님 뜻이라 해서 많이 참았습니다.’ ‘어쩌라고?’ 그게 수동성입니까? 음흉한 겁니까? 그게 음흉한 거지, 수동성이겠어요?

회사 인사관리에서 제일 골치 아픈 것이 직장이든 회사든 가볍게 또는 상사한테 부하직원이 굽신거리고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게 상사로서는 기분 더러운 짓 이예요. ‘니 주장을 이야기하란 말이야.’ 하면 니 주장을 안 해요. ‘예, 그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쥐 박고 싶어요.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나중에 보상 내달라는 거예요. ‘니 잘 되거든 나중에 우리 갈라 먹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거는 상사를 이용한 거죠. 사실 노골적으로 ‘당신 이용해 먹자.’ 하면 얼마나 속 시원한데, 그게 아니고 ‘예, 그저 뭐 주 뜻대로 하옵소서.’ 주 뜻대로 하라 해놓고 나중에는 뒤 소리 한다니까. 그러니 세상에서 제일 편한 것은 돈 쳐 넣어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돈 쓰는 재미가 최고에요. 전두환, 돈 쳐 재여 놓고 쓰는 재미로 사는 거예요. 최고로 뱃장 편한 사람 이예요. 최고로 편한 사람이죠.

수동성이라는 것은 인자가 천사를 보내서 일을 할 때 항상 이미 미래에 일어난다고 계산하게 되면 이건 음흉한 기대와 보상이 돼요. 예수 잘 믿었으니까 나중에 천사 올 때는 구원해주겠죠? 이것도 하나의 음흉해. 이건 말이 안 돼요. 그게 아니고 그 천사의 말씀하시는 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그냥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뜻대로 하시옵소서.’ 한다고 뜻대로 되는 게 아니고 ‘뜻대로 하시옵소서.’ 자체도 수동성이 돼야 되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뜻대로 되는가. 내가 볼까. 이렇게 나오면 안 되거든요.

그 뜻이 뭐냐, 내가 반드시 천사를 보내리라. 그러면 그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는 미리 감사해야죠. 아무리 어렵더라도 ‘천사가 오신대, 천사가 오신대. 작살낸대.’ 우리는 그런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감사하게 봐야 됩니다.

그 다음에 41절 보면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돼 있죠. 수동성입니다. 수동성이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신나야 될 하등의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다만 우리가 신나고 감사한 것은 주님이 일을 하신다는 그 자체가 감사할 뿐이지, ‘헤헤, 나는 이런 심판 안 받는다.’고 혼자 좋아할 입장은 우리가 안 됩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야 되겠죠. 여기에 의인이라든지, 불법을 행한 자, 할 때 생각을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불법을 행한 자 속에 우리를 그쪽에 넣으세요. 불법을 행한 자 속에 넣게 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은 뭐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사람이 뭐 천사도 아니고 완전한 것도 아니고 불법을 행할 수도 있지.’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진짜 해와 같이 빛나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들은 ‘불법을 행하는 사람 속에 제가 포함이 돼 있습니다. 그러니 불법을 행하는 사람 속에 있기 때문에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는 모든 권리가 애초부터 주님 앞에서는 차단 돼 있다는 것을 본인이 수용하겠죠. 왜냐 하면 주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에게 어떻게 합니까? 지옥 불에 넣어주잖아요. 지옥 불에 넣기 때문에 지옥 불에 넣어야 되고 나는 들어가는 입장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 이러쿵저러쿵 어떤 토 달고 할 입장이 못 되잖아요. 못 되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는 뭐가 그대로 남아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주께서는 불법한 자는 풀무 불에 넣는다.‘는 말씀이 그대로 남아 있겠죠. 그 남아 있는 사람이 바로 의인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이후에 성령이 오게 되면 제자들을 이렇게 만들어요. ‘여러분, 저처럼 되시기 바랍니다.’ 가 아니라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사도바울이나 사도 베드로나 사도 요한이나. ‘주께서 조치해야 우리가 이 말씀대로 구원받지, 우리가 이렇게 대비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라는 말을 주님 앞에 할 수 있는 거예요. 끝까지 수동성으로 되는 거예요.

여기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할 때 누구든지 이 말씀 보게 되면 불법을 행하는 자에서는 자기가 없고 자기는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해와 같이 빛나리라”는 의인에 해당된다고 이렇게 주장할 거다 말이죠. 사실은 인간의 육신 자체가 그렇게 해석하도록 조치가 돼 있어요. 주님께서는 그걸 익히 아시고 십자가 지게 됩니다. 요 말씀과 십자가를 비춰볼 때 이제는 내가 의인이다 생각하고 십자가 땅기지 말고 차라리 십자가 쪽에 가세요. 가게 되면 ‘주께서 십자가 죽는 그 죄 속에 바로 내가 해 같이 빛나는 여인입니다.‘ 라고 우기고 까부는 그것도 주님이 지신 십자가 죄 속에 포함돼 있는 사항이라는 것을 발견하신다면 주님이 부활할 때 그 말씀도 같이 부활되기 때문에 우리는 해와 같이 빛나게 되는 겁니다.

말은 참 어려운데 어제 수요 설교 참고해서 예를 들면 알겠죠. 푸른 나무를 마르게 만들고 높은 나무를 낮추게 만들고, 왜 그렇게 한다 했죠? 고 과정 속에서 주님의 언약이, 주님의 주되심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구원받습니다.’라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의미에요. ‘주께서 구원하십니다.’만 나오기 때문에 그 과정 속에 우리가 편입되면 우리는 덩달아 같이 빨려 들어가서 구원된다 이 말이죠. 그 빨려 들어가는 급류가 오늘 이 말씀 이예요. 이 급류가 우리 속에 폭포수처럼 흘려 내린다 말이죠. 주께서는 불법 자들은 유황불에 보내고 의인은 해와 같이 빛난다. 이것만 우리 곳에 말씀이 폭포수처럼 내려앉으면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든 누구 국회의원을 만나든 누구를 만나든, 집주인을 만나든 누구를 만나든 우리는 두렵지 않고 자유를 얻어요. 심지어 현장에서 죄인으로 들통 난다 할지라도 이 말씀이 계속 살아있으면 우리는 두렵지 않죠.

그 다음에 유명한 44절 들어가 봅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여기서 “감추인” 감추었다는 거죠. 비밀이죠. 감추었다. 비밀인데 사람은 그 자신의 비밀을, 비밀로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왜 능력이 없느냐 하면 이 비밀을 자꾸 장소를 이동시킵니다.

현재 지금 우리 어머니가 계신데 침해 걸렸어요. 제 아내가 힘써서 3급 등급 나왔습니다. 아내는 복음 들은 것처럼 아주 기뻐하면서 오늘 오후 2시부터 작업이 되는데 매일같이 4시간동안 하는데, 어머니 특징이 뭐냐 하면 여기 상에 뭐를 놓게 되면 그 다음날 자기가 바꿔버려요. 그리고 잊어버렸다고 맨날 저한테 찾아옵니다. 도둑이 들어와서 다 가져갔다고. 가서 찾아내면 ‘거기 있었네.’ 하고 다음에 가면 또 잊어버리고, 거기 있었는데 본인이 딴 데 집어넣고 또 도둑맞았다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인간은 자기 속에 반드시 비밀금고가 누구나 하나씩 있어요. 그래놓고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해요. 항상 요걸 이동시킵니다. 금고를 자꾸 이동시켜요. 이 금고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기어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요건이 그 금고 안에 들어있어요. 내가 심지어 지옥 가도 지옥 가는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어떤 경우라도 자기만큼은 포기를 못하고 세상천지 개벽 나도 기어이 나는 이뻐! 이뻐도 너무 이뻐, 나는 너무 훌륭하고 너무 정당하고 너무 잘났고 나는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되고 세상은 다 없어져도 나는 계속 영속해야 되고 영원해야 될 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게 선악과나무죠. 선악과는 하나님이 주신 거잖아요. 선악과 열매가 인간 버리려고 주신 거잖아요. 독약이거든요.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은 ‘먹어라’는 뜻과 똑같은 소리에요. 먹고 우리는 완전히 환자가 되었어요. 이게 분명히 내 것은 아닌데 뭐가 들어왔는데 이것은 항상 비밀로서만 유지되는 거. 그러면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은 이 비밀, 실제 내 솔직한 요것을 감추기 위한 두 겹, 세 겹, 콘크리트, 북한의 핵처럼, 콘크리트 벙커 시설이 우리 한평생입니다. 우리 모든 한평생은 진짜 나만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벙커시설, 그 벙커시설 가운데 있는 게 뭐냐 하면 교회 가기, 예수 믿기, 하나님 사랑하기, 이런 거예요. 이거 안 중요해요.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고 그것을 감춰 놓기 위한 그걸 잘 관리하는 용도로서 벙커로서 이렇게 두 겹, 세 겹 한 게 뭐냐 하면 예수 믿는 것도 모자라서 십일조까지 해가면서 기어이 지킬 것을 지키겠다는 고거, 이게 뭐냐, 보석을 감춰 놓은 밭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비유의 핵심은 뭐냐 하면 이미 우리 인간이 신이잖아요. 인간이 스스로 자기 비밀을 감추어놓고 있고 그걸 비유로서 두 겹, 세 겹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주님의 새로운 예수님 쪽에서의 비유를 들이대면서 해석해보라는 겁니다. 해석해 보면 우리가 그동안 감춰 있던 우리의 본색과 속셈이 이 비유 해석을 통해서 들통이 나라는 거예요.

이거는 비유 이야기하기 전에 쉬운 예로 봅시다. 그러니까 시누이와 올케 사이에 맘이 잘 맞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보통 집안을 위해서 서로의 체면과 체면을 위해서 서로 친한 척을 하죠. 그러면 집안 어른이 ‘아이구, 친구 봐라, 우리 시누이와 올케가 이렇게 사이가 좋다. 나는 며느리를 며느리로 안 보고 딸 같이 여긴다.’ 그거 무서운 말입니다. ‘딸 같이 여기고 쟤는 나를 엄마처럼 여긴다.’ 이렇게 하고. 손님 있을 때는 그 비밀금고가 감춰져 있습니다. 그 어른 가고 난 뒤에 시누이와 올케가 붙잡고 싸울 때 ‘언니 내 생일 때 뭐 해줬는데?’ ‘니 생일 내가 왜 챙기는데?’ 이러다가 싸우는 거예요. ‘언니는 맨날 친정에 돈 갖다 주고, 출가외인이.’ ‘출가외인? 언제 적 이야기야?’ 이래서 싸우고.

사람의 모든 분쟁은 이 벙커, 비밀을 담은 이 벙커를 손대게 되면 그거 수리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거든요. 다시 원상복귀 하는데. 자기 자존심을 채우기 위해서 제2, 제3의 자존심을 자꾸 채우다 보니까 어느 하나 건드리면 이게 도화선이 돼서 폭발해서 본색을 드러내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비유는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안에 피가 들어 들어있고 십자가 사건이 들어 있습니다. 아까 인간적인 거 다시 해봅시다. 우리의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잖아요. 주님은 미래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죠. 그럼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결국 주님 안에 십자가 졌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우리에게 이 말씀 하신다 말이죠. 우리는 이 본문 말씀 할 때는 십자가 전이니까 모르죠. 십자가 있는 것은 상상도 못했죠. 지금 예수님 잘 나가는데 왜 죽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말이죠. 그러니 제자들은 자기 자신을 감추는데 예수님 말씀이 도움 된다 해서 벙커시설을 하겠죠.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를 담고 이렇게 비유를 이야기하니까 이것이 어디까지 들어가느냐 하면, 그 사람 본색을 다 드러내는 데까지 다 파급이 되는 겁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라고 돼 있죠. 여기서 사람들은 뭘 할 수 있느냐 하면 밭에 보화가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하고 돌아가는 것까지는 해요. 농사짓다가 뭐 있으면 ‘쉿, 아무도 못 봤지? cctv 없지?’ 해서 자기 마누라한테만 얘기해서 같이 밤에 가져올 수 있는데,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하는 것이 이게 인간으로서는 오버에요. 너무 비약했어요. 아무리 귀한 거라도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것, 결국은 예수님의 비유 속에 뭐냐 하면 내가 받은 보물은 맞바꾸기가 되는 거예요. 그동안 벙커 안에 숨겨있던 너희 자존심, 마지막 너라는 자체를 바꾸는 용도 아니면 그건 보물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이야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니까 웬만하면 ‘제자들아, 너희들 이제 죽었어.’ 이런 뜻 이예요. 그동안 고이고이 유지했던 거, 이제는 그거는 새로운 보물 앞에서 그거는 빛을 잃어버리고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결국은 주님 나타나기 전까지는 의미 있다고 여겼는데 주님이 나타났을 때는 의미 있다고 여겼던 것을 전부 다 의미 없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이제부터 할 것이다. 하게 될 때 그들은 자기의 귀중한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주님에 대해서 극렬한 반응을 할 것이고, 그 반항 덕분에 진짜 주님은 죽는 척이 아니라 진짜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저주받는 거거든요.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거. 하나님한테 버림받는 게 제일 싫은데 버림받으면 자기는 뭐가 됩니까? 금고채로 버림받아요. 지 살아나면 뭐합니까? 하나님께 버림받아 지옥 가 있는데. 그건 제일 안 된 상황이잖아요. 절대로 돼서는 안 될 상황을 주님께서는 그걸 미리 십자가에 담아버린 거예요. 그걸 보물로 접수를 해줄 때 그 뒤에 영생의 부활의 끈이 달려있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된다는 것이 보물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몰랐다 이 말입니다. 내가 아버지 앞에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그 자체가 진짜 우리가 상상도 못한 그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보물 이예요. ‘주여,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 고백이 보물이라니까요. 그 보물을 모르고 그걸 진짜 자기 지키면서 그것까지 동원시킨다면 그건 안 맞죠.

그러면 이 보물을 어떻게 주는가? 제가 지난 주 설교에서 은혜 받은 게 뭐냐 하면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그 대목을 우리는 아는 대목이지만 그게 너무 제게 은혜 되는 게 뭐냐 하면 마리아 눕혀 놓고 주께서 강제로 싸워서 마리아의 자궁을 조폭처럼 파헤치는 겁니다. ‘니 자궁 내가 접수했다. 니가 원치 않는 임신을 내가 시키겠다.’ 그러면 그 마리아의 자존심과 마리아의 자기 의사는 어떻게 됩니까? 이건 완전히 처참하게 망가지죠. 그런데 엘리사벳이 약을 올리네. ‘이 복 받은 여인아.’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러면 복음은 뭡니까? 주님이 조폭이 돼서 삽 들고 와서 우리를 삽질해서 우리에 이만한 분화구, 화산구멍을 내는 게, 이게 축복입니다. 그 구멍 있는 위치가 뭐냐 하면 그동안 우리의 비밀금고 있던 위치, 두 겹, 세 겹 이거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그냥 공부하고 돈 벌고 전부 다 목적이 이거 하나 지키기 위한 이 보물을 주께서 삽질해서 그걸 완전히 도려내는 그런 축복을 주십니다. 대여, 자궁대여. 마리아는 자기 자궁을 하나님 앞에 대여됩니다.

동방박사는 참 위험한 짓을 했어요. 동방박사가 어디라고 거기 함부로 헤롯 동네에 옵니까? 그냥 곱게 사절단으로 왔으면 청와대에서 음식 대접받고 갔을 거예요. 그게 아니고 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을 찾아왔다는 것은 이거는 스스로 죽음 구덩이에 기어들어온 거예요. 마치 평양 김 일성 동상 앞에서 ‘박근혜 만세.’ 이거와 똑같은 거예요. 물론 그런 짓 하려고 들어갔다가 얻어맞아서 나중에는 딴 소리 하겠지만 동방박사 경우에는 본인 의사가 아닙니다. 별 따라 왔어요. 별이 문제라. 별이.

그런데 베드로후서에 보면 별 떠야 성도라는 거예요. 샛별이 떠서 우리를 데려가는데 위험천만한 곳에 우리를 데려간다는 겁니다. 그 위험천만한 것이 결국 뭐냐 하면 우리가 갖고 있던 것을 완전히 도림 당하고 그 자리에 주님의 작업이 채워지는 그 위험천만한 십자가 사건을 되풀이 하는 그 사건에 우리를 휘말리게 하는 겁니다.

이번에 수련회 할 때 사건 이야기할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움직임을 사건으로 응축함으로서 언약과 매치되게 하는 작업의 과정을 설명할 겁니다. 한 가지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고등학생이 있는데 고등학생이 자기 또래의 여학생을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아버지가 고의에 의한 차사고로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 범인을 보니까 그 딸이 그렇게 존경하던 천 씨 성을 가진 할아버지가 사주해서 했을 때,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이 근본적인 사건에 우리가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빠져나올 수 없는데 주께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걸 빠져나오게 하는 그게 구원이거든요. 그게 출애굽 이예요. 나올 때 뭘 하느냐 하면 그동안 얽히게 만든 그게 우리의 자존심과 자기 사랑으로 인하여 마귀가 쳐놓은 그물에서 이게 빠지질 않는 거예요. 자기 사랑, 자기 애정이 문제에요. 자기가 지키고 싶은 보물의 문제를 마귀가 딱 쥐고 있으니까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주께서 삽질을 해서 그 자리를 ‘니는 마귀한테 있다는 자체가 니는 저주받아야 돼.’ 주께서 우리에게 저주를 퍼부음으로써 빠져나오게 하는데 그 저주 속에 뭐냐 그 저주를 퍼붓게 하는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의 되풀이, 반복이다 말이죠. 십자가 사건의 반복!

되풀이가 된다는 것은 이미 시간 자체가 미래를 쥐신 분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되풀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되풀이 되는 거예요. ‘그때에 의인들은 해와 같이 빛난다.’는 미래 상황이 지금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니는 해거든. 빛나야 되거든.’ 이것을 계속 되풀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동안 쥐고 있는 이것을, 계속해서 육신이 생산되는 것을 계속 파헤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한번 이해했다고 넘어가는 게 아니고 이 비유는 지금도 매일같이 우리에게 되풀이해야 될 비유입니다. “보물이 있거든” 해놓고 뒤에 우리에게 충격적인 거.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주여, 그것만큼은 제발. 이건 오버입니다.’ 보물이 있지만 자기의 소유를 다 파는 건 도박장이나 할 짓이지, 도박장 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거든요. 오히려 재산 바치는 거, 심지어 도박하는 사람은 자기 마누라까지 바친다는데. 얼마나 마누가가 꼴 보기 싫으면 바치겠어요? 모든 걸 바칠 때 그 인간들은 뭘 못 바쳤습니까? 도박하는 본인은 거기다 안 바친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것마저 웃음거리로 만듭니다.

다시 마리아 임신 이야기해볼게요. 마리아가 바친 게 뭐가 있어요? 사실은 바친 게 없죠. 마리아에게 쳐들어왔죠. 뭐가? 주의 말씀이. “주의 말씀대로 하옵소서.” 하는 것은 이제는 주의 말씀이 주물럭거리옵소서. 삽질하든지, 파든지 다 파든지 다 깨든지 마음대로 쓰시고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그거에요. 참 피에타에요. 슬픈 여인.

그런데 사촌 엘리사벳은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복 받은 여인이여. 아무나 되나.’ 니 같은 팔자가 아무나 될 팔자가 아니라는 그런 이야깁니다. 처녀가 임신했는데 그게 아무나 될 팔자가 아니에요. 이게 그때 보면 성령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 성령께서 통하면 남들 보기에는 우사스러운 일도 성령 안에서는 축복받은 자요. 이건 아무나 되는 복이 아니야, 주께서 주신 축복이야. 성령 받은 사람끼리는 서로 통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교회라는 거예요.

기존교회는 전부 다 자존심밖에 없는 거 같아요. 전부 다 주님 지시하는 밭에서 보물 다 따냈대. 전부 보물 안 가진 사람이 없어요. 교회 가면. 이 비유대로. 보물이 아직도 남아있는지 몰라. 모든 소유를 다 팔았으니 보물이 남아있겠어요? 안 남아있겠어요? 안 남아 있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준 보물은 주님의 주신 보물이기 때문에 일부만 준 게 아니고 다 준 게 돼요. 왜, 우리는 모든 소유를 다 받았기 때문에. 따라서 나만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아까 사도행전에 사도바울만 복음을 전했습니까? 아볼로도 했습니까? 아볼로도 했죠. 하지만 사도는 뭘 이해합니까? 그걸 성령께서 주신다는 거죠.

여기 꿀 막대기 끝에 꿀이 있는데 여기 벌이 꿀을 보고 달려들어요. 그러면 벌이 이 꿀보고 꿀을 먹었습니다. 이 꿀을 벌이 다 먹었습니까? 아니, 달라붙은 거죠. 마찬가지로 이 복음에 우리는 달라붙었는데 우리는 모든 소유를 다 바쳐서 달라붙게 한 거예요. 달라붙은 이것을 교회! 다른 말로 하면 꿀, 교회다 말이죠. 피다 말이죠. 피! 오직 여기서는 ‘나는 요만큼 먹었다.‘는 소리가 안 나와요. 그냥 주님 이야기하지, ’나는 이만큼 먹었다. 나는 조만큼 먹었다.‘라는 소리를 할 수 없어요. 다시 개인 소유가 돼 버리면 주께서는 이미 소유를 다 팔라 했는데 또 우리는 ’나는 믿음을 요만큼 가지고 소망을 요만큼 뜯어내고 사랑을 요만큼 뜯어내고 너는 얼마나 뜯어냈는데?‘ 이러면 그게 또 새로 생긴 소유가 되잖아요.

이건 경계선이 아닙니다. 습자지가 아니고 다시 두께를 가지게 돼요. 저는 얼마나 두껍나? 또 두꺼운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이 말씀이라 하는 것은 ‘이해했습니다.’가 아니라 저에게 말씀이 날마다 심겨주시옵소서. 눈만 뜨면 심겨주시옵소서.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그걸 이미 들었으면 아침에 눈 떴다. 내일 눈 떴다. 이미 우리 소유는 없죠. 모든 소유를 천국을 위하여, 복음을 위해서 다 파여진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 소유가 없고 내 몸도 내 머리도 전부 다 안경도 주님의 것이 되죠.

그렇지 않고 ‘나도 마태복음 13장 아는데 나는 이미 복음을 가졌거든.’ ‘얼마치 가졌는데?’ ‘보물이 한 5만 원어치인가?’ 이렇게 되면 뭔가 이건 또 다시 소유를 다 팔아가 안 되죠. 받았던 그걸 도로 다 드려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다 팔아 그 밭을 샀다.‘는 것은 결국은 제가 내린 결론은 뭡니까? 이 말씀은 누가 지킨다? 예수님만 지킨다. 예수님만 아버지께 몽땅 다 드려서 그 보물을 다 받아낸 거예요. 그 다음부터 성도는 뭐냐, 주님이 받은 것을 우리에게 공짜로 나누어주는 거, 그냥 나눠주지 않고 삽질해서 우리의 비밀금고에다 확! 뒤집어 내놓고 거기다 집어넣을 때 그 삽질해서 떨어져 나갈 때 그 떨어져 나가는 것을 우리가 보자 이 말이죠. 보면 ’오! 오!‘ 저게 내 자존심이고 그게 바로 내 사랑이고, 남한테 들키기 싫은 내 마지막 나됨을 보장할 수 있는 최후의 그것이 날개 짓하면서 도망가고 있다는 거죠. 우리가 아까워서 그걸 쥐죠. 설교 들을 때는 다 파이고 설교 마치고 끝나면 다시 던져진 것을 주워 모으고.

이거는 여담인데요. 지난, 지난 주일날 재밌는 현상이 일어났어요. 식사 끝나고 난 뒤에 우리교회 옆에 보면 보나벤티인가 있어요. 커피집인데 빙수도 팔거든요. 그래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더우니까 ‘빙수를 먹으러 가자.’ 했는데 중요한 분을 빠뜨리고 갔네요. 그런데 나중에 오니까 ‘어디 갔다 왔는데?’ 가만있으면 되는데 ‘빙수 먹으러 갔다.’ 하니까 ‘아이, 나도 데려가지.’ 이러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난 주 설교에 낮 설교에 빙수 이야기한 거예요. 기억이 안 나시는 모양인데, 한번 들어보시면. 오 목사님 녹취 보시면 빙수 이야기 나올 거예요.

그러니까 분명히 설교 때는 주의 은혜로 사는데 막상 자기를 제치고 따로 저희끼리 빙수 먹으러 가니까 이게 기분 나쁜 거예요. 그러니까 따로 빙수를 먹은 게 그 사람한테는 축복인 거예요. 왜, 다시 한 번 주께서 삽질해서 자기 주제파악을 다시 알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쪽은 빙수이지만 오늘 우리는 무슨 짓,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잖아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실 때 모든 걸 다 팔아야 했지만, 우리는 보상을 기대하면서 마지막은 결코 내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령, 십자가 사건 앞에서 그 마지막이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고 마귀 적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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