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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3. 7. 26) 2강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3. 7. 26) 2강

이름 : 서경수(IP:218.146.227.196)

광주 강의(2013. 7. 26) 44-2

하나님과 인간이 만났을 때 인간이 기대했던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의 관념 속에 있는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은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 구출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협상이나 타협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잘 설명해도 그 말을 다 이해할 수 없고, 또 다 알아들으면 의사의 권위가 떨어집니다.

이처럼 고치는 분과 고침 받아야할 자는 격이 다릅니다. 우리는 평소에 늘 하나님을 부르지만 진짜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예상 못할 분으로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떨기나무에 나타나십니다. 만약 모세가 하나님을 알았다면 반갑게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예상 못하게 오셨기에 오히려 당황했지요.

떨기나무에 타나났을 때 모세의 입장에서는 두렵고 떨렸어요. 그럼 생각해 봅시다. 이런 하나님이 사랑스럽습니까? 아니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몸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라.”고 하셨지요. 이것은 주님이 안 나타났을 때 주님을 우리가 상상해서 섬길 때는 가능한데 막상 떨기나무에 나타났을 때는 혼이 나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타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만 나타난 환경, 그런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 앞에서 모세는 있는 둥 없는 둥,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개인적으로 고민거리나 스트레스가 있더라도 막상 하나님이 나타나면 나의 근심과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 되지요. 그 정도로 무섭고 떨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무섭고 떨리는 분이 인간을 앞장세우고 나타나면 그 인간은 어떤 존재로 보이겠습니까? 낯선 존재가 돼요. 이것을 정신분석학에서 ‘언케니(uncanny)’라고 하는데, ‘으시시’ 또는 ‘친숙한 낯섬’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인데 왠지 낯설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런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가인 앞에 나타난 아벨. 제사를 정성껏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보편화 된 일인데 아벨은 이상하게 양을 잡고 기름부위를 따로 떼고 드리는 것. 이것이 일반 제사의 입장에서 보면 ‘언케니’한 것이죠. 뭔가 이상해요. 그냥 기도하고 정성 모아 예배드리고 이것이 자연스러운데 ‘오직 예수님 피만 사랑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언케니’한 거예요.

주님께 정성을 다해 바친다는 것은 괜찮은데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할 때는 ‘언케니’한 거예요. 실제로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막상 사람을 앞장세워 나타날 때는 ‘왠지 낯설다. 예전에는 못 보든 상황인데?’ 이런 식으로 등장합니다.

떨기나무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떨기나무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네 신발을 벗어라.”하시고, “내가 너를 보낸다.” 그 사건 이후에 모세에게 지팡이를 잡으라고 하고 던지니까 뱀이 되었고, 뱀을 잡으니까 다시 지팡이가 되고, 지팡이 잡았던 손을 품에 넣으니까 문둥병이 되었고, 다시 품에 넣었다 빼니까 건강하게 되고.

이 모든 것은 친숙하게 내 생존을 위해서 꾸미는 삶 자체를 엉망진창으로 만듭니다. 우리의 모든 평화와 질서를 다 파괴합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살라고 하는 것인지 살지 말라고 하는 것인지 분갈 할 수 없어요. 내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 놓습니다.

대전 강의에서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반성문을 쓸 때는 종이게 작은 글씨로 ‘내가 언제 무슨 잘못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씁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반성문을 볼펜으로 구멍을 뚫어버려요. 이 말은 뭔가 하면, 우리가 아무리 우리 삶을 개선하고 바르게 산다 할지라도 내가 만든 토대 자체에서는 우리가 벗어날 수 없어요. 찐드기에 붙은 것처럼. 그러니까 하나님은 찐드기처럼 붙은 것을 떨어지게 만드는데 개입하십니다.

43장 1절부터 봅시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수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질문하겠습니다. 이 성전은 인간이 만든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여러분이 다 아는 것이고, 그러면 이 성전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없는데 43장에 보면 마치 성전이 완공된 것으로 간주하고 동쪽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쳐들어오지요. 주석가들은 이것을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환상 속에서 본 성전’이라고 해요.

그러면 환상 속에서 본 성전이 성전이겠어요, 인간이 손으로 만든 성전이 성전이겠습니까? 영원한 성전은 말씀 속에 있는 이 성전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이 성전은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우리 자신이 주님 보시기에 있으나마나한 꿈같은 존재로 있을 뿐이에요.

내가 현실이라고 우기니까 진짜 현실은 환상처럼 느껴져요. 그런데 환상이 현실이 된다면 그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별 볼일 없는 있으나마나한 한순간의 꿈같은 일일 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관심 둘 것은 43장 ‘그 문에 누가 들어오는가?’입니다. 그리고 ‘무슨 영광이 들어오는가?’ 이게 중요하지 그 밖의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성전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고, 성전 동편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중요합니다. 그럼 이 부분을 설명해 봅시다. 성전에 문이 각 방향으로 있는데 서쪽에는 문이 없어요. 북쪽, 남쪽, 동쪽에는 문이 있는데 서쪽에는 없어요. 그리고 북쪽과 남쪽 문은 북쪽에서 들어왔으면 북쪽으로 유턴 못해요. 북쪽으로 들어왔으면 남쪽으로 나가야 하고, 남쪽으로 들어왔으면 북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성전에 들어온 사람은 제 마음대로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포함된 사람은 영원한 구원에 이릅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성전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일으키신 사건을 왜 에스겔에서는 구체적인 성전이라는 건물로 표현하는 것인가? 인간들이 그동안 하나님을 만날 때 특정 지점과 특정 시간을 언급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43장 18절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성전에는 그냥 관람용이나 놀이동산이 아니고 이 안에서 피 뿌리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성전은 어떤 특정 장소에 있어야 하고, 특정한 시간에 제사를 드려야 하고, 특정 제물을 바쳐야 하고, 그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옷을 갈아입고 실제로 활동해야 하고 그럴 때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이며 구원이 성사된다고 믿었어요.

하나님은 이 전체를 통째로 환상으로 날려 보냅니다. 그냥 환상으로 무시하면 안 되고 그 의미를 살리면서 사건화 시키고, 그 사건을 예수님이 일으키신 사건으로 만들면, ‘예수님이 성전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동시에 ‘주님이 일으키신 사건에 내가 말려들어야 구원이 됩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주님만 사건이고 나는 멀쩡히 그대로 있으면 우리가 주님을 알 수 없어요. 주님의 일이 사건으로 집약된다면 우리도 여기에 같이 말려들어서 사건화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성전을 봅시다. 이것은 분명히 건물인데 이것이 인물로 전환되면서 사건화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전이라고 하면, 특정 지점에 세워진 건물과 특정 시간에 제사를 드리고, 이 일을 위해서 특정한 사람 제사장이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성전이 쪼그라들어 인물로 바뀌는 그 상황에 내가 같이 말려들면 우리도 주님 사건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역사 속에 살고 있어요. 사건이 역사 속에 도로 펼쳐지면 우리가 좀 전에 파인애플 먹은 것도 하나의 사건이고, 우리가 직장 다니는 것도 하나의 사건인데 이 모든 것이 응축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펼쳐놓은 일이 되는 겁니다.

[인디아나존스] 영화가 있었는데, 고고학자들이 밀림을 다니면서 신비한 것들을 발굴하고 심지어는 법궤까지 찾아내고 그런 내용인데, 이런 것이 있어요. 아프리카 밀림인데 딱정벌레가 한두 마리 기어 나와요. 지금 독일군과 인디아나존스가 어떤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데 한두 마리 보였던 딱정벌레가 온 땅에 깔려서 독일군 차량이나 병사들 몸에까지 달라붙어서 난리가 나요.

지금 우리는 몇 년 전 이 땅에 태어나서 이러저러한 일을 하면서 지금도 살고 있다고 여기는데, 사실은 지옥에서 올라온 딱정벌레가 우리가 사는 모든 곳을 점령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아주 살기 좋은 세상인줄 알아요. 딱정벌레가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라요.

그런데 이 딱정벌레의 정체가 언제 드러나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딱정벌레라는 악마들이 온 땅을 까맣게, 인간의 몸과 영혼까지 다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요. 이 전체가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건화’ 다른 말로 하면 ‘언약화’ 된 사건이지요. 모든 것이 언약대로 되어 갑니다. 마귀들이 설치는 것도 언약에서 파생된 일이에요. 역사의 모든 일들이 다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도 인디아나존스처럼 여기서 다 먹혀야 되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우리를 다시 딱정벌레가 있는 세상으로 보내요. 한명의 소자로. 소자로 이 땅에 보내시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 세상이 너무나 좋은 세상, 돈만 있으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세상으로 보이지만, 소자(성도)의 눈에는 지옥에서 올라온 새까만 벌레들로 완전히 장악된 세상으로 보이지요.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고 이것이 바로 ‘언케니’한 것입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이런 말 하는 사도 바울이 왠지 낯설게 느껴져요. “돈이 있어도 다 못쓰는 것처럼 살아야. 이 세상은 잠시 후에 끝난다.” 이런 말이 왠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고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들려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바울의 말씀이 낯설지 않고 우리가 십자가 사건에 참여된 자인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러면 이 작업을 할 때 어떻게 하는가? 43장을 봅시다. 1절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동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오지요. 그러면 이 성전을 우리가 성전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 성전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나. 성전은 귀한 것이야’ 하는데 동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쳐들어오지요. 쳐들어오면 우리는 점령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빛이 들어오면 우리는 졸지에 이미 이루어진 성전의 기능을 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성전 사건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는 겁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 있고, 그 영광은 동쪽에서 들어왔는데, 동쪽 문은 원래 왕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왕이 들어오는 동쪽 문으로, 왕의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동쪽 문으로 들어온 왕에 의해서 사건화 되기에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 성전화 시켰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4-5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고 싶다. 그 만나는 장소는 성전이다. 그런데 그 성전이 어디 있는지 분간을 못하고 있는데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 문으로 들어왔다. 동쪽 문으로 들어갔는데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면, 그러면 대체 이런 상태가 어떤 상태냐? 몰랐는데 성령을 통해서 보니까 그것이 십자가 사건 안에서는 이 말씀이 완성이 된다는, 언약 안에서 완성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십자가 안에서 우리도 하나의 언약화 되었으니까, 이것을 막대기라고 합시다. 만화에서 사람을 어떻게 그리는지 알아요? 동그라미 그리고 막대기를 그립니다. 이게 1,700년 경 중국의 상형문자나 갑골문자에 보면 사람을 이렇게 표시했어요. 계집 녀(女)를 쓸 때 이 ‘여’자는 여자가 아기를 앉고 꿇어앉은 (변형된)모습입니다. 인간은 사건 안에서 이것저것 다 떼고 남는 것은 뭐냐? 인간은 하나의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단한 것처럼 여겨져도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막대기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사건화 시켜서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땅에서 성전의 기능을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통해 이 성전을 펼치시는 겁니다.

“네가 바로 성전이야.” 왜? 네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들어 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가 하는 것은 이 땅에서부터의 거룩입니다. 거룩이 뭐냐? 제사 드려야 하고, 제사장이 있어야 되고,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되는데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성도의 움직임, 막대기같은 우리의 움직임 속에서 예수님이 성전의 기능을 펼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건 어렵지 않지요? 사도 바울이나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스데반 집사가 죽었잖아요. 그냥 막대기로 죽은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죽음으로 누가 살아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스데반 집사를 거두어 가는 것이 나타났지요. 예수님 나타나시고 스데반 죽고 이것을 에스겔 43장으로 보면 스데반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들어있는 거예요. 사도행전 7장에서는 이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은 십자가 사건화입니다. 사건화가 뭐냐? 막대기로 보면 돼요. 사건화의 반대는 뭐냐? 역사화입니다. 역사화가 왜 나쁘냐? 역사를 펼치면 ‘나는 과거에는 이러했고 지금은 이렇게 앞으로는 이렇게 할 거야.’라고 자기 역사가 만들어져요. 그런데 이것을 강제로 뭉쳐봅시다. 그러면 과거 자르고 미래 잘라내면 남는 것은 지금 이 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 버려두고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할 때, 그 여인이 자신의 과거를 생각합니까, 미래를 생각합니까? 둘 다 잘려나갔어요. 남는 것은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건, 막대기만 남지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 모습입니다. 이게 성전의 모습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성도의 모습이고, 그 안에는 하나님의 성전 기능이 막대기를 통해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고.

극장에 스크린이 있습니다. 영사기가 있고 기사가 영사기를 돌립니다. 이 필름 안에 에스겔 42, 43장이 들어 있습니다. 이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환상이에요. “이건 필름이고 그냥 그림이야!”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영사기를 통해서 스크린에 그림이 보이고 움직이니까 42, 43장에 다 보이는 거예요.

그 안에 있는 것은 환상이 아니고 실제인데, 이 안에 필름이 돌아가는 것은 하나의 사건으로 집약되어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펼쳐지면 성전의 기능이 이 땅에 펼쳐지는 겁니다. 이 필름 안에 주께서 우리 자신을 집어넣습니다. 하나의 막대기로 넣으면 그것이 펼쳐지면 우리의 역사가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역사를 역사로 보지 말고 이 전체를 십자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보자는 말입니다. 과거 자랑할 것 없고, 미래 걱정할 필요 없고. 내일 죽을지 몰라요. 그러니 지금 사는 것도 주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전의 거룩함을, 제사의 기능이 반복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필름이 되는 겁니다.

43장 20-21절에 보면 “네가 그 피를 취하여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 네 모퉁이와 사면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케 하고 그 속죄의 수송아지를 취하여 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를지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히브리서 13장 1절에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에스겔 43장에서는 ‘피를 취하여 제단에 뿌리고’ 했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13장에는 ‘형제를 사랑하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고, 돈을 사랑치 말라.’고 했는데, 이것이 피 뿌리는 겁니까? 이것이 성전 제사입니까? 속죄제 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성전이 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에 관한 것이지요. 돈을 세면서 돈을 사랑치 말라는 이것이 지금 제사 드리는 중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 놀라운 일을 하면서 돈을 세고 있다니까요. “주님, 제가 이 돈을 사랑하는 줄 아시지요? 사랑 안 합니다.”하면서 돈을 세고 있어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것이 제사라니까요. 우리는 이것을 일상생활로 여겨요. 그런데 이것은 일상생활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이룬 제사의 완성이 그냥 스크린에 일상생활로 펼쳐진 것입니다.

제가 만약 히브리서를 쓴다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이런 것도 쓰겠지만, “네가 좋아하는 팀만 응원하지 말고 상대 팀도 응원해라.” 이렇게 쓸 거예요. 그냥 일상이에요. 그리고 “버스에 노인이 타거든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자리를 양보해라.” 이런 것도 쓴단 말이지요.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고, 이것이 우리가 드리는 제사니까.

그렇다면 에스겔 성전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으로 넘어옵니까? 그것은 새언약 때문에 그래요. 구약에 에스겔이 나오잖아요. 이것이 십자가로 모입니다. 십자가로 완성했잖아요. 그래서 십자가로 역사를 펼치면 구약에서는 제사의 형식이 된 것이 신약에서는 일상생활로 나타나지요. 이 일상생활을 거룩한 제사장의 생활로 보는 겁니다.

제사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사건화 되었기 때문에, 언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 언약이 실제로 우리를 통해서 펼쳐지면 우리의 일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것은 주변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생활 하도록 몰아붙여요. 주변의 여러 가지 사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생각해도 나는 이상한 인간이다. 나는 막대기 같아. 남들은 자랑하는데 나는 자랑하기 싫어.’하고 일상생활이 우리로 하여금 성도다운 모습으로 드러내는 거예요.

여기서 주의할 것은, 내 일상생활을 내 힘으로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예배나 기타 종교적인 생활을 일부러 끄집어내는 것은 가짜입니다. 왜? 이것은 ‘다 이루심’ 자체를 우리가 부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불신입니다. “내가 나쁜 짓을 했으니까 다음 달에는 헌금을 좀 더 해서 나쁜 짓에 대한 죄를 씻어야지.” 이런 생각으로 뭔가를 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자기만의 역사를 남에게 과시하려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주님이 ‘다 이루었다’는 언약의 사건화가 날아가 버리고 자기 자신의 역사만 남에게 자랑하는 셈이 되잖아요. 이 싸움, 성령과 육신의 싸움을 계속 해야 되는 겁니다.

그냥 사세요. 그러면서 그 틈에서 나오는 주님께서 살아계시고 구원했다는 사실을 뽑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게 되고, 그러면 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고 이 때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생각을 쏟아 내게 됩니다. 이것은 거룩한 성전의 삶, 거룩한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 제사 드린다는 모든 제사가 신약에서는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43장 27절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날이 찬 후 제 팔일에와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더라.”

이것을 일상화 해봅시다.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라.’ 어떻게 드릴까요? 정답은 그냥 사세요. 왜? 내가 어떻게 하든 예수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이것이 바로 에스겔 43장 27절을 내가 이룬 것이 아니고 주께서 지금 이것을 그대로 실현시키는 과정 속에 우리가 뽑혀 참여된 거예요.

이것이 구약 말씀이잖아요. 이것을 그대로 신약에 옮겨오면 오늘날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이 말씀이 완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우리는 그저 ‘고맙습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우리가 돈 세고 살아가는 일상을 그대로 받는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돈 받을 때는 정신을 차리고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되지.’ 이런 식으로 오버하지 말란 말이지요.

내가 내 스스로 조정하고 절제하고 그런 식으로 하면 제사장이신 주님이 홀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이 누락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성전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서의 예배가 뭡니까? 이 여인에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까? 아니지요. 그럼 물동이 버리는 것이 예배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이것이 그 여인의 예배입니다. 그것이 성전이고. 주께서 그 여인을 막대기로 사건화 시킨 것입니다. “나, 예수 믿어.” 이런 생각을 우리가 왜 못합니까? 늘 하잖아요. 그것이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넌 예수 안 믿지? 난 예수 믿어.” 이게 즐겁게 왜 안 나옵니까? 당연히 즐겁게 나오지요.

“나, 예수 믿어.” 이게 어떤 의미인줄 압니까?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그런 뜻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짓을 하고, 어떻게 인생이 꼬이고 해도 그것과 무관하게 나의 구주는 주님이니까 주께서 내 인생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나는 그 인생 속에서 ‘주님은 나의 구주십니다.’ 그 고백만 하면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았잖아요. 신앙생활 어렵지 않아요. 아내가 설거지하다가 화가 나서 “에이, 더러운 집구석. 더 이상은 못 살겠다.”하면서 컵을 깼단 말이지요. 남편이 “죄 없는 컵은 왜 깨냐?” 이렇게 나왔을 때, 그 소리를 우리는 들어야 해요. 그런 꾸중을 들을 때 다시 한 번 뭘 포기합니까? ‘언케니’한 것.

“내가 왜 깼지? 이상해. 내가 낯설어. 조금만 참았으면 될 걸 왜 이런 짓을 했지?” 그게 뭐냐 하면, 내 인생을 내가 만들어가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 순간 눈치 채게 됩니다. 이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런다고 이렇게는 하지 마세요. “성도가 컵 좀 깨면 어떤데?” 이러지는 맙시다. 이렇게 되면 예수 믿는 것이 하나의 자기 역사가 되니까 이것은 제 자랑이기 때문에 주님 증거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그래,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이렇게 속으로 삭이면 되는 겁니다. “컵 깼다고 당신이 짜증을 내? 당신은 언제 설거지 한 적 있어? 나는 성도야. 컵 깨도 괜찮아!” 이렇게 나오면 너무 오버하는 겁니다. 본인이 알아야 돼요. 주님께서 남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 구원하기 때문에 본인이 컵을 깨고, 꾸중 듣고, 왜 내가 이런 짓을 했지. 등의 복잡한 상황이 들이닥칠 때, 자신에 대해서 ‘내 인생은 내가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성전이란 낯선 공간이 지금 현실화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창세기 15장 17절을 보겠습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이것과 에스겔 44장 2절에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라.”

창세기 15장에는 하나님이 횃불이 되셔서 쪼갠 재물 사이를 통과하지요. 인간이 통과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통과했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 자신이 통과할 공간을 하나님이 직접 만들었어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그 생각은 아브라함 생각이 아니지요? 하나님 생각이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친히 특수한 공간을 만들잖아요. 창세기 15장에서 횃불이 통과하는데, 하나님의 오실 자리, 하나님이 앉을 방석을 누가 만듭니까? 하나님 자신이 마련해요. 이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땅에 계시지를 않습니다.

일상적인 공간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특수한 공간을 만들어요. 특수한 공간을 만들고 특수한 공간에만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겁니다. 에스겔 44장 2절에 보면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고 하나님만 들어온다.’고 했지요. 그러면 인간이 성전을 만들어도 그 성전은 소용이 없습니다.

에스겔에서 실컷 성전의 높이는 얼마고, 규격은 어떻게 해놓고, 그 성전을 인간은 절대 못 만들뿐더러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드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아기 예수 태어날 때 옆에 성전 건물이 같이 만들어 졌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결국은 성전이 되었잖아요.

그러면 성전에 대한 모든 구조나 활동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야 해석이 되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성전 건축하기로는 해석이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평소에 종교생활 하고, 예배당 짓고 ‘하나님, 여기에 오시옵소서.’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왜 사람들이 이걸 모르느냔 말이지요.

사람들이 성전 짓고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하는 그 모든 것이 다 거짓말입니다. 몰라도 너무 몰라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짐승을 쪼개 놓았는데 하나님이 통과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지요.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횃불로 통과함으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재료와 장소와 시간과 절차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이디어를 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 받았다는 말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여인이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예수님께 물 대접했다고? 남자 여섯과 산 것? 물동이 버린 것? 아닙니다.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은 뭡니까? 예수님이 그 여인을 이용하신 거예요. 외계인이 나에게 찾아온 것은 내가 좋아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자기 UFO 착륙장으로 삼기 위해서 우리 집 뒤뜰에 온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았으니까 기쁘다.’는 말조차도 가짜일 가능성이 많아요. 구원 안 받았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어요.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황당하지요. “주여, 종이 뭔데 저를 찾아오십니까?” 이렇게 됩니다. 혹시 단(오 목사님 아들)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까? “주여, 종이 무엇인데 저를 찾아오셔서 간호사로 만들려 하십니까?” 간호사나 의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사용하신다는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볼 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주님께 영광 돌릴만한 것이 없어요. 여기 파인애플이 있는데 난데없이 하늘에서 무엇인가 떨어져서 꽂힌 거예요. 우리 등에 식칼을 맞은 겁니다. 그냥 우리 몸을 하나님 성전이 되게 하시는 것이지 우리 몸이 성전이 아니에요. 우리 몸을 성전 되게 한다니까요.

우리 몸을 제사가 완료된 장소로 봅니다. 내가 어떤 죄를 지어도 제사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된 현장으로 삼은 거예요. 이것을 성령 받은 사도들은 발견해요. 그래서 더 이상 “내가 좀 더 잘 살아야지.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해. 나는 오래 살고 싶어.” 이런 것이 없고, 사도 바울처럼 “빨리 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지요.

신앙생활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사도 바울은 어떻게 살았는지 보면 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내일 되면 다 잊어버리지요. 사도 바울을 안 보고 세상에서 잘 나가는 박근혜를 보고 이건희를 봅니다. 남의 자식들은 결혼할 때 어떻게 했고, 혼수는 무엇을 하고 이런 생각만 하지요. 조 집사님도 지금 혼수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니 사도 바울은 어떻게 살았으며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는지 별 생각이 없어요. 그런데 일이 꼬일 때, 나의 역사가 사건이 될 때,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고 살아가는데 내가 전혀 보탬도 안 되고 힘도 안 될 때, 포기할 때 확인해 보세요. 내 등에 식칼이 꽂혀 있는지? 성령의 식칼이 꽂혀 있는지?

그냥 살면 주께서 우리의 평범한 삶을 언케니하게, 아주 기이하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만들어 나가시는 그런 인생이 여러분에게 펼쳐 질 것입니다.

에스겔 44장 5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게 말하는바 여호와의 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거룩한 성전을 지은 사람들, 성전 속에 있는 사람들은 거룩한 생활을 해야 되고, 24절 이하에 보면 “송사하는 일을 재판하되 내 율례대로 재판할 것이며 내 모든 정한 절기에는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이며 또 내 안식일을 거룩케 하며 시체를 가까이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못할 것이로되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시집가지 아니한 자매를 위하여는 더럽힐 수 있으며 이런 자는 스스로 정결케 한 후에 칠일을 더 지낼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모든 일, 여기에 보면 22절에 “과부나 이혼한 여인에게 장가들지 말고” 제사장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방금 제가 해석해 드렸지요. 그냥 사세요. 그러면 우리가 스스로 거룩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사태를 통해서 생생하게 깨닫게 되고, 그러면 성공한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기도하고 애써도 절대로 내 인생을 내 힘으로 거룩케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때 여러분 등에 성령의 칼이 꽂힌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고 삽니다. 내 힘으로 건사한 일생 살아보려고 부질없는 시도를 했지만, 이 자체에서 구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8. 15. 08:50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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