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3. 7. 26) 1강
광주 강의(2013. 7. 26) 1강
이름 : 서경수(IP:218.146.227.58)
광주 강의(2013. 7. 26) 44-1
에스겔 42장 13절부터 보겠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좌우 골방 뜰 앞 곧 북편 남편에 있는 방들은 거룩한 방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것이 이 그림인데, 제일 밑에 보면 치수가 나와 있지요. 동영상으로 보시면 좋겠는데 --
그림에 보면 500규빗이라고 되어 있는데, 1규빗이 45.6Cm이까 대충 계산이 되지요. 이 치수가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42장 20절입니다.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에스겔이 건물의 규격을 거론하고 하는데 이 건물이 실제로 있는 것입니까? 없어요. 그렇지만 천사가 척량을 하는데 꼭 있는 것처럼 척량을 하니까 사람이 보기에는 없는 것이지만 천사들에게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 성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천사가 척량하기 때문에 사람이 성전을 지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성경에 성전의 치수가 나오니까 사람들은 모방을 해서 가짜 성전이 생겨납니다. 에스겔에 나오는 성전을 모방한 가짜 성전이. 대표적인 것이 헤롯 성전입니다.
그러면 가짜를 누가 유발시켰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유발시켰어요. 그렇다면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을 주심으로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가짜 행세 하도록 하나님이 조치하시는 겁니다. 참 고맙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짜입니다.
그러면 진짜 인간은 뭐냐? 그것은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말씀 안에 있는 진짜 인간은 우리가 만들지를 못해요. 성령이 만들고 천사가 관여해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말씀을 모델로 해서 말씀대로 사는 인간인 것처럼, 성도인 냥 모방함으로 말미암아 모방된 그것을 진짜 나라고 우기게 만들어서 포괄적으로 ‘너는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들춰내는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가짜행세 하도록 조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의 나아갈 길입니다. 우리는 한평생을 살아도 인간이 뭔지를 몰라요. 우리는 조상 때부터 인간을 잊어버렸어요. 전도서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전도서의 특징은 인간과 짐승을 같은 바구니에 담아요.
성경에서는 인간과 짐승이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데 인간은 가짜이기에 가짜의 티를 내요. 뉴스에 보니까 위조지폐 5만원이 나왔는데 위조지폐는 집에 두면 띠가 안 나요. 가짜지폐로 밤에 편의점이나 재래시장에 가서 사용해야 진짜 지폐가 손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인간은 가짜 노릇을 함으로써 진짜를 추구하는 거예요.
‘음지에서 일하면서 양지로 나아간다.’는 말이 있지요. 국가정보원 표어입니다. 꼭 가짜 행세를 해야 그나마 자신이 위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봐, 그러니까 너는 가짜지!” 이렇게 나오십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정리하면, 하나님이 천사에게 성전 만들라고 하심으로 결국 성전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살아도 모방된 유사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개그콘서트]에 보면 가짜 티내는 코너가 있어요. 직업도 없는 젊은이 두 사람이 야구공을 주고받아요. “한혜진과 기성룡이 결혼한단다.” “나도 축구 좀 한다.” 축구 좀 하기에 자신도 한혜진과 결혼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해요. “그럼 공 빼앗아 볼까?”라고 해요. 주재 파악을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코너나 교인들이 교회 가면서 ‘우리 심심한데 교회나 가서 천국 갈까?’ 이와 같은 소리입니다. 천국은 못 들어갑니다. 베드로는 결심하면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주님 말씀은 ‘처소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처소가 마련되었다는 통보가 온 사람은 가고 통보가 없으면 그 사람은 애초에 하늘나라에 좌석이 없어요.
그러면 천국은 어떻게 들어갑니까? 예수 믿는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처소를 마련해서 성령을 보내 통지서가 와야 돼요. 천사가 와서 “아저씨의 죄 값은 주님이 다 치뤘습니다.”라고 해야 갈 수 있어요. 그러면 ‘믿습니다.’ 라는 말은 믿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 안에 주님께서 하신 내용을 수용할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믿습니다.’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믿는다는 것 속의 알맹이를 깨어보면 그 속에 ‘이미 처소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아버지와 결의해서 “제는 살려줍시다.” “그래, 네 뜻대로 해라.” 이렇게 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성령을 통해 통보해 주십니다. 통보가 없으면 불합격한 줄 아세요. 통보 없는데 일부러 확인하기 위해 전화할 필요 없어요. 원서 냈는데 연락 없으면 불합격인줄 알면 됩니다.
언약이란 모든 일이 이미 종결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사항을 그냥 통보해 줄 뿐입니다. 통보 받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그냥 일상적으로 살 수밖에 없어요. 그냥 살고 있는데 통보가 오면 그때부터는 천사가 만든 성전 안에 우리가 이미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에스겔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겠어요? ‘천사가 치수를 재는 것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성전에 들어갈 입장이 못 되는 구나.’ 치수를 친히 잰다는 것은 이미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고, 그 만들어진 것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뭐냐? 그 성전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림을 보이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2장 13절은 어떤 대목인가 하면, 그림 Bi부분입니다. 이것은 Binjan의 줄인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거실 혹은 제사장 휴게실’입니다. 성전에 보면 동쪽이 출입구입니다. 북편, 남편 양쪽 다 거실이 있어요. 이것이 별채로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은 한 채가 아니고 두 채로 되어 있어요. 여기 방이 30개 있어요. 여기에 제사장들이 거주하면서 제사 드리는 일을 합니다.
이런 이야기하니까 마치 성전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지요. 잊어버렸을까 싶어 다시 이야기합니다.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인간들이 이 성전 그대로 만들고, 거기 제사장들이 업무에 종사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전이 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이 성전은 인간이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마치 실재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뭡니까? 그것은 이 성전은 인간을 겨냥해서 인간을 삭제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런 성전을 지을 수 있습니다.”라는 소리를 내뱉게 만들고 삭제해 버립니다.
제 어머니 연세가 84세인데 치매 등급 3급이 나왔습니다. 84세까지 살면서 지금 3급 받아서 요양사가 돌보는 것을 보면, 희미하게나마 남은 인생을 주께서 지우개로 지워나가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어머니가 정신이 있을 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옛날에 할머니가 그랬는데 요즘 내가 그렇다.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정신이 없을 때는 “아버지 서울 가서 왜 안 오시지?” 아버지 돌아가신지 8년 되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세요. 이 순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라요.
성전과 인간의 관계에서 결국 밝혀지는 것이 뭔가? 인간은 환상 속에 산다. 매일 우리는 하나님이 지우기로 작정된 그 아래에서 살기에 결국 지워져야 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하루 일과가 나를 지우게 만드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내 인생이라고 고이 간직하고 거기에 의미와 가치와 역사로 비중을 두니까 그 자체가 전도서의 말씀처럼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이유는 인간조차도 헛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헛됨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지혜의 전략입니다. 제대로 된 인간은 예수님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냥 흙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왜냐? 결국은 지워지니까.
결국 없어질 것인데 아직 있으니까 주님 보시기에는 우리가 꿈속을 해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워지고 사라지지만 나 자신을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까지 치매 안 걸렸다고 생각한단 말이지요. “아버지 서울 가셨는데 왜 아직 안 돌아오시지?”라는 말을 진심으로 말하는 거예요.
“공부 좀 열심히 해라.” 이것이 꿈속에서 하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이 말하는 순간은 진짜 거기에 몰입하는 거예요. “네가 우리 집안에 기둥이기에 네가 잘 되어야 우리 집안이 잘 된다.” 이런 식으로. 이것이 안 되면 하나님도 싫고 다 싫어요. 그래서 이것이 먼저 되어야 예수 믿을 조건이 되는 것처럼. 그런 인간의 모습을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이제부터 심도 있게 성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공간 개념을 영어에는 space와 place 이 두 단어를 사용합니다. space는 그냥 공간으로 보면 되고, place는 어떤 지점, 장소로 보면 됩니다. 차이점이 뭐냐 하면, space는 우리가 속해있는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place는 유별난 특정 지점을 말합니다.
공간이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 말고 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 그 때 그 장소, 공간 가운데 내 기억에 또렷하고 내게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한 지점을 꼭 집어서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겁니다. 이걸 마콤이라고 하는데, 마콤이 뭐냐 하면, 유대교 회당에서 아주 은밀한 곳(지성소)를 마콤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에 대해서 우습게 보는 일반 사람들이 유대 회당에 가서 그들이 제일 은밀하게 여기는 그 지점에 한 번 가본다면 어떻겠어요? 이런 데가 여러 곳에 있어요. 30년 동안 한 번도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는 수녀원, 비구니들만 사는 절인데 외부의 어떤 남자도 들어간 적이 없는 곳, 이것이 바로 마콤이에요.
이런 특별한 장소는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에 뭔가 대단하고 신비한 것이 있을 것 같은데 막상 가보면 특별한 것이 없어요. 다른 곳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곳(마콤)에 있는 흙은 길가에 있는 흙과 같은 성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거기에다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면 이곳은 신성한 장소(마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신성한 장소를 누가 정했습니까? 본인들이 정했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의 성전은 본인들의 느낌으로 만들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한마디. 이것은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게 마콤입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보면 그냥 그런 척하고 있지요. 신성한 척해야 그것이 종교가 되니까. 이런 신성한 장소 마콤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의 place에 대해서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예수님께 점검 받아야 되겠지요? 예수님에 점검 받은 사람이 있어요.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하고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려야한다는데 어느 곳이 마콤입니까?” 이렇게 물었지요.
새벽시장에 가보면 허름한 복장을 하고 길거리에 서 있는 사람이 있어요. 5시 30분에서 6시쯤 되면 봉고차가 와서 “시다 2명!”하면 2명이 재빨리 차에 오르지요. 그러면 그 장소가 뭐가 됩니까? 직업이 있는 사람한테는 그 장소가 의미 없는데, 일용직 노동자는 새벽마다 그곳에서 기다립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이 장소가 특별한 곳입니다.
그 장소를 사람들은 성전으로 삼았어요. 그리고 성전 제일 깊숙한 곳에는 “하나님이 여기 함께 계십니다.”라고 하면서 이곳을 제사장이 포위합니다. ‘아무도 이곳을 함부로 넘보면 안 돼! 에스겔 42장을 14절을 봐.’ 여기서 binjan,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해 옷 갈아 입는 곳이에요.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함으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라고 했어요.
성전은 2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안의 뜰은 100규빗입니다. 바깥뜰은 500규빗이에요. 이것은 이방인의 뜰이에요. 일반인들은 안에 못 들어갑니다. 바깥뜰에서 안 뜰로 가려면 계단으로 올라가서 가야합니다. 그러니까 수직적으로도 안뜰과 바깥뜰이 구분되어요. 이 안뜰은 제사장들의 공간입니다.
제사장들도 안뜰에서는 아무 옷이나 입을 수 없고 지정된 복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나올 때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편리한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지시를 받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마이크 들고 외치는 분이 아니고 말씀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중 하나가 에스겔 42장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내가 제사장이라면, 하나님은 나타나는 분이 아니라 말씀으로 자신을 보여주시는 분이니까, 백성이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물으면 ‘우리가 성전에 들어갈 때는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만약 안 갈아입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제사장 권위도 서고 백성들도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을 확정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성전이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부로 확장시킬 수 있는 그런 작업에 끌려온 사람만이 구원 받는다는 복음이 성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뭐가 나옵니까? 물이 나옵니다. 물이 나와서 500규빗 주변에 있는 모든 민가에 생명을 줍니다. 이게 천국입니다. 천국은 성전이 있어야 되고, 성전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고,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있다는 소문만 들었어요.
있다는 소문을 누가 유포시켰느냐? 제사장이 유포시켰고, 제사장은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거하는가? 42장 14절 말씀처럼 옷을 갈아입는 거실이 마련되었다는 그 자체가 이것은 자기들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시한 것이기에 그 지시하신 분이 성전에 필히 계신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하지요.
그런데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마치 성경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없어요. 없는 이야기를 마치 있는 것처럼 제가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는데, 실제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에스겔 42, 43, 44장 이 모든 이야기가, 특히 47장은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에서 “나를 믿는 자는 --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어요. 이게 믿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아니고, 믿는 사람 속에 예수님이 들어계셔서 예수님이 성전이 되셔서 그래서 47장 말씀대로 계속 영생의 물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비교해 보세요. 그 당시 유대인들은 에스겔에 있는 말씀을 따라 성전을 만들 것처럼 이야기를 했고, 그렇게 해석을 했지만 예수님은 47, 48장 이 모든 말씀을 “너희들은 못하고 내가 다 지킬 말씀이다.”라고 하시니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못 믿었어요.
믿고 싶어도 믿을 건더기가 없어요. 믿을 만한 것을 제공해야 믿지 터무니없는 해석을 하니까 믿을 수가 없었어요. 심지어는 12제자도 못 믿었어요. 나중에 성령을 받고 보니 성전은 예수님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예수 안에 자기 백성이 있는 겁니다.
space와 place의 차이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보통 공간은 성전이 될 수 없고 특별한 자리 place 구별된 장소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 계시는 place, 마콤이라고 했는데, 이 성전을 하나님이 만들기 때문에 이 장소도 역시 하나님이 만들지요. 그 만드는 장소에 대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물어요. “그리심 산에서 예배해야 합니까,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합니까?”
예수님 대답이,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다.” 이 말씀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뭐냐? 새벽 인력시장에서 사람 뽑아 가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사마리아 여인이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치면서 물동이를 팽개치고 미친 사람처럼 떠들고 다녔단 말이지요.
이 여인이 본 마콤은 뭡니까? 신성한 장소는 어디입니까? 신성한 장소가 한 곳에 국한되었다는 그 자체를 능가해 버립니다. 그동안은 특정 자리에서 하나님도 만나고 메시아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리심 산입니까, 예루살렘 입니까?”라고 특정 장소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아, 우리가 생각하는 장소가 그 장소가 아니구나.”를 알게 된 거예요.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날 때 우물에서 만났어요. 자기는 야곱의 우물에 물 길러 왔어요. “나는 여기에 정기적으로 옵니다.” 왜냐? 야곱이 판 우물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 사마리아 여인은 결국 space 공간에 매인 체 사는 거예요. 심지어 물 떠는 것도 야곱의 우물로 왔단 말이지요.
그 우물 없으면 못 살아요. 사나 죽으나 사마리아 여인은 이 땅의 사람이에요. 땅 없으면 죽어요. 세상의 모든 문명은 물이 흐르는 좋은 땅에서 발전했습니다. 사람은 땅이 있어야 삽니다.
물리학자 뉴턴은 지금 있는 공간이나 우주 밖에 있는 공간이나 동일한 공간이라고 봤어요. 맞는 이야기지요. 이의 걸 사람 없어요. 그리고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있는 시간이나 우주 밖의 시간이나 동일하게 흐른다고 생각했어요. 상식적으로 옳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절대 공간, 절대 시간이라 합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절대 공간, 시간은 있고, 그 다음에 푸팅에 건포도가 있는 것처럼 군데군데 별도 있고 달도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봐라. 성경에는 시간과 공간이 있고 해와 달이 있는 게 아니고 해와 달을 만들 때 부대효과로 나온 것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이런 아이디어를 요구한다면 우리를 못살게 구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수학 시험 칠 때는 왜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70% 풀었는데 시계를 보면 5분밖에 안 남았어요. 정말 시간이 빨리 흘러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은 왜 그렇게 안 가는지?
우리는 가짜 인간이면서 스스로 신으로 착각하고 나의 절대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우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언제 오십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나라가 이 때니이까?”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나의 시간과 공간 개념에 하나님도 동조해 주셔야 당신은 하나님답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 답변은 뭡니까? “그것은 네가 알 바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종말과 부활과 재림이 종합선물로 함께 담겨서 오는 거예요. 믿음 속에 들어가면 이미 그 안에 강림, 부활, 승천 다 들어 있어요.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인자가 올 때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은 해와 같이 빛나고 악인들은 풀무 불에 던진다고 할 때, 사람들은 그 해석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뭔가 하면, 주께서 오실 때니까 아직 그 때는 오지 않았고, 주께서 오시면 그처럼 두 분류로 나눠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비유를 잘 못 해석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신 것은 ‘내가 오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고 ‘현재 이렇게 이야기하는 내가 인자이며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떤 일을 일으키시는지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확인해서 주님을 믿을 사람은 없고, 지금 우리 앞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마지막 때 천국과 지옥을 나눌 분임을 믿으면 기다림 자체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그 일하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뭘 기다립니까. 아들이 아버지께 “아버지는 언제부터 내 아버지였습니까?” 이런 소리 한다는 자체가 아버지를 내 아버지인지 확인하겠다는 말이잖아요. 이건 아버지께 뺨 맞아야 돼요.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어요. “영원히 너와 함께 있었다. 어제도 아버지, 오늘도 아버지다.” 그런데 “아버지 노릇을 해야 아버지지” 이렇게 나오는 것은 아들인 자신을 절대화 시키는 것입니다.
“예배를 그리심 산에서 드려야 합니까,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합니까?” 이 질문 자체가 건방진 소리입니다. 이걸 알아야 뭣할 건데요? [천지일보에서 보낸 16개의 질문과 답변] 읽어보셨어요? ‘기름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그것 알아서 뭣할 건데.’ 이렇게 답했어요. 기름이 무엇인지 알면 그것으로 구원 받겠다는 속셈이잖아요.
이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인척 하는 것이지 주님 보시기에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냥 짐승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의 우물이라는 특정 지역에 물 길러 왔을 때, 예수님도 그 물을 마셨어요. 그 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게 물을 달라고 한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는 관심이 없고, ‘이 더운 날에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면 좋겠다.’는 말을 하지요. 앞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는 관심 없고 마실 물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그리고 자신이 사는 곳과 우물이 거리가 있으니까 물이 떨어지면 또 물 길러 와야 하고.
물 긷는 일도 내 집에서 우물로 와야 하고, 예배드리는 것도 내가 있는 곳에서 어떤 장소로 가야하고. 이것을 예수님이 뒤집어엎습니다. 주님 말씀이 “네가 물 긷는 것이 힘들지? 내가 너에게 영원히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도록 하면 어떻겠니?”라고 제안합니다. 여인 대답이 “그렇게 되면 좋지요.”라고 했어요.
그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께서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니다.”라고 했을 때, 이 여인이 성령을 받아서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내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못하고 나를 계속 유지하면서, 물 길러서 먹고 살고, 예배드려서 구원도 없어야 한다는 이 생각이 터무니없는 고집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런 나의 아집에서 벗어나도록 ‘나에게 물 좀 달라.’고 하시면서 찾아오셨고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하시면서 성령을 주셨구나.”를 깨달은 겁니다.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야만 구원이 아니고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이 내가 빠져나와야 될 곳임을 알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출애굽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여기도, 저기도 아니고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했지요. “오나니”는 미래지요? 그런데 “곧 이 때라.”고 하면 현재잖아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의 현재는 과거가 누적되어 오늘에 이른 현재로 여겼는데 주님은 이런 나의 현재를 포기하라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 현재에 매여 있으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나의 현재에서 수직적으로 주님의 현재로 이동하면 그것이 ‘지금’ 구원이고,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예배고, 성령 안이고, 진리 안에 있는 거예요. 여자가 무슨 말을 하리요. 남자 다섯과 산 것. 그것은 허물 축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예전에는 그것이 큰 수치였는데 주님 안에 들어오니까 그것이 아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괜히 의롭고, 착하고, 성스럽게 행동하는 그 자체가 점점 구원과 멀어지게 해요. 예수님 만나면 끝입니다. “곧 이 때라.” 그 때가 이번 수련회 주제로 등장합니다. ‘사건’입니다. 인간의 모든 움직임을 규격화 시켜서 이걸 사물화 시킵니다. 사물화 시켜놓고 사건화 시키면 이 사건이 바로 언약과 매치가 됩니다. 왜냐하면 전도서에는 언약이 없고 하나님의 구원이 없기에.
그냥 허무입니다. 허무에서 구원 받으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짓은 짐승만도 못한 짓으로 규명해야 됩니다. 잘났든 못났든 전부 다 허무한 거예요.
성전이라는 특수한 지점이 결국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우리도 그 성전 만들면 되지.’라는 그 인간 자체를 사건화 시킵니다. 사건화 시킬 때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인가 하면 십자가 사건화 시킵니다.
십자가가 사건이 되면 우리는 사건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고 우리를 대신한 분이 십자가 사건을 만들었지요. 그 십자가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덮치게 되면 우리의 하루하루 모든 삶은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면서 그 십자가 사건의 현장 속에 놓인 자가 됩니다. 아침에 빵 먹고, 점심 때 밥 먹고 이 모든 것이 전부 십자가 사건화 되는 겁니다.
먹고 마시는 모든 일이 잠시 기뻐하고 좋아했다가 성령이 임하면 다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누가 이렇게 만듭니까? 사마리아 여인을 물동이 버려두고 “심봤다.”하고 외치게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이 함께 있는 사람은 항상 ‘나’는 응축되고 나는 십자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으로 인생을 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3. 8. 12. 09:5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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