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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끝"성경미가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끝"

이름 : 관리자(IP:203.90.42.222)

2013 여름수련회 (전도서 강해)

주제: “끝”

2013년 여름 수련회 교재 (전도서 강해)

주제 : “끝”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 7:20).”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2-33).”

Ⅰ. 서 론

생물책에 보면 동물 세포의 구조가 그려져 있다. 동그란 모양 가운데는 공 같이 생긴 핵이 자리 잡고 있고 주변에 리보솜, 미토콘드리아, 조면소포체, 활면소포체, 퍼옥시솜, 미세섬유 등등이 이미 녹아버린 팥빙수의 첨가물처럼 자리 잡고 있는 모양새를 보여준다. 전도서에서는 ‘해 아래’의 광경을 이런 식으로 보여준다.

자체적으로 각 요소는 서로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죄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고 멸망이라는 것도 발생되지 않는다. 그저 돌고 또 돌고, 변하고 또 변하는 현상을 보여줄 뿐이다. 자체적으로 지혜를 구축하고자 시도해보지만 본인 자체도 어지럽게 자연과 더불어 같이 변하는 입장에서 고정적이지 못하기에 실패하고 만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모호성이 곧 ‘해 아래’서의 지혜라는 것이다.

이 돌고 도는 가운데서 유일하게 기준처럼 거론되는 것이 곧 ‘해’다. 그래서 ‘해 아래’ 모든 가치는 한 덩어리로 녹아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두 개의 상반된 가치로 분류할 수 있는 기준점 세우기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것을 ‘헛되다’로 표현한다. 하지만 애초에 ‘헛되지 않은 것’을 찾고자 하는 그 지혜자의 시도 자체가 허망한 기대가 아니었을까? 즉 지혜자는 ‘해 아래’ 세상에서 변화되지 않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여겼는가?

그것은 지혜나 진리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이 허망한 세계에서 탈출될 만한 지식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스스로 지혜를 알아서 그 지혜가 자신으로 하여금 허망한 세계에서 벗어나게 해주리라고 여겼다면 이것은 이 세상 자체가 조성해낸 지혜가 용납해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해 아래’서 동일한 운명을 간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만큼은 달라야 된다는 의식 자체를 수정해야 하고 교정해야 한다. 단지 확실한 것은 ‘해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늘 반복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마저 이 반복적인 속성으로 진행된다. 과거에 이 세상을 살던 사람이나 미래에 이 세상에서 살게 될 사람이나 ‘해 아래’라는 동일한 조건 속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심판도 반복적으로 적용될 뿐이다. 이래야만 하는 이유는, 인간이란 이러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죽지 아니하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확실한 지혜를 얻고자 하면서도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기에 참으로 ‘해 아래’ 있으면서 ‘해 아래 됨’을 제대로 말해주는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다.

Ⅱ. 본 론

1. ‘해 아래의 지혜’와 ‘언약’의 비교

전도서는 곧 예수님의 삶을 보여준다. 진정한 지혜는 예수님에게만 최종적으로 계시된다. 예수님 오시기 전, 이스라엘 내부에는 앞서 예수님의 삶을 보여주는 지혜가 제공되었다. ‘해 아래’로 한정되어서 실험되어지는 모든 사례들은 ‘해 아래’에서 시도되기에 반드시 구원이 성사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게 된다.

이는 ‘해 밖에’ 무엇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에게 제공되어졌는가를 보여주는 배경 역할을 하게 된다. 전도서에 들어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언약을 남기셨다. 그 언약을 타고 주입되는 것은 죄와 의, 멸망과 구원이다. 이런 것들은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지혜로서는 구성될 수 없는 낯선 실재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몸으로 느끼는 ‘해 아래’에서의 지혜와 ‘낯선 지혜’의 만남이 성사되는 그 틈새에 끼어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외면하고 버림’이 결국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쉽게 산다는 것, 편하게 산다는 것, 생을 그저 휘파람 불면서 세월 따라 신나게 하루하루 소비하며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담고 있는 어떤 취지를 말해주는 것인가?

(1) 율법의 투입으로 야기되는 지혜와의 충돌

율법의 의미가 인간과의 접촉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어떤 식으로 표출되느냐 하는 것은 민수기가 적절하다. 일종의 ‘율법의 지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민수기 15:27-36에 보면, “만일 한 사람이 그릇 범죄하거든 일 년 된 암염소로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 그릇 범죄한 사람이 그릇하여 여호와 앞에 얻은 죄를 위하여 속죄하여 그 죄를 속할지니 그리하면 사함을 얻으리라 이스라엘 자손 중 본토 소생이든지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든지 무릇 그릇 범죄한 자에게 대한 법이 동일하거니와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쳐지리라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고 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끊어져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기존의 구성된 자리에서 탈락해서 다른 영역으로 이전해야 하는 변동사항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영역은 ‘하나님 백성’ 곧 ‘언약의 백성’의 자리가 되고, 이전되어야 될 영역은 ‘비(非)-언약의 자리’가 된다. 즉 이 율법(=모세언약)이 주어지는 현장에서는 지속적으로 이런 분류작업이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전도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5:12).” 이는 곧 ‘해 아래’서 필히 제공되는 지혜의 축복이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벌목한 자도 잠을 달게 잘 수 있을까? 아니면 안식법 위반으로 내일 해가 뜨면 처참하게 진 밖으로 끌려 나가서 이스라엘의 축복에서 끊어질 것을 생각하며 긴긴 밤을 불안과 초조 속에서 지새게 될 것인가? 벌목하는 노동자에게 이 ‘해 아래’가 누릴 축복이 결국 하나님의 냉엄한 처벌로 이어지는 것이 전부란 말인가? 이렇게 되면 지혜와 율법이 충돌되는 셈이다. 이러한 충돌 지점에 지혜는 인간의 형편을 주목하고 있다.

(2)지혜의 등장

전도서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사실은 바로 솔로몬이 엘로힘의 입장에서 인간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게 볼 때에 인간 세계는 자기 한계뿐 아니라 무의미성과 무목적성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다. 인간에게 새로움에 대한 창조력이 상실되었다고 했을 때 이는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엘로힘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 못하는 세대는 새로움이 상실된 세대이며 허무한 세대라는 것이 솔로몬의 생각이다(1:1-11).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누리면서도(3:13) 결국은 허무한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이 심각한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그것이 인간들이 경외라는 측면에서 실패했다는 쪽으로 해답을 내릴 수 있다(3:14/12:1).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5:19) 폐단화 시키게(6:1) 된 것을 회복하는 데는 역시 지혜밖에 없다(7:4-12). 그런데 엘로힘 하나님의 세계에서 볼 때 지혜는 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과 허무를 발견하는 것이다(8:17). 따라서 엘로힘 하나님 밑에서는 자신의 한계와 허무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엘로힘을 바로 알고 있는 자 즉 지혜자의 특징이다. 심판 받아야 마땅한 자신에 대한 발견이 바로 지혜이다(12:13-14).

2. 구성

(1)내용 구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1:1-4:3) : 전도자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열거되어 있다.

둘째 (4:4-9:16) : 지혜로운 자가 경험한 사실이 열거되어 있다.

셋째 (9:17-12:14) : 모든 인생들을 위한 충고가 기록되어 있다.

(2)주제별 구성

첫째 (1:1-18) : 창조의 순환과 허무

둘째 (6:10-12) : 사람의 한계

셋째 (11:7-12:14) : 즐거움과 종말

세상은 어떤 내용을 품고 변화하고 있는데, 지혜의 세 가지 내용을 내뿜게 된다. 인생이 이 세상 변화에 휩쓸리게 되면 허무와 즐거움이 교차되면서 점차 종말 쪽으로 밀리게 되어 있다. 여기서 인간의 지혜 정립에 혼선을 낳는데 그것은 인간들의 행위에 대비해서 결과가 터무니없이 예상 밖이다. “구덩이를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지고, 담을 허무는 자는 뱀에게 물린다. 돌을 다듬는 자는 다치고, 나무 쪼개는 자는 위험하다. 주술을 거는 자가 뱀에게 물리면 그 주술마저 소용없다(10:8-11).”

이렇게 되면 변화 중인 인간이 측정하는 기준은 쓸모없게 된다. “굽은 것은 펼 수가 없고 없는 것은 셀 수가 없다(1:15).” 또한 그 끌림의 과정에서 고통이 따른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1:18).”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한계를 느끼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마저 한계에 도달되게 한다. 이 와중에 어리석은 자와 의인이 분류가 되는데 “그의 양 눈은 얼굴에 달려 있으나 어리석은 자는 어둠 속을 걷는다(2:14).” 하지만 그 분류조차 한계의 신비, 죽음 속에서는 어떤 식으로 판정 날 지 미지에 속한다. “살아 있는 개, 그것은 죽은 사자보다 낫다(9:4).”

이처럼 지혜(=하나님의 일)는 인간의 이성적 장악력을 벗어난다. “바람을 살피는 사람은 씨 뿌리지 못하고 구름을 관찰하는 사람은 추수하지 못한다(11:4).” 그러면서도 인생은 지혜를 모르는 대가를 평생을 살면서 치르게 된다. “게으름 때문에 그 석가래가 내려앉고 늘어진 두 손 때문에 그 집에 물리 샌다(10:18).” 자연은 이미 지혜를 알고 있다. “하늘의 새가 그 소리를 옮기고 날 짐승이 말을 전한다(10:20).”

3. 복음적 내용

(1)감추어진 지혜

역사란 양적으로 질을 규정하는 입장을 보인다. 재물이나 권세로써 성공 여부를 가름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으로는 세상 변화를 다 읽어낼 수가 없다. 이것은 진실도 모르면서 인생을 마감하는 식이 된다. 곧 인간은 평생 오해 속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부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들이 움켜잡은 그것으로 인해 거기에 관련된 진실과 의미가 삭제되어 버린다. 이것이 전도서에서 말하는 ‘헛됨’이다.

인간은 대안을 꾸려나갈 수 없는 재료들로부터 배격 당한다. 의미를 가진 그것으로 인하여 의미가 상실되는 현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역사 속에서는 그 어떤 새로운 창조나 질이 나올 수 없다. 꽉 막혀 있는 세상에서 죄는 감추어지고 죄의 열매와 결과만이 난무한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붕괴하지 아니하면 진정 죄조차도 모르는 처지다. 그래서 신을 찾다가 스스로 딜레마에 빠지는 그런 구조 속에서 인간은 일생을 보내게 된다. 결국은 자체적으로 붕괴를 맞이해야 하는 존재가 자연을 통해서 의미를 발견하겠다는 것은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다.

신을 미워하다가 지쳐버리지 아니하면 진정 지혜 있는 자가 아니다. 폐쇄를 혹독하게 경험해야 한다. 처음부터 죄 속에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죄와 지혜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비-지혜적이다. 인간 세상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똑같이 돌아가고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난관에 직면하게 되어 있다. 망해가는 입장에서 해결책을 강구할 수가 없다.

안다고 하는 순간, 되풀이해서 무지의 상태로 전락된다. 그것은 본인이 본인을 괴롭히는 성질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이다”고 확실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근거는 끝까지 마련되지 못한다. 흘러가고 분해되는 대자연의 이치에 그저 녹아있으면서도 인간은 거기에 순응 못할 속성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죄의 결과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하늘의 법이 투입되어서 이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절실해 보인다. 부분으로만, 흔적으로만, 조각난 파편만 부여잡고 진리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가 다 부질없는 것처럼 확실하게 규명해진 실체를 고대하게 된다.

(2)풀리는 비밀

a. 인간은 실험대상

민수기 5장과 6장을 살펴보면 인간은 대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실험의 대상자가 된다. 민수기 5장에서는 행복을 얻기 위한 결혼에는 조건이 주어지는데 그 조건이 깨어지면 혼인관계에서 저주가 발생한다.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으로 인해 저주를 유발하는 사이가 혼인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전도서 9:9에서는 결혼이라는 것이 마치 그 자체로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는 것 같이 이해될 수 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즉 허무하고 헛된 인생에 대한 보상책으로 받은 축복이 곧 아내와 더불어 즐겁게 사는 것이다. 이는 혼인관계 속에 새삼 저주가 피어나지 않고 이미 저주가 종결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민수기 6장에서는 포도와 관련된 나실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포도는 약속의 땅의 산물로 이것과 관련되어 꾸며지는 나실인의 존재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기 위해 바쳐지는 실험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실인 제도에서 메시아와 이어지는 단서가 엿보인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9).”

이처럼 ‘언약 아래’에서는 상대자가 있다. 하지만 ‘해 아래’에서는 따로 등장해야 하는 상대자가 없고 지시하거나 지시받는 자도 없다. 민수기 13, 1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직선상의 노선을 제시하시고 그 노선 위를 이스라엘로 하여금 걷게 하셨는데 결국 그 노선이 막히게 했을 때, 그들은 그들을 막는 가나안 민족의 느낌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3).”

이 본문에서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는 대목이 나온다. 타인의 생각이 자기 생각과 동일할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그래서 꽉 막혀버린 난관에서 인간들은 절망 이외에 한 게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낯선 끝 지점’을 주목케 한다.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민 14:44).” 이처럼 ‘해 아래’에서 ‘언약의 세계로’의 진입은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b. 지혜가 주선해주는 만남의 성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허무가 인간을 몰아넣으면 그 절정은 죽음이며 깜깜한 날이다(11:8). 허무에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세우는 힘이 나온다. 죽음이 깜깜한 날이다. ‘해 아래’ 세상의 결말이다. 따라서 인간이 피할 길 없으니 그 날이 오기 전에 즐겨라. 어차피 허무는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로써 ‘해 아래’ 있는 존재로서의 인생을 ‘언약 아래’로 전환시키는 작업은 죽음에 이르러 심판을 통해서 감행된다. 지혜의 완결판이 ‘죽음+심판’이라는 말이다. 이 죽음에 예수님께서 동참하셨는데 그 죽음이 곧 참 지혜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역사를 되돌릴 수 없는 이유는 그 안에서 실행되는 분류작업 때문이다. 역사는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갈 사람을 선별하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여기에 투입된 낯선 여분의 능력을, 이미 분류작업에 의해 조성된 입장에서는 자기 존재 이전의 상황으로 찾아들어갈 수가 없다. 마치 자식이 태어나기 이전의 부모를 찾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아는 분류의 결과물이지 원인선상에 가담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또 다른 종류의 바람이며 이 바람의 일부로 와서 살다가 사라진다.

Ⅲ 결 론

전도서의 주제는 주체의 권력화도 아니요 윤리의 위기성을 다루는 것도 아니다. 뭔가 지킬만한 것이 없음을 주목하라는 말이다. 인간은 짜여진 대로 산다. 한정된 능력과 인식으로 공장같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낱 기계처럼 움직인다. 지금 이런 식대로 살도록, 더 이상 벗어날 수도 없고 뛰어넘을 수 없도록 제한을 가하신 분의 면전에서 산다. 달리 살 수 없기에 이대로 살게 되었다. 이 정해진 연극무대 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여호와 하나님(언약의 하나님)의 계시에서는 거룩 안에서 인간은 필히 죄로 인해 죽게 되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가까이 나아가는 자 곧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민 17:12-13).”

하나님의 법의 주입은 죽음을 유발해서 온통 죽음의 환경 안에서만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전도서에서는 인간들이 나름대로 몸부림치다가 어느 날 죽음이 찾아든다. 청년에서 노화를 거쳐 죽음에 도달되는 인생의 여정은 정해진 코스며 이는 지혜를 거쳐 언약으로 완성되는 창조 작업이다(12:1-7). 잠시 얼굴 비취다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자들이 보여주는 것은 곧 ‘끝’이다. 세상의 모든 변화의 바탕에는 끝이 깔려 있다는 것, 그것이 지혜다.

관리자(IP:203.♡.42.222)

13-08-02 22:08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말씀 앞에 채우게 하시고 말씀이 우리를 보느냐 아니면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차이를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저희들이 이 말씀을 지배하지 말고 말씀이 우리를 영원토록 다스릴 수 있도록 이 시간 성령께서 줄곧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전도서가 구약에 있습니다. 구약에 있다는 말은 전도서마저도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에 전도서와 예수그리스도 사이, 그걸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금방 이어지질 못합니다. 전도서가 예수님과 이어지려면 이 전도서가 누구에게 이야기했는가를 알아야 되겠지요.

구약성경이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고 여기 신약성경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늘에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구약성경을 미리 던져주고 자기한테 회수하는 식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위에 실이 있다면 실을 지면에 닿아놓고 그 실을 잡아당기면 신약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겠지요. 여기 구약 중에 우리가 지금 하고자하는 전도서가 포함돼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서를 미리 던져놓고 회수하면서 어디서 만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지점이 있어요. 각별한 지점인데 이것을 place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은 space와 다릅니다. 특별한 장소, 특정한 역사적인 장소가 골고다 언덕,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스라엘이란 장소가 나중에 땅이 사라지게 되면 사건으로 바뀝니다. 장소로 바뀔 때보다 사건으로 바뀌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장소가 고정돼있으면 우리가 예수님 구원받으려면 비행기 타고 예루살렘에 가야 돼요. 먼 데까지 가야 됩니다.

그런데 사건화 되면 장소에서 사건으로 전이되는 힘이 있어요. 그 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힘이기 때문에 이 사건이 반복되게 되면 우리가 구태여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성지순례라는 것이 신약에는 성립이 되질 않습니다. 성지순례란 어느 장소를 찾아가잖아요. 성지순례라고 해봐야 게스트하우스나 올레길이나 장사되지 성지순례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자리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지면, 만약에 성지순례를 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감동을 받게 돼요. 감동을 받는 대신 받은 감동을 포기를 못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5년 전에 성지순례를 갔다 왔다. 그리고 난 뒤에 5년 뒤에 그 기억을 쥐고 있으니까 그것을 포기 못하지요. 그런데 진짜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건으로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돼요. 오늘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라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지요.

류현진은 공 던지고 추신수는 치는데 류현진이 공 던지면서 “주여, 죽여주옵소서.” 이러면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라니까요. 세상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 없지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그런 장소와 시간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니까 이것은 그 자체가 사건화 되질 않습니다. 사건화 되지 않으면 규격화돼요. 나 좋으라고 규격화돼요. 이러면 점점 더 자기 부인이 곤란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야 나 있는 곳에 너희가 있다고 했는데 전혀 이것이 점점 더 장애가 되고 방해가 돼버리죠.

그래서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키고 그 십자가 사건을 반복할 수 있게 하는데 그 반복은 우리의 몸, 우리 자아를 상대하지 않고 우리의 육신을 상대해서 여기에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우리는 자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쉽게 말해서 인간이 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육신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란 우리가 붙인 것이고 사실은 성경에서는 육신만 있을 뿐이에요. 육신 외에 다른 건 없습니다.

왜 우리가 인간이 아니고 육신이 돼야 하느냐 하면,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육신을 정하러 왔다고 돼있거든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룰 때 육신으로 다루는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자기 자신을 저도 인간이라고 품위, 존엄성, 이런 걸 들이대니까 모든 성경을 다 이루었다는 게 튕겨나갑니다. 우리한테는 적용이 되질 않으니까 불행이에요. 딱 깨놓고 말해서 인간의 품위나 품격이라는 것은 신앙 생활한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돈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돈이 없을 때 품위도 팍 떨어져요. 젊은 사람들은 앞으로 경험해봐야 돼. 돈 없으면 품위 떨어지고 돈 있으면 품위 생기고 그런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육신으로 다룰 때는 인간들이 이러한 수작에 주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저를 비롯해서 여러분들은 참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구약을 보고 있습니다. 구약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데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가 뭐냐? 전도서와 예수님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걸 풀면 되는 거죠. 푸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전도서에 가도록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마중을 나오죠.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고 이 지상에 성자 되신 하나님께서 예수란 이름으로 오게 돼요. 만나는 지점에서 구약과 신약이 만나는데 여기서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속에는 구약 전체가 다 포함돼있고 동시에 전도서 내용도 포함돼있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는 해석으로 전도서를 풀어내고 해석하면 이것은 옳은 거예요. 그런데 이렇다고 문제가 풀리는 게 아니고 다 이루었다와 전도서에의 의미가 어떤 의미냐 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육신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다 이룬 거예요. 우리를 육신으로 다뤄줘야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그 다루심과 일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일 때는 자아가 생생히 살아있는데 인간이 육신이 될 때는 죽기 위해서 육신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육신으로 만들어놨는데 우리는 이 육신으로 나도 인간이라고 나오니까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인생의 사상, 인생의 의식과 사고방식과 하나님의 의식과 다르니까 전도서 9장 3절에 보면, 사는 것이 미친 짓이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 결혼은 미친 짓이라 하는데 전도서는 그것보다 더 나갑니다. 결혼을 비롯해서 피아노 과외하는 것, 밥 먹고, 잠자는 것, 모든 것이 미친 짓이에요.

여기에 대해서 만약에 우리가 반항을 하든지 발악을 하게 되면 주님께서 “어, 인간 행세하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나는 너를 육신으로 보는데 입 있다고 인간으로 행세하는 거야?” 인간으로 행세하는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육신으로 바꾸는 그것이 다 이루었다 영,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그겁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육신으로 보고자하고 우리는 아직도 가치 있고 의미 있고 참하고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는 스스로 보기에도 괜찮은 하나의 인간으로 보려고 하고. 이런 충돌, 갈등 그걸 감사하게도 전도서를 맞이하면서 인간은 사는 것도 미친 짓이다. 네가 공부를 많이 했어? 다 헛소리야. 헛된 거야. 헛되지 않는 게 무엇입니까? 물으면, 헛되지 않은 것을 소망하는 게 헛된 거야.

그래서 제가 이것을 어떻게 정리하느냐 하면, 정리하는 방법을 공개하겠습니다. 처음에 전도서 1장에 보면,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다가 다섯 번 나오지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나오는데 ‘헛되다’를 같은 말로 허무니까 ‘허무가 있다’고 엿가락처럼 늘여보겠습니다. 그냥 헛되다고 하면 말이 안 되니까. 왜 늘였느냐? 헛됨이 있다고 늘임으로써 여기 ‘있다’에 반대가 성립되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아이디어를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다 이루었다는 사건이 예수님 혼자서 레고랜드 조립해서 다 이루었구나. 또는 로봇 태권브이 조립해서 다 이루었다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에 가해하고 예수님을 죽이고 핍박하는 활발한 사탄의 세력들이 작용을 하고 도와줘서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죽고 난 뒤에 부활하고 난 뒤에 다 이루었다가 아니고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죽어가고 있으면서. 우리 인간들 눈에는 최후에 자존심 세우는 것이고 발악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에 돌아 맞아 죽으면서 예수님 보인다. 어쩌라고? 진작 보지. 죽을 때 보느냐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 사건을 다 이루었다 할 때는 반드시 대립되는 요소를 배치해줘야 돼요.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이라면 상대방은 반 예수님, 반 복음이 되겠지요. 이 반 복음 세력이 예수님에 대해서 최후를 그런 식으로 배웅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는 것으로 되지 않고 십자가 지는데 있어서 부정적으로 협조한 그러한 반대세력을 노출시키는 데도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어느 쪽이냐 하면, 그 당시 인간들이 예수님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쪽에 인간들이 있습니다.

열두 제자의 대표자격인 베드로가 그렇게 물 위를 걷고, 자기 장모도 낫고, 오병이어도 맛보고 했지만 결국 예수님께서 체포될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예수님에 대해서 경호인도 아니면서 근접해서 말고의 귀를 베고, 온갖 멘트를 날리면서 제가 목숨을 다하여 주를 따르겠다고 아무리 언급을 해도 여전히 베드로는 어느 위치에 있느냐 하면, 예수를 반대하는 이쪽이 납득이 되고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답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다워야 되는데 베드로의 순수한 인간성, 손해 보면 언제든지 배반할 수 있는 너무나 인간다운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놓치지 않고 로마서 8장에서는 이걸 육신이라고 건지신단 말이죠. “아이고. 쓸모 있다. 이것 봐 육신이잖아.”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주님께서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육신으로 보는데 하나도 버릴 게 없이 다 유용하게 쓰시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말씀을 다 이루었다 할 때 예수님과 그 반 예수, 대비되는 요소가 있는 것처럼 헛되다고 그냥 할 것이 아니고 허무가 있다와 그 다음에 뭐가 있다. 그러니까 허무가 있다고 하고 반대편은 뭐, 뭐가 있다를 대비시킬 때 이 대비를 두고 끌고 가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 이 말이죠. 도저히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아요. 전도서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끌고 와서 십자가에 대립되는 세력으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 사건을 전도서에 미리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대립되는 구조를 이 안에서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허무가 있다는 말은, 여기 ‘있다’를 ‘없다’로 바뀌는 겁니다. 무엇이 없고, 무엇이 없고, 전도서를 통해서 다 찾아내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허무가 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없다고 하는데 여기 없다에 해당되는 이런 것들이 우리는 철석같이 없다가 아니고 있다고 간주하면서 인생들이 살아오기 때문에 그 인간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요인이 우리 안에 내장돼있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없음을 뽑아냈는데 몇 가지라고 정해진 건 아니고 제 나름대로 뽑았는데 첫째는 신의 지시가 없어요. 전도서에는 누가 신의 뜻에 따라 했다는 말이 하나도 없어요. 신의 지시가 없는 거예요. 신의 뜻에 따라 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전도서 입장에서는 너희들은 하고 싶은 대로 했지 절대로 하나님 시켜서 했다는 그런 비겁한 변명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뭐든지 해놓고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순교도, 전교도. 그걸 신의 뜻으로 헌금한다는 그런 되도 않은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게 전도서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시킨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이 시켜서 했다는 것을 우리가 유지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살해하는 동기로 이어집니다. 신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의 구세주를 죽이는 강력한 동기가 되는 거예요. 그럼 그 당시에 신의 지시를 따라서 성전 만들고, 이스라엘을 운영했던 유명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종교인들이지요. 종교란 인간의 사상의 극점입니다. 그 극점을 장악하게 되면 모든 걸 장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간질병 가진 사람 주께서 귀신 쫓아내도 마태, 마가, 누가복음 보세요. 간질병 걸린 사람을 쫓아낼 때 귀신 쫓아낸다고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진짜 오야봉, 진짜 귀신의 대장은 간질병 걸린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진짜 잔챙이들은 게거품 물고 나가지만 진짜 악마에 의해서 심하게 장악된 사람들은 아주 냉정하게 예수님을 재판으로 잘 처리하고 일을 깔끔하게 정리한 거예요. 한 사람 죽여서 나라가 살자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게거품 물고 귀신 나가지 않았어요. 그냥 그들은 할 도리를 했을 뿐이지요. 나중에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이 성령 받아서 십자가 끄집어내니까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어찌할꼬?” 이렇게 나오죠.

결국 이 말은 게거품 물고 병 낫고 해도 구원받은 뜻은 아니란 말이죠. 구원은 근원적인 것을 경과해야 되지 중심을 관통해야 되지 그냥 폼만 낸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첫 번째는 신의 지시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만남이 없어요. 만남이 없고 발생만 있는데 만남이 없다는 말은, 인간 대 인간의 상호교류나 서로에 대한 관심사, 돌봄 이게 전도서에는 일체 없어요. 현대인한테는 전도서가 멋집니다. 자기밖에 모르니까. 세 번째는 눈물이 없어요. “운다고 별 일 있나. 어디서 질질 짜고 그래.” 눈물이나 연민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아주 차갑고 냉정하고 냉혹해요. 울어? 우는 것 자체도 헛되고, 우는 걸 참는 것도 헛된 거고.

네 번째는 약속이나 보상이 없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미래가 없다. 희망이 없다. 전도서에서는 일체 희망이나 미래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살다 죽어. 좋은 나라 기대하지 마. 너는 좋은 나라 기대할 권리가 없어. 결국 그 동안 살아온 것이 미친 짓이라는 걸 깨닫게 하는 거죠. 얘 공부 못한다고 쥐어박았지만 쥐어박는 나나 너나 다 소용없는 짓이다.

다섯 번째가 놀라운 이야기인데 신앙이 없어요. “하나님 믿습니다.”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아요. “그냥 살아.” “주여,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괜히 오버하지 말고 그냥 살아. 그 말에 내가 안 속아 넘어가.” “주여,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전도서는 육신의 문제를 영으로 풀지 말고 육신의 문제는 육신으로 풀어. 뭐, 괴로워? 그러면 술 먹고 춤 춰. 그게 너한테 분복이고 축복이야. 이렇게 이야기해요.

표정들을 보니까 전도서를 한 번 읽어보지 않고 온 모습들이에요. 제발 신앙 생활하지 말라는 거예요. 신앙 생활한다고 사람 인격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점수 더 주는 것도 아니에요. 괜히 지가 켕기는 게 있어서 신앙생활하면 저주 적게 받고 벌 안 받을 줄 알고 깝죽대고 하는데 신앙 생활하나 안 하나 인간은 똑같으니까 신앙생활 접어라 이 말이에요. 신앙 생활하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란 말이죠. 덧붙여서 제발 성화 생활하지 마라. 이게 전도서입니다. 성경이야기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에요. 신앙 생활하는 건? 신앙생활 안 하면? 신앙생활 안 하는 게 미친 짓이라니까.

그 다음에 여섯 번째 기적이 없습니다. 전도서를 읽어보면 평범해도 너무 평범해요. 전도서에는 기적이 없는데 기적을 은근히 노린다는 것은 마음이 그만큼 음흉하다는 뜻이고 그것은 그만큼 지혜를 모른다는 뜻이고 어리석은 자고 악인으로 규정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적을 노린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데 이것은 처음에 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인간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볼 때는 육신으로 보기 때문에 자꾸 인간답게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할 줄 아는데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육신으로 돼야 될 목적이기 때문에 육신으로 끝나버리지 그 중간에 인간이란 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치장, 화장을 한 거예요.

제가 하나 예를 들어볼게요. 인간은 육신이 먼저고 자아는 두 번째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을 나라고 지칭하는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기억 못하지요. 언제부터 나를 나라고 인정했는지 호칭했는지 기억 안 나지요. 우리는 내가 언제 나라고 했을까 하는 그 기억조차도 기억 못해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언제 내가 지금 나의 몸이 나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걸 놓치고 까맣게 망각할 그때가 온다는 거예요. 벌써 온 사람 있어요. 어떤 사람은 3급 받고, 어떤 사람은 2급 받은 사람 있는데. 인간은 육신이 먼저지 자아는 나중입니다. 육신이 인간을 장악하지 내가 인간을 조정하고 관리할 그럴 입장이 못 돼요. 말 뒤에 마차를 놓아야지 마차 위에 말을 두면 갑니까?

육신이 먼저고 그 뒤에 인간이 죄를 지어서 자기 품위 유지한다고 갖다 붙인 것이 자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육신으로 다루는데 우리는 뒤에 엉뚱하게 붙인, 사실은 마귀가 붙인 것이지만, 자아라는 걸 붙여놓고 그 다음부터 육신을 자아의 자존심과 자아의 영광과 명예와 이름을 위해서 주님의 육신을 활용하려고 애쓰다보니까 현실감이 떨어져요. 그러니까 누가 힘든가 하면, 본인이 힘들어요. 그런데 인간은 내 육신에서 내 자아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하겠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전부 다 마차 위에 말을 놓고, “이 몸은 내 거야.” 하니까 “그게 맞나?” 하고 서로 다 틀린 걸 모르고 같이 사니까 서로 맞다고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거기서 인간들이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본격적으로 중요한 대목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인간들이 지혜를 끄집어내요. 인간들끼리 자기 생활에 필요한 지혜를 끄집어내다보니까 진짜 지혜는 헐~ 뭐야 이거. 인간들 저희들끼리 이것이 인간답다. 이것이 인간의 고상함이다. 인간의 철학이다. 자기들끼리 어떻게 해놓고는 그걸 하나님에게 인정해달라고 결재를 해달라고 내미니 하나님께서 그걸 인정하시겠습니까? 거부해버리죠. 거부한 모습이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을 판단해서 죽이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하다고 그렇게 판정을 내리니까 뒤에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리라. 라는 것은 성령의 객관적 사역입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 11절.

자기 주제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아무리 지혜를 이야기하고 하나님, 예수님 이야기해도 붙어있는 자아를 자기 힘으로 살려내겠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거든요. 살아있을 때 행복하게 살고 죽어서 천당 가겠다. 이건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누구 생각이에요? 본인 생각이에요. 그 자체가 지혜가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은 뭐랍니까? “에라 인간아. 어디 미친 짓을.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 그런 짓하는 것도 헛된 거예요. 그러니까 전도서를 안 보잖아요.

인간들끼리 하는 지혜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싱크대에 물때가 있으면 식초로 닦아주면 됩니다. 그런 이야기하면 솔깃한 거예요. 제가 적어왔어요. 여자 분들은 어떤 것에 솔깃하냐 하면, 삼겹살 671, 삶은 계란 78, 양념치킨 219, 팥빙수 400~988, 프라이드치킨 268, 삼계탕 1030, 닭볶음탕 201, 순대국 114, 소갈비 찜 124, 자반고등어조림 207, 오징어 대친 것 60, 라면 525, 떡볶이 226, 김밥 484, 비빔냉면 405, 물냉면 445, 순대 235, 쫄면 458, 김치만두 34칼로리입니다.

이게 사는 지혜에요. 이것 하면 여러분 ‘아멘’ 해야 돼요. 우리는 여기에 매여 살아요. 이런 게 필요한 거예요. 이런 게 중요하지 무슨 헛되고, 헛되다는 소리를 왜 듣습니까? 우리 인간의 품격에 도움이 안 되는데. [최초 계약 7년 만기 후 5년마다 갱신되는 상품으로 갱신을 통해 최대 86세까지 보장 가능하며 갱신 계약의 보험료는 갱신일 현재 피보험자의 나이 및 보험료율에 의해서 인상 될 수 있습니다. ○○○ 무배당 OK 실버보험] 이게 지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성경이 왜 필요합니까? 이런 게 필요하지.

기적은 없습니다. 뭐가 기적이냐 하면, 내가 기적을 원하고 기적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헛된 것을 알 때 그게 기적입니다. 참 헛된 인간이 안 헛되려고 몸부림치는 꼴을 봐라. 그걸 어떻게 발견하나? 성령이 아니고서야 발견할 재주가 없잖아요. OK 실버보험, ○○○보험이나 쳐다보고 있고.

그 다음에 전도서에는 진리라는 게 없습니다. 진리가 없다는 말은, 전도서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인간이 신에게 묻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에게 질문할 권한이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아 어디 있느냐고 묻지요. 성경에 모든 시작은 질문자가 따로 있고 우리가 질문하면 안 돼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신에게 질문한 건 뭐냐? 그걸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왜 우상숭배가 되느냐 하면, 사람이 누구한테 질문할 때는 상대방을 위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고 질문자 본인을 위하여 질문하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우상숭배 앞에 반드시 붙는 게 있어요. 항상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위해서 신과 거래와 협상과 타협에 나서는 것. 이 정도 바치면 복 주겠습니까? 하고 노리는 것, 전부 다 우상숭배에요.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기 때문에 진리가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너는 진리를 알 필요도 없고, 진리냐 아니냐는 내가 정하는 것이지 네가 정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지 정해버리면 우리는 안 진리로 자기를 살려내는 데 요건으로 집어넣는 경향이 있어요.

예수님과 빌라도가 만났을 때 빌라도가 건방지게 예수님한데 질문했어요. 진리가 뭐냐? 예수님은 답변을 안 해줬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진리를 앞에 두고 진리가 뭐냐고 묻는 것은, 진리가 입을 열고 진리를 이야기해줘도 그 사람은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진리를 엉뚱한 데서 찾고 있단 말이죠. 이미 진리가 자기 앞에 있는데 새삼스럽게 진리가 뭐냐고 물으면 그건 답변 못하지요. 자기 아버지가 앞에 있는데 자식이, “아버지, 아버지가 누구십니까?” 이렇게 묻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것은 어떻게 답변을 못하지요.

팔 번은 도덕이 없다. 착하게 살기, 바르게 살기, 이런 게 없습니다. 그냥 네가 사는 자리에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 양태, 그 모습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 모습을 전도서가 너무나 잘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네가 아무리 착하고 바르게 살더라도 그 착함이 결국 자기한테 유리하도록 작용하는 그런 노림수로 착해봐야 그 착함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용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큰 교회에 얘들을 보내는 것은 큰 교회를 이용하는 거예요. 오다가 그 이야기 들었어요. 큰 교회에서 누굴 만나겠는가? 전도서에 만남이 없는데? 만남이 없으니까 이용만 있는 거예요. 어떻게 상대방을 나 유리한 쪽으로 이용할 것인가 그것만 있는 거예요. 친구? 전도서에는 친구가 없어요. 누구 좋으라고 친군데. 그 사람이 친구라고 언급할 때는 비로소 친구가 될 때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친구라는 말을 했을 거예요.

9번이 뭐냐 하면, 이상국가가 없어요. 하나님의 뜻대로 조찬기도회하면서 나라를 이렇게 하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독교국가 될 것이다. 복음적인 국가 될 것이다. 또는 교회를 이렇게 하면 온전하고 이상적인 교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꿈은 전도서에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지상에 어떤 희망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국가라든지 사회라든지 가족이든지 어떻게 보면 하나로 크게 모인 것 같지만, 인간들이 이상국가를 기대하지만 그 이상국가의 주인공은 본인 말고 다른 사람이 되게 되면 그 국가를 탈퇴하게 돼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단체도 마찬가지고. 십자가마을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고. 항상 주도권자 중심에 본인이 끼어든다. 그걸 어려운 말로 본인의 자리를 그런 식으로 확보하는데 만약에 지장이 있다면 탈퇴하게 돼있습니다. 나라가 내 원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민 갈 생각을 항상 갖게 돼있어요. 북한에서 인민들이 만족할 수 없으니까 탈북 했다. 탈북 했다가 남쪽에서 살기 어려우니까 다시 북으로 가고. 평양에서 기자회견하고. 그 사람 또 내려옵니다.

오랜만에 기쁜 소식 전합니다. 열 번째는 뭐가 없느냐 하면, 부러워할 사람이 없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지만 본인한테 물어보세요. 안 크거든요. 아무 부러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저 사람처럼 됐으면 좋겠다. 막상 돼보세요. 역시 내가 살아온 이것이 나한테 맞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전도서에는 신의 지시가 없어요. 두 번째, 만남이 없습니다. 세 번째는 눈물이 없어요. 네 번째는 약속이나 희망이 없어요. 보상도 없고. 다섯 번째는 신앙이 없습니다. 여섯 번째는 기적이 없어요. 일곱 번째는 진리가 없습니다. 여덟 번째는 도덕이 없습니다. 아홉 번째는 이상국가가 없습니다. 열 번째는 부러워할 사람, 모델로 삼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럴 것 같으면 하나님 말씀을 뭐 때문에 믿노? 안 믿지. 그래서 하나님 뜻은 뭐냐? 믿지 마. 지금 전도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서 읽어보지도 않고 지 마음대로 해석해서 하나님께서 보상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을 제발 좀 되도 않는 소리하지 마. 믿지 마. 누가 믿으래. 그래서 신약에 와서 구원받은 사람은 주께서 알아서 골라서 채택해서 천국 보내십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처소를 마련해놓고 통보가 가면 그 사람 처소가 하늘나라에 있고, 통보가 안 오면 맨날 통보 기다리다 지옥 가는 거예요. 그 통보가 뭐냐? 성령님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 갈 때 주님께서 오지 말라고 했어요. 가봤자 네 자리 없다. 내가 가서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그때 널 부를게. 만약 제가 베드로 같으면, 통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통보 없으면 네 자리도 없는 줄 알아라. 이렇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뭔 뜻이냐 하면, 자리가 마련돼 있다. 통보를 해준다. 할 때 제가 만약에 통보가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 그런 질문을 인간이 하나님께 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통지서가 왔다면 통지서 온 사람의 특징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 특징이 뭐냐? 성령 받은 사람인데 그게 “주여, 우리는 기껏해야 나밖에 모르는 육신이었습니다. 나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저 육신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으로 온다는 그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깨달을 때 내가 주님을 이용하고 믿고 할 입장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되기 위해서 우리를 철저하게 이용했는데 이렇게 이용당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성경이 이렇게 무섭고 겁나는 문제입니다. 상당히 우리가 생각하기에 말씀대로 지켜서 영광 돌리고 구원받겠다는 그런 시도는 다 우상숭배에서 나온 본성에서 나온 발상에 불과합니다.

그 다음에 전도서에 없는 것만 있느냐? 있는 것도 있습니다. 반갑지요. 첫 번째, 허무가 있어요. 두 번째, 죽음이 있습니다. 세 번째, 심판이 있습니다. 네 번째, 끝이 있습니다. 계속 들어봐야 우리 좋은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섯 번째, 흔적이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것은 미친 짓인데 그게 중요한 것은 육신의 흔적이기 때문에. 여섯 번째, 차이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 일곱 번째, 육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마지막 여덟 번째, 왕이 있습니다. 전도서 1장 1절만 봅시다. “다윗의아들 예루살렘 왕” 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그냥 궁예나 왕건, 이성계 그런 왕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왕입니다. 각별한 지점, 특별 지점의 왕입니다. 그 왕은 독점해 있습니다. 뭘 독점하느냐 하면, 헛되다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제대로 헛되다고 이야기해주신 그 분의 심정을 반영하는 거예요. 펼쳐 보이는 겁니다. 그 왕이 지혜를 주시고 그 지혜대로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그 지점이 하나님과 인간이 접선이 가능한 연결지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예수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바로 그냥 왕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왕이 외치는 지혜,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전도자, 전도자가 전하는 전도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본격적으로 이 예루살렘의 왕이 있음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든 없음은 반드시 그대로 진행됩니다. 허무하다면 허무한 거예요. 군말하지 맙시다. 다만 우리가 믿을 것은 남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왕 되신 분이 허무하다면 그것은 허무한 거야.”라고 그걸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왕이 주신 지혜를 증거하는 용도로서 우리는 이미 그 안에 편성돼있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한윤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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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14.39.134.60) 13-08-02 19:23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왕인데 무슨 왕이냐? 예루살렘의 왕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그 지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장차오실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지혜를 전도서란 형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이라는 지점을 꼭 고수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시드시라든지 멜버른 안 그러면 LA, 전부 다 보낼 수 있는 문제인데 왜 예루살렘이라고 이렇게 한 지점을 고수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우리 형편을 생각해서 일을 하십니다. 형편이 어떤 형편이냐 하면, 인간이 있으면, 인간은 육신으로 돼있지만 항상 인간은 자기를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절대자로 생각하거든요. 인간은 자기 주변 공간을 확장시킵니다. 이것이 절대공간이 돼요. 그 안에 자기가 들어있으니까. 그렇다면 어떤 지점에 두 개의 물체가 있다고 합시다. A와 B가 있다면 A는 위로 가고, B는 내려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가 가만있는데 이쪽이 움직인다고 보고, 이 사람은 자기는 가만있었는데 이쪽이 움직였다고 보고. 그것은 거리로서는 도대체 서로 보는 입장에 따라서 누가 옳은지 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이걸 확실히 규정지을 수 없어요. 이것이 갈릴레오의 상대성원리에요.

상대성원리에 의해서 자기 입장과 저쪽 입장이 서로 다른 이론이 나오거든요. 이게 나중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로 나오는데 그래서 뉴턴이란 사람은 누구, 누구라 하지 말고 절대공간이라고 너나 말고 따로 정하자. 데카르트가 만든 좌표가 있어요. y=x 중학교에 나오는 수학입니다. 이 지점은 y=4, x=5 이렇게 지정해버리자. 하지만 이것은 지정하되 절대공간 이것은 누구도 손 안 대기.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그래야 뭔가 이야기가 되거든요.

이쪽에 어떤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7과 8 지점에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쪽이 움직이게 되면 당신은 얼마의 거리를 움직였다는 것이 절대공간의 좌표에 의해서 나타나니까. 바로 이런 절대공간, 절대시간에 고정된 이것이 바로 과학의 시작이에요. 과학이 모든 인간이 다 납득이 되는 보편적인 진리로서, 지혜로서 이미 등장하고 말았습니다. 과학을 잘 하게 되면 전쟁에 승리하고 과학을 못 하게 되면 패배하기 때문에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아프리카나 아시아는 유럽한테 국가적으로 큰 재난을 당하고 나라가 식민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절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이것이 인간 쪽에서는 중요한 현실이라고 하는데 모든 것을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에서 과학적으로 이걸 첫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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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506건 중 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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