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대구강의 12] - [피 98] - 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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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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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91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여기에서 두 개의 현실 층이 수직을 이룬다. 하나는 생존을 위해서 수시로 구성하게 되는 현실층이요, 위층은 약속의 완성에 의해서 생겨난 생명이라는 현실층이다.
◈ 서로 체험이 달라요 !!
여기에 "두 개의 현실 층이 수직을 이룬다" 라고 하는 복잡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쉽게 말해서 "나의 체험과 예수님의 체험이 다르다" 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체험과 예수님의 체험이 같지 않다는 것인데, 전혀 같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은 자기 주위에 자기 추억이 둘둘 감고 있는데, 그게 곧 자기 역사인데 말이다. 거기서 아무리 체험을 해보아도, 아무리 "이것은 전혀 새로운 맛이야" 라고 해도, 그것은 자기의 과거 경험을 근거로 해서 나온 체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자신의 체험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체험에다 맞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이해했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의 일방적인 독단적인 주장이냐는 말이다. "니, 예수님과 같이 살아봤어? 안 살아봤으면 말을 하지 마!" 라고 나오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험 속에 갇혀있는데, 그런데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몸으로 체험한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다고 하면, 그 동안 우리 인간들이 안다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일방적인 자기 구라, 즉 거짓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즉 "은혜를 받았는데, 그 느낌이 짜릿하다" 라고 하면, 하지만 그런 것은 다른 종교에도 다 있다는 것이다.
◈ 철학자 - '나의 체험은 나에게 이득이다' !!
철학자들은 인간의 자기 체험을 많이 분석하는데, 그렇게 해보니, 거기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의 체험은 나에게 이득이다" 라는 것이다. 19세기 철학자들은 이렇게 자기 이득으로 이야기하고, 그 이전의 철학자들은 자기에게 유리함으로, 즉 자기에게 불리한 것이 아니라 유리한 것으로 해석을 했다는 것이다.
'벤덤' 이라는 공리주의 철학자는, "인간은 항상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진리라고 한다" 라고 이야기했고, 그리고 옛날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것으로, 즉 자기가 형성한 세계에 유리한 쪽으로 작용한다고 했는데, 그것을 '덕(德)' 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하자면 '행복'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행복을 찾고, 덕을 추구하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체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기 자신이 형성해놓은, 자기가 상상해서 만들어놓은 행복과 축복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게 하려고 하는 종교적인 조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20세기의 서양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와서는, 자기 소득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는, 그러한 분위기에 모두가 같이 말려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득보다는 소득이라는 표현이 더 확실한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문제를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데,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교인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내가 수십 년을 믿은 것이 헛방인가?" 라고 하면서 그 다음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기분이 나빠서 말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골치가 좀 아픈데, 하지만 해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예수님의 체험'을 찾아서 !!
여기서 히브리서 5장을 보면, 지금 예수님의 체험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찾고 있는데 말이다. 5장 7절 말씀을 보자.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것은 누구 체험인고 하니, 분명히 예수님의 체험인데 말이다. 여기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라고 하는데, 이렇게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육체적 경험이 있다는 말이고, 그것이 언약을 완성하는데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새언약 속에 있다는 말은, 자기가 체험한 것을 넘어서서 예수님의 육체가 경험한 것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오든지, 우리가 거기에 스며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논리적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육체는 누구와 관계가 있는가? 숨어있는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데, 물론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이 숨어있는 분이 아닌데, 하지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감추어진, 즉 나타나지 않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시기 때문에, 자신을 구태여 나타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만 예수님을 우회해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다 거짓말이고,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시는데, 예수님의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체험을 통해서 나타나신다는 말이고, 그런데 그 체험에 대해서는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자기 나름대로의 체험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체험으로 건너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수십 년을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험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체험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니도 아기를 낳아보면 다 안다 !!
예를 들어서, 딸들이 친정엄마에게 애를 먹이니 친정엄마가 뭐라고 하는가? "너도 시집을 가서 아기를 낳아보면 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아도 엄마의 체험은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가 다르기에 말이다. 엄마는 모유수유를 통해서 자식을 키웠는데, 그런데 요즘은 다들 맞벌이를 한다고 소젖을 먹이면서 키운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체험이 서로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아이를 요즘처럼 달랑 하나만 낳는 것이 아니라 줄줄이 사탕인데, 그렇게 자꾸 낳으면서 엄마의 사상과 정신에 아이들이 푹 젖게 되는데, 그런데 요즘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달랑 하나 있는 것도 바쁘니까 시댁이나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도 아기를 낳아보면 안다" 라고 하는 말은, 이제는 그게 말이 안 되는 시대라는 것이다.
◈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체험에 동참할 수 있는가?
아무튼 제가 이렇게 문제를 끄집어내었으니 수습을 해야하겠는데, 즉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체험에 동참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그것을 지금부터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바다가 있고 또 해변이 있는데, 이 바다에 흠집이 생기는 경우가 언제인고 하니, 이 바다에 배가 지나가게 되면 그 만큼의 흔적이 남는다는 것이다. 물보라가 치고 말이다. 그런데 그 배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원상회복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육체가 어떤 체험을 했는지, 그것을 아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의 육체로 인해서 바다와 같은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면 되는데, 즉 예수님의 육체가 긁고 지나가면서 이 세상에 남긴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과 동일한 체험 속에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거기에 대한 판정은 무엇인고 하니, 그 뒤를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가, 그 동일한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예수님과 똑같은 흔적을 남기게 되면, 그것은 앞서 가신 예수님과 같은 질서, 같은 세계에 놓여있다고, 즉 동일한 체험 속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든 것이 비유가 되어서 그만 굉장히 복잡해지고 말았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성령 안에서'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예수 안에서' 라고 말이다. 사실 간단한 것이 더 어려운데,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라는 게 말이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거기에 대해서 지금부터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 다시 정리를 해보면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요약해보면, 1번은 "성경에 나와있는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체험에서 나왔다" 라는 것이고, 2번은 "그러면 우리도 그것을 체험하면 되지 않는가?" 라는 것인데, 하지만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의 체험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체험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어떠한고 하니, 어릴 때의 고향에서 알던 이웃집 아저씨나 학교를 다닐 때 자기에게 잘 해주던 선생님이라든지, 항상 그러한 생각에 준해서 현재의 하루하루를 어떤 새로운 사건과 만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건에 대해서 해석을 할 때도 자기 과거추억과 더불어서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 아주머니를 보니 어릴 때 내가 알던 이웃집 아주머니와 닮았다" 라는 말이 툭툭 튀어나온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도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의 바탕이 된 그 경향성에 의해서, 즉 과거라는 추억의 바다에 지금 자기가 배를 타고 가면서 긁어버리면 잊어버렸던 과거에, 그 긁은 흠집에 의해서 마구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한 집사님의 경우에는 군 생활을 했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어떤 일을 만나게 되면 "군에서는 저렇게 하지 않았는데" 라고 하는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교사생활을 했다고 하면, "우리 때 아이들은 저렇게 하지 않았는데" 라고 할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보통 뭐라고 하는가? "내가 시집살이를 할 때는 안 그랬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현상들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시간은 떠나도 우리 자신은 여전히 과거라는 환경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자기의 체험인데, 이러한 자기 자신의 체험이 주님의 체험과 일치된다고 하면, 그것은 억지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 '나'의 체험은 '나'의 소득을 수반해 !!
그런데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러한 '나'의 체험은 고요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무엇을 수반하게 되는고 하니, 그게 바로 '나'의 이득인데, 요즘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나'의 이득정도가 아니라 아예 '나'의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소득이 될 때, 비로소 나에게 유리하고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준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게 남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행복인데, 남의 행복은 별로 좋지 않고 오히려 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행복인데, 아무튼 조금이라도 더 남보다 행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살아가는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라이벌보다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야하고, 조금이라도 더 집안에 우환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라이벌은 우환을 덤탱이로 뒤집어쓰든지 해야하고 말이다. 바로 이러한 이기주의적 행태를 성경에서는 '육' 이라고 하는데, 성경을 보면 사도바울은 이런 단어를 툭툭 던지는데,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라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 목사님, 로마서 설교는 너무 골치 아파요 !!
어제 오후예배를 마치고 김 집사님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서 제 마음이 굉장히 아팠는데, 그게 뭔고 하니까,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설교를 들을 때는 그렇게 신이 났는데, 로마서 설교는 너무나도 골치가 아프다. 왜 이렇게도 어려운가?" 라고 말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편인 이 집사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위로를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여보,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제 로마서 8장을 들어간다" 라고 말이다(ㅋㅋ). 그러면 로마서 8장에 무슨 내용이 있기에 그런 소리를 했는지 지금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활동이 엑기스가 되어서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 들어오게 되는데, 왜냐하면 4복음서는 그 상대가 누구인고 하니, 그게 제한되어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 즉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로 말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고 난 뒤에 예수님의 성령은 온 세상 땅 끝까지 임하게 되는데, 즉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라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말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렇게 되면 그들의 체험 속에 예수님의 체험을 담아내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캡슐에 담듯이 말이다. 그렇게 담아내니 그들을 일괄적으로 표현할 용어가 필요하게 되는데, 그게 곧 '육(育)' 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육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는데, 그렇게 전혀 없으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을 주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성령을 받은 사람은 비록 육이라도 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참 어려운데, 육이라도 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게 되는데, 자기 행복만 추구하고, 자기 가정만 챙기고, 또한 이웃이 잘 되는 것이 배가 아프고, 그렇게 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영으로 취급을 해준다는 것이다. 육인데 말이다.
육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챙긴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영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알아서 산다는 그 육에 대해서, 그 육을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조작해서 만들어낸 육으로 볼 때, 그런 관계를 두고서 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영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중의 한 분인 영을 어떻게 소유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인데, 그러니 성령은 우리가 어떤 어르신처럼 그렇게 모실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성전건축 - '하나님이 보고 싶어요' !!
솔로몬 왕이 성전을 세운 것을 여러분도 잘 알지 싶은데, 그가 성전을 세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을 보고 싶어해서 그렇게 지었다는 것이다. 아주 소박하고, 또한 오늘날 우리의 본성을 어떻게 그렇게 잘 대변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성전을 짓는데 3년이 걸렸는데, 그런데 두로 나라의 히람 왕이 웬 은혜인지 몰라도 백향목을 바쳤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봉화의 춘향목이나 울진 영덕에 있는 금강송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야말로 굵고 바짝 곧은 최고의 나무인데, 그 귀한 나무를 성전을 짓는데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이 기분이 너무 좋아서, 일군을 3만 명을 동원시키고, 또한 돌을 깨는 사람을 8만 명이나 동원시켜서 성전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전을 짓는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보고 싶어서 성전을 지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참으로 대단한 아이디어인데, 하나님을 그냥 붙들어놓고 상대하겠다는 것이다.
◈ 하나님, 지상별장이 있습니다. 여기서 쉬세요 !!
다시 말해서, 하늘에만 계시지 말고 이 땅에 계시도록, 그렇게 쉴 수 있는 별장을 만들어드리겠다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항상 같이 있어달라는 말은 아니고, 즉 "하늘에 계시다가도, 잠시라도 우리 나라와 함께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행운입니다" 라는 것이다.
사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해와 달을 만드신 분을,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으로 우상화를 시켜서 끄집어낸 것이 기껏해야 형상이고 괴물과 같은 모습인데,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땡 잡았다는 것이다. 모세가 만난 그 하나님을 아예 상주하듯이 모실 수 있는 집을 짓겠다고 하는데, 그러니 8만 명이나 동원되고 돈이 좀 들어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러면 성전의 은밀한 곳에는?
그래서 해서 솔로몬은 밀어 부쳤는데, 아무튼 무조건 지었다는 것이다. 물론 성전을 짓고 나서 자기 왕궁도 13년 동안이나 지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서 지은 그 성전의 중심에는, 가장 은밀한 장소에 무엇이 들어가는고 하니, 이제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없고, 그리고 만나를 담았던 항아리도 이제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 달랑 하나 남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면서 던진 그 깨진 돌판을 대신해서 지상에서 다듬어서 만들어서 네 번째(세 번째?)로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손수 사인을 받은 그 돌판이 들어있는 상자, 그 상자를 제사장이 모시고 안착을 시킬 때, 하나님은 거기에 계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은 누구를 따라왔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솔로몬을 따라온 것이 아니라, 결국에 하나님은 언약을 따라오셨다는 것이다. 즉 언약이 성취되는 자리에는 이유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는데, 언약이 성취되는 자리에는 말이다.
◈ 언약궤가 눈 앞에 보이거늘 !!
그것이 신약시대에 들어오면, 신약에서는 새언약이 증거되는 자리에게는 무조건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것이다. 오지 말라고 말려도 말이다. 바로 그 새언약을 두고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이거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언약궤가 눈 앞에 보이거늘" 라고 할 수 있는데, 서로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즉 언약궤의 완성이 눈 앞에 보인다는 말이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보좌가 보이며, 그 안에 언약궤가 있더라" 라고 하고 말이다.
(계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 다시, 질문에 답변을 하면 !!
그렇다고 하면, 이제는 그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해야하는데, 제가 이 세상을 바다라고 했는데 말이다. 물론 죄악 된 바다인데, 그 죄악 된 바다에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긁어버리니, 그 틈 사이에서 새언약의 완성이 생겼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는 말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칼을 가지고 자살한 것이 아닌데, 이런 의미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스스로 자해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유발되기 위해서는 옆에서 뭔가가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이 세상이 왜 어둠인지, 그 티를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께서 약을 올린 셈이 되는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이 어디 이런 곳에 있나? 46년 동안 성전을 짓는다고 하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고? 내가 곧 성전인데, 벽돌을 가지고 이런 건물을 왜 짓는가?" 라고 말이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목사님, 동영상을 보면서 예배를 드리면 안 됩니까?
지난 금요일에 저에게 전화가 왔는데, 서울 서머나 교회에서 죽은 김성수 목사의 동영상 설교를 보고 들으면서 예배를 드리는 청년에게서 말이다. 그 청년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질문을 할 사람이 없어서 저에게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어떤 사람이 '동영상을 보면서 예배를 드리면 안 됩니다' 라고 하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적으로 어느 것이 맞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한 소리했는데, "부동산을 따지는 하나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ㅋㅋ). "두 세 사람이라도 주님과 함께 있다" 라는 의미는 뭔고 하니, 구약을 보면 하나님은 언약을 따라서 작용을 하게 되어있는데, 물론 이것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하나의 사건으로 주어지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체로 오셨을 때, 그 사건은 그냥 "예수님은 참으로 착하다" 라는 차원이 아니라, "이만큼 이 세상이 참으로 음란하고 악하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유발시킨 사건이라는 것이다.
◈ 목사님,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복잡하게 말할 것도 없이 "목사님,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라고 하면, 자기가 곧 죄인임을 아는 것, 그것이란 말이다. 그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는데, 자기가 나쁜 짓을 하고 십일조를 삥땅치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태생 자체가 우리는 아담의 죄로 인해서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아주 기쁘게, 그것을 존재의 가벼움으로 받아들여지고 인정이 될 때, 그게 곧 성령이 함께 있는 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유를 따질 필요가 없는데, 이유를 따지게 되면 우리가 수정을 하게 되는데, 하지만 이것은 수정을 하는 게 아닌데, 물론 반성할 이유도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만든 육신의 모습을 가지고서 살아갑니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게 곧 주님이 지나가면서 남기신 흔적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게 얼마 가지 않는데, 자기가 죄인이라고 해놓고 돌아서면 뭐라고 하는가? "주님, 제가 이렇게 죄인인 것을 아니까 용돈이라도 좀 주이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자기 가정의 문제도 해결해주고 말이다. 복음을 알기는 알지만, 하지만 대번에 또 자기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마는데, 그런 행세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해결책이 무엇인고 하니, "나의 체험이 주님의 체험이 되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늘에 보면 하나님의 언약궤가 완성이 되어서 있는데, 그게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요한계시록 11장 19절에 보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언약궤가 이미 하늘에 가있다고 한다면, 이 지상에 하늘의 요소가 그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생채기를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 지상에서 상처가 나서 찢어지게 되면, 그 찢어진 부분은 하늘에 있다는 말이다. 그 상처가 난 부분은 말이다.
우리는 당연히 "하늘은 하늘에 있다" 라고 여기는데, 그런데 그 하늘에 이 지상에 점포를 내게 되면, 즉 하늘나라의 프랜차이즈 점포가 이 지상에 있게 되면, 그 지상에 있는 장소가 무엇인고 하니, 하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미국 대사관이 우리나라에 있어도, 그곳은 미국의 영토로 취급을 받듯이 말이다.
◈ 예수님, 하늘나라가 언제 옵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하늘나라가 언제 옵니까?" 라고 하니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하지 못하고, 너희 안에 있느니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참으로 기가 찬다는 것이다.
(눅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렇게 "언제 옵니까? 어디에 옵니까?" 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인간 체험에서 나온 것인데, 그래서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뭐라고 했는가? 인간의 체험은 자기의 추억, 즉 정이 들었던 장소나 고향을 잊을 수가 없는데, 그렇게 자기가 아는 범위를 확대하게 되면 그것이 곧 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주님이여, 어디에 오십니까? 저는 제주도까지 가보았는데, 거기가 끝입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는, 주님께서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즉 "거기 제주도에서 약 2500키로를 더 가면 남진아 해가 나오는데, 거기에 내가 재림을 하겠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바로 그런 답변을 제자들이 듣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지리적으로 여기까지 아는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평선의 또 어느 지점에 오십니까?" 라고 하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가? 알면 찾아가려고 말이다.
◈ 예수님은 감람산에 오신다 ??
지금도 많은 교회에서는 "예수님은 감람산에 오신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미국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개신교 교회에서도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경우에도 그러한데, '회복' 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영화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유대인이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자기 나라에서 핍박을 당하는 내용을 다큐로 해서 만든 영화인데, 그분들은 아직도 예수님은 감람산에 재림을 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감람삼에 오게 되면 우리나라나 일본의 경우에는 서너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시차가 있어서 말이다. 하지만 누가복음 21장에 보면 그게 아닌데, 지구상에 있는 모든 자들이 한꺼번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라고 말이다.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 21: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제자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도 또 무엇이라고 하는가? 역시 "예수님, 언제 오십니까?" 라고 하는데, 그 때를 알아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고스톱을 치고 있다가 그 시간이 되면 "야, 주님이 오실 시간이다. 어서 빨리 치워라" 라고 하기 위해서, 그래서 알려고 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너희 안에 있으니 찾아봐라" 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너희들이 찾아오는 식이 아니라, 너희들 속에 하늘나라를 만들어내고 유발시키고 생산하는 식으로 일하신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실제로 이루어졌는가? 물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로마서 10장을 찾아보자.
(롬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롬 10:7)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여기 6절에 보면,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늘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7절에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지옥에 누가 갔는지를 살펴보고 "아하, 지옥이 과연 있기는 있구나. 그러니 나는 예수님을 믿어서 지옥에 안 갈란다" 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 펩시콜라와 신성종 !!
과거에 펩시콜라 목사가 먹고살려고 하루가 멀다하고 "나는 천국을 봤다. 지옥을 봤다" 라고 했는데, 물론 지금도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잘은 몰라도 총신의 신성종 교수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는데, 물론 함부로 이야기하다가 녹취가 되어서 증거로 남는 수가 있지만 말이다(ㅋㅋ).
아무튼 그런 소리를 언뜻 들은 것 같은데, 즉 "제가 죽어서 보니까 지옥과 천국이 있던데, 여러분도 정신을 차리세요. 그동안 제가 신학자라고 하면서 학문을 주장하고 했는데, 그런 것은 다 엉터리이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로마서 10장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천국이 있다는 소리에 속아넘어가지 말고, 또 지옥이 있다는 소리에 속아넘어가지를 말라"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닌데, 보고 믿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지옥을 보고 천국을 보게 되면 그만 자기 체험에 포함이 되고 마는데, 그렇게 되면 "나는 3년 전에 기도를 하다가 천국을 보았다. 5년 전에 기도를 하다가 지옥을 보았다"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그것을 울겨 먹게 되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주님의 계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행전이 더 기록되어야 하는데, 29장이 나오던지 해야한다는 말이다. 솔직히 저도 보태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다(ㅋㅋ).
하지만 주님께서는 더럽다고 다 잘라버리는데, 십자가는 예수님이 홀로 달리신 것으로, 사도바울도 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갈라디아서에서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나 자신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육이니, 나도 덩달아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지, 내가 여러분에게 혜택을 베풀어서, 그래서 여러분이 구원을 받는 식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 하늘나라 - '예수님을 빼고는 모두가 다 죄인' !!
그러니 하늘나라는 어떤 특징이 있는고 하니, "예수님을 빼고는 다 죄인이다" 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자신을 다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빼고는 다 죄인으로 만드는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이 어느 자리인지, 그것이 어느 때인지, 거기에 상관이 없이 그것이 곧 하늘나라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위에서, 즉 묵시의 세계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오는데, 마치 번개가 피뢰침에 내려오듯이 말이다. 그렇게 '번쩍' 하면서 성령이 내려오신다는 것이다. 이 어둠의 장소에 묵시적인 언약궤가 위에서, 그것이 언약궤의 완성도를 따라서 내려오게 되면, 즉 성령이 내려오게 되면 그 성령과 더불어 말씀성취가 내려온다는 것이다.
◈ 오잉, '문제지+해답' !!
그렇게 말씀성취 내려온다는 것은, 즉 말씀완성이 내려오는데, 그것은 쉽게 말해서 무엇인고 하니까, '문제지+해답', 그렇게 같이 내려온다는 것이다. 즉 모든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내려오면서, 문제지만 내려오는 게 아니라 해답도 같이 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 지상에 있는 우리는 무엇인고 하니, 그동안 자기 체험에 입각해서 성경말씀이라는 문제지를 자기 방식대로 풀어서 자기 의를 얻으려고 시도했던 그 모든 것이 '찌지직' 하면서 번개가 치는 순간, 자기의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죄를, 자기가 그런 식으로 죄를 짓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할 때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할 때, 그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똑똑했기에 핍박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들도 나름 연구를 했는데, 그래서 "예수, 당신은 율법도 제대로 모르는데, 우린 전통적으로 율법만 연구하는 전문가들인데, 지금 당신의 주장은 율법에 보면 해당사항이 없어. 그러니 당신은 이단이고, 귀신들의 오야붕이다. 그래서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귀신들이 오야붕이니, 귀신이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 라고 하는 게 그 당시 유대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평가였다는 것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 그들이 똑똑하고 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뭐라고 했는가? "너희들의 아비가 마귀다" 라고 나왔는데, 너무나도 서로간에 의견이 상이한데, 전혀 타협점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 새누리당과 민주당처럼 말이다. 그 가운데 끼어있는 국민들은 지금 어느 쪽이 맞는지 헷깔리는데, 참으로 난처하다는 것이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 한 사람을 죽여서 우리가 삽시다 !!
하지만 난처하면 뭘 하겠는가? 이미 바리새인들이 정권을 쥐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여서 우리가 삽시다" 라고 하는 거기에 전부 다 표를 던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예수라는 골치 아픈 작자를 죽여서 우리나라가 평안을 얻는다고 하면, 그것이 우리의 체험에 의하면 우리의 행복입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자기에게 유리하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또한 제자들도 도망을 쳤고, 결국은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보탬이 된 사람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이 된다고 하면, 우리의 육신은 정과 욕심대로 산다는 것을 까발리면서 오직 주님의 공로만을 쳐다보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 '두 증인'의 여유로움을 !!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두 증인' 이라고 해서, 그 순간만큼은 죽어도 좋다는 것이다. "주님, 더 살려주지 않아도 저는 괜찮습니다" 라고 하는 여유로움,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평안이라는 것이다. 이미 하늘나라가 왔다는 것, 누구든지 예수 안에는 있는 자는 이미 살았다는 것이다.
(계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지만 주님에 대해서는 살아있다는 것이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그냥 잠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아니 잠도 마음대로 자지를 못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아이가 너무 울게 되면 잠자는 사람들을 다 깨우기도 하지만 말이다.
사도들이 이런 고백을 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건성으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하지만 진지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님, 진짜입니까?" 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겁니까? 나사로처럼 나흘만에 깨어나고, 그리고 회당장의 딸처럼 일어나는 겁니까?" 라고 말이다.
◈ 소녀야, 일어나라 !!
하지만 예수님이 그 소녀를 보고 뭐라고 하셨는가? 그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면서, "소녀야, 너는 잠꾸러기구나.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라" 라고 하면서 손을 잡고 일으키니 어떻게 되었는가? 소녀가 잠에서 깨어나는데, 그것을 '달리다굼'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막 5: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막 5: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막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 이 세상에서 심각한 일은 없어 !!
그러니 우리는 그것이 진짜인지, 정말이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왜 그것도 모르고 인생을 이렇게 살았지? 매일 술이나 퍼마시면서 말이야" 라고 나오게 되는데,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저 자기 몸만 제대로 꾸미고 명품만 소유하게 되면, 그것이 제대로 인생을 사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성령을, 즉 하나님의 묵시의 번개를 맞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동안 번개를 맞지 않아서 이 세상에서 심각한 일이 없다는 것을 전혀 몰랐는데, 정말이지 심각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묵시의 번개를 맞아봐야 비로소 자유가 무엇인지 감을 잡게 되는데, 그러니 이런 일이 얼마나 보람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정형외과에 가서 목 디스크 수술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복음을 통해서 성령을 받게 되면, 이 세상에서 의사나 판사, 그런 남의 인생이 전혀 부럽지 않다는 것이다. 12사도가 살아온 인생을 보라는 것이다. 너무 좋아서 하늘을 훨훨 날아다녔다는 말이다. 남들은 고난을 받는다고 했지만, 정작 본인들은 너무 좋아서 날아다녔다는 것이다. -----------------------------------------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자기의 체험은 그대로 있는데, 그것이 번개를 맞는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처럼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 죄 많은 육신의 자리가 묵시의 자기가 되면서, "나는 죽고, 그 죽은 나를 살려내기 위해서 주님이 피를 흘렸구나" 라는 것을, 그러한 언약의 완성이 스스럼없이 자발적으로 고백이 될 때, 그게 곧 하늘나라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목숨을 잃으면 잠을 자는 것이 되고, 또한 예수님이 재림하게 되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된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을 두고 교재 291페이지에서 "두 개의 현실 층이 수직을 이룬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 다시, 히브리서를 보면 !!
이제 교재 293페이지를 보겠는데, 그 이전에 조금 전에 한 히브리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육체로 계실 때에, 예수님 본인의 삶을 통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그런 악의 정체를 밝히면서 예수님은 육체로 계셨다는 것이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것을 제가 비유하기를, 바다에 배가 지나가면 바다에 약간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바다의 속살이 보이게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은 굉장히 평화롭고 모두들 인간성이 좋은데, 그런데 십자가 복음으로 생채기를 내면서 긁고 지나가게 되면, 거기서 복음에 대한 강렬한 반발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점잖은 사람들, 나름대로 한 인품을 한다는 사람들, 또 자기 돈을 아낌없이 남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람들, 그렇게 선한 사람들도 복음이 긁고 지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그렇게 적나라하게 마귀의 모습을 보이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면서 말이다.
◈ 그게 곧 '질병' !!
그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데, 오늘강의제목으로, 즉 '질병' 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몸이 아플 때, 우리가 병을 다스리는가? 아니면 병을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느끼는가? 병이 우리를 지배하는데, 그래서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소문난 식당에 가도 맛이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입맛을 자기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병이 찾아와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몸은 태어날 때부터 질병에 걸려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미처 몰랐다는 말이다. 과거 아담이 걸렸던 그 질병이, 그것이 DNA로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되어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꼬랑꼬랑 늙고 또한 죽어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병이 들었는데, 그 병을 고치려고 하면 안 되고, "환자여, 니 병을 니가 고쳐라" 라는 곳도 있다고 하는데,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병을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병이 들었음을 노출하면 되는데, 병이 든 주제에 잘난 척을 하지 말고 말이다. 왜냐하면, 병을 우리의 주관아래에 있다면 고치면 되지만, 우리의 주관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주여, 제가 병이 들어서 아픕니다 !!
그러니 우리는 아프지 않은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플 때는 아프다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주여, 제가 이렇게 병이 들어서 아픕니다. 하루종일 제 생각만 하는 이기주의자이고, 주님보다도 저 자신이 더 좋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의 병든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야 하는데, 그렇게 질병을 토해내면 하나님께서 어떤 혜택을 주시는고 하니, "니가 현재 알고 있는 것보다 그 질병의 상태가 심하다" 라는 것이 세월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질병이 드러나면 날수록 우리에게 행복이 있다고 하면, 그게 다른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미를 두지 않고, 힘을 비축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우수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썼는데, 그것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손을 놓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질병이라고 하면 자기가 알아서 병원에 가서 고치든지 하겠는데, 주님이 말씀으로 까발리는 것을 보니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나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목사는, 계속해서 설교를 하고 싶고 자기를 찾는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되기 때문에, 나름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그러나 아침 10시에 죽으니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평소에 "나는 병이 들었습니다. 죽습니다. 그러니 나를 믿지 마세요" 라고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예수님을 믿어야지, 나를 믿으면 안 됩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병든 육체를 가지고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일단 히브리서 5장을 보자.
(히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 그가 아들이시라도 !!
여기 8절에서 10절의 말씀 가운데 어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 물론 멜기세덱도 어렵지만, 특히 8절의 '그가 아들이시라도' 라는 부분이 더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아들과 질병'의 관계인데, 다른 말로 하면 '아들과 죄'의 관계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왜냐하면, 질병이 곧 죄이니 말이다.
하나님은 언제 나타나시는고 하니,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그 시점은, 그 상황은 바로 우리의 죄를 앞장세워서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은 언약으로만 일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너는 죄인이야" 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계시면서 그것이 실체가 되는데, 하나님의 오른 편에 있으면 왼 편은 어떻게 되는가? 왼 편과 오른 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오른 편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 보면 이 지상에 나타내는 편이고, 그러니 왼 편은 없고, 그 이외에는 숨어 계시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숨어 계시면서 오른 편을 통해서 나타나신다는 말이다.
◈ 아들로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심 !!
그러니 오른 편은 능력이 실시되는 공간인데, 이 오른 편에 나타나는 것은 누구인고 하니, 바로 아들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이다. 그렇게 아들로서 나타난다는 것은, 구약에서는 누구에게 나타나는고 하니, 이스라엘에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그 모든 지시가, 아들로서 지칭되어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온 것이지, 이방인에게 온 것이 아니다" 라고 하셨는데, 즉 아들이라고 여기는 이스라엘에게 아들이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이 아들이 된다는 게 아니라, 그것은 말도 안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그 원형이 곧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결국 그 아들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의 양식으로서 아들 됨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 개인구원은 허용되지 않아 !!
이것은 바로 개인적인 구원은 허용되지 않고, 집합적이고 집단적으로만 구원을 하신다는 것이다. 개인구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아들이기 때문에 받는데, 이러한 원칙과 원리는 구약의 판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간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한 것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속에 개인주의가 피어났기 때문에 망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개인주의가 피어나지 말라는 조치로서 애굽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부모도 없고 남편도 없는데, 또한 집도 없고 절도 없다는 것이다. 즉 고아이고, 과부이고, 나그네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 전체가 곧 고아이고, 과부이고, 나그네 !!
어떻게 말인가? 히브리인들 중에서 누가 고아이고 과부이고 나그네라는 말인가? 누가 고아냐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곧 고아이고, 과부이고, 나그네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집단적이고, '너와 나', 그렇게 서로 누가 잘났다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래도 히브리인들 중에서 조금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못 사는 사람이 있을 게 아닙니까?" 라고 하신다면, 하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입장에서는 동일하게 보신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말하는 의미가 그러한데 말이다.
물론 히브리인들을 줄줄이 세워놓고서 누가 공부를 잘하고, 돈을 잘 버는지, 그것을 조사하면 분명히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같은 돈을 줘도 나중에 보면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의 개별적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런 개별적 차이 자체를 구원하는 용도의 개념으로서는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가 누가 잘했나? 잘한 사람을 내가 구원시켜줄 게" 라는 식으로는 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 "너희들이 잘났던 못났던 간에 너희들은 하나인 것을, 과연 그것을 아는가?" 라고, 그렇게 보신다는 것이다.
◈ 특별난 인간은 없어 !!
여호수아서 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 성을 공격할 때 '아간' 이라는 자가 개인적인 행동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아이 성을 공격하다가 36명이나 죽고 전쟁을 두 번이나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특별한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하는가? "우리에게 왕이 있어야 합니다" 라고 하는데, 즉 "특별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서 나오는 사사기를 보게 되면 사사들은 결코 특별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께서 똑같은 인간을 그냥 들어서 썼을 뿐이라는 것이다.
◈ 죄인 속에 아들이 들어옴으로서 !!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뭐라고 하는가? 즉 "특별난 인간을 우리 가운데서 뽑아내겠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집단적으로 구원하는 것을 모르고, 기존의 인간들이 하는 것처럼 "우리들 중에서 제일 뛰어난 사람을 왕으로 삼으면, 우리 구원에 유리할 것이 아닌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남자는 두 종류밖에 없는데, 이런 이야기는 젊은 사람들이 좀 들어야 하는데 말이다. 집이 있는 남자와 집이 없는 남자로 말이다. 특히 아가씨들은 결혼을 앞두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남자는 다 죄인인데, 집이 있던 없던 간에 말이다.
그렇게 죄인인데 무엇으로 만드는고 하니, 죄인이기 때문에 아들로 만드는데, 그것은 죄인에서 아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인 속에 아들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아닌 인간을 아들이 되는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이루시겠다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내용이 얼마나 어려우냐는 것이다.
◈ 베끼고, 그 베낀 것을 또 베끼고 !!
우리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어떻게 하든지 죽어서 천국에 가려고 자기 쪽에 뭔가 움직이려고 '부시럭, 부시럭' 하는데, 그게 일반화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일반화에 대해서 어제 낮 설교시간에 중요한 말을 했는데, 즉 "있는 것을 베끼고, 그 베낀 것을 또 베낀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인고 하니, '대한예수교장로회' 라는 간판을 내걸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대체 기독교라는 것이, 처음부터 베낀 것을 또 베끼고, 그것을 또 베끼고 하면서, 그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 되어서, "우리 노회에서 나가면 이단이고, 우리들은 정통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기가 차겠는가? 그래서 주님은 '우엑' 하면서 토해내겠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인데 말이다. 오죽했으면 그런 말씀을 했겠는가? 왜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자꾸만 '흉내내기'를 하느냐는 것이다.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계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 '흉내내기'와 '교육' !!
그 흉내내기를 어제 낮 시간에는 '교육' 이라고 했는데, 사람을 교육을 하고 훈련을 하게 되면 누구나 다 근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MBC의 예능프로 중에서 '진짜 사나이' 라는 것이 있는데, 나이가 40이 넘은 아저씨들이 군대에 가서 병영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인데 말이다.
나이가 모두들 40이 넘은 사람들이 군에 가서는 자기 아들 또래의 조교들에게 반발을 듣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예, 예' 라고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데, 그래도 군대 교육을 받으니까 다들 군기가 바짝 들어서 '충성!' 이라고 외치고 말이다.
제가 만약에 그 프로에 참석했다고 하면 모두 다 편집이 되어서 TV에 나올 내용이 하나도 없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왜냐하면, 중대장을 보고서 말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야야,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라고 하면서 저의 의견을 다 이야기할 텐데, 국가와 나라를 위해서 말이다. 군인들은 국가와 나라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데, 특히 고참들은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도 그렇게 베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냥 남의 뒤통수만 바라보면서 발꿈치만 가면 그냥 따라간다는 것이다. 만약에 길에 걸어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보면, 즉 "당신은 어떻게 삽니까?" 라고 하면, "저는 남들이 살아가는 것같이 살아갑니다" 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즉 사는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다는 말이다.
◈ 백숙이 되신 주님 !!
그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인데, 그들도 안 되는데 주님께서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언약을 통해서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니까, 그만 죽어야 될 어린양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죽어야 될 양이라고 하니 실감이 나지 않는데, 이것도 오늘 강의제목으로 해도 되는데, 즉 '백숙' 이라고 말이다. 일종의 보양식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몸보신을 하라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여쁘게 여겨서, 주님께서는 한 마리의 닭이 되셔서 털을 다 뽑히시고 부글부글 끓는 물에 들어가심으로서,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예수님만이 아시는 그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되는데, 이게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로마서 8장에 나온다는 말이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그야말로 백숙인데, 즉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의미를 몰랐지 싶은데, 즉 문설주에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바르니, 그것이 무슨 주술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여겼지 싶은데 말이다. 일단은 효과를 봤는데, 그런데 그것이 마음 속 깊이 들어가지 않고 그냥 그 순간을 모면으로 하는 것으로 때웠다는 것이다.
그렇게 효과를 보고 나서는 홍해 앞에서 데모를 했는데, "모세야, 책임져라. 앞도 막히고 뒤도 막혔다. 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바다가 갈라져서 육지가 될 줄은, 물론 나중에 조미미는 '바다가 육지라고' 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알았을지 몰라도, 그 당시 사람들은 몰랐다는 것이다(ㅋㅋ).
◈ 그들이 홍해바다를 건너가도 !!
이처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를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인데,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것과도 똑같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가 믿는다고 해서 자식에게 강요하려고 하니 좀 그러한데, 정말로 기적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너가면 무엇을 하느냐는 것이다. 40년 동안 다 죽고 말았는데 말이다. 하나님을 원망만 하면서 말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할 때는, 아들과 만나기 위해서 아들노릇을 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 이제는 우리가 백숙이 되어야 !!
진짜 아들은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만났던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고 그 아들은 반드시 별세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죽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아들이 죽어야 한다는 말은, 사실은 자기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 여기에 제 몸이 있습니다. 죽여주세요. 이제는 제가 백숙이 될 차례입니다" 라고 말이다. 주님 앞에서 우리가 백숙이 되고 보신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우리가 사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말이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이제 두 번째로 '멜기세덱'에 대해서 !!
이제 두 번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