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의 시간 130726
성전의 시간 130726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관리자(IP:203.♡.42.222)
13-07-27 11:02
서경수(IP:218.♡.227.58)
13-08-12 10:39
광주 강의(2013. 7. 26) 44-1
에스겔 42장 13절부터 보겠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좌우 골방 뜰 앞 곧 북편 남편에 있는 방들은 거룩한 방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것이 이 그림인데, 제일 밑에 보면 치수가 나와 있지요. 동영상으로 보시면 좋겠는데 --
그림에 보면 500규빗이라고 되어 있는데, 1규빗이 45.6Cm이까 대충 계산이 되지요. 이 치수가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42장 20절입니다.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에스겔이 건물의 규격을 거론하고 하는데 이 건물이 실제로 있는 것입니까? 없어요. 그렇지만 천사가 척량을 하는데 꼭 있는 것처럼 척량을 하니까 사람이 보기에는 없는 것이지만 천사들에게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 성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천사가 척량하기 때문에 사람이 성전을 지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성경에 성전의 치수가 나오니까 사람들은 모방을 해서 가짜 성전이 생겨납니다. 에스겔에 나오는 성전을 모방한 가짜 성전이. 대표적인 것이 헤롯 성전입니다.
그러면 가짜를 누가 유발시켰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유발시켰어요. 그렇다면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을 주심으로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가짜 행세 하도록 하나님이 조치하시는 겁니다. 참 고맙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짜입니다.
그러면 진짜 인간은 뭐냐? 그것은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말씀 안에 있는 진짜 인간은 우리가 만들지를 못해요. 성령이 만들고 천사가 관여해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말씀을 모델로 해서 말씀대로 사는 인간인 것처럼, 성도인 냥 모방함으로 말미암아 모방된 그것을 진짜 나라고 우기게 만들어서 포괄적으로 ‘너는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들춰내는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가짜행세 하도록 조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의 나아갈 길입니다. 우리는 한평생을 살아도 인간이 뭔지를 몰라요. 우리는 조상 때부터 인간을 잊어버렸어요. 전도서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전도서의 특징은 인간과 짐승을 같은 바구니에 담아요.
성경에서는 인간과 짐승이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데 인간은 가짜이기에 가짜의 티를 내요. 뉴스에 보니까 위조지폐 5만원이 나왔는데 위조지폐는 집에 두면 띠가 안 나요. 가짜지폐로 밤에 편의점이나 재래시장에 가서 사용해야 진짜 지폐가 손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인간은 가짜 노릇을 함으로써 진짜를 추구하는 거예요.
‘음지에서 일하면서 양지로 나아간다.’는 말이 있지요. 국가정보원 표어입니다. 꼭 가짜 행세를 해야 그나마 자신이 위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봐, 그러니까 너는 가짜지!” 이렇게 나오십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정리하면, 하나님이 천사에게 성전 만들라고 하심으로 결국 성전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살아도 모방된 유사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개그콘서트]에 보면 가짜 티내는 코너가 있어요. 직업도 없는 젊은이 두 사람이 야구공을 주고받아요. “한혜진과 기성룡이 결혼한단다.” “나도 축구 좀 한다.” 축구 좀 하기에 자신도 한혜진과 결혼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해요. “그럼 공 빼앗아 볼까?”라고 해요. 주재 파악을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코너나 교인들이 교회 가면서 ‘우리 심심한데 교회나 가서 천국 갈까?’ 이와 같은 소리입니다. 천국은 못 들어갑니다. 베드로는 결심하면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주님 말씀은 ‘처소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처소가 마련되었다는 통보가 온 사람은 가고 통보가 없으면 그 사람은 애초에 하늘나라에 좌석이 없어요.
그러면 천국은 어떻게 들어갑니까? 예수 믿는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처소를 마련해서 성령을 보내 통지서가 와야 돼요. 천사가 와서 “아저씨의 죄 값은 주님이 다 치뤘습니다.”라고 해야 갈 수 있어요. 그러면 ‘믿습니다.’ 라는 말은 믿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 안에 주님께서 하신 내용을 수용할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믿습니다.’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믿는다는 것 속의 알맹이를 깨어보면 그 속에 ‘이미 처소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아버지와 결의해서 “제는 살려줍시다.” “그래, 네 뜻대로 해라.” 이렇게 해서 결정되는 거예요.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성령을 통해 통보해 주십니다. 통보가 없으면 불합격한 줄 아세요. 통보 없는데 일부러 확인하기 위해 전화할 필요 없어요. 원서 냈는데 연락 없으면 불합격인줄 알면 됩니다.
언약이란 모든 일이 이미 종결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사항을 그냥 통보해 줄 뿐입니다. 통보 받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그냥 일상적으로 살 수밖에 없어요. 그냥 살고 있는데 통보가 오면 그때부터는 천사가 만든 성전 안에 우리가 이미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에스겔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겠어요? ‘천사가 치수를 재는 것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성전에 들어갈 입장이 못 되는 구나.’ 치수를 친히 잰다는 것은 이미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고, 그 만들어진 것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뭐냐? 그 성전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림을 보이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2장 13절은 어떤 대목인가 하면, 그림 Bi부분입니다. 이것은 Binjan의 줄인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거실 혹은 제사장 휴게실’입니다. 성전에 보면 동쪽이 출입구입니다. 북편, 남편 양쪽 다 거실이 있어요. 이것이 별채로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은 한 채가 아니고 두 채로 되어 있어요. 여기 방이 30개 있어요. 여기에 제사장들이 거주하면서 제사 드리는 일을 합니다.
이런 이야기하니까 마치 성전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지요. 잊어버렸을까 싶어 다시 이야기합니다.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인간들이 이 성전 그대로 만들고, 거기 제사장들이 업무에 종사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전이 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이 성전은 인간이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마치 실재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뭡니까? 그것은 이 성전은 인간을 겨냥해서 인간을 삭제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런 성전을 지을 수 있습니다.”라는 소리를 내뱉게 만들고 삭제해 버립니다.
제 어머니 연세가 84세인데 치매 등급 3급이 나왔습니다. 84세까지 살면서 지금 3급 받아서 요양사가 돌보는 것을 보면, 희미하게나마 남은 인생을 주께서 지우개로 지워나가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어머니가 정신이 있을 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옛날에 할머니가 그랬는데 요즘 내가 그렇다.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정신이 없을 때는 “아버지 서울 가서 왜 안 오시지?” 아버지 돌아가신지 8년 되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세요. 이 순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라요.
성전과 인간의 관계에서 결국 밝혀지는 것이 뭔가? 인간은 환상 속에 산다. 매일 우리는 하나님이 지우기로 작정된 그 아래에서 살기에 결국 지워져야 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하루 일과가 나를 지우게 만드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내 인생이라고 고이 간직하고 거기에 의미와 가치와 역사로 비중을 두니까 그 자체가 전도서의 말씀처럼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이유는 인간조차도 헛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헛됨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지혜의 전략입니다. 제대로 된 인간은 예수님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냥 흙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왜냐? 결국은 지워지니까.
결국 없어질 것인데 아직 있으니까 주님 보시기에는 우리가 꿈속을 해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워지고 사라지지만 나 자신을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까지 치매 안 걸렸다고 생각한단 말이지요. “아버지 서울 가셨는데 왜 아직 안 돌아오시지?”라는 말을 진심으로 말하는 거예요.
“공부 좀 열심히 해라.” 이것이 꿈속에서 하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이 말하는 순간은 진짜 거기에 몰입하는 거예요. “네가 우리 집안에 기둥이기에 네가 잘 되어야 우리 집안이 잘 된다.” 이런 식으로. 이것이 안 되면 하나님도 싫고 다 싫어요. 그래서 이것이 먼저 되어야 예수 믿을 조건이 되는 것처럼. 그런 인간의 모습을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이제부터 심도 있게 성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공간 개념을 영어에는 space와 place 이 두 단어를 사용합니다. space는 그냥 공간으로 보면 되고, place는 어떤 지점, 장소로 보면 됩니다. 차이점이 뭐냐 하면, space는 우리가 속해있는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place는 유별난 특정 지점을 말합니다.
공간이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 말고 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 그 때 그 장소, 공간 가운데 내 기억에 또렷하고 내게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한 지점을 꼭 집어서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겁니다. 이걸 마콤이라고 하는데, 마콤이 뭐냐 하면, 유대교 회당에서 아주 은밀한 곳(지성소)를 마콤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에 대해서 우습게 보는 일반 사람들이 유대 회당에 가서 그들이 제일 은밀하게 여기는 그 지점에 한 번 가본다면 어떻겠어요? 이런 데가 여러 곳에 있어요. 30년 동안 한 번도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는 수녀원, 비구니들만 사는 절인데 외부의 어떤 남자도 들어간 적이 없는 곳, 이것이 바로 마콤이에요.
이런 특별한 장소는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에 뭔가 대단하고 신비한 것이 있을 것 같은데 막상 가보면 특별한 것이 없어요. 다른 곳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곳(마콤)에 있는 흙은 길가에 있는 흙과 같은 성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거기에다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면 이곳은 신성한 장소(마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신성한 장소를 누가 정했습니까? 본인들이 정했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의 성전은 본인들의 느낌으로 만들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한마디. 이것은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게 마콤입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보면 그냥 그런 척하고 있지요. 신성한 척해야 그것이 종교가 되니까. 이런 신성한 장소 마콤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의 place에 대해서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예수님께 점검 받아야 되겠지요? 예수님에 점검 받은 사람이 있어요.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하고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려야한다는데 어느 곳이 마콤입니까?” 이렇게 물었지요.
새벽시장에 가보면 허름한 복장을 하고 길거리에 서 있는 사람이 있어요. 5시 30분에서 6시쯤 되면 봉고차가 와서 “시다 2명!”하면 2명이 재빨리 차에 오르지요. 그러면 그 장소가 뭐가 됩니까? 직업이 있는 사람한테는 그 장소가 의미 없는데, 일용직 노동자는 새벽마다 그곳에서 기다립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이 장소가 특별한 곳입니다.
그 장소를 사람들은 성전으로 삼았어요. 그리고 성전 제일 깊숙한 곳에는 “하나님이 여기 함께 계십니다.”라고 하면서 이곳을 제사장이 포위합니다. ‘아무도 이곳을 함부로 넘보면 안 돼! 에스겔 42장을 14절을 봐.’ 여기서 binjan,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해 옷 갈아 입는 곳이에요.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함으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라고 했어요.
성전은 2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안의 뜰은 100규빗입니다. 바깥뜰은 500규빗이에요. 이것은 이방인의 뜰이에요. 일반인들은 안에 못 들어갑니다. 바깥뜰에서 안 뜰로 가려면 계단으로 올라가서 가야합니다. 그러니까 수직적으로도 안뜰과 바깥뜰이 구분되어요. 이 안뜰은 제사장들의 공간입니다.
제사장들도 안뜰에서는 아무 옷이나 입을 수 없고 지정된 복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나올 때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편리한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지시를 받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마이크 들고 외치는 분이 아니고 말씀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중 하나가 에스겔 42장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내가 제사장이라면, 하나님은 나타나는 분이 아니라 말씀으로 자신을 보여주시는 분이니까, 백성이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물으면 ‘우리가 성전에 들어갈 때는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만약 안 갈아입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제사장 권위도 서고 백성들도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을 확정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성전이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부로 확장시킬 수 있는 그런 작업에 끌려온 사람만이 구원 받는다는 복음이 성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뭐가 나옵니까? 물이 나옵니다. 물이 나와서 500규빗 주변에 있는 모든 민가에 생명을 줍니다. 이게 천국입니다. 천국은 성전이 있어야 되고, 성전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고,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있다는 소문만 들었어요.
있다는 소문을 누가 유포시켰느냐? 제사장이 유포시켰고, 제사장은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거하는가? 42장 14절 말씀처럼 옷을 갈아입는 거실이 마련되었다는 그 자체가 이것은 자기들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시한 것이기에 그 지시하신 분이 성전에 필히 계신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하지요.
그런데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마치 성경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없어요. 없는 이야기를 마치 있는 것처럼 제가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는데, 실제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에스겔 42, 43, 44장 이 모든 이야기가, 특히 47장은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에서 “나를 믿는 자는 --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어요. 이게 믿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아니고, 믿는 사람 속에 예수님이 들어계셔서 예수님이 성전이 되셔서 그래서 47장 말씀대로 계속 영생의 물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비교해 보세요. 그 당시 유대인들은 에스겔에 있는 말씀을 따라 성전을 만들 것처럼 이야기를 했고, 그렇게 해석을 했지만 예수님은 47, 48장 이 모든 말씀을 “너희들은 못하고 내가 다 지킬 말씀이다.”라고 하시니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못 믿었어요.
믿고 싶어도 믿을 건더기가 없어요. 믿을 만한 것을 제공해야 믿지 터무니없는 해석을 하니까 믿을 수가 없었어요. 심지어는 12제자도 못 믿었어요. 나중에 성령을 받고 보니 성전은 예수님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예수 안에 자기 백성이 있는 겁니다.
space와 place의 차이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보통 공간은 성전이 될 수 없고 특별한 자리 place 구별된 장소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 계시는 place, 마콤이라고 했는데, 이 성전을 하나님이 만들기 때문에 이 장소도 역시 하나님이 만들지요. 그 만드는 장소에 대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물어요. “그리심 산에서 예배해야 합니까,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합니까?”
예수님 대답이,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다.” 이 말씀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뭐냐? 새벽 인력시장에서 사람 뽑아 가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사마리아 여인이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치면서 물동이를 팽개치고 미친 사람처럼 떠들고 다녔단 말이지요.
이 여인이 본 마콤은 뭡니까? 신성한 장소는 어디입니까? 신성한 장소가 한 곳에 국한되었다는 그 자체를 능가해 버립니다. 그동안은 특정 자리에서 하나님도 만나고 메시아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리심 산입니까, 예루살렘 입니까?”라고 특정 장소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아, 우리가 생각하는 장소가 그 장소가 아니구나.”를 알게 된 거예요.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날 때 우물에서 만났어요. 자기는 야곱의 우물에 물 길러 왔어요. “나는 여기에 정기적으로 옵니다.” 왜냐? 야곱이 판 우물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 사마리아 여인은 결국 space 공간에 매인 체 사는 거예요. 심지어 물 떠는 것도 야곱의 우물로 왔단 말이지요.
그 우물 없으면 못 살아요. 사나 죽으나 사마리아 여인은 이 땅의 사람이에요. 땅 없으면 죽어요. 세상의 모든 문명은 물이 흐르는 좋은 땅에서 발전했습니다. 사람은 땅이 있어야 삽니다.
물리학자 뉴턴은 지금 있는 공간이나 우주 밖에 있는 공간이나 동일한 공간이라고 봤어요. 맞는 이야기지요. 이의 걸 사람 없어요. 그리고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있는 시간이나 우주 밖의 시간이나 동일하게 흐른다고 생각했어요. 상식적으로 옳은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절대 공간, 절대 시간이라 합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절대 공간, 시간은 있고, 그 다음에 푸팅에 건포도가 있는 것처럼 군데군데 별도 있고 달도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봐라. 성경에는 시간과 공간이 있고 해와 달이 있는 게 아니고 해와 달을 만들 때 부대효과로 나온 것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이런 아이디어를 요구한다면 우리를 못살게 구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수학 시험 칠 때는 왜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70% 풀었는데 시계를 보면 5분밖에 안 남았어요. 정말 시간이 빨리 흘러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은 왜 그렇게 안 가는지?
우리는 가짜 인간이면서 스스로 신으로 착각하고 나의 절대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우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언제 오십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나라가 이 때니이까?”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나의 시간과 공간 개념에 하나님도 동조해 주셔야 당신은 하나님답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 답변은 뭡니까? “그것은 네가 알 바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종말과 부활과 재림이 종합선물로 함께 담겨서 오는 거예요. 믿음 속에 들어가면 이미 그 안에 강림, 부활, 승천 다 들어 있어요.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인자가 올 때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은 해와 같이 빛나고 악인들은 풀무 불에 던진다고 할 때, 사람들은 그 해석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뭔가 하면, 주께서 오실 때니까 아직 그 때는 오지 않았고, 주께서 오시면 그처럼 두 분류로 나눠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비유를 잘 못 해석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신 것은 ‘내가 오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고 ‘현재 이렇게 이야기하는 내가 인자이며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떤 일을 일으키시는지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확인해서 주님을 믿을 사람은 없고, 지금 우리 앞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마지막 때 천국과 지옥을 나눌 분임을 믿으면 기다림 자체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그 일하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뭘 기다립니까. 아들이 아버지께 “아버지는 언제부터 내 아버지였습니까?” 이런 소리 한다는 자체가 아버지를 내 아버지인지 확인하겠다는 말이잖아요. 이건 아버지께 뺨 맞아야 돼요.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어요. “영원히 너와 함께 있었다. 어제도 아버지, 오늘도 아버지다.” 그런데 “아버지 노릇을 해야 아버지지” 이렇게 나오는 것은 아들인 자신을 절대화 시키는 것입니다.
“예배를 그리심 산에서 드려야 합니까,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합니까?” 이 질문 자체가 건방진 소리입니다. 이걸 알아야 뭣할 건데요? [천지일보에서 보낸 16개의 질문과 답변] 읽어보셨어요? ‘기름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그것 알아서 뭣할 건데.’ 이렇게 답했어요. 기름이 무엇인지 알면 그것으로 구원 받겠다는 속셈이잖아요.
이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인척 하는 것이지 주님 보시기에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냥 짐승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의 우물이라는 특정 지역에 물 길러 왔을 때, 예수님도 그 물을 마셨어요. 그 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게 물을 달라고 한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는 관심이 없고, ‘이 더운 날에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면 좋겠다.’는 말을 하지요. 앞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는 관심 없고 마실 물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그리고 자신이 사는 곳과 우물이 거리가 있으니까 물이 떨어지면 또 물 길러 와야 하고.
물 긷는 일도 내 집에서 우물로 와야 하고, 예배드리는 것도 내가 있는 곳에서 어떤 장소로 가야하고. 이것을 예수님이 뒤집어엎습니다. 주님 말씀이 “네가 물 긷는 것이 힘들지? 내가 너에게 영원히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도록 하면 어떻겠니?”라고 제안합니다. 여인 대답이 “그렇게 되면 좋지요.”라고 했어요.
그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께서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니다.”라고 했을 때, 이 여인이 성령을 받아서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내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못하고 나를 계속 유지하면서, 물 길러서 먹고 살고, 예배드려서 구원도 없어야 한다는 이 생각이 터무니없는 고집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런 나의 아집에서 벗어나도록 ‘나에게 물 좀 달라.’고 하시면서 찾아오셨고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하시면서 성령을 주셨구나.”를 깨달은 겁니다.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야만 구원이 아니고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이 내가 빠져나와야 될 곳임을 알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출애굽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여기도, 저기도 아니고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했지요. “오나니”는 미래지요? 그런데 “곧 이 때라.”고 하면 현재잖아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의 현재는 과거가 누적되어 오늘에 이른 현재로 여겼는데 주님은 이런 나의 현재를 포기하라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 현재에 매여 있으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나의 현재에서 수직적으로 주님의 현재로 이동하면 그것이 ‘지금’ 구원이고,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예배고, 성령 안이고, 진리 안에 있는 거예요. 여자가 무슨 말을 하리요. 남자 다섯과 산 것. 그것은 허물 축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예전에는 그것이 큰 수치였는데 주님 안에 들어오니까 그것이 아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괜히 의롭고, 착하고, 성스럽게 행동하는 그 자체가 점점 구원과 멀어지게 해요. 예수님 만나면 끝입니다. “곧 이 때라.” 그 때가 이번 수련회 주제로 등장합니다. ‘사건’입니다. 인간의 모든 움직임을 규격화 시켜서 이걸 사물화 시킵니다. 사물화 시켜놓고 사건화 시키면 이 사건이 바로 언약과 매치가 됩니다. 왜냐하면 전도서에는 언약이 없고 하나님의 구원이 없기에.
그냥 허무입니다. 허무에서 구원 받으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짓은 짐승만도 못한 짓으로 규명해야 됩니다. 잘났든 못났든 전부 다 허무한 거예요.
성전이라는 특수한 지점이 결국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우리도 그 성전 만들면 되지.’라는 그 인간 자체를 사건화 시킵니다. 사건화 시킬 때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인가 하면 십자가 사건화 시킵니다.
십자가가 사건이 되면 우리는 사건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고 우리를 대신한 분이 십자가 사건을 만들었지요. 그 십자가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덮치게 되면 우리의 하루하루 모든 삶은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면서 그 십자가 사건의 현장 속에 놓인 자가 됩니다. 아침에 빵 먹고, 점심 때 밥 먹고 이 모든 것이 전부 십자가 사건화 되는 겁니다.
먹고 마시는 모든 일이 잠시 기뻐하고 좋아했다가 성령이 임하면 다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누가 이렇게 만듭니까? 사마리아 여인을 물동이 버려두고 “심봤다.”하고 외치게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이 함께 있는 사람은 항상 ‘나’는 응축되고 나는 십자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으로 인생을 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3. 8. 12. 09:58 녹취 마침)
서경수(IP:218.♡.227.196)
13-08-15 09:34
광주 강의(2013. 7. 26) 44-2
하나님과 인간이 만났을 때 인간이 기대했던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의 관념 속에 있는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은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 구출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협상이나 타협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잘 설명해도 그 말을 다 이해할 수 없고, 또 다 알아들으면 의사의 권위가 떨어집니다.
이처럼 고치는 분과 고침 받아야할 자는 격이 다릅니다. 우리는 평소에 늘 하나님을 부르지만 진짜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예상 못할 분으로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떨기나무에 나타나십니다. 만약 모세가 하나님을 알았다면 반갑게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예상 못하게 오셨기에 오히려 당황했지요.
떨기나무에 타나났을 때 모세의 입장에서는 두렵고 떨렸어요. 그럼 생각해 봅시다. 이런 하나님이 사랑스럽습니까? 아니지요.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몸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라.”고 하셨지요. 이것은 주님이 안 나타났을 때 주님을 우리가 상상해서 섬길 때는 가능한데 막상 떨기나무에 나타났을 때는 혼이 나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타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만 나타난 환경, 그런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 앞에서 모세는 있는 둥 없는 둥,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개인적으로 고민거리나 스트레스가 있더라도 막상 하나님이 나타나면 나의 근심과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 되지요. 그 정도로 무섭고 떨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무섭고 떨리는 분이 인간을 앞장세우고 나타나면 그 인간은 어떤 존재로 보이겠습니까? 낯선 존재가 돼요. 이것을 정신분석학에서 ‘언케니(uncanny)’라고 하는데, ‘으시시’ 또는 ‘친숙한 낯섬’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인데 왠지 낯설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런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가인 앞에 나타난 아벨. 제사를 정성껏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보편화 된 일인데 아벨은 이상하게 양을 잡고 기름부위를 따로 떼고 드리는 것. 이것이 일반 제사의 입장에서 보면 ‘언케니’한 것이죠. 뭔가 이상해요. 그냥 기도하고 정성 모아 예배드리고 이것이 자연스러운데 ‘오직 예수님 피만 사랑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언케니’한 거예요.
주님께 정성을 다해 바친다는 것은 괜찮은데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할 때는 ‘언케니’한 거예요. 실제로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막상 사람을 앞장세워 나타날 때는 ‘왠지 낯설다. 예전에는 못 보든 상황인데?’ 이런 식으로 등장합니다.
떨기나무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떨기나무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네 신발을 벗어라.”하시고, “내가 너를 보낸다.” 그 사건 이후에 모세에게 지팡이를 잡으라고 하고 던지니까 뱀이 되었고, 뱀을 잡으니까 다시 지팡이가 되고, 지팡이 잡았던 손을 품에 넣으니까 문둥병이 되었고, 다시 품에 넣었다 빼니까 건강하게 되고.
이 모든 것은 친숙하게 내 생존을 위해서 꾸미는 삶 자체를 엉망진창으로 만듭니다. 우리의 모든 평화와 질서를 다 파괴합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살라고 하는 것인지 살지 말라고 하는 것인지 분갈 할 수 없어요. 내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 놓습니다.
대전 강의에서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반성문을 쓸 때는 종이게 작은 글씨로 ‘내가 언제 무슨 잘못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씁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반성문을 볼펜으로 구멍을 뚫어버려요. 이 말은 뭔가 하면, 우리가 아무리 우리 삶을 개선하고 바르게 산다 할지라도 내가 만든 토대 자체에서는 우리가 벗어날 수 없어요. 찐드기에 붙은 것처럼. 그러니까 하나님은 찐드기처럼 붙은 것을 떨어지게 만드는데 개입하십니다.
43장 1절부터 봅시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수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질문하겠습니다. 이 성전은 인간이 만든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여러분이 다 아는 것이고, 그러면 이 성전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없는데 43장에 보면 마치 성전이 완공된 것으로 간주하고 동쪽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쳐들어오지요. 주석가들은 이것을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환상 속에서 본 성전’이라고 해요.
그러면 환상 속에서 본 성전이 성전이겠어요, 인간이 손으로 만든 성전이 성전이겠습니까? 영원한 성전은 말씀 속에 있는 이 성전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이 성전은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우리 자신이 주님 보시기에 있으나마나한 꿈같은 존재로 있을 뿐이에요.
내가 현실이라고 우기니까 진짜 현실은 환상처럼 느껴져요. 그런데 환상이 현실이 된다면 그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별 볼일 없는 있으나마나한 한순간의 꿈같은 일일 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관심 둘 것은 43장 ‘그 문에 누가 들어오는가?’입니다. 그리고 ‘무슨 영광이 들어오는가?’ 이게 중요하지 그 밖의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성전 어디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고, 성전 동편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중요합니다. 그럼 이 부분을 설명해 봅시다. 성전에 문이 각 방향으로 있는데 서쪽에는 문이 없어요. 북쪽, 남쪽, 동쪽에는 문이 있는데 서쪽에는 없어요. 그리고 북쪽과 남쪽 문은 북쪽에서 들어왔으면 북쪽으로 유턴 못해요. 북쪽으로 들어왔으면 남쪽으로 나가야 하고, 남쪽으로 들어왔으면 북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성전에 들어온 사람은 제 마음대로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포함된 사람은 영원한 구원에 이릅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성전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일으키신 사건을 왜 에스겔에서는 구체적인 성전이라는 건물로 표현하는 것인가? 인간들이 그동안 하나님을 만날 때 특정 지점과 특정 시간을 언급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43장 18절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성전에는 그냥 관람용이나 놀이동산이 아니고 이 안에서 피 뿌리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성전은 어떤 특정 장소에 있어야 하고, 특정한 시간에 제사를 드려야 하고, 특정 제물을 바쳐야 하고, 그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옷을 갈아입고 실제로 활동해야 하고 그럴 때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이며 구원이 성사된다고 믿었어요.
하나님은 이 전체를 통째로 환상으로 날려 보냅니다. 그냥 환상으로 무시하면 안 되고 그 의미를 살리면서 사건화 시키고, 그 사건을 예수님이 일으키신 사건으로 만들면, ‘예수님이 성전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동시에 ‘주님이 일으키신 사건에 내가 말려들어야 구원이 됩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주님만 사건이고 나는 멀쩡히 그대로 있으면 우리가 주님을 알 수 없어요. 주님의 일이 사건으로 집약된다면 우리도 여기에 같이 말려들어서 사건화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성전을 봅시다. 이것은 분명히 건물인데 이것이 인물로 전환되면서 사건화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전이라고 하면, 특정 지점에 세워진 건물과 특정 시간에 제사를 드리고, 이 일을 위해서 특정한 사람 제사장이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성전이 쪼그라들어 인물로 바뀌는 그 상황에 내가 같이 말려들면 우리도 주님 사건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역사 속에 살고 있어요. 사건이 역사 속에 도로 펼쳐지면 우리가 좀 전에 파인애플 먹은 것도 하나의 사건이고, 우리가 직장 다니는 것도 하나의 사건인데 이 모든 것이 응축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펼쳐놓은 일이 되는 겁니다.
[인디아나존스] 영화가 있었는데, 고고학자들이 밀림을 다니면서 신비한 것들을 발굴하고 심지어는 법궤까지 찾아내고 그런 내용인데, 이런 것이 있어요. 아프리카 밀림인데 딱정벌레가 한두 마리 기어 나와요. 지금 독일군과 인디아나존스가 어떤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데 한두 마리 보였던 딱정벌레가 온 땅에 깔려서 독일군 차량이나 병사들 몸에까지 달라붙어서 난리가 나요.
지금 우리는 몇 년 전 이 땅에 태어나서 이러저러한 일을 하면서 지금도 살고 있다고 여기는데, 사실은 지옥에서 올라온 딱정벌레가 우리가 사는 모든 곳을 점령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아주 살기 좋은 세상인줄 알아요. 딱정벌레가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라요.
그런데 이 딱정벌레의 정체가 언제 드러나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딱정벌레라는 악마들이 온 땅을 까맣게, 인간의 몸과 영혼까지 다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요. 이 전체가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건화’ 다른 말로 하면 ‘언약화’ 된 사건이지요. 모든 것이 언약대로 되어 갑니다. 마귀들이 설치는 것도 언약에서 파생된 일이에요. 역사의 모든 일들이 다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도 인디아나존스처럼 여기서 다 먹혀야 되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우리를 다시 딱정벌레가 있는 세상으로 보내요. 한명의 소자로. 소자로 이 땅에 보내시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 세상이 너무나 좋은 세상, 돈만 있으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세상으로 보이지만, 소자(성도)의 눈에는 지옥에서 올라온 새까만 벌레들로 완전히 장악된 세상으로 보이지요.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고 이것이 바로 ‘언케니’한 것입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이런 말 하는 사도 바울이 왠지 낯설게 느껴져요. “돈이 있어도 다 못쓰는 것처럼 살아야. 이 세상은 잠시 후에 끝난다.” 이런 말이 왠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고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들려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바울의 말씀이 낯설지 않고 우리가 십자가 사건에 참여된 자인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러면 이 작업을 할 때 어떻게 하는가? 43장을 봅시다. 1절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동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오지요. 그러면 이 성전을 우리가 성전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 성전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나. 성전은 귀한 것이야’ 하는데 동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쳐들어오지요. 쳐들어오면 우리는 점령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빛이 들어오면 우리는 졸지에 이미 이루어진 성전의 기능을 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성전 사건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는 겁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 있고, 그 영광은 동쪽에서 들어왔는데, 동쪽 문은 원래 왕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왕이 들어오는 동쪽 문으로, 왕의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동쪽 문으로 들어온 왕에 의해서 사건화 되기에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 성전화 시켰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4-5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고 싶다. 그 만나는 장소는 성전이다. 그런데 그 성전이 어디 있는지 분간을 못하고 있는데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 문으로 들어왔다. 동쪽 문으로 들어갔는데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면, 그러면 대체 이런 상태가 어떤 상태냐? 몰랐는데 성령을 통해서 보니까 그것이 십자가 사건 안에서는 이 말씀이 완성이 된다는, 언약 안에서 완성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십자가 안에서 우리도 하나의 언약화 되었으니까, 이것을 막대기라고 합시다. 만화에서 사람을 어떻게 그리는지 알아요? 동그라미 그리고 막대기를 그립니다. 이게 1,700년 경 중국의 상형문자나 갑골문자에 보면 사람을 이렇게 표시했어요. 계집 녀(女)를 쓸 때 이 ‘여’자는 여자가 아기를 앉고 꿇어앉은 (변형된)모습입니다. 인간은 사건 안에서 이것저것 다 떼고 남는 것은 뭐냐? 인간은 하나의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단한 것처럼 여겨져도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막대기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사건화 시켜서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땅에서 성전의 기능을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통해 이 성전을 펼치시는 겁니다.
“네가 바로 성전이야.” 왜? 네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들어 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가 하는 것은 이 땅에서부터의 거룩입니다. 거룩이 뭐냐? 제사 드려야 하고, 제사장이 있어야 되고,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되는데 이 모든 것이 이제는 성도의 움직임, 막대기같은 우리의 움직임 속에서 예수님이 성전의 기능을 펼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건 어렵지 않지요? 사도 바울이나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스데반 집사가 죽었잖아요. 그냥 막대기로 죽은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죽음으로 누가 살아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스데반 집사를 거두어 가는 것이 나타났지요. 예수님 나타나시고 스데반 죽고 이것을 에스겔 43장으로 보면 스데반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들어있는 거예요. 사도행전 7장에서는 이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은 십자가 사건화입니다. 사건화가 뭐냐? 막대기로 보면 돼요. 사건화의 반대는 뭐냐? 역사화입니다. 역사화가 왜 나쁘냐? 역사를 펼치면 ‘나는 과거에는 이러했고 지금은 이렇게 앞으로는 이렇게 할 거야.’라고 자기 역사가 만들어져요. 그런데 이것을 강제로 뭉쳐봅시다. 그러면 과거 자르고 미래 잘라내면 남는 것은 지금 이 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 버려두고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할 때, 그 여인이 자신의 과거를 생각합니까, 미래를 생각합니까? 둘 다 잘려나갔어요. 남는 것은 주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건, 막대기만 남지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 모습입니다. 이게 성전의 모습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성도의 모습이고, 그 안에는 하나님의 성전 기능이 막대기를 통해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고.
극장에 스크린이 있습니다. 영사기가 있고 기사가 영사기를 돌립니다. 이 필름 안에 에스겔 42, 43장이 들어 있습니다. 이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환상이에요. “이건 필름이고 그냥 그림이야!”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영사기를 통해서 스크린에 그림이 보이고 움직이니까 42, 43장에 다 보이는 거예요.
그 안에 있는 것은 환상이 아니고 실제인데, 이 안에 필름이 돌아가는 것은 하나의 사건으로 집약되어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펼쳐지면 성전의 기능이 이 땅에 펼쳐지는 겁니다. 이 필름 안에 주께서 우리 자신을 집어넣습니다. 하나의 막대기로 넣으면 그것이 펼쳐지면 우리의 역사가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역사를 역사로 보지 말고 이 전체를 십자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보자는 말입니다. 과거 자랑할 것 없고, 미래 걱정할 필요 없고. 내일 죽을지 몰라요. 그러니 지금 사는 것도 주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전의 거룩함을, 제사의 기능이 반복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필름이 되는 겁니다.
43장 20-21절에 보면 “네가 그 피를 취하여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 네 모퉁이와 사면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케 하고 그 속죄의 수송아지를 취하여 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를지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히브리서 13장 1절에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에스겔 43장에서는 ‘피를 취하여 제단에 뿌리고’ 했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13장에는 ‘형제를 사랑하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고, 돈을 사랑치 말라.’고 했는데, 이것이 피 뿌리는 겁니까? 이것이 성전 제사입니까? 속죄제 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성전이 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에 관한 것이지요. 돈을 세면서 돈을 사랑치 말라는 이것이 지금 제사 드리는 중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 놀라운 일을 하면서 돈을 세고 있다니까요. “주님, 제가 이 돈을 사랑하는 줄 아시지요? 사랑 안 합니다.”하면서 돈을 세고 있어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것이 제사라니까요. 우리는 이것을 일상생활로 여겨요. 그런데 이것은 일상생활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이룬 제사의 완성이 그냥 스크린에 일상생활로 펼쳐진 것입니다.
제가 만약 히브리서를 쓴다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이런 것도 쓰겠지만, “네가 좋아하는 팀만 응원하지 말고 상대 팀도 응원해라.” 이렇게 쓸 거예요. 그냥 일상이에요. 그리고 “버스에 노인이 타거든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자리를 양보해라.” 이런 것도 쓴단 말이지요.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고, 이것이 우리가 드리는 제사니까.
그렇다면 에스겔 성전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으로 넘어옵니까? 그것은 새언약 때문에 그래요. 구약에 에스겔이 나오잖아요. 이것이 십자가로 모입니다. 십자가로 완성했잖아요. 그래서 십자가로 역사를 펼치면 구약에서는 제사의 형식이 된 것이 신약에서는 일상생활로 나타나지요. 이 일상생활을 거룩한 제사장의 생활로 보는 겁니다.
제사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사건화 되었기 때문에, 언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 언약이 실제로 우리를 통해서 펼쳐지면 우리의 일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것은 주변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생활 하도록 몰아붙여요. 주변의 여러 가지 사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생각해도 나는 이상한 인간이다. 나는 막대기 같아. 남들은 자랑하는데 나는 자랑하기 싫어.’하고 일상생활이 우리로 하여금 성도다운 모습으로 드러내는 거예요.
여기서 주의할 것은, 내 일상생활을 내 힘으로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예배나 기타 종교적인 생활을 일부러 끄집어내는 것은 가짜입니다. 왜? 이것은 ‘다 이루심’ 자체를 우리가 부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불신입니다. “내가 나쁜 짓을 했으니까 다음 달에는 헌금을 좀 더 해서 나쁜 짓에 대한 죄를 씻어야지.” 이런 생각으로 뭔가를 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자기만의 역사를 남에게 과시하려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주님이 ‘다 이루었다’는 언약의 사건화가 날아가 버리고 자기 자신의 역사만 남에게 자랑하는 셈이 되잖아요. 이 싸움, 성령과 육신의 싸움을 계속 해야 되는 겁니다.
그냥 사세요. 그러면서 그 틈에서 나오는 주님께서 살아계시고 구원했다는 사실을 뽑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게 되고, 그러면 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고 이 때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생각을 쏟아 내게 됩니다. 이것은 거룩한 성전의 삶, 거룩한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 제사 드린다는 모든 제사가 신약에서는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43장 27절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날이 찬 후 제 팔일에와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더라.”
이것을 일상화 해봅시다.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라.’ 어떻게 드릴까요? 정답은 그냥 사세요. 왜? 내가 어떻게 하든 예수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이것이 바로 에스겔 43장 27절을 내가 이룬 것이 아니고 주께서 지금 이것을 그대로 실현시키는 과정 속에 우리가 뽑혀 참여된 거예요.
이것이 구약 말씀이잖아요. 이것을 그대로 신약에 옮겨오면 오늘날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이 말씀이 완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우리는 그저 ‘고맙습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우리가 돈 세고 살아가는 일상을 그대로 받는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돈 받을 때는 정신을 차리고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되지.’ 이런 식으로 오버하지 말란 말이지요.
내가 내 스스로 조정하고 절제하고 그런 식으로 하면 제사장이신 주님이 홀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이 누락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성전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서의 예배가 뭡니까? 이 여인에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까? 아니지요. 그럼 물동이 버리는 것이 예배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이것이 그 여인의 예배입니다. 그것이 성전이고. 주께서 그 여인을 막대기로 사건화 시킨 것입니다. “나, 예수 믿어.” 이런 생각을 우리가 왜 못합니까? 늘 하잖아요. 그것이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넌 예수 안 믿지? 난 예수 믿어.” 이게 즐겁게 왜 안 나옵니까? 당연히 즐겁게 나오지요.
“나, 예수 믿어.” 이게 어떤 의미인줄 압니까?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그런 뜻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짓을 하고, 어떻게 인생이 꼬이고 해도 그것과 무관하게 나의 구주는 주님이니까 주께서 내 인생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나는 그 인생 속에서 ‘주님은 나의 구주십니다.’ 그 고백만 하면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았잖아요. 신앙생활 어렵지 않아요. 아내가 설거지하다가 화가 나서 “에이, 더러운 집구석. 더 이상은 못 살겠다.”하면서 컵을 깼단 말이지요. 남편이 “죄 없는 컵은 왜 깨냐?” 이렇게 나왔을 때, 그 소리를 우리는 들어야 해요. 그런 꾸중을 들을 때 다시 한 번 뭘 포기합니까? ‘언케니’한 것.
“내가 왜 깼지? 이상해. 내가 낯설어. 조금만 참았으면 될 걸 왜 이런 짓을 했지?” 그게 뭐냐 하면, 내 인생을 내가 만들어가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 순간 눈치 채게 됩니다. 이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런다고 이렇게는 하지 마세요. “성도가 컵 좀 깨면 어떤데?” 이러지는 맙시다. 이렇게 되면 예수 믿는 것이 하나의 자기 역사가 되니까 이것은 제 자랑이기 때문에 주님 증거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그래,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이렇게 속으로 삭이면 되는 겁니다. “컵 깼다고 당신이 짜증을 내? 당신은 언제 설거지 한 적 있어? 나는 성도야. 컵 깨도 괜찮아!” 이렇게 나오면 너무 오버하는 겁니다. 본인이 알아야 돼요. 주님께서 남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 구원하기 때문에 본인이 컵을 깨고, 꾸중 듣고, 왜 내가 이런 짓을 했지. 등의 복잡한 상황이 들이닥칠 때, 자신에 대해서 ‘내 인생은 내가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성전이란 낯선 공간이 지금 현실화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창세기 15장 17절을 보겠습니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이것과 에스겔 44장 2절에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라.”
창세기 15장에는 하나님이 횃불이 되셔서 쪼갠 재물 사이를 통과하지요. 인간이 통과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통과했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 자신이 통과할 공간을 하나님이 직접 만들었어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그 생각은 아브라함 생각이 아니지요? 하나님 생각이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친히 특수한 공간을 만들잖아요. 창세기 15장에서 횃불이 통과하는데, 하나님의 오실 자리, 하나님이 앉을 방석을 누가 만듭니까? 하나님 자신이 마련해요. 이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땅에 계시지를 않습니다.
일상적인 공간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특수한 공간을 만들어요. 특수한 공간을 만들고 특수한 공간에만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겁니다. 에스겔 44장 2절에 보면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고 하나님만 들어온다.’고 했지요. 그러면 인간이 성전을 만들어도 그 성전은 소용이 없습니다.
에스겔에서 실컷 성전의 높이는 얼마고, 규격은 어떻게 해놓고, 그 성전을 인간은 절대 못 만들뿐더러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드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아기 예수 태어날 때 옆에 성전 건물이 같이 만들어 졌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결국은 성전이 되었잖아요.
그러면 성전에 대한 모든 구조나 활동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야 해석이 되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성전 건축하기로는 해석이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평소에 종교생활 하고, 예배당 짓고 ‘하나님, 여기에 오시옵소서.’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왜 사람들이 이걸 모르느냔 말이지요.
사람들이 성전 짓고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하는 그 모든 것이 다 거짓말입니다. 몰라도 너무 몰라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짐승을 쪼개 놓았는데 하나님이 통과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지요.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횃불로 통과함으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재료와 장소와 시간과 절차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이디어를 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 받았다는 말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여인이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예수님께 물 대접했다고? 남자 여섯과 산 것? 물동이 버린 것? 아닙니다.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은 뭡니까? 예수님이 그 여인을 이용하신 거예요. 외계인이 나에게 찾아온 것은 내가 좋아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자기 UFO 착륙장으로 삼기 위해서 우리 집 뒤뜰에 온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았으니까 기쁘다.’는 말조차도 가짜일 가능성이 많아요. 구원 안 받았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어요.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황당하지요. “주여, 종이 뭔데 저를 찾아오십니까?” 이렇게 됩니다. 혹시 단(오 목사님 아들)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까? “주여, 종이 무엇인데 저를 찾아오셔서 간호사로 만들려 하십니까?” 간호사나 의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사용하신다는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볼 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주님께 영광 돌릴만한 것이 없어요. 여기 파인애플이 있는데 난데없이 하늘에서 무엇인가 떨어져서 꽂힌 거예요. 우리 등에 식칼을 맞은 겁니다. 그냥 우리 몸을 하나님 성전이 되게 하시는 것이지 우리 몸이 성전이 아니에요. 우리 몸을 성전 되게 한다니까요.
우리 몸을 제사가 완료된 장소로 봅니다. 내가 어떤 죄를 지어도 제사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된 현장으로 삼은 거예요. 이것을 성령 받은 사도들은 발견해요. 그래서 더 이상 “내가 좀 더 잘 살아야지.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해. 나는 오래 살고 싶어.” 이런 것이 없고, 사도 바울처럼 “빨리 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지요.
신앙생활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사도 바울은 어떻게 살았는지 보면 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내일 되면 다 잊어버리지요. 사도 바울을 안 보고 세상에서 잘 나가는 박근혜를 보고 이건희를 봅니다. 남의 자식들은 결혼할 때 어떻게 했고, 혼수는 무엇을 하고 이런 생각만 하지요. 조 집사님도 지금 혼수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니 사도 바울은 어떻게 살았으며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는지 별 생각이 없어요. 그런데 일이 꼬일 때, 나의 역사가 사건이 될 때,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고 살아가는데 내가 전혀 보탬도 안 되고 힘도 안 될 때, 포기할 때 확인해 보세요. 내 등에 식칼이 꽂혀 있는지? 성령의 식칼이 꽂혀 있는지?
그냥 살면 주께서 우리의 평범한 삶을 언케니하게, 아주 기이하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만들어 나가시는 그런 인생이 여러분에게 펼쳐 질 것입니다.
에스겔 44장 5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게 말하는바 여호와의 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이렇게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