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강-에스겔17장 22-24(높은 자, 낮은 자)130724-이 근호목사
50강-에스겔17장 22-24(높은 자, 낮은 자)130724-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59.3.137.51)
50강-에스겔17장 22-24(높은 자, 낮은 자)13072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7장 22절에서 2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7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7:22-24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빼어난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양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할찌라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지금 살아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느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죄를 통해서 느끼게 되는 겁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죄짓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역사나 하나님의 일을 찾고자 한다면 이것은 가짜 하나님이 나타날 공산이 큽니다. 그것은 바로 영웅적인 하나님, 대단하게 보이는 하나님, 모든 것을 다 가능케 하는 하나님으로서 그런 메시아로서 우리 앞에 등장하지요. 사실은 사탄이고 악마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다 알고 있지만, 진짜 하나님은 십자가 외에는 우리 앞에 자신을 나타내지를 않습니다.
병을 고치고 갑자기 돌이 떡이 되고 갑자기 큰 권력을 쥐게 되고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악마가 우리한테 줬다는 판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것이 악마가 제시한 유혹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바로 십자가뿐이고 십자가가 보이지 않을 때는 백 프로 악마가 유혹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인간은 주변의 십자가 빼놓고 다른 것을 다 달라고 하거든요. “주여, 십자가 지게 하옵소서.” 이런 것을 기도하는 사람? 몰라요, 정신 나간 상태에서는 이런 기도 할지 모르지만 맨 정신으로는 그런 기도를 아마 안 할걸요.
십자가질 테니 이것 내놓으라는 다른 꿍꿍이를 노릴 수는 있는데 “주여, 십자가 그 자체만을 원합니다. 십자가 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야 인간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우리가 사탄보고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탄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사탄을 우리가 부르고 찾고 있습니다. 잠언 서에 그런 말씀이 있어요.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잠 11:127) 나쁜 짓을 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은 필히 나쁜 짓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도박하고 싶은 사람에게 꼭 도박의 기회가 찾아오고 바람피우고 싶은 사람에게 꼭 바람피울 기회가 찾아오고 세상 적으로 돈을 원하는 사람에게 돈이 찾아오도록 되어 있어요. 그것은 이 세상 자체가 십자가 빼놓고는 다 욕망이 되는 세상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현재 속해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냐 하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천 년 만 년 산다고 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다녀가야 돼요. 누가 오셨다가 죽고 부활하시면 그게 정답입니다. 우리는 다녀가지는 못하고 그냥 여기 눌러 살고 있는데 연세 많은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할아버지는 연세가 얼마나 되느냐고 하면 “7학년 5반” “6학년 8반” 이런 식으로 하잖아요. 그래서 “아직 학교 다니십니까?” 하는 거예요. 이미 주님은 거쳐 갔거든요. 주님은 이미 졸업을 하고 거쳐 가버렸는데 아직도 6학년 8반, 7학년 2반, 8학년 4반도 계시고, 이런 식으로 계속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말이지요. 아직 졸업을 안 한 거지요. 졸업을 안 했으니 이 세상이 온전히 파악되지 못한다는 뜻이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제대로 없었다는 뜻이 돼요.
주택가에서 살던 대구의 정경과 높은 산에서 보는 대구의 정경이 달라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보게 되면 대구시 정경이 새롭게 다가오죠. 스모그 자욱한 곳이 보이면서 ‘뭐하려고 내가 저기서 살지?’ 이렇게 높은 곳에 서서 자기가 살아온 것을 다시 한 번 재조명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라는 것은 시간을 내서 등산 해봐야 아는 것이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빨래 널어야 되고 밥 차려야 되는데 그럴 여유가 없지요. 이미 다녀가신 적이 있는 분의 조망, 시선, 그리고 관점을 존중해야 됩니다.
세상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들이 갖고 있는 관점은 두 개로 나뉩니다. 하나는 인간에 관한 것, 또 하나는 인간 주변의 자연에 관한 것,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인간이 인간을 본다는 그것은 그냥 보지 않고 자기 역사를 자랑하고 싶어 하면서 남들을 대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을 본다는 자체가 중립이 아니고 죄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살만해서 살았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연은 인간에 대해서 누구든지 중립적인 위치를 취합니다. 개성공단 남북회담하면서 “요즘 날씨 덥죠? 장마도 참 오래 갑니다.” 할 때 그것 가지고 시비 거는 사람 별로 없어요.
왜, 자연 현상은 중립이기에. 그러나 인간의 말은 돌아서게 되면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싸움이 나거든요. 이 말은 뭐냐, 중립적인 자연 속에서 인간은 왜 자기밖에 모르냐는 말입니다. 뭔가 중립적인 자연과 잘난 체 하는 자신과 안 맞는 상태에서 우리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힘들게 살아갑니다. 부처 말대로 생로병사 자체가 장난이 아닙니다. 자연은 중립인데, 새는 그냥 짹짹거리고 있는데 인간은 새가 짹짹거리듯이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욕망과 야망과 야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직 남은 죽든 말든 나는 살아야 된다는 그것을 주장할 때 하나님이 베푸신 이 중립적인 자연 속에서 도대체 무슨 짓이냐, 하는 생각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거기다가 하나님까지 초청을 해요? 그 하나님은 백 프로 사탄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은 십자가로만 나타나기에 반드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내 죄를 죄라고 느끼는 그 현장에 주님께서 작용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가 나타났다고 하십니다. 이제 궁금합니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실 때 어떻게 나타나시는가? 2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이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오시면 그냥 곱게 우리가 알아듣는 식으로,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는 식으로 오시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성경본문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면서 오시고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면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이게 진짜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이외에 달리 나타나는 것, 높은 나무를 높이시고 낮은 나무를 낮추시고 푸른 나무를 푸르게 하고 마른 나무를 마르게 하시는 하나님은 사탄입니다. 악마에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 도무지 우리 인간들의 생각과 연결점을 주지를 않아요. ‘아, 이게 하나님의 뜻이구나. 이젠 알았다.’ 라고 할 수 있는 것, 절대로 그것이 포착되는 것을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중립이 아니에요. 중립 이야기를 다시 할까요? 아무리 원수지간이 만나도, 아무리 남북회담을 해도 장마에 대해서 또는 날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누가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 수가 없어요. 중립이기 때문이죠. 구름 보고 욕한다는 것은 바보잖아요.
그런데 자기 앞에 어떤 사람이 등장하게 되면 ‘저 인간이 나쁜 인간인가, 좋은 인간인가’ 검토에 들어가고 측정하게 됩니다. 인간은 중립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상대방만 중립이 아니고 나 자신도 나를 중립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공평한 사람이 아니고 항상 나는 나 자신을 볼 때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으로 매일 같이 눈만 뜨면 평가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남들은 다 죽어도, 남의 집 애는 물에 빠져 죽어도 내 애는 빠지면 안 됩니다.’ 그것을 항상 우리는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트위터에 이런 글이 있었어요. ‘내가 아는 애가 태안반도 수련회에 참석했는데 그 애가 마지막 살아남은 여섯 번째 아이였다.’는 내용이 글입니다. 다섯 명이 죽었는데 그 애가 마지막으로 빠져나오고 다 죽었다는 말이거든요.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애가 그 애라는 거지요.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참 기적이지요. 그런데 하나님보시기에도 기적입니까? 자기가 아는 애가 혹은 친척이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그런 일을 통해서 ‘나는 나만 살면 최고라는 이 생각이 주님을 피 흘리게 만든 생각’임이 다시 한 번 노출될 때 그 노출된 사실을 접할 때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 현장에 주님이 함께 있습니다. ‘주님, 역시나 나는 나밖에 모르는군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성경대로 표현하면 높은 나무를 낮추는 겁니다. 높은 나무를 낮추는 그 하나님이 낮아진 그 나무를 높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걸 어렵게 이야기해서 인간은 작품이 아니고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면 돼요. 하나님께서는 인간 그 자체를 작품으로 보지 않고 인간 그 자체를 하나님이 일하시는 과정으로 보십니다. 그러니까 제발 우리 자신도 ‘이만하면 되었다.’ 하고 종결짓지 마시고 매일같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과정과 또 과정과 과정을 보여주고 또 보여주고 또 보여주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취직하고 싶은데 취직되었다, 제대하고 싶은데 제대했다, 이렇게 뭔가 하고 싶은 일을 마무리 지으면 사람 마음이 풀어져요. ‘하나님이여, 제가 한 건수 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과정에서 이탈해서 독자적인 작품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것은 어느새 낮은 나무가 되지 못하고 높은 나무로 돌변해 있습니다. 같은 뜻으로 푸른 나무를 말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목사님,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어떻게 나타나십니까?” “높은 나무는 낮추시고 낮아진 나무를 높이시면서 나타나십니다.” 어떤 예가 있습니까? 푸르디푸른 나무를 바짝 마르게 하시고 바짝 마른 그 나무를 푸르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할 거예요. “이러나저러나 푸른 나무 되게 만들고 이러나저러나 높은 나무 되게 하는데 왜 일부러 푸른 나무를 말리고 높은 나무를 낮춥니까?” 그것은 과정이 중요하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협상하거나 타협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뭉개버리고 해체시켜서 우리를 무로 돌립니다. 무로 돌리고 무에서 다시 새로운 피조물 되는 그 과정과 예수님 십자가 사건과 연계를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덕으로 구원받게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품을 과정으로 바꾸기 위해서 해체작업에 나서는 거지요.
해체작업에 나서는데 그 해체작업에 나서면서 우리가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하는 것을 때려 부수는 그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실제로 하나님께 구원받는 과정에 속한 사람은 자기가 부서지고 뭉개지고 깨지는 과정을 통해서 십자가 지신 주인공이 그 십자가를 가지고 그 작업을 한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 느낌이 오는 거예요.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지를 못하고 자꾸 높은 나무가 높은 나무답게 뭔가 과시하기 위해서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잔뜩 끌어 모아요. 다 놓으면 되는데 놓지를 못하고 쓰레기 같은 것을 잔뜩 모아요.
다큐멘터리를 보니 치매 걸린 어떤 분인데 동네 쓰레기란 쓰레기는 다 끌어 모아놨어요. 보다 못한 구청에서 자원봉사대학생들과 함께 집에 모아놓은 쓰레기를 다 꺼내보니까 2톤이나 되었어요. 끌어 모을 줄만 알았지 내버릴 줄을 모르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좋은 것은 알아요. 성경 요한계시록 백독하고, 이렇게 다 알고 하는데 자기가 그런 것을 하면 높은 나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는 애초부터 높은 나무는 아예 생각도 하등 하지 마세요. 높은 나무는 우리 소관이 아니고 주님이 주시는 소관이지 어딜 높은 나무를 넘보고 무성한 나무를 어딜 넘봅니까? 아이고! 참 꿈도 야무집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을 하지요?
실제로 구원받은 사람 생각을 해보세요. 실제로 구원받은 사람이 나열된 유명한 말씀이 히브리서 11장이거든요. 다 들 필요도 없이 하나만 예로 들면 노아가 나옵니다. 노아도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평소에 뭘 했습니까? 어떤 가수의 노래를 보면 ‘꿈을 품고 있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노래했어요. 이름은 잘 기억 안 나는데. 꿈을 품은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품은 사람이 제일 아름답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다고 뚝딱거릴 때 이웃집 사람들이 나와 보지도 않았어요, 제 생각에는. 저 영감이 미쳤다고 했을 겁니다.
이 땡볕에, 비올 기미도 안 보이는데 그 거대한 배를 인류를 다 구원할 듯이 뚝딱거리고 있단 말이지요. “할아버지, 이 쓸데없는 방주를 왜 만드십니까?” 했을 때 노아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에게는 심판이 없지만 나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진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심판을 품고 사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심판을 품고 사니까 심판 앞에서 자시는 바짝 마른 나무요 자기는 낮은 나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어딜 심판 앞에서 감히 자기가 높은 나무 행세를 하고 “제 잎이 무성합니다.” 입을 벌려서 그런 망발을 합니까, 심판이 있는데.
사도바울이 내가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노라, 십자가 안에 있다는 말은 매일 같이 심판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그것은 참으로 주제넘은 짓이에요. 그 나라의 의만 있어도 황공무지로소이다, 하고 매일같이 넙죽 절해야 됩니다. 우주적인 심판도 심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너, 너 개인적인 심판을 매일같이 주시는 것에 감사해야 돼요.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심판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을 가지고 무성한 나무라고 하고 무엇을 가지고 푸른 나무라고 할 수 있느냐, 주께서는 이것을 아예 조져버리시는데.
저는 목사가 되어서 설교하는 것도 그렇게 과거에 교인으로 교회 다닌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생각이 들어요. 2차 대전 때인가 유럽의 어느 병사가 정신분열증을 일으켰어요. 전쟁이라는 것이 자기 정신력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육체의 본성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이 전쟁은 영화다.’ 미쳐서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 포탄은 진짜가 아니고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 소리는 다 음향효과이고 지금 포탄에 죽어가는 전우들은 진짜 죽은 것이 아니고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있다.’ 그런 망상을 하는 거예요.
현실을 감당하기에 너무 힘드니까 나름대로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 이것을 영화세트장에 왔다고 생각하게 되면 마음은 좀 편하고 놓이는 거예요. 구약성경, 이게 실제거든요. 이스라엘이 전쟁하고 망하는 이 이야기가 실제거든요. 구약에서 일어나는 그 전쟁하고 망하는 것이 실제인데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보면서 하나의 영화로 보는 거예요. 우리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막상 우리가 그 전쟁 통에 유다의 군사로 들어갔다면 그 앞에서 하나님이든 메시아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말짱 도루묵이고 아무소용 없는 거예요.
하나님한테 도와달란다고 부르짖는다고 도와줄 것도 아니고 화살은 날아들지요, 적들은 무섭게 쳐들어와서 짓밟지요,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거예요. 제가 지금 설교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이 현실을 우리는 감당하려고 하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감당하지 맙시다. ‘내가 죽으면 천국가고……’ 자꾸 이런 영화를 만들지 마세요. 강가에 서서 강을 건너가지만 강도 없고 강 너머도 없어요. 교회 마치고 집에 가면 빨래 감 쌓여 있고 일해야 월급 나오고 주식투자 하는 사람은 주식 값 올라야 되고 전세 사는 사람은 전세 값 올려달라고 하면 어디로 또 갈까 걱정해야 되고, 매일같이 북 핵이니 뭐니 이렇게 갖가지 위험과 걱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예쁘장한 하나님, 영웅적인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한 200억 쓰라는 이런 것은 없어요. 그런 꿈을 꾸는 것은 현실이 너무나 감당이 안 되기에 성경책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조작해 보는 겁니다. 인형놀이 하듯이 자기가 품을 수 있는 세계를 성경가지고 인위적으로 소꿉놀이 하듯이 조작해 내는 거예요. 그러나 실제로 이 세상은 하나님이 왔지만 하나님마저 죽여 버린 그 세계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도 감당 못했는데 우리가 감당할 수가 있습니까? 혹독한 이 현실을. 사사기 9장에 보면 아비멜렉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깡패인데 아버지가 기드온이에요. 요새말로 하면 대통령입니다.
대통령 아들이죠. 기드온이 미디안 군사를 이겼잖아요. 나라가 평안해지자 아들들이 권력을 탐내는 거예요. 아들들이 70명이나 되니 숫자대로 나누면 권력의 몫이 적잖아요. 그래서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이 어떻게 하느냐하면, 형제들 70명을 한 바위위에 놓고 다 죽여 버렸어요. 죽일 때 세겜이라는 동네에 갑니다. 갈릴리와 사해의 중간쯤에 있는 동네인데 거기 가서 “세겜 사람들이여! 지금 이 나라에 왕자가 너무 많으니 나라가 힘을 모으려면 역시 내가 나서야겠지요. 그러니 나를 밀어주세요.”라고 해 놓고 돈 주고 고용한 깡패들을 모아서 협박을 합니다. 자기 형제들을 깡패들 동원해서 다 죽인 거예요.
그런데 구사일생으로 요담이라는 말째 아들이 도망을 칩니다. 도망을 쳐서 세겜 근처 그리심산, 높이가 한 900미터쯤 되지요, 그 산에 올라가서 외칩니다. “세겜 사람들아! 내가 한 비유를 말하겠소. ‘감람나무야, 우리의 왕이 되어다오.’ 하니 감람나무가 ‘나는 기름 짜야 되니 왕 같은 것 안한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무화과나무야, 우리의 왕이 되어다오.’ ‘나는 맛있는 열매를 맺기에 왕 안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나의 할 일이 있다.’ ‘포도나무야, 네가 왕이 되어다오.’ 포도나무가 ‘나도 맛있는 과일 맺어야 되니 안 되겠다.’ 별로 할 일도 없는 가시나무에게 ‘가시나무야, 왕이 되어다오.’ ‘그래, 해줄게.’ 해서 가시나무가 왕이 되어 세겜사람들 다 죽였다는 이야기요.” 이렇게 비유를 이야기해요.
요담이 하는 말이 뭐냐, 이 세상은 가만있는 세상이 아니고 꼭 돛대가 되고 싶은 인간이 왜 등장하느냐는 말입니다. 이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이 세상은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꼭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하더라도 그 십자가는 뒷전이고 자기가 오야붕이 되고 싶은 인간이 반드시 등장하는데 그 등장한 오야붕이를 믿기는 믿지만 단순히 믿음 정도가 아니고 내가 되어야 되는데 왜 네가 되느냐, 하는 질투심을 유발시키는 가운데 등장한다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어떤 사람이 ‘내가 오야붕이 되겠다.’라고 할 때 이구동성으로 그 사람을 욕을 하지만 사실은 나도 그 자리를 탐하고 있음을 그 사람이 내 대신 보여준 거예요.
그러니 이 세상에 높은 나무되기 싫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푸른 나무 행세하기 싫은 사람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로 다가오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대장질 하고 거기에 대해서 질투심이 유발될 때에 이게 감당하기 힘든 현실인 것을 우리가 압시다.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나도 남들 70명 다 죽이고 혼자 오야붕 되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수십 번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우리를 자극하는 현실 속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우리 힘으로 구원 받아요? 턱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힘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영웅적인 하나님을 원합니까? 가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꼭 이야기해요. 꿈을 품은 사람은 아름답다고. 꿈 안품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큰 나무, 푸른 나무되고 싶은 꿈, 오야붕이 되고 싶은 꿈은 다 있는데. 본인이 하고 싫다고요? 자식들이 하면 기분 좋지요. 내가 늙어서 못 다한 꿈 자식들이 이뤄 보세요. 자식 업고 동네 한 바퀴 돌고 싶어요. 내 자식이 이런 자식이라고 어화둥둥 업고 돌고 싶어요.
예수님 낳은 어머니가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서 자긍심을 느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마리아 기절 안한 것이 천만 다행입니다. 태안반도에 해변에서 애 죽고 난 뒤에 엄마가 실신해서 업혀 나가는 것 보셨지요.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 잡을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왜, 우리는 이 세상을 감당 못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감당 못해요. 여러분, 착실하게 살아왔습니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내일 되면 또 오야붕 짓 하고 “내가 바로 푸른 나무다. 내가 바로 무성한 나무다.” 할 수 있는 자질이 얼마든지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단번에 지신 그 십자가가 영원한 우리의 복음입니다. 십자가 없으면 아무도 우리는 구원 못 받습니다. 그 십자가 나타나서 우리를 박살내거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찾아온 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다 안다고 우리는 우겼지만 막상 세상 생활에서는 남한테 기죽기 싫어서 시기하고 미워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저희들 모습, 그것이 푸른 나무요, 건방진 나무요, 교만한 나무요, 높은 나무요, 주께서 손봐줄 나무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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