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0712a-히2장16절(아브라함 자손) - 이 근호 목사
안양20130712a-히2장16절(아브라함 자손)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30)
안양20130712a-히2장16절(아브라함 자손) - 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서2장 16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보통 어떤 특정한 사람 아브라함을 내세우면 비교하는 대상은 같은 인간들끼리 비교대상을 해야 되는데, 여기는 누굴 비교 하는가 하면, 천사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는 말이 아브라함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하거든요.
그러면 같은 인간 대 인간을 비교할 때는 “너, 말고 이 사람 구원하겠다.” 라고 그렇게 나설 때 “저 사람은 왜 버리고 나는 왜 구원합니까?” 할 때 우리가 잘 아는 정답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아는 정답입니다. “저 사람보다 내가 더 훌륭하기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는 성경에는 없어요. 여러분들이 다 아시고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교회 잘 다니기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이런 거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잘해서 구원받습니다. 이런 것도 없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을 이루는 성취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갑이 아니고 언약이 갑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은 숨어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가 소유하거나 잡아채거나 할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를 잡아채는 겁니다. 사람은 맘에 드는 것을 시장에 가서 고르잖아요. 고를 때, 자꾸 모아서 내거 만들려고 하거든요. 진열대에 있는 것을 집어서 갖고 오면 이것은 내 영역에 속하는 겁니다. 구원받는 것도 그런 식으로 구원받고자 시도해요. 바깥에 있는 예수님을 내 안에 가지고 오면 되는 거예요. 뷔페에 가면 먹으라고 샐러드 있잖아요. 그러면 접시에 담아서 가지고 오면 내 샐러드 되는 거죠. 우리는 이런 식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보편화됐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성경말씀은 믿고 싶어도 못 믿는 사람들을 탈락시키는 책입니다. 구원 받고 싶다고 다 받아주는 게 아니고 좋은 영화 나왔다고 “영화 좋아요.” 한 소리했다고 다 영화관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표 사세요, 하듯이. 언약의 표가 없는 사람은 이마에 그리스도 도장이 안 박힌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도장 파서 ‘그리스도’ 동그란 도장해서 이마나 손목에 찍어서 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리스도인을 내가 찍어서 가는 방식 같으면 일반교회에서 사람들을 천국보내기 위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온갖 주문하잖아요. 그 식이나 우리가 집에서 도장 파서 ‘그리스도인‘하든지 아니면 문신 새기던지 그런 식으로 갈 것 같으면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진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을 믿으세요. 할 때 이런 게 어려우니까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을 믿으세요, 라고 할 때 나는 믿습니다. 믿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에서 나온 믿음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믿음이라는 그것이 인간 속에서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따로 있어요. 따로 있어서 내가 믿고자 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믿어지게 조치를 당하는 겁니다. 우리가. 수동적이지요. 능동적이 아니고 수동적으로.
그러려면 내가 믿는다는 것은 전부 다 버려야 돼요. 사람이 뭘 믿겠다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살겠다는 거거든요. 이것, 저것 해가지고 예수도 성경도 집어넣어서 한 접시에 이것도 하고 건포도도 넣고 새우도 넣고 채워서 이걸 내가 갖겠다는 거잖아요. 이런 방식은 하나님이 준비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믿음이라는 것을 생산해 내는 하나의 수완이죠. 수단이고 방법이고.
제가 오늘 아침에 집을 나오면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로 10분간 타게 되면 불로동 불로성당이 나와요. 큰 도로에서 성당은 안쪽에 있어요. 보이지도 않아요. 가게 건물들 때문에.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여기는 불로성당입니다. 하는 방송이 나와요. 내 옆에 있던 할머니가 성당을 지나가면서 가슴에다 십자가를 그어요. 성당 근처도 안 갔어요. 지나가기만 해도 긋는 거예요. 왜 저걸 하고 싶어 할까요? 이건 뭔가 간직해야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뭔가 간직하는 방법은 반복된 훈련과 습관이 몸에 익혀야 돼요. 이게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믿음이라는 거예요.
이걸 성당뿐만 아니고 오늘날 교회들이 교인들이 긋습니다. 가르쳐 줍니다. 그럴 때 교인들은 대단히 만족해합니다. 왜? 어떤 특정 방법으로 계속 믿음을 내가 소유하기 때문에.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소유함으로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게 나라는 것은 내가 지금 통장 몇 개 있고, 집은 뭐고, 내가 학력은 어느 정도이며 자식은 몇 명 있으며 항상 뭔가 소유, 소유한 걸 집합할 때 그게 나가 돼요. 소유한 게 없으면 어디서 어디까지 나인 줄 몰라요. 도대체 어느 게 나인 줄 모르거든요. 항상 소유해서 내 것과 니 것의 경계선을 마련할 때, 바로 경계선 안 쪽이 나의 것에서 더 나가면 나가 돼요. 나의 것에서.
또 한 예를 들면, 얼굴이 예뻤다. 얼굴이 나는 예쁘다 하고, 남들도 그렇게 인정하고, 나도 거기에 대해서 충분히 동의하고. 예뻤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친구가 하는 말이 "니 듣기 싫은 소리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할게. 니 얼굴 이리 망가졌냐." 이리 했을 때, 갑자기 기분이 나쁜 거예요. 왜냐 하면, 이뻤다. 이뻤다가 계속 모아져야 그게 나다운 거예요. 그런데 안 이쁘다는 거예요. 그러면 옛날 이뻤다고 한 경계선이 있잖아요. 경계선에 안 예쁜 것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걸 보톡스를 맞던지, 주사를 맞던지 잡아 째던지 해서 빨리 안 예쁜 것을 쫓아내고 이쁜 것만 남아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나는 옛날 습관 된 나다운 습관이 계속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안심을 해요. 마사지 받고 돈 좀 들이는 거예요.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나라는 것은 그동안 내가 수집해서 끌어 모았던 것이 바로 '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나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빌지요. 그걸 교회에서는 뭐냐, 두 자로 '축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확장되는 것을 축복, 반대로 감소되는 것을 사라지는 것을 '저주'라고 하는 거예요. 알아들으셨지요? 대심방할 때 축복받기 위해서 맛있는 거 해 줍니다. 감소되기 위해서 대 심방 받지 않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합니까? 모든 걸 잃어버려라 하지요. 현재 니가 갖고 있는 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어요. 내가 갖은 것으로 천국에 인정이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 것으로 바꿔치기 되어야 돼요. 예수님께서 바꿔치려면 내가 가진 것을 다 놓쳐야 돼요. 흔히 하는 쉬운 예로 애들이 골목에서 흙장난하고 놀다가 흙이 잔득 묻었잖아요. 맛있는 빵을 엄마가 주려해도 손에 흙이 묻었으니까 흙을 털어내야 이걸 받는다 말이지요.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가 기대하는 목숨의 연장과 같이 결합이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제가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은 저주입니다. 이게 저주에요. 죽지도 않아요. 어느 인간도 안 죽습니다. 악한 자는 악한 자 나름대로 부활하여 나오기 때문에 안 죽습니다. 벌레를 여자 분들이 제일 무서워할 때 몇 번 밟으면 죽어야 하는데 이게 죽지를 않을 때 더 흉직 하지요. 이것은 벌레만 흉직한 줄 압니까? 우리가 더 흉직해요. 내가 나를 목을 밟고 밟아도 안 죽어요. 죽었는가 싶으면 마지막 날에 다시 악한 자의 부활로, 선한 자의 부활로 웃고 나올 사람 있고, 울고 나올 사람 있지만, 다시 또 기어 나온다니까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나도 버리지 않습니다. 다 재활용해요. 안 믿는 남편, 자식들 계속 삽니다. 차라리 죽을 것 같으면 자살하지, 죽는 것이 모든 걸 잊는 방법이라면 자살하지요. 인간은 자살에 실패합니다. 어떤 자살하는 사람도 성공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한 번 만들어졌잖아요. 빼도 박도 못해요. 끝났어요. 이게 우리의 팔자입니다. 영광된 부활로 살던지 아니면 지옥에서 영원히 살던지 둘 중에 하나지, 제삼의 장소는 없습니다. 나사로의 앞집에 살던 부자는 지금도 지옥에 있어요. 거기는 나이도 먹지 않고요, 지옥 간사람 넓지도 않아요. 스톱됐어요. 인간이 아니지요. 하나의 좀비라 보면 됩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처음에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좀비가 됐잖아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이제 생명나무 따 먹고 영원히 살겠다. 이미 심보가 그 심보에요. 이제는 선악과 따 먹은 것은 따 먹은 거고 죄 짓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이제 남은 대책은 하나밖에 없다. 영원히 안 죽으면 된다는 것이 인간의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아담부터 시작한 것이 뭐냐, 하늘나라를 자기 자신이 오래 사는 곳을 천국이라, 극락이라, 그런 아이디어로 만들어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야기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오래 산다, 행복 한다가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의 준비된 약속이 펼쳐지는 곳. 그게 천국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펼쳐지는 곳이 천국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오래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게 천국이라면, 둘 중에 어느 것을 포기해야 됩니까? 우리의 천국을 포기해야 돼요.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천국가려면 착해야 되니까 나도 한 번 착해보자, 예수님만 사랑해 보자, “예수여, 제가 어느 정도 착하면 영생 얻습니까?” 할 때 주님께서는 니 착함과 천국은 상관없다. 한 번 적어볼까요. 천국은 뭐와 상관없다? 천국은 너의 착함과 상관없다. 깡패도 사실은 착하고 싶어요. 나쁜 인간도 지가 착한 쪽에 있음을 외치고 싶어요. “니가 왜 그런 짓했어?” “어쩌다보니 그랬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나의 근본은 여전히 착합니다. 이런 뜻이에요.
나, 라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걸 가지고 나라고 남한테 내세운다 말이지요. 그 중에 착함이 들어있으니까 이 착함가지고 천국을 한 번 가보자. 할 때 그것이 천국은 너의 착함에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아브라함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차라리 아브라함이 있으니까 아브라함이 아닌 사람들이 뭐를 흉내 내는가 하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맹세가 있는데, 맹세는 생각 안하고 자꾸 아브라함을 엇비슷하게 그냥 닮아가게 되면 자기도 아브라함되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다 같은 인간인데 니 따라 붙이면 되겠다, 이리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알아요. 나는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아브람이라는 걸 알아요. 나는 원래 아브람이에요. 아브라함이 아니에요. 아브라함과 아브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아브람은 죽어야 마땅한 거고, 아브라함은 살아야 마땅한 거예요. 그런데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되는 데는 아브람이 어떤 역할이나 보탬이 되지를 못해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되는데 아브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힘으로 아브라함이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맹세로 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이미 모든 것이 완료가 된 상태에요. 천사는 그런 게 없어요. 천사는 생긴 그대로 완료가 된 반면에 아브라함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됐기 때문에 하나님은 천사보다도 아브라함을 더 쳐주는 겁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요소가 있지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하지요. 그러니까 믿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의 기반이 따로 있어요.
그 믿음의 기반에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쏟아질 때 수동적입니다. 쏟아질 때 우리는 받게 되는데 그렇게 쏟아지게 되면 이것은 내가 만든 믿음이 아니라서 나의 추억, 나의 체험, 나의 경험, 나의 지식, 나의 정보력, 나의 노력, 이런 것은 일체 그 믿음에 합류되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따로 마련됐기 때문에. 옛날 화장실에 줄을 잡아당기면 물이 쏟아지잖아요. 물은 위에서 쏟아지게 되어 있듯이 그 물은 대통령이 화장실에 가나 국회에 가나 동일한 물이 쏟아집니다. 대통령이다, 깡패다, 창녀다, 일체 묻지를 않고 그냥 위에 물이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믿음이 착해요. 왜냐 하면, 그 믿음을 우리가 만들어내지 않았기 때문에 착해요. 우리가 그 믿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착해요. 그래서 노력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착해요. 신앙생활에 아무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너무 너무 착해요. 그걸 성경에서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설쳐대는 사람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찾으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겸손한 사람은 지가 한 게 없기 때문에 모든 공로를 누구에게 돌리지요? 주님의 이름만 공로로 돌리지요. 주님보시기에도 착하고 하나님도 흐뭇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돌아온 탕자, 그것도 빈손 들고 자수성가 한 것도 아니고 쫄딱 망해서 손들고 나오는 그러한 착함, 이 착함은 인력으로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처럼 한걸음 두 걸음 발걸음을 이끄시는 거예요. 이끌지 아니하면 우리는 내가 만들지 않은 그 믿음 속에 장착하기 힘들어요. 제가 대구 강의할 때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요. 그 기도하면서 핵심이 뭐냐 하면,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가 핵심이 아니고 니가 어느 자리에서 기도하느냐, 기도의 자리가 더 중요해요. 응답받는 자리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기도할 때, 지가 빡시게 기도한다는 자기 행위를 기도의 출발점으로 삼아요. 그러니까 매일 묻는 게 기도를 몇 번해야 됩니까? 언제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꾸 물어요. 기도는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를 가지고 기도가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유럽도시가 멋있잖아요. 유럽에 광장이 있는 것은 로마식이에요. 로마에 광장이 있는 것은 그전에 그리스식입니다. 헬라식입니다. 아고라라해서 민주주의 제도를 할 때 광장에서 토론을 해요. 시민권만 가진 사람에게 해당되는데, 바울이 바로 그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에요. 로마에서의 시민권은 20%, 16%밖에 안돼요. 그 외에 노예들입니다. 의사들이 노예고, 전부 다 노예들이에요. 그럼 중요한 것은 시민은 뭐냐 하면, 먹고 노는 거예요. 전쟁하는 목적이 뭡니까? 지 먹고 노는 것 때문에 하는 거예요. 일은 남이 하고 노예가 하고, 지는 놀고먹으려고 목숨 걸고 싸움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분수가 있어요. 멋있는 조각품 사이에서 분수에서 세차게 올라올 때, 여기에 풍선을 하나 올려놨다고 봅시다. 분출하는 물줄기에 풍선이 내려가겠어요? 안 내려가겠어요? 안 내려가고 뜨지요.
기도의 자리는 우리 대신 기도하신 분이 있어요. 기도의 자리에. 그 기도하신 분을 주의 이름이라 합니다. 주의 이름이 유럽 중세도시에 광장에 있는 분수대에 있는 물줄기 분출하는 그 지점에 있고 이게 오게 되면 우리는 여기에 붕붕 떠있지요. 분출하는 주님의 기도에 의해서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 오늘도 한걸음 두 걸음, 걷고, 자전 차 몰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머리카락도 빠지게 하고 희게 하고, 헤아리게 하시고, 이게 분출되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자리에서 기도의 응답으로 이게 원인이 되고 그 결과물, 그 결과물이 뭐냐, 우리 자신의 인생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마귀한테 마귀의 종이 돼요. 이렇게 분수대에 붕붕 떠있지 않으면 우리는 마귀의 종이 되는 겁니다. 마귀의 종의 특징이 뭐냐,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 거죠.
기도한다는 것은 아까 했는데 다시 해봅시다. 인간은 끌어 모아야 누구 것이 되느냐 하면, 나라는 것이 정립이 돼요. 그러면 끌어 모을 때 뭐로 끌어 모으느냐, 자기 힘으로 못 끌어 모을 때는 신의 힘의 도움으로 내거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어떤 강구를 하게 되는데 그걸 가지고 사람들은 교회에서 두 자로 '기도' 영어로 Prayer 기도라 하는 거예요.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망한 거예요. 기도에 너무 정성이 많아서. 온통 기도생활이에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심지어 그냥 기도하는 것도 성에 안차서 이레에 두 번씩, 금식까지 한다니까요. 굶어가면서 기도하니까 그것은 자기의 각오를 지금 하나님이 모든 걸 보고 계시니까 자신이 이 정도 자기 포기를 하면서도 이번의 기도내용은 반드시 해줘야겠습니다.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100% 마귀한테 패배하고 있는 중입니다.
베드로가 끝까지 예수님 따라가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이 말렸잖아요. "베드로야, 안 돼! 안 돼! 지금 니와 나의 관계는 니가 알기 전에 누가 먼저 아느냐, 악마가 먼저 알아요. 베드로는 천당 가면 안 돼! 지옥 가야 돼! 이미 악마의 표적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모든 인간은 악마의 표적이고 종이죠. 죄 아래 갇혔으니까. 악마는 고소하는 천사거든요. 정죄하는 천사입니다. 신 앞에서 늘 정죄해요. 그게 스가랴에 나오지요. 하나님 앞에서 정죄하잖아요. 쟤는 저렇게 법에 어긋나고, 이거 법에 어긋나고, 하나님께서 마귀보고 "그게 바로 법에 어긋나는 짓이야." 정죄 당할 대상이 아닌데도 정죄하는 그게 바로 마귀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보내셔서 주의 이름의 자리에서 분출하는 사람을 직접 만들어요. 직접 관리해요. 직접 관리하게 되면, 베드로는 어디에 속합니까? 베드로는 가룟유다와 달리 주님의 관리대상이 되면서 베드로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어디서 나온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나온 겁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이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유일하게 응답받는 분이 바로 예수님 기도지요. 성령도 마찬가지지만. 그 예수님이 기도한 응답과 응답의 나날이 베드로의 나날이었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의 나날이기를 바랍니다. 하루, 하루 눈 뜨고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응답의 결과로서 축복으로서 하루, 하루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이것을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 뭐냐 하면, 정죄함이 없는 경우가 뭐라 했습니까? 뭐 안에 정죄함이 없다? 예수 안에 있는 자만이 정죄함이 없지, 예수 밖에 나가 정죄함이 없나니 인정 안합니다.
예수 안의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나라는 육신 자체가 이미 예수님에 의하면 이미 육신 자체가 죄라는 것을 익히 아는 사람이 바로 예수 안에 이미 들어온 사람입니다. 자기 죄를 알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그 꼴을 못 보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으면 다 죽여야지 마귀도 죽이고 다 죽여야지 왜 특정인물에 대해서는 정죄함이 없나니, 분명히 선악과 따 먹으면 죽으리라 했으면 죽어야지 왜 정죄함이 없고 심판도 없고, 영원한 저주도 없고, 왜 그런 혜택을 베푸느냐 하는 겁니다. 이제 악마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을 알겠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노리는 거예요. 예수님을 노리고 하여튼 예수님의 복음만 전하면 그 현장에 마귀들은 출동합니다. 꼭 견인차 같아요. 사고가 나면 언제 알았는지 벌써 견인차 와있는 것처럼.
우리의 반석, 우리의 기초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눈에서 외면해 버리면 벌써 "뭘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마귀가 이미 마귀 견인차 7대 8대 7귀신이 대기하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옛날 또 육신에 버릇이 나와 가지고 좋은 것을 가짐으로서 나를 확장시키고 나를 세계화시키고 이 세상이 곧 나를 위한 세상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줘서 나는 이렇게 잘 만들었습니다. 라고 자기 의시대고 자랑 질 해대는 그 작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반석위에 있지 아니하면 위에 100층 건물을 지어도 이것은 헛발질한 겁니다. 인생 헛산 겁니다. 여러분, 여름철에 아이스크림 있잖아요. 어릴 때 사 먹은 아이스크림이 기억나면 아무리 3층, 5층 채워도 이 과자가 부실하면 감사합니다, 하고 돌아서면 벌써 땅에 떨어져 있지요. 오랜만에 용돈으로 샀는데, 과자만 집어요. 삼성전자 주식 132만원 올라가면 뭐합니까? 밑이 반석이 아닌데. 롯데그룹 무슨 그룹 회장, 임원들, 고위관리, 의사, 판사, 그 출세한다고 머리카락 다 빠지고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그러면 뭐합니까? 이 안의 콘을 쏟아버렸는데. 다 쏟았는데.
마귀가 그걸 알고 반석에 대해서 신경 끊어버리고 니가 자랑질하기 위해서 남과 이기기 위해서는 자꾸 스펙을 쌓아라, 남이 부러워하고 탐낼만한 위인이 되어라, 너는 하면 할 수 있다. 그걸 강조에다 강조를 계속해 나가는 거예요.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겁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 처음부터 강의 다시 할게요. 아브라함은 절대로 아브라함이 될 수 없어요. 아브람과 아브라함은 절대로 다른 사람이에요. 같을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한테는 하나님의 맹세가 필요하고 언약이 필요하지만, 아브람은 지 살던 행세, 그 육적인 게 있잖아요. 그대로 살면 아브람 돼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그래서 천사는 뭡니까? 천사는 영원한 천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영원한 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어 질 때 개입된 하나님의 본인의 언약과 맹세를 하나님이 더 귀하게 보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귀한 게 아니고 우리를 천국 가는 사람으로 바뀌어 지게 하기 위해서 새롭게 투입된 그 무엇,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더 귀하게 보는 거예요. 괜히 지 구원받는 지가 귀하다고 까불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귀한 거예요. 그걸 가지고 기도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기도할 때, 기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뭐가 중요하다? 기도의 자리가 중요하다고 했지요. 기도 자리에서 누가 기도한다 했지요? 구약에서는 주의 이름이라 하고, 그래서 구약에서의 기도는 기도하는 게 기도가 아니고 어느 자리에, 니가 주의 이름 자리에 니가 놓여 있으면 그걸 기도라 하고 그러면 그 백성은 기도의 주님의 결과물이 되지요.
그러면 이 분수가 분출하게 되면 여기 뭐가 탄다 했습니까? 분출하는 물이 너무 세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출 위에 붕붕 떠 있지요.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주의 이름의 결과물로 살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기도라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기도합니까?” 묻지 마세요. “몇 분합니까?” 그런 건 기도도 아니에요. 그건 자기의 집념이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한나가 있었지요. 한나는 자기가 아기를 못 낳는 이유를 몰랐어요. 그런데 브린나라는 여자에게 자녀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분명히 두 번씩 나옵니다. 세 번씩 나오는 게 하나님이 일부러 잉태지 못하게 하심이라가 여러 번 나와요. 한나에 대해서. 그리고 둘 사이에 사이가 좋을 때 한나는 자식을 달라고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브린나 여자가 자꾸 자식 있다고 핍박을 하니까 그럴 때 한나가 밀려서,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잉태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그걸 하나님 자체의 하신 일을 증명하기 위해서 한나는 엘리제사장 성전에 가서 기도하게 되지요. 한나 이야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러니까 보편적인 경험상 자식 있을 때는 축복이고, 자식이 없으면 저주라는 일방적인 왕이 없던 사사시대입니다. 일방적인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깨기 위해서 한나에게 처음부터 자식이 없는 여자로 결혼케 한 거예요. 남편은 더욱 더 한나를 사랑하지요. 그런데 브린나라는 여자가 와가지고 형님, 형님 해가면서 지 자식 있다고 으스대니까 그 핍박을 하니까 그 서러움에 하나님이여,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못 낳는 것이지 저주받을 짓을 해서 애기 없는 게 아닙니다, 하는 걸 증명해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울고불고 기도한 게 아니에요. 입을 다물고 기도했는데, 입을 다물고 기도하니까 엘리제사장이 더 수상하다고 술 먹었지? 이리 하는 거예요. 술 먹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기도라 해서 하게 되죠. 그래서 했는데, 나중에 한나가 자식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지요. 아들이 세 명이고 딸이 둘이고 5명이나 낳았어요. 그러니까 이건 애기 못 낳는 여자가 아니지요. 애기 못 낳는 여자가 아닌데 하나님이 성태지 못하게 했다는 것을 자기는 분명히 알았어요. “나, 하나님이 일부러 안 갖게 해줘!” 하는 말을 적들은 브린나는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이에 오늘 본문 히브리서의 그 악마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하고 연관이 되는 겁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려우니까 잘 들어보세요. 세상에 살면서 악마라는 것이 어느 때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악마가 나타나면 공동묘지 비오는 날에 개인택시 지나가다가 머리카락 풀고 하얀 소복 입고 개인택시 모가지 쥐는 거, 전설의 고향 나오는 거 있잖아요. 내 엉덩이 내놔라 하는 걸 악마라 하는데, 악마라 하는 것은 구약에서는 이런 괴상한 게 아니고요, 실제적으로 한 가정에서 동서 간에 싸우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원수가 나온다니까요. 악마는 너무 일상적인 삶속에 있어요. 악마가.
그걸 우리는 발견하는 안목이 있어야 돼요. 일상적인 삶속에서 악마가 뭐냐 하면, 어~~ 귀신 잡아먹자! 이런 게 아니고 일상적인 세상 사람들의 그 사고방식을 준해서 축복과 저주를 논할 때, 그 때 악마가 나오는 거예요. 잘되어야 되고, 부자 되어야 되고, 건강해야 되고, 그런데 한나를 통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없는 사람을 세워서 있는 자를 부끄럽게 만들고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한나의 일생 자체가 한나 주변에 있는 그런 하나님이 없는 사사시대에 더러운 사사시대에 악마성이 이미 아침 안개처럼 온 나라에 젖어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식 없는 자가 오히려 자식 있는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러한 절차를 한나 인생 속에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일종의 반도체 칩을 한나 속에 박아 넣을 때, 한나라 하는 것은 본인이 원하는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수반되는, 담겨있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악마라는 것은 항상 악마 혼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들이 닥친 인물과 대비되어서 악마가 등장해요. 악마는 그냥 우리 현실화되지 않고 복음을 전할 때만 악마가 나와요. 복음 받은 사람이 등장할 때만 악마가 나와요. 요한계시록 해석 굉장히 쉬워요. 짐승의 인 굉장히 쉬워요. 그리스도 인 받은 사람이 등장하면 그 사람 빼놓고 나머지는 다 짐승의 인이에요. 짐승의 인해가지고 666 바 코트 있는 게 아니고 아까 제가 강의할 때 했잖아요.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은 요한 계시록을 우리가 도장 파서 그리스도 해서 아저씨 하나 파주세요. 해서 ‘그리스도인’해서 동그라미 속에 해서 이마에다가 박으면 이것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만들어낸 식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낸 방법이에요. 그렇지요? 여러분, 이게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적으로 아까 천주교 예를 들었지요. 교회에서 그렇게 하지요. 버스타고 성당 지나가기만 해도 가슴에 긋는 거 보세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반복해서 훈련되게 되면 그것이 마치 우리의 믿음을 우리가 유지할 수 있는 하나의 요령, 하나의 숙련된 기술, 단련된 믿음을 확보하게 한 붙들어 매게 한 내 소유화되기 위한 그래서 내가 나다운 그걸 지키기 위한 그 수완, 종교적인 경건의 반복, 이런 것처럼 이해되도록 교회에서 그렇게 훈련시키는 겁니다.
무에서 유를 할 때, 인간의 건전한 행위를 집어넣으면 무에서 유, 없는 믿음도 만들어낸다고 보는 겁니다. 주기도문 천 번 외우면 방언 터지듯이 할렐루야 삼천번하면 이건 아무리 성질 늦은 사람도 터지지요. 그리고 또 방언이 안 나오는가 싶으면 했던 그 기술을 되풀이하면 되잖아요.
구약에서의 한나가 그냥 존재하면서 하나의 찬양이 나오지요. 한나의 찬양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이런 게 있어요.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 메시아를 우리 자손을 통해서 보낸다 했어요. 그러면 사무엘을 통해서 그게 메시아가 오느냐, 이런 문제에 대해서 구약학자들이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사무엘은 왕이 아닙니다. 그런데 메시아는 왕이잖아요. 그런데 그 한나의 예언을 보면, 내가 받친 아들을 통해서 그렇게 메시아가 온다고 하니까 어? 이게 연결이 안 되네. 처음부터 사무엘이 왕으로 갈 것 같으면 우리가 “아, 한나가 왕을 낳았구먼. 아, 그 왕이 다윗 왕이 되는구나!” 되는데, 연결이 안 된다 말이지요.
연결이 안 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아브람은 아무리 애써도 아브라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애쓰는 아브람이 될 뿐이지요. 열심 내는 신자라고 우기는 사람 되지, 결국 성도는 될 수 없어요.
이걸 구약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지금 악마를 이야기하니까 중요한 것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넘어가면서 필히 여기에 들어가야 할 게 있어요. ‘죽음’입니다. 아브람이 죽어야 아브라함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죽게 되면, 이건 싶게 말해서 다리가 끊어진 거예요. 여기서 천국 가는 다리가 있잖아요. 다리를 주님 쪽에서 일부러 끊어버렸어요. 6.25때 한강다리 끊었잖아요. 일부러 끊은 거예요. 왜냐 하면, 아브람이 그냥 자기 힘으로 아브라함이 돼 버리면, 이건 천국이 아니고 완전히 죄인들 다 끌어 모으면 돼요. 이것은 제2의 지옥이에요. 그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 천국은 무슨 나라라고 했습니까? 천국은 약속의 나라. 하나님의 약속이지요. 우리나라가 아니고 약속이 완성된 나라거든요. 우리를 위한 나라가 아니고 약속을 위해서 만들어진 약속의 나라에요. 따라서 천국에 간다는 것은 약속이라는 거기에서 우리한테 뭔가 쏟아져야 돼요. 저 쪽에서 와야 되는데, 우리에게서 가는 다리는 철거돼야 되고 저 쪽에서 다리를 새로 놔요.
옛날에는 라디오에 안테나가 있어서 짧은 것을 죽죽 빼면 길어지지요. 예수님의 지팡이는 요술지팡이에요. 찍찍하면 이게 길어져서 우리의 마음까지, 율법은 왔다가 우리 마음에 연결이 안돼요. 율법은 십계명은 우리의 마음 앞에서 스톱합니다. 지켜라, 지켜라, 이 모든 율법 365개 다 지켜라, 사도바울의 명령까지 보태서 얼마나 많습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런 거 다 합하면 엄청나지요. 지켜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안테나가 하늘에서 내려온 거 같으면 지켜라가 이쪽에서 스톱되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 들어와서 드디어 지켰다가 되는 거예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다가 우리 속에서 폭발해서 이게 우리가 지킨 사람이 되어 가지고 우리는 남한테 이야기합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일만 악의 뿌리다(딤전6:10절)우리는 이야기하는 거예요.
만약에 성령을 안 받게 되면, 예수 믿어라, 이리 되거든요.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믿으라는 명령이 명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들어와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걸 가지고 우리가 덥석 잡으면 이게 잡히지를 않아요. 왜? 우리 쪽에서의 아브라함은 이미 끊어진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우리 쪽에는 마귀가 악마가 우리로 하여금 조종하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설치한 다리를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다리가 놓여 졌는데, 그 다리의 끝이 그냥 우리 앞에 약만 올리는 게 아니고 “날 믿으면 구원받지!” 이게 아니고 아예 우리 속까지 들어와요.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 안’ 이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요즘 더울 때 모기 있잖아요. 모기 있을 때 팍팍 뿌리면 그 때는 모기가 5분 동안은 안와요. 그래도 어디서 벌써 왔는지, 윙~~ 하고 소리가 들리면서 날아다니지요. 그러면 또 잠깨어 일어나서 뿌리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예 모기향 말고 전자파로 하는 거로 하게 되면 우리는 저 전자파 안에 놓여있지요. 그러면 항상 어떻게 됩니까? 항상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뭐가 없나니? 정죄함이 없나니, 그걸 지난 주일 낮에는 뭐라 했습니까? 정죄함이 없다는 말을 찬송가에 있는 용어로 바꿔서 말했지요. 다시는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여, 이제 기억 나십니까?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다시는 너희의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그래서 전자파 안에서는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리라, 그래서 우리 자체가 주의 이름이 벌인 우린 자체가 결과물이 되는 거예요.
우리 쪽에서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언약 안에 아브라함이 들어있어요. 하나님의 생명책 안에는 명단이 들어있어요. 그 명단을 명단답게 그리스도인답게 만들어내는 모든 숙제와 업무는 소관이 우리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해내신 거예요. 해내신 결과가 요 모양 요 꼴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감사하지요. 모든 일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이걸 알기 때문에 모든 일에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할 뿐이에요. 같은 말이에요. 감사한다, 기도한다, 기뻐한다, 같은 말입니다. 성령 안에서는 다 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평생 아브라함으로 살면서 항상 아브람 쪽의 요소를 평생 자기가 끌고 가는 겁니다. 요러한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그걸 16절에 보면,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천사와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천사는 달라질 게 없다고 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뭐가 있다? 아브람을 먼저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뭐한다? 아브라함으로 만드는 그 원리 법칙을 아브라함에게만 하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에게도 동일하게 되어 주지요.
이걸 유대인들은 오해해서 아브라함 자손 하니까 DNA가 같은 그 육적인 인간을 두고 이야기하는 줄 오해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그 원칙,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는 언약적인 원칙이 그 안에서 제공을 받은 자가 아브라함 자손이 되는 거예요.
백부장이 예수님보고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쉽게 말해서 까라면 까겠습니다. 이리 나온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본 아브라함의 자손은 천국에서 다 나가! 보내버리고 이방인 너가 아브라함 자손이 가야 될 천국을 몽땅 다 차지한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주의 이름은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거예요.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그 능력을 가진 분이 실제로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백부장은 예수님이 그런 분인 것을 눈치 챈 겁니다. 성령에 의해서 안겁니다. 알아 모신 겁니다. “오실 메시아가 아브라함 자손이 당신입니다.”
자, 그러면 제가 한 번 물어봅시다. 아브라함 자손을 붙들어 주게 되면, 아브라함 자손 이외에는 악마의 세력을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겠습니까? 그걸 묻는 겁니다. 없지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인간은 다 악마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시행했던 그 원칙 있잖아요. 그 원칙을 받은 사람만 악마의 세력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예수님 오신 것은 다가 아니라 오직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그 원리, 원칙만 집어넣어가지고 거기에 결과물이 되는 사람만 건지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이런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130712a-히2장16절(아브라함 자손) - 이 근호 목사.hwp (65.5K), Down: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