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학2장4-9(왕 같은 제사장)130721-이 근호 목사
3강-학2장4-9(왕 같은 제사장)130721-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3강-학2장4-9(왕 같은 제사장)1307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학개 2장 4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11페이지입니다.
학개 2:4-9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전 지으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전은 무엇인가? 성전은 죄 용서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물이 성전입니다. 혹시 누가 묻거든 그렇게 이야기하세요. 성전이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줄게. 용서해 줄게.’ 이거보다도 ‘이 성전을 근거해서 내가 너희를 용서를 하겠다.‘ 그러니까 너희가 ’내가 용서를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걱정스럽거든 성전 속에 들어가 봐라. 거기에 보면 너희들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뭔가 기계 엔진 작동 같은 것이 거기서 굴러가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엔진이 가동되게 되면 바깥에 나오는 효과는 뭐냐, 죄 용서가 되는 겁니다. 이 성전은 그냥 건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안에 어떤 죄도 용서 되게 하는 원리 원칙이 몇몇 동원된 재료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그걸 실현시켰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흠 없는 제물을 제사장을 통해서 바쳐야 되고, 피를 흘리고 하나님께서 그 피를 받음으로써 죄 용서가 가능하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지은 죄가 성전이 있음으로써 용서가 되는데요. 그러면 그 성전을 유지를 돼야 되는데 그 유지에 동원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성전이란 건물이 있어야 되고 거기에 종사하는 제사장들이 있어야 되고 그 제사장이 없으면 24시간 매달릴 수 없기 때문에 당번제로 해서 3교대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제물을 가져와야 되는데 그 제물을 따로 목장을 만드는 게 아니고 제사장들이 따로 목장을 만들어서 양과 소를 목축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죄라고 간주한 사람들이 자기 죄 지은 만큼 그걸 들고 와야 돼요. 들고 와서 성전 입구까지 오게 되면 성전까지는 못 들어오고 양이나 소나 제물만 바깥으로 보냅니다. 물론 그 관리하는 사무소가 성전 입구에 있겠죠. 거기에 문지기기 지키고 있어서 문지기는 레위 인들이 문지기를 해서 지켜서 일반인들이 못 오도록 해야 되고 그렇게 제물만 오게 되면 그 제물에 제사장이 ‘하나님이여, 저 사람의 죄를 이렇게 이전시킵니다.’ 하고 이전등기 시키는 안수를 하게 됩니다.
안수가 돼 있는 사람은 검정 도장 찍듯이 안수 받은 제물은 뜰에 있는 제단에 가서 아주 맹렬한 불로서 놋 제단에서 태워버리면 그것은 일단 죄는 공중으로 함께 날라 가면서 거기서 피가 나오는데 죄를 씻어주는 정도가 아니고 죄가 용서가 돼서 은혜가 돼야 되기 때문에 그 피는 나중에 지성소에 가서 뿌림으로써 전부 다 모든 것이 마감이 되는 작업이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선 제사장들은 그 일에 종사하다 보니까 수입이 있어야 되고 결혼도 해야 되니까 생계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 생계비는 십일조란 이름으로 백성들이 수입의 1/10을 세금용으로 내고 그거 말고 따로 성전 세라 해서 이거는 수입에 관계없이 남자 같으면 모든 가정은 다 내는 비용이 있어요. 성전 세를 2세겔인가 내야 되는데 이 성전이 있기 때문에 성전이 유지가 돼야 되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도 성전 세 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당시 이런 방금 제가 한 성전 제도, 이걸 제사장 제도라 하는데 이런 제도에 의하면 이게 무슨 뜻이 되느냐 하면 ‘어이, 예수와 그 집단 잠깐 스톱해 보세요. 성전 세 내세요.’ 만약에 예수님 제자가 ‘안내면 어떻게 할 건데?’ ‘안내면 당신 죄는 용서 못 받지.’ 그러면 제자들이 웃겠죠. ‘누가 죄 짓고 누가 용서한단 말이냐? 말도 안 돼, 진짜.’ ‘당신이 용서 받아야 돼, 우리 예수님이 누군지 알아? 죄 용서 하시는 메시야야. 어디서? 무릎 꿇어. 어디 죄 용서 하시는 분보고 성전 세 안 내라고 강요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화를 내면서 할 수도 있는데 주님께서 말렸죠.
“나는 죄 용서 하는 권세를 누리기 전에 이미 인간들이 죄란 무엇인가를 겪기 위해서 성전 세 달라는 그것마저 자기는 담당해야 된다고 생각하시고 다만 성전 세는 내기는 내되 너희들이 지금 엉뚱한 사람 붙들고 성전 세 내라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물고기 한 마리 잡게 해서 물고기 아가리 벌려 보니까 거기에 딱 더도 덜도 말고 딱 성전 세 되는 그 비용만 딱 들어있는 거예요. 성전 세가 76543원이라면 딱 들어보니까 7만 원 짜리 7개 하고 잔돈이 딱 맞게 들어있는 식으로 고렇게 들어있어서 내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이란 제도, 그리고 성전이 있을 때 비로소 백성들은 ‘아! 용서 받은 거 맞구나.’ 하고 안심을 하는 그 상황,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게 모형이거든요. 그 모형에 진짜 죄 용서 하시는 분이, 제물 되시는 분이 왔을 때 그 딜레마, 그 양쪽을 다 같이 경험하고 있는 인간들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놀랍게도 성전제도에 대해서 어떤 표를 던지고 좋아합니다. 지금도 천주교나 기독교에서는 그런 식으로 나가고 있잖아요. 사람들이 그걸 좋아하니까, 눈에 안 보이는 예수님이 용서합니다. 하는 것은 영 실감이 안 나고 믿음직스럽지 못해요. 그거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부한테 와서 고해성사하고 거창한 고딕적인 건물, 나중에는 성당 건물도 변해요. 그런 성당 성 소피아 성당은 돔 식으로 동그랗게 돼 있는데 그런 멋있는 성당을 100년 동안 지어가듯이 왠지 내 가슴에 추억으로서 믿음직스럽게 남아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 보기 전에 먼저 우리는 결론을 내립시다. 그러면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성전이란 그것은 사실은 예수님이 성전이 정답인데 사실은 인간 자신이 하는 행동이 집결된 그 모임, 그걸 사람들은 대체 성전으로 믿고 있는 겁니다. 내가 뭐 했다는 것을 그걸 믿는 거예요. 예수님이 용서했다가 아니라 내가 용서받을 짓을 했다, 그것을 믿는 거예요. ‘제가 예수 믿었잖아요. 믿었기 때문에 용서해 주세요.’라는 것이 더 강렬하게 우리한테 오죠.
그리고 내가 믿었다는 것을 믿다 보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서 믿었으며 몇 년째 믿고 있으며 언제 그 믿었던 날짜, 그때 11월 3일이었고 그때 오후 5시 해가 넘어갈 그때 은혜 받아서 믿었습니다. 그걸 더 의지하게 돼요. 예수님 어디로 갔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매일같이 용서하시는데, 지금 매일같이 용서하시는 건 잊어버리고 한번 그때 한꺼번에 뭉쳐서 받은 그 추억의 사건만 쥐고 있으니 아예 기념 날이 됐어요. 이것은 곧 우리 자신이 스스로 우상시 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봅시다. 오늘 본문에 봐서는 이러한 사실을 어떤 식으로 드러내는가, 여기 4절에 보면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또 사람 이름 또 나와요. 내 이름도 기억하기 골치 아픈데, 사람 이름만 딱 나오면 우리는 딱 순간적으로 부담이 갑니다. 어떤 부담감이 가느냐 하면 ‘하나님, 스룹바벨을 얼마나 알아야 구원받습니까? 이런 거, 여호수아 이거 몰라도 좀 빼먹으면 혹시 벌 받습니까? 이런 부담감이겠죠.
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이렇게 골치 아프거든요. 합치세요. 합치면 이게 뭐냐 하면 왕과 대제사장의 결합이 되는 겁니다. 왕과 대제사장이 결합이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둘 다 기름을 부음 받았거든요. 둘 다 기름을 부었다는 말은 둘 다 하나님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성전 있고 제사장 있을 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기름을 부음 받고 피를 부음 받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일을 할 수 있거든요.
이렇게 기름을 부음 받은 사람이 일을 하면 되는데 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 두 종류입니까? 왕도 기름 부었고 제사장도 기름 부었고, 왜 이렇게 골치 아프게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왜 두 종류로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이것은 제사장과 왕, 이 두 개가 나중에 어디서 합치 되느냐 하면 예수님에게서 합치가 됩니다.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이 돼요.
왕 같은 제사장 하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죠? 요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오늘날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겁니다. 요것은 그만큼 역사가 있어요. 이건 언제 이야기냐 하면 이것은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으로 구원할 때 뭐라고 부르느냐 하면 ‘얘들아’ 이렇게 부르는 것도 아니고 ‘야들아’ 이렇게 부르는 것도 아니고 “왕 같은 제사장들아” 이렇게 불렀어요.
그러면 왕 같은 제사장이 되려면 우리 모습 보고 이야기하면 안 되고 우리 안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뭔가 부풀어져야 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언약이란 겁니다. 언약이 우리를 덮치게 되면 언약에 준해서 ‘이 왕 같은 제사장들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인간이 그걸 실패하게 되니까, 이스라엘은 실패하거든요. 그 이스라엘 실패한 것을 예수님이 담당했으니까 예수님이 왕 같은 제사장되고요. 예수님이 성공한 그것이 건물의 모퉁이 돌이 되면 그 건물에 있는 여분의 나머지 모든 벽돌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려도 마땅한 겁니다. 언약에 준해서. 왕 같은 제사장은 일종의 신분증 같은 겁니다.
아르키메데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뭘 발견했느냐 하면 이걸 발견했어요. 참 아르키메데스 이야기 들어보면 어떤 점이 신기하냐 하면 이것도 발견이냐? 할 정도로, 그럼 그 전에 사람들은 이것도 몰랐다는 말인가, 할 정도로 그게 신기한데 목욕탕에 들어갔는데 목욕탕 욕조에 자기가 들어가니까 물이 꽉 차 있다가 물이 바깥으로 흘러 넘쳤습니다. 그걸 발견한 거예요. 그럼 우리 단군 할아버지는 목욕도 안 했단 말입니까? 하루나 이틀 만에 목욕을 했어도 분명히 지가 들어가면 물통에 물이 넘친다는 거 알거든요. 주몽 봐도 목욕하는 거 나오잖아요. 삼천 궁녀 목욕했다는 것도 나오잖아요. 그런데 왜 그들은 과학 법칙을 몰랐던 거예요? 그거 참 신기하죠.
그들은 뭘 알았느냐 하면 내가 들어간 무게만큼 물이 빠진다는 것을 알았던 거예요. 아르키메데스 빼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데 아르키메데스는 뭘 발견했느냐 하면 무게만큼 빠지는 것이 아니고 부피만큼 빠진다는 거예요. 아! 그 차이. 그 차이가 오늘날 뭘 만들었느냐 하면 비데를 만들었거든요. 화장실에 뒤에 있는 물이 누르면 물이 알아서 빠지면 물이 저절로 차는 것이 부레라는 게 있어요. 그게 물이 빠지면 자동적으로 수돗물이 열려서 쏟아지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조선 사람들, 고려 사람들, 화장실이 그 모양 그 꼴이죠. 진작 알았으면 진작 그거 만드는 건데.
우리 속의 언약은 주님의 부피로 부레처럼 부풀어 올라서 우리를 용서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정작 니 몸이 있지만 우리 몸은 하등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우리 속에 무엇이 장착돼 있는가, 언약의 장착이 우리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주 특이한 민족 이예요. 이스라엘 민족이 아주 특이한 민족인데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5절에 보면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라 돼 있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애굽 사람들 하고 너희들은 달리 살아야 될 존재다. 이런 뜻 이예요. 애굽이란 나라를 아주 힘주어 강조하면서 애굽에 살던 사람은 보통 사람이라면, 애굽에서 나왔던 너희들은 언약대로 살아야 될 특수한 사람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달라져도 다 달라져야 돼요. 몽땅 다 달라져야 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을 때 그들은 그게 간식인 줄 알았어요. 만나가 주식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음식은 그런 만나 한 종류가 아니었어요. 반찬도 열 두 가지쯤 됐을 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튼 한 가지는 아니었을 거예요. 주식은 그래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오늘도 만나, 내일도 만나, 메뉴 짤 것도 없어요. 그냥 만나에요.
중고등학교 급식하면서 한 달 내내, 아침에 만나, 점심에 만나 주면 애들이 자기 부모한테 얘기해서 일러바칠 거예요. ‘하나님, 우리 학교는 만나만 줘요.’ 그 학교 안 보낼 겁니다.
그것은 만나라는 그 음식 자체가 하나님이 죄 용서하기 위해서 성전이 있는 것처럼 너희들은 말씀 때문에 말씀이 너희를 살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씀이라는 것을 인간의 물체 적 형식으로 사물화 시켜서 변형시킨 것이 만나에요. 이 ‘만나를 먹어라.’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제 해석이 아닙니다. 신명기 8장 해석에 의하면 ‘만나를 먹어라.’가 아니라 말씀을 먹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지키는 것은 익숙한데 말씀을 먹으라 하면 우리는 난처해하거든요. 말씀은 지키나 안 지키나 그냥 살아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만나는 안 먹어버리면 우리가 굶어죽어요. 말씀을 안 먹어버리면 우리의 몸은 자장면이나 짬봉을 먹어서 배는 똥 배 나와서 탱탱하지만 그건 죽은 인간 이예요.
하나님께서 이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걸 특수한 언약이 있는 국가로 만드는 겁니다. 그 언약이 있을 때 언약을 알려줘야 되는데 언약을 모르면 안 되니까, 언약을 알려 줄 때 제사장과 왕, 왕과 제사장을 구분시켜서 그것이 어디서 합치되는가, 합치점에서 언약의 온전함을 다 보여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왕 따로 제사장 따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왕과 제사장을 따로 분리시키려는 겁니다.
왕이 뭐냐, 스룹바벨 총독이죠. 제사장은 뭐냐 하면 여호수아입니다. 이 두 사람을 이렇게 분리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두 사람을 이렇게 우리는 머리가 좋기 때문에 ‘아! 이 두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죄 용서가 성사가 되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성전에서 양을 잡아서 피를 냈다. 피가 있음으로써 우리 죄 용서받는다. 아까 이야기했죠. 그러나 그건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지금 바깥에는 백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쪽 안에 있는 이 피가 저 백성들하고 연관이 되려면 저 백성들은 남의 자식 되면 안 되고 그 왕의 백성이 되는 왕과 백성의 관계라는 것이 정립이 될 때 이 왕에서 이루어진 이 피가 저쪽에 용서가 되는 거예요. 성경에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어요. 예수님을 친구로 삼고 동창생으로 여기고, 이러면 안 돼요. 우리는 왕이 있어야 돼요. 왕이!
예수님은 왕과 제사장이 결합됐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할 때 왕으로 대해야 됩니다. 무릎을 꿇고 우리는 그분의 신하가 돼야 되고 그분의 백성이 돼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분의 것이고 우리는 그분의 것을 할당받은 것이고 그냥 분배받은 것이고 선물 받은 것이지, 내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노선을 걸을 수가 없어요.
현대에는 파편화 되었다. 이런 말을 하는데 파편이란 말은 조각, 조각났다. 접시 깨보세요. 잘게 조각조각 나죠.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은 한 마디로 말해서 전부 다 조각조각 이예요. 전부 다 자기 파편화 되었어요. 다 깨져있어요. 그 깨진 내 조각과 이쪽 조각을 맞추는 방법은 현대에서 오직 돈 밖에 없어요. 돈으로 인간관계가 성립됩니다. 파편화 됐으니까 본인도 알아요. 자기가 추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성형수술을 많이 해요. 자꾸 자기를 추하게 보는 겁니다. 저쪽 조각, 저쪽 연애 인들 조각하고 자기 조각을 맞춰보니까 영, 자기가 못 생겼거든요. 저쪽은 날씬하고 자기는 뚱뚱하니까. 그래서 뱃살 빼는 수술하고 지방 빼는 수술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이 자체가 전부 다 조각조각 난 파편 이예요.
그런데 속마음은 뭐냐 하면 이 깨진 것을 치료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현대인들이 원하는 건 사랑입니다. 그런데 참 불쌍한 것은 평소의 사랑의 관계가 돈의 거래로 하다 보니까 사랑을 얻는 것도 이건 조건화, 돈 거래하듯이 사랑도 거래합니다. ‘아이쿠, 당신 딸래미 우리한테 며느리 주면 제가 당신 빚 10억 갚아줄게.’ 이렇게 나와요. 10억 갚아줄 테니까 당신 딸 달라고. 오로라 공주 이야깁니다. 드라마가 다 그런 식 이예요.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내 집안사람 만들면 그 대신 돈 주면 된다는 거예요. 이 평소에 깨진 그것을 돈으로 전부 다 스카치테이프처럼 갖다 붙이면 전부 다 대충 뭔가 파편에서 추하지 않고 점잖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왕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사람들이 왕을 좋아하지 않아요. 1789년에 프랑스에서 왕을 죽여 버리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되는 프랑스 시민혁명이잖아요. 그 민주주의가 온 나라 229개국에 퍼졌어요. 그래서 지금은 전부 다 왕 제도가 아니고 왕은 있으나 마나고 왕은 상징적 존재고, 전부 다 의회 민주주의입니다.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도 되려고 껍죽거리고 데모하려고 하는데, 전부 다 파편화, 개인화 돼 있어요.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니 용서 받으려고 하나? 안 받으려고 하나?’ ‘받으려고.’ ‘그럼 니 개인은 누구한테 종속되어라. 니 왕이 있다.’ 왕이 있으면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고 왕이 책임지는 겁니다. 그 왕이 책임진다는 표현을 뭐냐, 예수님을 나의 주, 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나의 왕이시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은 뭐냐, 왕인데 보통 왕은 폭력입니다. 보통 왕은 압력을 가하고 그냥 뺏어가는 것, 그게 왕이 하는 횡포죠. 권력이 세니까. 그런데 예수님 왕의 차이점은 뭐냐, 제사장으로 오시는 거예요. 그럼 뭐냐 하면 이것은 고통입니다. 아픔이고 희생이고 봉사고 섬김입니다.
하나의 밀알이 죽어야, 왕이 죽으면 니가, 백성이 열매를 얻는 방식, 그 두 가지, 왕이면서도 제사장처럼 희생하는 그 기능을 하신 분은 이 세상에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것은 하나님도 인정해 주니까 우리가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는 고백,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성전입니다. 더 이상 우리자신이 파편화된, 조각난 우리자신을 우상화 하지 말고 ’언제 믿었니? 오랫동안 믿었느니.‘ 그거 하지 마시고 ’지금도 여전히 왕 되시고 제사장 되시는 분이 성전으로서 함께 우리를 용서하고 있습니다.’라는 고백 그거 때문에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 노릇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체적인 증거, 오늘날 우리 자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속에 꿈틀거리는 언약의 완성! 왕이신 예수님이 희생하신 십자가로 희생하신 사건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것이 용서의 공장인 것을, 용서의 엔진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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