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을 의지함 130717
애굽을 의지함 130717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애굽을 의지함(에스겔 17:11-16)
이근호
13-07-17 21:01
애굽에 의지함
2013년 7월 17일 본문 말씀: 에스겔 17:11-16
(겔 17:11,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7:12, 개역) 『너는 패역한 족속에게 묻기를 너희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고 그들에게 고하기를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방백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가고』
(겔 17:13, 개역) 『그 왕족 중에 하나를 택하여 언약을 세우고 그로 맹세케 하고 또 그 땅의 능한 자들을 옮겨 갔나니』
(겔 17:14, 개역) 『이는 나라를 낮추어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 언약을 지켜야 능히 서게 하려 하였음이어늘』
(겔 17:15, 개역) 『그가 사자를 애굽에 보내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
(겔 17:16,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벨론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가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그 왕의 거하는 곳 바벨론 중에서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이라』
(겔 17:17, 개역) 『대적이 토성을 쌓으며 운제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멸절하려 할 때에 바로가 그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그 전쟁에 그를 도와주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구원이 대단히 요란스러워 보입니다. 신약에 와서 그냥 간단하게 “예수 믿으면 천국이다”고 알면 되는데 왜 구약 때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상황처럼 분주할까요? 그것은 일단 ‘닫힌 상황’에서는 그 담힌 상황 밖을 알 수가 없기에 그 자체적으로 제한한 현실 이해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정치적 상황’입니다. 흔히들 종교를 통해서 신의 나라로 접촉이 가능하다고 알 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를 보니 소위 신성하다는 종교의 궁극적 모양새는 권력형으로 갖추어집니다. 정치적 사안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면서 홍해바다까지 오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에게는 ‘홍해 이후’라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홍해에 빠져죽든지 아니면 뒤쫓아온 애굽 군대에 몰살당하든지 하는 절망적 상황 뿐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그려지는 현실상이란 곧 정치적 상황 뿐입니다. 즉 ‘지도자를 잘 만나야 우리가 산다’는 겁니다.
바다 자체가 둘로 나뉘어져 그 가운데 통과하는 길이 나올 줄이야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소위 ‘현실 그 자체’라고 알고 있는 그 상황이 자신들의 인식을 제한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 뒤 요단강 가에서 다달았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지팡이들고 요단강을 물을 갈라놓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역시 난감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은 그 뒤 여리고성 함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난공불락의 성채를 무기없이 무너뜨린다는 아이디어는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겁니다. 그처럼 사람들은 ‘닫혀 있는 상황’에서는 그 다음의 상황을 짐작조차 못합니다. 구약에서 볼 때, 신약의 상황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이 곧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능력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입니다. 이점은 12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스승을 지키기위해 무력을 사룡했는데 단도로 말고라는 종의 귀를 베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시면서 그 떨어진 말고의 귀를 제자리로 도로 붙여놓았습니다.
이 정도의 대단한 능력의 소지자라면 십자가 죽음이라는 처참하고 치욕스러운 죽음을 저항없이 맞이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나 그당시 집권자들이나 백성들도 모두 ‘정치적 상황’을 최종적인 현실상으로 간주하는데는 이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현실 그 자체로 보는 안목이 곧 죄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고 나라 지키기 위해 애굽에 도움을 청하려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왕은 곧 나의 종이다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왕의 굴복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앙을 내세우는 나라 백성이나 왕으로는 모멸감을 갖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언약의 진수라는 겁니다. 언약이란 기존의 힘으로 버티는 정치적 상황에서 도리어 약한 자로 희생당하는 식으로 이 현실 세계에 펼친다는 겁니다.
애굽이라는 나라는 언약 구성에 있어 필수 요소입니다. 로마서 9:16-18에 보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정치적 상황’으로서 현실이 최종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알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있어 대변자적인 인물입니다. 힘으로는 최종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강퍅’을 제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보시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 달성에 있어 필히 ‘강퍅’과 ‘긍휼’이라는 상반된 결과가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퍅이란 바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힘을 그리워하는 태도를 말하고 긍휼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언약을 알게 하기 위해 울게 되는 상황입니다. 창세기 37:32-35에 보면, “그 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언약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아픔에 동참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죽는 죽음의 소식을 전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는데 안 울 아버지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긍휼이 전달되는 참된 현실입니다.
모든 것들이 정치적인 힘의 논리를 사랑하고 전개되는 마당에 단순히 자신의 힘을 잃었다고 해서는 슬퍼하거나 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은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슬퍼서 우는 자들이 바로 ‘갇힌 상황’ 너머를 읽어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오늘날 언약을 소개합니다.
유대나라가 바벨론에 망하는 것은 실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언약 안에 담긴 내용이 전달되는 모양새입니다. 망해야 산다는 경로를 타고 있는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현실로 자족하거나 만족하거나 만끽하는 재미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한시로 잊지 않고 사는 성도가 여전히 이 세상에 출현됩니다.
바로 언약적인 모임이란 이런 예수님의 아픔을 공유하면서 교류를 나누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씀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7-19 15:16
49강-에스겔17장 11-17(애굽을 의지함)13071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7장 11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7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7:11-17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패역한 족속에게 묻기를 너희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고 그들에게 고하기를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방백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가고 그 왕족 중에 하나를 택하여 언약을 세우고 그로 맹세케 하고 또 그 땅의 능한 자들을 옮겨 갔나니 이는 나라를 낮추어 스스로 서지 못하고 그 언약을 지켜야 능히 서게 하려 하였음이어늘 그가 사자를 애굽에 보내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 바벨론 왕을 배반하였으니 형통하겠느냐 이런 일을 행한 자가 피하겠느냐 언약을 배반하고야 피하겠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바벨론 왕이 그를 왕으로 세웠거늘 그가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그 왕의 거하는 곳 바벨론 중에서 왕과 함께 있다가 죽을 것이라 대적이 토성을 쌓으며 운제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멸절하려 할 때에 바로가 그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그 전쟁에 그를 도와주지 못하리라.”
언약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때 이것이 인간들이 언약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처럼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일방적입니다. 구원은 안 받고 싶다고 해서 구원 안 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고 싶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 입장에서 어느 쪽이 더 기분 좋은 이야기냐, 구원 안 되도 구원되게 하시는 그쪽이 굉장히 우리 마음을 기분 좋게 만들지요. 반대로 구원하고자해 도 하나님께서 구원 안 되게 하시는데 구원받기 싫어도 구원되어야 되고 구원을 원해도 구원이 안 된다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협의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게 뭐냐,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를 건져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었기에 그때부터 구원해주고 안 해주고의 소관이 인간의 의견을 떠나버렸어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그 분이 모든 말씀을 홀로 다 이루었기에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안하고에 대해서 예수님이 우리보고 의견을 묻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구원 좀 해줘? 아님 지옥갈래?” 이렇게 묻지를 않고 주 예수님이 주인으로서 자신의 주 되심을 다 펼치시게 되면 그 펼쳐진 결과에 의해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못 받습니다. 그 자체가 언약의 완성입니다.
나는 왜 구원 안 해주는가, 짜증내지 마시고 네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언약의 완성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언약이 완성되는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누구는 버리고 누구는 그냥 건지는 거예요. 구약 때부터 유명한 하나님이 하신 멘트가 있어요.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택했다는 말씀이 신약에 와서 예수님에게만 적용됩니다. 이미 누굴 선택하고 버리고 하는 권한은 예수님 혼자 주도권을 다 갖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구원이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내가 어떻게 열심히 한다고 해서 구원 받고 농땡이 친다고 해서 구원 안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주님에게 권한이 넘어 갔음을 믿는 그 사람은 이미 구원된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언약이 이만큼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교회는, 외국교회도 마찬가지고 언약에 대해서 금시초문, 못 들어봤다는 식으로 나오는 이유는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만 했지 모든 주도권이 예수님에게 가 있다는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내 앞일은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이 교회에서조차 습관화되어 있다 보니 믿음이 없고 믿음이 없는 이유는 성령을 안 받아서 그래요.
성령을 주고 안주고는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성령을 주시면 받기 싫어도 받아야 되고 안 주면 원해도 못 받게 되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모든 구원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주도권이 주님에게 넘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방금 제가 언급한 언약의 완성이라는 것이 최종적인 이런 모습을 띈다고 설명을 했거든요. 그건 신약 때고요 구약 때는 하나님이 언약을 어떻게 성취하는가, 그걸 우리가 몰라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는 신약이니까 구약은 몰라도 된다.’라고 해버리면 에스겔 구약시대의 선지자 이야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구약 때에 에스겔 선지자나 다른 선지자들, 오늘 본문 같은 경우를 보게 되면, 12절을 보게 되면 “너는 패역한 족속에게 묻기를 너희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겠느냐 하고 그들에게 고하기를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과 방백을 사로잡아 바벨론 자기에게로 끌어가고.”라고 되어 있잖아요. 구원받는데 왜 이렇게 요란스럽습니까? 그냥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면 간단하고 깔끔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구원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어떤 나라가 와서 이스라엘 왕을 사로잡았다, 뭐가 어쩌고저쩌고’ 어떤 전쟁상태, 어떤 복잡한 양상으로 끌고 가는 이유가 뭐냐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문을 닫아두게 되면 닫힌 입장에서는 밖의 상황을 전혀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죄를 씻어줘서 구원한다는 이 상황은 신약 때거든요. 구약 때 사람들은 신약 때 상황에 대해서 문이 닫혀 있다고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문이 닫혀 있기에 문 닫힌 이쪽에서는 문 열면 어떤 상황인지를 전혀 모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지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어요. 홍해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착했을 때 홍해 자체가 닫힌 상황입니다. 홍해 앞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랐어요. 모세도 모르고 아무도 몰랐습니다.
모세는 죽고 요단강 앞에서 여호수아가 이끈 이스라엘 백성들이 섰을 때 당시 요단강 물은 지금의 장마철처럼 물이 물어서 도저히 못 건너갑니다. 그 다음이 어떤 상황인지는 그 앞에 닫혀 있는 상황이기에 요단강 그 이후의 상황은 모릅니다. 우리야 신약에 있어서 그 문 밖의 상황을 아니까 이미 닫혀 있는 상황을 넘어섰잖아요, 넘어섰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알지요. 그런데 닫혀 있는 상황에 있을 때에, 구약 때는 그 죄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하면, 정치적 상황으로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정치적 상황입니다.
정치적 상황이란 것은 그야말로 삶의 현실 그 자체입니다. 한 예를 들면 지금 개성공단재개를 위한 남북 간 협의를 합니다. 그것은 정치적 상황에 속합니다. 국정원선거개입을 두고 정당 간에 논쟁을 벌입니다. 그게 정치적상황이에요. 제가 정치적상황이라고 다섯 자로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을 두 자로 줄이면 ‘현실’입니다. 세 글자 보태면 ‘현실 그 자체’입니다. 주일에 우리교회가 모이잖아요. 예배사회를 보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지금 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를 생각해 봐요. 주일에 예배참석해서 우리가 앉아 있는데 여기에 참석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지금 무엇을 현실이라고 볼까, 그들의 현실의 제일 마지막커튼, 마지막 그 모든 장식의 도착지점은 정치적상황입니다.
어떤 인간도 이 정치적 상황 너머에 놓여 있다는 이야기를 못해요. 젊은 사람들은 직장 다니고 공부한다고 바쁘지요. 나이 먹게 되면 항상 “박근혜가 어떻고……, 전두환 집에 쳐들어가서 보니 29만원밖에 없다고 해놓고 비싼 그림과 예술품으로 집을 갤러리로 만들어 놓았다더라…….” 그게 뭐냐, 저는 그것을 정치적 상황이라고 했고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의 생각이란 그것을 현실 그 자체로 보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거예요. 사람은 종교라는 것,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미 닫혀있는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 갇혀 있는 상황의 마지막 도착지점이 뭐냐, 그냥 정치라는 이름의 현실이 전부에요. 그러면서 자기는 늙어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왜 죽는지를 몰라요. 왜 죽는지도 모르면서 박근혜가 어떻고, 뭐가 어쩌고, 맨 날 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지금도 지옥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안다는 것이 혼자 카지노에 가서 도박을 한다든지 마약을 해서 죄를 짓는다고 생각을 한다면 구약성경을 완전히 오해한 겁니다. 구약성경이란 은밀한 곳, 도박장 같은 곳에서 짓는 죄가 아니라 집에서 뉴스보고 정치적 상황을 생각하면서 갇혀 있는 상황이 되면, 그게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그 너머를 생각 못하거든요. 이것은 꼭 오늘날 우리뿐만 아니고 예수님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벴잖아요. 왜 그런 짓을 합니까? 현실은 곧 정치적 상황, 정치적 상황은 곧 현실, ‘우리 예수님은 장차 이 땅에서 왕이 되실 분이다. 정치적 왕이 되실 분을 이렇게 한다면 내가 참지 못해서 나름대로 투사의 모습을 보이겠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베드로가 지금 말고의 귀를 벨 때에 119불러서 병원에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툭 털어진 귀를 도로 그 자리에 붙이니까 본드로 붙이듯이 들러붙었어요. 제자들이 이해 못하는 것은 뭐냐 하면, 제자들의 과격한 행동으로 떨어진 말고의 귀를 예수님께서 현장에서 다시 도로 붙이실 능력이 있다면 어째서 이 정치적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맥없이 체포되어서 사형 당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걸 이해 못하겠다는 거예요. 열두 제자도 그걸 이해 못하는 겁니다. 이해 못하는 것은 닫힌 상황에서는 저쪽 상황에서는 문 열고 나오는 저쪽 세계를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께서 시드기야라는 최후의 왕에게 약속을 했어요. “바벨론왕은 내가 다루는 종이다. 그러니 너는 그 바벨론 왕을 적이나 우상숭배자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기 위한 하나님의 부리는 종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너는 아무소리 하지 말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말을 듣고 조용히 있어라.”라고 했건만 시드기야 왕은 그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애굽, 요새 정치적 상황이 복잡한 이집트, 그 나라에 도움을 요청해서 바벨론의 침공을 물리쳐달라고 한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이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화가 나서 시드기야왕의 눈알을 다 빼버리고 결국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죽게 됩니다. 그 이전에 이미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언한 대목이 오늘 본문 대목이거든요. 참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예수 믿어라. 그러면 구원 받는다.” 하게 되면 아주 간편한데 왜 애굽나라 바벨론나라 중간에 유다나라, 이렇게 정치적 상황으로 복잡하게, 장기 알 움직이듯이 움직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닫힌 상황에서는 최종적으로 그것을 뭘 로 풀려고 애를 쓰느냐하면, 그것을 정치적인 역량, 요령, 아이디어, 통치력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난관을 극복하려고 시도한다는 그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어느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 복음도 모르고 아무도 십자가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고 이야기해봐야 쫓아내 버리고 싫어하고, 그래서 그 교회는 복음이란 들어본 적도 없는 교회라고 합시다. 천주교나 기독교 다 마찬가지지만 그 교회에 사람들이 주일예배로, 금요철야기도회로, 새벽기도회로, 구역예배로 모이고, 이렇게 다 모이는 그들의 최종적인 모습은 뭐냐, 그게 정치적상황이 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저 작은 교회들을 어떻게 삼키느냐, 우리의 올 한해 예산이 얼마인가, 우리교회 질서의 최고권위자가 누구며 그 밑의 권위자가 누군가, 장로와 부목사 중에 누가 더 높은가, 장립집사는 레벨이 전도사와 비교해서 어떤가, 권사라는 것은 어떻게 권사다울 수 있는가, 권사라는 것은 당회의 치리를 받는 것이 권사다, 특히 햇권사 같은 경우에 그렇게 교육을 시키죠.
목사 장로 모여서 교회 일 결정해야 소용도 없어요. 그날 집에 가서 자기 부인에게 당회의 회의 결과 이야기하죠. 그 다음 주되면 다 바뀌어 있어요. 장로 부인들이 보통 권사들 아닙니까? 회의 한 것 무효입니다. 복음을 모르니까 이 교회를 유지하는 데는 정치적인 수완이 동원되면 교회가 커질 수 있고 이름도 내고 사람을 끌어 모을 수 있다는 이게 정치적상황이에요. 바로 그것 때문에 구약성경이 있는 겁니다. 구약성경은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시도하는 그 현실이라는 것,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의 마지막 모습이란 결국은 정치적인 단결력, 책략, 그것이 인간이 마지막 보여줄 수 있는 죄악의 막장이고 그것이 바로 정치적 상황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디까지 이어지는가하면, 예수님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까지 이어져야 됩니다.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재판할 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원수지간처럼 싸우면서 으르렁거렸지만 예수를 죽이는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적으로 타협했고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그 당시 대 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체포해놓고 이렇게 정치적 발언을 합니다. “지금 우리가 로마의 지배를 받기에 만약 저 예수라는 작자를 방치할 경우 로마에게 밉상을 받아서 저 한 사람 죽여서 다른 많은 사람이 사는 것이 유리하다.” 라는 정치적 발언을 했고요,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죽어서 많은 다른 사람이 산다.’는 그 원칙을 그대로 사용해서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예수님이 구원하기로 한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데 가야바라는 그 원수의 입에서 그 원칙이 튀어나오도록 한 거예요.
놀라운 조화 아닙니까? 죄인들이 자기 죄를 마음껏 발휘하면서 그야말로 저주덩어리, 죄악덩어리 속에서 움직이면서 나오는 그 모든 원칙들이 실은 자기 택한 백성도 구원하는 원칙도 솔솔 튀어나온다는 거예요. 그 원리를 오늘 본문에 적용시켜 봅시다. 15절에 보면 “그가 사자를 애굽에 보내어 말과 군대를 구함으로.”라고 하지요. 구약성경에서 애굽이 나온다는 것, 애굽과 언약이 무슨 관련성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아주 절대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로마서 9장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라고 했습니다.
애굽왕 바로를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보이는데 무엇을 보이는가, 인간의 정치적 상황이 인간이 내보일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이에요. 정치적 상황 그 자체가 현실 그 자체입니다. 인간이 천이면 천만이면 만 그 현실은 뭐냐, 정치적 상황이고 그것으로 끝,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통수권자인 바로를 세워서 그 바로마저 맏아들이 죽는, 깨갱! 하고 깨어지는, 인간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현실 그 앞에 복종하는 그 닫혀있는 상태에서 오야붕인 바로를 하나님께서 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닫혀 있고 갇혀 있다는 상황을, 죄에 갇혀 있는 상황을 우리의 참 현실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바로를 걍퍅케 하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그 작전은 우리들이 진짜 현실이라고 여기는 이 정치적 상황 속에, 정치 밑에 경제 있고 경제 밑에 사회 있거든요, 이 최종적인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정치적 상황이 현실이라고 하는 그 자체를 바로와 같이 강퍅함으로 보는 겁니다. 어느 교회에 십자가 복음을 외치는 집사님이나 평신도가 있다 합시다. 목사가 와서 “당신이 그런 소리 하면 교회 질서를 해치니 안 된다.”라는 정치적 발언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내칠 때 그것이 강퍅함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이 세상 오고 또 오는 모든 권력자의 표상입니다. 대변자로 하나님이 세웠습니다. 뭘 보여주려고? ‘내가 의도적으로 강퍅케 했다.’ 바로는 정치적 상황이 마지막이기에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일을 도무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정치적 상황의 포인트는 정치적 힘, 세상적인 힘이거든요. 바로가 그렇게 강퍅하다고 했는데 그 강퍅함이 시대가 흘러가면서 누가 그것을 본받았는가하면 이 유다나라가 본받았어요. 시드기야가 본 받았습니다. “이 이스라엘, 이 유다나라는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니까 하나님이여, 제가 왕으로서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하면서 내세운 것이 정치적 상황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런 그들의 정치적상황이 죄고 닫혀있는 상태인 것을 분명히 알려서 망하게 하는 겁니다. 그것이 진짜 숨어있는 언약이에요. 언약의 핵심은 뭐냐, 죽음입니다. 창세기 37장에 보면 제일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이 야곱에게 전해집니다. 34절에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잖아요. 그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려요.
이게 언약대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 아들의 죽음에 아버지가 동참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아버지의 울음에 같이 동참해야 되고.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에 보면 “울게 하소서”라는 노래가 있어요. 내가 좀 실컷 울도록 가만 내버려 두라는 뜻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는데 그 언약에 참여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보통 사람은 자기의 정치적 상황, 정치적 현실 속에서 자기의 힘이 없어서 우는데 그것 말고, 몸 아파서 울고 병들어서 울고 자기 집구석이 엉망진창이 되어서 우는 그것 말고,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이 현실에서 오는 좌절감 때문에 우는 거고요, 자살대신 우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구현하고자 하는 울음은 예수님 십자가의 아픔에 동참해서 우는 울음입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자기 아들 예수님을 버릴 때 그 아픔에 택한 백성이 참여하는 식으로 언약이 우리에게 작용하게 되어 있어요. 그 울음을 집단적으로 울어야 될 사람이 누구냐, 오늘 본문에서 유다나라 포로 잡혀 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라가 왜 이 꼴인가, 나라가 어쩌다가 이렇게 망했지……, 예레미야애가에 보면 예레미야는 우는 것이 일이고 울음의 선지자에요. 예레미야는 웁니다. “하나님이여, 귀한 하나님의 성전이 이렇게 불타버리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을 군홧발로 짓밟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오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던 이 찬란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해서 온 동네 웃음거리로 이렇게 전락했습니까?”
이것은 마치 우리교회 예배당에서 굿판 벌이는데 사람들이 좋다고 박수치는 상황하고 똑같은 거예요. 우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이 한국교회 다니면서 울어야 돼요. 왜, 이 교회가 교회가 아니고 완전히 절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축복, 축복, 자기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복 받기 위해서 뇌물주고 점괘나 보고 있는 마귀 소굴로 달라졌을 때에 그런 교회를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는 이유는 그야 말로 “울게 하소서.” 실컷 울어라, 예수님도 울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못 죽여서 안달 났어요.
진짜 현실로 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예쁘다, 예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잡아 죽이는 거예요. 왜, 이 땅은 정치적 현실 그것이 전부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울면서 십자가 졌잖아요. 그 아픔, 그 쓴잔에 우리가 동참을 해야 되는데 사람들은 그 십자가라는 숨겨진 현실은 모르고 그냥 전 두환 비자금 조사하는 것, 개성공단 협상하는 것, 장마 진 것, 수해 피해 본 사람들 안 됐다고 하면서 피해 없는 것에 대해서 안심하는 것, 백 날 그것 하다가 세월 다 보내요. 1월 그것 하면서 보내고 2월 보내고, 벌써 7월 아닙니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이 닫혀 있는 세상 말고 다른 현실로 넘어가야 되는데 넘어가려면 예수님 십자가생각해서 복음 모르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과 “울게 하소서”라는 그 마음이 있어야 돼요. 그저 아침에 눈 뜨면 남의 밭에 키우는 채소 보는 것, 밥 먹고 사는 것,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아홉시 뉴스, 드라마, 사랑과 전쟁, 오로라공주, 그런 거나 보다가 세월 다 보내고 언제 웁니까, 언제! 유다 망한 것이 축복인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축복이에요. 이게 언약의 실행력입니다. ‘아, 하나님의 언약은 실제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구나.’ 그걸 깨달아야 돼요. 하나님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놀러오는지 장난이나 치러 오는지 모르겠는데 지금도 복음 때문에 우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잖아요. 목사의 설교가 항상 여유만만하고 늘 평안한 그런 교회들 보면 안돼요. 복음 때문에 우는 사람들, 그 심령에 동참하면서 설교가 돼야 되지요. 교인수가 몇 명, 헌금이 얼마, 이런 것 말고 “지금도 십자가 복음만 있으면 나는 그걸로 목숨 바쳐도 좋습니다.” 하는 그 사람 편에 서야 돼요. 왜, 그 사람들은 지금 “울게 하소서” 하고 있거든요.
허접스러운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린다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일이 갑자기 꼬이면 종교적이 돼요. 신앙이 아니고 종교적이 됩니다. 평소에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뭔가 해명하는 식이지요. 그러다가 종교적이 되면 성경해석에 들어가요. 해명이라 하는 것은 꼬인 것을 푸는 것을 해명이라 하고 해석이라 하는 것은 숨어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해석이에요. 그러면 해명하는가, 아니에요. 해석하는가, 아니에요. 그러면 인간은 뭘 하는가? 변명을 해요.
그 종교를 벗어야 돼요. 어디를 다쳤다, 하나님이여, 이것은 종교거든요. 이 종교를 벗어나야 돼요. 그렇게 울고불고 하지만 그것은 자기 것 빼앗겼다고 억울해서 우는 것이고 진짜 울음은 십자가에서 당한 주님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해서 우는 것, 아무것도 아닌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그렇게 아팠습니까, 라고 같이 동참해서 우는 것, 바로 그것이 참된 현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월아, 내월아,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라고 여기고 사는 이 시대 이 시점에도 복음이 좋아서 복음 때문에 울고 복음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이 항상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저 예수님 섬기는 것 자체가 축복인 것을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