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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원수지간 130714우리교회로마서

원수지간 130714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원수지간(로마서 8:5-9)

이근호

13-07-14 13:30

원수 지간

2013년 7월 14일 본문 말씀: 로마서 8:5-7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육신의 일 따로 있고 영의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은, 인간 모독으로 간주 될 다분합니다. 일이란 오로지 창조적 노동이 전부라고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이 세상에서 지속적으로 창조적 작업을 시행하게 됩니다.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계속해서 새로움과 새로움을 남기려고 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명이란 멈추지 않는 인간의 열정과 지혜와 용기와 반성과 개선의 산물입니다. 장애가 등장하면 물러서거나 외면하지 않고 돌파한 결과로 오늘날 찬란한 문명이 건설된 것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을 영웅시하거나 영웅으로 포장합니다. 영웅은 실패나 좌절을 모릅니다. 이겨냅니다.

인간의 일이란 이런 창조적인 속성으로 인하여 인간으로부터 찬사 받을 대상이 됩니다. 유(有)에서 유(有)로의 전환입니다.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신이 있다면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자극시키고 고취시켜서 만개할 때, 하나님은 인간으로 인하여 영광과 찬양을 받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의 일이란 그 자체가 보람을 인간에게 안겨다 주는 창조적이고 영적 사업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런 일을 ‘육신의 일’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뭔가 기분이 찜찜합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라고 구분지어서 인간은 평생 뭔가에 홀리듯이 쫓아다니는 본성에 매여서 산다고 단정합니다. 이 점도 또한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후예들이 제일 먼저 만든 것은 도시입니다.

그 안에 인간 스스로 생존에 필요한 것들은 다 담겨있게 됩니다. 그들은 음악도 만들고, 목축업도 개시했고 기계도 제작했습니다. 나중에 이들은 바벨탑까지 건립을 시도하게 됩니다. 자, 이런 일을 하는 당시자들에게 물어봅시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황당해 할 것입니다.

인간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자신의 육신만큼 잃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나기는 비 맞는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내립니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먼저 묻고서 다가서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차려입은 아가씨라도 화재 현장에서 숯검댕이로 돌변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작업에는 육신보다 우선되는데 있습니다. 인간들이 시도하는 영적 일이라는 것은 기껏 불교가 그 시범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인생은 고(苦)라는 현실이해가 먼저입니다. 세상은 생노병사가 동반되는 고생의 바다라는 겁니다. 둘째로 인간의 고통은 마음에서 일어나며 그 마음이 어디엔가 집착에서 함으로서 나온다는 겁니다.

셋째는, 따라서 그 집착을 없앰으로써 열반에 들 수가 있다는 원리적 처방을 말합니다. 넷째로, 그런데 아무리 맑은 거울도 세상을 살면은 때가 묻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심신에 거울에 때 까듯이 때가 낄 거니까 늘 닦을 필요가 있다고 합나다, 그러기 위해서는 팔정도에 매진해야 한다는 실천이 불교 사상의 요지입니다.

8정도란 바른 말(正語)하기, 즉 거짓말하지 않기, 중상모략하지 않기, 욕설하지 않기, 잡담하지 않기입니다. 또한 바른 행동(正業)입니다. 살생하지 않기, 주어지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기, 사음(간사하고 음란한 마음)하지 않기입니다. 셋째로 바른 생계(正命) 그릇된 생계수단을 버리고 바른 생계수단으로 살아가기입니다.

넷째로, 바른 정진(正精進)하기입니다. 다섯째로 바른 알아차림(正念)입니다. 여섯 번째는
바른 집중(正定)하기입니다. 일곱 번째는 바른 견해(正見)갖기입니다. 마지막 여덟째는 바른 사유(正思惟)입니다. 자신의 육신을 기어 포기 못하고 자신의 육신이 선도하는 식의 인생관인데 이를 두고 오늘 본문 7절에서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에 해당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영을 좇는 자는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임신했다”입니다. 성경 말씀이 육신을 찾아오게 되면 육신은 본인의 육신의 생각은 거부당하고 찾아오신 말씀의 세계가 그 육신을 통해서 펼쳐지게 됩니다. 즉 ‘신 속에 성령님이 임해서’ 늘 육신을 육신대로 발산시키시는 일을 하시게 됩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구약의 바로 왕이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정작 히브리인들은 그런 점에서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만 편하면 그만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따라서 바로왕의 권력 밑에서 구원되리라는 것은 그들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그런데 10재앙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바로왕의 맏아들이 죽었습니다. 모든 애굽의 살던 가정의 맏이가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오로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갖다 바른 집의 맏이들이 살아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안목에서 살고 죽는 것이 것이 인간들의 안목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이 어린양의 피는 상자에 담겨서 이스라엘 내내 주도적으로 이끌게 됩니다. 구원이란 육신의 아이디어나 상상력에 의해서 성취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로 도저히 눈치 챌 수 없고 그 뒤편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항상 장벽이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요단강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생각들이 주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는 요단강 강물에 두니 범람했던 강물 속에서 길이 새롭게 생겨버렸습니다. 이것처럼 육신에게 있어 천국으로 가는 길은 항상 장벽과 마주하는 노선입니다. 인간의 노선으로서 그 다음번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미리 알아챌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육신의 생각을 주도적으로 따라가면 아니됩니다. 성령을 따라간다는 말은 이미 인간의 육신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킬 마음도 없고 지킬 수도 없다는 그 말씀 자체가 장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피가 주도적인 힘을 발휘해서 항상 십자가 피가 보이는 쪽으로 이끌림을 받는 것이 성령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 따름 과정 속에서 성도는 자신의 육신됨을 혹독하게 경험해야 합니다. 자신의 포부와 기대와 아이디어가 늘 무너져내리는 즐거움을 맛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기도가 곧 우리 육신의 여망의 막장으로 이끌고 거기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결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7-17 05:57

42강-롬8장 5-9(원수지간)1307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5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9페이지입니다.

로마서 8:5-9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대목, 이 성경말씀 자체가 뭔가를 굉장히 의식해요. 뭘 의식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동일하다는 그 사고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사람은 다 똑같지 뭐. 살아가는 것을 보니 다 같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육신을 좆는 자와 영을 좆는 자, 이렇게 사람이 둘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말씀 자체가 상당히 흥미로워요. 5절에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라고 되어 있거든요. 어떤 사람이 황소를 키웠는데 그 황소가 도망을 간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그 모습을 볼 때 그냥 할아버지가 아니고 앞에 뭘 붙여서 말해요. “황소를 좇아가는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는 바빠요. 집나간 황소 좇는다고 바빠요. 그걸 좇아간다고 하는 것인데 황소를 좇아가는 할아버지가 되고 그 할아버지는 독자적으로 ‘나는 할아버지’라는 것은 의미 없어요. ‘황소를 좇는 할아버지’라고 규정된다면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지금 좇아갑니까? 세상 사람들이 물을 때 “당신은 누굴 좇아갑니까?”라고 묻지 않고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어요. 좇지를 않아요. 내가 이만큼 확보했으니 그것이 곧 나다, 라고 되는 겁니다. 뭔가 좇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질문에 해당되는 겁니다.

“당신은 누굴 좇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니 “육신을 좇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 우리가 상당히 중요해 보이지만 성경대로 하면 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육신을 좇아가는 너인가, 아니면 성령을 좇아가는 너인가, 이렇게 보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두고 ‘너 누구야’라고 시작을 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너는 무엇을 좇아가지?” 이렇게 우리가 좇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거지요. 육신인가 아니면 성령인가, 성령인가 아니면 육신인가를 우리에게 묻게 됩니다. 육신을 좇고 혹은 성령을 좇고, 이렇게 되어버리면 뭔가 좇아가는 것이 되기에 인간은 계속해서 평생 좇아가는 거예요. 평생입니다.

독자적인 자기 세계라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한테는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가, 성령을 좇는가, 하는 이런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상당히 인격모독의 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란 것은 누굴 좇아간다고 평생을 허비하는 존재가 아니고 사람이란 독자적인 자기의 노동과 창의성에 의해서 따로 자기만의 영광 돌릴만한 것들을 열심히 일하면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거든요. 울주군에 거대한 건물들이 있어요. 원자력발전소입니다.

그 근처에 자주 가 봤는데 영덕의 군청이나 면사무소를 가게 되면 ‘조선시대의 영덕군의 모습’ 이런 것이 있다고요. 제주도에 가 봐도 그런 것이 있지요. ‘제주서민들의 옛 모습’ 이래서 제주민속마을에 가 보게 되면 한복 입고 고기 잡는 기구를 들고 선 모습들이 있잖아요. 영덕에도 그런 것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거대한 원자력발전소, 괴물 같은 것이 서 있는 거예요. 이걸 누가 만들었어요? 선녀가 내려와서 만들었습니까?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선녀가 나풀나풀 내려와서 짠, 하니까 갑자기 원자력 발전소가 생긴 겁니까?

우리가 지금도 에어컨을 틀어놓고 시원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전기가 거기서 오잖아요. 이 모든 영광, 이 모든 찬양을 누가 받아야 마땅합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뭘 했다고. 하나님이 조선시대에도 있었어요. 하나님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는데 왜 그때는 원자력 발전소를 안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조선시대 때 영덕이나 울주군에 계셨다니까요. 거기 있는 금강송을 하나님이 키웠거든요. 그때 금강송만 키웠고 왜 원자력 발전소는 안 만들었는데요? 이것이 누구솜씨냐는 말입니다.

이것은 영광스럽고 찬란한 우리 인간의 솜씨입니다. 인간이 이런데, 인간은 자기 살 궁리를 스스로 챙겨서 지금까지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는데 좇기는 뭘 좇아간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육신을 좇는 자, 영을 좇는 자’라는 그 말자체가 인간에 대한 모독입니다. 창세기 4장 19절에 보면 가인의 후예들이 뭔가를 만들었어요. 창세기 4장 17절에 보면 가인이 제일 먼저 만든 것이 도시입니다. 도시라는 말이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도시에는 상가도 있고 아파트도 있을 것이고 운동장, 극장, 시장도 있을 겁니다.

도시를 만들었다 했을 때 도시와 도시 아닌 것을 구분 짓는 것은 성을 쌓아서, 소위 캐슬이라 하죠, 요새도 캐슬에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성을 만든 거예요. 왜요, 육신을 좇기 위해서? 영을 좇기 위해서? 좇아가기는 뭘 좇아가요? 자기가 노동해서 자기가 그 안에서 평생 살기 위해서 만들었지요. 그러면 그 후세들이 그 안에서 뭘 하는가, 어떤 사람은 수금과 퉁소를 부는 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목축업에 종사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어요. 두발가인이라는 사람입니다. 날카로운 기계문명이 생겨납니다. 정비업소도 생겼겠지요.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사람 아닙니까? 그렇게 살다가 마음 맞는 남녀가 만나서 결혼해서 애 낳고 늙어 죽고 죽으면 성 밖에 공동묘지 만들어서 묻고, 그게 사람 사는 전부지 또 뭐가 더 필요한데요? 아무것도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딴 이야기합니다. 신학교 때 창세기 4장을 봤어요. 거기에 도시가 나오고 인간의 문명의 시작을 봤을 때 우리가 익히 알아왔던 문명의 시작과의 그 의미가 달랐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도시가 만들어지고 농사짓기가 시작되는 이것을 긍정적으로 봤습니다.

인류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로 발전하면서 국가가 생겨나고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라는 분이 백두산에 고조선이란 나라를 세웠고 그 다음에 삼한이 생겨나고 신라 고구려 백제가 생겼고 그 다음에 통일신라, 고려, 조선, 이런 식으로 배웠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유구한 5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에 네가 태어났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배웠는데 신학교에 가서 창세기 4장의 주석도 보고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을 볼 때에 지금까지 나라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라고 배운 것과는 달리 생각해야 되는 것이 성경에 나온 겁니다. 그게 뭐냐, 나라는 다니엘에 보니까 우상이에요. 짐승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이 짐승의 나라에서 짐승의 이름으로 짐승에 충성봉사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군 입대하는 것도 짐승에 협조하기 위해서 군의 부름을 받고 만기제대 했거든요. 도대체 나는 공산주의국가에 기독교가 있다는 것을 도저히 믿지를 못하겠어요. 지금 중국이나 북한에 기독교가 있다면 분명히 다니엘에 나오는 것처럼 “국가는 짐승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완전히 산산조각으로 깨져서 하나님에게 패배당한 입장에서 ‘아, 우리는 가짜 도시에 살았구나.’라는 것을 혹독하게 느끼면서 진짜 영원한 도성은 이 땅에 없고 하늘나라에 있다.” 라고 해야 진짜 기독교 신자가 아니겠어요?

짐승의 모습, 마귀의 모습이 최종적으로 국가의 모습으로 되어 있다는 그것을 말해줘야 제대로 성경 전체를 보는 안목이 생겼다고 할 수 있고 그래야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해보게 됩니다. 뭔가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좀 달라요. 다음다음 주에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를 하는데요, 지난 대전의 겨울수련회에서 에스라 느헤미야서를 공부하면서 집중적으로 다뤘던 것은 뭐냐 하면, “왜 국가가 짐승인가? 국가라는 것은 나의 대행체, 나의 이상체이기에 그렇다. ‘나는 나 하나면 족하다.’ 하는 그 사고방식이 확장되면 내가 속한 나라는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는 그것, 우리가 국가를 요구하게 되는데 내가 요구하는 국가를 통해서 나의 욕망을 채우고 싶기에 국가는 내가 만든 우상이고 따라서 그것은 짐승이 된다.”는 논조로 에스라 느헤미야를 죽 풀었어요.

그 내용을 묶은 책이 저 뒤에 있습니다. 설명해 줘도 잘 모르겠지요. 왜 성경에서는 인간의 노동의 가치를 그렇게도 무시하느냐는 말이지요. 창세기 11장에 보면 거기에 바벨탑이 나오는데 소위 교회 좀 다닌다는 사람들 “바벨탑은 하나님이 분노해서 그걸 부숴서 그때부터 인류가 온 천지에 다 흩어졌다. 인류가 흩어지기 전까지 우리나라에 공룡들이 살았는데 인류가 흩어지면서 우랄알타이를 지나 한반도로 넘어와서 공룡들이 살던 땅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이렇게 이야기 하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바벨탑 세웠던 사람들에게 물어봅시다. “당신이 그걸 세울 때 그게 나쁜 짓이라는 생각을 가졌는가?” 그 말입니다.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를 않는 거예요. 왜 나쁜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것을 내가 하기 때문에 그래요. 무조건 내가 하는 것은 절대로 나쁜 짓일 수가 없어요. 남이 하면 불륜이지만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니까요? 내가 하는 것을 스스로 나쁘다가 한다면 그 인간이 왜 삽니까? 살 필요가 없지요. 사람이 다른 것은 다 부정해도 자기가 하는 것을 본인이 부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그 다음에 “할 수도 없음이라.” 할 수가 없지요. 자기가 하는 일이 옳은데 어떻게 율법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소리가 나옵니까? 될 수가 없다니까요? 바벨탑이 그냥 탑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라는 것이 있거든요. 불교의 기본이 이렇습니다. 첫째, 세상은 고생의 바다(苦海)이다. 두 번째, 사람이 고생하는 이유는 집착 때문이다. 세 번째, 집착만 없앤다면 마음의 고통이 다 사라진다. 네 번째, 마음의 고통이 사라진다 해도 또 마음에 때가 묻기에 그 때를 닦아내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 바른 생활에 정진해야 된다.

벌써 네 번째가 나오니 다 잊었지요? 첫째는 세상은 고생의 바다(苦海)이다. 두 번째, 생로병사, 이 세상은 왜 이리도 고생스러운가? 이유가 뭔가? 집착 때문이다. 세 번째, 집착만 버린다면 마음이 편하다. 네 번째, 마음에 때가 묻어서 문제이기에 때를 매일 닦는 여덟 가지 바른 생활을 해야 한다. * 八正道 - 正見(바른 견해), 正思惟(바른 생각), 正語(바른 말), 正業(바른 생업), 正命(바른 생활수단으로 사명을 다함), 正精進(일심노력으로 악을 나지 않게 하고 선이 나게 함, 正念(법의 본성을 바로 기억함), 正定(어지러운 생각을 버려 마음을 안정함)

이렇게 팔정도를 닦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육신을 따르는 거예요. 바른 생각, 바른 견해, 바른 행동, 이런 것이 육신을 따르는 거라니까요, 육신을! 나는 정당한 것을 더욱더 정당화하기 위해서 애쓰는 겁니다. “목사님, 이 귀한 설교시간에 왜 불교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낭비합니까?”라고 하신다면 기독교가 불교라니까요, 기독교가! 오늘날 기독교가 불교에요. 제가 지금 불교이야기 하는 줄 알아요? 제가 지금 기독교, 교회 이야기한 겁니다.

이게 육신을 좇는 거예요. 그리고 성경이 뭐라고 하는가? 성경에서 마리아가 남자도 없이 임신을 한 거예요. 마리아가 임신을 했답니다. 남자와 동침하지 않았는데. 이게 기독교라니까요. 바른 생각? 마리아가 바른 생각, 정정진으로 임신했습니까? 누구든지 바른 생각, 바른 말, 이런 식으로 하면 아들 다 낳겠네요. 제가 서울에 강의하러 가려고 401번 타고 불로동에 가는데 안내판이 나와요. 영어로 “불로 캐톨릭처치”라고 나오고 “여기는 불로성당역입니다.”라고 나와요.

그 소리를 듣고 옆에 있는 할머니가 갑자기 성호를 긋고 있어요. 이게 정정진입니다. 제가 속으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니 왜 그래요, 왜? 아니 이거(성호경) 한다고 마리아가 임신했습니까? 이게 성당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교회 이야기에요. 절간 이야기고. 그게 내 육신을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육신을 따르는 거예요. 인간은 뭔가 자기만을 지키려고 해요. 그런데 여러분이 장마철에 한 번 보세요. 소나기는 비 맞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우산 없다고 비가 안 오는 게 아니잖아요. 우산 안 썼다고 소나기가 멈춘다든지 하는 일은 없어요.

소나기는 개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소나기는 육신을 좇는 자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아요. 소나기는 영을 좇는 자의 입장을 생각합니다. 영을 좇는 자란 영 앞에 있을 때 더 이상 인간이 자기를 주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거든요. 감기 들렸다 합시다. 감기 들리면 ‘왜 하필 교회 가는 날 감기가 들렸을까’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것은 육신을 좇는 생각입니다. 늘 감기 들려야 돼요. ‘늘 감기 들려야 되는데 오늘 왜 감기 안 들리지?’ 감기 들리는 것이 만일 주의 벌이라면 사실은 늘 벌 받아야 마땅해요. 왜, 우리는 법에 복종치 않을뿐더러 복종할 마음도 없어요.

자기 챙기기 바쁜데 우리가 언제 주님 말씀생각하고 십계명을 언제 생각하고 하나님을 언제 좋아했다고. 하나님 좋아한 적도 없고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법에 굴복지도 않을뿐더러 오늘 본문 말씀대로 “할 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법을 지켜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여러분 속에 장착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여러분들은 로마서 8장 7절의 말씀, “주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는 것이 아예 여러분의 평생에 꽉꽉 박혀야 돼요.

그게 박혀 있어야 “주의 법을 지킵시다.” 하는 이 사기꾼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주의 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주의 법이 있어요. 있는데 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육신이 주의 법보다 더 중요하기에 그렇습니다. 내가 선두에 서고 주의 법은 뒤따라오라고 우리가 지시합니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언약궤라는 것이 나옵니다. 아까 제가 마리아 임신한 이야기했지요. 마리아가 임신했을 때 누가 놀랬는가 하면 마리아는 자신의 육신이 그런데 쓰일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자기 약혼자하고 행복하게 살 것만 생각했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하리라는 것을 사전에 예상도 못했어요.

나의 육신은 나의 육신을 위한 육신인줄만 알았지요. 그런데 말씀이 임하니 육신 속에 말씀이 내 허락도 없이 들어와 버렸어요. 저와 여러분도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부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라는 말씀이 들어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임신하신 겁니다. 마리아가 임신했을 때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이제부터는 성령을 따라다녀야지.’ 했다면 이런 생각 자체가 육신을 따라다니는 생각입니다. 성령이 있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은 상당히 육신적이에요.

그것은 진짜 영을 좇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내가 좇을 것은 나밖에 없다.’ 하고 자기 자신, 육신을 좇는 자에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마리아는 자기 육신에 대해서, 자기의 남은 인생에 대해서 오히려 자기가 굉장히 당황스러워했습니다. “고객님! 많이 당황하셨어요?” 하는 개그도 있지만 엄청나게, 세상에 그렇게 당황스러운 것이 또 없었어요. 임신하는 순간 자기의 인생 계획의 모든 것이 재수정되는 겁니다. 나의 결혼에 하나님도 도와줘야 된다고 내가 주도적으로 끌고 가던 그 인생이 이제는 내가 임신한 그 분을 위해서 그분을 내가 뒤따라가야 될, 내가 좇아가야 될 인생으로 달라졌습니다.

그 마리아의 임신소식과 더불어서 그 다음차례 계속 이어가는 변화가 뭐냐 하면, 오늘 본문 8장 7절에 나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마리아가 임신을 하고 애를 낳는 그 지점에 드디어 그동안 검은 바다에 숨어 있던 짐승들이 발작을 일으켜서 아기예수 태어난 그 주민 등록지를 찾아서 스멀스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동방박사도 소집통보를 받고 별 따라 왔고 동박박사가 별 따라 오니 동방박사를 추적하는 경찰들이 동방박사와 더불어서 아기예수를 살해하기 위해서 등장합니다.

본문 8장 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하나님의 원수가 우리한테 느껴진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육신을 좇는 자가 아니고 성령을 좇는 자이기에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원수가 스멀스멀 자기정체를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면서 등장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일에 써먹으라고 지금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육신을 이 지상에 태어나게 한 거예요. 지금 음성 좀 낮추라는 사인이 왔는데 중요한 대목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몇 년도에 태어났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이 중요한데 그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에는 하나님의 원수가 숨어 있다는 겁니다.

숨어 있기에 아무도 밝힐 수가 없어요. 그런데 마리아에게 임신을 하게 하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드디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예수를 노리고 여기저기서 막 튀어나오는 겁니다. 아기 예수 죽이기 위해서죠. 방금 이야기한 이것을 시나리오로 각색한 대목이 요한계시록 12장입니다. ‘머리에 해와 별을 쓴 여자가 아기를 낳으니까 바다의 짐승인데 이름은 옛 뱀’이라는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옵니다. ‘그 옛 뱀이 아들을 잡으려고 했는데 여자도 놓치고 아들도 놓쳐서 화가 난 짐승은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도 조지기 위해서 바닷가에서 포진하고 있다.’ 이게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그거하고 우리 일상이 노동현장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런 성경말씀을 부여한 것은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어떤 처자가 시집가려고 준비하기 위해서 집에서 신부수업 하면서 자수를 놓는 거예요. 옛날에는 주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있어야지요. 수놓는 것이 소용이 없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좋은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를 위해서 뜨개질을 했는데 그 남자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러면 뜨개질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십자수가 다 무슨 소용이 있어요? 갖다 버리지요. 인간이 육신을 좇는다는 것은 평생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곱게 수를 놓는 거예요.

곱게 수를 놓는데 그 수놓아진 것,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성경공부 한다고 하고 수련회도 참석하고 다 했는데 그 수놓은 것이 자기 구원받는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나중에 발각됩니다. 수놓은 것을 던져 버리면 그 밑의 세계, 하나님이 준비한 세계는 우리가 열심히 노동하고 애쓴 세계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세계로서 우리에게 부각될 때 평생 살아온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을 좇는 식의 생활을 해 온 겁니다. 교회 오면서도 교회 온 자신의 육신을 따라서 교회 온 거예요. 그러면 지금 관건이 뭐냐 하면, 그러면 이 육신을 좇는 육신을 어떻게 영을 좇는 육신으로 바꿀 수 있는가가 관건이거든요.

그런 사람이 분명히 있으니까 영을 좇는 사람은 이렇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육신을 좇는 사람, 영을 좇는 사람, 두 종류가 있으니까 육신을 좇는 것에서 어떻게 영을 좇을 수가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그러면 기도원에 가서 기도도 하고 이런 저런 애를 좀 써볼까요? 그것 해봐야 수놓는 식밖에 안되고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육신을 좇는 자에서 영을 좇는 자가 될 수 있는가? 거리 나가면 아가씨들이 아주 예쁘게 차려 입었어요. 날도 더우니까 시원하게 입고 모양내고 자신만만하게 거리를 걷지요.

그런데 그 아가씨가 나이트클럽에 있는 동안 화재가 일어났다. 매캐한 연기가 클럽에 가득 찼다. 아무리 예쁘게 차려 입은 아가씨라도 콜록거린다는 말이지요. 얼굴에 시커먼 검댕이 묻어서 콜록거리면서 밖으로 뛰쳐나오면 예쁘게 차려 입은 옷이 전혀 모양새가 안 나지요. 아가씨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얼음에 미끄러지니까 몸 다치는 것이나 아픈 것보다 옷매무새 망가지는 그것이 창피스러운 거예요. 아줌마는 여기서 빼주세요. 이분들은 그런 것을 다 초월한 분들이니까.

그처럼 인간이 두른 그 모양새,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음 앞에서 낼 폼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예쁘게 차려 입고 죽으면 그 죽음이 예쁜 겁니까? 그 무덤에는 나방은 안 오고 나비만 오는 겁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꾸미고 싶고 멋지게 보이고 싶어 하는 이 육신의 정체를 십자가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는 이유가 육신을 좇는 육신의 차원에서 영을 좇는 영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그 노선에 무엇을 반드시 경과해야 된다는 것, 경과의 지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 예를 구약에서 들 수 있는데요,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잖아요. 애굽에서 나올 때에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최고 오야붕이 있어요. 바로 왕입니다. 누구도 감히 바로 왕을 범접 못해요. 그 최고에 대해서 애굽인들은 물론 복종하고 더 나아가서 구원받아야 될 히브리인들도 감히 바로 왕에게 대든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바로 왕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명령을 내렸어요. “애 낳으면 딸은 살리되 아들이면 다 죽여라.” 그럴 때 그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어요. 모세 엄마가 숨겨서 키웠는데 그것도 오래 숨기지 못하고 그냥 죽으면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강물에 떠내려 보냈지만 어쨌든 바로왕의 명령을 누구도 복종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 이 짐승 같은 국가라는 현실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아무리 치열하게 노력해도 우리는 구원 될 수가 없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깔아놓습니다. 그것도 규격화 된, 법적으로 완전히 갇혀 있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생뚱맞은 사건 하나 일으켜서 ‘너는 이미 거기서 벗어났다.’라는 사실을 기쁜 소식, 복음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약부터 이미 그런 식입니다. 그게 뭐냐, 그 대단한 바로 왕의 귀하디귀한 맏이가 어느 날 밤 죽어요.

바로 왕이 갑이거든요. 나머지는 다 을이 되는 세계에서 바로왕의 아들이 죽어요. 바로왕의 맏이가 죽었다는 말은 갑이라고 우기는 인간이 죽었으니 다른 사람은 다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한 거예요. 1980년대 저희 어머니 아버지가 죽어도 안 울더니 세상에나, 누구 마누라가 죽었다고 천만 명 되는 사람이 줄서서 운 적이 있습니다. 그 죽은 사람이 누구냐, 육영수 여사입니다. 학교 학생들까지 다 동원시켜서 운 적이 있어요. 왜, 박정희는 갑이거든요. 그 사람이 울면 국민들도 다 같이 따라 울어야 돼요. 이게 뭐냐, 우리는 국가를 좋아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 같이 육신을 좇기 때문에 공통점이 있어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미안스럽게도 바로왕의 아들은 죽었는데 당연히 죽어야 될 자기 아들 장자가 안 죽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안 죽고 아들이 멀쩡하네요. 이거 구원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준비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준비했어요. 교회 다니고 바른 정신이니 바른 행동이니, 이것 일체 필요 없습니다.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왜, 우리는 법을 지킬 수가 없기에. 우리는 법 지킬 마음도 없고 지킬 수도 없기에 주께서 따로 준비한 것이 있어요.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네가 도저히 상상도 못할……, ‘분명히 나는 지옥 갈 거야. 맞아. 주의 법을 지킨 적이 없기에. 아예 다 어기고 살기에 모든 주의 법을 어기고 사는 나 이 근호는 평생 살아도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해.’ 우리는 이것을 당연시 합시다. 매일 감기를 달고 살아도 당연히 벌 받는 것이 마땅한데 어린양의 대신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도록 확정지어 놓을 때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따라가야 됩니까? 누가 갑이고 누가 을입니까? 세상이 갑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갑입니까?

성령을 좇아가는 것은 처음부터 성령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고 육신을 좇는 그 육신을 가지고 성령을 좇아가도록 하나님이 조치하신 이유는 육신을 좇는 것이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 내가 중요해.’라고 하다가 성령을 따라가게 되면 이제는 주도적인 것이, 주님의 가는 것을 바라보게 되면 그 관계성에 의해서 우리는 성령을 따르는 자가 돼버립니다. 우리 안에는 뭐가 장착되어 있느냐하면,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를 아예 달고 살아요.

고혈압이나 당뇨가 있는 사람은 다 약을 달고 살듯이 우리는 안에 이런 질병을 달고 삽니다. 우리가 죽지만 사는 이유는 이미 우리보고 “너는 살았어. 너는 살았단 말이다.”라고 통보해주는 그 통보 때문에 사는 거예요. 그 어린양의 죽음을 곽에다 담아요. 이것이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그 곽에 담아놓고 육신으로 할 수 없는 상황 속에 그 곽이 앞장서서 이끄십니다. 예를 들면 요단강 같은 경우입니다. 홍해 같은 경우에는 아직 곽이 안 만들어졌지만 그 때에는 지팡이가 있었지요. 그때에는 아직 모세가 있을 때이고 요단강의 경우에는 이미 모세는 죽은 상태지요.

모세부터 이야기해 봅시다. 홍해를 건널 때 뒤에는 애굽 군대이니 죽었지요. 앞에는 바닷물이니 죽었지요. 주님께서는 죽음과 죽음 사이에서 우리 육신의 한계를 느끼게 만듭니다. ‘아, 나라는 육신은 죽음에 갇혀 있는 신세구나.’라는 것을 알게 하고 그럴 때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바라보게 합니다. 분명히 앞의 것이 막혀 있는 상태이기에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몰라요. 모르는데 모세가 있기에 모세가 일러주니까 바다도 길을 낸다는 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그들은 새롭게 경험하게 된 겁니다.

이게 성령을 좇는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이고 평화고 축복이고 감사에요. 하루 일과가 그런 거예요. 못한다. ‘어? 못하는 게 맞는데 다른 노선에서는 그것이 되네. 아, 나는 이게 안 돼. 애 성적이 더 떨어진다.’ 부모가 노력한다고 됩니까? 애가 공부하기 싫다는데 부모가 대신 숙제할 수 없고 대신 시험 칠 수 없잖아요.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애가 건강하고 그것이 복이라는 것을 알 때 애 성적이 내려갈 때 미처 몰랐던 그것이 애 건강한 것도 축복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기쁨이 쏟아지지요.

이게 뭐냐, 성령께서 이끄시기 때문에, 우리의 탐욕도 같이 일으키면서 그 탐욕 때문에 뚫리지 않던 천국이 성령의 개입으로 다시 천국 쪽으로 방향을 틀수 있도록 그 때 그 때마다 문을 열어주는 식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요단강 같은 경우에 요단강물이 갑자기 불어났어요. 요단강 건너가야 약속의 땅인데 모세는 이미 죽어버렸고 여호수아는 별로 경험도 없어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언약궤라는 곽, 상자를 만들어서 그 언약궤 속에 유월절 어린양을 담았습니다.

그 상자에 담아서 그 상자를 메고 제사장 보고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가니 범람했던 요단강 물이 스톱됩니다. 이것을 사전에 눈치 챈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인간은 육신이기에 육신으로 눈치 챌 일은 영의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하라는 겁니다. 기도를 해야 자기 육신이 막장이 어디인지를 알아요. 기껏 우리의 기도내용이 우리 육신이 내놓는 모든 욕망의 마지막 터치하는 끝장입니다. 주님께서 응답하실 때는 그것이 왜 육신인가를 들춰내면서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보여주게 합니다.

언약궤로 요단강을 통과해서 언약궤로 말미암아 여리고성을 정복하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야, 언약궤만 있으며 승리하겠다.’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육신의 생각이에요. 언약궤 가지고 블레셋 전쟁하다가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어버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지요. 그 귀중한 언약궤를 빼앗겨 버립니다. 언약궤를 빼앗겼는데 언약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 궤를 자기들의 신당인 다곤 신당에 가져다 놓았는데 아침에 가보니 다곤 신상이 엎어져 있단 말이지요.

다시 세워놓고 그 다음날 보니 엎어진 정도가 아니고 손목과 발목, 모가지란 모가지는 다 부서져 있어요. 이런 아이디어를 우리가 사전에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마리아가 예수님 임신할 것을 사전에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동방박사가 별이 자기를 인도한다는 것을 사전에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성령을 좇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준 모든 일들은 전부 다 우리에게 낯선 것이고 새로운 것이고 이것은 육신으로서는 막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주께서 친히 요단강과 홍해를 갈라지게 하듯이 하루하루 살듯이 자동문 열리듯이 가까이 서면 열리고 안서면 닫혀 있는데 가까이 서면 또 다시 열리고 또 열리고, 그 열리는 자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통과해야 될 그 길로 우리를 매일같이 이끄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뭐냐, 우리가 뭘 느껴야 됩니까?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런데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있고 법을 지킴으로서 구원받는다.’는 하나님의 숨어 있는 원수들이 성도, 곧 영을 좇는 자의 주변에 좍 일어서고 대나무 숲을 지나가는 것처럼 그 나무들이 서서 협박하듯이 지켜보는 것처럼 누워있던 나무들이 갑자기 일어서서 공격하면서 달려들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바울도 느꼈는데요,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8절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로마서 8장에는 하나님의 원수라고 되어 있잖아요.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그 추상적인 것을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이것이 너무 추상적이라면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이것이 추상적이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면 구체적이지요. 그 다음에 더 구체적이 되면 지금 오늘날 우리의 삶이에요. 매일매일 손모가지 발모가지 다 깨져요. 모든 것, 내 육신이 산산조각 깨지는 이것이 바로 실제요 구체화된 성령을 따르는 삶입니다. 하여튼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게 만드시는 것.

나는 늘 우상이거든요. 내 육신이 우상이니까 이 육신인 우상을 손모가지 발모가지 다 부숴놓는 거예요. 기도하셨습니까? 기도했으면 그것이 다 부수어질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게 기도응답이에요. 기도제목대로 하나도 안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응답이에요. 왜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에. ‘아, 나 이렇게 무너져도 십자가로 구원받는구나. 천국 문이 열렸구나.’ 그걸 증거 하라고 그렇게 한 거예요. 그렇게 우리가 나갈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증거는 바로 우리 주변에 그것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성령 받지 못하고 육신을 좇는 사람들, 이것(수시로 성호나 긋는) 하는 사람들, 뭔가 내 행동으로 미래가 예측되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는 사람들, 법을 지켰기에 보상받을 것이라고 여기는 십자가의 원수들이 사도바울의 눈물 흘릴 거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가 임신해서 구원받았는데 우리는 지금 이 로마서 8장 7절의 말씀, 말씀을 지키지를 못하고 우리는 지킬 마음도 없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를 장착되게 하신 것이 곧 성령의 열매고 성령의 작품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을 좇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 힘으로 되겠습니까? 우리 예상은 성령을 좇아가는 것이 우리의 예상이 아니고 이 땅에서 성공한 사람 되는 것이 우리 인생의 포부였고 희망이었고 우리 가정의 영광이었습니다. 난데없이 성령 주셔서 이제는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시는, 언약이 앞에 보이고 우리는 뒤따라가는 주님의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마음이 성령을 통해서 늘 유지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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