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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단의 일 130712강의데살로니가후서

사단의 일 130712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이근호(IP:119.♡.93.55)

13-08-21 16:37

서울 의존교회130712a (사단의 일)―이 근호 목사

데살로니가후서 2장 16절부터 해야 되는데 16절을 하기 위해서는 앞의 이야기를 다시 연결시켜 해야 됨으로 9절을 보면 ‘살후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이렇게 나오는데 성경에서는 사단이 나와요. ‘사단의 역사’역사가 히스토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일한다.’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성경에서 사단이 나온다면 지금 이 시대도 사단의 일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어야 되겠지요? 아 저게 사단의 일이구나! 하고 짐작이 가고 수긍이 갈만한 그런 일들을 우리가 요새 체험하십니까? 일상 동네에서 직장에서 저게 사단의 일이구나! 아, 사단이 있긴 있구나! 라고 생각나는 경우가 어떤 경우에 오죠? 성경에 사단이 일한다고 되어 있으니까…….

제가 말씀드릴 것은 사단, 다른 말로 하면 악마죠. 악마를 사단이라 합니다. 악마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얼마든지 이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그 처신, 그러한 세상에 대한 태도, 만약에 그것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사단의 역사라는 표현을 사용한 하나님이 잘못이죠.

‘얘들아! 너희들이 이 세상을 사나?’ ‘예,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에 사단의 역사를 언급해 줬는데 그것을 평소에 너희 삶의 현장에서 그것을 느끼느냐?’하면 ‘그것, 뭐 별로 안 느껴도 충분히 살겠던데요.’그 사단의 역사를 생각 안 해도 사는데 뭐 지장이 없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그 말 괜히 했어! 이렇게 하나님이 나오겠어요? 아니지요.

아하, 너희들이 성경에서 조성하는 현실 말고 엉뚱한 현실 속에서 뭐 이만하면 됐습니다. 하고 그걸로 내 인생 이런 쪽으로 쭉 갈랍니다. 하고 성경과 다른 현실을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겁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면 성경어서 이야기한 현실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성경이 말하는 현실 속에는 반드시 사단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어요. 사단의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입장과 사도바울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입장은 분명히,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살면서 사단의 일을 항상 느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내가 살아가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사단을 뭐라 이야기 하지요? 공중권세 잡은 이죠. 에베소서 6장입니다. 학교에서 시험문제에 공중권세 잡은 () 해 놓고 다음에 공중권세 잡은 뒤에 들어갈 단어는? 1.박근혜 2.오바바 3.김정은 4.히틀러, 공중권세 잡은 해놓고 뒤에 ()에 들어갈 내용들이 뭔가? 성경을 모른다면 공중권세 잡은 해 놓고 뒤에는 우리가 아는 인물들, 우리가 이 세상에 현실 속에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인물을 집어넣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공중권세 잡은 이라고 해 놓고 뒤에 악마라고 했을 때 격자 구조로 우리가 현실을 봅시다. 우리가 여기에 앉아있고 우리는 격자구조 현실관을 만들거든요. 가까이는 내 남편, 내 자식들, 멀리는 내 직장 사람들, 또 멀리는 교회 교우들, 그렇게 해서 이것을 현실이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단은 이 현실 속에 어느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사단을 집어넣고 우리가 현실을 이렇게 구조를 짜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단이라는 것은 아예 없다고 없는 존재로 그게 문제에요 사단이 없다고 간주하고 아무 변화 없이 아무 느낌 없이 그냥 살아갈 때 혹시 그것이 사단이 의도한 바는 아닐까요?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기를 내가 싸움은 혈과 육의 관한 싸움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악마와 싸운다고 했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현실관 속에는 필히 뭐가 들어있습니까? 하나님의 원수로 들어 있습니까? 사단의 활동역사가 그 안에 필히 들어 있겠죠.

그런데 우리현실속의 사단은 어디 들어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사단이 있기 때문에 자기 인생은 사단과 싸우는 인생이다. 라고 분명하게 정립을 했어요. 내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사단과의 싸움이라고 정립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런 내 이야기, 생각에 대해서 너희가 동의하느냐? 우리에게 다그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나는 악마와 싸우는데 너희들도 그래? 그렇다면 우리는 다 같은 형제네? 안 그렇다면 사도 바울 나는 그럼 너희들과 다른 현실을 믿고 있구먼! 그 말은 너희들이 내가 생각하는 현실과 다른 현실을 생각하고 있구먼! 하고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회사에서 입사한 말단 사원에게 1일 사장을 하라고 하다면 아마 그 신입사원은 자기 초등학교, 고등학교 동창생 불러서 자기가 사장이라고 사무실 소개하는 것으로 하루일과가 시작될 거예요. 봐라, 나 사장됐어! 무시하지 마! 이게 내 사장실이고 이 건물이 우리 회사다 어때? 괜찮지? 이것으로 하루일과를 다 보낼 수 있어요. 끝나고 회사이름으로 내가 너희한테 술 사줄게 이렇게 하겠지요. 그런데 진짜 사장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진짜 사장같으면 자기 친구 불러서 사장실 소개해 주고 하는 쓸데없는 짓 하겠어요? 아침부터 그 회사운영에 매진하겠지요.

사도 바울이 세상을 볼 때에 제대로 사도 노릇을 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에 충만하면서 무엇을 겨냥하느냐 하면 나의 싸움은 사단과의 싸움이 다고 언지를 우리한테 줬습니다. 그렇다면 회사사장은 회사사장이 하는 그 방침이 있잖아요. 그 방침대로 말단직원도 왜 이렇게 하지? 뜻은 모르지만 사장님 명령이니까 하긴 하는데 모르면서도 따라하는 수밖에 없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그 사도 바울이 말한 그 현실관을 우리도 수긍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데살로니가후서 가운데 사단이 역사가 있다는 말에 대해서 우리가 선뜻 수용 못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사단의 역사와 뭐가 관련이 되어 있냐 하면 사단의 역사와 예수님의 강림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강림이 하시면 제일 먼저 사단을 망하게 합니다.

그러면 사단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무슨 때가 오기를 간곡히 고대하겠습니까? 예수님이 강림하시는 것이 고대하고 그 소식이 반갑겠지요? 그러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힘들고 고단하고 피곤하고 어려운 삶이 있더라도 무엇이 있기에, 힘들고 어렵고 고단하게 만드는 것이 아직도 사단이 일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내가 기쁘고 고대하고 반갑게 기대하는 것은 뭐냐?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는 그날이 있기에 우리는 그 날을 생각하면 늘 즐겁고 감사하고 기쁘다. 이렇게 되거든요. 예수님의 강림이 기뻐서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마다 않고 우리는 그것을 견뎌 냅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편지에 담아서 우리에게 소개를 했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여러분들도 저처럼 살아가는 것 맞지요? 라고 그것 다그치고 있어요. 그런 대목이 데살로니가뿐만 아니고 로마서도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7절에 보면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다’ 이 말은 뭔뜻인가 하면 사도 바울이 여러분!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 여기에 없지요? 라고 우리한테 확인 질문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사람도 우리끼리는 아무도 없죠? 이런 식으로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면 앉아 있는 사람이 ‘아멘!’기쁘게 화답하겠지요. 아멘 듣고 싶었던 그 말이었습니다.

사도님이니까 우리 마음을 이렇게 잘 꿰뚫어보시네! 아이고 누가 내 마음을 괘 뚫어보고 계시니까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내 대신 다 해 버렸습니다. 라고 호감과 동감을 유발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8절도 같은 말이에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누구의 것이로다? 주의 것이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무엇을 낚아채는 겁니까? 무엇을 쏙 빼버리는 겁니까? 우리가 만든 현실에서 나라는 것은 쏙아 내서 다 뽑아 버리고 남아 있는 자리에 무엇을 집어넣느냐 하면 예수님을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을’이 되고 주님은 ‘갑’이 되는 거예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주님이 나보다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먼저 존재하는 주님을 위해서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차후에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습니다. 라는 거예요.

주님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차후에 태어난 내가 태어날 이유도 목적도 의미도 없는 겁니다. 바로 그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니까 우리는 그냥 반갑고 그냥 좋지요. 라고 이렇게 사도 바울은 여기에 대한 우리의 동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가 반갑지 않다는 것은 정신을 엉뚱한데 팔고 있다는 겁니다. 정신을 엉뚱한데 팔고 있다는 것은 지금 현실이 아닌 다른 현실을 사주를 받아서 뒤에서 내부 조정을 받아서 자꾸만 엉뚱한 현실관을 우리가 지어내고 창작해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어요.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은 인생이라는 겁니다. 불만스러운 겁니다. 그 불만스런 현실을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이걸 만드는 재주는 공중권세 잡은 사단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단은 우리를 거기에 살게 만들고 사단은 뒤로 빠지는 겁니다. 뒤로 빠지니까 우리는 사단의 역사나 사단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지요. 항상 뒤편에서 조정하고 있으니까 없잖아, 없잖아 두리번거리는데 그 뒤쪽에 있으니까 그 두리번거리면서 매사가 불만스러운 거예요. 하루하루가 불만안스러운 날이 없어요.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불만스럽고 안 오면 덥다고 불만스럽고 하여튼 감사라 하는 것은 입을 닫았어요.

아침 눈뜨면서부터 감사는 없어요. 오직 매사가 불만스러워서 꼭 이런 현실에 내가 더 이상 살아야 되는가! 내가 자살하고 말지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지 하는 그런 푸념만 쏟아내니까 그 쏟아내는 푸념을 하지고 성경에서는 사단의 역사라고 하는 거예요. 사단이 어디 있냐고 찾고 있는데 그렇게 찾고 있으면서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단이 살아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물이 쏟아지고 있어요.

결론부터 이야기할게요. 사단의 역사를 우리가 안다고 해서 우리가 사단을 읽을 수가 없어요. 사단의 역사를 알았으니까 이제 사단을 생각안할 정도로 여유가다는 것도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사단의 역사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진짜 현실 속에 항상 사단의 역사는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살았어요. 항상 내가 싸움은 공중권세 잡은 사단과의 싸움 이지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고요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현실 속에는 사단은 항상 생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단이 살아있는 이유는 바로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보는 현실 속에 섞이다 보니까 자기도 사단의 역사가 눈에 보이는 겁니다.

아까 사단의 역사를 이야기 했었죠. 불만스럽고 불평스럽고 모든 게 만족스럽지 않고 할 수가 있다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따로 혼자서 행복해 지고 싶은 그런 상황을 상상하고 싶은 도피하듯이 그렇게 하고서 그게 나의 소박한 나만의 캡슐 같은 아무도 관섭 없고 나만의 생활공간, 그것으로 자족한다고 할 때 사단의 역사가 물론 느껴지지 않는 동시에 사단의 역사가 느껴지지않는다면 뭐도 사라지느냐 하면 예수님의 강림도 그 현장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강림이 없어요.

제가 여기 와서 여러 번 강의를 했습니다만 다시 한 번 전에 했던 것을 예를 들면 공터에 가면 큰 하수도관이 있지요. 옛날에는 놀이터가 없어 애들이 이 안에 가서 놀았어요. 그것을 남자애들은 그것을 우리끼리 본부라고 합니다. 애들이 들어가고도 남지요. 지름이 2-3미터 되니까 자, 이 큰 배관 끝에 예수님의 강림이 있다면 이 사람이 여기 들어가야 뭐가 보이겠어요? 예수님의 강림이 보이겠지요? 처음에 강의 할 때 이 전체가 바로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이 점을 다시 한번 설명해 드리는데 알아듣지 설명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아 듣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 너무 어려워서요.

십자가라는 사건은 단 회적이라 하는데 이것은 한번으로 끝내버렸어요. 한번으로 끝내버릴 경우 에는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은 창조를 몇 번했습니까? 한 번에 끝냈죠.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는 것은 한 번에 끝낸 창조를 우리가 아는 시간대에다가 두고두고 우리가 느끼면서 살고 있죠. 하나님이 매일같이 창조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 한번 한 창조가 계속해서 우리한테 적용되는 겁니다. 심지어 우리가 죽는 것까지 포함해서요.

십자가라는 것은 딱 한번 졌습니다. 한번 지면서 이 십자가의 완성은 새로운 현실을 낫는데 그 현실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에 저촉을 받지를 않습니다. 이것을 전에 관계성이라 이야기했지요. 아버지하고 아들 관계에서 7월 5일에 아버지였던 자가 7월 6일에 아저씨 되는 겁니까? 아니죠. 7월 8일에 가면 그냥 이웃집 어른 되는 거예요? 아니죠. 그 관계를 이해하시겠어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하신 것을 내가 믿겠다! 하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하신 일을 내가 믿어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기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을 믿음을 믿게 돼요. 그런데 그 믿음은 날마다 믿어야 계속 믿음이 유지되거든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믿음은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단번에 주신 믿음이기 때문에 믿어지는 것이지 내가 믿는 것은 아니죠. 믿어지는 거라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믿는 것하고 믿어지는 것하고 충돌이 일어납니다. 내가 믿는 것은 어제도 믿었잖아요. 오늘 저녁에도 믿었잖아요. 자꾸 믿었다는 자기 행함을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때도 내가 믿게 했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단 회적, 한번 일어난 십자가에 대한 적용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안에 우리의 창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창조될 때 하나님한테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요청 한 적이 없지요? 태어났으니까 태어나 보니까 하나님이 창조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가 원인이 되고 우리는 결과가 되겠지요. 결과라면 결과로서 살아야 될 텐데 결과가 어디에다 자꾸 간섭을 하려고 하느냐 하면 원인에다가 간섭을 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신이시여!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였습니까? 신이시여! 왜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신이시여! 내가 하는 계획 족족 내 뜻대로 안 되는 겁니까? 그러면 주님은 이야기하지요.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어디서 어디까지가 뜻입니까?

어떤 학생이 철봉에 매달렸습니다. 철봉에 매달린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할 때 선생님이 이야기합니다. 철봉에 매달리려면 네가 팔에 힘이 있어야 되는데 팔 힘이 생기는 것은 어떻게 생겼지? 오늘 아침에 밥을 먹어 팔 힘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네가 철봉에 매달리는 것 말고 네가 아침에 밥 먹는 것도 포함돼야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나온다면 그 말도 맞지요? 그러면 아침에 밥을 먹을 때 숟가락 누가 줬습니까? 엄마가 줬지요. 그러면 말씀이 이렇게 돼야 되지요. 철봉에 매달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아침에 엄마가 숟가락 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포함해야 되지요? 그러면 엄마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어디까지 번져야 돼요?

신직수 성도님은 지금 반팔 입었잖아요. 왜 반팔 입었지요? 그것은 집에서 반팔을 챙겼습니다. 그런데 왜 긴팔 아니고 반팔 챙깁니까? 여름이거든요. 그러면 여러분 여름은 누가 오게 했습니까? 여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오게 했지요? 도대체 우리가 내가 반팔을 입고 싶어 입었습니다. 하는 말이 끼어들 여지가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나는 5년 전부터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 말이 끼어들 여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5년 전에 나는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기도원에 올라가라고 누구한테 이야기했습니까? 차비 줘서 올라갔어요. 차비는 누가 줬는데? 누가 줬어. 그 사람은 왜 태어났는데? 이렇게 따지게 되면 도대체 우리가 언제 믿었습니다. 하는 것조차도 이것은 우리 역사 시간 속에서 끼어들 여지가 없지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시비걸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시비 걸려고 하는 것이 사실 맞아요. 시비 걸려고 하는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도대체 우리가 만든 현실이라는 것이 이게 누구 중심이냐 하면 나를 주인공으로 삼는 현실관이기 때문에 그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데 사실은 사단의 앞잡이로서 그렇게 현실관이 유포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간다는 라는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것 말고 따로 내 중심으로 현실을 챙기는 것이 나는 만족스러워 라고 우리가 생각할 때 그것은 사실은 예수님의 반대편, 예수님의 적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다른 현실관을 만들어야 마귀는 우리보고 박수를 치고 싶은 거예요. 그래 잘한다. 잘해! 진작 그래야지! 그렇게 나와야지! 사도 바울은 그런 현실관과 줄기차게 싸운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성경을 안다, 성경을 믿습니다. 성경을 알고 믿어버리면 예수님의 강림이나 사단의 역사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운 현실관을 갖추어져있어야 그게 마땅하지요? 제가 만족스럽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성경에서는 기쁘다 이야기하고 감사한다고 해 놨는데 다 같은 말이에요. 감사하다, 기쁘다. 만족스럽다, 같은 말이니까 사단의 역사가 있고 주의 강림이 있다는 이것이 오늘 본문에 있으니까 이 성경말씀에 있는 것이 우리한테 만족스럽지 않다면 이것은 바로 사단의 역사에 따라 가고 있으면서 사단의 조치에 우리가 말려들고 있는 거예요. 사단의 앞잡이가 되어서 야야, 너 현실 속에서 사단은 없어버려 다른 사람은 사단 생각안해도 얼마든지 돈 잘 벌고 잘 먹고 잘 살더라! 이렇게 그 자체가 마귀가 우리한테 기대하는 바를 우리가 어느 새 우리가 추종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사실은 그런 기분이 늘 들었겠지요. 그러니까 내 싸움은 공중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이라고 사도 바울은 인정을 했습니다. 그것을 인정을 했어요. 엄청난 괴물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그것을 인정하면서 주님이 하신 일의 의미에 대해서 감사했다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식으로 사단의 활동을 염두해 두고 감사할 것을 챙겼고 그것을 느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들도 이제부터 사단의 역사를 염두해 두세요. 여러분 역사에 집어넣으면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직 감사와 만족스러움과 고마움 밖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사단의 역사가 뭔지 살펴봐야지요.

살후 2: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살후 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사도 바울의 모든 이야기가 방금 이것을 뭐라 했느냐 하면 현실이라 했지요.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이 현실이니까 이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이 사도 바울의 현실은 뭐로 도배 되어 있느냐 하면 사단이 멈추지 않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현실 속에 이것을 집어넣어요. 사단의 활동, 그런데 사단이 이런 활동을 한다는 것을 보여 주면 무엇을 만족스러워해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강림이 와서 사단을 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예수님의 강림을 고대해야겠지요. 그러면 정답은 나왔습니다. 사단의 모든 역사가 뭐냐? 결국은 무엇을 생각하지 말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생각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물어봅시다. 예수님이 빠진 세상하고 예수님이 오신 세상하고 차이가 뭡니까? 뭔가 차이가 나야하잖아요. 예수님이 지금 여기 같이 있는 것 하고 의존교회에 같이 있는 것하고 빠져 있는 것하고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어떤 차이가 납니까? 학교에서 수학 시험을 치는데 예수님이 같이 있는 것하고 예수님이 없는 것하고 어떤 차이가 나지요? 먼저 예수님이 없는 경우를 봅시다. 예수님이 없는 경우는 누가 주인공이 되지요? 내가 주인공이 되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없는 상태에서 내가 만족스럽고 행복하고 야호! 하고 신나려면 내가 기대하고 고대하고 내가 소망하는 것을 이 현장에 일어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야호! 하고 만족하겠지요. 그리고 누가 없더라도? 예수님이 없더라도 나는 기분 좋다 말이죠.

그런데 사단은 무엇을 노리느냐 하면 이 현장에서 예수님을 생각하지 마! 너는 예수님이 없어도 살 수 있어! 라고 그것을 누가 장려하고 누가 학수고대하면서 박수쳐가면서 우리가 그런 현실을 사는 것을 누가 좋아합니까? 사단이 좋아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사단은 예수님이 강림해 버리면 인생을 망하게 만드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교사를 했을 때 애들이 약한 애들을 괴롭혀요. 그리고 하는 소리가 있어요. 무슨 소리냐 하면 너, 내가 돈 뺏고 강제로 담배 피게 만드는 것, 너 괴롭힌 것 절대로 선생님한테 이야기하면 안 돼! 선생님한테 절대로 이야기하면 안 돼 하는 소리를 네가 듣고 있지요. 항상 저는 쉬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힘센 깡패 같은 그 학생이 항상 무슨 말을 하고 행동을 해도 쉿! 선생님 오나? 이 모든 행동이 무엇과 연관되어 있어요? 절대로 이 사실을 선생님한테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염두해 두고 협박하잖아요.

히브리서 2장15절을 보세요.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기를 무서워해서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 주려한다고 했죠. 그러면 그 사단은 뭐냐 하면 깡패에요 그 학교 깡패한테 예예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약한 학생이 누구란 말입니까? 우리 인간이란 말이죠. 죽기를 무서워해서 벌벌 떨거든요. 그렇다고 학교를 안갈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살 수 밖에 없잖아요. 욥처럼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마음대로 물릴 수도 없고 무효로 하고 다시 부자 집 아들로 딸로 태어나고 싶어요?

우리가 지금 성경을 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현실의 정답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예를 듭니다. 학교깡패한테 얻어맞고 사는 우리, 그런데 그 깡패는 무서운 게 있더라 이 말입니다. 누구입니까? 절대로 선생님한테 이야기하면 안 돼! 라고 겁을 내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보고 선생님한테 고자질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또 고자질하는 우리가 바로 성도입니다. 뭐냐 하면 사단의 약점을 우리가 미리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단의 약점을 알고 있으면 누가 약자이고 누가 강자에요? 사단이 강자에요? 우리가 강자에요? 바로 예수님의 강림을 만족하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 강자요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그것을 원하고 있고 그것을 노리고 이 편지를 보내는 거예요.

데살로니가 교인 여러분들도 나, 사도 바울 이에요. 여러분 기분 좋아서 온 거예요. 주께서 강림하신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사단에게 매였는데 주께서 강림하셔서 폭행하듯이 사단을 쳐부숩니다. 저도 기분 좋은데 여러분들도 같이 기분이 좋지요? 하고 이 편지로 묻는 거예요. 그런데 교인들이 입을 꾹 다물고 암하고 있으면 뭐에요? 사도 바울이 내가 엉뚱하게 교회 아닌 곳에 와 있습니까? 절간에 와 있습니까?

사단은 눈에 안보이죠? 구약에서는 사단이 눈에 보였습니다. 구약에는 역사 속에서 주의 이름이 거기에 개입하거든요. 그럼 애굽에서 사단의 역할을 하는 것은 누구죠? 애굽나라 왕 바로 왕이죠. 모세가 누구와 싸웠습니까? 모세는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주의 이름, 하나님이 계셨죠. 그러면 모세가 애굽에 가서 아, 사단이 어디 있지? 음침한 공동묘지에 있나? 아니면 저 깊은 계곡에 사단이 있나? 사단아! 이리 나와봐! 나 모세야! 나는 사단과 싸우러 왔다! 뭐 이랬습니까?

사단이 누구하고 상대했습니까? 애굽의 왕, 바로죠. 바로가 만약 그 당시에 MBC, KBS, SBS tv가 있어서 매일 저녁 9시 뉴스에 바로 왕이 늘 등장한다고 합시다. 그 바로 왕을 보고 저거는 사단이야! 라고 판단할 수 있는 위인이 그 애굽나라에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없지요. 모세 아론 빼고는 없겠죠. 그러니까 없으니까 그 빠져나올 히브리인들이 누구를 원망했습니까? 바로를 원망한 것이 아니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말하면 구약에서의 사단은 강자입니다. 그리고 그 강자라는 것은 그 당시 모든 히브리인들과 유대인들에게 각인이 새겨졌어요. 무조건 저쪽은 강한자야! 그렇다면 광야를 떠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사단의 역할은 누가 했습니까? 바로 장대 같은 원주민들이죠. 그들 앞에서 이스라엘인들은 메뚜기 같다 했지요. 그러면 이번에 소년 다윗이 형심부름 나왔을 때 전쟁터에 나왔을 때 사단의 역할은 누가 했습니까? 골리앗이 했죠.

골리앗의 특징이 뭡니까? 세지요.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 사단, 악마는 항상 우리보다 너무 세서 우리는 그 앞에서 죽을까 벌벌 떨게 만드는 어떤 요소, 여기서 한번 따져봅시다. 우리가 어떤 사람 앞에서 죽을까 무서워 벌벌 떤다는 말은 누구만 살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나로 하여금 벌벌 떠는 저쪽만이 나를 살릴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는 사단이니 악마니 하는 말은 그런 식으로 현실을 꾸미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나를 살려주지? 라고 하면서 우리는 그와 기대고 아부하고 엮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바로 우리가 세상 적으로 기대고 뭔가 의지 하는 것이 항상 우리한테는 무슨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사단의 존재로서 우리한테 등장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혀있을 때에 몇 번 부인했습니까? 세 번 부인했죠. 제가 하나 예를 들게요. 평소에 불을 쬐고 있을 때 어떤 소녀가 평소에 예수님과 베드로하고 헤어지기 전에, 예수님이 잘 나가고 있을 때, 그때에 17살 먹은 소녀가 같이 불을 쬐고 있을 때 미리 땅겨서 소녀가 베드로보고 잘 나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베드로 선생님, 예수님하고 한 패죠? 하면 베드로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래, 한 패다! 왜? 왜 베드로가 그런 소리를 할 수 밖에 없겠어요? 실제로 누가 강합니까? 구름타고 오신다는 게 누구에요? 예수님이고 물 위를 걸은 게 누구입니까? 오병이어 기적 일으킨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궁중들이 호산나하고 불렀던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고 자기 장모를 낫게 하신분도 예수님이죠. 자기를 물 위로 걸어오게 하신분도 예수님이죠. 그리고 성전 가서 채찍을 휘두른 분도 예수님이죠.

그러면 베드로와 그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힘을 사랑한 겁니까? 제자들은 예수님한테 예수님 나라가 올 때 우리 중에 누가 높은 사람 되겠습니까? 라고 했잖아요. 그때 예수님께서 어린 애라고 했죠. 그러니까 12제자 모두가 예수님을 모르면서 예수님을 따라 다닌 거예요.

평소에 자기 현실관에는 누구든지 힘이 세서, 많은 힘으로 나를 살려주기만 하다면 나는 얼마든지 메시야로 추종하고 사랑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라고 우리 현실관이 갖춰져 있지요. 그 현실관을 사실은 주님께서 뒤 엎으려고 하신 거예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구원받아야할 자, 그게 구원이 아니고 거기서 빠져 나와야 될 구원되기 이전에 사단의 권세 안에 있을 때에나 나올 현실구조 현실관이라 이 말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혹독하게 확실하게 그런 생각을 갖도록 분명히 가지고 다녔어요. 왜? 많은 기적을 베풀어 줬으니까 그 기적에 혹한 거예요. 오병이어가 폼입니까? 여기서 오병이어 해 보세요. 의존교회, 하루아침에 부흥됩니다. 메시야가 누구나 있어요. 메시야는 누구나 소망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메시야가 어떤 연장선에 있느냐 하면 지금 내가 미처 갖지 못하는 것을, 내 포부를 그 메시야가 오게 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줄 것이다. 라는 그 연결된 선상 끝에 뭐가 온다? 메시야가 온다고 우리는 사수하고 싶은 거예요. 그것을 고수하고 싶은 겁니다.

다시 모세 이야기합니다. 모세가 바로가 싸웠잖아요. 싸웠을 때 누가 상당히 불편해 했습니까? 히브리인들, 빠져 나오려고 하는 히브리인들이 굉장히 불편해 했습니다. 저 양분들이 왜 저러나? 바로가 얼마나 센지를 모르고? 바로한테 좋은 말을 해서 빠져나오기는 뭐 하러 빠져나와? 이 땅에 살면서 노예생활 줄이기만 하는 것을 우리는 원하는데 저 모세, 아론은 왜 자꾸 오버하지? 바로 왕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데……. 그럴 때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것이 뭐냐? 바로가 악마에 속했다는 증거가 담긴 것을 준비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모세가 백성들에게 마지막 나올 때 요구한 게 뭡니까? 뭐 바르라고 했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양의 피를 발랐죠. 바로가 그것을 원했습니까? 바로가 모세야! 다른 것은 다 해도 제발 양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는 말아다오! 이랬습니까?

바로가 자기가 사단의 앞잡이인 것을 몰라요? 알아요? 모르지요. 히브리인들도 알아요? 몰라요? 모르지요. 모세도 알았어요? 몰랐어요? 모르지요. 모세의 아이디어입니까? 야, 피만 바르면 되겠네! 모세의 아이디어에요? 그러면 그렇게 애굽이라는 곳에 배치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 다시 말해서 창조 할 때 창조가 누구의 중심으로 했습니까? 예수님의 중심 아닙니까? 그 예수님께서 자기가 만든 창조에 계속해서 계획 했었고 관여 하셨죠. 여러분, 그것을 믿습니까?

이미 애굽에 있을 때 천지창조 하신 예수님이 관여했잖아요. 바로도 몰라, 모세도 몰라, 모세는 대책도 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할뿐이고 히브리인들도 몰라, 애굽 백성들도 몰라, 그러면 아는 사람 누가 있어요? 아무도 모르죠. 그리고 그 대책이라는 게 뭡니까? 생뚱맞은 대책입니다. 1년 된 양을 잡아서 그 피내서 그것을 문설주에 바르지요. 그러면 그 결과가 뭡니까?

오늘 강의 어려운 대목 나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소망이 있지요. 이 세상을 행복하게 힘들지 않게 살 소망이 있지요. 그렇다면 그 소망을 충족시킬 방법을 우리가 착안하겠어요? 착안 안 하겠어요? 우리 현실관 속에서 착안하겠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 의존교회가 예배당을 새로 지으려면 한 50억 필요한데, 50억 가진 사람, 교인하나 와서 성령 받아서 구원받고 내가 50억 흔쾌히 내겠습니다. 이러면 우리는 내지 마세요! 이렇게 할 사람 여기 아무도 없습니다. 반갑다 친구야! 고맙다 친구야!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하겠지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그렇게 되기를 반가워하는 것은 평소에 그런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그런 나를 만들어 낸 내 주재를 만들어 낸 현실관 속에 그 연장선 속에 그런 것을 얼마든지 모순 없이 같이 끼어들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어떤 지나가는 귀인이 와서 하는 말이 ‘피를 받아라!’하면 우리는 미쳤다고 하지요. 무슨 페인트칠 다 해 놨는데 피를 발라? 여름에 피 바르면 냄새 맡고 파리, 모기 다 모입니다. 이렇게 예배당 밖에 다 파리로 다 붙일까요?

성경을 보세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구원방법이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관 속에서 들려지지 않는 구원방법이에요. 우리 현실관 자체에서 탈출을 의도해서 주시는 방법이라니까요. 쌩뚱 맞아요. 피 바르고 난 뒤에 애굽에서 나올 때 뒤에서 애굽군대가 따라오니까 그 히브리인들이,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한테 원망했습니까? 모세한테 원망했습니다. ‘아니 우리가 집단적으로 죽을 때가 없어서 그래 홍해 바다에서 다 몰살당해? 세상에 책임져! 일을 왜 이따 구식으로 하느냐 말이다.’

진짜 주님 일을 이따 구식으로, 내 인생을 이따 구식으로 만들 거예요?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서 안 들어주신다 이 말입니다. 왜? 이유는 우리가 원하기 때문에 안 들어주시는 겁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원함 속에서 우리의 기대 속에서 우리가 탈출해야 그게 천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에서부터 탈출을 돼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방법이 아니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에 계속 갇혀있고 또 내일이면 기도 하면 주시겠지, 또 헌금하면 주시겠지, 계속 우리가 원하는 것에 우리가 스스로 갇히고 싶은데 우리가 원하는 방식은 그것은 바로 성경에는 사단의 역사라 하는 겁니다. 여기서 사단의 역사가 뭐냐 하면 모든 능력과 표적과, 공중권세 잡은 그 사단이 모든 것을 다 동원해요. 항공모함 비행기 잠수함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그 어린양의 피라는 것, 그것만을 우리 머릿속에서 지우개로 제발 지워지기를 그 싸움을 사단이 치열하게 벌리고 있습니다. 누구하고? 성령하고, 주님하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보 같아서 뭣도 모르고 그냥 살아요. 그런데 사단과 치열하게 싸웁니다. 그 어린 양의 피, 주의 강림, 주께서 하신일, 그게 내가 만든 현실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력을 하여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런 기적과 표적이 행운처럼 찾아오기를 제가 쓴 글에 보면 행운은 곧 불행이라는 글이 있지요. 그처럼 여러분, 행운을 기대하십니까? 그것은 차라리 심판과 저주와 불행을 기대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기대하고 소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현재 여러분들이 있는 그대로의 있는 모습 자체가 예수님이 만들었다 해서 주를 위해서, 주께서 조성해 놓으신 현실관을 우리 현실관으로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 이미 주님께서는 적당한 현실관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 현실관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지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서울 의존교회130712b (사단의 일)―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을 계속해서 하는데 성경에 사탄의 역사가 있는데 실제로 사탄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약도 마찬가지이지만 신약에서 사탄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게 아닌데 그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구약에 보면 실제로 사탄의 쪽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까 했습니다. 그게 모세 때는 누구라고 했습니까? 애굽의 왕 바로죠. 바로 왕인데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 그 히브리인들은 바로 왕이 사탄이라고 느낍니까? 안 느낍니까? 안 느끼죠. 왜? 강자이니까 강자라는 것은 우리한테 부러움의 대상돼요. 아이고, 좋겠다, 박근혜 대통령은 좋겠다, 부러움의 대상이죠. 아이고, 이건희 회장은 좋겠다, 세상에 재산이 수조원이 넘잖아요. 어떤 아가씨가 이건희 삼성 재벌 3세하고 결혼을 하게 되면 아이고 야야 어디 그런데 시집을 다 가냐? 차라리 죽어라! 이렇게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역시 기도 많이 하더니 기도 빨이 먹었나보다, 아이고 좋겠다, 나도 좋은 자리 있으면 어떻게 안 될까? 이렇게 같이 섞이고 싶어서 환장하지 그쪽 레벨 사람이 되고 싶어 환장하죠.

바로 왕이 사단의 짓을 했거든요. 바로 왕 자체가 사단의 짓을 따로 할 수가 없었어요. 왜냐 하면 사단의 짓을 하려면 절식으로 이게 하나님인데 이게 반대이니까 사단이라는 것이 나와야 되는데 아직 까지 어린 양의 죽음이 안 나왔어요. 어린 양의 죽음은 열 번째 재앙, 마지막 재앙 이전에는 안 나타났지요? 바로 왕은 지배자, 통치자, 강자, 누구도 찍소리 못하고 거기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그러니까 학교에서 오야봉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왕의 누가 죽어요? 바로 왕의 아들이 죽지요. 그것도 맏이가 죽잖아요.

여러분, 전쟁에서 마지막 시점은 둘 중에 누가 하나 죽어야 전쟁이 끝나지요. 전쟁의 판가름을 내려면 누구하나가 죽어야 되지요. 그런데 누가 죽어요? 바로 왕 아들이 죽지요. 죽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패배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 죽으면 승자가 없지요. 바로 아들이 죽었데, 죽었어? 우리 애들도 죽었는데 똑같네! 이러면 되는데 바로의 아들은 죽었는데 그 죽음과는 대조적으로 누구는 살아났어요? 히브리인들의 문설주에 피를 바른 그 집안의 맏이는 살았어요? 죽었어요? 살았지요. 왜 일괄적으로 안 죽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했다는 거잖아요.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안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개입하는 것도 안 믿어요. 사람은 사단이 안 보입니다. 사단이 안보이기 때문에 사단이 일하는 것도 안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았어요?

바로 왕의 아들은 죽고, 왜 바로 왕의 아들이 중요하느냐 하면 바로가 누구한테 대들었습니까? 모세한테 대들은 거예요. 모세가 나는 여호와가 보냈다하니까 바로가 하는 말이 여호와 같은 소리하고 있네! 여호와가 누구인데? 내가 오야봉인데 여호와가 누구인데 내가 그 말을 들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라고 대들다가 바로 아들이 죽었잖아요.

모세가 죽였습니까? 모세가 모자 쓰고 마스크하고 들어가 죽였습니까? 모세가 칼 차고 이게 어디 나를 무시해 하면서 가서 죽였습니까? 아니잖아요? 모세가 안 죽였으면 누가 죽였습니까? 하나님이 없다면서 하나님이 안 보인다며? 오늘날 신월동에 하나님이 보입니까? 그래서 신월동 사람들이 의존교회를 안 오는 거예요. 안 보이니까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교회안오는 식으로 그들을 일상 속에 개입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강하다는 사단한테 실컷 농락당하다가 결국은 너희들은 죽어라!

사람이 죽으면 괜찮아요. 문제는 사람이 저주스러운 존재라는 이유가 사람이 죽어도 안 죽어요. 교회 안 다녔잖아요. 죽어도 그만 이잖아요. 그런데 안 죽어요. 주께서 강림하실 때 천국 가는 사람은 영광스러운 부활로, 지옥갈 사람들은 흉측한 모습의 부활로 어쨌든 부활로, 어쨌든 무덤 속에 있는 자가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곧 와요. 여러분, 이거 반가운 소리 아닙니까? 빗소리만 반가운 거예요? 얼마나 반가운 소리 입니까?

그 반가움이 그때만 반가워하지 말고 7월12일 오늘 깊숙이 주님의 피로 장화신고 주의 내리는 그 다시 산다는 말씀이 우리몸속에 푹 젖어야 돼요. 그럴 때 평소의 길거리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강자, 무서운 자, 힘센 자, 돈 많은 자, 거기에 껌뻑 죽어서 살아가는 사단의 종이라는 사실이 우리 눈에 들어오지요.

사단은 눈에 안 보이고 하지만 사단의 일은 눈에 들어오고 예수님은 눈에 안보여도 예수님의 일은 지금 눈에 들어옵니다. 이미 우리는 살았고 저들은 죽었고 주님의 십자가 개입이 그런 식으로 되는 거예요. 산자는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은 자는 사나 죽으나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겁니다. 오늘날 현실 21세기에 있는데 성경 말씀이 틀렸다고 할 수가 없지요. 성경말씀이 옛날 객소리가 아니죠. 생생하게 지금도 그대로 살아있는 겁니다.

바로 왕부터 계속해 봅시다. 바로는 강합니다. 우리는 강자를 좋아합니다. 강자한테 들러붙어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것을 간곡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자한테는 너무나 약하고 약자한테는 너무나 강해요. 그리고 그런 현실관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현실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옛날에 출애굽할 때 히브리인이나 그리고 애굽사람이나 ‘바로는 세다’ 바로가 오야봉이고 바로 말을 안 들으면 즉각 처분, 죽는다. 요새 북한의 김정은처럼, 그런 존재가 바로 왕이거든요.

그래서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 앞에 영생 얻고 구원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습니다. 모세, 아론보고 하는 것 보세요. 모세를 원망하는 입장에서 어느 누구도 나는 마땅히 살아야 돼! 하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메시야가 바로인데요, 그들이 희망하는 메시야의 상은 바로가 미리 모형을 보여 줬잖아요. 바로 보다 더 센 분이 오실거야!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바로 보다 더 센 분이 오는 게 아니고 바로 그 문설주에 피 바름을 당하기 위해서 그들 가정에 어린 양으로 자라나고 있던 어린 양이 있어요. 그 양의 모습이 바로 오실 메시야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25장에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다. 하는 말을 믿어요? 누가 천국가고 누가 지옥 갑니까? 나한테 먹을 것 입을 것 준 사람이 천국간다. 그게 누구입니까? 네가 무시하고 기댈때 없는 네가 부러워하지 않는 이 작은 아이, 소자 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예수님은 강자가 아니고 우리가 충분히 호감하지 않고 필요로 하지 않는 있으나 마나한 그런 존재의 모습으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거예요. 왜? 우리가 너무 강한 자를 고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학교 가 보세요. 학교에서 강한 자가 누구냐 하면 담배피고 침이나 뱉고 이런 아이는 쉬는 시간이나 강하지 평소에 수업 시간에 강한 사람은 누구이냐 하면 역시 공부 잘하는 사람입니다. 공부만 잘하는 애보다 더 센 아이가 누구냐? 공부 잘하고 이쁜아이, 공부 잘하고 이쁜아이보다 더 센 아이가 누구이냐? 공부 잘하고 예쁘고 집안 좋은 아이, 그러니까 이것은 선생님부터 껌뻑 죽습니다. 선생님부터 껌뻑 죽으니까 나머지 아이는 뭐냐? 그 아이가 정점, 모델이 돼서 걔 흉내 내기, 걔 모방하기, 걔 뒤따라 가기, 걔 중심으로 집안 좋고 인물좋고 공부잘하고 걔중심으로.....

국제중학교 들어가기 위해서 그 아이 키우기 위해서 오늘도 여왕의 교실에서 얼마나 애를 씁니까? 방학도 없이 공부시키잖아요. 학부모들은 좋지요. 학부모들이 원하는 메시야는 그런 겁니다. 공부 잘하고 인물 좋고 하지 절대로 소자 같은 것은 원치않아요. 어린 양을 믿는 그런 바보 정신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뭔가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인물이 내 집안에서 나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이 공부 잘 했습니까? 예수님 인물이 괜찮았습니까? 예수님의 집안이 어땠습니까? 예수님은 마리아가 잉태해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했으니까 이것은 분명히 사람을 임신한 거죠. 육신이 임신한 게 되잖아요. 육신이 임신했는데 뭔가 이상해요. 예수님한테는 아빠가 없어요. 아빠가 누락되어 있어요. 아빠가 비어있어요. 엄마는 있는데 아빠 자리가 없어요. 이 말은 예수님은 이 땅에 족보가 없어요. 그리고 그 예수님의 노선에 아까 그 큰 배가 그 예수님의 노선에 들어선 사람은 전부 다 이와 같아요.

성령으로 난 사람은 육에서 난 사람과 구분이 됩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과격한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은 과격한 말씀이 진짜 말씀이죠. 누구든지 성령을 부인하는 자는 지금 이라도 지옥가고 오는 세대에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했거든요. 죄 사함이라 하는 것은 어떤 죄를 씻어줄 때를 죄 사함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단서를 붙였어요. 이런 죄인은 어떤 경우에도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지은 모든 죄는 모두 용서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성령을 부인하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차원을 넘어섰어요. 이것은 악마의 차원입니다. 만약에 성령 부인했는데도 용서받는다고 하면 이것은 아예 지옥 자체를 없애 버렸다와 똑같은 거예요. 악마도 용서받을 수 있다가 되어 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용서하는 것이 주가 아니고 전쟁이 주에요. 악마는 악마답게 성령은 성령답게 분명히, 또렷이 드러나는 것이 예수님이 현실관의 취지입니다. 우리는 그 취지를 이해해야 돼요. 예수님의 행운을 얼마나 내가 가지냐를 생각하지 마시고 나는 어느 편에 속한 것으로 감사해야 되입니다.

마리야가 임신을 했는데 성령에 의해서 잉태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의 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모든 것이 성경에 의해서 나왔죠. 그러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공생애 때에 사람 만나기전에 제일 먼저 누구부터 만났느냐 하면 성령의 끌려서 광야에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세례요한 이후에 만난 인물이 누구죠? 사단을 만났죠. 사단을 먼저 만났죠. 왜? 다른 사람은 사단의 수하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강해요. 경제적인 문제, 인기문제, 세상 권력에 사단이 강하거든요.

사단을 만났다는 이 말은 그 다음부터는 사단의 세계에 예수님이 대결구조로 가져갑니다. 그러면 사단이 세기 때문에 예수님이 빠져나왔지만 사단이 세기 때문에 그 세상 속에서 예수님, 안녕하세요? 제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면서 자발적으로 뛰어나올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없으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냥 아버지가 우리한테 보내준 자만 찾아가니까 그런 식으로 뽑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저를 뽑아주세요! 하는 그런 권한이 어떤 인간에게도 있을 수가 없지요.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8장에 현장에서 간음한 사람의 경우를 봅시다. 요한복음에 쭉 나오는데 세 가지 예를 들게요. 8장에 간음한 사람 나오지요. 5장에는 38년 된 병자가 나오죠. 요한 복음 9장에는 누가 나옵니까?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나오지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그 다음에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중풍병자, 이런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구원을 받게 되는데 38년 된 병자가 구원을 받는데 누가 찾아옵니까? 예수님이 찾아오지요. 자, 여기서 만약 지금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온다면 여러분들은 그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못 알아봅니다. 왜냐 하면 그 간통한 여인이나 38년 된 병자나 소경된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 저를 구원하러 왔군요.’하고 먼저 나선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먼저 나서지를 않았죠. 그러면 예수님이 옆에서 이야기를 해도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메시야 맞습니다. 하고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 듣습니까? 못 알아듣지요.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의미하는 취지가 뭐냐 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육이 알아서 영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말입니다. 영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의도적으로 다가가신 겁니다. 간음한 여자가 찾아왔지요. 예수님이 다 물리치시고 그 여자를 용서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의 소관입니까? 누가 마음대로 인정한 거예요? 예수님 마음대로죠. 실로암에 못에 씻으라 할 때도 소경이 구원받고자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일괄적으로 그렇게 조치를 했죠.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조치가 있는 겁니다. 병원에 가서 붕대감고 약 바르고 어떤 사람이 병원가기 전에는 얼굴에 아무 것도 없었는데 병원 나오면서 붕대붙이고 손에 약 얻어서 나왔다 그 사람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분명히 그 의사가 그렇게 했지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다녀가시니까 얼굴에 뭐 붙이고 약가지고 나왔다,

그러면 이러한 것이 원칙이 되어서 그때부터 모든 영적인 성령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무슨 조치를 당하게 됩니까? 주님께서 했던 모든 조치가 그 사람에게 다 공히 주어지겠지요? 그럴 때 그들은 비로소 내가 그동안 예수님이 찾아오지 않는 사단에 속한 채로 인생을 헛살았구나! 그것을 느끼는 겁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에게 물을 갖다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습니다. 그렇다면 물로 포도주로 바꾸는 아이디어가 마리아에게서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예수님에게 가져간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내가 나된 것은 어떤 것도 나의 아이디어가 거기에 포함이 된다? 안 된다? 없다 이 말이죠. 앞으로도 어떻습니까? 앞으로도 그럴꺼에요. 그럼 하루하루 눈뜨고 사는 것이 누가 만든 인생입니까? 내가 만든 인생입니까? 내가 발휘한 인생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그 사람이 바로 성령에 속한 사람이고 주께서 구원하는 사람이고 주께서 만들어 가는 주님의 현실 속에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눈에 안 보여요. 사단이 눈에 안 보여요. 주님이 다녀간 사람이 없는 사람은 사단에 속한 사람이고 주님이 다녀간 사람은 이미 사단에게 벗어난 사람입니다. 사단에게 벗어난 사람은 비로소 뭐가 보입니까? 옛날에 자기가 사단에게 속아서 살았던 것이 생생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 예수님께 감사가 빠진 모든 것은 사단의 역사이고 예수님의 감사가 붕대감은, 처방전을 손에 쥐고 있으면 이런 것은 누가 봐도 성령의 속한 사람이라고 알겠죠.

모세가 광야, 홍해 강에 있을 때 뒤에서 애굽나라가 따라왔을 때 히브리인들은 원망했습니다. 뭐냐 하면 군사가 따라왔는데 모세를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를 이끌어 왔다고 했어요. 그럴 때 그들이 아는 것은 뭐냐 하면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큰 아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만을 알지 뭐는 모릅니까? 예수님이 주의 이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모르지요.

아들이 죽어야 되는데 살았으니까 그것으로 그 현실관을 계속 이어갑니다. 그 현실관을 이어가는데 이은 그 다음에 아마 분명히 바다는 갈라질 것이다. 라고 생각한 사람 그 당시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뭔가 잘못됐지요. 뭔가 막혀 있지요. 어린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래서 반은 살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현실관은 뭡니까? 옛날에 사는 사람은 계속 살아 남아있는 현실관이죠. 그러니까 그 현실관은 그 다음에 무엇을 캐느냐, 새로운 사단의 역사에 대해서 강자에 대해서 그들은 꼼짝 못하고 고개 숙이게 되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정탐꾼 12명 보냈습니까? 12명을 보냈는데 10명이 뭐라 합니까?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한다? 못 차지한다? 못 차지해요. 왜? 이유가 뭡니까? 그들은, 원주민들은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 강하다는 사고방식이 그들을 발목을 계속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40년 동안이나 그것을 40년간 정탐해서 못 들어가잖아요. 하나님께서 그 40년 전달한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40년간 그 광야를 쓸데없이 뺑뺑 돌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이미 죽은 자라는 거예요. 그들은 죽은 자라는 거예요. 그 죽은 게 어떻게 죽은 거냐 하면 ‘역시 강해야 살아!’ 라는 사고방식이 죽어 마땅한 사고방식, 현실관 속에 그게 섞여있는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강해야 산다는 것이 죽어 마땅한 거예요.

광야에서 40년 동안 계속해서 원망한 것이 뭐냐, 애굽이 좋았다. 언제 우리 애굽으로 돌아가나? 그때 애굽에는 부추도 있고 파도 있고 마늘도 있는데 지금 만날 먹는 것만 먹고 기름기도 없고 정력도 쇄하도다! 만날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때가 사는 것이 재미있었다는 겁니다. 사람은 이왕 사는 것, 재미로 살아야 돼요. 재미있게 살아야 돼요. 이 사람들이 재미있게 살다가 죽었어요.

이것은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현실관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우리의 선배 되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광야 돌아다니면서 우리가 할 소리를 몽땅 다 쏟아냈어요. 왜 우리는 이렇게 재미가 없느냐? 왜 강한 자가 있어서 우리가 못 들어가게 했느냐? 하나님께서 강한 자를 원주민으로 두는 이유는 네가 믿는 믿음 말고 주님이 주신 믿음이 있느냐를 확인하기 위해서 계속 강한 자를 주는 겁니다.

강한 자가 있을 때 우리에게 대책은 뭡니까? ‘주님은 우리보다 더 강해!’라는 것이 대책 아닙니까? 왜냐 하면 그것은 강하면 강함으로 풀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된 사고방식이에요. 우리는 진작 죽어야 돼! 이게 바로 정답입니다. 날마다 주께서 살려주셨기 때문에 살았지, 우리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이야! 내가 관리할 인생이 아니고 매일같이 살려주시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죽는 것이 그것은 너무나 우리한테는 합당한 현실이에요.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만을 품거나 원망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우리는 오늘도 죽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죄로 죽는 게 마땅하지! 그런 마음가짐일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 전부가 사단의 역사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주께서 나로 하여금 날마다 죽게 하시는 것은 날마다 예수님의 생명이 죽을 우리 육체에 나타나게 함입니다. 우리가 아는 생명은 없어지고 주님이 집어넣은 영생은 우리 속에서 피어나고 그러한 실험장, 그러한 재료가 우리 인생이에요. 우리 인생을 주께서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요. 그저 세상이,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없어지고 주께서 좋아하는 것은 피어나고 그것이 우리 인생을 통해서 계속해서 교체되면서 피어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0절 봅시다.

살후 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살후 2: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살후 2: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이냐 하면 사도 바울 본인의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 받았잖아요. 성령 받았으니까 이런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동의를 할까요? 동의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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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3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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