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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3. 6. 21) 1강자유게시판에스겔

광주 강의(2013. 6. 21) 1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36)

광주 강의(2013. 6. 21) 43-1

에스겔 40장을 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레위기를 읽기가 지루하다고 하는데, 저는 에스겔 40, 41, 42장이 더 지루할 것 같아요. 40장에 보면 “우리가 사로잡힌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거기서” 뭐가 보이느냐?

천사가 있었고, 그 천사의 손에는 측량하는 장대가 있었고, 이미 완공된 집에 대해서 측량을 시작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아주 지루해요.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 흥미 위주나 읽기 편하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지 우리가 납득하고 흔쾌히 동의해서 구원에 이르는 그런 용도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자기 계획서입니다.

40, 41, 42장의 내용은 설계도인데, 지루하게 방 치수, 구조 이런 이야기입니다. 전혀 은혜로운 구석이 없습니다. 당시에 카메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에스겔이 산 위에서 본 광경이 40~4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제가 3장에 그려보았습니다.

에스겔 성전의 평면도인데, 정 방향 이쪽이 500규빗이고, 여기도 500규빗입니다. 1규빗(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은 약 45.6 Cm쯤 됩니다. 가로 228, 세로 228미터.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만들어놓고, 이미 불타버린 솔로몬 성전을 대신해서 이런 성전에서 너희들이 산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옛날 솔로몬 성전에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찾아왔겠지요. 그들이 성전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 열왕기상 8장 나오는데, 병들었을 때도 찾아오고, 전쟁에 패했을 때도 찾아오고, 죄 지었을 때도 찾아오고, 가정에 우환이나 힘들 때 찾아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네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했어요.

우리 생각에는 꼭 성전에 안 가고 다른 곳에서 기도해도 응답해 주실 것 같은데 왜 하나님은 성전을 고집하실까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까 산 위에서 기도해도 응답하시면 좋겠는데 왜 하필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기도하라고 했을까요?

거기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실무자가 계세요. 그분은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은 철수, 영희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주의 이름’을 상관한다든지 대화를 청한다든지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이름(철수, 영이)이라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할 수 있지만 인간의 이름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은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기에 그냥 ‘주의 이름’입니다. 인간들이 상대를 만날 때는 자기 이름을 들고 나오는데 주님은 이름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주의 이름’과 관계가 성사되지 않습니다.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의 이름’이 이 땅에 나타날 때 어떤 기능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흠 없는 어린양의 죽음입니다.

죽음이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과 관계를 맺으려면 자신의 존재는 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나의 회복을 원합니까, 아니면 거듭나기를 원합니까? 구원 받을 때 내가 회복되어서 구원 받습니까, 아니면 내가 다른 인간으로 구원 받습니까? 거듭난다는 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고 다른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는 죽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죽음, 자기 십자가가 없으면 구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구원하는 이유가, 이미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우상들이 지천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나의 회복을 줍니다. 지금보다 더 뛰어나고, 더 나은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신과 거래에 나설 때는 우리 이름으로 뭔가를 바치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나의 이름으로 선물을 주잖아요. 이런 우상적인 방식을 차단하기 위해서 인간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길은 죽음으로 끊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기도하라고 했는가? 기도하면 병도 낫고, 전쟁도 이기고, 가뭄에 비도 내리고, 곡식이 잘 된다는 그런 약속을 왜 했는가? 이 원리를 그대로 적용시키면 이렇습니다. ‘비가 안 와서 농사가 안 된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가서 주의 약속대로 기도하면 비가 와서 농사가 잘 될 것이다.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서 기도했고 기도가 응답되어 비가 왔습니다.

그러면 그 농사나 농토가 그 이후에는 누구 소유가 됩니까? 처음에는 자기 것 잘 되기 위해서 갔다가 막상 예루살렘을 거쳐 오게 되면 자신의 것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이 그것을 노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농토는 누구 소속인가 하면, 주의 이름으로 회수된 농토가 됩니다.

그래서 구원 받는 사람은 본인의 기대와 희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으면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주의 것이 된 사람의 특징은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재산이 있더라도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내 것을 잘 키워서 확장해 보겠다는 것은 주님 앞에 용납이 안 됩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이제 주님의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그 작업을 주님이 행하시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행하시는 주님의 구원 작업입니다. 물론 내 것 빼앗기고 주님 것으로 등기 이전될 때 화가 나지요. 나는 나의 명예와 행복의 회복을 원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기니까요. 주 안에서 우리는 죽어야 하고, 죽으면 내 것이 없어집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구원 받았습니다. 만약 이것이 나의 회복이라면 우리 직업을 강도로 바꿔야 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거지가 되어야 합니까? 아니지요. 어차피 죽으면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 받아야지.’하는 생각도 죽음과 함께 다 사라집니다. 의미 없는 겁니다.

우리가 내 것이라고 하는 자체가 주님의 것을 훼손시키는 짓입니다. 우리의 회복을 바라는 것은 주의 이름을 좋아해서가 아니고 내 이름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내 이름 값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회복을 바라지요.

여러분들이 무쇠 솥뚜껑 위에 올라가 보세요. 내려앉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알루미늄 냄비 위에 올라가면 냄비가 찌그러지지요. 내가 내 이름을 생각하고 이것은 내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하나님의 것이 내가 차지한 자리만큼 우그러듭니다. 우리는 우그러진 것도 모르고 내 소원대로 되게 해달라고 하는데, 주님은 “빨리 비켜라. 네가 내 것을 훼손했다.” 이렇게 나오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고상한 것을 우리가 내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마구 군화발로 짓밟아 왔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을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이것이 내 것이라고 하는 순간 주님이 주신 은혜를 지금 훼손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은 선풍기를 주시면서 감사하라고 하시는데, 처음에는 감사하다가 나중에는 감사한줄 몰라요. 이 자체가 냄비를 찌그러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풍기가 차압을 당해서 남의 집에 가 있다면 그 때 그 선풍기에 대해 감사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되지요. 주님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있는 것을 원치 않고 주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렌탈이라고 하는데, 빌리는 것이지요. 우리의 하루하루가 주님께 빌린 세월이기에 이것을 모으지 말고 소모해야 합니다. 모으면 내 것 됩니다. 내 것이 되면 냄비가 우그러져요.

성전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될 것이 뭔가 하면, 원하지도 않은 설계도를 왜 보여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네가 있는 자리를 비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작업에 내가 방해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날 솔로몬 성전에서 쫓겨났어요. 쫓겨난 이유가 성전은 주의 이름이 계시는 곳인데 그들은 자기 이름을 위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소유하려 했기에 그 성전이 불탔고 그들이 망하게 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은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고 반대가 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날마다 소유당해야 하는데, “주님이 내게 해 준 것이 뭐 있습니까?” 이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을 위해 치워버려야 할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에스겔 새 성전의 설계도를 보여주신 이유가 드러나지요. 만약 에스겔 성전의 설계도를 안 보여 주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네가 하나님을 모실 성전을 지어라.”고 했다면 우리는 어떤 구조로 성전을 짓겠습니까? 아마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필요한 공간들을 염두에 두면서 설계를 할 거예요. “하나님, 제가 경배하는 모습이 잘 모이지요?” 이런 식으로.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의미 있고 가치 있음을 하나님이 인정해 줄 것이라는 식으로 성전을 만들겠지요.

솔로몬 성전이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불타 버렸다면 새 성전은 그런 사고방식이 잘못임을 보여주는 내용이 이 성전 안에 포함이 되어야겠지요. 하나님이 성전 설계도를 보여주시는 것은 ‘이 성전은 인간 중심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전은 누구 중심입니까? 죄 많은 인간을 대신해서 오실 분이 있어요. 에스겔에서는 ‘인자’라고 했어요. ‘인자’가 거하실 공간이 새 성전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에스겔 41, 42, 43장에 나오는 이 성전을 기본 모델로 해서 거대하게 46년 동안 계속 짓고 있는 성전이 있었지요. 그것을 헤롯 성전이라고 합니다. 헤롯 성전이 이 에스겔 성전을 흉내 낼 수밖에 없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런 성전이 주어진다고 하니까 그 때가 되면 다윗이 이 성전에 좌정한다고 하니까 이 성전을 누가 만약 짓게 된다면 그 사람은 백성들로부터 지도력을 인정받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래서 헤롯이 성전을 건축하게 된 것입니다.

헤롯의 역점 사업 중 최고의 사업이 유대 백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성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고 에돔 사람입니다. 에돔 사람이면서 유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강제로 할례를 시킨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국가 법에 의해서 강제로 할례를 시행했어요.

유대인들은 여호와 말씀이라고 하면 무조건 따랐어요. 그러기에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면 통치자로서 존중받고 훌륭한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겠지요. 마치 박근혜 대통령이 이단들을 다 척결하고 곳곳에 장로교 예배당을 세워 준다면 장로교 교단에서 대통령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에스겔 40장을 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건물 성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에스겔에게 설계도를 주셨고, 직접 측량도 했어요. 측량을 했다는 것은 실제로 땅 위에 건물 크기와 높이 등을 구체적으로 말씀한 것이기에 이 성전이 하나님께서 마지막 허락한 성전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성전을 헐라고 하시니까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성전 짓는 속도가 너무 느리니까 주님이 사흘 만에 완성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제시한 성전은 제자들도 몰랐어요. 나중에 예수님 부활한 후에 알았습니다. 성전은 예수님 자신의 몸을 두고 말씀하신 것인 줄.

그러면 이 에스겔 성전의 의미는 끝났습니다. 성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육체입니다. 예수님 육체 밖에는 성전이 없고 예수님 몸 자체가 성전입니다. 세상의 어떤 학자가 이 부동산 건물로 된 성전이 예수님 몸이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 요한은 제자이지만 그들도 오해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부동산 건물에 오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건물을 헐라는 말은, 인간들의 사고에서 나온 성전은 이럴 것이라는 아이디어는 주님 이름에 의해서 부서질 대상이며 이런 작업에 나서시는 분이 진짜 성전 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아이디어는 다 주님 앞에 부서져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질문합니다. 우리 몸이 성전입니까, 아닙니까? 우리 몸이 성전이라는 생각도 주님에 의해 부서져야 됩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라면 이곳에 성전이 여러 개가 있네요. “너희 몸이 성전이다.”라고 할 때는 우리가 지닌 이 몸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몸은 개별적인 내 몸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너희 몸이 성전이다.”라고 할 때는 각자의 몸을 성전이라고 한 것이 아니고 너희 모두가 하나의 몸을 이루어 성전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에베소서 2장이 나오지요. 성령이 연결시켜서 하나의 성전을 이룹니다. 그래서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출발부터 내 이름을 위하기에, 내가 잘 되는 것이 좋은 세상이라고 여기기에 성경을 해석할 때 이 점을 포기 못해요. 그러다보니 ‘내 몸은 성전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께서 방울처럼 들어오게 되면 내가 가는 곳마다 딸랑딸랑 소리가 나겠지요. 이게 틀려먹은 거예요. 성경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나에게만 성령이 충만하게 오는 것이 아니고 전체 성전을 고려해서 우리의 기능을 분명히 밝혀주는 식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는 것은 내 좋으라고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성전을 위하여 내 몸이 봉사해야 하고, 희생해야 할 것을 자각시키기 위해 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나만 잘 되는 것으로 생각해요. 여름에 제과점이나 찻집에 친구들과 같이 가서 팥빙수를 주문했으면 어느 그릇이 더 많이 담겼나를 비교해요.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이런 식으로 비교합니다.

제자들이 성령 받은 후에 “이제 됐다. 나는 성령 받았으니까 구원은 확실하고, 이제 놀아야지.” 이렇게 했어요? 바울이 성령 받고 고생에 접어들었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끌려가면서 풍랑을 만나고 죽을 고생을 했지요. 스데반 집사가 성령에 충만해서 설교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어요.

주님은 전체를 위하여 각자의 역할을 하라고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성령 받지 아니하면 전체는 생각지 않고 나만 생각합니다. 나만 즐거우면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름다울 때 그 아름다운 것을 나의 것으로 가지면서 주님이 주신 냄비를 찌그러뜨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주님 몸이 찌그러진 상태에서 원상회복이 되겠지요. 따라서 주님은 자기 몸의 회복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 안 합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는 말씀은 아내가 없어야 구원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결혼 전에는 주님을 기쁘게 하던 사람이 결혼해서 아내를 기쁘게 한다고 주님께 소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한 거예요.

그래서 이 성전 자체가 주의 이름이 거해야 되기 때문에 성전에는 주인공이 없습니다. 제사장이 성전에서 활동하지만 제사장의 이름은 없습니다. 성전은 우리를 익명적 존재로 전환시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네 이름 내기 위해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기도, 구제, 금식 등 무엇을 해도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식으로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일(교사, 회사원, 목사, 학생 등)도 주님이 시켜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의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을 위해서 하니까 주님의 냄비가 우그러지고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이름 없으면 편해요. 주님 이름이 우리 이름을 이미 차압했잖아요. 그러면 우리 이름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름 없는 빈자리에 주님 이름이 차고 들어오기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주의 이름으로 연결되는데 그것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연결된 상태입니다.

초기 우주인들이 우주선 밖으로 나올 때 우주선과 사람 몸을 연결하는 선이 있어서 마치 아기와 엄마가 탯줄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어요. 탯줄이 끊어지면 죽는 거예요. 그 양상이 오늘날 성도가 존재하는 양상입니다. 주님의 탯줄이 없으면 우리는 죽어요. 따라서 구원은 오직 언약 속에만 담기지 언약 외에는 없어요.

한국교회는 이런 말씀을 거부하지만 이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바울 안에 성령이 있어서 그를 인도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말을 안 듣습니다. 오직 언약 완성을 위해 임하기 때문에 언약대로만 실시합니다. 따라서 에스겔에 나오는 이 성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어서 우리가 성령 받아서 성전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오직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만 매일같이 각인 시키면서 모든 사건이 진행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움직이는 제사장의 분주한 몸짓도 자기 이름을 위함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담아서 합니다. 오늘날 성도는 이미 오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반복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전이 움직인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애가 성령 안에서 반복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애를 적용할 때 빈 진공상태에 직접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생애를 둘러싼 검은 세력들(요한 계시록에서는 ‘짐승’이라고 하고, 예수님은 이들을 ‘악마’라 했음)이 활개를 쳤기에, 예수님은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심지어 12제자도 예수님의 권능을 받아서 이런 일을 했지요.

제자들이 “우리가 능력을 행하니까 귀신이 떠나갔습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그런 것으로 좋아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지요. 이런 대화는 바로 이런 그림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 예수님 생애만 오는 것이 아니고 그를 둘러싼 악한 세력도 같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경험했던 것이 이제 우리의 경험이 될 때 이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라는 기존의 개념은, 늘 청소기를 들고 우리 속을 구석구석 청소하면 깔끔해지니까 우리 몸은 거룩하다고 합니다. 때가 끼면 또 청소해서 거룩하게 하고. 이것은 유식불교입니다. 우리나라 옛날 불교의 고승들은 인간의 마음을 거울로 보아서 거울이 깨끗하지 않으면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거울이 세상 욕심 때문에 때가 끼면 깨끗하게 청소해야 하고, 거울이 깨끗해지면 세상을 똑바로 보고 바로 행하고 바로 생각하니까 많은 중생들을 진리로 인도해서 선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 주장은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의 주장과 똑같아요. 성령 충만해서 선한 삶을 살면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인간의 욕망을 종교에서 긍정해 주니까 교회로 절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겁니다. 여기서는 깨끗하게 살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이런 생각 속에 놓여 있던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아, 그것이 아니었네.”하고 구원을 받은 거예요. 내가 더러운 거울을 닦을 필요도 없고 오히려 반대로 우리의 더러운 것을 더욱더 노출시킵니다. 왜냐? 더러운 육신에 주님이 거했기 때문에 더러운 육신은 육신 값을 해야 돼요.

우리가 아는 범죄는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했나이다.’는 그곳에 아직 못 미친 것입니다. 우리나라 폭력영화를 보면 나쁜 짓 종합세트지요. 유괴, 폭력, 살인, 강간 등 온갖 악행이 다 나오지요. 사람들은 그런 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저것이 나쁜 짓이라면 나는 아직 그 나쁜 짓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자기 거울의 깨끗함을 확인하고 싶은 거지요.

막장드라마에 보면 온갖 나쁜 짓이 다 나오는데 시청률 40% 나와요. 이것을 보면서, “내가 아무리 나쁜 놈이지만 저 정도는 아니다.”라는 데서 오는 쾌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에게 복 주세요. 나는 저런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드라마에서 악역을 하는 사람이 나오면 나는 은근히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 정립되면서 오늘도 어디선가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구원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만이 아니고 옛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에 가서 기도하면 복 받을 줄 알았습니다. 바로 그것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은 새로운 성전으로 갈아치워야 합니다. 솔로몬 성전에서 섬겼던 그 버릇으로 새 성전에서도 섬기면 새 성전의 취지가 사라지지요. 이런 짓을 한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본인이에요.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 본인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본인이 본인을 짓는 거예요. 이 말을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고, 바리새인도, 오늘날 한국교회도 그 말을 못 알아들었어요.

우리 이름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작용입니다.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그 소자와 내가 같은 몸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 이런 이야기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새 성전에서 제사장이 활동할 때 만약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수고가 많습니다. 이런 수고와 고생 덕분에 가족들이 다 복을 받고 나라가 평안하게 되니 당신의 수고는 정말 귀한 일입니다.”라고 한다면 어떤 답변이 나와야 합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주님이 시키신 일이고 그분의 능력이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 라고 해야 정답입니다. 이것을 내가 행했다고 하면 옛날 솔로몬 성전 망하듯이 또 망합니다.

새 성전에서 제사장이 활동하는 것은 천국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면류관을 반납하는 모습처럼. “이것은 제가 받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종려나무 들고 어린양 예수님을 찬미하는 모습들. “이것은 내가 나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기쁜 마음으로 표현하는 그 세계를 위한 설계도가 바로 에스겔 40, 41, 42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우리에게 적용시키지 말고 이 설계도를 예수님의 생애와 먼저 연결시키고, 또 성령께서 우리를 예수님의 생애에 참여시키는 작업이 오늘날 성도가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순서를 에스겔에서 바로 우리에게 가져오지 말고, 에스겔에서 인자 되시는 예수님의 생애에 적용시키고, 그 생애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므로 우리는 에스겔 40장 새 성전에 합류된 제사장으로써의 활동을 통해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10분 쉽시다.

(2013. 7. 11. 08:5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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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