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05a 울산강의-출애굽기 28장 : 제사장 복장
20130705a 울산강의-출애굽기 28장 : 제사장 복장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705a 울산강의-출애굽기 28장 : 제사장 복장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28장의 내용은 동영상에 보이는 그림, 어떤 할아버지처럼 생겼지만 원래 젊었다고 보면 돼요. 레위인들은 오십 때까지 하고 제사장들은 죽을 때까지 하는데 이 그림을 보면 28장, 29장까지 내용이 다 담겨 있습니다. 오늘 강의는 이 아저씨 알고 있으면 돼요.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서 무엇을 우리가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천국에 보낸답니다. 이게 말이 돼요? 우리에게 “그냥 천국 와.” 이러면 쉽잖아요. “너, 이 땅에서 고생 많이 했지. 천국 가서 편히 쉬어라.” 하고 초청하면 되는데 이 아저씨는 웬 아저씨에요? 이게 왜 필요 하느냐 말이죠.
옛날 교회에 신부들, 지금도 있지만 신부들이 무슨 일을 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불러준다고 해서 여러분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것과 비슷한 복장을 한 우리가 여러분을 인도해줘야 천국에 갑니다.” 해서 중세교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 신부에 속아 넘어가서 주님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신부라는 제사장이 구원하는 줄로 안 겁니다.
1517년에 루터가 종교개혁하기 직전에는 이태리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 짓는다고 돈을 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성전세를 내는 거예요. 그걸 내면 천국에 도착한다는 거예요. 루터는 거기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했지요. 캘빈도 거기에 대해서 반대했습니다. 그들에게 충고하느니 마귀한테 충고하겠다는 그런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이런 식으로 구원하는 걸 더 좋아해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 이런 해괴한 복장한 사람을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고 관계를 유지시키느냐? 어쩌면 그 당시 인간들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복장 걸치고 설치는 것이 그들에게는 쉽게 납득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납득하기 쉬우라고 이런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고 이런 식으로 구원된다고 오해를 하기 때문에 이런 복장을 한 사나이를 보낸 거예요.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신부 복장을 하고 설치면 오히려 그게 더 신뢰가 가고, 신빙성이 있어 보여요. 예배당에 와도 아무도 없고 목사도 남방 입고 설교하고 하면 별 신빙성이 없어 보여요. 그런데 신부가 특수복장을 하게 되면 왠지 구원되는 것 같고 천국은 따낸 당상 같고 그렇게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습니다. “거룩이란 걸 말로 하지 말고 거룩의 티를 내주시면 우리가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는 생각을 인간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보내셔서 그러니까 너희들이 하는 그러한 아이디어조차 너희의 구원을 방해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이 제사장 지파는 열두 지파 가운데서 레위지파지요.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지 못합니다. 레위지파가 유다지파로 바뀌어요. 그렇다면 레위지파에 속한 레위인과 아론의 자손, 제사장에 잔뜩 기대를 걸던 사람들은 이 바뀜에 대해서 주님의 취지를 수용할 수 없겠죠.
좀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히브리서에 보면 레위지파 이야기가 나오고 난 뒤에 멜기세덱 이야기가 나와요. 제사장 이야기는 히브리서 5장에 나옵니다. 6장에 들어가면 멜기세덱과 같이 담긴 내용은 신앙의 연조가 적다든지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은 이해 못한다. 그러면 신앙이 약한 사람은 제사장은 이해하거든요. 같은 제사장인데 천사의 제사장, 멜기세덱으로 이전시키고 이 멜기세덱에서 7장에서 바로 예수님과 연관시킵니다. 제사장에서 멜기세덱, 멜기세덱에서 예수님으로 전환할 때 그 전환 과정에 하나님의 진짜 뜻이 여기에 투입되거든요. 사람들은 이걸 이해 못하는 거예요. 투입될 때 다윗언약 들어가고, 십자가 새 언약, 완성이 들어가요.
하나님께서 이런 제사장을 보낼 때 우리한테 제사장 복장을 한 사람이 만약에 새순교회 가운데 있다면 새순교회 교인들은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비록 나는 부족해도 교회만 가면 이 사나이 하나 있다. 그러면 마음에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래서 이런 쪽으로 계속 갔으면 좋겠어. 왜? 평소에는 반바지 입다가 주일에는 이런 복장 걸치고 나오면 새순교회 자부심이 대단할 거예요. “우리 교회는 제사장 있다. 너희 교회는 양복 입은 목사 있지. 그것과 게임이 안 돼. 우리에겐 제사장이 있어.” 머리는 관 쓰고, 금으로 된 흉패 있고, 그 다음에 청색 띠 띠고, 금 사슬에 금 고리에다가 호마노에다가 금테, 견대는 두 개가 있는 한쪽에는 여섯 개 지파의 이름을 쓰는데 연치라 해서 10절에 보면 나이가 많은 순대로 지파 이름을 쓰는데 르우벤, 시므온, 유다해서 등급이 나와 있어요.
한국축구대표팀 같지요. 대표팀 11명이잖아요. 여기에 한 명 추가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감독에 홍명보, 등등해서. 대표팀이 있다는 거예요. 대표팀을 대표한 제사장이니까 홍명보 감독이 제사장이에요.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감독이에요. 동메달은 따낸 당상이에요. 동메달이 아니라 천국을 가니까.
요즘도 이렇게 해서 구원시킨다면 얼마나 쉽겠어요. 이런 아이디어를 쓴 게 바로 천주교입니다. 천주교는 제사장이 하는 것을 축약했어요. 등 들고 향 뿌리고 미사는 제사거든요.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제사를 드릴 때 질문을 하지요. “신부님, 제사를 안 드리면 죄 용서가 안 됩니다.” 그들은 머뭇거리지요. 왜냐하면 히브리서에 보면 이제는 죄 용서해주는 제사는 두 번 다시 없습니다. 이 말은, “제사 드리지 마. 제사 드리고 싶다고? 그러면 너는 천국 갈 사람 아니야. 제사 드리지 마.”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제사로 해결할 죄는 진짜 죄가 아니에요.
우리가 아는 죄는 우리가 제사로 할 수 있는 죄는 죄가 아닙니다. 하이타이로 빠질 때는 찌든 때가 아니에요. 삶아야 돼. 귀찮지만. 주일에 예배드린다고 용서 받고 복 받는 그런 식의 죄라면 그것은 죄 본질 근처가 안 갔습니다. 그럼 죄가 뭡니까? 몰라요. 죽어도 몰라요. 죽을 때까지도 우리는 모를 거예요. 내가 무슨 죄로 지옥 가는지를 죽을 때까지도 모르고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거기에 합당하게 예수님의 피, 생명이 거기와 연결시키느냐 그 위치, 수위, 그 높이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몰라요. 그냥 믿어요.
내가 어떤 죄를 지었는데 죄를 분석하는데 평생을 보내도 안 됩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가도 분석이 안 돼요. 안 되지만 어쨌든 간에 피로 말미암아 피 흘림이 있은즉 사함, 용서가 되니까. 어쨌거나 피 흘림이 있으면 우리가 미처 놓치는 죄책이라든지 내가 놓쳐버린 죄의 항목이라 할지라도 이미 그것은 처리가 다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나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지 마세요. 이 정도 같으면 안다고 주님 앞에 나서게 되면 예수님을 내가 안 만큼의 예수가 되기 때문에 온전한 예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성경에 입각해서 해야지 나는 이것은 착하고 이것은 악하다고 본인이 판단하거나 결정하지 마세요. 본인은 계시가 아닙니다. 계시는 성경이 계시지. 성경대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겁니다.
그래서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랬지요. 인간의 체험은 하나님의 체험에 이르지 못한다. 사람이 아무리 평생을 체험해도 그게 죄의 체험이든, 의의 체험이든 관계없이 어떤 체험도 주님의 체험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체험 되지도 못하면서 믿는다는 것도 성립되지 않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은 뭘 알고 믿어야 되지 그냥 모르면서 믿는다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는 게 아니냐고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겠지요.
그 논리는 이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사장에서 멜기세덱으로 이전할 때 망하게 하십니다. 제사장이 있음에도 이스라엘은 망해버립니다. 그들은 그게 못내 아쉬워서 망하고 난 뒤에도 자기 임의대로 누가 제사장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희들끼리 알아서 제사장을 임명한 거예요. 그걸 에스라-느헤미야 할 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제사장 있어야 구약 메시아 기다리는 폼 나잖아요. 지 마음대로 제사장 안수하고 기름 부은 거예요. 하나님은 허락도 안 했어요. 그래야 백성들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라 하지요. 하나로 단결할 수 있는 사상으로 얼추 맞춰나가거든요. “우리도 제사장 있으니까 곧 있다가 구름 타고 메시아 올 거야.” 그런 희망이라도 있어야 한 나라로 단결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정치적인 책략이에요. 그런데 주님은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지요. 제사장 있는 나라 망했습니다.
그러면 “망해야 메시아가 오는데 왜 오늘날 우리는 안 망합니까?” 하고 물으면, 지금 울산만에 사시는 게 망한 거예요. “목사님, 왜 저는 탕자가 아닙니까?” 니가 탕자야. 우리는 이 땅에서 말씀에 의하면 돈만 사랑하고 그야말로 망한 모든 모습을 다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음녀란 뭘 탈퇴를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음녀는 탈퇴가 없어요. 오늘 강의의 핵심은 ‘인 치심’이에요. 출애굽기 28장 21절에 나오는데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매 보석에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인을 새기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온 세상이 음녀입니다. 음녀는 예외가 없어요. 예외가 없다는 말은, 태어나게 되면 산후조리원부터 해서 전부 달려들어요. 같은 사상을 주입시키는 거예요. 음녀는 성경에서 음녀지 성경 밖에 나가면 그냥 자본주의사회, 다들 그렇게 똑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이것을 현대철학에서 ‘평균인간’이라 합니다. 아주 표현을 잘했어요. 평균인간이란 도토리 키 재기에요.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비슷비슷해요.
드라마에 보면 연기자들이 밥 먹을 때 외출복을 입고 밥을 먹어요. 그것은 평균인간 아닙니다.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람이나 집에서는 다 반바지 입고 돌아다니거든요. 안 그러면 추리닝 입고 돌아다니고. 이것은 재벌 집도 마찬가지고. 나오게 되면 꾸미지요. 모든 가정은 대충 비슷하게 삽니다. 음녀 안에서 통합되어 있는 거예요. 사고방식이나 사상이.
그것은 바로 음녀는 마귀가 인을 줬다고 하거든요. 그건 요한계시록 이야기고 마귀가 인을 박았다가 아니라 특별조치가 뭐냐? 하나님이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자기 백성에게 그리스도 인을 박았다는 사실은, 그 사람 빼놓고 나머지는 마귀에게 인 박혔다고 이야기해야 대비가 되거든요. 성령의 인 치심을 받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 치심을 안 받은 사람은 아무 도장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마귀한테 이미 도장을 받았다고 해야 성령의 인 받은 취지가 살아나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렇게 표현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란 하나님이 주신 제사장 법, 언약이죠. 이 법에서 통합되어 있어요. 어느 누구도 언약적인 원리원칙에서 제외되거나 예외일 수 없습니다. 아간이란 사람이 아이성 칠 때에 몰래 외투와 금은 챙겼잖아요. 내가 갖고 싶은 걸 내가 챙겼다. 뭐가 문제냐? 그런데 그걸로 인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아이성이란 작은 성을 칠 때 36명이 죽었어요. 이게 뭐냐? 언약 안에서는 너, 나가 없고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장에게 하나님이 거룩한 복장을 줬다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한 복장에 속하지 아니하면 인 맞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한 걸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준 것은 어떤 인간도 제사장을 준 원리원칙에서 빠져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이것은 신자든 불신자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하나님께선 동일한 원리원칙으로 심판하시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렇게 오셨군요. 하나님은 구원이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고 너희는 갇혀있다는 거예요. 어디에? 하나님의 원리원칙에. 예수 믿든 안 믿는 관계없어요. 니 마음대로 절에 가라 했어요. 어쨌든 죽든 살든 심지어 죽고 난 뒤에도 동일한 원리원칙이 적용되는데 그게 뭐냐? 제사장언약이에요.
오늘 이야기할 게 많지만 차근차근합시다. 제가 먼저 물어볼게요. 하나님께서 이런 복장으로 제사장을 만들었는데 제가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이런 복장을 걸쳐서 구원하지 않고 이 사람을 발가벗길 거예요. 홀딱 벗겨서 나체로 만들 거예요. 왜? 그게 인간의 모습 아닙니까. 옷을 걸치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서기를 “하나님이여, 저 죄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에 합류할 수 있습니까? 살려주세요. 영생을 얻고 싶습니다.” 할 때에 하나님께서 “너는 네 본색을 모르는구나. 내거 너의 본색을 보여주랴?” 하고 제사장에게 “옷 벗어. 홀딱 벗어. 이게 너희들 본 모습이야. 자, 너희들도 자기를 위장하면 지옥 가고 이처럼 주님 앞에 모든 걸 노출시키면 구원받는다.” 이런 아이디어 어때요? 괜찮잖아요.
왜 하나님께서는 홀딱 벗기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에서 귀하다는 보석 열두 개를 박고 금으로 테를 두르고. 사람들이 좋겠다, 귀하다. 그런 소리가 나오도록 왜 그런 인간으로 만듭니까. 이게 여러분 거창하고 멋있지요. 이 멋있는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게 하는 그런 힘이 이 세상에서 지금 밑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런 제사장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거죠.
여러분 이 제사장 보니까 아이언맨 생각나지 않습니까. 온갖 적들, 모든 악한 지구의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최첨단 병기로 완전무장한, 바지 위에 팬티 입고 슈퍼맨 또는 거미줄을 쏘아내는 스파이더맨, 그리고 그걸 종합한 아이언맨, 독수리 오형제, 딱 그 폼 아닙니까.
제사장 이야기가 어려운 이유가, 거룩이 힘이 된다는 논리를 이어가는 게 그렇게 난해해요. 거룩이 우리한테 거룩한 복장, 물체 아닙니까. 사물이거든요. 재료가 실로 돼있고, 금으로 돼있고, 어떤 물질이에요. 보석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요소가 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 두 개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여기에 논리적인 다양한 발전과 변화가 투입이 돼야 돼요. 보통 작업이 아닙니다. 중요한 작업이에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예를 들어볼게요. 28절 30절 봅시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으로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 가슴 위에 있게 하라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지니라” 구원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1장에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지요. 십자가가 물
우림이란 말은 빛이란 뜻이고 둠밈이란 완전함이란 뜻인데 어쨌든 간에 판결 흉패 안쪽에 넣으라고 한 거예요. 이것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고 어떤 물건이잖아요. 이 물건이 우리를 건입니까? 십자가를 작게 만들어 넣으면 되겠어요? 십자가를 보석으로 만들어 넣으면 거기서 어떤 특수한 에너지, 알파선, 감마선이 나와서 우리를 구원합니까?
인간 자체가 사물체라면 사물체에서 사물체를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왜냐하면 사물체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기를 팍팍 넣는다 하지요. 제가 강구에 갔는데 식당에 부적이 있어요. 부적이 요즘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내용이 나오는 그것과 비슷하게 생겼어요. 스마트폰은 물체입니다. 그림이거든요. 그림과 물체의 만남, 이게 현대 신기술이에요. 그런데 옛날에는 부적으로 했단 말이죠. 부적을 한 이유가 글자를 보고 귀신이 물러가는 거예요.
10세기, 11세기부터 알프스 산 계곡 곳곳에 성모 마리아를 모셨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낙서할까 싶어서 자물쇠로 채웠어요.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귀신이 성모 마리아 상을 보고 이쪽 마을은 못가겠다고 피해간다는 거예요. 사상을 보세요. 귀신이 석고로 만든 마리아상을 무섭게 느낀다고 인간들이 느끼는 거예요.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들이 생각하는 영적 세계란 결국 딱딱한 물질과 통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우리나라 같으면 글자를 쓰잖아요. 귀신이 그것 보고 이 동네 오면 안 되겠구나. 하고 피해가서 저주가 안 온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것은 그런 미신을 믿느냐고 욕하잖아요.
문제는 제사장 흉패 뒤쪽에 우림과 둠밈이란 두 물체를 집어넣어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오해하겠습니까? 제사장은 아마 어떤 죄도 안 질 거야. 왜냐하면 가슴 품에 하나님이 기를 받으라고 준 요새 같으면 부적 같은 것, 우림과 둠밈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우리는 안 되지만 제사장이 기도하면 복을 받고 제사장이 용서하면 용서받게 된다고 인식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멜기세덱은 이런 사물, 물질이 있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점차로 인간이 인식하고 있는 영적 세계에 대해서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그 수준, 아주 뒤틀린 고목이라든지, 특수한 보석이라든지 이런 것만 있으면 거기서 자동적으로 복을 받는 어떤 기운이나 능력이 나온다는 이러한 인간들의 보편적인 생각 속에 하나님도 같이 끼어들어 들어가면서 그러니까 너희 생각이 틀렸다고 그걸 알려주는 새로운 언약,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면서 우리가 지금 짐작했던 것은 말도 안 되는 너무나 미신적인 사고방식인 것을 깨닫게 하는 밑바탕이 되는 거예요. 제사장이.
그러나 그 당시에 제사장들이 처음 이런 복장을 할 때 사람들은 혹 하지요. 우리나라에 제사장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안 망한다. 복 받는다. 제사장이 앞서서 언약궤 들고 설치면 적들은 물러간다. 그런데 홉니가 비느하스가 언약궤 들고 나갔다가 그들은 죽고 언약궤는 빼앗기고. 그런 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목사, 기독교 총회장이 십자가 앞세우고 개성공단 빨리 정상화하라. 김정은은 물러가라고 평양까지 갔는데 십자가는 빼앗기고 지는 죽고. 꼭 그 식이에요. 당시에 십자가 만드는 걸 왜 가르치느냐 하면, “십자가가 마귀 이길 줄 알았지. 십자가가 공산당을 이길 줄 알았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 편이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이겨야 된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글러먹었다 이 말입니다. 결국 제 말대로 제사장 홀랑 벗깁니다. 이런 제사장 복장을 해도 히브리서 5장에 보면 그들을 죄인들이에요. 화려한 복장을 해놓고 죄인. 화려한 복장이 그 사람의 죄를 없앨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화려한 복장을 하고 누가 봐도 거룩하고 누가 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같지만 그 죄는 그대로 들어있는 거예요. 그걸 찌든 죄? 아무리해도 다 씻겨지지 않는 찌든 죄. 아담이 지은 죄의 위력 그것은 무슨 복장을 하고 관을 쓰고 보석을 둘둘 감아도 죄는 여전히 죄가 된다는. 죄는 위대하다.
전도서 할 때 할지 안 할지 모르겠는데요. 신은 위대하다고 하잖아요. 보통 이슬람 쪽에서 신은 위대하다고 해서 전쟁도 하고 테러도 하는데 신은 위대한 게 아니에요. 정답은 자연이 위대해요. 자연이 위대한 걸 사람들이 평소에 자연을 우습게 봤기 때문에 신이란 이름을 붙인 거예요. 부산에서 영천 가는 길에 토사가 내려와서 내일 돼야 다 치워진답니다. 지금 막혀있어요. 못 올라가요.
그런데 토사라는 대자연이 그래 너는 살려줄게. 내가 만약 토사라면 토사가 내려오다가 자동차에 보니까 신혼부부네. 오늘 결혼했으니까 봐주고. 뒤차에 보니까 노인들이네. 얼마 안 있으면 죽을 테니 놔두자. 이렇게 골라서 덮칩니까? 대자연이 위대한 이유는 전혀 우리 인간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아요.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라 한 거예요.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그저 충성하고 복종하자는 것이 인간들 심상 속에 보편적인 거예요. 음녀에요. 이 세상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하나님. 그걸 개혁주의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여분의 것을 하나님 것으로 남기고 우리는 위대하다는 말로서 숭상하게 되면 그걸로 우리는 올바른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갖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신이 위대한 게 아니고 자연이 위대해요. 그 자연 중에 하나가 바로 질병입니다. 사람이 병 걸리기 전까지는 병 안 걸리려고 애를 씁니다. 일단 본인이 병 걸리면 대번에 고개 숙입니다. 꼬리 내리고 병한테 순종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병은 위대하다. 암은 위대하다는 말을 차마 못하잖아요. 그걸 달리 바꿔서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니 그것은 신앙도 아니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그 자체가 자연스런 현상이에요. 내가 다룰 수 있는 여지를 신의 몫으로 돌리고, 돌림으로 말미암아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다루겠다고 기어이 따로 챙기는 것, 하나님 잘도 넘어가겠다. 하나님이 신은 위대하다고 해서 봐주는 것 아닙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제사 드렸지요. 무슨 마음으로 드리겠습니까? 신은 위대하다고 드렸겠지요. 가짜 하나님이니까 날름 받는 거예요. 그 제사를 거부하는 게 진짜 하나님입니다. 아벨의 제사를 받았잖아요.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게 아니고 아벨의 제사를 만들었지요. 하나님은 자기가 받을 제사는 자기가 손수 만들어버려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사람은 천국에 못 가요. 천국 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낸 피조물만 천국 가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 제사장 나오면 우리나라는 구원받겠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모델로 해서 제사장 같이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요. 그러면 우리는, “제사장처럼 우리도 관 쓰자.” 아니에요. 그 방법이 아니고 제사장이 되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 단계 멜기세덱, 그 다음 단계 예수.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구원받아요.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에 갈 사람을 만드시는 창조하는 작업을 하시는데 그 창조의 설계도가 이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나 여기 있고, 날 구원하려고 주께서 오셨다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는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그걸 보고 주님께서 특공대를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특공대 보내실 게 아니죠. 차라리 생명나무 갈 길을 완전히 터버리지. 입산금지가 아니라 입산개방하면 지가 알아서 기어올 건데 뭐 때문에 이런 이상한 아저씨 왜 보내는 거예요. 주께서는 이 이상한 아저씨 못 박아버립니다. 나중에.
멜기세덱이 영원한 제사장이죠. 그 다음 단계가 예수님이죠. 히브리서 5장, 6장, 7장에 보면 예수님을 영원한 제사장이라. 영원한 제사장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는데. 구멍 났어요. 제사장이 완전히 구멍 나버려요. 그럼 제사장 직 자체가 하나님이 생각한 진짜 참 제사장은, 인간 세계에서는 전혀 통하지도 먹히지도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가짜 제사장들, 죄 있는 제사장들을 보낸 겁니다. 좋다고 좋아들 하면서 이제 이런 복장을 했으니까 이런 원리만 알면 그러면 된 거죠.
집에서 붕어빵 먹고 싶다. 간단하지요. 붕어빵 기계를 들여놓고 그 다음에 붕어빵 굽는 원리를 갖추면 우리는 아침저녁마다 매일같이 지겹도록 붕어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맛있는 붕어빵을 매일 먹을 수 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영생의 나라를 자기가 자기 손으로 만들기를 원해요. 따라서 제사장 복장을 그대로 하고 그 다음에 제사장이 양 바치고, 소 바치는 제사하는 방법을 알면 자기는 영원한 붕어빵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영원한 영생을 먹을 수 있다는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거든요. 그걸 구멍을 뚫어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멸망해야 돼.
이 제사장이 사라집니다. 마지막 사라질 때는 이런 복장이 아니었어요. 발가벗고 십자가에서 사라졌어요. 이런 복장 하나도 없어요. 옷 다 벗기고 맨살로 십자가에 그냥 남아있다면 피와 땀, 피가 쏟아지는 그 모습으로 사라졌을 때 이 제사장 복장도 같이 거기에 삽입되어서 피와 더불어 이 땅에서 사라졌어요. 사라지고 부활할 때 이 복장은 부활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때는 이 복장의 보석은 어떻게 됩니까? 인간들의 보석은 이름으로 새겨진 보석이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열두 지파 하나하나가 보석1, 보석2, 보석3 계속 나오지요. 요한계시록 22장에 예루살렘 성 전체가 보석으로 돼 있잖아요. 문도 보석이고 다 보석이죠. 완전히 보석상 가게 같아.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예루살렘 자체가 보석 덩어리. 예루살렘 성에서 여러분이 미끄러졌다면 보석에 미끄러지신 겁니다. 여러분들이 예루살렘 성에서 낙석 하나 맞으면 다이아몬드한테 얻어맞은 거예요.
이 보석은 원래 사람의 복장에 묶여있던 거잖아요. 붙어있는 보석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데 예수그리스도의 하늘에 속한 형상에 붙어있다 보니까 그 보석들도 하나 둘씩 사람이 되어서 천사 같은 모습으로 천국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사장이 품고 있는 모든 것은 천국의 축소판이라. 천국을 압축시켜서 죄 덩어리 세상에 올 때는 이런 모습으로 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나, 천국인데 지금 달려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끝이 아니고 이건 그림자고, 모형이고 언젠가 나중에 실체가 드러날 텐데 그건 요한계시록 22장에 너도 보석, 나도 보석, 모두 보석,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보석이 되는 그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부는 하늘에서 내려오고. 신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걸 봤어요. 어느 예식장에서 신부 입장하는데 그네 타고 신랑은 땅에서 기다리고. 완전히 요한계시록 21장을 그대로 재현해요.
복장 이야기 근처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민수기 5장 봅시다. 이걸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혀를 찰 이야기가 나옵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의 아내가 실행하여 남편에게 범죄하여 타인과 정교를 하였으나 그 남편의 눈에 숨겨 드러나지 아니하였고”
뒤에 이야기는 모른다 치고 제사장이 이 사람의 범죄를 입증하든지 무죄를 입증하든지 판결할 수 있는 방법은 뭐겠습니까? 남편이 의심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요. 그래서 남편이 자기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 앞에 섰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제사장이라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는 의처증 환자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 연약한 불쌍한 여인 하나 인생 조지는 셈이 되잖아요. 판결을 잘 해야 돼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제사장이 글을 씁니다. 네가 만약에 간통을 했으면 저주도 받아야 마땅하다는 글자를 써놓고 이 글자를 어떤 물에 빨아요. 빤 물을 버리지 않고 컵에 담아둡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제물을 가져오라고 해놓고 성전바닥에 티끌에 보태요. 마술사가 이것 넣고, 이것 찢어 넣고 수리수리마수리 하는 것처럼 글자 빤 물에다 성막에 있는, 다른 장소는 안 돼요. 공간적 제한이죠. 성막바닥의 티끌을 넣고 그걸 마셔야 되는 거예요. 그걸 마시기 되면 그 물속에 아미노산, 비타민 이런 게 있는 게 아니고 네가 진짜 간음했으면 저주받아도 군말하지 말라는 말이 담겨있거든요.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말이란 것은 음파, 소리에너지가 있는 것뿐이지 말이 소금입니까, 커피믹스도 아니고. 우유 타는 것도 아니고. 같은 물질에 물질을 탈 수 있습니까. 농도로써. 어쨌든 간에 타놓고 그걸 마실 때에 만약에 여자가 거짓말했다면 이게 마셨으니까 위장으로 해서 십이지장으로 해서 작은창자, 큰창자로 내려가면서 아랫도리까지 부으면 그 여자는 죽고, 만약에 간음 안 했으면 그냥 오줌으로 나오겠지요. 이걸 제사장이 주도해야 되는 거예요. 제사장이 별짓을 다하지요. 도대체 그 의미가 뭐냐?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첨부파일 : 20130705a 울산강의.hwp (46.5K), Down: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