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만들기 130709
교리 만들기 130709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한윤범(IP:14.♡.134.60)
13-07-17 13:35
20130709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5-교리 만들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20번, 38페이지에 이레니우스 합시다. 여기 연도가 나와 있지요. 130~202년이라고. 이레니우스나 나중에 나오는 터툴리안이나, 아타나시우스, 클레멘트, 이런 사람들은 대중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게 있어요. 신은 여럿이 아니고 한 분인데 모호했던 신이 예수그리스도를 분을 통해서 분명히 자기 정체를 드러냈다는 겁니다. 신은 모호하기만 하고 인간들은 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그동안 신이 만든 이 세상만 바라봤는데 직접 신이 이 땅에 자기의 말씀을 나타냈다는 거예요. 그러면 신이 이 땅에 나타나려면 우리 생각에는 신이 신다워야 되겠지요. 논리상 말이죠. 신이라면 다른 면이 있어야 사람들이 혹하고 믿고 싶은 충동이 있는데.
초대교부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전혀 신답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아주 더 정교한 아주 더 논리적이고 정립이 잘 돼있는 신론을 그들은 참 하나님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거론한 게 로고스였어요. 신이 있는데 이 신이 인간세계에 로고스를 통해서 나타냈다는 겁니다. 로고스가 뭐냐 하면, 그 당시 사람들은 다 알죠. 로마 사람들 다 알고, 헬라 사람들 다 아는데 로고스가 뭐냐 하면, 신이 세상을 만들 때 어떤 법칙으로 만들었어요. 그걸 이법이라 하는데 신의 법칙, 그 법칙을 로고스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필론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신자는 아니고 유대교신자인데 지금 한창 데모하고 있는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알렉산드리아가 로마와 먼 줄 알지만 로마가 전부 점령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도 로마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요새 같으면 미국의 뉴욕 정도. 워싱턴이 로마라면 알렉산드리아는 뉴욕. 모든 지식과 문명, 상업이 제일 발달한 곳아 알렉산드리아 여기에 대학도 많고 도서관도 큰 게 있었고. 학자들이 여기 다 모이는 거예요. 알렉산드리아의 지식이 전 로마 전역에 퍼지는 겁니다.
알렉산드리아가 지식이 풍부한 것은 바벨론, 페르시아 쪽에서 오는 지식, 인도에서 온 지식이 상인들을 통해서 소문이 돌고 교류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모인 지식이 어떤 지식이냐 하면, 어떻게 하면 무역을 잘 할 수 있는지 하는 지식. 무역을 잘 할 수 있는데 필요한 지식이란 측량술, 바다를 항해하는 기술, 이것은 지구를 통째로 알아야 돼요. 위도, 경도, 해가 언제 뜨며 달이 언제 지며 별자리는 어떠냐? 그래서 망망대해에서 자기 장사할 곳을 찾아갈 것 아닙니까. 이런 것들의 지중해 연안에서 벌써부터 발달되고 지식이 축적되었던 것입니다. 로마 이쪽 사람들은 땅만 밟고 왔다갔다했는데 바다를 다스리는 것은 역시 전에 강대국들이 있어서 항해기술을 알았던 거죠. 그뿐만 아니고 온갖 새로운 문명도 갖고 있었으니까.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유대교인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어떤 아이디어를 했냐 하면, 유대교의 여호와는 그냥 신이 아니고 인격신입니다. 사람과 교류하려고 하는 신, 사람 상대하듯이 기도 들어주시고 예배 받으시고 응답하시고 하는, 주고받는 게 성립되는 거죠. 그 사람이 로고스를 신의 이법, 원칙, 로고스를 이성이라 볼 수 있는데, 그냥 규칙, 법칙에서 더 나아가서 인격으로 본 거예요. 신, 어떤 어르신을 통해서 세상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 법칙이 로고스라는 거예요.
전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헤라클레이토스란 철학자가 자연의 이치를 로고스라 했고, 그걸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스토아학파에서 로고스는, 신이 인간을 포함해서 전 세계를 만들 때 어떤 일정한 법칙으로 만들었다고 보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에피쿠로스학파는 신이란 없다고 보고, 법칙이란 없다고 보고 이 세상은 그냥 우연의 산물로 보는 거예요. 그런 차이가 나요.
골치 아프게 신의 법칙을 알아버리면 그 법칙에 복종해야 되잖아요. 복종하면 힘드니까 사람은 누구한테 눌리면 행복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우연에 맡기는 것이 더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 에피쿠로스학파고. 스토아학파는 신은 로고스라는 법칙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법칙에 순종해야 되는데 스토아학파에서 로고스의 법칙은 중용이라 할까요, 또는 평정심이라 할까요. 너무 많이 욕심 내지 않고 자기 육체를 단련시키는, 탐욕을 부리지 않는 것, 그게 자연의 이치에 맞는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스토아학파는 불교라고 보시면 돼요.
에피쿠로스학파는 인간은 행복해야 사는 보람이 있기 때문에 법칙에 얽매이지 않더라도 행복할 때는 그러니까 하느냐, 마느냐 자체를 벗어버리자. 어떤 법에 얽매이지 않고, 신에게 얽매이지 않고, 너무 과도하게도 하지 말고, 너무 작게 하지도 말고. 그게 인간의 행복이다. 어떻게 보면 전도서에 나오는 내용과 비슷한데. 하여튼 두 학파의 공통점이 있다면 인간은 행복해야 돼. 행복하지 않으면 인간이 사는 목적과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그저 인간은 사는 날 동안은 행복해야 돼. 그렇게 생각한 거죠.
제가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를 언급하는 이유가, 우리가 지금 바쁘다 보니까 인생이 무엇이냐, 어떠냐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정지된 상태에서 인간을 무엇이냐 따져보면 결국 우리가 아무리 연구해서 그들이 연구한 범위를 못 벗어나요. 사람은 역시 하루를 살더라도 행복해야 돼.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사람의 목적이 행복에 있고, 행복하려면 덕을 쌓아야 돼요. 덕을 쌓으면 쌓을수록 인간은 더 행복하고, 덕이 모자라면 인간은 불행해진다는. 에피쿠로스와는 좀 달라요. 에피쿠로스는 그런 것에 얽매이지 말자는 쪽이고. 어쨌든 인간이 행복하자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 거예요.
그런 대중들을 위해서 지금 초대교회는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전해야 돼요? 교회 오도록 꼬셔야 돼요. 어떻게 해야 돼요? 난감하죠. 난감한 거예요. 참 어려운 문제인데 교부들이 믿은 게 뭐냐? 하나님? 예수님? 성령? 초대교부들 이레니우스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믿은 것이 어쩌면 하나님, 예수 하는 게 핑계일 수 있고 따로 노리는 게 있지 않겠느냐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들의 믿은 것은 자기가 믿는 것을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그걸 믿지 않았을까요? 나는 예수를 믿는다.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인정받으면 기독교 세력이 확대될 것이고, 그러면 교회가 안정될 것이고, 교회가 안정을 취하면 어떤 이득이 있느냐? 그러면 교회가 전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남들에게 뽐낼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지요. 인정받으면 뭐하냐? 인정받는다는 그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사는 최종적인 행복일 수 있단 말이죠. 자기는 옳은데 남이 인정 안 해 줄 때 우리는 마음으로 섭섭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인간이란 것이 아무리 껍데기를 뭐로 포장해도 궁극적으로 인간의 노림수라는 것은 옛날 인간이나, 중간의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나 전부 동일하게 자신이 사는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교부들, 이름도 참 기분 나쁘지요. 교회의 아버지란 뜻 아닙니까. 초창기 교회, 사도 이후에 어른 행세하던 사람들이라고 보면 돼요. 물론 그들은 순교를 많이 했습니다만 순교한 건지 살해당했는지 불분명한데 어쨌든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주장되는 내용이 그들은 복음 전했다고 하는데 그게 과연 복음이냐? 아니면 신학이냐? 우리가 거론해보자 이 말입니다.
신학이 돼버리면 그것은 하나에 그 당시에 유행하는 철학의 일종인데 교회가 우세하다는 것은 바로 교회가 외치는 신학이란 신종철학이 우세했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그게 우세했으면 나중에 로마의 권력까지 점령해버리면 313년에 밀라노에서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데오도시우스란 사람이 본격적으로 기독교인 말고 나머지는 다 불태워버렸습니다. 323년은 정식으로 일요일을 국경일로 정해져서 일요일은 다 쉬어야 돼요. 주일 지킨다는 입장에서. 국가종교로 기독교가 등장하는 겁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들의 주장한 게 복음이냐는 거예요. 아니면 대중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철학이냐는 겁니다. 그들이 믿었던 것이. 어쨌든 간에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고, 교회가 커졌고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는 것은 분명하잖아요. 그렇다면 그들의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 당시 사람들이 기존에 스토아학파철학을 버리고 어떻게 기독교의 하나님,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나오게 됐느냐 이 말이죠.
교회사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하나님의 뜻이다. 성령의 역사다.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살리기 위해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팍스로마나, 로마에 평화를 주어서 이교도인 로마인이 길을 닦아서 사도 바울이 신나게 마차 몰고 가서 복음 전했다.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다. 또 로마 이전에 헬라어로 통일되어서 구약성경도 헬라어로 번역되어서 복음이 퍼졌다고 하는데 복음이 퍼졌는지 안 그러면 새로운 철학이 퍼졌는데 그것은 기독교 본인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무엇을 전했느냐 하면, 신은 유일하다. 유일신을 전했어요. 이것은 다신론에서 일신론으로 바뀐 겁니다.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그냥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은 이미 그전에 다른 철학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러면 물어봅시다. 인간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중요합니까? 이 철학에 의하면. 하나님이 중요하지요.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이용할 뿐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이 될 때 아무나 하나님이 될 순 없는 거잖아요.
이레니우스는 이런 이야기했어요. 모든 속에는 인간은 이성이 있다. 그 이성을 철학자들은 로고스라 했거든요. 그런데 이레니우스는 말하기를,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그리스도는 로고스다. 하나님이 이 로고스를 사람으로 만든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의 모든 원리와 법칙이 사람으로 나타난 거죠. 그런데 그 원리와 법칙이 이성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곧 모든 인간 속에 이성이 있다는 말은, 뭔가 따지고 판단하고 짐승이 아닌 요소가 있다는 말은,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레니우스가 이야기한 거예요. 유스티누스 이런 사람들. 그들이 교회를 옹호한다고 해서 호교론자라고 해요. 거기에 비해서 터툴리안은 철학과 복음과 무슨 관계있느냐? 아테네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배척해요. 이걸 배격론자라고 해요.
이러한 단편적인 사상들, 책 같은 것은 없고 그냥 주고받고 서로 공격하다가 나온 단편들을 보게 되면, 나중에 교리정립, 이런 것도 새로 다 해야 돼요. 교리정립이란 게 먼저 뭐가 선행되어야 하느냐 하면, 교회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있어야 교리정립이 돼요. 교회에서 교리정립이 된다는 말은 그만큼 시간이, 역사가 흘렀다는 말이거든요. 교리가 정립되고 역사가 흐르면 이게 전통이 돼요. 이 전통을 신학이라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왜 그렇게 글자를 많이 썼겠어요? 그들이 선배들 주석을 꼼꼼히 다 적었거든요. 탈무드에 나오잖아요. 구약 때 주석마저도 유대교의 역사와 전통을 후대에 전하기 위한 하나의 교리책이 되는 겁니다. 후손들은 그 교리책을 배우면 되는 겁니다. 물어봅시다. 교리책을 배우면 신자 됩니까, 성령을 받아야 신자 되는 겁니까? 성령 받아야 되지요. 그러나 교육과 양육과 훈련, 그렇게 가르치게 되면 사람은 본질적인 자기 자신을 숨기고 가르침에 부응되는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어내는 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그렇게 돼있어요. 진짜 본심은 따로 있고.
성악하는 사람들 학교에서 열심히 배우잖아요. 놀러가서 술 한 잔 먹고 노래방에서 유행가 부른답니다. 풀자 이래서. 심지어 전통 클래식 발레 하던 사람도 씨스타, 아이돌 춤추고 해요. 그만큼 자기의 본성만은 바짝 긴장돼있는 겁니다. 인간은 두 개의 자아상을 만들어내게 돼요.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교리정립이 필요한데 이 정립을 위해서 반드시 필수적으로 있어야 될 게 교회와 교리정립을 공격하고 반대하는 요소가 있을 때 교회는 교리정립에 더욱더 힘쓰게 됩니다. 그게 영적 열광이에요. 초대교회에 몬타니스트라든지 그런 자들이 열광주의, 성령은사주의라 할 수 있지요.
그들이 나왔을 터툴리안이나 아타나시우스나, 이그나티우스나, 클레멘트나 다 마찬가지인데 법 만들자. 이건 개나 소나 다 성령 받았다고 하니 안 되겠다. 그래서 로마주교 중심으로 교회에 위계질서를 세우게 됩니다. 옛날 과거도 시험과목이 있듯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이 되는지 시험 쳐야 되겠지요. 꼴찌하는 사람을 갑으로 삼을 수 없고 을이나 병 쯤 되고, 적어도 똑똑한 사람, 시험을 잘 친 사람은 갑이 돼야 되겠지요. 이것은 조직이 있으면 반드시 필수적입니다. 제가 뉴스에서 봤는데 대구시공무원들 7급에서 6급으로 올려줬어요. 그런데 보직이 없어요. 하도 인사가 정체되니까. 이건 다른 공무원도 마찬가지에요.
항상 누가 밉고, 좋고 간에 어떤 규칙을 정해서 해야 되는데 그 위계질서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신학을 전공한 사람을 반드시 교회에서 높은 직책을 제공하는 식으로 교회가 질서가 유지돼야 됩니다. 교회 질서를 왜 유지해야 될까요? 교회라는 구체적인 조직이 있음으로서 일반 사람들이 구분할 수 있도록 교회에 가야 구원받는다는 그런 특정 장소와 특정 개념이 자신의 구원의 발판으로 삼는 겁니다. 그냥 구원받는다는 건 말이 안 되거든요.
구세군은 원래 교회가 없어요. 처음에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가까운 교회에 나오세요.” 하니까 진짜 가까운 교회 가버리고 지 교회 안 오고. 그 다음부터 구세군교회가 따로 생겼어요. 교회라는 것을 집단화하게 되면 필히 여기서 계급이 생기고 계급은 첫째 임무가 뭐냐? 교회를 없애지 않고 계속 키워나가는 막중한 임무가 있는 거예요. 회사의 임원진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열광주의나 이런 걸 공격했을 때 교회가 싸워야 될 게 다신론과 싸워야 돼요. 그 다음에 유대교와 싸워야 돼요. 그리고 성령 열광주의와 싸워야 돼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 잠시 회의합시다. 다신교와 싸우려면 교회가 뭘 주장해야 됩니까? 일신론을 주장해야 돼요. 신은 둘이 아니고 오직 하나입니다. 나중에 이게 다 문제돼요.
유대교를 반대하려면 뭐하면 됩니까? 유대교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됐잖아요. 하나님의 법칙이라는 로고스가 특정 인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잖아요. 유대교에 반대해서 예수님을 주장해야 되지요. 여기서 교회 내에서 폭발직전이 됩니다. 뭐냐 하면, 일신론이지요. 신이 하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이 된 거예요? 아니면 하나님이 인간의 탈을 쓴 겁니까? 껍데기는 인간이고 속에는 하나님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유대교를 반대하고 기존의 로고스사상, 그러니까 스토아철학을 반대하기 위해서 “너희들의 말한 로고스는 눈에 안 보이는 법칙이지만 우리 교회에 보면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니깐.” 하고 분명히 못을 박으려면 하나님이 인간이 돼야 되는데 그 인간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사실은 인간 속에 하나님이 계시냐? 교회가 정립이 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또 열광주의죠. 특히 열광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몬타니우스 이단은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이 다르다. 또 열광주의와 비슷한 게 있어요. 그 유명한 영지주의가 또 등장하네. 영지주의는 신플라톤주의이라는 거예요. 신플라톤주의가 뭐냐 하면, 신은 보이지 않아요. 신은 보이지 않는데 그 신에서 나왔으니까 창조가 아니고 유출되었다. 창조와 유출의 차이가 뭐냐? 창조는 뚝 끊어져서 저쪽과 이쪽이 차별되는 거예요. 피조물과 창조주가. 유출은 피조물 속에 창조주의 심성이 여전히 연결돼있는 겁니다. 자식 건드리면 아버지 건드리는 것과 똑같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엿가락처럼 늘어난 것이 유출론입니다. 유출론의 장점이 뭐냐?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곧 우리를 만드신 신이 존재한다가 돼요. 있음에서 있음을 설명하는 데는 좋은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유출된 거예요? 창조된 거예요? 창조되었죠. 수제비 한 덩어리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되면 유출된 거예요. 성경에서 창조는 뭐냐? 아예 없어요. 없는 데서 만들어졌거든요. 없는 데서 다른 분이 있게 만들었단 말이죠. 인간의 원천은 있음이 아니고 인간의 원천은 없음이에요. 없는 데서 만들었고 죽은 데서 살리잖아요. 죽은 데서 살리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은 관심 없고 없는 데서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지금 교회가 대중들에게 이쪽 철학, 저쪽 철학 다 아니고 이게 옳은 진리라고 외치고 싶은데 이미 대중들은 그것은 들은 적이 있다고 하면 안 되잖아요. “어! 새로운 거네?”라고 했을 때 교회 올 수 있단 말이죠. 새로워야 되는데 그런데 하도 신에 대해서 나온 이론들이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여러분 소나기 속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 이거는 개미라도 못 피하죠. 지금 개미로도 안 되는 논리를 기독교 교부들은 그걸 해내야 되는 거예요. 소나기 빗줄기 속을 안 적시고 다 빠져나와야 돼요.
하나님이 창조할 때 유출하지 않고 없는 데서 생겼습니다. 이것은 금시초문입니다. 없는 데서 어떻게 생깁니까? 없는 데서 생길 수 없는 이유가 반드시 재료가 있어야 되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형상=실체, 존재가 되거든요. 먼저 재료가 있고 거기에 뜻과 의미를 형상을 실어서 그게 인간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들었거든요. 재료는 흙으로 하고 자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도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란 말이죠. 그래서 교회 내에서 호교론자들은 말하기를 소크라테스도 사실은 기독교 신자야. 이렇게 나와요. 예수그리스도를 몰라서 그렇지 사실은 그 토대는 잠재적인 신자고.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연옥에 갔다가 과외 받아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이런 사람들이 천국으로 갔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왔거든요. 자기의 오야봉 되는 사람을 지옥에 보내면 곤란하잖아요. 연옥에 갔다가 그전까지 못 들었던 복음을 사도한테 한 수 배워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소크라테스나 똑똑한 사람들, 훌륭한 사람들 전부 다 그걸 편입입학이라. 영훈 중학교처럼 편입입학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 천주교 신부들은 말하잖아요. 우리나라에 복음 들어온 지 몇 백 년밖에 안 되는데 그전에 훌륭한 사람들을 설마 하나님께서 지옥 보낼 일 없다. 그래서 세종대왕 같는 사람은 일단 연옥에 가서 나중에 김대건이 합류하면 과외로 속성으로 빨리 배워서 천국 갈 수 있다. 그런 아이디어 같으면 천주교에 있는 일반 대중들은 천주교도 안 가고 교회도 안 간 이미 죽은 조상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성당에다 부동산을 헌납하고 거기다 미사를 넣겠지요. 왜? 죽은 조상 대대로 연옥에서 빨리 빠져나오도록. 돈 써야 빠져나오거든요. 면죄부가 그런 거예요. 후손들이 빽쓰면 빨리 나오는 거예요. 바로 대중들이 원하는 건 그겁니다.
그래서 유스티누스나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교회는 오직 하나의 목적만 있다. 그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구원시켜라. 구원시키되 그들이 미처 모르는 요소를 집어넣어서 구원시키면 된다는 거예요. 그 요소가 뭐냐? 이미 바탕은 다 돼있는데 단 하나 빠진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란 사실, 신이 인간이 됐다는 그 사실만 빼놓고 나머지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해줘라. 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수정하지 말고 거기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살짝 마지막으로 얹으면 되죠.
몬타니우스에서 구약과 신약의 신이 다른데 구약은 무서운 신이고, 신약은 자비로운 신이다. 따라서 신약에 오시는 메시아가 있는데 에이온. 이 에이온이 그리스도인데 이 그리스도가 사람이 될 때 마치 더러운 물에는 발을 오래 담그면 안 되잖아요. 빨리 빼야 되잖아요. 그래서 메시아는 더러운 인간의 육체에 살짝 담갔다가 후딱 빼야 되죠. 육체는 더러운 거니까. 더러운 육체를 입었기 때문에 욕심을 내고 죄를 지으니까. 인간의 육신을 입은 척 하다가 후딱 벗어버리고 본래 자기 모습, 신의 모습으로 올라가신 분, 그게 바로 그리스도다. 이것은 영지주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요.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당시 대중들, 교부들, 주교들의 머리를 해부해보면 뭐가 들어있습니까? 기본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무조건 계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의 뜻을 나타냈다. 그 사랑의 뜻은 뭐냐? 인간을 어여삐 여겨서 불쌍히 여겨서 구원하는 거예요. 구원하는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교리를 로고스니까 이성적으로 배우고 익히면 이들은 구원을 받는데 단 조건이 있어요. 교회가 교리를 가르칠 때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교회가 하나의 사람들 모으는 바구니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교회에다 담아야 돼요.
그러면 그 당시 교부들의 논리와 신학에 의하면 노리는 점이 딱 하나지요. 아무리 날고 기도 교회의 법과 교회의 규칙을 어기면 구원 안 돼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한다. 단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 뭐냐? 교회의 말을 듣는다는 조건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낸 게 아니죠. 그럼 누굴 보낸 거예요? 교회를 지배하는 교회를 다스리는 신부들, 감독들, 교부들을 보낸 셈이 된단 말이에요. 그게 바로 먹혀든 거예요. 이 이야기하려고 오래 걸렸다.
지금 대중들에게 신은 보이지 않아요. 예수님도 벌써 하늘로 올라가고 보이지 않아요. 그러면 대중들이 자기가 구원받고자 하는 열망이 있잖아요. 그 당시 철학들도 전부 다 인간의 구원과 관련돼있거든요.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된다. 왜?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죽으니까. 어떤 철학이 나를 구원하는데 좋으냐 말이죠.
아까 아리스토텔레스나 소크라테스나 인간이 사는 게 뭐라 했습니까? 행복이죠. 그러면 이 땅에서 행복하면 되겠어요? 안 되잖아요. 행복의 주인공이 나잖아요. 내가 이 땅에서만 잠시 행복하면 안 되고, 이 땅에 행복하지도 않지만. 죽어서 영원한 행복을 누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 나의 행복은 영원히 계속 되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 사람이 영원히 오래 사는 건 저주입니다. 사람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누구나 영원히 살게 돼있습니다. 악인은 악으로 부활되고 선인은 선인으로 부활되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히 살아요. 영원히 사는데 죄 용서 안 받으면 영원한 저주받아요. 그렇다면 죄 용서를 교회가 해줍니까? 우리 생각은 예수님이 해주죠. 그런데 초대교회부터 교회의 성례가 해준다는 겁니다. 열광주의에 대비해서 그들은 성례주의를 주장했거든요.
그 당시 교회 교부들끼리 논쟁은 두 가지에요. 합리주의와 신비주의 두 가지밖에 없어요. 둘이 싸움을 그렇게 해도 결국 노리는 것은 저 사람들을 어떻게 교회로 모을 것이냐 그 점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어요. 사람들을 교회 오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걸 제공하는데 그들의 원하는 것이 뭐냐? 그들의 영원한 복락과 행복입니다. 그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 신은 이런 걸 준비했다고 그들에게 이야기해줘야 돼요.
이야기해줘야 하는데 스토아학파는 여러분 몸을 스스로 절제하세요. 불교라 했지요. 스토아학파는 자기 욕심을 줄이고 절제하는 거예요. 에피쿠로스학파는 과하지 않은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 약간 비슷한데 신 같은 누구한테 간섭받지 말고 자유롭게 하되 지가 알아서 잘 하면 된다는 거예요. 스토아학파는 이 세상에 법칙이 있으니까 법칙에 순종하면서 항상 은둔생활하면서 이럴 때 더 행복해지는 겁니다.
이 두 가지가 나중에 신학의 교부들과 결합이 되고 수도원운동까지 나가게 되면, 이 세상에 인간의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악한 것을 어떻게 스스로 절제하고 관리해서 영혼을 순수하게 유지하게 되면 영원한 신의 복락에 합치되는 겁니다. 이것은 그 당시뿐만 아니고 교회사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회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철학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교리가 있으니까 교리의 가르침을 받으시고 스스로 절제하시면 구원을 따낸 당상이니까 염려 붙들어 매세요. 교회 말 들으세요. 구원받습니다.
323년, 351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 신조 같은 게 나오거든요. 381년은 콘스탄티노플공의회고. 공의회에서 삼위일체 형성과정에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계속 해서 더 세밀해지고 더 규격화된 교리들이 쏟아져 나와요. 그 교리들은 엑기스입니다. 그런 것들을 참고로 해서 거기서 이탈되지 않으면 구원은 따낸 당상이 되는 겁니다. 일종의 교과서에요.
독도는 누구 땅입니까? 독도는 한국 땅이잖아요. 그런데 일본에서 고급관리가 되려면 교리가 뭐냐 하면, 그때는 이름도 독도가 아니라 다케시마지요. 다케시마는 어디까지나 일본 땅이라는 교리를 배워야 일본 공무원에 진급을 할 수 있다니까요. 다 같은 이치라니까요. 일반 대중들에게 성경은 골치 아파요. 성령 받는 것도 체험화 되기 때문에 안 받으면 곤란해요. 하지만 우리가 못하는 것을 교회가 엑기스처럼 해줄 때 그들은 비로소 자기의 영원한 행복을 받았다는 안심 같은 것이 주어지는 겁니다.
참 하여튼 십자가마을에 이런 강의 재미 하나도 없어. 재미없더라도 여러분 들어야 될 게 항상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부딪치는 사고방식들입니다. 매일같이 교인들과 목사들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 그들은 표현하지 안 하지만 사실은 은밀하게 다 들어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행복할 때 기분 좋아요. 단지 행복이에요. 세상은 모두 나 위주로 잘 돌아갈 때 행복한 거예요. 신이고, 예수고 안 믿습니다. 삼위일체 배우고 교리 배운 거예요.
그런 식으로 유사복음이죠.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유사복음이 어떠한 다채로운 내용들이 있는가를 보고 있는 거죠. 유사교리. 그 원리와 내막, 토대 이런 것을 하는 겁니다. 나중에 신비주의와 합리주의와 싸우면서 합리주의는 로마와 안디옥 신학과 붙었습니다. 이게 한 편이에요. 신비주의는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동방교회와 한 편 먹는 겁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공의회에서 엎치락뒤치락하다 승리하고 난 뒤에 한쪽은 로마가 있고, 한쪽은 알렉산드리아가 있는 거예요. ‘일체’를 주장하는 게 알렉산드리아신학이에요. 이걸 신비주의라 합니다. 이게 지금 동방교회. 진짜교회라 해서 오소독스처치, 동방정교회. 러시아 밑에 줄줄이 전부 그 교회 아닙니까.
동방정교회는 성부가 하나님 자신이에요. 알렉산드리아 동방교회에 가장 오야봉 되는 신학자가 오리겐입니다. 오리겐은 말하기를 유대교에 이어서 신은 하나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뭐냐? 예수는 양자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신은 아닌데 비유적으로 신이라 해주자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기를 그것은 이단적인 사고방식이라 하는데 그러면 이단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게 뭡니까? 거기에 대해서 할 말이 없지요.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다같이 신이다. 이게 이단적이 아니지요. 그건 로마 쪽이라니까요. 로마 쪽과 안디옥 신학. 안디옥 신학도 좌파, 우파 해서 저희끼리 또 싸웁니다. 로마 신학 쪽은 오야봉이 터툴리안입니다.
신이 인간으로 변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곧 신이 되는 거예요. 그걸 극단적으로 주장한 사람이 사벨리우스. 사벨리우스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물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예수님이 울 때는 누가 운 것이냐?” 사벨리우는 그것은, “하나님이 운 것이고, 하나님이 죽은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죽은 하나님 믿나?” “그래.” 그래서 이것도 이단 되었어요. 너무 과하다고.
오리겐 제자가 아리우스에요. 로마 쪽은 아타나시우스. 여기 내용이 다 나와 있습니다. 어쨌든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인데 합리주의는 교회는 제도와 법이 있어야 되고 합리적이고 조직적으로 해야 사람들이 안심하고 온다는 주장이고. 신비주의는, 모든 인간은 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 나와도 하나님 믿는다고 쳐주자. 그러면 교회 나온 사람만 신자 되는 것이 아니고 집구석에서 양치고 염소 쳐도 나중에 국가로 통합될 때는 한꺼번에 신자 될 유용성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10분 쉬어야 되겠죠.
한윤범(IP:14.♡.134.60)
13-07-17 13:36
20130709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5-교리 만들기
(강의:이근호 목사)
이레니우스, 아타나시우스, 터툴리안, 이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터툴리안은, 인간이 원죄가 있잖아요. 만약에 오리겐의 알렉산드리아신학처럼 하나님이 사람이 아니고 그러니까 로고스 되는, 오리겐은 하나님은 한분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사실은 하나님은 아니에요. 두 번째 질이 떨어지는 하나님으로 본 거예요. 그럴 때 터툴리안이나 로마 쪽의 사람들이 볼 때 그렇게 되면 인간의 구원이 성사가 안 된다는 거예요.
로고스가 인간 속에 들어가서 인성을 신성으로 바꿔야 되는데 어설픈 하나님이 들어가 버리면 결국 도착지점이 진짜 참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를 다 받는 것이 아니고 어설픈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때문에 제대로 된 원죄 해결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를 졌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해결도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가 돼야 되는데 죄를 묻는 분 말고 다른 분이, 죄에 묻는다는 그분이 용서를 해야 되는데 그래야 자기가 정죄한다를 취소한다가 되는데 그렇지 않고 정죄를 어떤 하나님이 하고 질 떨어진 다른 하나님이 용서해줄게 한다면 온전한 구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조건 예수님이 하나님이 돼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유사본질이 아니고 동일본질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럴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렇게 따지면 너무 교리적이고 너무 법률적이라는 거예요. 그런 것은 일반 대중들은 모르고 어디서 배워야 돼요? 교회 와서 진짜 많이 배운 신부들에게 직접 교육을 받아야 돼요. 교육 안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 못 받지요. 그 사람들은 그런 것만 전공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을 확보해야 하는데 곤란하지요.
지금도 그래요. 성부 하나님이 하나님을 대변해요. 만약에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요, 성령도 하나님이라면 이게 단일신이 아니고 다신론이 되죠. 다신론이 돼버리면 각 하나님마다 구원의 법칙, 삶의 원리가 동일하지 않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여기 교부들의 이야기가 단편적이고 체계적이지 않은 것은 교부들이 기독교 내부의 싸움뿐만 아니고 기존의 다신론과도 싸워야 되잖아요. 유대교와도 싸워야 되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로고스가 됐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로마 쪽이고, 동방신학 쪽은 예수님은 로고스와 그리스도와 연관시켜야 되고, 이 로고스는 하나님보다 한 수 낮은 신이라고 보는 거죠. 로고스가 하나님보다 낮다는 것은 이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나왔던 거예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법칙과 원리가 로고스기 때문에.
이렇게 할 때 교리가 어떻게 발전되는가? 점점 골치 아프게 됐는데,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할 뿐 아니고 경륜, 세상의 창조부터 모든 것이 지상의 역사에도 하나님이 개입해왔기 때문에 역사가 이렇게 됐다는 경륜적이 되면서 하나의 체계적인 조직신학, 성경신학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경륜적으로 보게 되면 점점 교리가 폭이 넓혀지겠지요. 그걸 신학의 발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학이 자체적으로 발전되면서 완성되지는 못하고 자체 내에서 논쟁이 일어나게 되거든요. 논쟁이 발생하면서 이단들이 여기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군에서 참호 전투처럼 사람들을 들어내는 게 있잖아요. 이단은 저리 가라고 내치고 이단은 이단끼리 모이고 또 자기들끼리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중에 아리우스란 사람의 주장을 보세요. 여기서 새로운 신학이 나왔는데 부정신학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란 신학자도 부정신학인데 하나님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데 예수그리스도가 성경에 보니까 아버지에 대해서 다는 모른다고 돼있어요. 그 때와 그 시는 나도 모른다고 돼있고, 또 마태복음 19장에 부자청년이 와서 “선하신 선생님이여” 하니까 “왜 나에게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아버지밖에 없는데” 따라서 그 때와 그 시를 모른다고 했으니까 예수님도 아버지에 대해서 온전히 다 아시는 분은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낳았다는 거예요. 엄마가 아기 낳듯이. 낳았다는 말은 예수님도 이 땅에 없었던 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행기에서 미사일이 장착되었다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없었는데 튀어나온 거예요. 그때 인간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대리한 하나님으로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진짜 신을 만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아리우스가 이렇게 언급한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유일신을 지키기 위해서. 유일신을 왜 지켜야 되느냐 하면, 성경에 보니까 나는 오직 하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한분밖에 없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교재 계속 나갑니다만 하나님이 한분밖에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돼요.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이 성령의 역사냐? 그야말로 아니면 철학이냐?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철학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로 모아진다는 것이 모든 인간의 본성이 그래요. 인간은 하나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나라는 것은 곧 신이 하나여야 한다는 것은 내 마음이 궁극적으로 다양성이 하나로 모아지는 식으로 방향이 그렇게 정해져 있어요. 그러니까 모든 개념에 신이라는 것을 갖다 붙이는 거예요.
그런데 클레멘트가 두 사람 있어요. 로마에 클레멘트가 있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있어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오리겐과 같이 부정신학입니다. 부정신학이 신비주의라고 했는데 부정신학은, 하나님은 모든 언어에 대해서 초월해있다. 언어에 대해서 초월해있기 때문에 신학 자체로서 신을 표현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갑바도기아 세 신학자들도 같은 이야기했어요. 그 사람들이 중요한 걸 했어요. 삼위일체가 3이잖아요. 삼신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느냐 할 때 위격내재라는 말을 했어요. 레온티우스도 그런 이야기했는데 위격내재가 뭐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하나님이 삼신이면 저녁도 한 사람은 라면 먹고 한 사람은 밥 먹고 따로 먹는 거예요. 모든 찬양과 모든 사역을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세 분이 다 같이 한다고 한 것이 바로 갑바도기아 세 천재적인 신학자들의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칼케돈공의회(451년)에서 삼위일체교리가 완전히 교리가 정립이 돼요. 성부, 성자, 성령도 동일본질을 같이 누린다고 봅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예수그리스도는 비록 육과 혼은 인간을 갖고 있지만 영 만큼은 로고스로 갖고 있다고 주장해요. 그러다가 이단으로 참호 전투에서 튕겨나갔지만. 성령도 같이 하나님이다. 그렇게 완전히 교리가 구축이 됩니다.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이 다 하나님이라는 것을 물었잖아요. 그러면 동방신학이 잘못됐다는 것이 뭡니까? 할 때 사실은 한국기독교신학교전통이 로마의 삼위일체교리에서 나온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지 우리가 신앙 고백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어떤 교리를 표현할 때 이미 언어적으로 가미했다는 자체가 하나님은 그 언어에 얽매이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다고 해서 부정신학인데 그 사람은 부정하기 때문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모든 것이 긍정신학이 돼요. 하여튼 옛날에도 그런 것만 연구한 사람이 있던 모양이라. 신이 어떤 분이냐? 알아서 뭐 할 건데. 신이 어떤 분인지 계속 연구하는 거예요.
그래도 만족하지 못해요. 왜? 원래 삼위일체에 나오는 ‘우시아’라는 용어도 처음 초대교회에서는 이단으로 쳤어요. 우시아라는 게 뭐냐? 이게 물질이라는 뜻이거든요. 물질로 어떻게 신을 표현하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냐고 사용 안 했다가 교리정립과정에서 이단들이(그들이 말하는 이단이죠) 등장하니까 교회가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 사실은 로마제국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 콘스탄티누스대제가 신학자들 모아놓고 가둬놓고 이것은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고 나라가 깨지면 안 되니까 나라가 하나의 교리로 뭉쳐야 되니까 결정한 것이 우시아란 용어를 집어넣은 거예요. 실체란 용어를 집어넣은 거예요.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삼위일체 교육을 언제 받았지요? 빨리 받아 적어. 안 그랬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밤에 낙원에 간다 했지요. 부정신학이든 긍정신학이든 신비주의든 모든 신학의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리자를 자처한다는 거예요. 교회가.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여러분을 구원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구원받고 싶지요? 여러분의 요구를 우리 교회가 충분히 수용해서 우리가 가르치는 이 교육과 교리공부, 신학을 하시면 이 신학은 훌륭한 선배들의 전통과 아주 정화되고 순수하게 구원받기 적합하도록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같이 가담하시면 구원받는다고 제시하는 용도에요.
사도신경을 예수님이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한 게 주기도문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주기도문 외우면 구원받는다고 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사도신경을 예수님이 안 만들었지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성경말씀밖에 없고, 성경말씀에 대해서 성령이 역사를 해야 성령이 말씀으로 말씀이 스스로 우리 안에 역사해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교리논쟁들이 계속 나오는데 우리는 그것을 몰라서는 안 되지요. 왜냐 하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구원하기 위해서 아주 정교하고 세밀하게 다듬어가는 과정을 놓치면 안 되거든요.
유일신을 유지하면서 유일신을 성부라고 잡고서 그 다음에 여기에 성자와 성령을 거느리게 되는 겁니다. 전에 수련회할 때는 성령도 처음에 등장하지 않았지요. 삼위일체는 나중에 생겼고, 제일 먼저 논쟁된 것이 성자의 논쟁이었고, 성자의 논쟁에 성부를 합쳐서 나중에 삼위일체가 생기거든요.
성자의 논쟁에서 로고스와 인간의 육을 할 때 로고스가 신성이라면 신성이 인간의 육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 로고스가 인간의 신성을 대신한다고 주장했어요. 키릴이란 사람이 그렇게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여 네스토리우스란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님의 신성이 하나님의 신성을 대신한 게 아니고 예수님 자체 내에서 신성 따로 있고 인성 따로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통합돼있다고 했어요. 이걸 이성론이라 해요.
그런데 유티쿠스란 사람이 등장해서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이걸 단성론이라 합니다. 그런데 전통으로 정해진 신성은 뭔 줄 알아요? 이성론은 2 아닙니까. 단성론은 1이거든요. 유티투스의 단성론은 루터도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정답은 뭐예요? 정답은 이렇습니다. 양성론. 그래서 나중에 아타나시우스 신조 등에 보면, 예수님은 인간이면서 신이시고 서로 섞이거나 통합되지도 아니하고, 뭐 이렇게 돼있어요. 그런데 만약에 통합된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면 봅시다. 시장에서 물건 파는 무식하고 순박한 아줌마가 천국 가려면 물건 팔고 집에 와서 삼위일체를 연구해야 돼요. 그리고 자기 생각을 비춰봐야 되겠죠. 내가 예수님 인성을 통합되는 것으로 볼까? 나중에는 신성뿐만 아니고 의지가 있어요. 예수님의 의지는 하나다, 아니다 둘이다. 이렇게 나와요. 668년인가 그렇게 나와요. 그래서 예수님의 의지 두 개라고 정립이 됐습니다.
이런 것들이 주변에 있는 유대교나 불신자나 다신교와 대결하기 위해서 더욱더 세밀해지면서 뭘 보여주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표현할 때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까발려진 계기가 된 거예요. 삼위일체이론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고 할 때 그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각양각색 뷔페음식처럼 다 나오는 거예요.
아까 제가 부정신학 했죠. 이런 것도 나중에 신비주의자들 신학이잖아요.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걸 초월한다. 도대체 그야말로 삼위일체이론을 통해서 빠진 게 없을 정도에요. 예수님이 인간이라면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돼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은 로고스냐? 아니면 로고스는 따로 있고 예수님의 영은 따로 있느냐? 그리고 이 영이 곧 신성이냐? 아니면 합해서 신성이냐?
지금 여러분이 보시게 되면 문제점이 어디 있다고 봅니까? 혼, 육, 영, 신성, 성육신. 하나님이 인간이 됐느냐? 아니면 인간이냐? is냐? become이냐? 그런 개념. 모든 이야기가 뭔가 발설할 때 인간이 자기 뜻을 남한테 전달할 때 뭘 사용하지요? 문자나 언어를 사용하잖아요. 사람들이 모르는 게 뭐냐 하면, 그 언어와 문자라는 것은 본인이 지어낸 게 아니고 이미 상주해있는 그 공동체, 그 집단이 서로 활용하고 통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그 중에서 몇 개를 끄집어내어서 문장으로 연결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사상과 신학과 체계를 표현한다는 거예요. 너는 내 표현에 무조건 따라야 돼. 안 그러면 너는 이단이라고 했을 때 과연 그 판정에 하나님께서 동의하시겠어요? 동의 안 하지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래서 헤겔은, 사람이 누구한테 말을 한다는 것은 남들로부터 인정받겠다는 겁니다. 아까 무궁화 타고 오면서 뒤에 장로님과 어떤 할아버지 한분이 탔어요. 내용이 뭐냐 하면, 자연식하면 건강하다는 그 이야기에요. 장로님은 그것도 철학이라고 반박하고. 어떻게 하면 복음 전해볼까 싶어서 했는데 그 사람은 그 말 완전히 듣지도 않고 계속해서 생식하면 건강하다는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헤겔은, 인간은 상호인정.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소용없어요. 남이 나를 인정할 때 비로소 사는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이 사회가 나만 그런 게 아니고 그러니까 서로가 상호인정, 다 그런 거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으로 보게 되면 이러한 논리들이 바벨탑처럼 인간의 언어가 같이 통용되어 나오는 바벨탑처럼 그 자체가 우상이에요. 본인이 우상인데 그 우상의 티를 내면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표현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어야 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서 전도, 도를 전하는 것은 뭘 전하는 겁니까? 십자가를 전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사도들은 십자가복음을 어떻게 전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유명하죠. 나는 죄인의 괴수다. 그리고 사도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서 우리가 진짜 빠뜨리기 쉬운 건데 내가 죄 지은 게 아니고 나는 이미 죄 속에서 그동안 계속 살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나오지요. 공중권세 잡은 자의 지배를 받아서 우리는 불순종의 아들이라고 있지요. 이게 교부들에게서는 나오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여기 나오는 어거스틴부터 해서 유명한 80여명의 신학자들 중에서. 도대체 이게 나오지 않아요. 나는 세상 자체의 일부인데 세상이 곧 지옥이라는 것 따라서 나는 지옥의 일부라는 걸 본인이 고백하지 않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이 언급을 할 때 나는 이렇다가 아니라 우리는 어디에 잠겨있다는 겁니다. 푹 젖어있다는 겁니다. 너, 나 있지만 합치면 하나의 아담이고 아담 자체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거예요. 로마서 5장에 의해서. 고린도전서 1장에 있는 말씀처럼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십자가 져서 당신들 구원했습니까?”라고 오히려 반문하잖아요. 나는 십자가 안 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신성이 어떻고, 인성이 어떻고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십자가 진 적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게 정답이 아니라는 겁니다. 신이라는 개념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인간의 집단,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개념이 바로 신 개념이에요. 문제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쓴 용어도 인간 용어를 썼다는 점이에요. 물어봅시다. 예수님의 발음이 좋습니까? 아니면 우리나라 아나운서의 발음이 좋습니까? 어느 발음이 더 낫겠어요? 교부들 신학에 의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가장 뛰어난 발음을 해야 됩니까? 예수님 빼놓고 사도 바울의 발음은 최고입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장동건이 미남이라 하는데 사도 바울은 장동건보다 더 미남이어야 합니까? 답변해보세요.
지금 그리스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미 철학이 있지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가장 좋은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진리는 다 신의 것이에요. 신에서부터 떨어지면 점점 더 타락한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발음이 좋은 것도 굉장히 듣는 사람 기분 좋게 하거든요. 행복하잖아요. 최고의 발음은 역시 신이 갖고 있어요. 그리고 아름답다, 예쁘다 해도 신이 예쁜 거예요. 이게 그 당시 공동체고 오늘날 공동체도 마찬가지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볼트와 예수님과 100미터 달리기 하면 누가 이깁니까? 인간의 사고방식은 예수님이 이겨야 돼요. 오히려 볼트의 발을 움직일 정도가 되니까. 빨리 가, 빨리 가.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 몸을 입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빠르기가 육상선수가 아니면 예수님도 빠르다고 볼 순 없어요. DNA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죄가 뭔지를 평생을 살아도 몰라요. 그 죄는 성령이 와야 압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죄라고 딱히 따질 필요조차 우린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예수님이 오신 것은 로마서 8장에 의하면 육신의 죄를 정하러 왔거든요. 육신 자체가 죄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비로소 드러나는 게 그거라는 겁니다. 이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받은 사람만 아는 게 뭐냐? 예수님은 육신의 죄를 정하러 온 거예요. 그러니까 붓 하나 들고 우리 얼굴에다 통째로 먹칠하러 온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대야에 발 씻겨준 것 기억나시죠. 요한복음에서. 그게 발 씻겨준 게 아니고 베드로에게 먹칠했다고 생각하시면 정답이에요. 씻어준 게 아니고 오히려 물 찍어 바른 때마다 베드로는 점점 더 죄인이 되는 거죠. 예수님이 씻어줄 때마다 죄인이 되는 겁니다. 왜? 씻겨줌으로 비로소 내가 씻길 게 있는 존재라는 것이 파악되기 때문에 그래요.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에이 발만 씻겨주고. 다 씻어주이소.” 예수님이, “발만 씻어도 전체를 씻은 것이 된다.” 발만 먹칠해도 전체를 다 먹칠한 거예요. 이 말은 네 인생은 네가 관리하거다 네가 구원하거나 할 수 없는 것에 갇혀있고 그 갇혀있는 그것을 내가 옴으로써 거기서 빼내주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것을 교부들은 이렇게 보지 않고 인간 속에 로고스가 있다. 이성이 있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겁니다. 오늘날 루터주의나 칼빈주의나 개혁주의도 다 이런 사고방식이에요.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그 형상은 성경말씀을 받아서 자체적으로 관리하고 지키고 순종하면 날이 갈수록 우리 속에 있는 신의 로고스, 신의 형상이 더 높아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결국 형상이 높아진 사람만 구원이 된다는 그런 논리가 개혁주의 성화론이잖아요.
그 성화론의 원본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제가 지금까지 나온 교부들의 신학에 이미 깔려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는 그 신학의 뿌리를 건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학교에서 배웠어요.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배웠고, 사도신경을 압니다. 우리는 그것을 정답으로 본 거예요. 특정이 언어가 정답이 돼버리면 우리는 그 언어를 반복해서 외우고 그걸 숙지하게 되면 구원을 받게 돼요. 그러면 성경의 어느 구절을 외우면 구원을 받습니까? 성경 어느 구절 외워도 구원 못 받지요. 성경을 다 외워도 구원 못 받지요.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 몇 독했습니까?
언약에 의하면 성령이 주어지면 성경 전체가 다 들어있을 뿐만 아니고 성경 전체가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주어지게 돼요. 성령 안에서는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는 다 이루었다가 되죠. 그래서 교부들의 이런 철학이나 신학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럼 그 당시에 신자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우리가 할 상황이 아니죠. 왜? 재림하지 않는 이상은 신자가 계속해서 꾸준히 있었다고 봐야 돼요. 몇 년 만에 있느냐, 몇 명이냐? 그건 우리가 알 필요 없어요. 베드로가 저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네가 알바 아니요. 서기 2000년 되든, 서기 200년 되든 간에 우리는 주님 보시기에 죄에 갇혀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 사상 자체가 이미 죄에 갇혀있다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런데 교부들은 인간론을 신론에 비해서 신은 있음, 인간도 있음, 신에 있는 요소가 인간에게 있음, 따라서 신에게 가려면 우리 속에 있는 신성을 계발해서 신과 합체하면 돼. 그러면 이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저도 신과 합체할래요.” 하고 분명히 많이들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을 교육시켰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신부되게 했고, 수녀 되게 했고, 집사 되게 했고, 그들이 돈을 내서 예배당 세웠고, 예배당 있음에 구원의 매개체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그것이 너무 섞으니까 섞었다고 외치면서 루터는 면죄부 하지 말라고 비텐베르크에서 95개조 붙였고, 루터 말이 옳다고 따라왔고 칼빈도 거기에 따라다녔고 그래서 개신교가 생겼고, 개신교가 천주교와 똑같이 전통과 역사를 주장하고, 그 학습된 전통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감리교는 웨슬레교리를 또 가르치고, 성결교는 성결교대로 가르치고, 장로교는 장로교대로 가르치고, 가르침 받은 사람은 장로교신자라고 안수 받고 물 붓고 똑같은 일을 옛날처럼 하고 있는 거예요.
정리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합리주의는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은 인간이 되어야 되고, 동방교회에서는 인간 있음 자체가 이미 하나님 있음을 인정하는 거니까 인간 속에 이미 하나님 들어있으니까 우리는 그것을 계발해서 가르쳐주면 될 문제다. 따라서 구태여 신이 세분이 될 필요가 신은 한분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은 불신자든, 신자든 기본적인 로고스적인 이성적인 안목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주고 본받으면 구원될 수 있습니다. 인간 속에 로고스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 들으면 성경말씀 듣고 순종하면 구원받는다고 그런 체제로 합리주의든, 신비주의든 양쪽 다 간 거예요.
그러한 삼위일체 토대 위에 어거스틴이 나옵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이야기하고 강의 마치겠습니다. 왜 삼위일체를 언급하느냐 하면, 어거스틴이 평소에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그 비법은 모든 것은 3. 어거스틴은 인간의 구조도 영과 육과 혼, 3.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손에 손잡고, 위격내재. 내부적으로 서로 교류가 돼요. 이것은 성부가 한 것이고, 성자가 한 것이라고 할 게 없다는 겁니다. 전부 다 어떤 일을 벌여도 성부가 가담돼있고 성자가 가담돼있고 성령이 가담돼있으니까 목사가 설교할 때 1대지 성부가 하신 것, 2대지 성자가 하신 것, 3대지 성령이 하신 것만 끄집어내면 그 설교는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 받으시는 분명한 거지요. 어거스틴이 보기에. 모든 것은 삼위일체가 가담돼있으니까.
이 꽃, 나무? 이것은 뿌리는 성부고, 줄기는 성자고, 가지는 성령. 아주 멋들어진 은혜로운 설교가 되는 겁니다. 남방? 원단은 성부요, 디자인은 성자요, 제품으로 나온 것은 성령이고. 교인들이 은혜롭습니까. 교인들로 하여금 모든 일에 삼위일체가 개입한 것을 믿고 알기만 하면 천국에 가기 때문에. 왜? 전통적인 신학에서 삼위일체를 벗어나면 이단이고, 삼위일체 안에 있으면 무조건 오늘밤 죽어도 구원받기 때문에. 이게 어거스틴이 했던 모든 설교입니다. 그걸 우리는 알레고리라고 하죠.
이런 설교를 어거스틴한테 구태여 배울 필요 없어요. 우리나라 일제시대 때 부흥사들 설교들을 보면 그 설교가 소주 한 병 먹고 이불만 뒤집어쓰면 나올 수 있는 설교들이에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목적은 하나밖에 없어요. 은혜만 된다면 다 용서가 되는 설교. 심지어 물 떨어지는 홈통. 물은 은혜요, 홈통은 성자요, 물 내리시는 건 성부요, 물 떨어져서 축축한 것은 성령이로다. 이렇게 설교해도 교인들은 아멘, 아멘이에요.
제가 경북 봉화에 갔는데 연세가 87 먹은 노인과 식사를 했어요. 46만 톤 배 몰던 선장까지 하면서 잘 나갔던 분인데 아내 따라 듬성듬성 서울에 소망교회 다니다 했는데 아내 죽고 난 뒤에 소망이 뭐냐? 아내 죽은 곳에 합류하기 위해서 교회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사람이 저와 식사하면서 저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목사를 만난 것이 하나님 만난 것 같습니다.” 정말 이것은 제가 수십 년 전에 처음 교회 다닐 때 처음 초신자들이 목사를 대할 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