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없다
죽으면 죽으리라구원은 없다지난 주에 진희 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그럼 선택 된 거네요? 창세전부터? 네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선택이라면 기쁘게 반기며 달가워 할까요? 전혀 안그렇습니다. 죽기까지 평생 강도로 살다가 예수님을 원치도 않은 십자가에서 알아보게 되었으니 그는 얼마나 후회 스러운 인생을 산 겁니까? 안그런가요? 그래서 한국교회는 그를 단호하게 몰아 붙였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이라고요.그러나 후회는 예수님 앞에서는 소용없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말 자체도 성립이 안되면서까지 몰아붙이는 이유가 뭘까요? 뭔가 부담스럽고 거부감이 일어나며 당당한 구원을 자신들은 받아야 한다고 배가 불러서 나온 단어입니다. 구원도 모르면서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말을 아주 생소한 단어를 마구 만들어 내어서 교인들을 자기들 손에서 못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함이지요.예정은 애초부터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촛점이 맞추어진 겁니다(롬 11:36).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 되어 있습니다. 단절된 관계를 죄라 했습니다. 선택이란 주님의 소관이지 인간이 다룰 문제가 안됩니다. 선택될 권리조차 인간에겐 원래 없었던 겁니다. 그렇기에 구원은 꿈도 꾸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에 애초부터 인간을 위한 선택 예정은 없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구원하십니다. 이 단절성을 모르면 유대인처럼 또 법으로, 행함으로 달려들껍니다. 그럼 전혀 길이 없나요? 네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왜 어떻게 성경에는 구원을 제시 했습니까? 성경은 구원을 제시한게 아니라 예수님을 제시했습니다. 예수님만 끄집어 내었습니다. 그말이 그말 아닌가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이 구원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아브라함(믿음의 조상) 또한 누구의 때를 기다려야 했다는 겁니다(요 8:56). 누구를요 한 참 뒤에 오실 예수님을요. 그럼 예수님이 안오면 믿음의 조상이라는 트레이드 마크(trade mark) 도 소용 없네요? 네 없지요. 예수님이 와야 그 말이 적용되니깐요. 남용한 자 돌 보다 못하지요(마 3:9). 그런데 유대인은 그 단절성을 거부하죠 하나님 믿으면 바로 구원인 거죠. 아브라함처럼 된다고 본거죠.(오늘날도 똑같은 식으로 예수님을 핍박하죠? 누가? 교회가) 그러나 정작 본인 아브라함은 누구를 기다립니까? 예수님을요.우리가 예수님의 원수가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아 놓고도 구원을 기다린다는게 말이 되나요? 그래놓고 선택 예정을 자기유익을 위해 구원을 자기 쪽으로 좋게 해석 할려고 하는 겁니다. 이런 모순은 우리 속의 원수가 하는 짓이기에 그것을 잡지 않고서는 구원 꿈도 꾸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믿음을 본 것이 아니라 누구의 믿음을 기다린겁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올 때까지. 그 예수님의 믿음이 와야 자기를 살리니깐요.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나 이제는 신의 자리를 교회를 통해서 노리고 있고, 믿음을 통해서 노리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속의 죄성입니다. 원수입니다. 이것을 때려 잡을려고 강도 잡으러 원수 잡으러 온 것입니다. 누가요? 예수님이요. 그런데 모두가 선한 이웃인냥 앉아 있으니 강도는 어떻게 잡나요? 그 원수는 선악에 대해선 도사들입니다. 법이란 법은 모두 그들이 꼭 쥐고 있습니다. 율법도 그들이 쥐고 흔들고 있습니다(신의 대리자처럼). 그래서 악을 이겼고(하지말라를 제대로 실천했고, 하라를 그대로 행했음), 선함은 자기 쪽에 있으니 율법은 자신들을 위해 있는 것처럼 여길정도였습니다. 그러니 강도에게 던질 미끼는? 선악을 미끼로 삼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우리 자신이지요)에게 선과 악을 구분하는데 기가막힌 솜씨를 어떻게 유발케 하나요? 그거야 선과 악의 대립인 하라와 하지말라를 던져 놓으면 그 그물망에 걸려듭니다. 법은 하나님만이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법을 알게되었고, 그 법 아래 갇히게 되니 그 법 위에 있는 은혜를 공격하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 흉내를 내기 시작합니다. 법을 가지고 마음대로 난도질 합니다. 법은 오로지 자기자신 뿐인 것에 그 힘을 결집합니다. 그 신 흉내는 곧 예수님을 자동적으로 미워하게 됩니다.이것이 바로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의 사고방식입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쉰들러 리스트 가 생각나곤 하는데 각설하고 보면, 온통 법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왕은 법보다 사랑(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에 뿅 가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만은 법을 고수하면서 국가와 왕의 충성을 위해 법을 너무 고수하는 나머지 그만 국법(황제가 임명한 국무총리 하만이 지날 때 무릎꿇고 절하라)을 어긴 모르드개를 미워함으로 같은 민족 유대인까지 모두 몰살 전멸 시키고자 모략을 꾸밉니다. 하만의 화냄은 가인의 죄의 소원과 연관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안색의 변함입니다(창 4:5-7). 최고의 권력자인 왕의 대행자 국무총리인 하만이 철두철미한 국법 사랑 앞에 벗어날 자 아무도 없습니다.(마치 솔로몬의 아이를 두조각 내어서 각각 나누어 주라는 그 판결 앞에 아이의 살 길- 구원은 없는 겁니다)(더 3:5)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는 것을 보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더 3:6) 『더구나 모르드개가 유다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그는 모르드개만 죽일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유다 사람들을 전멸시키기로 결심하였다.』바로 여기서 지혜는 그 빛을 발합니다. 모르드개와 유대백성은 옷을 찢고 대성통곡합니다. 그 부르짖음 속에서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대화는 죽음과 구원을 돌출 시킵니다.(더 4:1-12)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으며 재를 무릅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를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고하니 왕후가 심히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를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 에스더가 왕의 명으로 자기에게 근시하는 내시 하닥을 불러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슨 연고인가 알아보라 하매 / 하닥이 대궐 문 앞 성중 광장에 있는 모르드개에게 이르니 / 모르드개가 자기의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부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수효를 하닥에게 말하고 /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 하닥이 돌아와 모드드개의 말을 에스더에게 고하매 /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고하기를 / 왕의 신복과 왕의 각 도 백성이 다 알거니와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 그가 에스더의 말로 모르드개에게 고하매』(더 4: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더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더 4:15)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더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더 4: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 대로 다 행하니라』왕후 에스더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그 죽음을 담보로 하여 페스티발을 엽니다. 두 번씩이나 연회를 열어서 왕후 에스더는 왕에게 요구합니다. 그 속에서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지혜와 하만의 지혜가 충돌합니다. 하만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줄 모르고, 집요하게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려고 합니다. 왕은 과거에 왕을 살해 할려는 자의(더 2:21-23) 음모를 파해쳐 위기를 넘긴 일기를 보고 늦게나마 그 공로를 베풀고자 국무총리 하만을 불러 상의를 합니다.(더 6:6) 『하만이 들어가자 황제는 `내가 영예를 주고 싶은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때 하만은 황제가 영예를 주고 싶은 사람이 자기 외에는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더 6:7) 『이렇게 대답하였다. `황제 폐하께서 영예를 주고 싶은 사람에게』(더 6:8) 『황제의 예복과 말과 왕관을 가져오게 하여』(더 6:9) 『황제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신하가 그 사람에게 황제의 예복을 입히고 그를 말에 태워 성안 거리로 다니게 하시며 그 신하에게 `황제가 영예를 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렇게 할 것이다!' 하고 그 사람 앞에서 외치게 하십시오.'』(더 6:10) 『그러자 황제는 하만에게 이렇게 명령하였다. `너는 급히 내 예복과 말을 가져다가 궁궐 문 앞에 앉아 있는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네가 말한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시행하라.'』(더 6:11) 『그래서 하만은 황제의 예복을 가져다가 모르드개에게 입히고 그를 황제의 말에 태워 성 안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황제가 영예를 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렇게 할 것이다!' 하고 외쳤다.』(더 6:12) 『그런 다음 모르드개는 다시 궁궐 문으로 돌아가고 하만은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머리를 싸매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자기 꾀에 넘어간 하만은 모르드개를 나무에 달려고 했으나 정작 자신이 달려야 할 판입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국가의 법을 수호하는 국무총리 하만의 미움을 받아 죽게된 모르드개와 유대인을 자기 목숨을 걸어서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죽음을 뛰어넘는 그 지혜로 죽음으로 다 몰린 유대인을 살려내었다는 부림절의 기원을 다룬 내용입니다.그러나 그런 부림절기를 지키고 지켰던 그 법을 잘 준수하는 유대인 이 에스더서의 지혜를 알던 그 유대인이 정작 에스더가 누구를 증거하는 줄 몰라서 눈이 어두워 지고 귀는 듣지 못해서 하만의 손에서 건짐 받은 줄 모르고 도리어 하만이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하만으로 몰아 붙여 나무에 매달아 죽인 겁니다. 지혜는 절대로 인간의 계산에 놀아나지 않음을 인간의 손에 닿지 않음을, 인간의 손에 지어지지 않음을 다시 한번더 확인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입술에 의해 증거 되지 않습니다. 죄인의 입술로 증거하십니다.성령을 통해서만 증거 됩니다. 사람이 지은 성전에 안 계시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사람 자체를 교회로 삼으시는 주님은 인간의 믿음으로 만든 교회 조직에서 배출된 교역자의 선포에게서가 아니라, 지금도 예수님 자신이 직접 활동 하셔서 증거하심을 그저 우리는 그의 소리일 뿐임을 어떤 인간의 공로도 십자가의 공로에서는 하만의 꾀 일뿐임을 알게 됩니다.십자가의 지혜만이 하만의 꾀로 가득찬 우리의 깊은 죄성 늘 자기 믿음으로 자기를 속이는 그 진리를 갈망하는 그 마음 속에서 상한 심령은 따로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화목제물이 아니고서는 사랑은 없습니다.주님 에스더의 이야기를 통해 유월절 페스티발이 어린양의 희생 때문에 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없습니다. 오로지 구원 베푸시는 분의 자비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몰살 당해 마땅한 우리, 하만처럼 자기 꾀에 속아 넘어가 나무에 달려야 할 우리가 정작 예수님을 하만으로 몰아서 실제로 못밖아 버렸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원수로 갚는 우리의 모순은 그래도 구원을 받겠다는 탐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여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자기 유익만을 위해 구원을 챙기는 이런 우리를 어서 심판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