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예상외의 일)130620-22강b -이 근호 목사
가락교회-70이레 논문(예상외의 일)130620-22강b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교회-70이레 논문(예상외의 일)130620-22강b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그 70년이라는 실제 역사적 기간만 지나면 필히 하나님께서 서언은 다시 본래의 자리에 건축되리라 믿었고 하나님은 다시 그 성전에 임재하리라 여겼다. 그렇다면 지금의 포로 기간은 그냥 자숙하면서 고난 속에서 잠잠히 있으면서 그냥 속히 지나가기만 고대하면 되는 자체적으로 무의미한 시간이 될 것이다.』그렇게 무의미하게 보내느냐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70년 포로 기간 동안에 포로수용소에서 가만히 있었습니까? 인간은 쉬었지만 하나님은 나름대로 굉장히 분주하죠.
그 예를 한번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5장 1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그거만 딱 봅시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갔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궤는 누구 손에 있습니까? 블레셋 손에 있죠. 블레셋 손에 여호와 궤가 지금 잡혀 있잖아요. 그런데 그 뒤의 진행 상황을 보면 분명히 블레셋이 언약궤를 잡았는데 언약궤가 도리어 잡은 블레셋 나라를 완전히 조져놓죠. 거기에 다곤 신이 있었는데 다곤 신 앞에 언약궤를 안치하니까 다곤 신이 마치 사람 같아. 이게 엎드러져서 손목이 다 부러졌죠. 여기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그런데 원래 이러한 결과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칠 때 그때 기대했던 결과잖아요. 이스라엘 인간들이 기대했던 것은 우상인 다곤 신을 박살내면서 우상의 허실한 점을 폭로하는 그 점인데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능해서 못하고 무능하다고 포기한 상태에서 언약궤가 알아서 스스로 전진에 투입해서, 꼭 007 같아. 본인 혼자 올라가서 적토마가 혼자 다 해치우는 것처럼 그 잡았던 것이 엉망진창 만들어버리니까 그쪽에서 감당이 안 돼서 ‘제발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사정해서 빈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활동은 인간이, 자기 백성이 있어야 활동합니까? 없어도 하나님 스스로 활동합니까? 스스로 활동하죠. 이걸 믿어야 이게 신앙인이다 말이죠. 오늘날 이게 믿어져야 신앙인 이예요. 내가 말씀 지키고 십일조 하고 이래서 신앙인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가 돼야 돼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마귀한테 요만큼도 오히려 마귀한테 지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원된 것은 내가 해내지 못한 것을 주께서 적토마처럼 혼자서 설쳐서 그 효과와 그 열매를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심으로 그 효력 덕분에 십자가의 공로 덕분에 우리는 아무 한 것도 없이 구원받는 거예요. 그게 신앙이죠.
그럼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 할 게 뭡니까? 이거 설교 해야죠. ‘여러분, 헌금해도 소용없습니다. 그거 구원하고 아무 관계없습니다. 봉사했어요? 그거 구원하고 아무 관계없습니다.’ 이렇게 설교해야 된다 이 말이죠.
어제 수요일 날 예배 끝나고 누가 이야기하던데 교회에서 헌금을 했던 모양이라. 그래서 우리 교회 나오는 분의 아버지가 따로 다니는 교회가 있는데 헌금을 했는데 가만히 그들이 헌금을 계산해 보니까 모자랐던 모양이라. 교육관을 짓는지, 장로들이 전부 다 전경들이 시위 막을 때 팔로 막아서 못 나오게 하는 것처럼 교회 출입구를 딱 막아서 ‘헌금이 모자라니까 이 자리에서 헌금을 작정하고 나가라.‘고 이렇게 했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나오는 청년의 아버지가 ’나를 밟고 가라‘는 식으로 장로들의 순교자적인 의지를 이기지 못해서 몇 푼 쥐어주고 나왔는데 시험 들었답니다.
그 교회가 무슨 교회냐, 순복음 교회랍니다. 전주에 있는 순복음 교회. 그런데 차라리 순복음 교회가 참 난 착하다고 봐요. 너무 노골적이니까 착하잖아요. 쉽게 드러나잖아요. 그런데 한국 개혁주의 교회, 장로, 침례, 감리, 성결, 이거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이거는 몰래 요 짓하니까 더 미워. ‘돈 밝히는 건 옳지 않습니다.’ 요런 소리 하면서 돈 더 밝히니까 더 미운 거예요.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전혀 내 구원에 내 위치를 1센티미터도 천국으로 움직이지를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는 게 이게 이미 언약의 자리에요. 이게 시작점입니다. 내가 아는 시작점이 아니고 주께서 아시는 시작점부터 시작되는 것이 언약의 시작점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내가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하는 그 시작점을, 그 우리의 시선을 주께서 아는 시작점으로 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우리를 무장해제 하는 그 기간이 70년 포로 잡힌 기간 이예요. 포로 잡힘으로서 만두피가 짐승이라는 거, 기껏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라는 거.
그러면 짐승은 뭐냐, 전에 설교했지만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반복해야 돼요. 짐승의 특징은 뭐가 없다 했습니까?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으니까 우리가 상대할 대상이 안 됩니다. 우리가 뭘 상대한다는 거, 카메라, 물, 책, 상대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이름을 지어놓고 우리가 상대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강아지야’ 하면, 이건 미친 사람이죠. 강아지가 없는데 왜 강아지라 해요. 이름이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짐승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없다고 여기는 자리에서 짐승이 튀어나오니까 그 출몰은 우리 인간이 호출하거나 기대하거나 예상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 있던 하나님의 시원, 시초, 언약의 처음 자리, 하나님만 아시는 하나님과 결부돼 있는 어떤 정체 모를 어떤 대상, 그 대상을 주께서는 포로 잡혀가게 하는, 이스라엘로 무장해제하게 만드는 그 자리에 그들을 등장시키는 겁니다.
짐승의 이름으로 등장했는데 그 사람이 느부갓네살 이예요. 아! 느부갓네살이 짐승이라는 안목을 볼 줄 아는 것은 바로 인자가 되는 다니엘뿐! 다니엘과 다니엘 세 친구뿐이죠. 다른 사람은 그냥 느부갓네살. 일반적인 여러 임금 중에 한 사람, 그런데 다니엘의 계시에 의하면 그것은 짐승의 원류, 원본, 원천과 엮여져 있는 인물로 보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게 되죠. 그 꿈은 평소에 꿈 해몽을 하는, 아까 했죠? 신과 접촉하는 방법은 밑에서 왕이 꿈을 꾸면 신의 계시라고 해몽을 함으로서 그게 그 나라를 지배하는 법이 됐다 했죠. 그런데 그 전문 자들이 박사고 점쟁이인데 일종의 고위 관리예요. 가뭄이 온다. 비가 안 온다 할 때는 그 사람이 나와서 기우제를 드려야 되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꿈을 꾸는데 아무도 주변에 꿈 해몽을 하는 사람이 없죠. 느부갓네살은 미칠 지경입니다.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 니들이 풀지 못하면 전부 다 죽여 버린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고 일괄해서 다 죽이는데 죽는 사람에 다니엘도 포함돼 있어요.
그러면 다니엘은 그 꿈의 내용을 압니까? 또 해석도 합니까? 본인도 몰라요. 그러니까 다니엘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아까 블레셋 때 언약궤가 혼자서 활동한 것처럼 다니엘도 마찬가지로 다니엘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다니엘로 하여금 꿈을 알게 하고 해석하게 하시는 그분은 절대로 포로 잡힌 이스라엘이지만 비록 짐승한테 잡혔지만 홀로 그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은 마음 놓고 자신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시는 분이 현재 다니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포로 잡혀 있으면서도 진정한 자유를 느끼죠.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제압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관한 한, 복음에 관한 한, 언약에 관한 한, 그 누구에게도 꿀릴 게 없습니다.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문 활짝 열고 기도하죠. 꿀릴 게 없어요. 다니엘 세 친구 절하라고? 다니엘 세 친구는 보란 듯이 문 활짝 열고 절하지 않아요.
이게 뭐냐 하면, 언약의 효과입니다. 신약에 오면 이게 성령의 효과! ‘니가 왜 그런 짓을 하느냐?’ 고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묻거든 ‘그 일은 내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한다.’고 하세요. 내가 알고 해버리면 이건 나의 의가 돼 버려요. 그래. 다니엘 보니까 사자 굴이 없나 해서 동물원에 가서 들어가려고 하지 마시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지 마세요. 못 하는 건 못하는 것이고, 할 수 있는 건 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의 계시적인 차원은 내가 내 입에서 ‘내가 한 게 아닙니다.’라는 소리가 나올만한 것만 주께서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괜히 할 말 있는지 로또 사지 마시고요, 로또 사서 당첨되거든 내가 한 게 아니고 ‘난 번호도 꿈에도 받은 적 없습니다.’ 하면 주께서 ‘사기는 왜 샀느냐?’ 이렇게 되기 때문에 그런 짓 하지 마시고, 누가 로또 사준다? 받으세요. 그리고 일주일 동안 꿈을 꾸세요. 일주일 동안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로또는 그 재미로 사는 겁니다. 일주일 동안 희망으로 살 의욕을 느끼는 재미로 사거든요.
다니엘 세 친구의 70년이란 개념은 다니엘도 몰랐고 포로 잡힌 사람도 몰라요. 70일 지나면 본토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본래의 성전으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본래의 성전으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그냥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너를 시험케 했던 짐승이 본질과 정체를 밝히면서 돌아가야 구원의 마감이 되는 거예요. 구원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냥 돌아가면 또 쫓겨 나와요. 짐승을 알고 짐승의 정체를 밝히고 그 짐승을 밝힘으로서 돌아가게 되면 두 번 다시 짐승에 빠지는 일이 없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대신 돌아 갈 장소가 전에 있던 지리적인 공간도 아니고 그 시간도 아니에요. 짐승이라는 그 시원적, 원초적인 상대자, 하나님만 아는 상대자가 등장하면서 거기에 부합되는 그 구원의 작업에 부합되는 시간과 공간도 따로 같이 병행해서 새롭게 거기 가미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전은 뭐냐 하면 그냥 하늘이 아니고 이 땅에 인자로 오신 그분이 가는 나라가 하늘나라예요. 하늘에서 오시는 분이 아니고 예수님이 가신 곳이 새롭게 하늘나라로 규정이 돼요. 기존 하늘은 그건 지상에 속합니다. 처음 듣는 말이죠. 기존에 우리가 보고 있는 하늘 있잖아요? 그 하늘은 이제는 수명이 다해서 우리 육체로서 발견하는 하늘은 하늘이 아니고 천정에 붙인 도배지라고 보면 돼요. 우리는 도배지 뒤에 뭐가 있는지 몰라요. 도배지가 뜯기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데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뭐냐 하면 이 땅에 인자로 오신 분이 가시는 그 공간이 곧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지금은 새 하늘과 새 땅은 백날 봐도 모르죠. 죽으면 볼 거예요. 죽으면 우리가 거기 갑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거지 나사로가 어느 품에 안겼죠? 아브라함이 뭐냐, 언약이죠. 아브라함 품에 안기잖아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자기는 죽으면 어느 품에 안긴다 했습니까? 예수 안! 새 언약, 아브라함은 십자가 지기 전이니까 아브라함 언약이지만 이건 새 언약이죠. 사도바울은 지금 예수님 안에 있어요. 엘리야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역시 주님 안에, 모세는? 역시 주님 안에. 그러니까 변화 산에서 엘리야, 모세 나왔잖아요. 지금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전부 다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강림이란 그 당사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으면 곧 그곳이 강림이고 강림을 이미 맛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지금 우리가 70이레를 풀어야 되는 것은 방금 이야기한 그 과제입니다. 짐승이 등장하면서 짐승을 짐승답게 티 나게 만드는 그런 시간과 공간을 하나님이 따로 준비해 놓았다는 거예요. 준비를 할 때 준비물이 뭐냐,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짐승과 더불어 끄집어 낼 때는 미리 준비물이 있어요. 깔린 배경이 있습니다. 그 배경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은 죄 졌다는 겁니다. 죄 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 졌는데 그 죄는 그들의 죄가 되면 안 돼요. 보편적인 짐승이 되려면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는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죄가 돼야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유다 나라가 지은 보편적인 죄는 어떤 죄냐 하면 지존의 눈에 보이는 시간과 공간 그 안에서 세계관을, 하나님을 생각한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예루살렘에 있다. 하나님 구경하러 갈까? 얘들아.’ 유다나 이스라엘이, 만약에 해변 가에 있으면 ‘얘들아, 다음에는 유월절 절기기 때문에 하나님 보러 갈까?’ ‘어디 있는데?’ ‘예루살렘에 있어.’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예수님 어릴 때 부모가 예수님을 잃어버렸죠. 사흘 동안이나 찾아다녔는데, 그게 무슨 절기였습니까? 유월절 절기였는데 왜 부모들이 왜 거기 갔죠? 1년에 3번씩 남자들은 절기 지키러 갔잖아요. 그게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두 발로 걸어서 양 몰고 예루살렘 성전이 눈에 보이잖아요. 지금도 붉은 황금 돔이 예루살렘에 있어요. 지금 이슬람 구역에 있지만. 예루살렘이 4구역으로 나눠졌다 했죠. 동방교회 부동산 있는 거, 유대교, 그 다음에 이슬람 마오메트 하여튼 4구역으로 나눠져 있어요. 이방인 구역도 있는데.
현재 이슬람 구역에 예루살렘이 있잖아요. 그럼 눈에 보이잖아요. 지금도 서편에서 모자 쓰고 경건한 사람들이 앞뒤로 흔들면서 통곡의 벽에서 울고 있잖아요. 언제나 오십니까? 그럼 하나님이 ‘니 인간이나 바뀌어라. 니가 바뀌어라. 성전은 여기가 아니고 니 몸이 성전 돼.’ 마지막 때는 우리 몸이 성전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 공간 바뀌는 이것이 옛날에는 그럴 수 없어요.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지만, 예루살렘에 성전 있고 눈에 보이고 저 해변 가에 있으면 멀리 떨어져 있어서 1년에 세 번씩 마음을 먹고 가야 거기까지 가고, 거기 감란 산에 누가 온다? 감람산이 둘로 쪼개지면 메시아가 거기 서게 되면 그 서는 날짜가 있을 게 아닙니까? 고 날짜에 누가 온다? 고 공간에 메시아가 온다는 개념으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고대했던 겁니다.
그런데 막상 오신 예수님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이 바로 죄다. 너희 애비는 악마다. 죄가 너로 하여금 바로 이런 식으로 결코 구출되지 못하고 심령 적으로 정신적으로 절대적으로 그 사고방식, 그런 율법의 사고방식에서 스스로 깨뜨릴 수 없는 이미 죄로 가두어진 상태로 완벽하게 가둬진 상태에 누가 오느냐, 인자 되신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아무도 몰랐어요.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을 받은 사람들, 백부장이나 수로보니게 여인 이런 사람들, 얼마 전에 요한계시록 해석 할 때 했습니다. 주일 낮에 자기를 개라고, 이방인이라 우리는 애초부터 지옥 갈 인간인데 주인이 먹다가 에이 씨, 먹기 싫다. 하고 혹시 버린 거, 안 갖겠다고 버린 거, 암표 나온 거, 예약했다가 취소한 거, 고거 기다릴 것 같으면 얼마나 지는 마땅히 못 간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전전긍긍했겠습니까?
참, 그 사람이 만약에 서울대학교 나왔다 합시다. 서울대학교 나온 사람이 지보고 개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제가 재정부의 국토부 장관이라면 장관이 에헴, 나 장관인데, 이러지 나는 갭니다. 이런 사람 봤어요? 교회 가서. 그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개 같이 사는 노선 같으면 개가 되는데 이게 아니고 지가 돈 좀 있고 이런데 개? 삼성그룹 임원? 개라고 하기가 어려워요. 성령을 안 받으면 안 된다니까요. 목사 하고 있는데 목사가 ‘나는 갭니다.’ 하는 이런 목사 봤어요? 물론 개 같은 목사가 또 기어이 목사 쥐고 있으니 문제라.
철저하게 7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짐승 밑에서 유린 시킵니다. 다니엘이 독립운동 한 적 있습니까? 변또 가지고 폭탄 넣어서 던졌습니까? 이봉창처럼. 제가 주일 낮인가 했는데 모세가 독립운동 할 때 그때 사고방식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된다 했죠? 모세가 독립운동 할 때 애굽에서 내가 이 민족의 지도자다. 이름도 모세다. 물에서 건진 자다. 나 아니면 지도자 없다.‘ 라고 할 때 그때 모세가 생각했던 구원 개념, 그거 알아야 됩니다. 왜, 그게 엉터리기 때문에.
이미 예상하잖아요. 야, 폭력으로 애굽 사람 죽이면 사람들은 자기를 믿고 ‘모세, 모세, 모세, 모세,’ 외칠 것이고, 그럼 내가 기타 들고 앞장서면 나는 잔다르크가 되는 거죠. ‘신의 계시를 받았다.’ 이런 그림이 나오잖아요. 재설, 재설해서. 레미제라블 나오듯이. 그래서 뮤지컬 한 편 나온다니까.
그런데 막상 하나님 오니까 완전히 쭈그리 돼 버렸어요. 그리고 모세가 하는 말이 ‘나 하나님 일 할 자격 못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성경에 출애굽기 4장 보세요. 참 희한한 일이 있죠. 자기가 데리고 살 사람을 숙소에서 죽여 버립니다. 모세를. 모세가 지 마누라 아니면 죽을 뻔 했어요. 모세가 죽을 때 마누라가 우황청심환 먹였습니까? 허준 불러서 침 놨습니까? 모세가 어떻게 살았죠? 보세요. 모세가 진맥한 게 아니죠. 얼른 ‘내 아들 할례를 안 했구나.’ 할례 해서 떨어진 피 묻는 표피를 가지고 모세 사타구니에 집어던지니까 모세가 살아났잖아요. 무슨 그런 치료법이 다 있어요? 출애굽기 4장 이야기예요.
이게 뭐냐 하면 할례라는 언약을 성취하는 용도로서 출애굽 되는 거예요. 그래서 12장에 출애굽 할 때 모든 사람은 조건이 있어요. 그냥 양 잡는다고 피 바른다고 되는 게 아니고 조건은 뭐냐 할례를 다 행해야 돼요. 이건 뭐냐 하나님은 사람 건지는 중심이 아니고 언약을 건지는 중심으로 구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 마누라가 아이고, 당신은 오나가나 할 수 없이 당신은 무슨 남편이다? 피 남편! 누구 남편은 아니다? 내 남편은 아니다. 당신 피하고 놀아. 당신은 피를 위해서 존재하는 남편이지, 나 행복하게 해주라고 있는 남편이 아니다. 아이고, 이놈의 팔자. 피 남편이라. 이거 드라마 제작해야 돼, 피 남편!
다니엘을 보면서 느낀 점은 다니엘은 지금 입술이 타들어갑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아무 예상문제를 주지 않아요. 다니엘 보고 어떤 사적으로 프로젝트를 세우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만날 1년 목회 계획 세우는 건 목사들이나 하는 짓이지, 주님께서 1년 목회 프로젝트를 제시한 적 없어요. 1월 달에는 신년 축하 예배해서 뽑기 하고 2월 달부터 대 심방하고 3월 달에는… 4월 달에는 전도대회하고 5월 달에는 누구 불러서 간증 집회하고 이런 거 없어요. 6월 달에는 목돈 나오는 부활절, 7월 달에는 맥추 감사절, 꼭 돈만 생각해서 11월 달에는 기분 좋아, 추수감사절 돼서 돈 나오고 12월 달에는 성탄절이라 돈 나오죠. 헌금 내라고 봉투 돌리죠. 목회 계획은 돈 밖에 더 있습니까? 마지막에는 헌금 쓰려고 기다리고 있고. 이게 매니저인지 도대체. 그런 것은 미국으로 가서 경영 배우면 돼요. 리더쉽.
무슨 모세가 리더쉽이 있어요? 모세 리더쉽은 하나밖에 없어요. ‘나 안 하렵니다.’ 그래서 제목이 뭐냐 하면 서울 의존교회서 한 강의 제목이 ‘안 돼. 나는 못 합니다. 저 주의 일 못합니다.’
블레셋에 언약궤가 있을 때 바로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홀로 하듯이 소년 다윗이 그 뒤쪽에 많은 사울 군대, 그리고 그 대표자, 키가 3미터 30, 키가 3미터 30이 대적하려면 적어도 사울 계산은 이쪽 이스라엘 대표자는 키가 4미터 30은 돼야 돼요. 저기 자오민이 나왔으면 여기는 키가 더 큰 한 기범이보다 더 큰 농구선수가 나와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는 소년 다윗! 그래서 소년 다윗이 하는 말이 ‘이 전쟁은 우리들에 속한 전쟁이 아니고 만군의 하나님이 하신다.’ 이 말은 지금 우리가 여러분 하시는 대로 하세요. 지금 만군의 하나님께서 마귀와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부스러기, 그 효과만 우리는 지금 염치없이 넙죽넙죽 받아먹고 사는 거예요. 맨날 같이 우리는 살려냄을 당하고 있습니다. 살 자격도 없는데 주께서 일을 치르시고 그 효과로 우리가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남들이 ‘당신은 참 열심히 산다.’ 고 할 때 이렇게 하세요. ‘나는 이렇게 해서 잘 산다.’ 하지 말고 ’나는 살려냄을 당하고 있습니다. 살려주니까 오늘도 재밌게 삽니다.‘ 이렇게 하시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잘 삽니까? 라는 그런 질문은 정답이 없는 질문 이예요.
자, 그렇다면 살려내는 것이 결국 70년인데 포로 잡힌 이 기간이 이스라엘 죄를 아는 기간이라 했죠. 죄를 안다는 것은 여기 맞은편에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짐승을 배치해 놓죠. 그렇다면 요러한 구조 자체가 이게 뭐냐 하면 언약의 파이프 속, 이 자체가 바로 구원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렇게 챙겨야 구원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실제 구원은 구원 작업 속에 있으면 그게 구원 이예요. 우리는 아파트가 건립되고 그것을 내 등기로 소유할 때는 내 아파트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아파트 지을 때 어깨에 자갈 시멘트 지고 올라가면 그게 구원 이예요. 하나님 일에 참여하면 그게 구원이라니까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보고 뭐라 합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고 했죠. 그런데 베드로가 뭐라 하느냐 하면 딱 보니까 옆에 요한이 있거든요. ’쟤는요?‘ 이렇게 하니까 주님 하는 말이 약을 올리잖아요. ” 내가 올 때까지 있더라도 니는 상관하지 마라.“ 그런데 그 말은 전부 다 각자, 각자 할당 받은 게 있기 때문에, 제가 로또 당첨되는 기계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당첨된 것은 36번이고 쟤는 4번인 거예요. 36번역할 하면 되고 4번역할 하면 되고 7번역할, 시집 못하는 역할하면 되고, 시집가면 시집가서 두 번 가면 두 번 가는 역할 하면 되고,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옆에 보고 ‘쟤는요?’ 하거든요. 쟤가 부럽다는 뜻이거든요. 그렇다면 니가 원치 않는 길이 의미가 없다고요. 내가 올 때까지 있다 할지라도 니는 거기에 관심 끊어라. 이 말이거든요. 이 말은 모든 것이 주의 일이 돼야 되지, 독자적인 ‘요것은 나의 일, 요한아 니 일은?’ 이렇게 비교대상 할 게 못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70년이라 하는 것은 요렇게 함으로서 아파트 건설 작정이 있었고 그 건설 작정에 베드로가 시멘트 메고 3층까지 올라가고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다니엘 세 친구도 나름대로 삽 들고 섞고 있고 각자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뭔가 들고 하고 있는데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루하루 사는 것이 주께서 삽질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걸 하면서 뭘 느낍니까? 우리는 뭘 해도 죄고 그리고 우리가 죄인 이유가 우리는 짐승을 이겨내지 못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붙여놨다는 것은 이렇게 붙여놓고 주께서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니가 이미 짐승을 이겼다. 짐승을 짐승이라고 파악한다는 것은 이미 니는 짐승의 권세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의미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봐야 될 것은 230페이지 봅시다. 그러면 이 70년이라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데 우선 공간은 나중에 하고 시간부터 이야기할게요. 70년이라는 이것이 죄가 짐승으로 나눈다면 이것이 실제로는 70년이 아니고 기존 자체가 짐승의 나라니까, 이것이 70이레로 바뀝니다. 70년이라 하는 것은 1년, 2년, 3년, 4년, 제가 환갑 됐다고 권사님이 이쁜 옷을 하나 선물해 줬어요. 그런데 다음에 이 옷을 받으려면 내가 60년을 더 기다려야 돼요. 그렇잖아요. 120살 때 요거 하나 더 받아요. 내년 6월 달에 이거 못 받아요. 왜, 60년이 안 찼기 때문에. 그러면 이 선물은 60년 단위로 주는 거잖아요.
그러면 주님은 몇 년 단위로 주시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몇 년 단위로 주는 겁니까? 이게 70년 단위로 주면 안 돼요. 이게 70이레로, 새로운 의미가 주어지게 되면 1년, 2년, 요런 계산으로서의 이레는 아니에요. 이게 1년 연자로 계산해 버리면 지구가 태양 도는 계산으로 해버리면 70☓7=490년 돼요. 그러면 그 차원이 1년, 2년 차원에서 못 벗어나요. 이거 못 벗어나면 인간은 짐승의 존재의 의미가 없어요. 맨 우리는 기존의 시간 속에 갇혀 있어서 구원 못 받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지금의 장로교, 여호와증인, 세대주의, 개혁주의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70이레 계산을 전부다 모든 학자들이 요 계산을 해요. 한번 미리 볼까요? 236페이지 봅시다. 요한계시록 해석법 끝나고 나서 다과회 하면서 우리 교인 집사님이 떡으로 케이크도 가져오고 생일축가도 불러줬어요. 그런데 떡은 저희들이 다 먹어버리고 그런데 내가 일부러 성의 있게 했는데 내가 인사말을 안 할 수가 없어서 했어요. ‘지금까지 제가 이렇게 된 것은 다 여러분 덕분인 줄 안다고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죠?’ 사실은 이건 그냥 기억으로만, 추억으로만 남기라고 했어요. 다른 사람도 다 하잖아요. 하필 나만 의미 있게 한다는 그 자체가 상당히 이상스러웠어요.
여기에 70이레 보면 236페이지 보면 최 만수 나오죠. 그 다음에 칼빈, 칼빈 들어본 적 있습니까? 카일, 류폴드, 몽고메리, 포르튀우스, 헹스텐베르그, 하젤, 영, 최영헌, 간하배, 이희락, 전부 다 이런 식으로 계산하는 거예요. 소위 정통, 보수 진리, 이런 사람들이 이러했다면 여호와증인들이 왜 이런 계산하는 게 왜 문제가 돼요? 여호와증인뿐입니까? 제 7 안식일, 전부 다 그런데 이 계산해 버리면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적인 시간 개념으로 그걸 사람들이 따지게 되는 거예요. 그럼 맨날 바뀌어요. 1992년 10월 28일에 이 장림이 이 계산했잖아요. 조 용기, 전부 다. 완전히 들통 다 났어요. 그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 시간 계산을 믿는 사람 이예요. 시간 계산을 잘 해놓으면 자기가 안자고 있는 사이에 주께서 오실 줄 알고, ‘깨어라’ 하니까, 도적같이 오신다니까 아예 이쑤시개로 눈썹에다 올려놓죠. 참, 기가 찰 이야깁니다.
예수 피를 믿으라고 그렇게 했건만 그들이 믿는 것은 자기가 만든 시간 계산을 믿고 있어요. 예수 피를 믿는 게 아니고. 그 계산력에 대해서는 자기가 ‘하나님 제 계산력만큼은 알아주세요.’ 마작 합니까? 여러분, 마작 알아요? 숫자 맞추기 하는 것, 포카 브릿치해요? 야, 7번이 빠졌네. 이런 거. 그래서 신학자들이 70이레를 구약의 늪이라고 생각해요. 한번 빠지면 못 헤어나오는, 나중에는 난감해진다고 겁을 집어먹고 있어요.
이 70년을 70이레로 넣을 수 있잖아요. 이건 70년 동안 포로 잡힌 것은 맞아요. 맞는데 70이레로 바뀐 때는 '년‘이 ’이레‘로 바뀌는 것은 이미 외부 환경이 우리가 아는 역사적, 공간적 그런 개념의 외부 환경이 아니고 짐승이라는 묵시적인 활동성이 지금 하나의 도배지처럼, 새 아파트 도배하잖아요. 새로운 도배지 안에서 70이레라는 의미로 확대될 때 비로소 메시아가 요 확대를 유발하시면서 일종의 빵빠래죠. 빵빠라빠빠~ 하면서 새로운 우리가 예상 못한 다른 시간 차원이 주어지면서 덩달아 메시아가 그때 등장하게 되면 그때 우리 눈에 없다고 여겨졌던, 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짐승이 비로소 정체가 보여 지는데 그 짐승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철떡 같이 섬깁니다. 사도 바울도 어떠했습니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그러니까 이게 짐승인지 악마인지 진짜 아는 기준은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모르면 그건 이유를 막론하고 얼마나 경건스러우냐. 얼마나 인품이 고상하냐를 막론하고 무조건 마귀에요. 무조건 마귀입니다. 마귀냐 아니냐 하는 것은 십자가로 결정하는 거예요. 왜 그건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인간의 신학으로서는 파악될 수 없는 하나님의 숨겨놓은 지혜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 앞에 보게 되면 우리는 처음부터 뭐다? 죄인이었다. 우리 죄인에서 난 모든 아이디어도 죄인인 겁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소경 된 자보고 뭐라 합니까? ‘저 소경이 소경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자기 부모 죄 때문입니까?’라고 멘트를 그렇게 날리는 그자체가 뭡니까?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멘트 안 날리고 입 다물고 있으면 그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아버지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 외에는 아버지 아는 자가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나머지는 그냥 죄인 이예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 행세를 냄새를 푹푹 온 천지에 풍기고 있는 겁니다. 자기 장모도 살리고 물 위까지 걸어줬던 베드로가 예수님 만낙 뭐라 했습니까? ‘나 저 사람 모른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삼 세 판이나. 한 번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닭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닭에 대일밴드 붙여놨으면 계속 베드로 입에서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하다가 어떤 사람이 닭 입에서 반창고 떼면 베드로가 ‘아이고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울 거예요.
어쩌면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나는 주님 모릅니다.’ 소리. 항상 닭 키우지 않더라도 주께서는 항상 아예 닭을 우리 집에 집어넣죠. 모른다. 할 때마다 ‘꼬기요.’ 울게 만들죠. 그걸 말씀에 의한 각성이라 그러는 거예요. 말씀은 항상 우리가 원하나 원치 않으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동할 때마다 닭이 울듯이 말씀이 울어요. 항상 휴대폰 소리만 울리는 게 아니고 항상 말씀도 같이 울려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전화 받아야 돼요. 울려서 보게 되면 ‘까불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항상 우리는 이렇게 통화료도 한 푼 안 내고 만날 하늘의 스마트폰을 항상 갖고 있어서 주께서 메시지를 보냅니다. 우리를 너무 잘 아니까. 그것을 다니엘은 자기 생애 가운데서 온 몸으로 받고 있다는 거죠.
230페이지 봅시다. 제일 밑에『이렇게 되면 70년 포로기간은 다시 역사적으로 유지되는 유대 나라와 연결되는 기간이 아니라 역사에서 비역사적 나라로 이전을 통해서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관성을 비로소 밝히 보여줄 수 있다는 사태와 관련된 기간이 되는 것이다.』여기서 보면 역사적이 아니라 비역사적 나라이기 때문에 역사 속에 비역사인 나라가 손에 잡힙니까? 안 잡힙니까? 잡힐 수가 없죠. 왜냐 하면 잡으려는 자체가 역사적 존재기 때문에 손에 잡힌 것은 무조건 비역사고 역사는 다 변하고 말아요.
옛날에 어느 나라에 임금이 있었는데 공주가 웃지를 안 해요. 그래서 임금이 현상공모를 했어요. 우리 공주를 웃게 하면 사위 삼아서 차기 임금 되게 해주겠다. 온갖 코미디, 개그맨, 다 동원됐거든요. 그래도 웃지를 안 해요. 그런데 우연히 어떤 애가 오리를 들고 가는데 사람들이 오리를 만지니까 황금으로 변해버리네. 그걸 보고 베란다 있던 공주가 웃었거든요. 지금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서 들으세요.ㅎ 그러니까 사위 됐거든요.
그래서 만지기만 하면 뭐가 된다? 금이 되든지 아니면 붙든지. 지금 이야기가 혼선돼서 알아서 들으세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이 뭘 하나님이 역사해도 내가 일단 소유화 시켜버리면 이게 비역사가 아니고 나의 역사가 돼 버려요. 야, 난 이런 일로 은혜 받았다. 나는 응답 받았다. 나는 이런 신앙적인 효과 봤다. 이러면 주님의 모습이 아니고 돌부처가 돼요. 하나의 우상이 된다니까요. 그래서 그걸 잊을 수가 없어서 어디가도 그 자랑하거든요. 이게 간증집회 아닙니까? 간증집회.
맨날 장로들은 처음에 자기가 예배당 지을 때 손수 벽돌 나르고 자기 집도 전세로 바꾸고 나머지 돈 가지고 여기다 투자했다는 이야기, 이게 뭐냐 젊은 놈들아 돈 좀 내라. 그 이야기죠. 그래서 얻는 것이 주일 낮에 대표기도 하는 거 하나 얻어서 …… 그리고 나라와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라니까 국가를 위해서 남북통일까지 다 아는 시사 다 끌어들여서…… 그게 역사라니까요. 그게 누구 역사? 자기 역사거든요. 자기 역사를 환등기로 비추니까 세상은 그래야만 되고 그럴 경우에만 예수를 사랑의 예수로 믿을 용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거 자체가 짐승이 되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생각했던 사고방식이 어디서 나온 거예요? 이게 로마에 갇혀 있잖아요. 로마에 갇혀 있으니까 구약을 맨날 연구하는 거예요. 구약에 포로 잡혀 간 상태가 어떻습니까? 어느 나라에도 지배 받지 않은 상태죠. 그러면 그들이 원했던 것은 로마에 압제돼 있잖아요. 로마는 짐승이라면 짐승에서 벗어난 상태는 어떤 상태입니까? 다윗이 다시 와서 옛날 다윗 시대처럼 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제사장 나라 되는 그것만 기도하면서 지금도 예루살렘 서편에서 이리 앞뒤로 흔들어 가면서 모자 하나 쓰고 군대 복무도 안 하고 맨날 나라 세금 축내면서 이 짓만 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 사람들을 싫어해요. 정통파 유대인들! 안식일 날 되면 다큐멘터리 보면 나팔을 불어서 온 동네방네 하고 금요일 저녁 때 혹시 안식일에 어긋나는 거 파나 조사하고 이럽니다. 그러면 일반 사람들은 ‘어, 장사 좀 하자.’ 이렇게 해요. 코샤라 해서 율법에 어긋나지 않은 음식을 호텔가면 유대인들이 음식을 따로 팔아요. 그게 무슨 짓입니까? 그것이 짐승 이예요. 그렇게 경건스럽고 그렇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자기 완벽을 추구하고 남한테 해 끼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철저한 자기 관리하는 그것이 무슨 모습이다? 그게 짐승의 모습 이예요.
지금 그것을 그대로 한국교회가 교인들에게 그걸 숙달시키고 훈련시킵니다. 왜, 인간의 윤리는 반복된 학습에 의해서 되거든요. 반복된 학습이 몸에 익히게 되면 이게 자동적으로 나와요. 처음에는 힘들지만 너무나 학습을 많이 받게 되면 자동적으로 일어나요. 여러분들이 한 기도 하는 사람들 보세요. 치면 막 나와요. 안 말리면 두 시간씩 합니다. 사실은 그 이야기를 우리 교회나 여러분한테는 할 입장이 못 돼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해왔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교회 교인들 다 한 기도씩 했던 사람들 이예요. 지금은 기도하라 하면 다 도망가고 없어요. 그렇게 기도 유창하게 하던 분들이 기도하라 하면 생중계돼서 안 합니다. 방언들 했던 사람들 이예요. 한 방언 한 사람들 이예요. 방언은 바로 그것이 방언이 아니다, 하는 것이 방언 이예요.
방언은 뭐냐 하면 방언의 내용은 안에 복음적 내용이 있으면 이게 방언 이예요. 이사야에 나오는 방언에는 신약에 완성이 되지만 성령께서 알려주는 내용이 있으면 그걸 방언이라 하고 성령이 알려주지 않는 것은 방언이 아니라는 거죠. 초창기에 있는 모든 말씀은 통역이 없으면 이해가 안 돼서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 통역이 있어야 되고 나중에는 방언도 그치고 통역도 그치고 바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바로 역사하는 거예요. 사도들이 아직 살아 있을 경우에는 계시가 확정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고린도전서에 보면 방언도 폐하고 예언도 폐하죠. 그거 전까지 과도기적으로 있는 거예요. 아직까지 계시가 있어야 되니까.
방언이라 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이 담겨있어야 돼요. 복음의 내용을 이야기하면 통역 안 해주면 못 알아들어요. 그게 무슨 뜻인데?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행위로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게 무슨 뜻인데? 그럼 교회서 헌금하는 것은? 그것으로는 구원 안 된다. 그게 무슨 뜻인데? 십일조가 예수님이 십일조다. 10분의 1을 내야 십일조지, 예수님 자체가 십일조다. 이게 무슨 뜻인데? 이러는 거예요. 그게 히브리서 7장에 나오는데. 그 뜻을 모른다니까요.
그걸 사도행전 2장에서는 뭐냐, 젊은 사람은 꿈을 꾸죠. 꿈을 꾼다는 말은 성령이 이 땅의 역사 속에 없는 비 역사 속에 있던 묵시 적에 있던 내용을 역사 속에 집어넣을 때는 역사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그걸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미쳤어, 미쳤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미쳤다 소리 듣거든 그걸 기뻐하라 이 말이죠. 미쳤다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주 예수만 믿기만 해도 구원을 받는다는 이런 소리를 해요. 어떤 행함도 없이 예수만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거예요. 이거는 미쳤어요. 완전히 미쳤어요. 어떻게 외부인이 나의 구원을 성사시킵니까? 내가 주물럭대든지 내가 나한테 뭐를 하든지 내가 뭔가 노력을 하든지, 착하게 살든지,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고 내 구원은 내가 책임져야 되는 이게 보편적 상식인데 어떻게 아무 관리도 안 하고 내가 손 뗐는데도 불구하고 내 외부인이 어떻게 구원해요?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그런데 그 외부인이 주님이라는 거예요. 그거 가지고 예수 믿는다는 거예요. ‘믿습니다.‘가 믿음이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분이 나를 구원한다는 그것을 믿음이라 하거든요. 왜냐 하면 기존의 믿음은 기존의 믿음을 차고 들어오기 때문에. 주의 주신 선물로 구원 받는다. 이게 믿음이거든요. 아까 언약적인 파이프. 그것이 꽂혔을 때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움직이는 것도 성령의 행동이다.‘ 그 자체를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빌립 집사가 여기 있으나 내시 만나러 가나 자기가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빌립 집사가 시계 차서 ’4시쯤 올 때 됐는데.‘ 이런 거 없어요. 4시고 3시고 안 와요. 주께서 그냥 ’가라‘ 하니까 가보니까 누가 왔고 오니까 마침 이사야 53장 펴놓고 해석해 달라 해서 해석해 줬고 도대체 이 세상이 내 맘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누구 맘대로? 주님 맘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다니엘도 경험했고 초대교회 교인들도 경험하고 지금은 우리 차례에요. 우리가 매일같이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왜 고백 못하느냐, 너무나 우리는 자기가 자기 관리하는데 너무나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은 기도 몇 시간 하고 성경 몇 장 읽고 너무나 훈련됐기 때문에 이것을 주의 일이라고 이렇게 잡다 보니까 고 사이사이에 개입되는 주의 일을 마치 놓치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열심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안 될 때, 꼬일 때, 하나님 앞에 데모할 때, 비로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다 카운터에 집어넣지 않은, 세지도 않았는데 이미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동안 주께서 우리를 지금까지 일을 일으켜왔다는 거예요. 언약궤가 블레셋을 자동적으로 쳐서 그냥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언약궤가 자동적으로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왔듯이 주께서 지금 우리를 혼자서 다 처리하시고, 효과는 우리의 구원이라는 영생 얻는다는 효과로 그냥 매일같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70이레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그전에 먼저 우리가 역사적으로 살면서 묵시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 놓치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그 자체가 주님의 활동이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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