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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40강-롬7장 18-25(죄의 법 아래로)130630-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로마서

40강-롬7장 18-25(죄의 법 아래로)130630-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83.105.212.7)

40강-롬7장 18-25(죄의 법 아래로)1306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7장 18절에서 25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8페이지입니다.

로마서 7:18-25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교회 가면 하나님 믿으라고 이야기하지요. 하나님 믿으면 구원받고 안 믿으면 구원 못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전부 다 내가 예수, 혹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반대말이 뭐냐 할 때 “나는 예수 안 믿겠습니다.” 혹은 “나는 하나님을 못 믿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다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정작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 믿음이란 믿는다, 혹은 안 믿는다, 이것이 아니고 율법과 네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 율법에게 찾아가 보라는 겁니다. 율법과 먼저 만나야 돼요.

‘믿어볼까? 안 믿어? 에이, 필요 없다. 안 믿는다.’ 믿는다, 안 믿는다,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이 믿음은 성경에서 나오는 믿음과 상관없습니다. 성경에서는 구원을 언급하면서 율법, 이 하나님이 주신 법 앞에 우리를 세우게 되는 겁니다. 세우게 되면 우리는 뭘 알 수 있느냐, 이 법을 내가 지킬 수 있는가, 못 지키는가, 그 문제로 상황이 진전되지요. 교회 가면 항상 하나님 믿으라, 예수 믿으라, 믿으라, 믿으라, 하고 ‘믿습니다.’ 하고 손들고 나오면 구원 받았다고 하니 믿을까 말까, 믿을까 말까, 이것만 생각하다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느냐, 못 지키느냐, 그 문제로 깊숙이 들어가게 되지요.

그런데 이미 율법을 줄때는 결론이 났습니다. 우리가 괜히 심각하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요. 뭐냐, 율법은 못 지키는 것으로, 어떤 인간도 율법을 못 지키는 것으로 이미 결론이 났습니다. 이미 결론이 났기에 인생 살면서 제발 심각하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디오나 TV에 나와서 상담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지 심각해요. 남편이 술 먹고 나를 팬다는 거예요. 아주 심각한 문제인 거예요. 경찰이 동원되어 와도 아무 해결책이 없다, 굉장히 심각한데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게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사탄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다른 교회는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면 “할렐루야, 아멘!” 하겠지만. 이 세상에 심각한 문제가 없거든요. 왜냐,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나한테는 심각한데 율법 앞에서는 심각할 자격도 없고 권리도 없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심각하지 않는데 네가 뭔데 심각한가?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심각하지 않은데 하나님도 아닌 네가 왜 심각하게 생각하느냐?”는 거지요. 모든 고민과 걱정은 심각한 게 따로 존재한다고 여기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는 이미 결론 났습니다. 율법은 어떤 인간도 그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없는 이유가 오늘 본문에 의하면, 나야 심각하게 율법 지켜서 의로운 의인 되어서 구원되고 싶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순진한 내 생각이고 나보다 더 센 것이 있어요. ‘순수하고 싶어. 나도 순수하게 살고 싶어.’ 그것은 네 생각이고 나는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는데 23절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나는 하나님의 법을 좋아해요.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십니까?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다.” 이러면 우리는 양심껏 살며 다 구원받아요.

그런데 내 양심도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만드는 힘이 내 속에 들어 앉아 있어요. 양심이라는 것, 양식이라는 것, 교양이라는 것, 순수함이라는 것, 그런 것들도 무용지물로 만드는, 사실은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은 아니고 내속에 있는 괴물이 나로 하여금 무용지물 되도록 놀려요. 웃기네, 하고 놀리고 있습니다. 자기 단속도 못하는 주제에 남의 일 신경 쓸 여력이 없지요. 자기문제도 해결 못하는 판국인데. 안에서 계속 끌고 있는데 밖에서 나는 착하다고 해 봐야 위선이 될 뿐이거든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율법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게임오버!” 라고 해서 끝났습니다. 이미 결론이 나 버렸고 더 이상 심각한 것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그 보상으로 복을 따내려는 수작은 부리지 말라, 이미 끝났고 못 지킵니다. 20절에 보면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이 상당히 어렵기에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뭐든지 이유가 있어서 행동한다,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러나 사람의 기본은 뭐든지 이유가 없어요.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한다.’ 이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싫어한다.’ 이게 무슨 이유가 있어요? 좋아하고 싫어한다는 것은 나는 저래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내 속에 있는 죄가 저 사람 싫어하게 만들면 싫어하는 것이고 좋아하게 만들면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니 나는 내 속에 어떤 괴물이 있는데 시키는 대로 좋아해, 하면 무조건 좋아해야 돼요. 남의 아내든 남편이든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좋은 것을 어떻게 합니까? 장 동건이가 좋은데, 내가 좋아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이유가 어찌되었건 싫어지는데 어떻게 해요. 사람의 모든 행동은 논리로서 하는 줄 압니까? 아닙니다. 자기 기분 따라 살아요. 회사에서 신입사원 뽑을 때 못생긴 사람은 시험 잘 쳐도 미워요. ‘토플 점수는 왜 이리 높은 거야?’ 이것은 시험을 잘 쳐도 밉고 예쁜 것은 시험 못 쳐도 합격시키고 싶고.

남자 눈에는 20대도 예쁜 것, 30대도 예쁜 것, 40대도 예쁜 것, 심지어 80이 되어도 예쁜 것을 찾아요. 이 본심을 가리기 위해서 핑계 달아봐도 그런 것은 다 떼면 껍데기에 불과한 거예요. 무조건 좋고 무조건 싫은 것은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어요. 같은 자식이라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룰 수 없는 다른 힘에 의해서 우리가 지금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누가? 이 육신이. 찬송가 228장 가사를 읽어볼게요. <저 좋은 낙원 이르니> 2절입니다.

이곳과 저곳 멀잖다 주 예수 건너 오셔서

내 손을 잡고 가는 것 내 평생 소원이로다

영화롭다 낙원이여 이 산위에서 보오니

먼 바다 건너 있는 집 예비하신 곳일세

주님께서 손을 잡고 거니는 모습을 이 찬송가 가사에 담아놓았지요. 봅시다. 주님께서 내 손을 잡고 내 손을 거닐 때에 우리가 뭘 했다고 이런 호사를 누립니까? 우리가 뭘 한게 있습니까? “화려하게 지은 집 영원한 내 집” 이 영원한 집의 설계도를 내가 만들었습니까? 설계사무소에 내가 찾아갔습니까? 2절 가사에 “내 손을 잡고” 주님이 내 손을 잡는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에요. 주님이 내 손을 잡는다는 말은 나는 주님의 들러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내가 천국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하고 선택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 손을 끌고 무조건 천국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 속에서 주님에게 손목 잡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이 땅에서 살면서 우리는 내가 판단해서 저 사람을 미워하고 내가 판단해서 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땡기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이 저 사람은 뭘 해도 예쁘고 저 사람은 뭘 해도 짜증나거든요. 나라는 육신이 어디에 휘말려 든 것 같아요. 기분이라는 것이 내가 판정하고 오늘은 이렇게 살겠다고 자기가 결정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 육신에 대해서 어떤 조치가 안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내 육신이 조치가 안 되는데 여러분은 조치가 되던가요? 안되지요? 안되거든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맡겨버리라.” 하는 거예요. 왜 맡겨야 되느냐, 우리 육신이 내가 조절하고 내가 절제하고 내가 처리하고 내가 판단 내려고 해 낼 수 없는 육신을 주께서 허락하신 이유가 우리가 천국에 가서 살 때도 내가 똑똑하거나 판단력이 뛰어나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죄에 휘둘리듯이 하나님의 의와 자비와 사랑에 무조건적으로 손목 잡혀 휘둘리기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도 심각한 것이 없고 하늘나라에도 심각한 것이 없는 거예요. 인간은 심각한 것이 없으면 자기가 또 만들어내는 버릇이 있어요. 희한한 버릇입니다. ‘이게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 이것은 나쁜 일인 것 같은데? 이것은 법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일인 것 같은데?’ 슬슬 심각한 것을 만들어내요. ‘분명히 하루 석장 읽기로 했는데 두 장 밖에 못 읽었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겠는가?’ 처음부터 그런 인간인데 뭘 또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라는 질문을 합니까?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처음부터 그런 인간인데 별 다른 인간이 있습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빨려 들어가게 되면 죄가 자기 정체를 가리고 죄는 문제 해결을 우리한테 떠넘깁니다. “네가 똑바로 하란 말이다. 네가 신앙생활을 똑바로 안 해서 그런 거야. 하나님의 법은 왜 있는데? 지키라고 있는 거잖아. 네가 법을 안 지켰으니까 네가 네 양심에 가책이 되는 거야. 그러니 똑바로 살아.”라고 죄는 빠져버립니다.

죄는 빠져버리고 똑바로 살게 된 나의 이상적인 모습이 나를 책망하게 되는 겁니다. 나의 허접스러운 현재 모습을 똑바로 살고 진짜 완벽하게 사는 내가, 지금 부족한 것이 많은 나를 계속해서 질책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겁니다. 여러분, 꼭 아셔야 할 것은 사람이 말씀에 대해서 뭔가 안다는 것은 무엇까지 포함하고 있느냐 하면 내가 거기에 대해서 어기고 잘못했을 때 반성할 수 있는 자질도 있다는 것도 포함해서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대해서 뭔가 알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하나님, 다시는 이런 짓 안하겠습니다.”가 나와요.

여러분, 다시는 이런 짓 안하겠습니다, 라는 말을 다시는 하지 마세요. 그것은 마귀한테 말려든 겁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다시는 이런 짓은 두 번 다시 안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본인은 아주 심각해집니다. 자기가 법을 위반한 것을 스스로 파악한 순간 어떻게 하든 그것을 개선해 보려고 그것을 바른 자리로 되돌리기 위해서 자학하는 식으로 자기를 못살게 굴면서 나름대로의 분투노력을 다 하게 되는 겁니다. 교회 몇 주 빠지면 그 다음에는 시어미에게 잘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자식도 미울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아, 내가 미운 감정을 가지면 안 되는데.’ 하면서 애와 외식을 한다든지. 그래야 자기 마음이 균형이 잡히고 선과 악이 조절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혼자 노는 시체놀이고 게임이에요. 그러면 마음이 편할까 싶어서 그러는데 그게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손잡고 지금도 이끄시는 이유는 죄를 감추려고 하지 말고 죄 있는 대로 다 긁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죄라는 죄는 다 나와야 돼요. 죄가 나오는데 그 죄의 극단적인 모습이 뭐냐,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서 내 관리에 들어가서 내 구원은 내가 쟁취하고 만다는 결론지점에 도달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복음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마귀의 최종적인 얼굴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잘 버텨왔지, 지금까지 내가 별 실수는 없었지, 지금까지 내가 한 것으로 구원 받는다는 식으로 하는데 이것은 로마서 7장의 전체 내용과 반대되는 이야기고 자기 스스로 계시를 자기 유리한 쪽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가 노력하게 되면 그 노력하는 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거기에 부합되는 법을 스스로 생산해 내요. 자기의 노력을 미화시키기 위해서 법을 계속 만드는데, 참 무서운 것이 그 법을 계속 만들 때 자기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남들도 같이 법을 만들거든요. 그러니 어떻게 되느냐하면 남의 신앙을 베껴서 내 신앙으로 하고 또 그 남의 신앙을 옆 사람이 베껴서 그대로 신앙인줄 알고 해요.

그래서 오늘날 이 모든 신앙생활이라는 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베낀 겁니다. 아닌 것 같습니까? 시험을 치는데 둘 다 모르는데 옆에 앉았어요. 40명 중에 39등과 40등이 옆 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서로의 것을 컨닝한다고 보고 있어요. 그래봤자 모르는데. 보려면 1등 시험지를 봐야지 40등이 39등의 시험지 봐서 또 39등이 40등의 시험지 봐서 뭐하겠어요? 다 기분 따라 찍은 건데 나올게 뭐가 있어요. 인간은 정답을 모릅니다. 그냥 죄만 드러내면 돼요. 아침 6시 30분에 음식쓰레기 차가 와요. 음식쓰레기만 통에 담으면 돼요.

그런데 거기에 리본 내놓고 장미꽃 한 송이 더 얹는 짓 하지 맙시다. 음식쓰레기만 수거하지 돈 봉투 넣는다고 그것 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봉투에다 돈 넣는다고 주님이 받습니까? 일 년 내내 주일성수 했다고 성적표 얹으면 주께서 그것 회수해 갑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만 가져가요, 죄만! 사실 그것도 죄지만. 주께서 뭘 받는지 그것도 몰라. 수십 년 교회 다니고 성경을 백독 만 독하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께서 회수해가는 것이 뭔지를 몰라요. 주께서 회수해 가는 것은 우리의 죄만 회수해 가는 거예요. 우리 의는 있을 수도 없고 우리 의는 받지도 않아요.

그것은 죄가 우리 오야붕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깡패 두목은 우리로 하여금 질식하게 만듭니다. 인생 자체를 질식하게, 숨을 못 쉬게 만들어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세상에서는 북한 핵이니 기름 값 문제니 수출이 어쩌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단어의 개념은 율법, 죄, 사망, 육신, 그리스도, 믿음, 이런 거예요. 이런 단어를 섞어서 새로운 현실 속의 우리 모습을 파악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안목이에요. 다시 이야기하니 기억나지요. 한 주만 지나면 다 잊어요.

건강보험공단에서 우리 어머니를 만나러 왔어요. 지난 목요일에 와서 어머니를 만났는데 너무 멀쩡하니까 보호자인줄 알았던 모양이에요. 앉혀놓고 물어요. “어르신네! 모자, 자동차, 나무, 따라해 보세요.” 기억이 다 안 나니까 하나하나 따라 하라고 하지요. “모자” “모자” “자동차” “자동차” “나무” “나무” 이렇게 해 놓고 “어르신, 나이가 얼마입니까?” 해요. “내가 칠십 얼마인가?” 그것은 이제 미끼이고 그렇게 해 놓고 “아까 이야기한 세 가지 기억하십니까?” 방금 이야기한지 10초쯤 지났을 때입니다. “나무, 자동차, 그 다음에 뭐더라?”

그렇게 딱 물으니까 나도 모르겠어요. “아, 모자!” 나중에 또 물어서 세 번을 묻는데 다 불합격했어요. 저하고 아내는 옆에서 우쌰, 하면서 좋다, 성공이다, 하고 있고. “어르신네, 뭐 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고 그냥 내 맘대로 막 돌아다닌다.” 속으로만 여러분이 한 번 따라해 보세요. ‘죄, 율법, 그리스도, 믿음’ 이러다가 그만 9시 뉴스보고 박근혜 중국 갔다 온 이야기 보는 동안 다 잊어버렸어요. 완전히 우리는 천국 갈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이 땅에서 영영 눌러 살 사람 같아요. 그런데 이 땅에서 기름 값과 물가가 오르든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도 심각할 것이 없는 거예요. 주께서 회수해가는 것은 오직 죄만 회수해가요. 우리 죄만 회수해 간다고요. 다른 것은 회수 안 해요.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반듯하게 살아야 하는데, 교인이 교인답게 살아야 하는데, 빛과 소금 역할……, 소금 값 올릴 일이 있습니까? 모든 성경 말씀은 지금 우리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 어머니보고 모자, 나무, 자동차, 이렇게 테스트 하는 것은 기억력이 얼마나 떨어졌는가를 알아보는 것인데 그렇게 지적하듯이 우리는 아무리 똑똑해서 서울대학을 나왔다 해도 사람이라는 것은 보편화되고 일반화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조건 좋아해요. 이게 법이든 법이 아니든 그것은 뒷전이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무조건 싫어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것은 내 조절의 능력의 한계선을 넘어서 버렸어요.

좋아해서는 안 될 사람을 좋아하는 이것이 법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좋아하는 것은 이미 좋아해 버린 거예요. 내가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이란 법은 싫다는 말은 이미 내 소관에서 벗어나 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경험, 체험을 주시는 것은 인간, 육신, 인생이라는 것은 주님이 관리하지 우리가 관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까 장로님 기도할 때 중요한 맥을 짚어줬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했기 때문에 창조된 우리로서는 우리를 관여할 수없는 입장입니다.

창세기 1장이 기본중의 기본이에요. 내 인생은 내가 관여하고 내가 인도하는 것이 아님이 창세기 1장에 이미 나오거든요. 찐빵에 앙꼬가 있듯이 그 앙꼬는 주님의 것으로 집어넣었다가 주님의 것으로 빠지는 겁니다. 내가 앙꼬를 쥐고 있으면서 가지 마세요, 라고 붙들 수 있는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죄가 시키는 대로 맘대로 살면 돼요. 죄라는 것이 칼 쥐고 설치는 이것이 죄가 아니라 사람이 같은 말을 해도 싫어해서 하면 톤이 다르고요 좋아서 하는 말은 톤이 다릅니다. 보통 연상연하가 결혼할 때 연상연하커플이 아닌 일반사람들이 보게 되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어린 남편이 나이 많은 아내보고 누나뻘 쯤 되니까 말을 높일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막상 둘이 이야기하는 것 보면 누가 연상인지 분간 안돼요. 그럴 때 우리는 문화적 충격을 받지요. 저럴 수가! 그런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사람에게는 그게 전혀 허물이 되지 않아요. 만약 나중에 그 둘 사이가 나빠지면 다 그것이 지적사항이 돼버려요. “네가 이래서 되겠느냐? 네가 법적으로 이러면 안 되지.” 이렇게 들어가는데 이미 좋은 사람에게는 법이고 뭐 고가 없어요. 모든 허물이 무너진다니까요. 그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법을 주는 것은 법을 주기 이전부터 우리는 이미 자기 맘대로 살아왔다는 것을 법으로 새삼스레 통보해 주는 겁니다.

마구잡이로 살아 왔는데 그 막사는 것이 내 뜻으로 막 사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다른 힘이 나로 하여금 막 굴리면서 우리는 지금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의미라는 것도 일부러 끄집어내면 있지만 핑계에 불과하고 사실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남은 것은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가, 하는 그 문제입니다. 그 문제는 간단하게 해서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개인에게 준 적이 없습니다. 구약에는 국가 단위로 이스라엘 나라에게만 준 거예요. 이스라엘 나라 통째로 구원이다, 그렇게 됩니다.

국가 단위로 주었던 이스라엘의 구원인데 이스라엘국가가 망하고 난 뒤부터는 개인적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알아야 돼요. 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만 되면 다 구원받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개인만 구원받아요. 같은 부부라도 한 사람은 잠을 자게 놔 두고 한 사람은 데려가는 식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조치가 달라져요. 오늘날 우리보기에는 개인적으로 구원을 주는 이것이 정당한 것 같고 국가적으로 줄때는 정답이 아닌 것 같은데 사실은 반대입니다.

어떻게 되는가, 국가적으로 구원을 줄때는 그 국가에 소속만 되면 돼요. 왜 하나님께서 국가적으로 구원을 해 줬는가, 거기에 왕이 있어요. 왕 하나 잘 만나서 백성들이 공짜로 구원받습니다. 이 원리가 신약 때도 변하지 않아요. 우리 예수님이 기름 부은 왕이십니다. 메시아가 기름 부었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의 영원한 왕 중의 왕으로 계신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입니다, 라는 순간 구약 때 실패한 것이 신약 때 하나님께서 성사케 한다는 감으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개인을 고집해 버리면 해답이 없어요.

‘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실패했는데 오늘날 우리는 개인적으로 성공하는구나.’라고 되면 그것은 해답이 아닙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보면 스핑크스가 나오는데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라는 사람을 붙들고 수수께끼를 냅니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낮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그것이 뭘까? 만약에 네가 못 알아맞히면 너는 나에게 잡아먹힌다.” 이 정답을 유치원 애들도 알지요. 정답은 사람입니다. 어릴 때는 네 발로 기다가 성인 되어서는 두 발로 걷다가 나중에 노인이 되면 지팡이 짚고 세발이다. 그래서 스핑크스라는 괴물은 인간의 지혜를 시험했다 하지요.

그런 정답 같은 것이 죄가 되는 이유가 그게 정답이 되어 있잖아요. 아주 오묘하고 깊은 어떤 이야기를 끄집어냈을 때, “아침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엔 세 발, 정답은?” “사람” 딩동댕! 이렇게 정답이 나와요. 인간들은 이렇게 어떤 확정적인 정답을 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확정된 정답을 주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개인적으로 정답을 알 수 있는 어떤 권한과 자격이 애초부터 허락된 적이 없어요. 정답은 누구만 아시면 되는가? 정답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만 알고 있으면 돼요. 왜, 그분은 우리의 왕이기에.

진도가 너무 빨라서 정리해 봅시다. 구약에서는 국가라는 집단으로서 구원을 다 받습니다. 개인적인 자질을 묻지를 않아요. 다윗왕의 복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 원리가 신약에도 변하지 않아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 로마서 1장 3절의 말씀인데 벌써 잊었지요? 로마서 1장 3절에 다윗의 자손으로서 왕으로 오신 분이 등장했습니다. 동방박사는 그 분에게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왕이신 그 분에게 바쳤습니다. 왕이 왕만 달랑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때는 왕이 통치 원리를 휘감고 오셨어요. 그분이 왕으로 오셨다는 말은 우리 자신이 나 자신에 대해서 왕이 될 하등의 이유는 없다는 겁니다.

본문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벌써 우리는 개인적으로 사망의 몸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심각한 것이 없어요.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바꾸어 말하면 “우리 왕”이라는 겁니다. “우리 임금님, 우리 왕,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 순간 우리는 구약의 원리 속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왕이 하나님과 상대해서 모든 언약을 이루면 그 왕을 왕으로 인정하는 모든 소속된 백성들은 덩달아 왕이 계시는 그 나라에 합류가 되게 되어 있어요. 왕이 왕다운 티를 내야 되기에. “너 같은 백성을 위해서 내가 죽었단 말이다.” 라는 관련성이 있어줘야 돼요.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처럼 주님이 거미라면 우리는 그 거미줄에 묶인 사람이 돼요. 그 거미줄에 같이 묶인 주님의 포로가 되는 겁니다. 왕과 전리품과의 관계, 그 관계에 있어서 구약의 이스라엘 국가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개인이 아니고 하나의 국가로서 설치기에 이 이스라엘의 적은 개인이 아니고 하나의 다른 국가가 돼요. 저쪽 국가와 이쪽 국가 사이에 누가 이기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속한 이스라엘이 이기지요. 저쪽은 왜 못 이기는가? 저쪽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에 진거예요. 그러면 저쪽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개인적으로 구원받는다, 하는데 그것은 자기 생각이고 성경에 보면 저쪽 사람들은 저쪽 사람들의 분위기에 편승해서 서로가 서로를 베껴서 종교생활 하는 사람들끼리 모인 거예요.

너 잘한 것 내가 베끼고 내 것도 네가 베껴서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면서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교회고 이것이 참된 기독교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보게 되면 전부 다 이것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2천년 역사동안 베낀 것 또 베끼고 그것을 다시 베껴서 너덜해질 정도로 베낀 것을 지금 써먹을 수 있는 것만 골라서 교회의 전통과 관점으로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 안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게 되는 겁니다. 찬송가 부르면서 박수칠 때 어떻게 치면 은혜로운 겁니까? 해병대처럼 위에서 밑으로 내려치는 것이 은혜로운 겁니까?

기도원에 가서 보면 옆 사람 보고 따라하면 되지요. 부흥사 하는 대로 따라하면 되고요. 이 세상 윤리와 도덕이라 하는 것은 다 교육의 효과입니다. 반복되는 학습이 나중에 덕이 돼요. 덕이라 하고 윤리와 도덕이라 하고 그것을 착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뜯어보면 다 훈련받은 거예요. 강아지도 훈련시키면 착한 개가 되는 거예요.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인간도 자기의 죄를 가리는 것은 훈련과 노력과 교육에 의해서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고르기아스라는 유명한 그리스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은 특출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교육 시키는 정도에 따라서 그 사람이 쓸모 있는 인간으로 달라진다.”

회사도 교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과 훈련의 성과에 따라서 그 사람 얼마든지 인간 만듭니다. 아무리 엇나가던 젊은 장정들도 논산훈련소 들어갈 때부터 기 팍 죽어서 들어가면 유격훈련 받는 동안 참 사나이로 만들어버리죠. 군에 가면 나이도 없고 오직 계급만 있잖아요. 제대할 때 미안하다, 그 소리로 다 끝나고. 그건 인간이 아니고 그냥 전쟁하는 도구고 기계에 불과하거든요. 인간이 왜 그렇게 망가진 거예요? 유격장에서 빨간 모자만 깊숙하게 눌러쓰게 되면 아저씨가 오든 형님이 오든 관계없이 “똑바로 해! 마지막 구호는 붙이지 않는다! 여러분, 교관 말이 우습습니까?” “아닙니다.” “하찮아 보입니까?” “아닙니다!”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런 식으로 윽박지르면 기 팍 죽어 있지요.

강아지도 그렇게 훈련시킬 수 있어요. 이 세상은 전부 다 강아지, 똥개 훈련시키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훈련시켜서 효과 봤거든요. 봤으니까 이것 베끼고 저것 베껴서 그것이 법이 되고 그 법이 오늘날 세상 현실을 유지하는 세상 법이 되고 국가법이 되는 거예요. 천국은 전혀 그 법에 개의치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얼마나 교육을 잘 받아서 “오늘 밤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렇게 되었습니까? 구원받는 데는 교육이 필요가 없어요. 그냥 주님께서 손목 잡아당기면 가는 거예요.

본인이 원치 않아도, 본인이 선택하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선택하면 그것으로 끝난 거예요. 인간의 말은 헛방이지만 주님의 말은 그 자체가 액션이고 행위입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이 덮쳐버리면 우리는 그 말씀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의 말처럼 빈 깡통 같은 빈말이 아니에요. 본문대로 “네 속에 죄 있어.” 하면 무조건 죄 있는 거예요. “너는 따져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네 기분 따라 행동하는 거야.” 하면 기분 따라 행동하는 것이 맞아요. “너는 백날 뭐 해도 죽을 때는 결국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어.” 사망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율법을 주시면서 같이 투입된 것이 뭐냐, 이 율법을 준 것은 율법 앞에서 인간의 모든 집단과 국가는 구원이 될 수 없고 제대로 된 메시아, 제대로 된 왕이 와야 된다는 겁니다. 어줍잖게 다윗이고 솔로몬이고 다 안 되는 거예요. 나름대로 괜찮다 싶지만,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다윗도 결국 마귀에게 넘어갔잖아요. 그래서 인구조사 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죄는 10년 20년 동안 우리가 그럴싸하게 신앙인인척 하지만 주님은 그런 것은 안 받고 아침 6시 반만 되면 음식쓰레기통 회수하듯 우리 죄만 그냥 회수해 가는 겁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만나게 되지요. 엊그제도 만났어요. 남성합창단 공연 가보면 주로 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잖아요. 교인들 총 동원 다 한 거 같아요. 교인들은 논산훈련소같이 교육을 시켜놔서 잘 돌아가는데 개인적으로 감정을 조사해보면 죄 아닌 것이 어디 있겠어요? 교회라는 껍데기를 심하게 벗겨버리면 목사는 목회한다는 그것이 자기 신앙생활을 대체하고 있어요. 바빠요, 바빠. 대 심방에 새벽기도회 인도한다고 바쁘지요. 그렇게 바쁜데 전혀 신앙생활 아니거든요. 그런데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굉장히 교회 일에 바삐요. 교회 스케줄이 교인들을 가만 안 놔두고 막 돌립니다. 월화수목금토일, 직장도 없는 아줌마들 할 일도 없겠다 마구 돌리는데 일주일 내내 교회생활은 하는데 그게 신앙생활은 전혀 아니거든요. 신앙생활의 대체물로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생활을 확 벗겨버려야 돼요.

확 벗겨버리면 결국 교회 다니면서도 호감 가는 교인들이 있고 눈에 보이면 그저 심술을 부리고 싶은 교인도 있어요. 지금 이런 소리 하면 어른거리는 얼굴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바로 뭐냐, 매일같이 아침 여섯시 반 되면 주님께서 회수해야 될 음식쓰레기입니다. 살면 살수록 자꾸 나와요. 맨 날 도둑놈이 다 가져갔다고 하는데 찾아보면 다 나오거든요. 맨 날 도둑놈이 다 가져갔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데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싫어하는 것이 또 생겨요. 아침에 눈만 뜨면 스스로 바보 같아요. 스스로 심각한 문제를 내가 만들어요. 만들어놓고 그 문제를 자기 딴엔 해결한답시고 양심에 합당한 법적인 일을 자기가 또 해요.

그것을 해서 자기가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그래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말릴 수는 없고요. 그냥 그렇게 사세요. 맨 날 법 만들고 지켰다고 좋아하다가 깨지고 원망하고 나중에 성령이 오게 되면 ‘주여, 이게 또 하나의 시체놀이였습니다.’ 하고 발견하고, 맨 날 그거 반복하는데 이런 반복하는 가운데서 감사한 것은 개인적인 노력과 열성으로 구원되지 않는다는 사실, 어디에 근거해서, 구약 이스라엘에 근거해서, 구약 이스라엘은 왕이나 선지자나 메시아에 의해서 법을 받듯이 주님께서 손목잡고 천국을 거닐 때 이 땅에 살면서도 우리는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할 수 없었고 죽어서도 하늘나라에서는 주의 처분에 의해서 구원받은 것은 애초부터, 장로님 기도한 내용대로 애초부터 우리는 내가 나를 관리할 입장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날 다독거려서 대단한 사람 되는 것, 이런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분명히 제가 언급했습니다만 돌아서면 또 자기생각 하거든요. 대전에서 대구 오는데 대전역에서 이런 멘트가 들려요. “김 소영씨는 분실물 센터에서 지갑 찾아가세요.” 그 소리 듣고 제가 느낀 것이 인간은 자유롭게 살고 싶어도 자기 지갑한테 매여서 사는 존재라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리 누가 교회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내 것은 내가 챙긴다는 그것이 일상화된 겁니다. 만약에 “김 소영씨 지갑 찾아가세요.” 했는데 김 소영 씨가 “이미 한 번 내 손 떠난 것이니 이젠 내 것 아니다.”할 대범한 김 소영씨는 우리나라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 아까운 것, 하고 후다닥 찾아가잖아요.

아무리 인간이 주님, 하나님, 하지만 역시 나는 내 것에만 집착해서 매여 사는 것, 이것이 아침마다 음식쓰레기통, 주님 십자가 앞에 내놓아야 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을 이미 사도바울은 익히 알고 “주여, 이 같은 나를 구원할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 밖에 없다.”는 복음을 외쳤던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과 세상을 제대로 알게 하여 주옵소서. 나름대로 반성하고 회개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수작인 것을, 그냥 나밖에 모르는 본성대로 살아가면서 말씀이 이야기한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구세주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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