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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06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4-삼신론자유게시판[신학]

201306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4-삼신론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6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4-삼신론

(강의:이근호 목사)

필론은 25페이지에 보면, [헬라철학과 유대교라는 양대 사상을 연결하려 했다.] 헬라철학과 유대교가 다릅니다. 다르면 다른 데로 둘을 떼어놓으면 되는데 그걸 왜 연결시키려고 했는가? 헬라철학을 유대교에 연결시키는가, 아니면 유대교를 헬라철학에 연결시키는가? 그런 문제가 있는데 필론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헬라철학과 유대교 사상은 동일한 진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예를 들어서 지리산이 있다면, 남원 쪽에서 지리산과 무주에서 본 지리산과 같은 지리산을 보면서도 형체가 다르겠지요. 덩치가 크니까. 인간은 진리에 대해서 다 모르지만 헬라철학도 지리산이고, 유대교도 지리산이고. 그리고 그게 전부가 되니까 이 둘을 합쳐보자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유대교에서 온 것이, ‘신은 인격적이다’ 이것 하나 가져왔고, 유대교에 없는 것을 헬라철학에서 가져온 것이 로고스라는 걸 가져왔어요. 로고스라 하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 변화에 가담한 질서, 원리입니다. 신은 점잖은 분으로 부동자니까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에게서 나온 로고스라는 것이 세상을 관장하게 되면 그 로고스가 자연세계와 신과 연합시키는 중간 지점의 역할을 하게 되지요.

신은 인격적이라는 것은 헬라철학에는 없던 것이죠. 이게 좀 난해한데요. 왜 헬라철학에서는 신이 인격적이지 않을까요? ‘인격적’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적이죠. 인간적이 되면 신은 단일신, 다신교 말고. 다신교는 인격적이죠. 인간이 너무 다양한 거예요. 성질 급한 사람이 있고, 조용한 사람도 있으니까. 그러면 이게 하나로 모아지지 않아요.

하나 되기 위해서는 인격마저 초월하신 높은 분, 인격이란 말도 붙이지 못할 정도로 그걸 넘어서서 계신 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게 인격을 제공할지언정 스스로는 그 인격조차 파악이 안 되는 분으로서 신이 돼야 되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인간이 늘 흔들리는, 아침에 성질났다가 오후에는 풀리는 이런 변화마저 잠재울 수 있는 신이 되려면, 신이 화냈다 웃었다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기분 좋을 때 신에게 바치면 잘 되고 기분 나쁘다면 제사도 안 받고 하면 상당히 난처한 입장이 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인격적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유대교는 인격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결합을 한 겁니다. 그러면 유대교가 왜 신은 인격적이어야 하는가? 왜 인격적이죠? 유대교가 하나님을 사람처럼 어떤 성품이 갖추어진 분으로 했다는 게 어디 나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인데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느냐 하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너무나 인격적이에요. 원망하면 원망했다고 나무라고, 화내면 화냈다고 나무라고, 감사하면 기쁘다고 흔쾌히 제사를 흠향하시고. 헬라신은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이성적이기 때문에.

유대신은 인간과 인간의 정을 나누는 것 같이 다정스럽게 그런 관계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격적일 수밖에 없는 거죠. 이렇게 인격적인 하나님에 로고스를 집어넣으니까 나중에 나온 게 바로 기독교의 신론이 되는 거예요. 이쪽에 없는 걸 넣고 이쪽에 빠진 걸 채워 넣으니까. 이 로고스를 나중에 성자 하나님, 예수그리스도로 전환시키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가까이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필론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예수그리스도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신중심의 기독교가 시작되는 거예요. 신은 기독교다. 거기다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넣으려다보니까 로고스 개념을 도입해서 넣을 수밖에 없는데 필론의 이론을 상당히 많이 참고해서 기독교 신학이 정립이 되어서 헬라사람들도 오고 유대교도 포섭하고 그런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헬라라는 게 도대체 뭘 이야기하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기 이태리가 있고, 그리스, 키프러스, 크레타 섬, 터키 있고, 지중해 있는데 헬라는 현재 그리스 이 동네 사람들 말하는 겁니다. 이태리는 성자중심이에요. 헬라사람들은 성부중심이에요. 이태리는 신자, 불신자를 구분하는 입장에 있다면 헬라교부들, 교부란 초창기 기독교 멘토들, 이 사람들은 온 세상은 다 하나님의 자녀다. 이쪽입니다. 지금도 동방교회가 이 주장하고 있어요. 그들이 몰라서 그렇지 사실은 신의 아들이라고 포섭하는 겁니다. 이쪽에서는 법 중심이고 성자중심이기 때문에 신자, 불신자를 날카롭게 나누고, 이쪽은 전부 신의 아들이라고 포용하고 다만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보다 지적으로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러한 전통들이 초반기부터 성립이 되는 겁니다.

26페이지 봅시다. [그러나 보편적 로고스에 의한 참여 사상에 신론을 통해서 주입이 되어버리면, 스토아주의 만인평등사상은 자연스럽게 모든 인간은 신의 자녀라는 기독교의 인간관과 혼합이 되어 버린다.] 그 밑에 보면, [신인 성부는 완전-부동하시되 성자는 고통과 죽음까지 당했기에 성부와 성자의 일체성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기독교 신학에서 문제점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냥 로고스 같으면 아무 문제없어요. 그냥 로고스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은 아무 문제없는데 여기다가 예수그리스도를 집어넣으니까 예수그리스도는 고통당하고 죽으신 분이잖아요. 여기 낄 자리가 없는 거예요.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교회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납득이 되려면 조화가 돼야 되거든요. 이 주장과 이 주장이 아무런 거리감 없이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되는데 여기는 이 소리하고 저기는 저 소리하고 예수님은 고통 받고 죽었고 주님께서는 선한 분이다. 그 뒤에 보면 또 문제가 있어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어떻게 악이 함께 있느냐 말이죠. 이게 신정론인데 26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즉 신이 전능한 동시에 지선하다면 이 세계에 도무지 악이란 있을 수 없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며, 신의 두 속성이 양립하는 것은 모순이므로 하나를 포기하지 않을 없다.]

그 뒤에 보세요. [신이 전능함에도 악을 허용할 만큼 지선하지 않거나 반대로 지고의 선이기는 하지만 악을 폐기할 만큼의 능력을 지니지 못하는 그야말로 신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도전받는 상황이 상정되지 않을 없었다.] 내가 만약에 억울한 일 당했는데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나한테 해코지한 그쪽을 잘 되게 하고 나는 점점 더 인생 꼬이게 만들었을 때 그게 어떻게 선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부모가 자식한테 그렇게 사랑하는 게 어디 있어요.

문제는 이겁니다. 왜 악이 설치느냐? 여기에 대해서 기독교 신이 답변해보라는 겁니다. 기독교 신은 나중에 나와요. 나중에 신비주의자 베르나르라든지 그보다 더 뒤에 가면 쿠자누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신은 선과 악마저도 초월한다. 신을 선하다, 악하다 할 수 없다. 이 정도까지 나가요. 나중에 나올 겁니다.

어쨌든 간에 초대교회에서 문제가 뭐냐 하면, 악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걸 답변하지 못한다면 그 하나님은 뭔가 엉터리 하나님이 될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 자기가 착하다고 오기 때문에 자기의 한 맺힌 것을 선한 하나님께서 내가 복수하지 못한 것을 선한 하나님이 나서서 내 대신 풀어줄 때 우리는 좋은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고 싶은데 거기에 대한 명백한 답변을 제시해야 됩니다.

그 답변을 제시한다는 게 뭐냐 하면, 26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에 나오죠. 어거스틴은 뭐냐 하면, 어려운 것을 미리 하려고 하니 뭐 하지만 들어보세요. [‘있음 자체’라는 신 개념에 호소한다. 즉 없음이 전혀 없이 있기만 한, 있음이라는 의미에서의 있음 자체인 신은 바로 그 있음 자체라는 본성에 의해 전능하고 동시에 지선하다는 것이다.] 이게 어거스틴의 주장인데 악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선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신데 악은 뭐냐? 악은 악이 아니고 선이 모자란 것, 마이너스 선이 악이라는 거예요. 악은 애초부터 없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어거스틴의 해결점입니다.

그게 뒤에 플로티누스 할 때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세상의 모든 것은 아름답다는 겁니다. 아름다운 것을 악하다고 생각하는 네가 문제 있다는 거예요. 네 돈을 떼먹고 도망간 놈이 나쁘다고 하지만 좀더 깊은 은혜에 들어가고 성령을 받아보면 그것도 다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받아버리면 내 돈 떼어먹고 도망간 놈도 천사일 수 있기 때문에 악이라고 생각한 내가 문제였다. 내가 하나님의 선의 깊이를 잘 몰라서 경솔하게 하나님을 원망만 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도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구나. 이러니까 결국 악이라는 걸 통해서 악이 있음으로 내가 선을 깊이 아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그 악도 어떤 의미에서는 선의 기능을 발휘한 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가룟 유다 같은 경우도 해당되지요. 가룟 유다가 나쁜 인간이라고 할 게 아니라 다만 역할이 나쁜 역할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보다는 못하겠지만 약간은 선한 구석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따져보면 그래도 삼년 동안 따라다녔잖아요. 다른 사람은 안 그런데. 어쨌든 간에 가룟 유다를 변호하려고 애를 쓰지요. 지젝이 그런 식으로 가룟 유다를 해석해요. 나중에 지젝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27페이지 봅시다. [따라서 있음은 선한 것이고 없음은 악한 것인데 악한 것은 결국 없는 것이어서 기껏해야 ‘선의 결여’일 뿐이다. 이것은 마치 빛과 어두움의 관계와도 같아서 선은 빛이요 악은 어두움일진대, 어두움이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빛이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과 악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 밑의 말이 더 중요한데요. [악은 실재성이 없음으로써 형이상학적 지위가 부여되지 않음으로 신의 전능성과 지선성의 공존에 어떤 손상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게 중요한 말인데 뭐냐 하면, 신이 선하다면, 악은 없어야 되는데 왜 악이 있느냐는 그 질문자체가 성립 안 된다는 거죠. 여기 선하다에 악이 낄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왜? 악은 선이 없는 상태기 때문에. 결국은 선함이 많은 상태와 선함이 텅텅 빈 상태의 차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다 합치면 결국 선함이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설명하게 되면 지옥에 있는 인간들도 악한 자가 아니고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함을 많이 혜택을 못 입은 사람이지 근원적으로 악하다는 게 없어요. 그러면 악마는? 악마도 마찬가지에요. 천사들 중에서 혜택을 많이 못 받은 쪽이지 불쌍한 쪽이지 악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어거스틴의 이 말이 복음적으로 맞습니까? 틀렸지요. 왜 틀렸느냐 하면, 이렇게 되면 심판의 의미가 없어요. 방치하면 되지 심판할 필요는 없단 말이죠. “그냥 놔둬. 나중에 언젠가 알게 되겠지.” 적극적으로 깨알같이 이런 못된 놈이라고 심판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심판 자체가 성립 안 돼요. 악하지도 않는데 심판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심판은 악하기 때문에 심판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거스틴이나 이런 신학자들은 심판이란 걸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심판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악마나 나쁜 것을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거든요. 누가 그렇게 존재케 했습니까? 하나님 본인이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창조에 의하면 하나님의 속성이 나오게 돼있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속성이 창조에 담기데 돼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악하기 때문에 악한 마귀가 나왔지. 선에서 어떻게 악이 나옵니까.

악마는 분명히 있고 악마를 만든 것은 하나님이고 만들 때는 하나님의 성품을 담아서 만들었고. 그런데 악마가 악하다는 말은 결국 처음 만들 때부터 하나님 쪽에서 악이 있었다는 말이고 하나님의 악한 부분이 떨어져나가서 악마가 되고 이런 못된 놈이라고 때리면 결국 누가 누굴 때리는 거예요? 하나님 스스로가 스스로를 때린 격이니까 그게 무슨 하나님의 선하심입니까. 하나님은 선과 악 양면을 다 갖고 있는 괴물 되지요.

이렇게 보면 웃고 있어도 뒤돌아서면 악마고. 조크나 지킬과 하이드처럼 그런 양면성을 갖고 있는 하나님을 만약에 신자가 교회 와서 믿는다 할 때 어느 쪽을 믿어야 돼요? 하나님 돌아가고 있으니까 착함 할 때 얼른 잡아야 돼요. 착할 때 잡아야지 악할 때 잡으면 악마 되는 수가 있어요. 그 힘든 짓을 교회 와서 누가 하겠어요. 늘 선한 게 나와야 하나님을 믿지. 잘못 건드려서 악만 받으면 안 되잖아요.

결국 궁극적으로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이 인격적이라는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커지고 국가교회가 돼버리면 인격적인 건 사라지고 배후에 신비 속에 자리 잡으면 여기서 나온 것이 플라톤주의입니다. 결국 플라톤이 이야기한 하나님을 토마스 아퀴나스나 뒤에 신학자들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과 악의 속성문제가 안 풀리니까 더 높은 곳에 모셔놓는 게 편하단 말이죠. 선과 악은 우리 인간들 수준에서 노는 것이고 하나님은 높은 수준이니까 따지지 마라. 이런 식이 편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했지만 문제는 이거에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인간들이 이런 주장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신명기 21장 5절을 누가 읽어볼까요.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이게 뭐냐 하면, 그 당시 제사장들이 판결할 때 제사장들이 정신 바짝 차려서 판결하면 신의 뜻이고 흐릿하게 술 한 잔 먹고 판결하면 신의 뜻 아니고 그런 겁니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제사장들이 어떤 판결을 했던지 간에 판결을 내렸으면 그것 곧 하나님의 뜻이 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제사장들이 정신 바짝 차리는 것 없어요. 제사장들이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 것 아니에요. 제사장들이 양심에 입각해서 바르게 판단하면? 아니에요. 그런 것 없어요. 제사장들이 마약을 하던 대마초를 피우든 부부싸움을 하던 관계없이 제사장들이 어떤 판정을 내면 그 판정이 곧 하나님의 판결이 되도록 누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제가 이 대목을 철학공부하면서 왜 하느냐 하면, 철학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양심과 판단을 끄집어내야 돼요. 이왕이면 제대로 된 양심, 이왕이면 제대로 된 이성, 이왕이면 좀더 뛰어난 지혜로운 자, 이왕이면 좀더 똑똑한 사람이 판결내리면 신의 진리에 가깝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인간들의 철학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그게 아니에요. 바보 같은 제사장이 해도 그가 판정을 내리면 그것이 곧 그 시점에 하나님의 준비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판사, 검사가 공부 잘해서 서울대 법대 나오고 이것과 전혀 관계없어요.

이게 바로 중보자적 기능이에요. 철학에서 로고스라 하는 것은 기존에 자연세계에서 공통점을 뽑아내요. 이 나라도 봄여름가을겨울, 저 나라도 봄여름가을겨울, 그러니까 봄여름가을겨울 맞다. 공통점을 뽑아내는 거예요. 이쪽 장미도 빨갛고, 저쪽 장미도 빨갛고, 장미는 빨갛다. 장미는 빨간 것이야. 왜? 로고스가 장미를 빨갛게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의 각각 요소에 있는 것의 공통점을 뽑아서 하는 거예요. 현재 조직신학, 개혁주의신학도 그래요. 인간은 무엇이냐?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 인간은 양심의 거룩이 있고 바르게 산다. 선을 추구한다. 그걸 뽑아내면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이건 철학입니다. 이건 중세철학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중보자적 기능은, 내가 똑바로 살고 바르게 살 때 하나님께서, “너, 어떤 태도야?” “바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뜻이라고 해줄게.” 이게 아니고. 똑바로 바르게 한다는 자체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면 바르겠다, 반듯하겠다는 자체를 날아가고 사라지게 만들어버립니다. 아들이 하는 일이 곧 아버지가 하는 일이에요. 예수님이 바르게 해서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 그 차이 중요한 합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만 아버지의 일이에요. 그리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목사가 똑바로 산다고 주의 영광 아니에요. 하나님 영광은 예수그리스도만 영광이에요. 그래서 예수를 믿을 때 영광이지 바르게 살고 바르게 행동한다고 영광 되는 게 아닙니다. 이 땅에서. 신자가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살고 바른 생각 가지고, 바른, 바른, 바른 이건 불교의 팔정도에 나오는 겁니다.

기독교는 그게 아니고 복음은 그게 아니고 바르게 한다고 영광이 아니고 그냥 예수 믿으면 영광이에요. 이 쉬운 것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안 믿는 경향이 굉장히 많습니다. 옛날에는 십일조 할 때 다리미질하여 정성을 다하여 드렸잖아요. 그게 영광이 아니고 돈을 어떻게 하던 관계없이 예수 믿으면 그게 영광이에요. 거지가 됐던, 창녀가 됐던. 오늘 낮에 손님을 몇 명 받고 어제 저녁에 손님 두 명 받았던 간에 그 창녀가 예수 믿으면 그게 하나님 영광이에요. 제사장이 어떤 판정을 내리던 영광되게 하셔요. 하나님 판결이 되게 하신다니까요. 이게 아주 독특한 점이에요.

그래서 유대교와 헬라철학은 결합이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한쪽은 로고스 기능으로 세상 전부를 보편적으로 중요한 것, 거룩한 것, 착한 것, 고상한 것, 다 뽑아내야 돼요. 고상하지 않는 건 죄고, 고상한 것은 죄 아니고, 이렇게 구분해야 되지만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게 영광이 된다는 중보자적 기능 앞에서는 서로 부합될 요소가 전혀 없는 겁니다.

여기 27페이지에 토마스 아퀴나스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뭘 모르느냐 하면, 요한복음 1장을 몰라요. [마치 빛과 어두움의 관계와도 같아서 선은 빛이요 악은 어두움일진데] 이게 잘못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상은 어두움이고 주님은 빛으로 왔는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고 돼있지요. 그렇게 예수님만 빛이기 때문에 예수님 외에는 어두움이어야 한다는 것이 요한복음 1장입니다. 우리는 빛이 비추면 어두움도 환해져야 되잖아요. 그게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만 빛이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 주변은 더욱더 어두워야 된다는 것이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나타나야 섞여야 알지 예수님이 그 속에 들어오셔야 알지 아무리 철학적으로 공통점을 따져도 세상은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요. 세상 자체에 대해서 빛과 어두움으로 구분하려고 해요. 어거스틴처럼. 어거스틴은 큰 엄청난 실수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두움 되면 돼요. 그게 영광이라니까요. 우리가 어두움에서 빛 돼야 영광이 아니고 우리가 빛 앞에서 어두움인 것을 알면 그게 영광이에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자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관계 또는 관계성이라 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따라서 우리가 영광을 받는 거예요. 이게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가 있게 된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의 되게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성이 의 되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데리고 오는 거예요. 관계성입니다.

그런데 철학은 그게 아니고 관계성을 끊어버리고 독자적으로 나는 의인인가? 아니면 나는 죄인인가? 이게 철학적 사고방식입니다. 독자적으로 우리 세계는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 돌립니까? 이러고 있단 말이죠.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연결돼있으면 누구나 의인 됩니다. 이걸 예수 안이라고 하는 거죠. 유대교가 멸망한 이유는 자체적으로 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망한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가 되는 걸 모르고. 어거스틴이나 이런 사람들은 철학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서 결국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영광을 돌릴지 여기에 매진한 겁니다. 자기가 죄인인 걸 모르고 말이죠.

플로티누스 하고자 합니다. 굉장히 많은데 이것 하나면 끝납니다. 동그라미, 원이 있고 여기에 중심이 있고, 반지름, 둘레를 원주라 합니다. 플로티누스는 이 중심을 일자라 합니다. 이걸 신이라 할 수 없는 게 세 개 다 신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반지름을 정신, 원주를 영혼, 이 세 가지 다 신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 신자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데 왜 유명하냐 하면, 27페이지 중간에 쯤 보면 이런 게 있어요. [플로티누스는 삼위일체 개념을 계승하고 있다. 이 삼위일체 개념은 한 마디로 머무르고, 드러내며, 되돌아가는]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고. 로마서 11장 32절, 33절 그 말씀 그대로 보는 것 같지요.

[다시 말해서 궁극적인 실체로서 모든 존재의 원천은, ‘변함없이 머무르면서도 자신의 무한한 원천적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그때마다의 다양함을 선보이며, 동시에 그러한 다양함은 의미 없이 사라져버리지 않고, 다시금 자신에게로 모아들이는 삼위일체적인 구조’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줄 그어놓을 것은,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고. 이게 뭐냐 하면, 플로티누스는 세상은 자체가 아름답다는 거예요. 모든 게 아름답다. 그러니까 악이고 심판이고 구원이고 없습니다. 모든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에요. 거지가 됐던 모든 게 아름다움이에요.

[‘하나’를 그 중심에 두고 ‘정신’을 따라 반경을 그리며, 마침내 ‘영혼’이라는 원주를 통하여 하나의 구를 이루는 전체적인 세계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모든 게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도 쇠퇴하고 소멸할 게 아닌가? 당연히 그런 반발이 나오죠. 그래서 사람을 이야기하지 않고 영혼을 이야기합니다. 영혼은 사람에다 물질이 추가된 거예요. 물질에 영혼이 추가됐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고 영혼에 물질이 추가된 것은 플로티누스의 주장입니다. 나중에 토마스 아퀴나스나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플로티누스 쪽을 해요. 영혼에다 육체가 붙어있는 겁니다.

그 이유가 28페이지에 나옵니다. 위에서 열 번째 줄에, [인간의 육체는 공간적으로 연장선을 지닌 결합체이기에 그 때문에-결합된 유한자로 인간의 육체는 무한히 쪼개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을 전쟁 통에서 팔을 잘랐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온전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팔 잘린 본인 입장에서는 팔 하나 없다고 해서 내가 덜 나인 건 아니죠. 다리 하나 날아갔다고 해서 내가 덜 내가 아니라고 내가 느끼잖아. 따라서 육체는 잘려도 영혼은 잘리지 않으니까.

또 이런 말이 있어요. 귀가 있고 눈이 있고 코가 있다. 코가 느낀 감각의 정보와 귀가 들은 정보와 눈으로 본 정보가 다 달라요. 다 다르지만 사람들이 눈 가리고 게임할 때 ‘호박’하고 맞추잖아요. 눈으로, 코로 받아들인 건 다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구상하는 단일체로 만들어내는 작업은 영혼에서 하는 거예요. 따라서 인간은 신이에요. 어떻게 신이냐? 아무리 전쟁 통에 팔 잘려도 그래도 잘리지 않은 걸 갖고 있어요. 그게 신이 아니고 뭐냐 이 말이죠. 아무리 칼질해도 절대로 잘리지 않는 것, 그게 영혼입니다. 이 영혼은 정신과 연결되면서 일자, 신과 내통하고 있어요.

그럼 영혼과 정신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영혼은 힘든 과업을 부여받았어요. 육체를 보존하고 관리해야 될 과업을 부여받은 겁니다. 이게 나중에 플로티누스 사상이 어디까지 이어지냐 하면, 베르그송까지 이어집니다. 베르그송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람인데 그 사람은 인간의 본능과 이성을 차이 두고 인간의 본능은 육신, 신체를 담당해야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밥 먹고 힘들게 살아야 되지만 인간의 이성은 신체를 관리 안 해도 된다 이 말이죠.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내가 비록 자갈치 시장에서 고기 몇 마리 팔고 있지만 자식 사랑은 변함이 없어.” 이럴 때 비록 더러운 고기 만지고 하지만 자식한테는 순수한 어머니 노릇하겠다는 말은, 육체적으로는 아부도 해야 되고 남는 게 없다고 거짓말도 하고 속이지만 나의 자식 사랑은 정신/이성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순수함이 유지된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플로티누스가 영혼이 힘들고 어렵고 때 묻고 하는 것은 육신을 담당해야 돼요. 육신은 자연의 일부기 때문에 자꾸 쇠퇴하고 늙어가고 있고 힘들어요. 날 추우면 벌벌 떨고 더우면 옷 벗고. 따라서 영혼이 육신 때문에 힘들지만 영혼은 절대로 죽지 않으니까 정신을 통해서 무슨 교훈을 받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계속해서 잔소리와 교훈을 받아내요. 영혼이 육신 때문에 당하는 그것을 갈고 닦아서 정신을 통해서 점점 더 신의 뜻에 합당하도록 그렇게 노력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영혼이 육신을 관리하기 때문에 육신이 니 육신, 내 육신 다르잖아요. 각각 개별적 육신을 따로 갖고 있기 때문에 영혼도 개별적 영혼이에요. 하지만 정신이 오게 되면 신의 뜻이 너 다르고, 나 다를 수 없단 말이죠. 신은 일자니까, 한 분이니까. 각자 신으로부터 교훈 받아서 양심의 소리겠죠. 정신의 소리를 들어서. 정신은 일자와 영혼을 중간에 매개해주는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일종의 로고스죠. 뜻을 받아서 영혼이 수납해서 육체로 살아가는데 어떤 교훈을 얻어서 점점 더 갈고 닦으면 일자, 신에 가까워지는 겁니다.

들으니 어떻습니까? 성화론이지요.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대로 받아들인 거예요.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떨어져도 영혼은 영원하다는 거죠.

28페이지 중간에 보면, 하나 됨, 일자와 영혼의 하나 됨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 아무리 달라도 고유성이 있다. 하나 됨을 고유성이라 하는데 자신만의 고유성이 있고 그게 영혼인데 그 영혼은 물과 흙 같은 비영혼적인 것과 우연적인 결합이 됐다는 것은 어리석인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반대합니다. 육신에 따라서 영혼이 되는 게 아니고 영혼은 신에서 받았기 때문에 비록 육신은 각각이라도 다 떨어내면 어느 영혼이라도 다 신적인 요소가 있다. 인간 존엄성이죠.

29페이지 봅시다. [물질적인 속성은 산산이 흩어져버리고 또 지나가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오로지 물질적으로만 이루어졌다면, 모든 것은 벌써 다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만일 영혼과 같은 존재가 앞서 존재할 수 없었다면, 육체란 도무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혼이 육체보다 항상 앞서고. 육신은 뭐냐? 흩어져 있는 물질이 그냥 영혼을 영혼 되게 하기 위해서 만난 거죠. 만난 거니까 육신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떨어져나가도 영혼은 하나님만 추구하면 되는 겁니다. 이 사람 기독교 신자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 이런 것 안 믿어요.

모든 것은 본래대로 되돌아오게 돼있어요. 세상은 부채처럼 펼치고 펼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전부 다 하나님 쪽으로 되돌아가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세계. 인내천, 인간이 곧 신이고, 신이 곧 인간이다. 인간은 작은 신이에요. 왜? 영혼을 받았기 때문에. 다만 물질 때문에 영혼이 힘들게 살지만 언젠가는 신으로 되돌아가게 돼있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요새 개척교회 하면서 남이 안 하는 특별한 걸 해서 손님 모을까 해서 하는 사람들, 전부 플로티누스 사상이란 걸 알아야 되는데. 제자훈련해서 최고단계까지 올라가면 여러분이 곧 신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가 신이라 했는데 요한복음 거론하면서. 부산에도 있잖아요. 중요한 건 이겁니다. 이것과 복음의 차이점이 뭡니까? 이것 모르면 소용없는 거죠.

30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마치 펼쳐진 원주로부터 마침내 저 하나의 중심을 향하여 그어지는 무수한 반경과 같다.] 전 세계 모든 사람, 모든 영혼들. 다만 플로티누스는 개나 소는 영혼이 없다 해요. 영혼은 신과 관련돼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다 신이 되는 겁니다. 지금 이 사상이 동방교회, 동방교부들의 사상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 뒤에 계속해서 나옵니다. 34페이지 중간에 보면, 플로티누스가 세계영혼을 거론하거든요.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것은 복음과의 차이점이 뭐냐? 도대체 복음이 뭐냐?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형제라고, 기독교 신자라고 이야기했을까요? 안 했겠지요.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겠지요. 이런 사상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겁니까? 바로 이 사상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죽으신단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 사상과 다르기 때문에 이 사상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사상은 뭐였습니까?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신과 정신과 영혼. 영혼은 육신과 같이 있죠. 사도바울의 복음은 인간 자체가 인간이 육체에서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육체가 있다고 본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어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할 때 이 말씀이 동산 한 가운데 있었지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가 한 가운데 박혀있단 말이죠.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면 이것이 중앙에 있다면, 인간이 중앙에 있지 않다는 것을 플로티누스는 몰라요. 플로티누스 사상은 영혼 자체가 신이잖아요. 그럼 인간 자체가 중앙에 있는 거예요. 그러나 에덴동산 중앙에는 인간이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를 쳐다보고 살아야 될 주변에 있어요.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를 위하여 있는 겁니다. 그럼 죄는 어디서 나오는가? 선악과 따먹을 때 나왔잖아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하잖아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을 언급한 겁니다. 그렇다면 죄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있고 그 죄라는 것의 정체는 바로 예수님이 등장해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 죄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죄 안 짓고 구원받느냐가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시냐에 관한 거예요.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시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어야 될 피조물에 불과한 겁니다.

이 세상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이 중심이에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친히 만드신 거예요. 신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이에요. 인간이 말하는 신이라는 것은, 신이 아니고 죄에서 나온 개념이라는 것이 여기서 드러나고 끝나버려요. 더 이상 들어올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 쪽에서 죄를 극복하고 예수님 만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인간 쪽에서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못 따먹지요.

그럼 방향성이 인간 쪽에서 다가올 수 없고 예수님 쪽에서 다가오면서 먼저 다가온 것이 구약 이스라엘 역사잖아요. 이스라엘 존재가. 이미 예수님이 역사의 중심이에요.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흘러오는 거예요. 화산에서 마그마 내려오듯이 그리스도 십자가가 위에서 흘러내려온 거예요. 흘러내려온 것이 이스라엘이고 이방인이거든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복음 전한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이미 나타났다. 따라서 너희들은 이런 위치에 있다. 그게 바로 플로티누스와의 차이점입니다. 플로티누스는 내 쪽에서 신에게 다가가는 거고, 복음은 나타났으니 그리스도가 곧 복음이에요. 예수님이 나타나서 행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는 태어나야 하는 거예요. 에서가 그러하고 야곱이 그러하고.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움 받아야 되고 야곱은 사랑 받아야 되고. 항상 엘리야도 그렇게 모세도 그렇고. 변화산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오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신이 문제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다. 그걸 증거하는 겁니다. 그분이 이야기한 것이 신의 세계고. 그건 하나의 비밀이고 숨어있었던 것인데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플로티누스의 이런 이야기는 쓸데없는 게 아니고 바로 우리가 옛날에 육적으로 있을 때 성령을 안 받았을 때 기껏 생각한 신의 주권, 신앙이라는 것, 하나님이라는 게 결국 플로티누스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 우리 쪽에서 이렇게 경건하게 살면 신도 알아주겠지 하는 사고방식을 이미 플로티누스나 앞에 나오는 필론이나 누메니우스, 에우도로스가 이미 선배들이 우리의 육적이고 죄악 된 것들을 깔아놓았다 이 말입니다. 앞으로도 거기에 대해서 공부하게 될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나타나실 때 우리 쪽에서 예수님을 상관하려고 했는데 그게 열두 제자의 잘못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 버리고 도망갈 때 다시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그리스도의 증인되게 하신 것처럼 도망친 우리를 성령으로 붙잡아서 그리스도만 증거케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30611b 부산강의.hwp (49.5K), Dow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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