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0614a-히2장14절(근원분할) - 이 근호목사
안양20130614a-히2장14절(근원분할) - 이 근호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65)
안양20130614a-히2장14절(근원분할) - 이 근호목사
히브리서2장14절을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라고 되어있지요. 요 문장에 보면 존재하는 것은 자녀들이 존재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존재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마귀라는 게 있어서 같이 한 문장을 이룹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 돼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했다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혈육이 그 혈육이라면 마귀는 이 문장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들어 올 수가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귤이 세 개, 수박이 네 개, 바나나가 세 개, 기관차가 두 개, 이러면 뒤에 기관차가 빠져야 되지요. 시자에 가서 과일가게에 가가지고 여기 바나나 두 개 주시고, 귤 두 개 주시고, 기관차 두 개 주세요. 이러면 안 되잖아요. 왜, 기관차는 과일이 아니니까. 그렇잖아요. 같은 문장에 섞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자녀들은 혈육에 속했는데,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혈육에 속해서 마귀가 세력을 장악해서 어떻게 합니다, 하면 마귀는 거기에 섞일 수 없지요. 그렇다면 번역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혈육이라는 것이 여기에 들어간다는 말은 뭐를 불러내느냐 하면, 우리가 없다고 여기는 마귀를 나와! 마귀 너 빨리 나와! 불러낼 낚시 밥이 뭐냐 하면, 바로 ‘혈육’이라는 겁니다.
‘혈육’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서 마귀가 노리고 있는 바를 마귀를 엮어내는 하나의 미끼 같은 거죠. “나, 잘났어. 나 누구야.” 이게 아니고 “나, 혈육이야.” 짝을 이루는 거예요. 혈육과 마귀와 짝을 이루는 거예요. 그런데 평소에 인간들은 처음부터 중요하지요. 인간들은 자기를 혈육이라고 보지 않고 육신으로 보지 않고 “나, 교사야, 나 사장이야,”이렇게 본다 이 말이지요. “당신, 누구십니까?” “나, 육이야.” 이렇게는 안 하잖아요.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나, 육입니다.” 이런 식으로 안하잖아요. 내가 육이다, 하는 것은 나한테 의미 없어요. 나는 직업이 뭐며, 연봉이 얼마이며, 그게 중요하지, 애가 몇 명이며, 가정주부며 이게 중요하지 “나, 육이야.” 같은 인간들끼리 안하거든요.
혈육이라는 것은 육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나 혈육이야, 나 육이야, 혈육에 속했다는 말은 좋지 않다는 뜻이거든요. 성경에서 혈육에 속했다는 말은 위태하다는 뜻입니다. ‘아! 내 힘으로 안 되겠네.’ 이런 뜻이다 이 말입니다. “나, 교회 다니는 혈육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나는 교회 다녀도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혈육은 짝을 이루는데 마귀하고 짝을 이룹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마귀가 갑이 되고 을이 되는 쪽이 혈육이에요. 그리고 그 을은 갑한테 빠져나오지를 못하는 지경, 혈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혈육과 마귀는 짝을 이루어서 문장을 이루어도 되는 거예요. 그렇게 문장을 이루는 겁니다. 성경은 그냥 읽으면 안 되겠지요. 존재하지 않는 마귀를, 실제 마귀는 주민등록증 없잖아요. 마귀가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이 나라에서 존재하는 것은 다 주민등록증 붙지요. 개 같은 것은 말고. 인간처럼 활동하면 주민등록이 다 있어요. 그거 없으면 노숙자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 동사무소에 가서 우리 집에 마귀 있는데 주민등록증 내주세요. 이런 이야기를 못하잖아요. 마귀는 우리한테 존재감이 없는 거예요. 존재감이 없다는 말은 결국은 존재는 누구한테만 활용된다? 우리 인간에게만 쓰여 지게 된다, 라고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죠. 여기 사람 몇 명입니까? 하면 사람 몇 명이라고 손들면 되는데, “어, 미안합니다. 마귀 둘이 있는 것을 놓쳤네. 합해서 몇 명입니다.” 이런 식으로 안 하잖아요. 군에서 하나, 둘, 셋, 넷... 번호 끝! 다시 해! 마귀 세 개 빠졌잖아! 귀신 세 개 빠졌잖아, 하면 그러니까 본인은 모르잖아요. 마귀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사람이 “나는 혈육에 속한 게 아니야.” “나는 육이 아니야.” 라는 그런 표현을 달리하면 “나는 마귀나 이런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같은 말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인간들이 그런 식으로 눈에 보이는 숫자에 헤아리는 그런 세상에 성경이 동조할리는 없고 “너희들이 그렇게 하든 나는 마귀를 포함시켜서 세상을 다루겠다.” 이건 하나님의 뜻이니까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동조해야 됩니다. 그렇게 동조하고 나면 우리는, 나는 혈육에 속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쉬운데요, 15절에 보면,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고 되어 있지요. 요걸 난해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용어로 쓰게 되면 난해한 것도 풀립니다. ‘근원분할’이지요. 근원분할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토대, 바탕, 바탕이 갈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의 바탕은 중앙에서 결정하거든요. 중앙에 나무가 두 개 있었지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나란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3장을 미리 아는데 창세기3장을 모른다고 치면, 항상 생명나무 있는 곳에 선악과 있고, 선악과 있는 곳에 생명나무 있고, 짝을 이루어서 나란히 있는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3장을 알아버렸습니다. 어떻게 되지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갈라지지요. 근원분할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밑바닥이 갈라지는 겁니다. 밑바닥이 갈라지니까 근원, 중앙부위가 중앙부분이 둘로 갈라지게 되지요. 그렇다면 둘로 갈라졌을 때, 만약에 배를 타고 가는데 쫙! 하고 둘로 갈라졌을 때, 우리는 어느 쪽에 서야 삽니까? 사실은 이미 배가 갈라졌으면 어느 쪽에 상관없이 분할된 우리의 토대가 분할됐으면 그건 죽음입니다. 사람은 이미 선악 쪽에 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부터는 생명나무를 따먹지 말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내는 조치가 뭐냐, 근원을 분할시켜 버리는 겁니다.
생명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손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바탕이 갈라져버렸어요. 갈라짐으로 말미암아 원래 창세기2장에 보면,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생명나무 선악과나무 함께 있을 때, 그 변두리에 누가 있느냐 하면, 인간이 있습니다. 요게 제 위치에요. 제 위치에 있다는 말은 제가 말하는 취지가 뭐냐 하면, 그럴 때만 인간이다, 이 말입니다.
인간은 “나, 인간이다!” 해서 인간이 아니고 생명나무 선악과나무 분할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주변을 맴돌 때 그 때가 인간이었던 순간이에요. 그 때 부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아담은 자기 아내를 살 중에 살이요, 내 빼 중의 뼈다, 라고 기쁨의 고백을 한 겁니다. 살아, 잘 있나! 집에 퇴근해서 뼈야, 잘 있었어? 내 뼈야! 이런 식으로. 너를 먹이는 것이 마치 내 뼈를 먹이는 것이고, 너에게 월급 주는 것은 이건 나한테 월급 주는 거야, 니가 잘돼야 내가 행복해. 니가 좋아야 내가 만족해. 아직도 이런 식으로 살고 있습니까? 이게 안 되면 아담 탓하지 마시고요, 항상 인간은 근원과 같이 겹쳐져 있어요. 근원 따로 우리 따로가 아니에요. 생명나무 선악과가 같이 있을 때, 그 때는 인간은 행복이 뭔지도 모르면서 행복한 겁니다. 그 때는 죽음이 뭔지를 알 필요도 없어요. 사는 거 자체가 에덴이고 극락이니까.
극락이라 하는 것은 깨질 때 알거든요. 인간이 참 후회스럽게 살아요. 뭐든지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잖아요. 있을 때는 좋은 줄 모르다가 건강 잃어버리면 “아이고, 저 인간들은 뭐가 잘난 게 있어서 튼튼하게 잘 걷는데 나는 뭐가 못 났는가 걷지도 못하고 바보같이 등신 다 됐네. ” 지 까불다가 기브스 해 놓고 남 탓하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인간은 나 여기 있으니까 인간이다, 이리 하지 마세요. 그것은 범죄하고 난 뒤에 일방적인 육신으로 바뀐 혈육에 속한 거예요. 혈육이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배후에 마귀의 조종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억지를 부리지만, 하나님이 말하는 인간 쪽에 섭시다. 마귀 말 듣지 말고 성경말씀 들어서 인간이란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함께 있을 때, 그 때 그 비치되어 있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그것만이 그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단독적으로 인간되는 법은 없다 이 말입니다. 동양철학은 불교는 그것도 모르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그거 외우면 인간되는 줄 알고, 동양철학의 특징이 뭐냐 하면, 스스로 도를 깨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미쳤어요. 미쳤어. 자기가 도 닦아서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물어 볼게요. 유한자가 무한 자 될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유한한 인간이 무한이 될 수 없는 것이 유한한 인간이 생각하는 무한은 뭐가 무한인지, 유한한 입장에서는 모르게 돼 있어요. 유한한 인간이 생각하는 무한은 진짜 무한하고 관계없이 유한의 연장, 확장으로서의 유한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짜 무한입니다. 신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신이 될 수가 있겠어요? 신 자체가 뭔 줄 모르는데. 그러니까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말 안되는 게 많아요. “나는 천국갈래” “천국이 뭐냐?” “몰라” 모르면서 간데요.
다시 정리하게 되면, 인간이란 스스로 결정하고 내가 인간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내가 중앙에 서면 안 돼요. 중앙을 비워드려야 돼요. 생명나무와 선악과 있을 때 그 때만 아담은 아담이었습니다. 만약에 근원이 분할되어 버리면, 아담은 흙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범죄하고 난 뒤에 흙이 되어가는 존재를 성경에서는 혈육에 속했다, 육신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은 “아이구, 인간이 까불다가 혈육 되는 거 아이고, 그래, 그래 흙 되라 하면 그만이지.” 인간을 만든 취지가 그렇게 되면 안돼요. 하나님은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와 관계돼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하나 됨을 어떻게든지 회복시키면 회복에 따라서 어떤 것도 있어야 되느냐 하면, 바로 인형 같은 인간도 만들어져야 돼요. 세트로. 콜라, 햄버거, 감자튀김, 맥도날드 3천3백원짜리, 이렇게 3종류가 세트가 되어야 되듯이 생명나무 그리고 선악과 하나 그 다음에 인간의 배치 그렇게 있을 때만 인간이라 했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인간되려면 그 조건을 이탈하면 안돼요. 하나님이라도 그 조건을 충족시켜야 그 때 등장한 인간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은 감 잡을 거예요. ‘아, 나는 인간인데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이런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구나!’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그대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가고자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손꼽놀이 하실 때, 종이접기해서 아빠 만들고 엄마 만들고 부엌 만들고 강아지 만들고 요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손꼽놀이 하시는데 어느 날 마귀가 와서 강아지를 채갔다. 그러면 주님께서 소꿉놀이 못해요. 채어간 강아지를 기어이 그 원래자리에 있어줘야 주님은 계속해서 소꿉놀이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생명나무, 선악과, 그 다음에 인간, 낙원, 이게 놀이인데 마귀가 들어와서 선악과를 따먹게 하니까 이게 엉망진창이 됐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생명나무까지 다치면 안 되니까 얼른 뭘 보호하느냐 하면, 생명나무를 보호한다는 것은 생명나무 이것만 있어도 다시 원래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고 본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단 전염병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겁니다. 격리되면서 근원분할 됨으로 말미암아 배가 갈라진 거예요. 저 쪽 편은 마귀가 왕초고, 그 마귀의 배에 탄 배에 좋다고 인간이 타고 새끼를 낳는 거예요. 그게 혈육에 속했다, 육신에 속했다, 이 말입니다. 계속해서 자식을 낳아요. 마귀 배에는 사람이 우글거려요. 찾는 자가 많아요.
생명나무 가는 것도 원래 저 쪽 살던 사람인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채택되어서 이리로 온 거예요. 생명나무 쪽으로 온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나 백부장이나 이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니까 우리 동네에 와서 기적을 베풀어달라고 한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아무에게나 기적을 베풀지 않는다, 했어요. 기적 베푼다고 쥐나 개나 만나는 족족 다해준 게 아니고 다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하는 거예요. 조용필 인기 있다고 인덕원 노인 복지관에서 공연 부르면 조용필 오겠습니까? 그런데 안 가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요청한다고 하나님이 덜렁 구원해 버리면 안돼요.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꿉놀이 있잖아요. 그 세트. 그거 맞추기 위해 적합해야 돼요. 그게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는 다루어지고 있다 이리 보는 겁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이제 근원분할 이해되지요. 근원이 잘라졌습니다. 갈라지니까 혈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신이고 뭐고 다 잊어버렸어요. 에덴동산에서 추방됐기 때문에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은 자기 육신과 흙 이런 것이고, 그리고 육? 어떤 목적? 목표? 목적과 목표는 다르다고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지요. 그 다음에 의미 몰라요. 혈육에 속한 사람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 같아요. “우리가 왜 죽지?” “아이고, 죽을 때 죽더라도 그런 모르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하고 뭔가 자기가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 몰라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 “아이고, 몰라도 돼! 몰라도 돼!” “내가 존재하는 목적?” “아이고, 그거 내가 알 필요가 뭐가 있어. 그냥 아침에 눈뜨고 밥 먹고 살면 되고 죽으면 죽고 그만이지.” 너무 많이 누락시켜요.
우리 인간됨에서 많은 요소를 누락시켜요. 너무 많이 누락시키니까 집에 있는 개나 우리가 차이점이 없어요. 왜? 오뉴월의 개 보세요. 부러워요. 이건 뭐 취직을 걱정할 필요가 있나, 그냥 주는 밥 먹고 요새는 고급스러워서 사료먹이지만, 옛날에는 그냥 집에 찌꺼기 나오면 혀를 낼름 거려서 분주하게 움직여서 혓바닥해서 물을 핥아 내고 우리 먹기 싫은 거 다 먹어주니까 고맙기도 하고 먹고 난 뒤에 이거는 동원예비군을 다닙니까? 어디 공부를 합니까? 그냥 슬금슬금 돌아다니다가 짝짓기 하다가 힘센 놈 갑한테 물려 을이 돼가지고 편안히 턱 누워 있잖아요. 얼마나 부러운지. 그게 왜 부럽냐 하면, 개의 사는 목적이 의미 없듯이 우리도 개하고 똑같아요. 우리도 목적이 없으니까 개나 쥐나 우리 신세나 똑같아요. 그래서 남자는 술 먹으면 뭐된다? 개 되는 거예요. 전부 다 흙이 돼 다 사라지지요. 우리는 너무 많은 요소를 빼놨어요. 모르니까 무조건 빼놓은 거예요. 내가 사는 이유, 누가 만들었지? 죽은 다음에 뭐가 있지? 의미의 존재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사는 대로 살뿐이에요. 밥 먹고 배나 좀 부르니까 신이 어떻고 성경이 어떻고 하지요. 살기 바쁘고 하루 벌어먹고 사는 사람은 피곤에 지쳐서 그 다음날 아침에 또 일어나서 배달해야 되고, 이렇게 사는 삶에 있어서 성경이 어떻고 신이 어디 있어요. 그냥 개지요. 개하고 인간은 차이점이 없습니다. 특히 치매 걸린 노인들 보세요. 애도 그런 애가 없고 애가 더하면 나중에 귀신 돼요.
여러분, 성경이 굉장히 과격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보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토해 내치리라, 상당히 과격하지요. 얼마나 과격한지 멀미난다 이 말이에요. “니는 내 속에 들어오면 안 돼!” “나, 니 들어오면 멀미나.” 얼쩡거리지 말라는 거예요. 토해 내쳐버리는 거예요. 자동 토해낸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보고 할 이야기입니까? 더 놀라운 사실은 가룟유다 보고 하는 말이 “차라리 니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 누가 태어나게 했습니까? 주님이 태어나게 해놓고 이제 와서 왜 딴 이야기를 합니까? 아예 애초부터 태어나게 하지 말던지, 자기가 태어나게 해놓고 책임을 누구한테 밉니까? 가룟유다한테 밀어요. 그런 이야기가 우리한테는 이해가 안되는 게 우리는 의미, 목적, 목표, 이유 하나도 모릅니다. 모른다는 말은, 개하고 똑같다 보니까 항상 사수하고 지키는 것은 혈육에 속한 것, 지 몸뚱어리밖에 없다 말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내친 것은 인간 자체에서 억한 심정, 나쁜 감정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시키기 위해서 무대 판을 새로
짠 거예요. 그러니까 생명나무, 선악과 있고 인간이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이 판을 없애버리고 새 판을 짜신 거예요. 생명나무 따로 있고, 저 쪽은 인간은 선악과와 더불어 따먹고 죽어가면서 판을 새로 짜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인간은 혈육이 되어서, 흙이 되어서 죽거든요. 죽으면 그 죽는 과정에서 뭐가 등장하는가 하면, 그동안 몰래 숨어있던 나쁜 자가 등장합니다. 악마가 등장하지요. 그러니까 뱀이 뱀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뱀이 악마가 될 때까지 주님의 전략은, 작전은 계속됩니다.
인간은 의미, 목적 아무것도 모르니까 악마고 신이고 이것도 별로 사실은 없어요. 배부르니까 신을 찾지만, 급하면 신이고 뭐고 없어요. 없는 그 쪽을 혈육이라고 잡아놓게 되면, 인간에게는 자기를 그렇게 망쳐가는 장본인, 악마가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이쪽의 누구를 등장시키면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시키면 비로소 저 쪽에도 스물, 스물, 인간을 지배하던 것이 등장해서 예수님의 흉내를 냅니다.
마귀의 특징은 예수님을 흉내 낸다는 겁니다. 어린양을 흉내 내요.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성전에 있는 짐승, 예수님을 모방해요. 이런 겁니다. 예수님께서 한 마디 하면, “자, 내가 이제부터 연설하겠습니다.” 하면 “어 어 어 어”해가지고 말 못하게 만듭니다. “어 어 어 어 얼레리 꼴레리 안 들려! 나 귀 막았다.” 하는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은 뭘 느끼느냐 하면, 그리스도와 관련된, 정작 노리는 그 관련된 것이, 인간을 어떤 식으로 지금도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가? 서서히 그 윤곽을 감지하게 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육신에 있는 사람은 마귀들이 이런 게 있는 줄 모르니까.
오늘 본문 다시 해봅시다. 히브리서2장 14절을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그 다음에 곧 뭡니까? 마귀를 없이한다, 되어있지요. 혈육이라는 것을 우리로 본다면, 마귀가 우리라는 혈육과 같이 섞일 존재자가 아니거든요. 인간의 모든 언어라 하는 것은 있는 것들만 기록되어야 하는데, 여기에 우리와 더불어서 마귀를 집어넣어버리면 우리는 이걸 어떻게 해석하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존재의 의미, 목적 그런 것도 다 귀찮고 모르고 싶은데, 마귀를 집어넣는 순간 ‘그럼 지금까지 내가 마귀한테 조종 받으며 살아왔단 말인가?’ 라고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자기의 인생 판을 점검하겠지요. 그게 바로 말씀의 효과에요. 우리는 기껏 바르게 살겠습니다.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하지만 그 판이 이미 혈육에 속한 판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르게 산다고 해서 생명나무 허락해 주는 건 아니거든요. 왜냐 하면, 배가 달라요. 생명나무 배는 배가 따로 이고, 아까 했잖아요. 유한자가 무한에게 건너올 수 없다고. 이 쪽 배에서 건너갈 수 없어요.
부자가 가슴 치는 게 거지 나사로 땅에 있을 때는 바로 앞집이었는데, 막상 바탕 자체가 분할되고 난 뒤에는 저 쪽으로 건너갈 수가 없어요. 그게 영원한 고민입니다. 고민은 고민으로 끝나버려요. 계속 고민이에요. 바라볼 때마다 고민 돼! 다리가 있습니까? 건너갈 배가 있습니까? 그리스 로마신화에는 배가 있어요. 노 저어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에는 어떤 다리도 없고 백날 노래 불러도 없어요. 험한 세상은 다리가 없습니다.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하는데 될 필요도 없고 될 수도 없어요.
선교단체에서 애들 전도할 때, 세상 그려 놓고 천국 그려 놓고 여기 십자가를 다리로 해서 건너가잖아요. 십자가 다리가 없다니까요. 왜냐 하면, 지금 십자가는 어디에 꽂혔습니까? 세상에 꽂혔지요. 세상에 꽂힌 이런 십자가는 없는 게 세상에서 출발한 십자가는 하늘나라하고 연결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십자가가 거꾸로 됐다니까요. 십자가가 천국에서 시작해서 다가오게 되면 세상사는 사람 가운데서 성령이 나온 사람만 십자가에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세상에서 무수한 십자가가 있더라도 다 이것은 헛방이라니까요. 헛수고에요.
오직 천국의 십자가는 그 뿌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의 자리, 주의 오른편의 자리에서 나오는 십자가만이 성령께서 이런 식으로 요 이미지로 우리에게 옵니다. 성령은 요 이미지에요. 왜? 이 세상은 십자가라는 것은 어리석으니까. 십자가 죽을 때만 어리석은 사람인 줄 알아요. 계속 어리석어요. 십자가는 영원히 어리석음이에요. 영원히 어리석고 미련하기 때문에 성령이 아니고서는 십자가를 알 자가 없다고 했지요. 고린도전서2장에 보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 목걸이 걸고 돌아다녀도 십자가 올라 탈 수가 없다니까요. 끊어졌어요. 십자가를 이렇게 그려야 돼요. 그 뿌리를 하늘에서 그리게 되면 학생들이 난처해하는 게 우리 쪽에서 올라 탈 방법이 없잖아요. “목사님, 그럼 우리 쪽에서 십자가 올라타면 되잖아요.” 올라탈 길이 있습니까? “없어!” 없다고 하니까 집에 가자해요. 없다는데 없다는 한 마디로 끝나지요. 이미 분할된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고 원판이 근원적으로 이미 분할되어 버렸어요. 그 분할된 것을 주님께서는 혈육에 속했다는 것으로 해서 혈육과 마귀가 한 통속이라는 것을 히브리서2장 14절에서 이렇게 통보해 주시네요. 그러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를 아는 사람만 그 말을 알아듣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 인간은 인간들끼리 의논하지 “언제 우리한테 마귀가 있나?“ “너 봤어?” “마귀 없잖아, 봐라!” 마귀는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지 않는 것하고 우리가 왜 상의합니까? 미쳤어요?
학생이 학교에서 문제 있어서 “얘, 너는 마귀하고 상담해 봐라.” 이런 소리 안 하잖아요. 상담교사하고 상담해봐라, 상담교사는 존재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존재하지 않거든요. 마귀의 존재는 성령 받아서 바로 우리가 혈육이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고 나, 연봉이 얼마고, 나는 우리 집안이 어떻고 이런 게 아니고 나는 바로 연봉이 얼마든, 어느 학교 나오든, 나이가 많든, 나는 혈육입니다! 라고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만 마귀의 존재가 그동안 얼마나 우리를 속여 왔던가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보고 “당신, 마귀 들렸지요?” 이러면 화를 냅니다. 빨리 말을 바꾸세요. “혈육에 속하셨지요?” “무슨 혈육에 속해? 내가 삼겹살인가 혈육에 속하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말을 못 알아듣지요. 왜 그런 취지로 이야기합니까? 만약에 혈육에 속했다고 하면 “그래, 혈육에 속했다. 왜? 왜?” “혈육에 속했으면 마귀한테 잡혀있는 겁니다.” 짝을 이루어서 설명해 줘야 히브리서 2장 14절이 되는 거예요. 이제 제 이야기의 취지를 알겠지요.
그러니 내가 혈육에 속했다, 이 말은 내 힘으로는 마귀의 힘을 이길 수가 없다. 그 다음의 특징이 15절에 보면, 그 혈육에 속한 특징이 나오지요. 죽기를 무서워한다. 이걸 좀 설명을 하겠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한다. “그거 목사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는데 이게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왜냐 하면, 근원분할을 기초로 할 때, 죽음이라 하는 것은 이게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분할되기 이전에는 죽음이란 말씀만 있었지 죽음이 체험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안다하면 안돼요. 죽음을 인간은 몰라요. 왜냐 하면, 진짜 죽음은 생명나무 선악과 함께 있을 때, 그 때의 말씀하시던 그 죽음을 죽음이라고 제대로 알아야 되는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은 근원이 분할됐잖아요. 배가 다른 배잖아요. 우리는 뱀의 후손 마귀와 함께 있고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 생명나무와 갈라졌잖아요. 그리고 우리 쪽에서는 생명나무 길이 차단되어 있는 입장이잖아요. 우리 입장에서는 죽음이란 개념 자체도 이미 날아가 버렸어요. 우리는 죽음도 모르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껏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죽는 현상을 수집해서 그걸 일반화시켜 놓고 그걸 죽음이라고 의미를 붙이는 거예요. 정의를 그렇게 내려요. 죽음은 무엇이냐, 숨 끊어지는 것, 요렇게. 참~ 마귀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죽음이 숨 끊어지니까 고통하고 괴로울 때는 그 고통과 괴로움을 해소하는 최후의 마지막 아예 작살내는, 없애는 방법은 자살하면 되지요. 왜? 이 육신이 흙이 되고 육신이 숨 끊어지면 감정도 없고 느끼는 것도 없고 고통도 없을 거니까 “에이~씨 어찌하면 뭐 해보고 안 되면 죽어버리지.” “술 막 퍼먹고 죽어버릴까” 이런 식으로 죽고 싶다. 어떤 목사가 자기 양녀로 삼은 딸을 성폭행하다가 걸렸어요. 걸리고 난 뒤에 이틀 뒤에 큰 교회 목사인데 그 사람이 자살해서 죽었어요. 왜 자살했겠어요? 쪽팔려서 그래요. 평소에 간음하지 마세요, 라고 설교시간에 했거든요. 성폭행한 놈은 지옥 간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자살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평소에 설교한 것이 내가 이 정도로 바르게 삽니다 를 보여주기 위한 자존심용으로 했는데 그게 들통 난 겁니다. 만약에 예를 드는데 교인이 한명도 없었는데 설교했을 때, 자살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자살 안하지요. 그러니까 지 수작에 지가 말려든 거예요. 그게 마귀의 수작이에요.
사는 이유도 모르고 의미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고 있는 것은 오직 내 자존심을 위해서 나의 잘남을 위해서 버티는 것이 배가 이미 갈라져서 마귀 편에 있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죽어버리는 거예요. 죽기를 무서워하면 살아야 되는데, 계속 죽을 때도 죽는 게 무섭고 죽기 전에도 죽는 게 무섭고, 죽는 순간만 죽는 게 아니고 죽는 것이 무섭다는 그 자체가 이미 죽음이라는 거, 그걸 알아야 되는데 어디서 그게 나왔는지 인간은 알도리가 없지요. 왜? 저 쪽 마귀는 그걸 안 가르쳐줘요. 마귀는 무조건 복음만 전하면 어어어~ 어어어~ 이런 소리하기 때문에 마귀는 그냥 개처럼 살아라, 밥 먹고 사는 게 그게 사는 거야, 별나게 살지 마! 하고 가르치기 때문에 이유, 목적, 의미 그런 거 아무것도 몰라요. 살다 살다 힘 빠져서 죽으면 그만이고, 어려우면 자살하면 그만이고, 이렇게 했기 때문에 죽기를 무서워하면서 결국은 죽어버리고. 아무 해답도 해결책도 없어요. 그래서 차라리 태나나지 말았으면 좋을뻔 한 거예요.
가룟유다는 죽는 순간까지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몰라요. 주님은 알지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뻔한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난 거죠. 이제 가룟유다가 태어난 이유를 알겠지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뻔 했다, 라는 악마에 대한 저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도화지로서 이 땅에서 만들어낸 자가 가룟유다입니다.
너는 참 태어나길 잘했어, 라는 그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도화지로 사용된 것이 야곱에 속한 성도에요. “넌, 참 잘 태어났어!” “저는 창기인데요.” “잘 태어났어!” “저는 강도데요.” “잘 태어났어!” 잘살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참 잘 태어난 거예요. 주님께서 그림을 그리시는데 눈, 코, 입, 입가에 점하나, 당신의 마음까지 다 그리죠.
주님께서는 원판, 니란 인간은 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판이 중요한 것이다. 니가 지금 살고 있는 판이 이미 갈라졌는데, 중요한 건 어느 쪽의 갈라진 곳에 섰느냐, 이게 굉장히 문제거든요. 사르밧 과부가 가뭄 들어서 지금 굶어죽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누굴 만나지요? 엘리야를 만나지요. 엘리야가 그냥 참기름이나 떡이나 밀가루를 던져주고 끝난 게 아니고 그 집안에 판을 가는 거예요. 가는데 어떻게 하느냐, 엘리사 같은 경우인데, 없는 아들 태어난다고 해놓고 태어난 그 아들 죽이고 거기에 대해서 그 여인이 원망했고 원망한 아들을 다시 살려내고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듭니까? 그냥 곱게 구원하면 되지, 왜 이리 복잡합니까?
우리의 존재 판이 기존에 니가 알고 있던 개 같은 존재 판이 아니고, 지금 그리스도가 누워있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시고 강림하시는 그 판 위에 우리는 지금 뭣도 모르고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필름이고 우리는 그 위에 예수님을 비춰 투사하는 스크린역할로 살아가는 거예요. 저 쪽에는 마귀가 누워있고 마귀를 스크린에 비춰보는 마귀의 모습이에요. 그걸 예수님 쪽에서 보면서 혈육에 속했다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만날 하는 게 죽기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러면 죽음이란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봅시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죽는 것을 공통점으로 수집해서 죽음을 안다? 모른다? 모르지요. 그것은 철학적인 죽음이고, 과학적인 죽음은 몰라요. 죽음을 알려면 어디를 가야 아는가 하면, 근원적인 분할이 안 될 때, 그 쪽으로 가야 돼요. 니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죽음을 아담은 죽으면서도 그 죽음을 몰랐던 거예요. 아담이 죽어가면서 그 죽음을 몰라요. 본인이 죽어가고 있으면서. 그러면
그 말씀을 하신 쪽이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죽음의 의미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아담에게 죽기 전에 뭘 주느냐, 창세기3장15절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줘버리면 비로소 그 안에 죽음의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잎가지고 치마 옷 입히고 수치를 들게 하는 것도 죽음을 알려주기 위함이고 그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들고 그걸 벗기고 만들어 거기에 가죽옷으로 치마를 입히고, 아예 아담을 가지고 놀아요. 이것은 니가 죽고 살고 문제가 아니라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니가 죽음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본래 하나님의 판은 절대로 마귀에게 보낼 수 없고 반드시 성취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담은 죽어가면서도 창세기3장15절 하나님의 약속을 구현하는 용도로서 원 없이 쓰여 지면서 결국 아담은 죽은 것이 아니고 잠자는 거죠.
이거 하고 쉽시다. 안식일은 하루 쉬고 6일 일하지요. 자, 묻습니다. 쉬는 날이 중요합니까? 일하는 날이 중요합니까?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쉬는 날이 중요한 이유가 일하는 것이 너무 고되기 때문에 하루 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걸 반대로 이야기해요. 인간의 일 한 것 때문에 쉬는 날이 있다는 거예요. 안식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쉰다는 것은 하나님이 쉬는 날을 준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안식의 날을 줬지 쉬는 날을 준 적이 없는데 우리는 혈육에 속했기 때문에 우리 몸만 챙기는 거예요. “아이고, 오늘은 좀 쉬자.” 이리 된다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안식일 제도를 만드신 것은 이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인간은 율법에 대해서 전부 다 지 편한 데로 일방적인 해석을 하니까 율법대로 인간은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결론은 뭡니까? 율법을 줘놓고 결국 인간은 죽음이 죽이는 거예요. 죽어간다고 해서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 내 백성만큼은 죽음을 알아야 된다. 죽음을 알기 위해서는 마귀가 등장해야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 예수님이 등장해야 비로소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아는 거예요.
죽음의 의미란, 우리한테 죽음의 의미란 의미가 없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그것만이 죽음의 의미입니다. 그동안 마귀가 그렇게 따먹어라, 따먹어라,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죽음의 의미를 우리한테 감추기 위해서 얼굴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선악과를 따먹게 하고 결국은 이 죽음이 우리는 우리 죽음으로 국한되고 그것이 인생 종치는 것처럼 “그래, 그러면 죽지 뭐” 이걸로 인생 다 아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보여주기 위해서 이러한 악마부터 모든 것이 배치되어 있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주의 말씀은 제대로 죽어라 이 말이에요. 제대로. 모든 말씀은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다, 이 말은 안 살거든 니는 죽어야 될 인간이었고, 말씀대로 부자가 천당 가기에 힘든 것도 니가 부자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죽어야 마땅하고, 모든 말씀이 “니는 죽어야 마땅해! 죽어야 마땅해!” 하고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와 연결시키려고 먼저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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