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강-YouTube강의(심판)1306013-이 근호 목사
37강-YouTube강의(심판)1306013-이 근호 목사
이름 : 유일자(IP:116.33.234.248)
37강-YouTube강의(심판)1306013-이 근호 목사
37강, 제목은 “심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무지무지하게 요란스럽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8장 1절에 보면, 고요한 대목도 나옵니다. 8장 1절에 보면, “일곱인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고요한 부분이 나오는데, 이 부분은 어떤 사태, 무슨 일을 앞두고 고요하냐 하면, 마지막 심판을 앞두고 일곱 나팔 불 때 마지막 심판인데요, 잠시 고요해지는 겁니다. 아주 무서운 고요함이죠. 아주 엄숙한 고요함입니다.
심판이라 하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이겁니다. 세상을 없애버리겠다는 겁니다. 세상을 없애 버리면, 우리가 어떤 점에서 당황스럽냐하면, 평소에 우리가 웃고 울었던, ‘난 이것 때문에 웃을 수 있어. 이런 일만 벌어지면 난 늘 웃어. 또는, 평소에 이런 일만 일어나면, 난 울고 싶어. 난 이런 일 일어나면, 자살하고 싶어. 난 정말 이런 일 일어나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 라고 애착을 갖고 했던 그 모든 것, 그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심판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한다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동거, 동락을 같이 했던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선 심판하시는 거죠. 여러분들은 여러분 곁에 누가 있어야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십니까? 누가 있을 때... 북한에 김정은이 있을 때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폭력배가 옆에 있을 때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을 부축이고, 도와주고, 보호하고, 모자라는건 채워주고, 이쁘다하고, 여러분들을 자랑스러워하고, 여러분들을 부러워하고, 아껴주는 사람이 있을 때나 행복합니까.
결국은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울던지, 웃던지 간에 내 곁에는 이런, 이런 것과,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할 때, 그것은 자기 곁에 있는 그러한 경우와 사람을 자기가 선택한다는 것이 이것이 근본적으로 대단히 문제가 큽니다. 잘못된 겁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니 곁에는 너를 심판하시는 분과 함께 있으라.“ 하~ 이거 정말 어처구니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신명기에 28장부터 끝부분에 가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말씀이 너의 곁에 있다.“ 언뜻 들어보면 말씀이 곁에 있으니까 ‘야~ 이제 말씀 지키면 우리는 복이 있다는 이야기이니까, 결국은 축복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그런 뜻이구나.’ 하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 신명기 28장 끝에 또 보면, 그게 아니고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너희들과 함께 있겠다.” 그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있다는 것이 될까요? 그것은 신명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주면서 전제를 같이 깔아서 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희들은 결국은 너희들만 사랑하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란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아무리 연구하고, 공부하고, 탐구해도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본인이 어느 정도 되는 인간인지 몰라요. 뭐 그이유야 간단하죠. 인간이 지하고 똑같은 육체, 똑같은 인간들만 쳐다보고 하루 종일 사니까, 지가 잘난 존재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부부를 생각합시다. 부부가 방에 같이 잠을 잘 때, 또는 자식과 같이 가족을 이룰 때, 가장된 입장에서 아내와 자식을 보면서 뭘 느끼겠습니까? ‘그래 내가 이렇게 고생한 보람이 있어. 내 덕에 아내는 곤히 잠을 자고 내 덕분에 애들은 씩씩하고 토실토실하게 밥 잘 먹고 살아주는구나. 역시 나는 가장으로서의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낙제점은 안 받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의 어떤 실적을 통해서 자기가 이 땅에서 잘나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는 방식으로 항상 자기 평가를 내리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육체를 가질 때, 이 육체에서 그런 본성들이 나와요. 그런데 이런 육체가 옛날 이스라엘 사람과 우리가 똑같은 육체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같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진리예요. 그러니까 옛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된다는 겁니다. 주변에 있는 똑같은 인간들과 항상 쳐다보면서 ‘그래 너도 잘났지만 너보다도 이런 점에서 내가 장점을 가졌어. 항상 자기를 긍정하는 쪽으로서 세상에서 자기를 파악하거든요.
그런데 거기에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줘버린 겁니다. 말씀을 주니까, 자기 원래 육체의 본성이 뭐냐.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 육체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본성에다가 말씀을 주니까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하나님 이런 말씀을 내가 지켜보니까 역시 하나님 보시기도 내가 잘난 사람 맞죠? 하는 식으로 자기 긍정적으로 해석을 해온 겁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자기 무지 자기 주제 파악 안 되는 것을 까발리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은 고집대로 원래 말씀이 의도하는 대로 꾸준히 말씀이 떠나지 않는 겁니다. 마치 이래 봅니다. 아주 진드기 같아요. 귀신이 떨어지다가 안 떨어지고, 계속 붙어 다니는 거와 똑같은 겁니다.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대는 겁니다.
이 말씀을 지켜라, 저 말씀 지켜라, 십계명 지켜라, 어떻게 지켜라.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 보면 정말 지킬 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몸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과연 이것이 인간에게 성사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변명합니다. ‘하나님이여, 최소의 노력을 다해서 지키려고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완전치 않다는 것을 하나님도 익히 아시는 바잖아요. 그러니까 얼추 지키려고 애를 쓰고, 최선의 노력을 다할 그럴 마음만 가져도 곧 지킨 것으로 해서 우리에게 계속 복을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식으로 우리는 해석해 버립니다.
그러나 신명기 끝에 보면 하나님은 양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어기면, 너는 저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잘못은 나를 저주 하시는 분과 동행하지 않고, 바로 나를 칭찬해주는 가짜 메시야, 가짜 그리스도를 마치 동행하는 자로 우리가 채택 했다는거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는 지금 이 세상은 우리가 보기에 고요함이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모든게 정상으로 돌아갑니다. 심판! 언제 심판 받았어. 저주! 난 저주 안 받았어. 요한계시록 8장 1절에 보니까, 마지막 최후의 심판, 우리가 울고불고 하는거 내가 예찰하는 모든 것을 다 부셔 버리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고요의 시간을 허락했습니다. 잠시 고요한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우리는 그 때 뿐이고, 다시 돌아서면 내가 좋아하는 세상으로 섞여서 다시 환원돼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거짓말이 되고, 우리 자신도 심판 받아야 될 세상 속에 섞여서 어쩌면 그것이 가장 우리다운, 가장 세속다운 그 세속으로 항상 우리는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 속성을 마음껏 표현하면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심판은 이미 결정 난 상황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아도 심판받고 악하게 살아도 심판 받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주신 거예요. 우리의 어떤 생각과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의 심판은 결정되었고, 세상이 불바다 되는 것은 이거는 당연한 마감 절차에 해당 된다고 봅니다.
그러면 끝으로 우리가 이 성경을 볼 때에 새삼스럽게 어떤 기쁨과 어떤 행복을 느끼느냐하면 그동안 쓸데없는 곳에 마음을 너무 빼앗겼다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의 스트레스를 낳게 했고, 우리를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만들었어요. 우리를 땜질할 필요 없는 실적과 업적에 너무 마음 빼앗겼습니다. 그 성공 실패 여부에 우리의 혼이 다 나가버렸어요. 정신을, 시간을 다 소모시킨 거예요. 우리의 기를 다 빼앗아 갔습니다.
이제는 그 업무를 주님 소관으로, 주님한테 넘겨주세요. 넘겨주시고 우리를 심판 한다는 이야기가 기쁜 소식으로 들을 때 이것이 바로 주의 말씀과 함께 있는 구원받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성도는 내 계획에 스스로 피곤해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계획 속에 나를 넘김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시키는 대로 살아가면서 과연 주님의 심판이 정당함을 우리가 외부의 생활을 통해서 증거 하는 자가 바로 곧 성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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