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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율법의 기능 130616우리교회로마서

율법의 기능 130616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율법의 기능(로마서 7:7-11)

이근호

13-06-16 13:31

율법의 기능

2013년 6월 16일 본문 말씀: 로마서 7:7-11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7: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7: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상대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나님과 상대하는 곧 죽음인 것을 사람들은 염두에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는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에서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과 관련맺는 것이 성립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죄와 상대하게끔 하십니다. 하나님보다 죄와 상대하므로서 진짜 현실이 무엇인가를 만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가지고 기껏 보여주는 것이 죄뿐임을 분명히 해두십니다. 사람들 속에 죄가 자리잡고 있고 그것이 인간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지경입니다.

사람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죄로부터 멀어지고 의로움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합니다. 그럴수록 의를 싫어하고 반대하는 숨어있는 성향이 분출되는 것이 곧 인간의 심성입니다. 사람에게는 오직 자신만 귀합니다. 자기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을 양보할 그 어떤 상대자도 인간은 치워버립니다.

이는 곧 자기 목소리 외에 그 어떤 목소리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보이게 합니다. 다정한 이웃이나 가족의 음성 뿐만 아니라 신의 지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아무리 고상하고 경건하고 거룩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다 죄의 지배 하에 연출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6에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고 “토해 내치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천국에 안 맞다는 겁니다. 역겹다는 겁니다. 사람들 눈에는 순수해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추방시킬 수 밖에 없는 모습을 인간들은 내비치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자기만을 영원히 사랑하고 싶지만 죄는 도리어 인간을 자기 원대로 다룹니다.

근대 사회에 들어와서 인간들은 이유도 모르면서 일상의 생활을 되풀이 합니다. 곧 감시받고 살면서 누가 자신을 감시하는 감시자인지 계속 미궁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있어서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럴 때 어떡하면 돼지?”라고 스스로 물을 때에도 인간의 자리는 안정감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 자리가 불안정하게 되면 이것을 훼손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영화같은 이미지로 상상하게 됩니다. 그 속에 천국과 구원과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성령과 이상적인 교회상, 바른 신앙생활 같은 것들을 유발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상력은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행하시는 구원작업에 의하면 모두 환상이요 놀이요 오락으로 들통납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장성하여 조상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현실화해야겠다는 사로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애굽인을 쳐주기고 동족들끼리만 단결하면 이 집단적 노예 생활을 청산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정립한 이스라엘상이 하나님께서 원래 기대하신 그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서 결국 홍해바다 곁까지 오게 하시는데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합니다. 왜냐하면 앞에도 죽음이요 뒤에도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꽉 막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코스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온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현실이란 교회가 꿈꾸던 그런 꿈이 아니라 인간은 애초부터 구원될 자격이 없음을 분명합니다. 죽음을 건너 뛸 수 없는 육신을 가지고 그동안 우리 인간들은 나름대로 인생 산다고 자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죽음 앞에 세우십니다. 죄가 현재 너희 자신을 다스리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참된 하나님께서 막힌 길로 몰아세우십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서 발악하는 괴물의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모든 지시와 명령이 싫어요”라는 마음의 소리를 말입니다. “나는 내가 좋으니 내 식으로 행하는 것을 훼방하지 말라”는 것은 인간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인간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요 소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내용입니다. 사람의 완력으로 스스로 애굽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만 홍해바다를 건넘이 가능함을 알려주십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죄에 갇혀있음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애굽나라의 존재가 현실이 아니라 죄 안에 갖혀 있음이 참된 현실이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과 마태복음 1:16-22의 말씀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를 언급하는 그 청년이 결국은 본디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그렇게 그 와중에서 거론된 율법과 계명은 무슨 역할을 한 걸까요? 그것은 바로 그동안 부자 청년은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자리를 털쳐 버리고 빠져 나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사람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죄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죄인입니다. 그동안 부자청년은 철저하게 자신을 속이고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괴물입니다. 유리에다 대고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면 그동안 뚜렷한 윤곽으로 잘나 보이던 그 얼굴도 일그러져 흉측하게 됩니다.

이게 괴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호로라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롬 7:24)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조치로 우리를 곤고하게 만드시는 작업을 병행하십니다. 행주 쥐어짜면 구정물 나오지만 바로 주부들이 그런 식으로 부엌에서 설거지를 끝내듯이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의 고난이 곧 성도가 이미 구원에 들어서 있음을 알고 감사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6-18 23:15

38강-롬7장 7-11(율법의 기능)1306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7장 7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8페이지입니다.

로마서 7:7-1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우리는 교회 올 때 하나님과 상대하려고 교회 오지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상대할 입장이나 처지가 되지 못합니다. 일반 직원들이 회사 매일 가도 회장님 얼굴 잘 못 보듯이, 군에서 졸병으로 있으면서 총사령관 얼굴 잘 못 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감히 하나님과 상대하려고 교회 나온 거예요. 주제파악도 못하면서.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상대하지 말고 죄하고 상대하라. 죄하고 상대하고 난 뒤에 너는 네 자신이 누군지를 알아서 과연 내가 하나님, 그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인지를 죄와 상대해서 먼저 파악해보라.”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하고 잘 사귀겠다고 건방을 떨어요. 논산훈련소에 가면 자기 아버지가 군대의 높은 장군 급쯤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하고 자기하고 좀 차이난다고 착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그 아버지 손잡고 조교에게 맡겨질 때 “충성!” “얘가 내 아들이야.” 그러면 그 대화를 중간에서 듣고 있는 아들은 든든하고 신이나지요. ‘내 아버지는 장군이다.’ 아버지가 훈련 잘 받으라고 손 흔들면서 돌아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꼴아 박아!”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내가 아는 사이라고 해서 계명도 지키고 말씀도 지키고 교회도 나오지만 하나님이 아예 우리를 죄 앞에 세우고 주님은 우리를 떠나버립니다.

“잘 해봐라. 네가 나와 상대할 존재인지, 한 번 잘해봐라.” 인간은 하나님을 말할 입장도 못돼요. 죄를 빼버리니까 하나님이고 부처고, 이런 이야기를 하지 하나님이 한 번 다녀가게 되면……, 실제로 다녀간 경우가 있지요. 사사기에 보면 마노아에게 하나님이 다녀갔는데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어요. “죽었구나.” 하나님을 만나면 특징이 뭐냐, “아, 내가 처음부터 죽어있었구나. 산다는 이것이 사는 것이 아니구나.” 사람들 앞에서는 “네가 살았나, 나도 살았다.” 이런 이야기가 되는데 막상 하나님 만나니까 “아, 내가 죽은 것이 맞군요.” 확인사살 되듯이 그것을 확인할 뿐이에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이사야가 한 고백입니다. 남 망한다고 욕하지 말고 내가 망할 자라는 겁니다. ‘그동안 인생 뭘 목표로 해서 살았나? 인생 뭘 보겠다고 살았지? 이렇게 살아도 망하고 저렇게 살아도 망하는데.’ 이것이 하나님 만난 사람의 특징이에요. 영화 보게 되면 거기 나오는 사람들이 싸움도 잘하고 악인도 잘 물리치지요. 덩달아서 자기가 그런 입장이라고 생각해서 신이 나는데 영화관 나오면 다 헛방이고 가상의 세계라는 것을 알잖아요. 우리는 교회 나오면 구원받은 것 같기도 하고 교회 나오면 하나님이 구원해줄 것 같기도 하고 인간 같은 인간이 될 것 같기도 하지만 다 영화한 편 본 것 같은 헛방입니다.

설교 한 편 들은 것은 영화한 편 본 것이고 아무 소용없어요. 교회 안 나오면 지옥가지요? 교회 안 나오면 지옥 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교회 나와도 지옥가요. 아무 소용없습니다. 교회가 천국을 안보내고 못 보내줍니다. 보낼 능력이 없어요. 이것은 천기누설입니다. 이것은 어떤 목사도 얘기 안 해줘요. 자기들끼리만 알자고. 교회 나와도 구원 없어요. 천국 못갑니다. 이것을 알려주면 장사가 안 되죠. 이것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천국 간다고 이야기를 해 줘야 교회장사가 되는 거예요. 성경은 영화관이 아닙니다. 소설책이 아니에요. 직접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상대하지 말고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상대해보라. 그러면 네 속에 서서히 괴물이 떠오를 것이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예수님 싫어.” 이것이 우리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이러나 저라나 누가 나보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싫어해요. 누가 나보고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전부 다 명령조로 듣고 그 명령에 대해서 어떤 명령이든 다 싫어하는 본성을 갖고 있어요. 예를 들면 부부가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아내가 다정스레 이야기합니다. “여보, 몇 시인가?” “더 자지.” 하면 “내가 잠을 더 자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이렇게 나오지요. 다정스레 하든 사랑스럽게 하든 누가 내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약간이라도 끼어들었다 싶으면 우리는 참을 수 없습니다. “네가 뭔데 나에게 명령을 하느냐, 네가 뭔데!”

그 명령이 옳든 그르든 문제가 아니고 “네가 뭔데? 네가 내가 아닌데 왜 나에게. 다정이고 사랑이고 다 집어치우고 네가 뭔데 나에게 그런 명령을 하는데?” “명령이 아니고 푹 쉬고 주무시라고 한 것 아닙니까?” “에이 씨, 잠은 다 잤다. 그냥 일어날란다.” 이러고 싶지요. 하지만 이러면 아침밥이 시원찮기에 깨깽 하면서 곱게 자는 척 해요. 이것을 윤리라고 이야기해요. 윤리라는 말은 ‘위선자 되기’ 이런 뜻이에요. 위선자로 살기, 마음에 영 들지 않지만 꾹 참기, 그게 윤리라는 겁니다. 윤리는 사회적으로 이야기할 때 윤리라고 하고 그것을 내 양심과 결부시키면 도덕이라고 하는 겁니다.

동양철학에서는 도덕을 강조하고 서양철학에서는 윤리를 강조해요. 성경은 ‘하나님을 상대하지 말라. 그것은 일종의 영화 관람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괜히 성경보고 착해지려고 하는데 따져봅시다. 착해지면 뭐합니까? 착해졌다고 소고기 사먹겠지요. 착해지면 뭐할 것인데요, 왜 착해져야 되는데요? 착해질 필요가 없는데. 그래서 인간은 착하지도 않으면서 왜 착해지려고 하고 성질 곱지도 않으면서 성질고운체 살아가는 이유가 뭐냐? 미셸푸코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그것을 분석했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남으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는데 문제는 그 감시자가 안 보인다는데 있다.”

현대사회는 이상스럽게 감시를 받고 시선이 내리쬐는데 막상 그 시선이 오는 그 곳, 중앙지점이 보이지를 않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주눅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 명령하고 지시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지시를 안 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반신불구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구체화한 것을 원형감옥이라 합니다. 원형감옥이란 감시자는 보이지 않고 주변에 죄수들을 배치해서 수감자만 보이게 해서 합리적으로 죄수들을 감시하는 겁니다. 이것이 원형감옥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가정이나 병원이나 학교나 공장과 교회와 병영과 기업 등 모든 분야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옛날에는 지시를 받았는데 이제는 신입사원이 먼저 나서서 “사장님, 제가 어떻게 감시를 받으면 됩니까?” 이렇게 언급을 해요. “제가 어떻게 감시를 받으면 저에게 월급을 꼬박꼬박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나온다는 거죠.

시집가는 새댁에 시집에 가서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에게 “어떻게 내가 감시를 받으면 귀염을 받겠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감시하지 않아요. 자기들은 며느리를 딸같이 여긴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딸 같이 여겨도 며느리입장에서는 부담이 되거든요. 딸같이 여겨야 한다는 이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지시는 누구한테 배운 겁니까? 이것은 알 수 없는 감시자에게 주눅이 들어 있는 거예요. 모든 현대의 특징은 뭐냐, 이유도 모른 채 주눅이 들어 있어요. 이 대우라는 탈주범에게 “왜 도망쳤습니까?” 하니까 모르겠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왜 도망을 쳤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이유를 저는 알지요. 어릴 때부터 도망했던 대로 그냥 도망한 거예요. 어릴 때부터 도망하는 버릇이 있는 거예요. 감시받으면 도망하고 싶은 겁니다. 도망치는 와중에 감시의 눈을 피하면서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어떻게 피해도 거기에 감시의 눈이 있을 것이다.”라고 현대인들은 이 몸에 푹 배어있어요. 어느 자리에서도 불안정해요. 거기에다 예수님의 명령까지 들어오니 주의 명령을 자기가 알고 있던 그 권력구조로 생각해서 감시받기 싫어서 그것을 배척하면서도 그 감시가 없으면 나라는 것이 누군지를 모르니까 또 그것을 원하게 되는 인간의 입장을 두고 성경에서는 죄에 갇혀 있다, 죄에 놀아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감시받는 것이 아니고 죄라는 것에 의해서 인간은 감시받고 있었던 겁니다. 죄라는 것에 감시받고 있으면서 교회 나가니 교회 나가는 것도 죄고, 죄에 감시를 받으면서 예수를 믿으니까 예수 믿는 것도 죄고, 성령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죄고, 모든 것이 죄 안에서 놀기에 술 먹어도 죄고 술 끊어도 죄고, 담배 피워도 죄고 담배 끊어도 죄고, 그냥 그 속에서 우리는 지내고 있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죄부터 만나게 하느냐하면, 천국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네가 천국 올 수 없고 구원 받을 필요도 없어. 구원받지 마. 구원 받아서 어디에 쓰는데? 생각해 봐라. 그것이 뭔데? 아무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네가 구원받겠다, 영생 얻겠다, 하는 것은 전부 다 죄가 시킨 거예요. 뭔가 자기 자신을 좀 낫게 해보려고 죄가 시킨 거니까 구원받고자 하지 말고 구원자체가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을 가져 달라는 겁니다. 죄 속에 있는 자가 구원되면 안 되잖아요. 죄 속에 있는 자는 지옥에 가야지요. 구원은 받을 자격도 없고 받을 필요도 없지만 어쨌든 네가 상상한 천국은 네 맘대로 한 짓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을 상상하든 영생을 상상하든 다 죄에 다른 양상, 죄가 이런 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을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요한계시록 3장 16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거기 보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한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쉽게 말해서 안 맞는다는 거예요. 지금 이 교회는 천국에 들어가기에는 합당치 않다는 겁니다. 그냥 내치는 것이 아니고 욱, 하고 토해내치는 겁니다. 억지로 들어왔는데 나는 너를 억지로 끄집어내겠다는 뜻이에요. 천국 가겠다는 것은 네 소망이고 네 소망이 너를 너 되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소망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구원은 우리 소망이 아니고 주님의 소망이에요. 교회 오래 다니면서 이것을 몰랐어요? 각자 자기 소망가지고 오시는데 주님은 토하여 내칩니다. 어딜! “저는 원합니다. 천국을!” “미쳤나, 미쳤어, 미쳤어. 네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네가 어딜 들어와? 에이 토해버리자. 퇘.” 하고 토하여 내쳐버립니다. 이 대목이 중요해요. 아예 토해 내칠 것 같으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도 안하면 되는데 토해내치리라, 하는 말을 하시면서 기어이 그 교회에 성령께서 말씀을 주신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취지겠습니까? 토해내치는 그 취지를 알아듣는 사람은 이미 영생과 구원 작업에 합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예 남의 자식 같으면 토해 내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거든요. “에이, 토해내치리라.”하고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슬슬 나의 소망대로 너의 소망을 꺾 너를 천국에 보내봐?’라는 주님의 작업이 이미 개시가 된 겁니다. 그 구원 작업에 이끌리면서 우리가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뭐냐, 토해 내친다는 이것, “이것이 주님의 진심이었구나. 이런 것 몰라도 구원받을 줄 알았는데 토해 내친다는 그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 이미 구원이 되고 있다는 증거구나. 주여, 제가 토해 내칠만한 인간이 맞습니다.”라고 수긍하고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에 합류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이 좀 어렵지요. 약간 쉬운 것을 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장의 한 대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의 숫자가 많아지니까 애굽의 왕이 싫은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인이 딸 낳으면 살리고 아들 낳으면 다 죽이라고 해서 다 죽이는데 모세 엄마는 왕명을 어기고 갓난애를 살렸어요. 법보다 내 육신이 먼저 아닙니까? 나라 법보다 내 맘의 정욕이 우선이니 갓난애를 살려놨는데 계속 감시가 심하니까 애를 집에 둘 수가 없어서 그만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목욕하는 그 냇가에 애를 먼저 띄워 보내고 자기 누이 미리암이 따라가 보도록 했어요. 어떻게 되나 살펴보게 한 거지요.

그래서 아다리가 됐거든요. 모세가 궁녀나 다른 사람 만났으면 팔자 버렸을 것인데 우연히 로또도 아닌데 바로의 공주에게 걸렸어요. 기막힌 타이밍이지요. 모세 엄마가 모세의 바구니와 바로의 공주가 그것을 발견하는 타이밍계산을 안했거든요. 만약에 바구니는 그 옆에 떠내려가는데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면서도 그것을 안 봤으면 어떻게 할 뻔 했습니까? 목욕하면서 장난치다가 장난 그만치자 하고 보니까 뭔가 떠내려 왔고 시녀가 가서 확인했고 거기서 아이 울음소리가 났지요. 그런데 애기 울음소리가 나도 건져주는 것이 아니지요. 그냥 죽게 내버려 두라고 할 수도 있는데 “예쁘다!” 했고 물에서 건져냈다고 해서 이름도 모세라고 지었지요.

여러분의 이름은 어떻게 해서 짓게 되었습니까? 점쟁이 집에서 지었나요? 어쨌든 모세라 지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아이에게 먹일 젖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할 때 뒤따라오던 누나가 “제가 아는 아줌마가 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해서 그 아는 아줌마가 모세를 낳은 진짜 엄마에요. 완전히 막장드라마, 출생의 비밀입니다. 아들이라도 아들이라 부르지 못해요. 하여튼 키웠습니다. 모세가 장성하는 동안 엄마가 계속해서 세뇌를 준 거예요. “독도는 우리 땅이다.” 계속 그런 식으로 교육을 시켰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고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된다.”고. 자, 모세가 재벌 집 아들로서 잘 컸습니다.

민족사관고등학교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명문대 진학했지요. 그래서 평생 머리에 각인된 것이 뭐냐, “내가 물에서 건져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나를 물에서 건진 것처럼 우리 민족도 물에서 건져내야 하고 그 지도자가 나 외에 누가 있으랴.”라고 해서 모세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엄마에게 다 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민족이 애굽에서 사는 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된 것이니까 그 지도자로서 내가 구사일생으로 살았으니 내가 이 민족을 구해야 된다는 그 사고방식에서 모세가 지도자실습에 나서는 겁니다.

애굽사람,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로 치면 일본 사람 때려서 우리민족 구하는 광복군처럼 애굽사람을 쳐 죽여서 자기민족을 해방하겠다는 그 정의감이죠. 개 풀어놓고 공원에서 운동하는 아줌마 보면서 그 개를 발로 차버리고 싶다는 그 정의감처럼. 모세가 ‘이 민족 살리겠다.’고 하는 그 모세의 구원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마음가짐을 여러분이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제가 지금 그 대목에 주목해 달라고 부탁하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머릿속에 구상하는 그 구원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이 기껏 모세가 자기 민족을 살리겠다고 애굽인을 쳐 죽이는 그 정도의 육적인 수준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구원 안 된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뭘 하는 것이 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기껏 모세가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나라처럼 구출해 보겠다는 몸부림 맘 부림에 지나지 않고 전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세가 오지랖 넓은 짓을 하는 것을 그대로 기록해요.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고. 그리고 어느 인간도 성경보고 천국이 어떻고, 영생이 어떻고, 구원이 어떻고, 예수님이 어떻고, 에덴동산이 어떻고, 이런 이야기를 백날 해도 기껏해야 어디서 멈추는가 하면 모세가 자력으로 남들 구원하고자 한 그 시도의 범위에서 끝나요.

모세는 결국 도망이나 다니는 수배자가 됩니다. “때려치워라. 난 안하련다. 하나님이 도와주지도 않는데 내가 미쳤다고 하나? 내 밥벌이나 하면 되지.” 해서 양치기나 하면서 하나님과 바이바이 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모습으로 나타나서 등장하니까 “어?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네.” “신발 벗어라.” 놀래서 신발 벗었지요. 죽은 거예요. “이제부터 너는 내 종이다. 일방적이다.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게 되어있어. 널 다시 애굽으로 돌려보낸다.” 모세가 하는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는 말이 “내가 같이 갈게.” 모세가 하는 말이 “저는 빠지겠습니다. 우리 형이 말을 잘하니 우리 형 데려가세요. 저는 빠지겠습니다. 저는 이미 빠져나왔고 이제 다른 사람들이 빠져나오면 되는데 제가 새삼스레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데려가는 이유는 모세가 이미 실패자라는 것이 분명하기에 데려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백날 교회 다니고 헌금하고 전도하는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흉내 내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한 사람만 데리고 구원 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깝죽대다 얻어터지거든요. 얻어터졌기에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을 저주했어요. 주님 면전에서 저주를 했단 말이지요. “난 저 아저씨를 모릅니다.” 그 전에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영생의 말씀이 여기 주님께 있는데 내가 어디로 떠납니까?” 그땐 믿음이 좋은지 알았어요.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내가 다른 누구를 보겠습니까?” 나중에 보니 누굴 보대?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하는 그것이 주의 일인지 알고 착각을 한 거예요. 그것이 자기소망과 욕망과 욕심의 결정인지를 모르고. 그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지도 모르고. 자기소망과 자기결심과 자기믿음에 마귀가 넘어갈 줄 압니까? 죄가 놀라서 물러 갈 줄 알아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앞장세워서 어디로 가느냐, 막힌 장소로 갑니다. 그게 홍해에요. 홍해에 데리고 가니 백성들은 길이 없다고, 길이 막혔다고 하는 거예요. 모세는 말합니다. “길이 막혔나?” “막혔습니다. 앞으로 가도 죽고 뒤로 가도 죽습니다.” 잘 오신 겁니다. 제대로 길 받아 오신 거예요. 여러분이 구원 받으려면 교회 와서 막혀야 돼요. 주의 말씀에 막혀야 됩니다.

어느 말씀도, 심지어 내가 주를 사랑한다, 예수 믿는다, 라는 말씀도 결국 가짜로 들통 나야 돼요. 예수 믿어야 구원받지만 믿는다고 수십 년 믿은 것이 가짜인 것이 들통 나야 되는 겁니다. 그런 막힘의 순간이 찾아와야 돼요. 막힘의 순간이. 이것이 다 오락이고 게임이나 소꿉놀이에 불과함을 알아야 돼요. 제가 누구와 메일로 논쟁을 하면서 글을 썼어요. 기독교라 하는 것은 종교오락에 불과합니다. 답장이 오기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글에는 힘이 있네요.” 자기는 하나님과 상대한다 그 말이거든요. 성경은 죄하고 상대하라고 하는데. 우리 장군 아버지는 이미 논산훈련소에서 사라져버렸어요. 우리에게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죄하고 상대하는데 우리는 마치 죄를 이긴 듯이 간주해서 자꾸 성경보고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천국은 어떻고, 삼위일체는 어떻고, 자꾸 자기가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소꿉놀이를 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로마서 7장 11절에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계속 우리는 속이는 대로 속아 넘어가는데 그렇게 속으면서도 점점 더 몸이 아프고 치매 걸리고 죽어가고 있어요. 여러분이 교회 다닌다고 영생 얻습니까? 교회 다닌다고 영생 얻는 사람 봤어요? 없어요. 교회 다니면서 죽어가고 있어요. 오래 사는 영화구경 하고 오면 오래 삽니까? 아무리 영화 봐도 알레르기는 그대로 있고 기침도 그대로 하고 다 마찬가지라니까요.

그냥 나의 환상이 꾸며낸 임시적인 책략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진짜 현실은 교회가도 막혀 있고 절에 가도 막혀 있고 교회나 절에 안가도 막혀 있고, 다 막힌 거예요. 마태복음 19장에 부자청년 나옵니다. 이 부자청년 볼 때마다 얼마나 부러운지, 청년인데 벌써부터 돈이 많아서 저리도 부자인가 싶어 부러운데 그 청년이 부자니까 슬슬 영생 생각이 났던 모양이지요. “예수님이여,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제가 어릴 때부터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해요. 그 때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너는 그 다음에 나를 따라오라.” 하니까 성경에 “그 말을 듣고 청년이 근심해서 갔다.”고 되어 있지요.

지금 계명을 언급했어요. 예수님도 계명을 언급했고 그 부자청년도 “나는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했잖아요. 그런데 그 계명의 역할은 뭐냐, 네가 너도 미처 모르는 너의 본 자리로 되돌아가서 너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음을 규정하는 기능이 바로 율법의 기능이에요. 오늘 설교 제목이 율법의 기능이거든요. 율법의 기능이 로마서 7장에 나오기 전에 이미 마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지켰습니다, 할 때 자신은 이미 붕 떠 있어요. 자기는 붕 떠서 계명 지켜서 선한 사람의 부류에 속한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르라 하니 근심해서 예수님을 찾아오기 전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계명은 너는 아무리 몸부림 쳐도 네 자리, 죄라는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계명의 역할입니다. 계명을 제대로 알게 되면 우리 얼굴이 기괴한 괴물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코미디에 그런 것이 많은데 멀쩡한 얼굴에 비누거품을 마구 문대기면 코고 눈이고 거품범벅이 되어서 눈인지 코인지 입인지 분간이 안 되잖아요. 괴물이다, 하면서 그걸 보고 사람들이 웃잖아요. 아가씨의 예쁜 얼굴도 유리창에 눌러 대면 돼지 코가 되잖아요. 인간은 죄를 이기려고 자꾸 계명을 지키고 말씀을 지키려고, 안식일도 지키고 십일조도 지키려고 애를 쓰는데 문대면 문댈수록 본인자체가 괴물인 것이 더욱더 분명해져요.

저도 오랫동안 교회에서 괴물만 봐 왔어요. 어릴 때부터 장로입니다, 목사입니다, 신학박사입니다, 신학교 교수입니다, 전부 다 괴물이에요. 본래의 내 모습은 계명 앞에서 계명을 지키고자 평생을 소진하는 악마의 모습, 괴물의 모습이 인간의 본 모습이에요. 빠져 나올라야 나올 수가 없습니다. 홍해에 도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홍해가 막혀 있습니다. 백성들은 한결같이 만장일치로 모세한테 대듭니다. “우리가 죽을 자리가 없어서 물에 빠져죽으라고 여기까지 우리를 끌고 왔느냐?” 딩동댕, 맞는 이야기입니다.

뒤에는 애굽군대가 앞에는 바다가 있어서 옴짝 달싹 못합니다. 찬송가 가사에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하는 가사가 있잖아요. 요단강 건너면 천국이 보이는 줄 알고 있는데 요단강이나 홍해가 뭔가 아름다운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이 유일하게 마지막 드러나는 지점이 괴물의 모습, 악마의 모습이에요. 그것이 예수님의 모든 약속, 하나님의 모든 예언과 미래를 향한 약속의 꿈이 나는 싫다고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싫어. 난 예수님 자체가 싫어. 나는 내가 좋아.” 나 외에 나보다 더 좋은 분을 우리는 만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주님의 명령이든, 타인의 명령이든, 아내의 명령이든, 누가 됐든 우리에게 지시와 명령을 하게 되면 우리는 발작을 일으킵니다. “네가 뭔데 나에게 명령하는데? 내가 인간성 좋아서 참아준다. 돈 아쉬워서 참아주지 사회에서 만났으면 너는 나한테 죽었어.” 군대에서 그런 것 많잖아요. 고참 들 만나면 “사회에서 만나면 넌 죽었어.” 그런 마음이 들거든요. 이게 뭐냐,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무효화시키는 그 악마적인 괴물이 이미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괴물을 통해서 “그 악마의 모습아, 제발 좀 유리창에 너의 돼지코를 좀 비쳐다오.” 라는 것이 주님이 계명을 우리에게 투입하는 이유에요.

그래서 그 돼지코를 유리창에 보입시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잘난 맛에 산다는 것을 좀 명확하게 보입시다. 우리교인들 좀 점잖은 채 하지 말고. 헌금했다고 자랑하고, 기도 좀 했다고 자랑하고 좀 그럽시다. 그게 마귀거든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짓을, 그 짓을! 하지만 그 짓을 해야 내가 주인공이 되는 영화가 상영 돼야 그 재미로 인생을 버틸 수 있거든요. 이렇습니다. “토해 내치리라.” 토해 내침을 당할 때 그 사람만 구원받습니다. 내 속에 괴물이 나갈 때 악마가 나갈 때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장군의 아들이요, 훈련소에서 장군의 아들이 아닌 것처럼, 그야말로 졸병으로 제대했던 그 아버지의 그 아들처럼 실컷 훈련받을 때 아버지는 뒤뜰에 앉아서 “이제 좀 환상이 깨지겠구먼. 그래, 그게 바로 군인이다. 네 자신이 망가져야 해.” 하고 물끄러미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겁니다.

주께서는 계명 주셔서 우리 자체가 죄에 놀아나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로마서 7장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것이 진솔하게 체험되어서 진짜 현실 그 자체로서 외쳐야 돼요. “하나님이여, 저는 곤고한 인간이고 질곡에 빠졌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인간입니다.”라는 것을 그대로 토해낼 때 그렇게 토하게 한 것, 그런 고백을 하게 한 원동력이 바로 너를 건지려는 나의 작전이었어, 그 말씀이 겸하여 들려오지요. 그것이 25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다시 말해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나의소망인줄 알았는데 그 소망 분질러 버리고 우리의 구원은 나의 소망이 아니고 나의 계획이 아니라 주님의 소망 주님의 계획에 우리가 말려듦으로 구원받는 이 놀라운 작전, 주님의 창세전 혼자만 아는 비밀작전, 007작전입니다.

미리 알았어도 우리는 그 계획을 거부했을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손으로 쥐고 짜니까 마귀가 튀어나오고 죄가 튀어나오고 나 잘난 맛에 살아가는 우리 모습이 막 구정물처럼 떨어지는 거예요. 우리는 그 구정물을 축복으로 알고 감사하게 살아가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소망이 다 사기고 조작된 것인데 자기 꿈에 자기가 속고 놀아나고 모든 돈과 정욕을 자기 잘난 맛에 퍼 넣는 실책과 실수, 하지만 그것을 유발시킨 하나님, 그렇게 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작전으로 말미암아 구원되었기에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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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