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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3. 5. 24) 2강자유게시판에스겔

광주 강의(2013. 5. 24) 2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36)

광주 강의(2013. 5. 24) 42-2

잃어버린 것이 있다. 뭘? 본향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지요? 현대인들은 뭘 잃어버렸는지 조차도 모르는데. 사는 것이 살수록 꼬이고, 뭔가 놓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고. 이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에 대해 까맣게 잊고 살아갑니다. 언약이란 것이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자기 생활 속에서 증거를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을 간단히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미리 오는 것이 언약이니까 이 세상 전체는 그냥 물음표. 뭔지를 모르겠어요. 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것이 바로 유한 세상에 무한이 들어온 것입니다. 무한이 들어오면 유한은 무한을 이해할 수가 없지요. 왜냐? 유한이기 때문에 무한도 유한 식으로 이해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잖아.” 이런 식으로. 자신이 인간이니까 예수님도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예수님이 “너희들에게는 진리가 필요하다.”고 하셨을 때, 그들은 진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친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순교자가 발생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진짜 필요한 것은 그 순교자가 필요했다는 사실인데, 그 순교자는 누가 때려 죽여 만들었는가 하면 필요한 줄도 모르는 자들이 순교자를 만들었어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주체가 개입하면 현실이 조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 내가 손대면 현실이 나의 손때가 묻어서 본래 현실의 의미가 아니라 내가 다가간 것이 말썽을 일으켜서 왜곡된 현실(조작된 현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꼭 저와 같아요. 평소에는 음식물 쓰레기에 관심도 없다가 오랜만에 아내를 기쁘게 해주려고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했는데 일이 잘못 되어 두 번 일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져요.

인간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 힘쓰면 힘쓸수록 실타래 꼬이듯이 점점 꼬여서 갈수록 난감한 사태에 이르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유한에 하나님의 무한이 들어왔으면 유한에서 무한을 해석하라고 하면 안 되고, 해석 방법은 무한에서 유한으로 해석하는 방법뿐입니다. 잃어버린 언약이 현실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무한으로 유한에게 다가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한 자체에 무한이 찾아오게 되면, 유한 자체가 플러스 알파라고 합시다. 뭔가 여분의 것이 되도록 하는 방법은 이스라엘이 편안하게 쉬는데 갑자기 주변 모든 나라가 연합해서 침략해 와서 이스라엘을 황폐화 시키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은 자기가 생각했던 유한의 의식에서 벗어나서 무한의 하나님의 뜻에 일임하는 그런 개기가 되겠지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방식대로 이루려고 애쓰다가 극한을 맞이하면 ‘나의 방법 자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드는 행위만 추가했을 뿐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렇지만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나저러나 뭔가를 해야 하는데,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일은 더 꼬이고. 이렇게 될 때 ‘내가 믿는 무한, 내가 아는 무한, 내가 아는 하나님’ 이 모두는 내 주체 때문에 조작된 것임이 발각됩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고맙게도 곡(또는 마곡)이 등장합니다.

에스겔 38장 8절을 보면 “여러 날 후 곧 말년에 네가 명령을 받고 그 땅 곧 오래 황무하였던 이스라엘 산에 이르리니 그 땅 백성은 칼을 벗어나서 열국에서부터 모여 들어오며 이방에서부터 나와서 다 평안히 거하는 중이라.”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서 평안하게 잘 지내고 있는데, 9절에 보면 이방인이 광풍같이 쳐들어오는 겁니다. 14절 이하의 말씀을 봅시다. “인자야 너는 또 예언하여 곡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 이스라엘이 평안히 거하는 날에 네가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네가 네 고토 극한 북방에서 많은 백성 곧 다 말을 탄 큰 떼와 능한 군대와 함께 오되 구름이 땅에 덮임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이야기를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당하기는 이스라엘이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겨냥해서 한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 일을 벌이신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정리가 되었지요? 37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무덤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38, 39장은 이스라엘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주변 모든 나라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에 본의 아니게 같이 휩쓸림으로 인하여 이방나라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예언이 에스겔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나라가 구원 받는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0장 8절에 보니까 이방나라는 사단이 움직인다고 했어요. 그러면 이방나라에게 악마가 존재하고 사단이 있다는 것을 통해서 뭘 짐작해야 하는가 하면, 자기들이 이상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싫어하고 미워하는데, 이것은 자기들도 어찌할 수 없는 자기를 지배하는 어떤 다른 정신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게 어디까지 가는가 하면 39장까지 갑니다. 계속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38장에서는 이스라엘을 치게 해놓고, 쳤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39장 1절 이하에 보면 “인자야 너는 곡을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너를 돌이켜서 이끌고 먼 북방에서부터 나와서 이스라엘 산 위에 이르러 네 활을 쳐서 네 왼손에서 떨어뜨리고 네 살을 네 오른손에서 떨어뜨리리니 너와 네 모든 떼와 너와 함께한 백성이 다 이스라엘 산 위에 엎드러지리라.”라고 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다가 70년 만에 돌아와 편안히 거할 때에 곡을 대표로 하는 주변 나라들이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무조건 쳐야 돼요. 사방에서 몰려와 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당해야 하고, 그 후 하나님이 곡을 치게 됩니다. 시체 위에 시체 하나 더 추가하는 식입니다.

“너희들이 이스라엘을 쳤지.”라고 하면서 이방 나라를 하나님이 칩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억울합니까? 곡이 억울하지요. 자기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할 마음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치도록 하셔놓고, 이제 와서 “내 백성을 왜 쳤어?” 하면서 하나님이 곡을 치니까, 곡을 비롯한 이방 나라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얻어맞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것을 누가 시켰다고 했습니까? 사단이 시켰다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사단은 어떤 운명입니까? 곡(또는 마곡)과 같은 운명이에요. 하나님이 시켜서 욥을 시험했고, 착한 백성을 유혹했고,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못 믿게 했는데 그 벌을 사단이 몽땅 받아 유황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합당한 사단과 용과 뱀, 귀신, 불신자는 반드시 이곳으로 집결해야 합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분류 작업인데, 이것은 인간이 멈출 방법이 없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우리가 듣고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안목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복음도 안 받아들이고, 제 마음대로 살고, 잃어버린 것이 뭔지도 모르고 허전한 마음을 술로 채우려 하는 이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배당된 역할을 해야만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 주님에 의해서.

따라서 누가 구원 받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주님이 분류작업을 안 하신다면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하지만 주님이 지금도 쉬지 않고 분류 작업을 하고 계시기에 우리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본인들이 원한다고 가는 곳이 아니고 지옥 갈 자를 분류하는 방식으로 천국 갈 자로 분류된 자가 가는 곳입니다.

수박을 먹든, 참외를 먹든 천국 갈 자는 천국으로 갑니다. 천국으로 보내기 위해 그런 것들을 먹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자는 천국 가고,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진다.’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는 말이 아니라 생명책(새 언약의 주인공인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자가 간다고 했지요.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자만 천국 간다는 말을 왜 합니까? 그것은 지상에서 행하는 일로 천국과 지옥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잃어버린 것을 찾은 사람입니다. 찾았다고 해서 뭔가를 소유했다는 말이 아니고, 나를 포함한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게 된 사람을 말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할 때 사도바울은 이 모든 것을 안 사람입니다.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기뻐하면서 모든 것에 감사한다.’ 이 말은, 잃어버린 것을 찾았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0장 7절을 다시 봅시다.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이렇게 되어 있지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그 말씀에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 의식으로 그것을 해석하게 되면 하나님의 참된 의미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여기에서 “천년이 차매”라는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기는 ‘1,000년 후라는 말이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라고 했기에 ‘천년 후에 사단에 풀려나는구나.’ 생각할 것이고,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했으니까 ‘약 천년 후, 그리고 조금 더 지난 때에 세계 전쟁이 벌어지겠구나.’ 이것이 우리의 해석입니다. 이런 식의 해석을 ‘전천년주의’라고 합니다.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9절 “저희가 사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여기에 갑자기 성도가 나와요. 에스겔 38장에서 곡과 마곡은 누구를 공격합니까? 이스라엘을 공격하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로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이 에스겔 38장의 이야기라면 성도를 공격하는 것은 요한계시록 20장 이야기잖아요.

이것은 분명히 같은 취지이기에 인용된 것이란 말이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에스겔 38장에서 바로 요한계시록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사건이 있다고 했지요. 예수님이 오시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 20장을 해석할 때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담아야겠지요.

언약이 이루어 질 때가 예수님 부활할 때입니까, 재림할 때입니까, 십자가에서 이루어집니까? 분명히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어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면 십자가 지신 그 순간에 성도가 살아나야 하고,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3일 후에 부활하셨어요. 그러면 ‘다 이루었다.’가 아니라 아직 덜 이룬 것인가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고 했는데, 아담은 그것을 먹은 후에도 안 죽고 아이까지 낳았잖아요. 900년 넘게 살다가 죽었어요.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남자 갈비뼈를 세어보는 사람도 있어요. 진짜 남자 갈비뼈가 하나 모자라는지 확인한다고.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한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미 죽었다고 했으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예요.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우리가 아는 십자가에서 죽는 그것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잘못된 해석입니다.

에스겔 다음에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 있고, 요한계시록 20장을 해석할 때는 십자가의 취지가 담긴 해석을 하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어떤 해석인가?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 모든 사람이 죽었지요.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의 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고, 살아 있어도 죽은 거예요. 그러면 살아 있으면서 뭘 하는가 하면 해석을 해요. 날마다 현실에 대한 해석을 해내요.

해석을 하는데 어떻게 하는가? 유한에서 무한을 해석해요. 무한에 해당되는 것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기적, 영혼, 인간의 자유 등을 해석해 내는 거예요. 죄인인 주재에 무한에 있는(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해석하니까 이 해석이 옳은 해석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20장을 해석할 때 예수님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에스겔 38장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여기서 반드시 싸움(전쟁)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싸움이란 개념에도 역시 언약이 포함되어야 되는데, 언약이 빠지고 싸움을 해석하면 ‘나는 성도이고 나의 반대편은 적이다.’ 이렇게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가 바로 하나님 전쟁에 나쁜 편에 속해 있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으로 이미 확정되었어요.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옆에 강도 두 사람 빼고 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순교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목자를 치니까 양이 흩어져 버렸어요. 목자를 치니까 목자는 죽고, 목자가 죽는 자리에 양은 몇 마리 남았습니까? 없지요. 바로 이겁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없어요. 없는데 말씀대로 전쟁하는 기능을 통해서 없던 성도가 드러나고, 없던 사단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니 요한계시록 해석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십자가 의미를 담아서 해보니까, 십자가 의미가 옳으면 우리는 항상 자기를 좋은 편에 둬요. “우리는 성도다. 그러면 우리 빼고 다른 사람은 마곡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건 터무니없는 해석이지요.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양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일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복됩니다. 반복은 동일성의 되풀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죄인들의 안목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반복인가? 차이의 반복입니다. 어떤 학생이 지난 번 시험에서 1등을 했어요. 이번 시험에도 1등을 했어요. 이것은 반복입니까, 아닙니까? 이것은 반복이 아니에요. 그냥 1등한 학생이 1등을 한 거예요.

1등한 학생이 2등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차이가 발생했지요. 엄마가 어떻게 합니까? “왜 2등 했니?” “한 문제 실수를 했어.” “그럼 그렇지. 네가 2등할 아이가 아닌데. 다음에는 실수하지 마라.”

그런데 다음에 1등을 기대했는데 또 2등을 했어요. 그러면 이 학생은 처음부터 1등할 학생이 아닌데 전번에 1등한 것 자체가 수상하게 되는 거죠. 2등이 두 번 있었잖아요. 이게 동일하지요. 우리 아이는 1등할 아이가 아니고 2등할 아인데 전번에 1등한 것은 소 뒷걸음질 하다가 쥐를 잡은 것처럼 우연히 한 것이지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런 경우가 있었어요. 내가 1등을 했거든요. 선생님이 제게 상장도 안 줬어요. ‘너 같은 학생이 1등을 하다니 이건 뭔가 수상해?’ 선생님이 기대한 학생이 아니었지요. 2등한 학생이 다음 시험에서 또 2등을 했다. 그러면 이것은 반복이 아닙니다. 2등한 학생이 1등을 했어요. 그러면 부모가 헷갈리는 거예요. “야, 너는 1등이야, 2등이야? 김1등이야, 김2등이야?” “나는 김1등도 아니고, 김2등도 아닙니다. 저는 김차이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마땅히 성도다.’라고 여기는 이것을, ‘너는 성도가 아니고 마곡에 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다.’라는 것을, 이 차이를 되풀이 하는 식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언약을 주시는 겁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남자가 애인을 만날 때, 그냥 서서 말하면 되는데 벽 쪽으로 밀어붙여서 도망칠 곳도 없이 하는 것처럼 주께서 자꾸 우리를 밀어붙여요. “네가 이 본문을 알아?” “저는 성도입니다.” “뭐, 네가 성도라고? 마음속에 음행하면서 성도라고?” “그것은 죄지요.” “그러니까 넌 죄인이잖아.” 이런 식으로 자꾸 밀어붙이지요.

그렇게 한다는 자체가 이미 ‘너와 나는 언약을 성취하는데 같은 동업자다.’라는 거예요. 이게 차이의 반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죄인이고 예수님은 의인인데, 의인과 죄인이 결합해서 반복되는 경우에만 십자가 의의가 드러납니다. 십자가는 죄 없는 어린양이 피를 흘린 것입니다. 왜 피를 흘렸습니까?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기에서 ‘세상 죄’가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그것을 지고 가는 ‘어린 양’이 있지요. 그러면 이 문장에 ‘세상 죄를 진다’는 것도 포함하고, 세상 죄를 담당할 분이 ‘너는 세상 죄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로 뭉쳐지면 십자가 사건이고, 새언약이고, 이것이 십자가의 반복이 되면 우리 속에는 내가 알고 있던 성경 해석과 늘 차이가 되풀이 되는 겁니다.

‘차이의 반복’ 우리가 아는 것은 ‘똑같은 것의 반복’ “같은 행동을 왜 반복하는가?” 라는 말이 왜 틀렸는가 하면 우리는 주체를 안 건드리고 ‘어제의 너나 오늘의 너는 똑같은 인간이다.’라고 규정한 후에 “어제도 수박 사더니만 오늘도 수박 산나?” 어제의 그 인간이 오늘도 똑같이 수박은 산 것으로 보지만, 주께서는 우리를 똑같은 인간으로 안 봐요. 우리를 동일 주체로 보지 않고 어떤 기능으로 봅니다.

죄 짓는 기능으로 십자가 안에 초청받는 사람으로의 존재, 우리에게는 ‘내가 어떠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언약 안에서 남이 모르는 죄의 깊이와 높이를 아는 그 기능으로 할당된 그 자리에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요한계시록 20장 8절을 누구한테 이야기한 겁니까? 성도한테만 이야기한 거예요. 불신자들에게는 말해봐야 소용없지요. 그런데 누가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습니까? 받아들인 그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성도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서 이 말씀이 우리 속에 역사하는 겁니다. 잊을 수가 없지요.

에스겔 38장 마곡을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38장에서는 사단이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을 모르면 전쟁은 옛날 한 때 있었던 사건이 되지요. 그러면 반복이 안 됩니다. 반복이 되는 것은 언약으로 다뤘다는 것이고, 반복이 안 되면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에 휩쓸려 간 거예요. 과거는 기억에만 있지 이미 가버렸어요.

길을 가다고 40년 만에 초등학교 때 친구를 만났어요. 초등학교 시절 그녀는 너무 예뻤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늙었어요. 늙었다는 판정은 내가 합니다. 그러면 둘 중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그녀는 너무 예뻤다.’는 이것만 간직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것을 선택할 자유는 누구한테 있습니까? 내가 주체니까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이 생각을 상대가 알았다면 뺨을 맞았을 거예요. “넌 안 늙은 줄 아냐?” 라고 하면서. 그처럼 인간에게 가장 구원에 방해되는 것은 뭡니까? 마곡의 정체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사단으로 나와 있지만 에스겔 당시에는 그게 바로 나고,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죽으면 천국 간다.’고 착각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누구 마음대로 천국을 가?’

왜 그들은 천국을 자기 나라로 생각했을까요? 에스겔 38, 39장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나와요. 유대인 본인들이 아브라함 혈통이니까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러니 누구 봐도 자신들은 천국 간다고 믿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고 했어요.

“그녀는 너무 예뻤다.” 누구 마음대로? “나는 내 아내를 너무 사랑해!”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가 지옥 가면 너도 지옥에 같이 갈래?”라고 물어요. 그러면 “내가 미쳤어요. 지옥가게.” “그러니까 네가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의 주체에서 형성된 것이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주체를 죽입니다. 이것이 언약이고 이것을 반복시킵니다. 그러니까 매일 하나님이 우리 주체를 죽이십니다. “이번에 일어난 일은 결코 너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니까 네가 너를 닦달하지 마라.”

TV드라마 [사랑과 전쟁]이라는 것이 있어요. 부부간의 이혼문제를 다룬 것인데, 서로 싸워요. 왜냐? 둘 다 주체를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바람피우니까 그것을 안 여동생이 오빠한테는 말하지 않고 상대 여자에게 닦달을 합니다. 왜냐? 오빠한테 알리면 여자가 오빠에게 이혼하라고 협박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 여동생은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가 하면, 오빠가 자기 오빠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자기가 의미를 붙일 때 이것은 일방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인간들에게 십자가에서 살해당한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무한)입니다.

곡과 마곡이 이스라엘을 칠 때 이스라엘은 오해했어요. ‘언젠가는 우리가 복수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오늘날 성도를 말하고, 성도는 성도가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언약에 같이 동참될 때만 성도가 됩니다. 성도란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는 현상을 표출하는 존재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 받고 의인 되었어요.’라고 십자가를 보여주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 능력은 자기의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 사람은 평생을 내 것이 아닌 주님의 것으로 사는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그런 자리를 할당 받았습니다.

할당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설거지 해놓은 국자, 그릇이 되어서 주께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빼서 쓰십니다. 그 가운데 항상 십자가는 반복됩니다.

십자가는 차이의 반복. 어떤 차이? 나는 예수 믿으니까 의인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내일이 되면 그것이 바로 죄다. 라고 바뀌게 되는 것, 죄로 지적되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데 사용되어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내게 믿게 된 것은 전부 예수님 덕분이라고 고백하고, 그렇게 고백했기에 나는 신자라고 우기다가 다음 날 또 얻어터지고. 늘 이렇게 차이의 반복이 되풀이 되는 것. 이것이 주께서 날마다 성도 되게 하시는 작업입니다.

한시도 우리가 성령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속했다는 것은 공간을 의미하고, 영은 실체를 말하는데, 영이라는 공간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영을 소유하고 있는 나.’ 이렇게 되어버려요.

이런 더러운 버릇이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보는 주체에서 나왔는데, 워치만 리가 이런 주장을 하지요. “성령 받았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영에 속했다.” 영은 넓고 우리는 작고, 영은 무한이고 우리는 유한이고, 무한 속의 유한은 무한을 위해 봉사하게 되어 있고.

우리가 뭘 해도 죄인 되게 하셔서 십자가 피에만 주목하도록 인도받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환경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고, 내일은 주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내일 또 감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안 됩니다.

차이의 반복인데, 차이가 반복되면 동일성으로 바뀌고, 동일성으로 뭉쳐진 것을 주체라고 합니다. “어제 나 은혜 받았어.” 이것이 동일성입니다. 어제 은혜 받은 나와 오늘의 내가 동일하다는 것이지요. 나이 많은 분들에게 사진 찍자고 하면 싫어해요. 왜냐하면, 그 사람 기억 속에는 젊은 시절 아름다웠던 때가 담겨 있어요. 그런데 다 늙은 지금의 모습을 사진을 찍어서 본다는 것이 끔찍한 거예요.

꿈속에 등장하는 나는 항상 젊은 모습입니다. 우리의 정신은 28세로 고정되었어요. 나이 60이 되어도 생각하는 것은 ‘젊은 내가 왜 이러지?’ 이러고 있어요. 나의 주체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반복하는데, 우리는 나름대로 고집이 있어서 선악과 따먹은 나의 주체를 늘 되풀이하면서 기억 속에서 반복합니다.

치매 걸린 분들을 보면 자꾸 옛날이야기를 반복하면서, 그 때로 돌아가서 “왜 네가 내 집 팔았어?” 이렇게 나와요. 그 집 팔아서 새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것은 생각 못해요. 옛날 그 집이 내 집인 거예요. 왜? 그 집이 있어야 그 때 살았던 내 주체가 있는 것이고, 그 주체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지요. 늙어버린 주체는 내 기억에는 없어요.

잃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합니다. 그것이 뭐냐? 언약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그냥 장난삼아 죽은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실 때 그냥 오신 것이 아니고, 성경 전체가 주수님의 주 되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은 천국 가서 그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세상은 바로 그 주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간단한데 달리 생각하면 왜 그렇게 복잡한지, 그 원인은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어야 만족하는 잘못된 마음가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을 깨달았사오니 날마다 주님께 맡기고 주께서 쓰시는 대로 감사하게 받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6. 13. 09:5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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