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이름과 존재와 기능)130523-20강b -이 근호 목사
가락교회-70이레 논문(이름과 존재와 기능)130523-20강b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교회-70이레 논문(이름과 존재와 기능)130523-20강b -이 근호 목사
제 20강b
방금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게 여기 보면 아까 제가 첫째 시간에 피를 바가지처럼 붓는다, 했잖아요. 그걸 성경의 표시는 뭐냐 224 페이지 표현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성전인데 물이 나온다. 물이 나오는데 그 물이 그냥 발목만 적셔요? 어떻게 돼요? 물이 깊이가 결국은 물이 차고 넘쳐서 흠뻑 다 뒤집어쓰죠.
그러면 묻습니다. 사람이 큽니까? 덮어씌우는 물이 더 범주가 넓어요? 물이 범주가 더 넓죠. 거기서 식물도, 물고기도 뛰놀고 하죠. 그럼 그 물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거예요. 성전에서 나온 물이죠. 성전에 수도공사 했어요? 왜 성전에서 물이 나오죠? 우리가 찾아가면 되는데. 성전이 있다. 찾아가면 되잖아요. 이게 옛날 시편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하는 식이잖아요.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 시편에 분명히 나오잖아요. 그냥 부르지 않고 찬양을 했다 이 말이죠.
그럼 오늘날 교회에서 성가대 할 때 성가대 근거가 뭡니까? 성가대 근거가 구약에 나오는 시편에서 찬양을 했기 때문에 찬송한다는 거예요. 참 성경해석 보면 참 힘들죠. 시편에서 찬양했다고 해서 ‘성가대 만들자.’ 왜, 시편의 찬양의 시편은 성가대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성가대가 했던 그 가락은 다 잊어버리고 가사만 적어놓은 것이 시편입니다. 그러면 그걸 그대로 모방해서 오늘날 성가대를 만들면 그게 하나님이 오게 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건 뭘 몰라서 그러느냐 하면 성전이 존재가 아니고 이게 사건화하고 분해됐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여러분이 집에 가시면 그곳이 성전입니다. 그냥 가시면 안 되고 여러분 집에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무슨 사건이냐 하면 그걸 언약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게 바로 224페이지 내용이니까 어려우니까 내가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사건, 사건 했는데 사건이란 말은 성경에 잘 안 나오는 언어고 그걸 정리하다 보니 사건이라 했는데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망했죠? 이스라엘 망했다는 증거가 뭐죠? 사람이 흩어졌으니까 망한 겁니까? 뭔가 불타버렸어요. 성전이 불타면 망하는 거예요. 왜 성전이 불탈 때 이스라엘이 망했죠?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이 없으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이 좌정하시는 곳이라고 지정된 곳이 뭐냐 하면 성전입니다. 이건 누가 정했느냐 하면 사람들이 정한 게 아니에요. 이것을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라는 겁니다. 다윗 약속(=언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조건이 있어요. 성전을 통해서 너희와 함께 있겠다. 존재니까 함께 있겠다.
유대인들은 오해했습니다.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성전이 불타 버리니까 하나님이 이제는 우리를 떠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두 번째 조건을 몰랐습니다. 그 성전은 너희들이 만든 성전이 아니고 누가 만든다? 내가 만든 성전에 내가 있음으로서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게 사무엘 7장에 분명히 그렇게 돼 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여 이 성전을 받으소서.’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 성전은 안 받는다.’ 그럼 뭐냐? “내가 직접 만든 성전에 내가 있겠다.” 했습니다.
그러면 그 성전이 뭡니까? 물었겠죠. 하니까 “내가 다윗의 가문을 혈통적이 아니고 언약 적으로 이뤄질 그것을 성전으로 하겠다.” 혈통은 아니고 언약 적으로 잇게 하는 그 다윗의 가문에 내가 성전으로 있겠다.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 성전은 다윗이 아니고 언약 적으로 연결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솔로몬 이예요.
솔로몬이 언약 적입니까? 내가 알기는 솔로몬은 다윗의 혈통적으로 된 다윗의 아들로 아는데, 그게 혈통적 아들하고 언약적인 아들하고 차이가 뭐냐? 솔로몬이 아버지가 없어요. 다윗이었으면 참 좋겠는데 마태복음 1장에 보니까 이게 누구 자식이냐 하면 죽은 자의 자식, 우리야의 자식 이예요. 엄마는 있어요. 누구냐, 밧세바에요. 엄마의 남편이 따로 있습니다. 누구냐, 우리야가 남편 이예요.
그런데 옛날 여자는 누구 이름이냐 하면 남편에게 종속돼요. 그냥 여자 이름이 아니라 누구의 아내 여자에요. 그래서 누구에게서, 누구의 아내에게서, 이렇게 돼요. 누구의 아내냐?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누가 태어났느냐? 솔로몬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밧세바고 엄마의 죽은 남편이 우리야고, 그런데 우리야에게서 솔로몬의 아들이라 하면 우리야는 살아있는 다윗이 아니라 우리야,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누구 때문에 죽었습니까? 다윗에 의하여 미필적 고의 살인에 의해서 죽었던 그 우리야의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바로 다윗의 죄를 지적하면서 우리야를 살리기 위해서 준 아들이 누구냐, 여디디야, 솔로몬입니다.
그럼 솔로몬을 볼 때마다 다윗은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아~!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모친의 죄 중에서 아예 죄를 짓기 위해서 태어났구나. 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태어난 것이구나.’ 누굴 볼 때마다? ‘나 같은 죄인은 저주받아야 되는데 죄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피어나다니, 이건 기적 중에 기적이죠.’ 어떻게 죄에서 의가 피어납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심이고, 살으심은 우리의 의를 위해서 살아나심이라. 로마서 4장에 잘 나오죠. 롬4장 25절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제가 로마서 지난주에 설교하면서 ‘인간은 죄를 위하여 살아있다.’ 고 했죠. 인간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야 되는데 죄의 처리를 누가 한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의가 하잖아요. 하나님의 의가 죄를 처리 했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의 종이 되는 거죠.
옛날에는 우리는 누구다? 죄의 종이었어요. 왜, 죄가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죄에서 의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차단됐기 때문에 그냥 죄에 있어서 죄의 종인데, 이제는 너희가 죄가 아니고 의의 종이라. 의의 종은 우리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죄와 상대했기 때문에 의가 의로서 태어나는 겁니다. 그게 의의 종이예요.
그럼 개혁주의에서 어떻게 가르칩니까? ‘여러분들은 옛날에 성령 받기 전에, 예수 믿기 전에는 여러분들이 마귀에 속해서 죄 졌습니다. 이제 성령이 여러분한테 오시고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여러분들은 죄 없는 새사람 됐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착한 일만, 성경에 나온 대로 사도바울의 권면과 착한 일만 다해서 남들 보기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해서 의의 종으로 살아가시면 이것이 하나님께 거룩한 자가 되라 한 명령대로 거룩한 자 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사도의 모든 권면과 명령은 폼으로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에게만, 전에는 지키질 못했는데 이제는 성령의 은혜로 이제는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됐기 때문에 여러분 지켜야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맞습니까?
그러면 그걸 못 지키면? 못 지키면 첫째, 성령 없는 사람이 되고, 둘째, 성령이 없기 때문에 구원 못 받는 사람이 되고, 첫 번째 그걸 못 지키면 못 지킨 만큼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해서 영광을 가리게 되고, 영광을 가렸다는 말은 그 순간 성령을 소멸했기 때문에 못 지킨 것이고, 소멸했다. 충만했다.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소멸과 충만함 사이에 틈이 갈라져서 문제고, 그 틈 사이를 메울 수 있는 힘이 없어 문제고, 그럼 그 틈 사이는 그냥 틈 사이가 아니고 마귀가 들어와서 문제고, 어떤 때는 마귀가 일곱 명 들어오고 어떤 때는 성령이 들어오고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만약에 침해 걸리면 어떻게 하죠? 침해 걸려서 ‘예수가 누구지?’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미리 사전에 녹음해야 돼요? 아니 침해까지 갈 것도 없어요. 아침에 은혜 받았다가 오후 4시에 은혜 못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필 오후 4시에 주께서 강림하시면 어떻게 해요? 별로 마음이 안 기쁠 때 주님이 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성령이 왔다가 소멸되고 왔다, 갔다 해버리면 결국 이건 기존교회에서 성령을 뭐라 해요? 마태복음 25장 이 비유에 의하면, 처녀가 뭘 준비한다? 기름 준비한다. 기름이 있다가 없다가 이렇게 돼 버리면 기름 없을 때 오시면 어떻게 돼요? 기름 준비 하라 했는데, 물론 기름 닳는 건 아니지만, 이 모든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성경을 구원론 위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이 여기 있다. 이 성경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있다. 이게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것 때문에 망한 거예요. 성경은 우리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풍랑이 일 때 제자들은 물 퍼내느라고 애썼잖아요. 주님은 주무시고,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한테 화났을 거예요. 우리들은 물 퍼내는데 주님은 주무시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을 깨웠을 때 주님이 바다를 먼저 꾸짖습니까? 제자들을 먼저 나무랐습니까? 제자들을 먼저 나무랐죠. “왜 두려워하느냐”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뭡니까? 바다를 향하여 꾸짖으시고 바다가 잠잠해졌죠.
그러니까 제자들이 ‘야, 살았네. 야, 우리는 살았어. 우리는 구원됐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뭐라고 했어요? 그 이야기 안 하고 뭐라고 했습니까? ‘저분은 누구시기에’ 결국 누구시라는 말은 뭐냐, 이제는 나의 구원이 관심이 아니고 당체 우리와 함께 있는 저분은 도대체 어떤 분이란 말이냐? 예수님 그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둔 거예요.
성경은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거예요. 그럼 구원은 뭐냐, 구원은 예수님 그분이 우리에게 그냥 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챙기려고 하다 보니까 구원을 챙겼다는 말이 아니라 그분이 그냥 주셨다 하는 것을 우리가 믿는 거예요. 그 정도로 구원이 좋은 게 아니고 도대체 뭐하시는 분이기에, 왜 구원을 공짜로 주시느냐? 이렇게 돼야 돼요. 뭐하시는 분이기에,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 분이기에, 구원될 자격도 없는 우리를 그것도 창세전부터 이미 예정하사, 어떻게 공짜로 주시느냐 이 말입니다. 관심사가! 관심사가 나에게 관심이 떨어지고 주님한테 관심이 가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내 인생이 행복하니, 불행하니, 왜 꼬이느냐, 왜 몸이 아프냐. 왜 안 낫느냐, 왜 애 성적이 내려가느냐, 우리교회는 왜 10년 내 부흥도 안 되고 있는 사람도 나가버리고 왜 헌금도 안 들어오고 왜 이러느냐.‘라는 것이 과연 우리가 관심을 둘 이유가 아닙니다.
미장원에 가서 왜 머리가 안 나오는지 모르겠네. 기도하고 갔는데 왜 머리가 안 나오지? 이게 우리가 이런 데다 관심 둘 필요가 없는 거예요. 미장원에 가서 머리가 잘못 되든지, 미용사 초자가 와서 머리를 왕창 망치는 것도 이것은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신 그분께서 그렇게 해놓고 머리 안 나왔다고 불평하니까 “이 믿음 없는 자들아, 왜 머리 안 나왔다고 두려워하느냐” 똑같은 책망 받아요. 참, 당뇨 있는 사람 앞에서 이런 소리 하려니까 미안한테, 한 달 전에 제가 강의할 때 우리 어머니 잃어버렸다 했죠? 제 마음도 그런 거예요. ‘어머니 찾아야 될 텐데, 빨리 경찰서에 신고해서 찾아야 될 텐데.’
그러니까 사람은 있는 사실을 있는 사실을 잊는다는 것과 그걸 인식하는 것과의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런데 인식을 못했다 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닙니다. 제가 인식을 못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게 믿어져야 그게 믿음 이예요. 믿음이란 것은 내가 인식을 해야 믿는다면 이 인식이란 것은 아까 이야기한 침해 걸려버리면 인식은 한꺼번에 다 날라 갑니다. 신경세포 시냅스가 다 끊어져서 예수가 누군지 아무도 몰라요. 심지어 자기 아들도 모르고 남편도 모르고.
제가 며칠 전에 어머니한테 물었어요. ‘어머니 제 이름 뭡니까?’ ‘몰라.’ ‘형 이름이 뭡니까?’ ‘이.. 몰라.’ ‘어디 사십니까?’ ‘몰라.’ 아무것도 몰라요. 아들 집도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거기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물으면 웃습니다. ‘쳇, 그것도 모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어머니 이 내용이 중요한 내용인데 이름도 몰라, 그런데 내가 ‘어머니, 예수님 믿습니까?’ 라고 방금 물었죠? 요걸 여러분, 사도의 명령과 지시라고 봅시다. 내가 물으니까, 예수님을 ale으니까 어머니가 그 순간, 믿는 순간 뭐가 돼요? 기억이 나죠. 내가 안 물었으면 어머니가 평소에 예수님 생각 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하죠. 자기 아들 이름도 모르는데 무슨 생각을 해요? ‘어머니, 예수 믿습니까?’ 물으니까 ‘내가 믿지, 그래, 내가 왜 예수를 안 믿어.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는데.’ 이야기했거든요.
그렇다면 사도의 모든 지시와 명령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아내 된 자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는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내가 그걸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로 하여금 불일 듯 그 말씀이 이미 실시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겠죠.
그렇다면 그 자랑, 그 공로를 누구한테 돌려야 되겠습니까? 지 믿음 좋을 걸 해야 되겠습니까? 누구한테 돌려야 되겠어요? 아! 예수님이 저를 버리지 않고 지금도 주께서 이렇게 살리는구나.‘ 모든 영광을 주께 돌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 돌린다면 이게 인간과 인간 사이에 교인들 간에 기도 경쟁, 믿음 경쟁, 헌금 경쟁 있어요? 없어요? 이런 게 있으면 안 돼요.
어떤 사람이 돈 100원을 헌금했습니다. 그러면 ‘에게, 100원’ 하지 말고 누가 하게 했습니까? 주께서 하게 하셨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행전에서 재산 반 바쳤잖아요. 그럼 누가 반 바치게 했습니까? 주께서 반 바치고 반 바쳤다고 죽게 하셨고, “니가 사탄에 속아서 성령을 속임이라.” 해서 죽게 하셨고, 그러니까 우리는 그걸 보고 주께서 살아있다는 것을 또 다시 느끼는 거예요. 왜 우리는 반만 안 냈습니까? 우리는 10분의 얼마, 말도 부끄럽다. 정말. 우리는 반만 안 냈겠어요. 헌금하다가 빼는 우린데. 그럼 우리는 죽어도 100번이 뭡니까? 막 헌금하려고 하다가 레슨비 빼서 줘버리는데. 돈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우리끼리는 돈 이야기하지 맙시다. 예민하고 민감한 문제예요.
인간이 돈을 이겨요? 미쳤습니까? 돈을 이기게. 인간은 돈은 못 이깁니다. 헌금을 하는 것은 배나 갚아줄 줄 생각하고 돈 놓고 돈 먹는 식으로 하는 것이지, 돈을 이겨요? ‘아휴, 돈이 처치가 안 돼.’ 이런 사람 봤습니까? ‘주여, 다림질해서 바치는 거 봤죠? 봤죠?’ 더 달라는 이야기거든요. 지금 내는 이 돈이 어떤 돈인데 생돈을 줬으니까 달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인간이 돈에서 자유로워요?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를 사랑하면 반드시 하나를 미워하게 돼 있어요. 따라서 그렇게 주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을 두 자로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성전’이라 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이 성전이 어떤 성전? 거룩한 성전이죠. 고린도전서 3장 16절 맞습니까? 원래 성경에 3장 16절이 중요한 구절이 많아요. 요한일서도 그렇고 요한복음도 그렇고.
우리 상식에서는 뭐냐 성전은 담배도 피우지 말고 술도 마시지 말고 몸도 깨끗하게 해서 ‘자, 자,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주의 성령이 맘껏 들어오셔서 착한 일 맘껏 하소서.’ 이게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성전이잖아요. 그건 또 조작이라. 왜냐 하면 우리의 성전은 말씀이 들어와야 돼요. 말씀은 우리가 좋은 것만 고르는 습관이 있는데 말씀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했던 역사가 다 들어옵니다. 다 들어오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까 뭣 때문에 멸망했다 했습니까? 부동산, 건축, 눈에 보이는 성전, 이거 불타니까 끝났다고 생각했거든요.
주께서 언약으로 만든 성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고 난 뒤에, (지금 에스겔 하니까) 포로 잡혀 갑니다. 그런데 에스겔 포로 잡혀 간 동네가 어디냐 하면 가나안 땅이 아니고 바벨론, 그발 강가 그쪽에 가잖아요. 그쪽이 뭐가 되느냐 하면 새로운 처소가 돼요. 에스겔 37장에. 한번 봅시다. 공식 세워 봅시다. 하나님 믿는 곳이 성전이 아니고 하나님 이름이 계신 곳이 성전이죠. 하나님 이름은 그냥 이름이 아니고 기능이 있다 했죠. 기능!
그 기능이 뭐냐 하면 너는 이렇게 죄인데 내가 너에서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잡아서 너의 피로 용서해준다는 그 용서의 기능이 있는 곳이라면 그게 무조건 성전 되겠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이 오셔서 거룩한 말씀이 오면 우리는 거룩한 말씀이, 그냥 말씀이 아니고 거룩한 말씀이 오면 거룩한 말씀이 기준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다. 이게 규정이죠. 우리 입장은 실질적으로 육체와 육체가 관계하지 않으면 아직까지는 덜 간음이다. 간통이다. 마음속으로 간음했다고 다 잡혀가면 사랑과 전쟁에서 드라마 되지도 않습니다. 안 되죠. 진짜로 몸과 몸을 섞어야 그래서 간음이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거룩한 말씀이 뭡니까?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죠. 형제보고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죠. 그게 우리 속에 팔락팔락하고 날아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로 버팁니까? ‘우리는 내가 아직도 바람피운 적은 없습니다.‘라고 버티죠. 그러면 거짓이 되려면 뭐해야 돼요? 누가 우세해야 돼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그것도 우세하고 ’맞습니다. 내가 이거 아직까지 육체적인 관계 안 했으니까 간음 아닙니다, 라는 이것이 바로 죕니다.’하고 누가 드러내요? 주의 말씀이 들추어내면 그 장소가 무슨 장소? 죄가 드러나고 죄에 대해서 용서가 주어지는 장소, 거룩한 공간이죠. 성전입니다. 회개 없이 구원되는 법은 없습니다. 평생 회개 없이 구원되는 법은 없습니다. 울고 불고가 회개가 아니고 ‘이미 나는 구원받았구나. 아! 그렇구나. 아, 그러기 때문에 피구나.’ 이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그 틈새에서 나오는, 그걸 아까 사건이라.
언약은 반드시 사건으로 와서 우리 존재를 완전히 분해시켜 버리죠. 존재를 분해시킨다는 말은 우리는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 이러거든요. 오늘 아침 8시에 내가 성경 봤습니다. 성경 봤다 하면 ‘하나님이여, 아침 8시에 성경 3장 봤습니다. 오늘 일당 다했습니다.’ 하루 종일 성경 볼 수 없으니까. ‘성경 봤습니다. 성경 안 봤다 소리 하지 마세요. 큐티 했습니다. 분명히. 어제 빠졌는데 오늘 곱빼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했다 말이죠. 그러면 이게 사건이 아니고 나의 존재에 담기죠. 존재는 바구니예요. 바구니에 아침에 큐티 했고 오늘도 지하철에 걸인한테 돈 1000원 주고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하고 담는 바구니죠.
바구니가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는 바구니 자체를 기뻐하고 그걸 지키려고 사수하고 그것 가지고 남한테 자랑 질 하고 나도 믿음 있다는 것을 그것으로 확인하고 그것이 과연 뜻인지 하나님을 상대로 실험하고 오늘 착한 일 했으니까 복이 오는가 보자, 우리 목사님이 분명히 착한 일 하면 복 준다고 했는데 복이 언제 쯤 오려는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예상 밖의 행운이 찾아오는가, 로또도 한번 사보고, 이렇게 하는 그것이 누굴 위해서? 나의 존재 바구니를 단단하게 딱딱 굳혀서 누가 뭐래도 믿는 자 되고 싶은 충동에서 나온 거죠.
그게 사건이 오게 되면 뭡니까? 예를 들면 난데없는 사건이 오거든요. 우편함 딱 열어보니까 지난 6일 전에 자유 로에서 과속했습니다. 5만원. 갑자기 아침에 은혜 받은 거 다 깨져버리고 ‘주여 분명히 기도했잖아요. 오늘도 아무 일 없도록. 그런데 앞 차는 안 걸리고 내 차만 걸리고, 하필 내가 운전할 때 걸리고 해서.’ 할 때 그게 5만원 벌려고 하면 얼마나 해야 되겠습니까? 얼마나 속상해요. ‘주여 왜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십니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할 때 그 순간에 뭐냐 하면 우리를 수술대에 눕혀놓고 내시경에 우리를 칼로 하나하나, 아롱사태 따로 잘라내고 안심 잘라내고 말씀으로.
그러니까 이게 히브리서 4장에 나오죠.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는 벌거벗은 자로 골수와 다 쪼개버리죠. 다 쪼개버리면 어떻게 돼요? 그 쪼개진 틈 사이에 진짜 말씀의 원 뜻이 우리 속에 다 담기게 되죠. 이웃사랑? 이게 이웃사랑이야. 뭐, 봉사? 이게 봉사야. 그게 들어오게 되면 어느 것 하나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했을 때 그 분위기가 ‘나는 개 같은 여자입니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고 그 공간을 통해서 주님께서 맘껏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공부 잘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공부 못해도 구원받게 해주시는 걸 감사할 때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제발 남하고 비교하지 마시고 특히 자기 자신과 비교하지 마세요. 자기한테 벌주지 마시고 자기한테 화내지 마세요. 그리고 자기를 용서하세요. 오늘 복음입니다. 자기를 제발 용서해 주세요. 남보다 못한 인생 가졌다고 자기를 제발 닦달내지 마시고 그 못난 인생도 용서했잖아요. 주께서 용서했는데 내가 뭔데 나를 용서 못해요? 주의 피보고 용서하거든요.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 그게 두 자로 거~룩 이예요. 회개한 그 모습이 거룩 이예요.
그래서 225 페이지 봅시다. 제가 이 소리를 개혁주의 신학 학회에서 했으니까 그들이 얼마나 그야말로 화를 내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225 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한 줄만. 『‘개혁’과 ‘쇄신’은 실은 거짓말이요 위선이다.』 이걸 개혁주의 신학회에서 교수들 앞에서 했거든요. 개혁? 에이, 씨, 진짜 위선자들. 가증한 인간들. 그걸 예수님은 뭐라 했습니까? 위에는 하얀 페인트 회칠하였지만 속에는 뭐가 있다? 해골이 들어있죠. 속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뭐가 더럽다? 나오는 게 더러워요. 개혁이라니. 거짓말이고 위선이라. 이걸 문자로 박아놔 버렸어요. 그러니 그걸 봤을 게 아닙니까?
왜 위선이냐? 『과거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와 미래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 사이의 균열이 내부적으로 따로 시간 층을 성사시켰고 수시로 변화는 외부적 동질성을 모색하려고 시도한 것 뿐이다.』도대체 무슨 이야깁니까? 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말을 어렵게 썼어요? 쉽게 할 말을 누구 애 먹이려고 어렵게 썼습니까? 이게 논문이거든요. 논문이라 책잡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표현에 완벽에 완벽을 기해야 되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과거를 다듬는, 이걸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있습니다. 보입니다. 인간이 과거에 이미 경험을 했잖아요. 과거가 인간 속에 과거가 이렇게 가죠. 계속 가요. 그런데 현재가 과거를 참고로 해서 미래를 점선으로 점점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층이 몇 개입니까? 위층이 있고 아래층이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 이게 맞지를 안 해요.
하나 예를 들게요. 과거에 초등학교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기억 속에 여학생은 그녀는 예뻤다. 분명히 초등학교 때는 어지간하면 다 예뻐요. 그런데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그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초등학교 때 예뻤죠? 만나기 전에도 예뻤죠? 그리고 만나기 직전에도 예뻐야 되겠죠. 왜, 못 나면 안 돼, 특히 성형하면 안 돼. 보톡스 하면 안 돼, 왜, 내가 그리듯이 예뻐야 돼요. 만나기 전에는 계속 예뻤답니다. 그런데 현재 누굴 만났어요? 그 여학생을 만났어요. 늙었어요. 늙어도 너~~무 늙었어요. 지는 늙은 건 생각 안하고. 균열이죠. 이게 균열이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예쁜 걸 포기할까요? 못난 걸 포기해야 될까요? 어느 쪽을 포기할까요? 못난 걸 포기합니다. 위선자죠.
연세 많은 사람들 사진 찍으려 하면 못 찍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에 사진 찍었다 합시다. 그러면 지금 사진 보겠어요? 20년 전의 옛날 사진 보겠어요? 옛날 사진, 잘 나갔을 때, 멋있을 때, 사장님 할 때, 그때 사진 많잖아요. 아! 이게 뭐냐 하면 위선이죠.
5년 전에 기도원에서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 받은 걸 기억할까요? 지금 자기 과실을 기억할까요? 지금 자기의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 계속 5년 전에 은혜 받고 기도해서 암 나은 것이나 병 나은 것 있잖아요. 계속 그걸 우려먹고, 우려먹고 그게 부흥사라니까요. 6.25 때 폭탄 맞고 살아난 거. 그래서 목요일 날 헌금 우려먹고. 순 돈 이예요. 돈! 돈! 돈! 돈 밖에 몰라요.
목사가 교회를 끝날 때 주께서 하시는 일을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퇴직금을 옴팍 받아냅니다. 내가 와서 교인 몇 명 불어나고 교인 한 사람당 십일조 계산해서, 두당 헌금 얼마 나오니까 이 정도는 챙겨줘야 되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 사람의 지금의 신앙은 뭐예요? 지금의 신앙은 들통 난 거죠. 위선자죠. 주님 사랑한 게 아니고 뭐를 사랑한다? 돈! 돈 사랑한 거예요.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뭐냐, 돈이 있어야 사니까 결국은 주님이 살든 말든 누구는 살아야 되겠다? 난 살아야 되겠다. 주님을 빙자로 해서 주님은 프랜차이즈로 상품을 걸고, 브랜드로 걸고 사실은 지가 사는 거예요. 주님 덕분에 지가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의 산업 화예요. 주님을 본 적이 있어요? 있는지 관심도 없어요. 다만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그 자체가 자기의 먹잇감 이예요. 그게 먹잇감 이예요.
그런 것을 이야기할 때 이렇다, 저렇다 괜히 비판할 것이 아니고 성경적으로 옛날 이스라엘은 어떠한지 근거를 제시해야 돼요. 그게 성전 개념입니다. 그것에서 여기 222 페이지 보면 밑에서 다섯 번째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 나오죠. 뭐가 성소에서 악을 행하였다? 원수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입만 떼면 여호와예요. 입만 떼면 찬양이고.
이사야 1장 보세요. 그들은 절기 다 지켰죠. 그들은 십일조 했죠. 그들은 안식일 있는 줄 알았죠. 이사야에 뭐라 합니까? “제발 내 마당만 밟는다. 제발 그러지 마라. 너희들이 손을 들고 기도해야 손에 피가 묻어있는데.” 예레미야 7장에 뭡니까? “이곳이 성전이라고? 오지 마라. 이곳이 성전 아니야.” 가로막고 오지마라 하는 거예요. 이사야, 에스겔 같은 경우에 안식일 날 너희들이 먹고 마시고 금식 하지 않고, 통회하지 않는 걸로 돼 있어요. 그걸 보고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그걸 참고로 해서 안식일 날 뭐한 줄 알아요?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이 성전에 왔을 때 뭐랬습니까? 내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하고 십일조 하고. 이게 뭐냐, 이사야를 고려해서 우리는 그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자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기어이 자기들은 잘났다는 거예요. 자기들로서는 의로울 수 있는 가능성이 계속 있다는 겁니다. 구원위주예요. 전부 다 성경에. 진짜 주의 뜻은 모르고 그냥 지만 구원 챙기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복 받으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구원은 그냥 주는 것이고, 그 구원은 내 구원이 아닙니다. 누구 구원입니까? 예수님의 구원의 효과입니다. 예수님이 구원받은 효과,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 허리케인, 요번에 토네이도, 그 토네이도에 휩쓸리는 것을 가지고 교회라 합니다. 그 토네이도 위에 머리 되신 분이고 그 머리가 움직일 때 지체로서 휩쓸려 나가면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태풍이 불죠. 성령의 태풍이 불면 우리는 그리스도만 주여,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죠. 그게 성전입니다.
그 다음에 226 페이지 봅시다. 그러니까 아까 제가 진도 나갑시다. 할 때 나갈 수가 없어요. 왜냐 말을 이렇게 어렵게 썼기 때문에 이거 풀이하는데 힘들어요. 여러분은 그냥 이런 뜻이다. 라는 것만 아시고 넘어갑시다. 226 페이지,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요 제목을 무슨 취지로 이렇게 붙였느냐 하면 다니엘의 이름을 하나님이 뭐라고 부르십니까? 인자죠. 예수님 본인은 뭐라고 했죠? 인자죠. 다니엘이 500년경에 어떻게, 400년, 500년 갭을 어떻게 극복하고 같은 인자에서 어떤 인자로 어떻게 뭔가 연결되느냐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요걸 한 겁니다.
아까 개별자 이야기했죠? 아무리 부부라도 같은 꿈을 같이 꿀 수 없다고. 몸이 다니엘 몸은 따로 있고 이쪽 예수님 몸 따로 있는데 어떻게 이쪽 인자에서 일어난 일이 어떻게 저쪽 인자의 몸에 동일하게 일어나느냐 하는 거죠. 다니엘 인자에게 구름타고 인자가 온다고 했거든요. 인자 같은 이가 온다. 마태복음 보면 인자가 구름타고 올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 그냥 믿어라, 이러면 안 돼요. 그냥 믿으라 하면 안 되고, 여기 다니엘이 있는데 다니엘이 뭐라고요? 인자! 예수님도 인자!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렇게 바로 못 가요. 왜 바로 못 가느냐 하면 다니엘이 죽기 때문에. 다니엘이 죽어버리면 소용없어요. 다니엘 자손이 연결해서 가도 안 되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다니엘이 죽잖아요. 죽는 이유가 죄 때문에 죽죠. 모든 아담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죽었을 때 다니엘이 그냥 죽는 게 아니고 다니엘을 인자로서 죽게 해요. 인자로서 죽은 요것을 인자되게 하신 것이 다니엘이 아니고 인자라고 부르신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께 뭐가 있느냐, 언약 성실성이 있습니다.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남들은 죽을 때 그냥 죽지만 다니엘은 죽을 때 부활을 기약하면서 죽는데 그 부활 기약이라는 내용이 인자라고 부를 때 그 안에 이미 포함이 돼 있어요.
다니엘을 보면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대목이 다니엘 12장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죽을 때 다니엘은 죽었는데 뭐만 달랑 남아요? 다니엘은 죽지만 인자됨은 달랑 남아있죠. 인자됨을 가져가요. 인자됨을 언약의 하나님이 가져가죠. 왜 가져갑니까? 왜 무슨 자격으로 가져갑니까? 인자라고 불렀던 분이 바로 그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언약의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 자기 약속 이루기 위해서 다니엘을 이용했기 때문에 가져갑니다. 그걸 가지고 배당, 또는 배치, 또는 배당 받는다. 다니엘은 자기 인생이 아니고 배치 받은 인생 이예요. 요거는 니 역할이야. 배당받은 역할 이예요. 우리도 갖고 있어요. 너는 여자로 태어나고 너는 남자로 태어나야 하고, 이렇게 부도 맞아야 되고 이렇게 배당받은 게 있어요. 누구는 애 세 사람, 누구는 한 사람. 요걸 달랑 가져가면 처리는 누가 합니까? 처리는 안에서 하는데 처리는 누가 하느냐 하면 성부와 성자 안에서 처리를 해버려요.
요 처리 계획은 언제 세웠느냐 하면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창세전에 이미 그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처리하도록 이미 돼 있는데 그걸 영원한 언약이라 해요. 조직 신학에서. 하나님이 언약 적으로 이미 마감됐어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내가 온 것은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 뜻을 이루려 함이라 아버지 뜻은 무엇이냐,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 살려내시는 것을 예수님이 이루죠.” 목회자가 이걸 믿습니까? 목회자가 믿기 힘들어요. 왜 자기 교인수가 줄어드는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자기 교인수가 줄어들어서 자기 부인하고 두 사람만 남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요한복음 6장 39절이 취소됩니까? 그게 실패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머리 긁으면서 ‘아이, 뭔가 일 해보려 했더니 이 무능한 목회자들 때문에 일이 안 된다. 미치겠다. 아버지 하나님, 일 못하겠습니다. 일 안 해.’ 이렇게 삐졌습니까? 주님께서.
베드로 보고 뭐라 했습니까? 니가 띠 띠고 원치 않는 길을 가죠. 진짜 성령 받은 목회자는 내가 했다는 소리를 할 수 없게 만들어요. 왜 분명히 어떤 걸 기대하면 그걸 피해 가버리니까. 행여나 내가 했다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여지를 주께서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원치 않는 길로 가요. 결국 남는 것은 영생만 남아요. 영생만 남고 나머지는 다 손 떼게 만들어요. 그것도 공짜로 준 영생! 생명의 면류관만 남고 나머지는 다 없애버립니다.
주께서 이렇게 인자를 데려갈 때 성부와 성자가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났어요. 그럼 그걸 성취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자기 피로서 성취를 했어요. “아버지여, 다 이루었다.” 했죠. “어찌 날 버리시나이까” 다 이루었으면 남아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제는 성령만 남아있어요. 성령!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을 보냈는데 아무나 보내는 게 아니고 이미 창세전에 택한 자가 따로 있어요. 그건 어린양의 생명책에 명단이 있어요. 명단 보고 성령의 세례를 줘요. 요번에 영훈 중학교 뭐했습니까? 영훈 중학교에 시험 쳐서 간 게 아니고 이미 합격자 뽑아놓고 합격 안 될 애는 성적 깎아버리고 합격 될 자는 성적을 올리고 했죠. 그걸 보고 저게 바로 천국이다. 어떻게 천국을 영훈 중학교가 이뤄요. 진짜 그 나라 의를 이루는 것 같아요. 딱 천국이 그거에요. 죄 진 인간 용서해주고 구원하고, 천국 오려고 밤새 철야기도 하는 자는 절대로 안 넣어주고, 왜 자기 의기 때문에.
성령께서 명단 보고 넣어줍니다. 넣어줄 때 무엇의 이름을 박탈시킨다? 내 자존심, 내 명예, 나의 의, 이런 것은 성령이 찾아오면 판을 뒤집어버려요. 이게 가정 폭력의 한 가지예요. 술 먹고 와서 아내가 밥상 차려주면 밥상을 발로 차버리면, 된장이고 국수가 다 엎어지듯이 우리 인생 판을 뒤집어버려요. 그래서 ‘어휴, 내꺼, 내꺼, 줍기는 뭘 주워?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를 구원하죠. 내꺼, 내 소유, 내 교회, 내 직장, 요거는 내 가족, 이것을 남겨두지 않고 판을 엎어버리면서 다 주께서 주신 자식이고 주께서 주신 교회고, 주께서 주신 사업체고 주께서 주신 신체고, 이걸 깨닫게 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누가 먼저 몸소 시범 했습니까? 다니엘이 했습니다. 다니엘의 소원은 뭐였냐 하면 70년만 지나면 나는 어디로 간다? 다시 본래 약속의 땅에 간다고 생각했는데 끝에 와서 계시 받고 난 뒤에 안 가게 돼요. 그 땅은 그 땅이 아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요. 이 땅은 우리는 죽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 있다? 하늘에 있어요. 구약의 땅 개념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면서 따라서 같이 어디로 이동했습니까? 하늘로 이동해 버리면 눈에 보이는 것은 소망입니까? 아닙니까? 소망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소망이죠.
우리는 나그네고 객이고 우리의 고향은 하늘에 본향이 따로 있어요. 히브리서에 나오는 모든 증인들은 바로 비행기 같아. 땅에서 하다가 속도 내서 하늘로 다 올라갔어요. 그래서 땅에서 유명한 사람은 절대로 하늘나라에서 유명하지 않습니다. 땅에서는 거지 나사로는 유명하지 않아요. 부자가 더 유명하지.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더 유명한 인사예요? 거지 나사로가 유명한 인사가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니 목사들이 제일 주의해야 하는 것은 사람에게 높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뭐 받는다? 미움 받는다. 그런데 오늘날 미움 받더라고 사람들이 사랑받으려고 자기 팬클럽 관리하니 그게 문제예요. 불쌍해요. 조용필, 이효리 다 불쌍한 사람들 이예요. 그 사람들, 유명하잖아요. 유명한데 하늘나라 갈 리가 있습니까? 유명한데 왜 버립니까? 뭐 이 땅에서 이혼했다든지 자기 여자 친구가 자기 차에서 자살하든지, 이러면 예수 믿을 가능성이 있는데, 판이 잘 팔리는데, 강남 스타일 불렀던 싸이가 자살할 이유가 없잖아요. 자살해도 그냥 자살 안 하고 뛰어내려서 6살 애 죽이고.
세상은 전부 다 짜인 대로 움직이는 우리는 하나의 기계 같아요. 모든 것이 다 짜인 대로 가고 자체적으로 의미를 찾지 마세요.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다 헛됩니다. 그런 헛되다는 것을 아주 기쁘게 이야기하는 사람만이 구원받은 사람 이예요. 왜냐 하면 어차피 아버지께서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내가 신경 안 써도 될 문제라 이 말이죠.
어떤 사람은 자기 마누라 교회 안 온다고 고민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식 교회 안 나온다고 절에 간다고 고민하는데 그거 왜 지가 고민합니까? 고민하는 그게 죄라. 문방구에 주인이 고민해야지, 왜 점원이 고민합니까? 지 가게도 아니고 남의 가게인데.
절대로 이 땅에서 유명하지 마세요. 내가 보니 유명한 사람 아무도 없어. 절대로 유명하지 마세요. 이 땅에서 무명한 자가 유명하다고 고린도후서에 나오죠. “무명한 자 같으냐 유명한 자로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지고 쓰레기 같으나 사실은 너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쓰레기 취급 받았다. 성경에 그런 구절 나오는데 왜 자꾸 마귀의 시험 받아서 기도 잘해서 유명인사 되고 기적 받아서 믿음 좋다는 소리 듣고 싶어 하고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게 다니엘의 위치입니다. 아시겠죠. 다니엘의 위치란 다니엘이 인자라는 것 때문에, 인자라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누구 이름은 박살난다? 다니엘 내 이름은 주의 이름에 이끌리고 배당받은, 배치 받은, 내 맘대로 못살고 주의 이름에 미리 앞서서 보여주는 그런 제한된, 한정된 인생관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니엘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논문의 본문에 뭡니까? 70이레죠. 그럼 70이레는 꿈을 누가 꿨습니까? 이거 누가 알려준 꿈이죠? 나풀나풀 누가 왔죠. 천사 이름이 가브리엘 천사가 왔잖아요. 여러분, 이거 한번 봅시다. 야, 이거 어려운 건데, 여러분 천사는 이름이 있어요. 그건 천사 이름이 아니고 천사 조직의 이름이 아니고 천사의 기능 이름이거든요.
악마 이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악마 이름은 없어요. 왜냐 하면 주의 이름이, 이름이 없잖아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요 대상과 이름이 일치될 때 이름이 있다고 할 수 있거든요. 이 지상에는 주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지상에 부를 이름은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이름이 있어요. 왜냐 하면 인간은 지상에 몸이 있으니까.
그러면 천사의 이름은 뭐다? 그 천사가 해야 될 기능을 가지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룹이라든지, 가브리엘, 이런 이름들 전부 다 기쁜 소식 이런 거, 그래서 이름 자체가 기능을 갖고 있어요. 그러면 악마의 이름은 뭡니까? 악마 이름이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악마를 대적하는 것은 우리가 대적할 수 있지만 악마를 이기는 것은 누구 담당입니까? 주님 담당 이예요. 미가엘 천사는 전쟁하는 기능 이예요. 미가엘 천사가 모세의 시체를 두고서 악마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나무라기만 했지, 그 처리를 누가 했습니까? 주의 이름이 하는 거예요.
그러니 결국은 악마라 하는 것은 결국 그것도 주의 이름을 위해서 쓰여 지는 그냥 피조물 뿐 이예요. 이건 악마의 뜻이라고 대응은 하되 ‘악마야 좀 나가줘.’ 라든지 ‘악마야 물렀거라.’ 하든지 ‘악마야 두 번 다시 나한테 오지 마라.’ 라든지, 지가 예수님도 아닌 게 악마보고 그거 시킨다고 악마가 웃습니다. 그거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악마를 이기겠다고 아예 성경책을 찢어서 도배를 한다든지 금식을 하든지 제발 그런 짓들 좀 하지 마세요. 지가 악마가 좋아서 하면서, 악마는 우리가 좋아하는 걸 미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워하는 걸 이길 수 없어요. 악마와 평생 한 통속 돼서 살면서 무슨 악마를 지가 이겨요?
다니엘에서의 악마의 기능이 나옵니다. 왜냐 하면 인자기 때문에! 요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인자는 기능이기 때문에 인자는 반드시 죽어야 되는 기능이 있죠. 인자는 누가 죽입니까?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넣은 인간이 누구예요? 다리오 왕이죠. 다리오 왕은 바로 짐승입니다. 왜, 연속된 짐승, 큰 짐승, 큰 짐승, 짐승이거든요. 그러면 느부갓네살도 다니엘 세 친구를 죽이려 했죠. 그렇잖아요. 그러면 느부갓네살도 짐승이죠. 7년 동안 짐승을 했으니까.
그렇다면 인자라는 이유 때문에 졸지에 뭐가 등장했어요? 그냥 사적으로 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짐승 노릇하는 것이 공격해야 돼요. 그러면 다니엘 세 친구와 다니엘은 어떤 점에서 중요한 위치냐 하면, 진짜 숨어있는 하나님의 원수가 티 나는, 그 정체가 밝혀지는 자리로 배정받은 거예요. 배정받은 자리! 그게 오늘날 성도의 자리입니다. 십자가만 안 믿으면 다 친구인데 괜히 십자가 피 이야기해서 교회 가도 따돌리고 친구, 친척도 다 따돌리고 제사도 못 지내고 아는 정들었던 모든 좋은 관계가 다 끊어지고, 그냥 그저 구원은 십자가로 거저 받는다는 그 소리, 행함이 아니고 오직 거저 온다는 그 소리, 거저 온다는 그 관계를 믿음이라 하거든요. 믿음이란 다른 말로 거저 받는다. 이런 뜻 이예요. ‘그냥 거저 받았어.’ 그 소리 했을 뿐인데, 그거 믿었을 뿐인데, 다 깨지잖아요.
그게 인자 같은 기능입니다. 우리가 그 위치를 배당받은 것을, 참 주의 이름으로 받은 걸로 알고 인자 이름을 받은 걸로 알고 우리는 오히려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우리도 남한테 욕 얻어먹으면 우리도 기분 더럽고 기분 더러우면 불평을 매일같이 누구한테 쏟아냅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미워하고 주님께 원망하죠. 원망해도 구원 된다니까. 원망해도! 주님을 원망해도 구원받아요.
그러니까 원망 하도록 만들어 놓고, 원망 실컷 하게 해놓고, 원망해도 너를 이미 구원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나올 것은 뭐냐 감사함 밖에 나올 게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때때로 안 되면 속으로 부화가 터져 나옵니다. 기껏 주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냐고 따지기 좋아하는 저희들, 그것마저 십자가 보혈의 피로서 다 일처리 했다는 것을 통보하시는 주님, 내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복음 믿는 데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기쁨이, 감사가 저희들에게 복음과 기쁨과 감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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