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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0606 봄특강b - 요한계시록 해석법자유게시판요한계시록

20130606 봄특강b - 요한계시록 해석법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606 봄특강b - 요한계시록 해석법

(강의 : 이근호 목사)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관심사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를 잊을 수가 없지요.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있지 않고 없는 분으로 계시는 분으로. 지금 예수님은 사람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계시는 분.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사느냐? 성도 아닌 자가 성도로 사는 자, 이게 바로 성도지요. 예수님은 있지 않고 없는 분으로 계시니까 여기 있다와 이 땅에서 성도는 이렇게 살아야 돼. 하는 성도다움 이 두 개를 모으면 이게 바로 짐승의 나라에 해당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답게 산다는 것은 곧 짐승에 속해서 사는 것이다. 왜냐? 예수님께서 짐승의 나라에 이런 식으로 사셨기 때문에. 짐승의 나라를 인간은 몰라요. 짐승의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 것은 계산하지도 않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있지 않고 없는 분으로 사신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 그 미지의 존재는 그 무엇, 그 어두운 실체가 드러난다면 이 땅에서 성도로써 산다는 것은 여기다 그대로 대입하면 성도로 살지 않고 성도로 사는 자 성도가 된다. 이런 논리가 되거든요.

그러면 성도로 산다는 것은 교회에 헌금한다는 말이고, 성도로 안 산다는 것은 너, 성도 아닌 것 같아, 라는 평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진정한 성도가 되는 거예요. 한평생 살면서 전혀 성도답게 살지 않은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성도 아닌 것 같아. 그렇게 살아야 유일하게 성도로 사는데 성공한 사람이에요.

만약에 성도로 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묻게 돼요. “성도 같아?” 옆에서 궁시렁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집단화되어서 그들끼리 예수님은 있지 않고 없는 분이 아니고 그들 조직에 포섭된 예수가 돼버립니다. 그 예수는 가짜 예수기 때문에 거기서 주께서는 빠져나왔기 때문에 성도라는 집단에서 포섭되지 않고 빠져나올 때 그 사람이 진정한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그 흔적이 뭐냐? 세상은 예수님 때문에 짐승의 존재가 파악된 것처럼, 윤곽이 드러난 것처럼 성도도 성도가 성도답지 않게 살아가는 자체가 성도가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도답게 살았다고 발목 잡는 그 세력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고 말씀으로 살았다고 생각해보세요. 나중에 돌아가실 때가 되서 진정 내가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구원받는지, 아니면 내가 이것과 상관없이 구원받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동안 성도답게 살려고 한 그 헛된 짓이 얼마나 후회스럽겠습니까? 부질없는 짓을 한 거예요. 쓸데없는 짓을 한 겁니다. 주님은 그렇게 살지 않았는데 주님방식이 아니고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을 내가 부응하고 충족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가식적으로 몸부림 쳐왔던가.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성도라는 개념 자체가 세상에는 성도라는 개념이 이미 구축돼있단 말이죠. 거기에 메이지 않는 자로 살려면 성도답게 사는 구축된 용어들 주변에 무엇이 깔리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사람 있고, 또 사람 있습니다. 이게 전부지요. 사실은.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짐승이 나와요. 없는 존재에요. 태양을 머리에 짊어진 여인? 파마했습니까? 뜨거워서 어떻게 해를 져요? 태양의 중량이 얼마나 되는데 몸무게 60 짜리 여자가 어떻게 짊어집니까? 없는 존재에요.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 개? 어느 동물에도 없지요. 짐승, 아까 뿔, 이것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없는 것들로 배치해놨어요. 완전히 세상을 뒤덮어놨어요. 그것은 이 세상에 있다고 여기는 예수님은 사실은 없는 분이고, 없는 식으로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들 보기에 짐승? 없어. 해를 짊어진 여인? 그런 것 없어. 뿔? 그런 것도 없어.

없다고 사람들이 확정지어놓은 그 환경을 주님께서는 계시를 통해서 도입해버립니다. 너희들이 있다고 한 것보다 너희들 보기에 없다고 한 그 바닥 위에 너희들은 살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없다고 전부다 무시하고 다 제거해버리고 달랑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우리는 무엇이냐? 우리는 죽어서 어디 가느냐? 이런 걸 논한다면 이런 행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냐고 이야기할 때는 없다고 간주할 것들을 옆에 붙여놓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해석이 난감하게 되죠. 없는 걸 어떻게 해석하란 말인가? 무저갱? 바닥이 없는 우물? 그런 우물이 어디 있어요. 도대체 바닥없음이 과연 성립이 될까요? 바닥없음은 이런 뜻이구나. 한국에서 우물을 파면 아르헨티나나 남쪽이 나와요. 그런데 팔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중력 때문에. 파봐야 스톱돼요. 지구 자체가 위아래가 없거든요. 중력이 있는 곳이 아래고 나머지는 위가 되는 겁니다. 중력이 없어야 위아래가 되는데 구멍이 없는 우물은 지구상에서는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무저갱에서 귀신이 아니고 마귀가 나오잖아요. 무저갱이 있어야 나오든지 말든지 할 텐데 이 자체가 없기 때문에 마귀와 귀신은 성경에는 나왔는데 만날 수가 없지요. 있으면 사진 한 장 찍겠는데 그럴 입장이 못 돼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은, 빠져나올 수 없다. 빠져나올 수 없다는 말은, 빠져나와야 될 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아예 성립 자체가 안 됩니다. 얘들에게 하는 말이, “너 인간이 되어라. 공부 잘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요새 어린 여자 가수에게 “네가 노래 잘 한다마는 가수가 되기 전에 인간이 돼야 된다.” 걔가 인간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니까요. 자기가 인간의 전부인데 여기서 또 뭔가 다른 내가 있다는 말인가? 상상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요한계시록 자체가,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해석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빠져나온다든지 구원이라는 개념도 안 나오죠. 안 나올 때는 이렇게 됩니다. 지금 인간들이 있는 이 세상을 힘든 세상으로 보는 거예요. 사람들이 상상을 합니다. 힘든 세상에서 천국을 상상해서 임의로 만들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의 내용은 지금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요소들 중에서 괜찮은 것들만 골라서 채워 넣게 돼요. 이 천국은 이 세상의 연장, 확대에 불과하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건너가면 되는 겁니다. 이런 천국은 빠져나온다는 것이 의미가 없고 여기서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 우주선 도킹하는 것처럼 우주정거장에서 우주정거장으로 이동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전혀 있지도 않는 겁니다. 짐승이라는 게 왜 나오는지 그런 것은 전혀 없지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문제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인간들끼리 뭉쳐있는 이게 문제가 되지요. 그러면 우리들끼리 있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 문제라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집단밖에 없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멸망한 이유가 우상을 섬겨서 멸망했거든요.

우상이란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게 우상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누굴 섬겼느냐 하면, 여호와를 섬겼거든요. 그런데 에스겔이나 보면 여호와를 섬겼는데 여호와로부터 이스라엘이 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상이란 여호와도 우상에 포함돼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도 가짜 예수에 포함이 된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것이 조작이 가능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어떻게 드러냈느냐? 여러분들이 아는 이야기합시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통해서 여호와의 뜻을 다 이야기해줬단 말이죠. 그러면 새 언약을 통해서 이야기할 때 새 언약을 오기 전까지는 그들은 자기는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새 언약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이 들이닥치니까 여호와를 섬긴 것이 아니고 마귀를 섬긴 것으로 예수님한테 고발당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없다고 봅시다. 그들이 여호와 섬기는 것이 가짜 여호와라는 것을 알 길이 없지요. 예수님이 없다고 여기고 사라지고 안 계시다고 여기고 자체적으로 여호와를 섬길 때 이것이 우상이 된다면, 하나님 자체가 우상이 되고, 말씀을 지키는 게 우상이 된다면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대표적인 집단으로 부름을 받은 게 돼요. 이게 신명기 마지막 대목에 나옵니다.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이스라엘 너희들은 필히 다른 신을 섬기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학자들은 그 대목을 뺍니다. 이것은 자기들이 멸망하고 난 뒤에 첨가해서 조작한 구절이지 모세가 그런 이야기할 적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스라엘을 도와준다면 애초부터 초를 치지는 않을 것이다.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지 절망적인 예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레위기 2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들은 아무리 해도 결국은 여호와를 배반하게 돼있는 그런 코스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여호수아 마지막 대목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하니까 너희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어. 필히 너희들은 망하게 돼있다.

반드시 망하게 돼있는 그 이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위로 보지 말고 옆으로 봅시다.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밑바닥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력을 깔아놓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세력을 불러내기 위해서 여자라고 했고, 그 다음에 아까 이야기한 무저갱, 그 다음에 유황불, 그 다음에 생명나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용어들, 지팡이, 전부 다지요. 그리고 보좌, 천사. 이스라엘 역사를 뚫고 이런 것들을 밑에 깔아놓으면 이스라엘이 이것을 뚫고 오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쪽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바라보게 되면 옛날 자기가 겪었던 모든 역사, 부정적인 역사, 벌 받은 역사를 보게 되면 여기서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한테 멸망당해야 되는지가 부각이 돼요. 들통 나요. 드러나게 돼있어요.

그렇다면 무저갱이라든지 아들 개념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창세기부터 나왔잖아요.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런 단어들이 쪼개집니다. 난도질당하지요. 이스라엘 자체를 쪼개면서 지진이 일어나는 틈 사이에서 올라오는 세력들이 나옵니다. 세력들이 모아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본래의 세력들이 집결되게 돼있어요.

그런데 사람들 눈에는 이건 안 보이고 쪼개진 이스라엘 역사, 이런 것만 보이는 겁니다. 신약에 오면 이스라엘 속에 일곱 교회도 포함됩니다. 일곱 교회도 쪼갭니다. 에베소교회는 이게 문제야. 라오디게아교회는 이게 문제야. 서머나교회는 이게 문제야. 빌라디아교회 이것도 문제야. 전부 다 문제 있다고 지적하는 이 틈 사이에 나오는 이것을 봉합하는 거예요. 이걸 다시 뭉쳐서 있음을 자꾸 만들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새 언약,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세력이 현재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세계를 들어가게 되면 말씀으로 이스라엘이 그 동안 부정적으로 겪었던 모든 용어들이 추가적으로 들어오게 되면 여기에 대해서 반발 세력으로 하나로 뭉치고 집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집결된 것을 짐승, 바벨론 또는 음녀라고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돼있어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의 진행과정이 뭐냐 하면, 1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이야기, 그 다음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우기는 교회들의 등장과 책망 받는 교회와 그 다음부터 천사들이 와서 낱낱이 쪼갭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쪼개면 마지막 요한계시록 16~18장에 가면 이것들이 쪼개면 쪼갤수록 집결해서 오직 하나의 노선, 음녀, 큰성 바벨론으로 집결해서 대항하게 됩니다. 여기에 맞서서 집결하지 않더라도 이미 하나로 확정된 한 신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위에서 신부의 자격으로 내려오면서 혼인잔치가 이뤄지죠. 진행과정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빨리 지나갔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왔던 모든 용어들이 현재 눈에 보이는 것으로 단합된 결집된 모든 조직들을 쪼개는 역할을 하고 쪼갠 그 사이에서 “왜 쪼개는데? 네가 뭔데 쪼개는데? 우리가 여기 모여서 하겠다는데 네가 왜?” 하고 쪼개는 틈새를 메우면서 반발하는 세력이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세력으로 나온단 말이죠.

말씀으로 쪼갠다는 것은 주님 쪽에 속한 증인들이고 그러니까 144,000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고. 거기에 반발하면서 서서히 통째로 하나의 성깔로 집결하는 하나로 움직이는 움직임을 쪼갤 때마다 강력한 힘으로 결합이 돼요. 그럴 때 그게 뭐냐 하면, 다니엘이 말하는 짐승의 나라의 모습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은 어디 있습니까? 짐승은 이게 짐승이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짐승의 세계라고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기 있다는 것은 사실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다. 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그게 주님에 대한 반발이죠. 그동안 이 땅에서 살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지금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죽은 자로 사는 것이라는 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그동안 살아보려고 애썼던 것을 무용지물로 만드니까 얼마나 기분 나쁘게 들리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단결해서 살자. 단결해서 살면 그게 바로 바벨론이고 음녀가 되고 짐승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교재 5페이지 봅시다.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요한계시록 5장에서 1절에 3절 말씀 나와 있지요.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가 여기 있음을 감안해서 보게 되면 진짜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왜냐하면 책을 왜 봉합니까? 서점에서 책 사는 입장에서 제일 기분 나쁜 게 비닐로 덮어놓은 게 있잖아요. 칼로 찢고 싶어요. 뭐 신비주의 전략도 아니고 뭐 중요한 게 들어있다고. 주로 내용 안 좋은 만화책에 많이 있거든요. 얘들 보지 말라고.

여기 비닐봉지가 일곱 번이나 감아놨어요. 보라는 거예요? 보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책을 봉해놨으면 봉해놨다고 하면 될 건데 천사가 하는 말이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누가 책을 펴서 인 떼기에 합당하냐?” 묻기는 왜 묻는데. 출판사가 책을 일곱 번 봉해놓고, “너희 중에 이 비닐 뗄 사람 없지롱?” 그러면 책의 존재의 목적이 뭐고 이유가 뭡니까? 결국은 약 올리는 거죠. “너는 책 읽을 자격도 없어.” 이런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실 때 예수님은 여전히 이 세상에 없는 존재입니다. 안 보고 말지 뭐. 예수님, 요한계시록입니다. 난 안 봐. 끝난 문제에요. 여러분 창세기 있습니다. 성경 있습니다. “난 안 보고 이대로 살 거야.” 그러면 그만이지 뭐 어떻게 하는데. “요한계시록 이걸 봐야 진리를 안다고?” 이러면 이 사람은 예수님한테 걸려든 사람이에요. 성도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책을 비닐봉지로 일곱 번 감아놨거든요.

그러니까 사도요한이 울지요. 예수님이 얼마나 짓궂습니까? 괜히 놀고 있는 얘에게 이 책 보라. 비닐봉지로 쌌어요. 울어라, 울어라. 울리지 못해서 안달 난 것 같아요. 일부러 울려요. 사도요한이 웁니다. 아무도 이 책 펴기를 합당한 사람이 없다.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울기는. 안 보고 말지. 뭐 답답해서 뭐 궁금한 게 있다고. 신기한 것도 귀찮아. 천기누설도 다 귀찮아. 난 이대로 밥 먹고 살래.” 그러면 그만이지 보기는 왜 보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하여 여기에 뭘 담아내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5장 1절 다시 보게 되면,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다고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오른손으로 일하시는 낯선 하나님과 너희들이 전에 죽였던 예수그리스도와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뭐고, 어떻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전부다 구라고 거짓말인 이유가, 오른손과 관련 있는 예수그리스도와 관련성을 맺지 못하면 너희들은 그동안 너희들이 상상한 엉터리 우상적인 하나님을 섬겨온 것이란 겁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이걸 보고 우니까 천사가 말하기를 어린양만이 이 책을 편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5장부터 예수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아니다. 왜? 오른손과 관련된 분인데 오른손에 관련된 기능과 내용의 책을 펼 사람이 아담부터 해서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없으니까 결국 인간들은 예수를 만나면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런 팔자고 그런 기능을 해야 돼요. 따라서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그동안 아무 탈 없이 온순하게 살고 있는 겁니다. 아무 이상 없음. 별 탈 없음. 우리는 죽으면 좋은 나라 감. 이런 식으로 우리가 만든 종교에 따라서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하면, 책을 펴기 전까지는 교요한 세상이에요. 방금 제가 지어낸 거예요. 정말 고요한 세상, 좋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책을 펴게 되면 번잡스러워. 번잡스러워도 너무 번잡스러워. 너무 요란스러워. 반대로 요란한 세상. 요한계시록은 요란해도 너무 요란스러워요. 그런데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너무 조용해요. 가끔 북한의 김정은이 핵미사일 그것뿐이지. 그 외에는 아주 조용합니다. 성폭행범 설쳐대도 아무나 찾아오는 게 아니고 밤거리에 술 먹고 돌아다녀야 그런 일이 있는 거고 집에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는 해당도 안 되고.

어쨌든 우리는 아무 문제없어. 정말 아무 문제없는 세상에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괜치 분란을 일으킬 이유가 하등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자신을 내가 하나님이라고 드러내는 사람한테는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은 인생이 요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당탕탕. 요란스러워요. 그렇다면 고요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밉상 받는 계기가 될 뿐이에요. 하지만 사도요한에게는 이것은 세계에서 최고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웁니다. 내가 이걸 모르고 인생 산다는 것은 이 자체로 나는 인간도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책을 드디어 펼쳤습니다. 펼쳐도 한꺼번에 펼치면 좋겠는데 사람 감질나게 만드네. 한 번 벗기니까 우당탕탕 하더니만 또 다시 사면은 고요해지고. 그 다음에 제2막 벗기니까 잠시 우당탕탕 하다가 다시 고요해지고. 일곱 번을 벗겨서 다 됐을 줄 알았는데 일곱 나팔까지 부네. 그게 다 인줄 알았는데 다음에 일곱 대접을 쏟아 붓네. 아무리 지금 봐도 세상은 너무 치안이 잘 돼있어요. 특히 한국경찰은 4대악 제거한다고 설쳐서 너무 조용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혼자 굉장히 요란스럽단 말이죠.

이걸 어떻게 접근해 나갈 것인가? 사실은 약간 힌트를 드렸어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동원할 때는 현재 인간을 쪼갠다고 했습니다. 쪼갤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언약을 들을 때 그들이 오해를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생각할 필요 없지요. 그냥 밥 먹고 살면 되니까. 그런데 말씀이 오니까 말씀에 순종한답시고 순종을 해요. 그런데 순종하겠다는 그걸 기화로 자신의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분명히 자신들은 죄인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때 그들은 거부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거부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느냐 하면, 인간이 신을 믿는다는 것은 항상 자기가 갖고 있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고 신을 도입시키거든요. 과거까지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고 미래는 자기가 안 살아본 인생이기 때문에 여기다 신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신이 자기에게 해줄 것은 과거에 미흡한 것, 과거에 상처 받은 것, 손해 본 것, 손실당하는 것, 이런 것을 넉넉하게 원상회복시켜달라고 신을 믿게 돼있습니다.

신을 믿게 되면 행운을 가져오게 되면 그 증거를 어디서 찾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주변의 막대한 나라에서 찾아요. 주변의 나라가 잘 사는 나라잖아요. 자기도 잘 살아요. 잘 산다는 말은,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는데 저들은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겼더니만 우리보다 더 잘 살거든요. 그래서 산다는 것은 플러스알파란 말이죠. 분명히 똑같이 노력해도 복을 받아 사니까 사는 만큼은 그들이 믿던 신에 의해서 행운으로 주어진 복이라고 보는 겁니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껍데기에다 그들이 복을 얻는 방식을 집어넣으면 되겠지요.

이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오해할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주의 말씀은 애초부터 이스라엘을 쪼개는 방법으로 오는 겁니다. 왜 그러냐? 이스라엘은 있는 나라지요. 있는 나라에 이스라엘 사람들 본인이 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없는 분으로 이 땅에 나타난 분이에요. 이 땅에서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있음이 적용될 수 없는 없는 분으로 이 땅에 서슴없이 나타난 분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없는 분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데에 자꾸 섞이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퇴출시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없는 세계가 있는 세계보다 더 천국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 쪽이거든요. 현재 있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하나님이 같이 있는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 천국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 이야기가 서로 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선지자들이 애를 먹습니다. 그 전에 물론 모세가 애를 먹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만나는 보관용이 아니라고 했지요. 보관하면 썩어버려요. 그러나 애굽에서 살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보관하려고 해요. 보관하고 많이 먹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할 때 물이 없지요. 양식도 없지요. 물이 없고 양식이 없을 때 현재 있는 나는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원망했습니다. 그것을 다투다, 또는 시험하다. 이런 식으로 광야를 보내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오른손의 기능으로 나타날 때만 하나님입니다. 오른손이라는 기능은 하나님의 원수를 노리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원수는 비겁하게 숨어있고 그 앞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주님을 맞이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언약을 담고자 할 때 이스라엘은 여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반발할 때 중간에 모세나 선지자들이 애를 먹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숨어있는 어두운 나라에 다가서려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마중 나가서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말지요.

멸망시킬 때 하나님께서 직접 멸망시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방나라 멸망시킬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우박이라든지 그런 식으로 멸망시키고도 했는데 나중에 이스라엘 멸망시킬 때는 바벨론 나라를 통해서 합니다. 그전에 앗수르를 통해서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없고 앗수르는 날아갔고. 바벨론이 숨어있는 나라가 돼요.

이 바벨론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바벨론이라 하지 않고 짐승인데, 제1 짐승. 짐승2가 뭐냐 하면, 바벨론 다음에 페르시아, 바사나라. 짐승3가 헬라이고, 짐승4가 로마입니다. 성경에는 여기까지만 나와요. 왜냐하면 로마에 이르게 되면 여기에 오른손에 주의 자리에 계신 분이 직접 오셔서 드디어 오른손의 정체를 다 드러내기 때문에 더 이상 여기서 짐승의 정체를 진척할 이유가 없어요.

짐승의 실체를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이라 하면서 실제 내용은 짐승2, 짐승3, 짐승4의 내용으로 바벨론으로 다시 집결시킵니다. 로마까지 마감시킴으로써 다니엘에서 짐승4가 로마 이후에는 짐승이 없어요. 다니엘에 그렇게 예언되고 있습니다. 스가랴에도 약간 예언된 게 있어요. 스가랴도 여기 교재에 뿔이 나오는데 뿔이 유다를 들이박는 역할을 합니다. 로마에 열 뿔이 있어서 이 뿔은 유대나라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받는 역할, 파쇄하고 멸망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 나라를 짐승으로 규정함으로 말미암아 이 바벨론 나라를 짐승으로 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스스로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너는 빠지라는 거예요. 바벨론 같으면 이스라엘아 바벨론과 싸워라 하면 되는데 바벨론이 아니고 로마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인간들 집단이에요. 인간들은 여기서 빠져나와야 되는 겁니다. 여기 오른손으로 일하시는 분과 짐승과 싸우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나 로마 이쪽에서 짐승으로 표현했다는 말은 구원받을 사람들로 하여금 네가 나대지 말라 이 말입니다.

용어 자체가 짐승을 사용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이미 짐승이라고 지칭되는 바벨론에 멸망당했잖아요. 그러니까 바벨론 속의 이스라엘이 짐승을 이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이미 져버렸으니까 아무도 짐승을 이길 수 없어요.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서 직접 짐승을 짐승으로 들춰내는 겁니다. 짐승을 들춰내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점선으로 하겠습니다. 비로소 짐승과의 전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있어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 바로 교회, 이것이 성도입니다. 떨어질 때 그냥 떨어지는 게 아니고 언약적으로 한다고 해서 12*12*1000이라 해서 하나님의 144,000이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짐승과 싸우니까 그렇지 교회가 짐승과 싸워서 이스라엘이 되는 건 아니에요. 이것은 성사될 수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목사, 당신이 하고 말이 뭐냐? 만약에 우리가 성도라고 한다면 성도기 때문에 짐승과 싸워야 돼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성도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성도되지 말고 주님이 하시는 일의 결과물로 사시면 되는 거예요. 주님이 일을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 짐승이 짐승으로 드러난 이상은 짐승은 쉬는 법이 없어요. 짐승이 아니고 로마라든지 미국이라든지 필리핀 같으면 고요합니다. 북한만 좀 떠들어서 그렇지 신문, 방송 보세요. 세상은 정상적이에요. 동성애자가 결혼한다는 말도 안 되는 것만 이슈가 되지 세상이 불바다 되고 그런 이야기 안 나오거든요.

이 세상이 짐승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에게 맡긴 사람에게만 파악되는 개념이지 일반사람한테는 전혀 감잡히지 않는 거예요. 그저 요한계시록 안 풀린다고 울고 있는 사도요한한테만 눈에 보이지 다른 사람한테는 큰 문제 거리도 안 돼요. 문제 거리도 안 되니까 문제 삼지 말고 그냥 삽시다. 괜히 나대지 말란 말이죠. 요한계시록 지켜보겠다고.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 신천지 천지일보가 저한테 질의한 다섯 가지 중에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한 네 생물은 무엇인가 할 때 이 질문에서 누구인가의 형식을 하면 안 된다. 어떻게 하느냐? 지금 어떻게 활동하고 일하고 있는가? 이게 만약에 짐승이 무엇이냐가 돼버리면 내가 활동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오늘 일과도 끝났고 심심한데 뭐 할 것 없나? 옳지. 짐승이 무엇인가 내가 연구해볼까?” 이렇게 나서게 되면 짐승이 누군지 파악하는 주체가 활동하는 나인데 그런데 우리가 빠지잔 말이죠. “짐승이 뭔지 알아서 뭐 할 건데?” “알면 성도되지. 성도답게 산다.” 그러지 말라 했잖아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우리가 나설 문제가 아니거든요. 우리가 나서는 건 오직 돈 버는 문제 외에는 없어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다 돈 벌다가 양심에 걸린다 싶으면 성경 좀 보고. 그것뿐이에요. 돈 벌다 심심해서 성경 보는 거예요. 우리는 그쪽이지 짐승 연구하는 사람 아니거든요.

하나님께서 짐승이 무엇이냐 할 때 지금도 활동하는 분에게 맡깁시다. 활동하는 분이 오른손이에요.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질문해야 돼요. 지금도 짐승은 어떻게 활동하는가? 그래야 내가 활동하는지, 않는지 여부를 떠나서 지금도 나 빼놓고 일하시는 주님과 짐승과의 그 다툼으로 비로소 요한계시록이 현실로서 다가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내가 할 건 아무것도 없기.

심지어 요한계시록 해석도 내가 할 필요조차 없는 이유가 뭐냐? 해석해서 알아서 뭐 할 건데? 그래서 구원받으려고? 그럴 필요 없어요. 우리는 결과물이라니까. 언약이 쉬지 않거든요. 언약의 결과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답지 않게 살기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언약 안에서 주께서 세상을 짐승으로 겨냥하면서 요한계시록대로 차근차근 진행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주변에 사건들이 일어나요.

짐승이란 말을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짐승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 눈에만 보이기 때문에. “이 짐승.” 그렇게 이야기하면 나는 짐승 아닌 게 되잖아요. 짐승이란 어느 차원이냐 하면, 오른손의 위치에 있을 때 짐승으로 파악되는 거예요. 그럼 짐승은 뭐냐? 그냥 인간이죠. 인간인데 짐승에게 속해 있는 인간이다.

그 특징은 뭐냐? 바로 하나 되기입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그 구호의 하나 되기. 세상의 특징은 결국은 다 하나로 뭉쳐진다는 겁니다. 하나로 만들어져요. 종교도 하나요, 국가도 하나요, 전부다 하나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짐승은 두 마리가 아니고 한 마리기 때문에 그래요. 두 마리 되면 안 되거든요. 여기 짐승1, 2, 3, 4 있지만 결국 하나의 짐승으로써 파생된 거란 말이죠. 그래서 하나로 뭉쳐지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로 돼야 비로소 구원자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오른손에서 지금도 작용하시는 분, 이 땅에서 죽으심을 당하신 사람에게 버림 받으신 예수님밖에 없다는 한 분이 이 하나를 통해서 대비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받는다. 어떻게 행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 때도 그렇게 등장하는 겁니다.

거기에 필요한 용어들은 10분 쉬고 이 용어들이 어떻게 해서 예수그리스도와 짐승의 하나 됨과 그리스도의 하나 됨으로 모든 용어들이 달려가고 있는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첨부파일 : 20130606 봄특강b.hwp (48.5K), Down: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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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