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606 봄특강a - 요한계시록 해석법
20130606 봄특강a - 요한계시록 해석법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606 봄특강a - 요한계시록 해석법
(강의 : 이근호 목사)
요한계시록 들어가기 전에 신명기 9장부터 보겠습니다. 거기에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여기 이스라엘 속에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유일하게 내통을 해요. 유일하게 내통을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역할, 이스라엘을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신명기 9장을 요한계시록 하기 전에 왜 거론하느냐 하면, 여기 이스라엘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으면 안 돼요. 어디 있다면 찾아올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이 말도 어려운 것이 이스라엘에 가보면 이스라엘만 있지 이스라엘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고 돼있다고. 하나님이 분명히 나 여기 있다는 식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기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뭔가 움직이고 있다. 움직일 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이 움직이는 흔적을 통해서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가 되는 겁니다.
정리해보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할 때 정답은 여기에는 아니 계시다고 언급해줘야 되는 거예요. 이런 데는 하나님이 아니 계십니다. 그러면 어디에는 아니 계신다고 할 때 이 어디는 어디냐 하면, 인간의 자리에는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적인 상식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모든 것을 식물과 동물과 바다에 있는 고기마저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니까 하나님이 바다 밑에도 계실 것이 맞는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진짜 하나님의 뜻은 물고기 움직이는 걸 아무리 연구한다고 나타나지 않아요. 하나님 뜻이 나타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아니 계신 곳을 추려내는 방식으로. 추리고 추려 나온 방식은 바로 모세가 있는 자리, 곧 이스라엘 자리에만 하나님이 나타나는 겁니다. 나타나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걸 하나님이 계신 것과 같은 것으로 쳐줄 수 있느냐는 그 문제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한다고 식으로 처리가 돼요.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실시되는 게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실시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언약의 상대자가 되니까 이스라엘은 ‘을’이 되는 거죠. ‘갑’은 어디 있습니까? 갑은 없는 거죠. 갑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데 갑의 지시를 받고 을이 움직이니까 이스라엘만 있을 뿐이죠.
요한계시록을 하면서 이스라엘을 언급하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할 때는 먼저 요한계시록이 나올 수 있는 자리가 옛날 언약의 자리와 똑같은 원칙으로 이스라엘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야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심으로 하지 않는 다른 곳에서는 요한계시록을 백독, 만독 해도 요한계시록을 모른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면 옛날에 이스라엘이 있었는데 거기에 모세가 있었던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스라엘을 어디 있느냐, 어디서 만나느냐?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구약에는 특정 지점이 있어요. 가나안 땅이라는. 신약에는 어디 있느냐는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때그때마다 이스라엘 되게 만들어내기 때문에 어디 있느냐가 성립이 안 돼요.
예를 들어서 광복절 밤에 여의도에서 불꽃놀이를 했다. 그러면 8월 16일에 가면 불꽃놀이 합니까? 안 하죠. 이미 끝났잖아요. 그런데 분명히 불꽃놀이 있었거든요. 어디 있느냐? 이미 끝났어. 이미 사건 종결됐어. 이러면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겁니다. 신약에서 이스라엘, 교회라는 것은 항상 사건으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어디에 교회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어디 있느냐로 설명할 수 없고, 교회가 어떻게 등장하고 나타나느냐? 그런 식으로만 교회란 말을 쓸 수 있지 교회가 어디 있고, 몇 명이냐는 것은 신약에는 쓸 수 없는 용어에요. 교회와 만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그 교회가 어디 있느냐?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어디 있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될 정도로 피로 사신 거예요.
우발성인데요. 이런 신약에 교회가 우발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구약 때 이스라엘이 이미 한계를 보였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동행하면서 구약에는 여기 있다가 되거든요. 이젠 여기 있다는 것을 해체시켜서 하나님의 언약을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마지막 때 신약 시대입니다. 구약에는 여기 있다. 어떻게 움직인다. 신약에 오면 여기 있다, 움직인다는 게 성립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이스라엘 되게 할 때에만 이스라엘 되고, 교회되게 할 때만 교회되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그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이렇게 정리가 되지요.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습니까? 구약에는 이스라엘 빼놓고 잘라내는 작업을 해서 이스라엘만 있다는 그 시절이 있었다. 특정 공간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런데 신약에 보면 그 누구라도 요한계시록을 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남아있는 건 뭐냐? 그냥 요한계시록만 영원히 남아있을 뿐이죠. 말씀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디 있느냐? 요한계시록이 실현되는 그 순간, 사건에 요한계시록이 적용되면서 거기서 교회가 발생되게 돼있죠.
만약에 구약적 인식이라면, 구약적 인식은 신약에 통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서 구약적 인식이 이라면, 여기 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한다. 그러면 누가 갑이냐 하면, 교회가 갑이 되고, 요한계시록이 을이 되죠. 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주셨다고 되는 겁니다. 이러한 실험은 구약에서 이미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나님께 모세가 있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제가 요한계시록 하면서 신명기를 자꾸 언급하는 이유가,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위해서 홍해에서 건져냈다. 이러한 인식이 결국은 신약 시대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나 악마의 사주 역할,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바로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모른다. 어디 있다고 말하지 마라. 똑같은 질문입니다. 악마가 어디 있느냐? 모른다. 똑같은 거예요. 악마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네 아비는 마귀다. 악마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악마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한 그들이 악마였어요. 그게 안 되면 요한계시록의 짐승 개념이 전혀 풀리지 않습니다.
이미 실패로 끝난 거예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여기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한다는 시도는 그 자체가 단순히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고 실패이면서도 실패 아닌 양 여기면서 오히려 실패로 규정하는 쪽을 공격하는 식으로 자기의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하면서 구약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다시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의 뜻을 보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접하고 다른 민족은 하나님의 뜻이 없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느냐? 하나님의 뜻이 함께 있었지만 언약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여긴 본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본성과 속성을 발휘하면서 자기 나라와 함께 망해버렸다. 그렇다면 구약 사람들의 잘못은 뭐냐? 자기가 갑이고, 하나님은 을이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교회답게 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주신 것이라는 그 사고방식이 옛날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반복할 뿐이고 실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실패를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교회라는 것이 짐승의 앞잡이라는 것이 폭로되면서 진짜 요한계시록이 요한계시록답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략은 차질이 없는 거예요.
여기 교재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교재 초반에 읽어보시면 이 단어가 하나 나올 거예요. ‘도판’이란 말. 도판이란 말은 그림으로 된 판때기란 뜻이잖아요. 여기서 짜깁기로 표현했는데 이 표현도 맞지만 더 진실에 가까운 표현은 지구의 지각이 쭈그러들어서 맨틀에서 올라오는 마그마에 의해서 부유하는 하는 이동하는, 연못의 꽃이 피었는데 바람 부는 데로 이동하듯이 지각들이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서로 어울리면서 충돌하면서 지진이 발생하거든요.
뜯어낸 지각들이 하나의 도판이라면 전혀 논리적으로 안 맞는 도판들이 옆에 있으면서 뭔가를 보여주게 돼요. 구약에 그 도판들의 특징이 뭐냐? 전부다 구약 역사의 쪼가리들입니다. 신명기를 언급하는 이유가 구약부터 제대로 이해하자 이 말입니다. 구약부터 만들어낸 역사를 요한계시록은 잘라요. 맞지도 않는 그림들을 바로 옆에 놔둬버립니다. 이것은 구약적인 안목, 역사적 안목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자체를 주께서 차단시키는 겁니다. 모자이크가 맞지를 않아요.
요한계시록 그림이 있다면 A는 B와 만나고, B는 C와 만나야 되는데 이것이 갈가리 찢어져서 A 옆에 C가 있고, Z가 Y에 붙어 있고, 이렇게 돼있단 말이죠. 구약 역사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돼있는데 A에서 B, B에서 C, 시간 따라 흘러가는데 B는 따로 쪼개서 나오고, C는 따로 쪼개져 나와서 C는 A와 만나고, A는 X와 만나고 Y와 만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의 모든 문장들이. 그걸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맞습니까? 문법 자체가 역사적 토대 위에서 돼있는데. 안 맞지요.
지금 제가 언급하는 것은 왜 그렇게 하느냐? 왜 짜깁기하듯이 안 맞는 도판으로 요한계시록에 깔아놓는 이유가 뭐냐? 그걸 지금부터 설명하고자 합니다. 신명기 9장을 봅시다. 이스라엘 나오고, 2절에 보면, “그 백성은 네가 아는 바 장대한 아낙 자손이라” 가나안 땅에 아낙 자손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힘이 센 거인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거기를 차지해서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미리 40일 동안 정탐을 하고는 그들은 낙담을 합니다. 힘으로 못 이깁니다. 힘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다음에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제 이야기 아니죠. 신명기 9장 2절에 나오는 분명한 이야기지요. 그 다음에 4절에 보게 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여기 첫 번째 ‘힘’이 나오고, 두 번째 ‘의’가 나오죠. 힘과 의를 대비를 시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우리가 해석할 때 힘을 얻기 위해서 해석해야 됩니까? 의를 알기 위해서 해석해야 됩니까? 어느 쪽입니까? 천국은 힘쓰면 들어갈 수 있습니까? 못 들어가지요. 그러면 평소에 이 세상에서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한다는 자체가 터무니없는 짓이죠.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은 약속의 땅, 천국이 힘을 원치 않는 세계라는 것을 누가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상에서는 힘없이는 못 살거든요.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그만큼 살 힘이 축적돼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천국에는 남아도는 힘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그런데 천국은 힘을 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낙 자손은 천국에 못 가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국에 못 가는 아낙 자손을 그렇게 겁내고 있고 부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격해야 될 이스라엘이나 공격당할 아낙 자손이나 둘 다 똑같은 질이에요. 천국과는 상관없는 족속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익히 아시고 일부러 아낙 자손을 가나안 땅에 배치해놓은 거예요. 천국 가는 이스라엘이 정작 천국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들춰내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천국 가고, 구원받고, 복을 받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들은풍월로 많이 들었는데 정작 하나님과 함께 사는 세상은 이룰 수 없는 그런 조건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 이스라엘입니다. 그것을 주께서는 들춰내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명기가 그 당시 이스라엘을 들춰낸다면 요한계시록은 오늘날 우리를 들춰내는 거예요. 이 땅에 우리가 산다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 살 힘이 있기 때문에 살 힘 덕분으로 살아간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영생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은 오래 산다. 영원히 죽지 않는 걸 영생이라고 보는데 성경, 특히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어떤 인물입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잠자고 있으면 영생 얻으면 오랫동안 살 것이다.” 할 때 영생은 조금도 낯설지 않은 개념인데 영생이란 이름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영생이 그 사람 자체라는 인식은 우리한테는 상당히 낯선 인식이 되죠. 그런데 성경에는 여러분 알다시피 영생이 이 땅에 오셔서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그분이 영생이에요. 영생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아저씨가 영생이에요. 이게 납득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목숨이 계속 이어지는 걸 영생이라고 생각하는데 목숨이 힘이거든요. 어떤 아저씨가 나, 영생. 내가 생명이고 길이고 진리야. 생명이 돌아다닐 때 오래 살고 싶은 내가 그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쪽에서는 없는 거예요. 따라서 없다는 말은 우리는 영생과 상관없는 존재에요. 영생을 얻을 수도 없지요. 그 사람은 잡아서 먹는다고 해서 안 되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약을 올리듯이 내 살을 먹으라고 하니까 잘라서 따로 굽고 지지고 이렇게 먹는다고 영생이 아니다.
영생 자체가 현재 있는 내 목숨은 부지한 채 오래 간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영생과 연관되지 않는 영생이라고 따로 돌아다닐 때는 그동안 우리가 영생을 찾았다는 자체가 부질없는 종교적인 욕구에 지나지 않는구나. 일종의 환상이죠. 태어날 때부터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데 죽기 전에 뭔가 너무 한이 맺혀서 영생이란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교회 세우고 사람 끌어 모으고 했을 뿐이지 하여튼 우리는 영생은 아니에요. 다른 분이 영생입니다.
생명나무가 나무로 돼있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겁니까. 생명나무가 나무로 돼있기 때문에 나무만 치우면 영생은 못 얻게 돼있어요. 치워버렸는데 없잖아요. 옛날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할머니가 지혜롭게 제사 드릴 때마다 문어와 중요하고 비싼 것은 일년이 뭡니까, 삼년 씩 계속 다락에 감춰놓고 작년에 한 것을 또 내놓고. 감추니까 더 먹고 싶은 것 있죠. 만약에 문어가 영생이라면 우리는 맛도 못 봤어요. 그걸 치워놓으니까 아무리 살고 싶어도 영생 자체가 이미 절단된 상태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그 절단된 상태를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세상은 힘의 세계, 힘의 세상입니다. 힘의 세상에서 요한계시록을 본다는 것은, 현재 힘을 더 얻기 위한 힘의 세상이라고 요한계시록에서 규정했잖아요. 규정했기 때문에 힘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나나 여러분들이 요한계시록으로 영생 얻겠다는 것은 힘으로 영생 얻겠다는 짓거리밖에 안 되는 거예요.
천국에 갈 수도 없는 것들이 천국 가겠다고 시도한다는 자체가 힘의 세계의 범주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기능을 할 뿐이에요. 그래서 “너는 이 세상이야.”라고 확인시켜 주는 작업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의 위력이란 말이죠. 이 세상을 힘의 세계로 만드는 요한계시록 하기 위해서 밑에 도판을 까는데 그 도판이 신명기 도판이란 말이죠. 이제 제가 도판이야기를 끄집어낸 이유를 아시겠지요.
신명기 9장에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배치하기를 아낙 자손을 가나안 땅에 배치함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낙담케 하는 겁니다. 낙담한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없다는 것이고, 평소에 이스라엘이 힘을 원했다는 것이고, 결국 이스라엘이 원하는 천국이라는 것은 힘 센 하나님을 평소에 원했다는 것이고 이 두 가지가 합쳐서 요한계시록에 들어오면 모두 다 악마에 소속돼있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과 고백을 한다 이 말입니다.
어느 교단이든 어느 단체든 요한계시록 해석하면서 “여러분, 우리 힘 뺍시다.” 이런 쪽으로 해석하는 게 없어요. 어떻게 하면 지금 갖고 있는 힘을 유지하면서 천국까지 들어가느냐? 그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요한계시록 해석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 있잖아요. 일곱 교회 해석할 때 보세요. 일곱 교회가 이렇게 책망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 바짝 차려서 이러한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하게 되면 우리 교회는 나름대로 존속하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모아놓은 힘은 누수 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고 커질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렇게 해석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 요한계시록 본래의 취지라는 겁니다. 그래야 교회가 짐승의 앞잡이라는 게 들통 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신명기를 몰라서 그래요.
신명기 9장에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아낙 자손을 배치한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 가는 것이다. 의가 힘으로 전환되는 것을 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신명기 9장에 보면, 너희들은 원래 목이 곧은 백성이다.
5절에 보면,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그 다음에 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목이 곧은 백성이니까 죄라는 뜻이고 죄라는 것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고 죄기 때문에 반드시 힘을 얻고자 힘을 탐내게 되고 힘을 그리워하게 돼있는 속성을 감출 길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의를 줄까?” “아닙니다. 헌금을 주시옵소서. 교인들 주시옵소서.” 구조가 이렇게 돼있단 말이죠. 더러운 구조가.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더러운 죄성을 주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로 아름답게 수놓아서 오려서 요한계시록을 장식하는데 밑에 도판으로 까는 거예요.
제가 신발을 샀는데 급하게 사느라고 컸어요. 그래서 한두 달 동안 마음고생을 했지요. 신발을 신을 때마다 신발이 미워지는 겁니다. 신발 수선하는데 갔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한 달 동안 입원해서 한 달 더 기다렸어요. 그래서 어제 드디어 그 사람이 일 시작해서 가죽을 대충 오려서 앞부분에 집어넣으니까 딱 맞아요. 그래서 삼천 원 받았어요.
밑에 도판을 까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이라는 도판이 깔렸다는 걸 모르고 현대 21세기 관점에서 힘을 얻고자 하는 그런 본성을 감추지 않는 채 요한계시록에 덤벼들어서 천국 가는데 힘 달라고 요한계시록을 보고 있단 말이죠. 처음부터 신명기에서는 너희가 목이 곧은 백성이고 의롭지 않다고 이미 판정 났잖아요.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된다니까 의를 양으로 끌어 모으려고 또 죄의 본성을 발휘하는 겁니다. “너, 의를 얼마치 모았어? 난 이만큼 모았어.”
만나라는 것이 많이 저축하라고 준 만나가 아닙니다. 광야에서. 만나라는 것은 저축할 필요가 없는 하늘에서 온 음식이에요. 하늘나라에는 저축 왕이 없다 이 말입니다. 은행도 없고 보관금고도 필요 없다는 거예요. 하늘나라에 도둑놈이 없는 이유가 뭘 보관할 게 있어야 도둑놈이 있지. 자기 게 없는데. 자기 것이 없는 천국에 가려면 이 땅에서부터 자기 것이 없어야 된다는 걸 훈련을 해야 되는데 이 땅에서는 훈련이 안 돼요. 왜냐하면 내 것으로 내가 살기 때문에 내 것이라는 게 있어야 된다고. 내 의, 내 믿음, 내 소망 등 전부 앞에다 내 것을 붙이기 때문에 내 것 빼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요한계시록에서 일괄적으로 마음껏 갖고 있으라고 해놓고 시커먼 콜타르를 부어버려요. 모든 게 죄가 되도록. 마음껏 가져. 얼마나 가지든지 상관없이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산다고 자랑질하지 마세요. 그것도 죄에요. 물론 잘 사는 것도 죄고. 적당하게 사는 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신명기에 나타나는 언약의 본성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의는 오직 언약에서 나오기 때문에 언약 빼놓고 의라고 간주 안 할 작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심을 했어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구원하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그런 죄 많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다녀야 역사 배후에 있는 이름 모를 세력자가 나오잖아요. 그걸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짐승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이게 이 세상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재 5페이지에 보면, 교재가 있으면 참 강의하기 편해요. 그냥 읽기만 하면 되니까. [네 생물이 어디 있는가? 누가 본 사람이 있는가? “저 꽃병은 무엇인가?”라는 말은 성립이 되는데 이는 역사상에 있다고 느껴지는 질의자와 꽃병은 같은 역사적 존재로 눈에 띄기에 당연한 질의다. 하지만 네 생물은 어디 있는가? 없다! 따라서 질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일곱 머리에 열 뿔의 짐승이 이 세상 어느 수풀에, 어느 동물원에 있는 짐승인가? 어느 열대 우림 지역에 있는 짐승인가? 본 사람이 있는가? 없지 아니한가. 왜 없는 짐승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가? 따라서 그 질의도 성립될 수 없다.]
꽃병과 질문하는 사람이 같은 역사에 존재해 있잖아요. 같이 있잖아요. 눈에 띠잖아요. 네 생물은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없는 걸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안 되지요. 있어야 묻지. 여기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이 이 세상 어느 수풀에, 어느 동물원에 있는 짐승입니까? 이 동물원 가봤어요? 없지요. 어느 열대우림에 있는 짐승입니까? 본 사람 있습니까? 본 사람이 없는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자체가 말도 안 되죠. 왜 없는 짐승에 대해서 왈가왈부합니까? 따라서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악마를 짐승이라고 표현한 것은, 짐승은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요. 반려동물은 이름을 붙이는데 그것은 가깝기 때문에 그렇지, 지리산에서 곰 만나면, “영식이 아니냐?” 이럴 수는 없단 말이죠. 이름은 인간에게만 붙일 자격이 있고 짐승은 붙일 자격이 없다는 그 인간이 짐승을 짐승이라 부르기 때문에 짐승 이름이 없는 거예요.
왜 그렇게 이름이 없느냐 하면, 이름이 없는 분이 척결해야 되지 이름이 있는 인간은 이름 없는 존재에 대해서 대항할 수 없습니다. 천로역정 글 읽어보셨지요. 거기서 크리스천이 칼로 짐승 찔러 죽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에요. 그건 지가 천사보다 더 세다는. 천사도 짐승에 대해서 갈지도 못했습니다. 지가 뭔데 칼 들고 찌릅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님도 짐승을 이기지 못했어요. 이 세상에 계실 때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왜 그러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을 때부터 인간은 짐승의 하수인으로 돼있기 때문에 갑은 짐승이고 을이 인간이거든요. 어떻게 을이 갑을 이깁니까.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도판으로 까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막상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똑같은 인간을 상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잔득 풀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저 적들은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가 이스라엘의 고민거리인데 하나님은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해요. 저 적을 두려워하지 마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지 너희에게 속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자꾸 해버려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분명히 같이 봤어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본 게 뭐예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눈이 네 개입니까. 똑같이 눈이 두 개에요. 시력이 5.6입니까? 1.5 됐는지 모르겠어요. 똑같이 봤어요. 똑같이 그들은 우리보다 힘세고 우리는 메뚜기 같고.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낙담하고 울고불고 통곡하고 난리 났어요. 왜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갑시다. 승리합니다.” 왜 그런 망발을 했어요? 그들은 뭘 봤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을 배치해놨다는 입장에서 언약을 생각하니까 그들이 힘센 자를 배치해놓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배치해놓은 것에 대해서 극복할 하나님이 함께 하는 믿음이 있느냐하는 여부를 보겠다는 것으로 본 거예요.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나머지 열 명은 하나님, 하나님 말은 하지만 전혀 하나님의 존재를 안 믿어요. 그냥 강호동 같은 큰 덩치, 그러니까 씨름하면 마땅히 지지요. 패배하기 마련이지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힘으로 밀어붙이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패배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전쟁은 적들과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와 전쟁하는 중이다. 진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언약으로 전쟁하는 중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갈렙과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갔을 때에 전쟁을 하면서도 사실은 이방민족과의 전쟁이 아니고 그것은 바로 지금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둘 사이의 전쟁입니다. 그저 뭐든지 힘으로 이기려고 하는 이 본성, 지울 길이 없어. 돈 힘, 명예 힘, 권력 힘. 뭐든지 힘으로만 해석이 가능한, 힘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되는. 뭐든지 힘으로만 생각, 계산, 줄 세우려 하는 이런 사고방식은 지금도 주님의 말씀과 우리와 끊임없이 전쟁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위로 잘라서 그냥 밑에 깔아놨습니다. 깔아놓으니까 말씀이 그냥 깔리기만 하겠어요? 거기서 말씀 자체의 위력이 막 나오거든요. 구약에 이스라엘이 실패하기 전의 이스라엘이라면 신약 요한계시록에는 모든 인류가 이스라엘이고, 그것도 다 패역한 이스라엘로 이미 확장되고 말았어요. 이스라엘 멸망하면서 각 나라로 흩어졌잖아요. 따라서 언약이 따라 가서 이스라엘을 따라 갔으니까 언약적으로 적용되는 겁니다. 이것은 선지서에 예언돼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중앙과 사방. 역사적으로 보면 중앙은 역사에 포함이 돼있습니다. 동서남북 가운데가 중앙이 되죠. 이건 구약이거든요. 신약 때에는 중앙이 뜹니다. 떠서 중앙이 보이지 않습니다. 중앙은 어린양 하늘나라 보좌가 중앙으로 자리 잡습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의 그림은 이 하나로 끝났어요. 사방 동서남북은 스가랴에 나오는 겁니다. 스가랴에 보면 이 네 모퉁이마다 네 천사를 동원해서 동서남북을 쥐고 있어요.
어릴 때 이불 호청 빨 때 보면 완전히 공사에요. 보통 작업이 아닙니다. 날 받아서 특히 6월 6일 공휴일은 이불 호청 빠는 날이에요. 남자든 여자든 다 동원해서 풀 먹여서 양쪽에서 잡아 당겨야 돼요. 특히 열 세 식구 되면 이불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빳빳하게 다린다고 여자가 갑이 되고 남자가 을이 되어서 당기죠. 사방을 동서남북을 천사가 당겨주는 거예요.
구약 역사에선 중앙이 있어요. 항상 영웅이란 역사에서 중앙지점을 차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중앙지점에 법궤가 있지요. 요단 강 건너갈 때 제사장들이 법궤를 호위했잖아요. 그리고 가나안 땅 전쟁에서도 항상 법궤가 중앙이 되어서 갔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가 전차나 기갑부대인 줄 알고 들고 갔다가, 그러니까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힘으로 해석한 거예요. 이런 역사가 얼마나 고마운 역사입니까.
교회가 땅 사놓으면 무조건 땅값 올라야 돼요? 교회가 하는 일은 무조건 야외예배 하면 비가 안 와야 됩니까? 대구 어느 교회는 권사님들 놀러 갔다가 차가 뒤집어져서 여섯 분 돌아가셨어요. 갈 때 차에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했겠어요. 목사부터 기도하고 갑니다. 처음부터 기도할 때 여섯 명만 죽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적 없잖아요.
힘으로 생각했는데 주께서 그 힘을 빼앗아버렸어요. 이것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중앙이 아니고 중앙은 너희를 비껴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속 중앙지점을 차지했는데 나중에 기원전 586년에 망합니다. 망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흩어졌던 모든 세계가 이스라엘이 우상 섬겨서 하나님을 대적한 것처럼 이스라엘만 우상 섬긴 게 아니라 모든 나머지 민족들도 우상 섬기는 것으로 마땅히 중앙지로부터 벌 받아 될 것을 확정짓기 위해서 천사가 여기 오지요.
그 네 천사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사람 모습, 독수리 모습, 황소 모습, 사자 모습, 사면을 차지하고 있고 중앙에 인자 같은 이가 계셔요. 이게 일종의 전차에요. 이것이 중앙지점에 있으면서 지상에 모이거든요. 그렇다면 사람, 독수리, 황소, 사자, 이것이 요한계시록 4장 7절에 보면,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사자 같고, 송아지 같고, 황소 같고, 독수리 같고, 이렇게 요한계시록 4장에 있잖아요. 그러면 이 도판은 에스겔 1장에서 자른 것이죠. 자를 때 그냥 자르면 안 되고 에스겔 1장에서 뿜어내는 하나님의 뜻이 담기도록 뿜어줘야 돼요. 에스겔에서 차용했구나 하고 넘어가면 안 되고 에스겔 자체에서 이러한 천사의 모습은 어떤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했던가? 그걸 그대로 가져와서 요한계시록에 깔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 밑에서 에스겔 취지가 뿜어 나오죠.
그러면 사람, 독수리, 황소, 사자는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이 범주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못 벗어나요. 심판이라 하는 것은, 힘으로 버티려는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은 중앙에서 원하는 것은 의를 원하죠. 의는 하나도 없고 전부다 힘으로 버티니까 이 땅은 마땅히 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에스겔에 보면, 분명히 사라져야 되는데 이 세상은 멸망돼야 된다고 외치는 자가 있어요. 그게 에스겔, 인자에요. 인자가 외치잖아요. “사라져야 돼!” 인자가 나중에 중앙이 되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성소, 새로운 이스라엘이 만들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이 중앙에서 내려온 성령이나 인자가 임하면 그것이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에스겔이 그 취지거든요. 그 취지를 21세기 밑에다 박아놓으면 세상에서 움직이는 모든 의식은 누가 힘세냐? 힘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힘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신명기에 의해서 의가 없는 힘으로 버티는 사람은 멸망한다고 외치는 그 당사자가 하나님의 교회, 이스라엘에 소속된 144,000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풀리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짐승은? 여기에서는 짐승이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다니엘 도판이 들어가는데 다니엘에 짐승이 나와요. 짐승이 여기서 중앙을 차지해요. 이스라엘 멸망할 때 중앙은 하늘로 떠버렸지요. 떠버리고 그냥 차지하는 게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두 증인을 살해함으로써 중앙을 차지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 십자가 죽으신 곳이고, 그게 소돔이고, 애굽으로 돼있어요. 이게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잖아요.
주님이 중앙으로 떠버렸는데 그 빈자리를 적그리스도, 짐승이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차지할 때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어린양의 모습으로 차지하면서 사람들은 여기서 옛날 이스라엘을 반복하고 이스라엘을 그대로 모방하는 그러한 형태의 종교국가가 이 세상 전부를 차지하게 되는 그러한 모습이 되겠지요. 그게 바로 악마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양의 탈을 쓰고 세상을 차지하고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있고 모든 사람은 이로써 우리는 이 땅에 천국을 이뤘다고 자부하는 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그런 과정을 주님께서는 구약에 있는 도판들을 동원해서 밑에 깔아놓는 겁니다.
쉬고 하겠습니다.
첨부파일 : 20130606 봄특강a.hwp (50.5K), Down: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