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론 130611
삼신론 130611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한윤범(IP:14.♡.134.60)
13-06-22 11:27
20130611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4-삼신론
(강의:이근호 목사)
시대적으로 누메니우스는 2세기 후반이니까 에우도로스보다는 뒤에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누메니우스 보면, [이런 금욕주의에 신비주의적 요소가 가세함으로써] 금욕이 금욕으로 머문다면 어떤 실적이 주어지지 않잖아요. 그래서 자기가 남들보다 금욕을 했으니까 줄일 것 줄이고 안 쓸 것 안 쓰고 참을 것 참았으니까 뭔가 그만큼 손해 봤잖아요. 그러면 보상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 보상이 뭐냐 하면, [‘절대 순수’를 추구하게 되었다.]고 돼있어요. 사람이 한쪽을 양보했으면 그 양보를 계속하기 위한 동기 부여가 내가 손해 본 만큼 많은 이익이 주어질 때 계속해서 우리는 양보를 해낼 수 있는 겁니다. 절대순수. 그걸 신의 마음.
여기서 인간이 신을 찾게 되는데 니체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 신이 있다는 것. 신에 관한 것이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닌데 실제로 신은 있다, 없다는 판정을 내릴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를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신이 있다, 없다는 판정을 하려면 어느 위치에 올라가야 하느냐 하면, 신을 내려다 볼 수 있을 때 신이 있다, 없다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보다 신이 높다고 해놓고 그 높은 분을 낮은 인간이 있다, 없다고 규정할 수 있느냐? 그것은 말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 겁니다. 니체에 의하면. 그래서 신이 있다, 없다가 아니라 왜 사람들이 신을 찾을까를 생각하면 돼요. 신이 있다, 없다는 문제는 무의미한 거니까.
어떤 경우에 신을 찾느냐 하면, 보상 때문에. 그 보상은, 니체의 이야기입니다. 힘의 의지. 세상은 모든 것이 힘으로 짜여 있는 질서체계인데 힘이 좀 밀린다 싶으면 밀렸으니까 자기는 손해 봤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자기가 전에 이만큼 가졌는데 힘을 빼앗겼으니까 비록 힘은 옛날만큼 못 가져도 옛날에 저 자리가 내 자리고, 저 힘의 자리가 내 자리라는 빈 공터는 남아 있을 것 아닙니까.
흥부전에서 흥부가 놀부 집에 양식 가지러왔는데 형수가, 너 같은 거지한테는 양식 못 준다며 주걱으로 뺨을 칠 때 흥부는, “나는 오늘 양식 없어.”라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는 거예요. 밥풀떼기 두 개가 붙은 것으로 오늘의 성과는 이루었다고 해석하고 싶은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뭔가 텅 빈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거죠. 반드시 텅 빈 자리는 다른 것으로 메워야 되는데 흥부는 주걱에 묻어있는 밥풀떼기로 처음에 생각했던 양식 얻을 그 빈 공간에다 때우는 겁니다. 인간이란 힘을 알게 되면 힘이 있는 만큼 자기의 면적이 넓어져요. 그 힘이 계속 채워지게 되면 그 면적만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겠는데 이게 어쩌다가 힘이 빠져버리면 힘은 빠지고 옛날 자리라는 면적은 남고. 그걸 뭔가로 채워야 된단 말이죠.
여기 절제하고 금욕주의 하는데 사람이 금욕주의라는 것이 많이 가졌을 때는 절제, 금욕이 잘 안 돼요. 그런데 절제, 금욕이 언제 되느냐 하면, 수입이 변변치 않을 때는 수입이 없다고 하면 되는데 “이제부터 아껴 써야지.” 전기가 남아 돌 때는 절전 안 합니다. 원자력발전소 몇 개 가동이 중지되니까 “이제부터 여름에 덥게 지내야지.”라고 하는 거예요.
이 면적이 있는데 면적이 전체를 다 차지했는데 힘이 빠지니까 이만큼은 남아 있잖아요. 남아있는 부분은 자리는 있는데 내용은 빠졌으니까 자살하지 않는 한 면적을 끊을 수 없어요. 인간이 자살하는 이유는 자리마저 자기 화딱지 나서 구겨서 한강에다 던져서 없애버리려는데, 자리 자체를 없애려는데 자살하지 않는 한 옛날에 잘 나갔던 그 시절 그때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남아 있다면 이 뒤에는 그냥 텅 빈 채로 남겨두지 않습니다. 뭔가로 메워야 돼요.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집에서 안 놀아요. 사업에 실패하면 반드시 다른 사업을 하게 돼있어요. 그것 안 되면 자살하죠.
성경에 고린도전서 15장에 이런 말씀 있잖아요. 22절에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러면 안 죽은 사람은 누굽니까? 아담 밖에 있는 인간은 안 죽겠지요. 그런데 인간치고 아담 바깥으로 나간 인간 없잖아요. 사도바울이 아담 안이라 할 때는 모든 인간을 그 범주 안에 가두었잖아요. 그러면 너는 아담 안에 있다. 사도바울이 단순히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너는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말을 살아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살아있네.” 이 말이 아니고 다른 말로 해야 돼요. 뭐냐 하면, “죽어있네.”이게 정답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그 뒤의 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때문에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살아있으니까 생명이잖아요. 인간이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은 죽은 자리에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되죠. 이것은 내 자리인데 내 자리에서 어떻게 생명을 얻을까?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자리 자체를 바꿔야 되겠죠. 이건 내 자리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으니까 예수 자리로 바꿀 때 비로소 그것은 생명을 더 이상 추구할 필요 없이 예수 안이라는 그 요건 때문에 거기서 계속해서 생명이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란 단순히 예수님 혼자 죽었다 살아난 게 부활이 아니고 아담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리를 우리의 자리로 바꾸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거예요. 그걸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부활의 장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내 것입니까? 내 것이 아니고 다 주님의 것이죠. 여기 있는 안경, 머리카락,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되면서 그 주님의 안경, 옷, 전부 다 뭉쳐져서 생명을 증거하라고 지금 우리가 요 모양 요 꼴로 그리스도 안에 살도록 하신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체가 완성이에요. 미흡함이 없다. 모자람이 없고 채워야 될 하등의 이유도 없어요. 왜냐하면 계속해서 영생하는 우물처럼 나오니까. 나오는 것도 감당을 못할 정도로 나오니까. 나오는 족족 주님의 영생이라고 감사하다고 그런 일 하기도 바쁠 마당에 뭘 더 채워요.
쉬운 예로 이런 겁니다. 밥을 먹기만 하면 배가 나와. 옆구리 살도 나오고. 그런 아줌마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아줌마가 살을 빼려고 시도를 해보는데 살을 뺀다는 것은, 자기가 더 이상 자기가 아니라고 자기를 포기해야 가능한 거예요. 밥을 먹으면 살찌니까 밥을 안 먹으면 되는데 사람이 밥을 안 먹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거잖아요. 살을 뺀다는 것은, 내가 죽고 다른 사람으로 다시 산다는 그러한 계획에 불과한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날마다 나는 내가 아니고 싶다는 그것의 되풀이에요. 우리는 아담 안에서 내가 원하는 걸 알아요. 그런데 살아도 이것은 사는 게 아니고 죽음이라는 걸 명심하면서 주께서 죽었다는 것을 계속 지적하면 그 지적의 능력이 바로 우리를 살게 하는 능력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럴 때 성도에게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 말씀만 생생하게 수면 위로 올라오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우선이 아니고 말씀이 우선이죠. 보통 사람은 자기가 우선이지만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하나님은 율법을 위해서 결혼했는데 사람들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결혼한다니까 결혼에 관한 신명기 계명에 대해서 기겁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럴 것 같으면 결혼은 왜 하는데. 미쳤다고 결혼하겠어? 율법을 준 것은 우리에게 왜 죽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예요. 율법을 통해서 죽음을 알아야 그리스도와 결혼한다는 게 성립되거든요. 사람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하는데 지키는 게 아니고 율법과 결혼관계에 있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알 때 율법이 죽든지 우리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가 죽지 아니하면 그 관계가 스스로 안 깨워져요.
성경이 그런 거예요. 성경은 지키고 말고가 아닙니다. 나라는 것은 어떤 관계에 엮여있는데 그 엮여있는 관계를 설명해주고 동시에 예수그리스도에게 엮여있는 자에게만 영생이 주어졌다는 그걸 설명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성경과 관계없이 누메니우스나 에우도로스나 뒤에 나오는 필론이나 오늘 본격적으로 하려는 플로티누스나 이런 사람들은 성경의 계명이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니체 말대로 모든 게 힘의 의지 속에 힘의 그림판 속에서 내가 빠진 것만큼 채우지 아니하면 결핍을 느끼는 겁니다. 사람이 결핍을 느끼면 밥을 먹든지, 뭘 해야 돼요. 사람이 만족해야 사는 재미로 사는데.
쉽게 말해서 “나는 이 정도야.” 이 정도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 정도가 안 되니까 그 빈 자리에 바로 여기에 채워지는 게 신인 거예요. 니체가 신이 죽었다는 말은, 자꾸 신을 핑계대지 말고 너의 본디 네 모습으로 돌아가면 될 문제인데 왜 자꾸 신을 찾느냐 이 말이죠. 인간은 힘의 의지에 의해서 힘에 밀리고 당기고 힘이 있고 없고 그런 식의 인생인데 자꾸 아닌 척하는 그게 꼴사납다 이 말이에요. 자꾸 신을 빙자해서 신을 채우다가 나중에 돈이 채워지면 신으로 채우던 것을 신을 한쪽으로 모셔둬요. 다시 이걸로 자기를 채우는 거예요.
그래서 니체는 종교를 싫어합니다. 그걸 대체종교라 합니다. 이제는 종교가 필요 없고 대체종교가 필요하다. 대체종교의 교리가 뭐냐? 힘을 사람들이 그리워하면서 인간은 사는 보람을 느낀다. 이게 진리입니다. 힘을 그리워하면서 아직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힘이 언젠가는 나에게 주어질 기회가 있기 때문에. 기회가 있는데 미리 죽을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키우라는 것은 힘을 키우라는 말이고 힘을 받을 바가지만 키워라. 시편에 나오는 입을 크게 벌려라. 비슷하잖아요. 밑에 단지만 조성해놓으면 언젠가 아파트 올라온다는 그 말이거든요. 단지 조성하는 청소년, 이제는 채우기만 하는 거예요. 이게 덜 채워질 때는 청소년들은 신을 믿는 게 아니고 신을 믿는 것은 기독교 계통이고. 신 대신 대마초, 술, 담배, 폭력, 성폭행, 나이트클럽, 이런 걸로 채우는 거예요. 그렇게 20대를 보내죠. 이 20대가 다른 20대를 만나서 결혼을 합니다.
옛날 결혼이란 집안에서 이미 정해줘서 하잖아요. 그러면 그 자리는 자기가 만든 게 아니고 여자 같으면 결혼한 여자답게 살면 되는 거예요. 사람답게 산다는 건 없어요. 자기가 원하는 사람 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고 했잖아요. 니체는 이렇게 바꿉니다. 네 자신이 되어라. 어느 정도 되면 내 자신이 되는 겁니까? 그것은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에 긍정하면 그것이 바로 네 자신이 네 스스로 잘 만들고 가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들어보니 기쁜 소식 같지 않아요? 이게 복음이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되는 것을 여러분 원하는 대로 채워주길 원합니다. 이게 니체의 이야기잖아요. 여러분들이 원하는 대로 꿈대로 이뤄주십니다. 이게 니체철학이라니까요. 사람들이 오늘날 너무 허무하거든요. 왜 허무하냐 하면, 평균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평준화된 인간이거든요. 대체종교에서는 힘이 우선이라고 힘이 있는 곳에 모이다 보니까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얼마나 평준화인지 보세요.
우리나라에서 힘 가진 사람은 이건희지요. 삼성그룹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사람이 여기에 배치가 됩니다. 그렇다면 삼성그룹을 중심으로 해서 차이, 순서에 따라 어떻게 됩니까? 삼성그룹이 돈이 많으니까 로펌, 법인을 세워도 소위 삼성에서 당겨서 거기 들어가게 되면 같은 변호사라도 최고의 변호사가 되겠지요. 삼성이 지원하면 최고가 되는 거예요. 야구도 삼성이 공동 1위고, 배구도 삼성화재가 1등이죠. 모든 것을 여기 줄이 서있다는. 여기에 삼성이 원하는 본질에 맞도록 순서가 정해져 있으니까 평균화되는 거예요.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소외당하겠지요. “너는 내 뒤에 서.” 이게 바로 대체종교에요. 이게 바로 신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자기가 이미 종교인이에요. 힘이 있어야 산다는 게 대체종교잖아요. 거기에다 기독교나 불교, 천주교나 믿겠다는 이 말은, 단지 종교를 믿는 것은 힘이 빠져버린 누락된 것을 뭐로 채워야 되니까 예수란 신으로 삼위일체로 채우는 거예요. 채우는 것은 정작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은 안 다치도록 채워요. 문지기로 채우는 겁니다. 진짜 자기가 갖고 싶은 자기 자신은 뒤에 남겨두고. 외부에서 뭔가 치게 되면 앞에 있는 종교가 깨지잖아요. 그건 깨져도 자기 자신은 안 깨지겠죠.
그래서 깨져도 상관없는 것을 앞에 설치하는데 그게 신앙이라는 겁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믿는 것. 깨져도 무방한 것. 왜 깨져도 무방한 걸 앞에 세우느냐 하면, 범퍼죠. 진짜 깨지기 싫은 것은 자기 자신을 뒤에 숨겨놓은 거예요. 그래서 자기 기도대로 잘 되면 뒤에 있는 자기가 웃고, 잘 안 되면 역시 신이라 하는 것은 꼭 있는 게 아니고 있을 수도 있고. 있는지 없는지 누구도 잘 몰라. 내가 언제 예수한테 푹 빠진 적 있나. 그냥 한 주일에 한 번 교회 왔다갔다하면 되지.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수가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중요한 게 아니고, 말씀이 중요한 게 아니고, 계명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안 다치고 싶은 거예요.
이 대체종교가 바로 현재 종교생활 하기 때문에 안 다치기 위해서 가짜로 종교를 섬기는 그것이 기독교고 그게 바로 불교고 천주교고 교회고 그런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바로 누메니우스, 에우도로스나 필론이나 또는 뒤에 나오는 플로티누스라 하는 모든 시대 인간이나 지금 기독교에 있다는 인간이나 똑같은 인간, 인간은 시간 따라 달라진 적이 없어요.
제가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시간은 흘러가지도 않고 시간은 지나가지도 않아요. 시간은 그냥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인이 늙어서 망가지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늙으니까 세월이 흐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개한테 물어보세요. “주인이 많이 늙었지. 시간이 많이 흘렀지.” “내가 보기에는 시간이 흐른 게 아니고 주인이 늙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개는 피아노 보고 말했어요. 피아노 여기 몇 년 됐지? 피아노는 맨 그대로 있어요. 우리는 몇 년 전에 지금보다 젊었고 지금은 늙었잖아요. 같은 시간이 있으면 피아노는 늙지 않잖아요. 시간을 느끼는 것은 피아노가 느끼는 게 아니고 괜히 우리는 시간 핑계대요. 자기는 이 땅에 태어나서 스스로 무너지는 거예요. 자기 자리가 무너지잖아요.
신을 도입하는 것은 무너지는 이 현상을 인정하면서 그래도 신만 접착제로 붙여놓으면 신은 안 무너질 것이니까 신은 영원한 존재니까 완벽한 존재니까 완벽한 존재와 붙어있으면 안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나 신을 찾는 이유는 정립이 됐지요. 결국 신을 찾는 것은 자기 자신을 영원히 신처럼 유지하기 위해서 대체물로 신을 찾는다고 했지요.
두 번째 문제입니다. 그런데 신이 됐다, 안 됐다는 것을 무엇으로 측정합니까? 내가 신처럼 됐다, 신에 가깝다. 측정이 돼야 되는데 어떻게 측정이 되지요? 측정하는 방식을 어디서 도입해야 됩니까? 누메니우스나 에우도로스 이 두 사람은 자연에서 찾아요. 24페이지 읽어볼게요. [누메니우스라는 자는 위계적 삼신론을 정립함으로써 플라톤에서 공시된 삼신론의 신비주의화 과정을 본격화시켰다. 누메니우스의 위계적 삼신론은 이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의 원리인 제1신, 그리고 이 세계를 형성시키는 발생의 원리이며 데미우르고스라고도 불리는 제2신,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세계 자체인 제3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여러분이 아셔야 될 것은 1신과 2신과 3신, 모두 신이지요. 아까 예수 안에서란 말을 했잖아요. 고린도전서 15장 22절. 이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가 아니고 신 안에서 사는 거예요. 신 안에서니까 내가 신을 안다는 표현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 현재 눈에 보이는 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의 변화, 가을되면 낙엽 떨어지잖아요. 내가 낙엽 다 뗐습니까? 내가 페인트칠 다 했어요? 아니잖아요. 내가 자연을 손 안 대도 어떤 존재가 자연을 손대서 봄여름가을겨울로 되잖아요. 그렇게 변화시키는 신. 그 다음에 신이 변하면 안 되잖아요. 변화는 주지만 본인은 변화가 안 되는 신. 그러니까 인간은 있음 자체는 변화 되는 신속에 있으니까 변화를 유발하는 신속에 있으니까 깨달으면 그 자체가 결국 신의 품 안에 영원히 산다. 되잖아요. 종교 아닙니까. 이게 멋진 교리가 되겠지요.
방금 한 이 이야기를 제가 신이라고 했습니다. 누메니우스라고 분명히 했지요. 기독교 들어오기 전입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 후반이지만 기독교와 관계없어요.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 교인들이 예수란 용어를 하나님으로 바꾼다고 합시다. 그러면 누메니우스와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 날 게 없지요. 신의 주권. 이것도 신의 주권. 차이 나는 게 뭐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교회, 사도바울이 말하는 교회와 상관없는 교회들이지요. 결국 교회라는 것이 사람들의 종교심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지 성령에 의해서 교회가 된 건 아니에요. 성령에 의해서 교회 되려면 하나님의 피가 나와야 됩니다. 그리고 줄곧 이 세상 끝 날 때까지 하나님의 피만 이야기해야 돼요. 사도행전 20장 28절에 의해서.
그런데 정작 교회에서 주제는 존재론적 아닙니까. 이게 누메니우스적이죠. 내가 여기 있음은 신과 함께 있다. 모든 되어가는 것은 신의 뜻이다. 끝인 거예요. 계속 그걸 뱅뱅 돌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납득이 안 될 이유가 없지요. 이해 다 되는 거예요. 왜? 같은 인간이니까. 교회 와서 한 수 배운 것밖에 없어요. 자기도 얼핏 생각했는데 교회에서 약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뿐이지 색다른 걸 이야기하는 건 아니에요. 자기 마음속의 종교성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건 절에 가도 천주교도 다 마찬가지고.
에우도로스 봅시다. [기원전 1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에우도로스는 신과의 합일이야말로 철학의 목표라고 설파하고]
참, 누메니우스 이야기하고 넘어갑시다.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자기가 금욕하고 있다는 것, 절제하고 있다는 것. 사람이 절제하면 할수록 빈 자리를 뭐로 채웁니까? 개뿔도 있어야 돈을 쓰지. 돈이 없으니까 그때는 그 빈자리에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계획으로 채워지는 거예요. 직장이 바쁘다, 돈 버는데 정신이 없다. 언제 성경 봅니까? 퇴직하고 할 일 없으면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고 그러겠지요.
신과 합일한다는 것은 사람이 두 마리 토끼를 못 잡는 거예요. 세상을 포기하면 빈 자리가 생기고 그 빈 자리에 포기한 만큼 채워지는데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질 때 그것은 신과 합일됐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합니다. 인간의 종교성. 그러니까 이 세상이 얼마나 악마적이고 위험한 세상인지 아시겠지요.
죽어서 지옥 간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 갔잖아요. 거지 나사로 입장이나 부자 입장에서 볼 때 지옥은 어디 있느냐 하면, 가서 불구덩이도 지옥이지만 이미 살아있을 때 거지 나사로의 가치를 전혀 못 알아보는 그 세상 자체가 지옥의 개시에요. 지금 부산 이 동네가 지옥이라니까요. 지옥에 살 때 지옥에서는 천국에 가지 못하는 그런 사상과 이념과 종교가 범람하겠지요. 그걸 우리가 보고 있는 거예요. 지옥의 사자, 누메니우스. 지옥의 사자, 에우도로스, 필론, 플로티누스, 쭉 나옵니다. 교부들. 지옥에 사자들 많이 나와요.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못 보게 만드는 것, 그리스도의 피 복음을 사도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는 구원받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막는 모든 그것이 아무 여과 없이 아무런 저지 없이(사실은 하나님께서 저지하고 있지만) 마음껏 활개 치는 이것이 지옥입니다. 여러분 덥지요. 지옥에 가깝지요.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여기가 지옥인데 사실은 생명나무 없으면 지옥이에요. 이미 인간은 생명나무에서 추방되었잖아요. 그럼 이미 지옥인 거예요. 여기에서 바라볼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 구원이란 이름을 줬다는 말씀 자체가 지옥이란 뜻이에요. 쟁기를 잡고 뒤 돌아보지 마라. 뭔 뜻입니까?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은 왜 있는가? 지옥 불이 얼마나 무섭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이 있는 겁니다. 불구덩이 될 것들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아직 불이 안 붙었지만. 결국 불붙게 될 것들을 눈만 뜨면 보고 있는 거예요. 화초고 피아노고 불바다 속에 재가 될 것들을 보고 있는 거예요. 박사학위, 석사학위, 목사, 장로도 마찬가지고. 예배당 건물도 마찬가지고. 예배당 건물 다 벌겋잖아요. 지옥을 보고 있는 거예요. 아침마다 교회란 지옥에 가서 거기서 들을 건 그리스도의 피 복음, 십자가 외에는 들을 게 없어요. 우리는 그 앞에서 회개하고. 이런 공부가 쓸데없는 공부가 아닙니다. 이 내용이 강단에서 늘 나오는 있는 내용이에요.
[기원전 1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에우도로스는 신과의 합일이야말로 철학의 목표라고 설파하고, 위계적 삼신론을 따르면서도] 삼신론이라 하는데 이게 애매하고 어려워요. 우리 상식부터 먼저 이야기하면, 신이 있고 신보다 못한 중재자 있고 그 다음에 신이 만든 피조물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플로티누스는 그렇게 이야기 안 하고 세상 자체를 신으로 보는 거예요. 세상을 신으로 봐야 구원이라는 것이 구태여 필요치 않아요. 자연세계를 신으로 보게 되면 자연세계 속에 우리도 포함돼있지요. 그동안 우리가 힘들게 사는 것은 진리를 몰랐을 뿐이지 신으로 살고 있는 거예요. 이걸 그 당시의 철학자들은 기쁜 소식으로 전한 겁니다. “내가 왜 늙지? 아, 늙게 하는 신이 있구나.” 그러면 이 육체는? 육체도 신이에요.
영지주의와 달라요. 영지주의는 이 몸이 악마의 것이에요. 봄여름가을겨울, 해와 달 다 악마가 만들었어요. 그런데 플로티누스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해와 달 모든 것은 신이 만든 게 아니고 그 자체가 신이라니까. 어렵다, 정말.
세 가지 견해지요. 자연은 신이 만들었다. 이것은 필론의 주장입니다. 교재 18페이지. 유대교니까. 자연은 신이다. 이건 플로티누스. 세 번째. 자연은 악마가 만들었다. 영지주의라는 겁니다. 자연 속에 우리 육체가 포함돼있지요. 이 육체는 악마가 만들었지요. 악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죠. 유대교나 영지주의는 구원이 성립되지만 두 번째, 자연이 곧 신이라면 구원이 안 됩니다. 구원이 있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몰랐을 뿐이지. 내가 신이구나. 그러니까 두 번째는 불교나 힌두교와 굉장히 유사하죠. 죽는 걸 왜 겁내. 자연으로 돌아가는데. 전에 통영에서 했잖아요. 죽는 게 겁 안 난다고. 에피쿠로스 했지요. 죽으면 내가 없어지니까 겁낼 주체가 없어지니까 두렵지 않고, 지금 아직까지 안 죽었으니까 미리 겁낼 필요 없고. 이래나 저래나 죽음은 겁나지 않는다 했잖아요.
다시 해봅시다. 지금 교인들에게 복음이 안 먹히는 이유가, 그들의 관심사는 힘 모으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힘을 얻기 위해서 신을 찾아왔어요. 사실은 힘이 모자라지 않지요. 그런데 “나는 이 정도로는 안 돼. 영 마음에 안 차. 이보다 더 많은 힘을 가져야 돼.”라는 것 때문에 힘을 채워달라고 신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힘의 속성은 오늘날 삼성으로 보면, 이미 질서를 잡아놨어요. 힘이 있다, 삼성그룹. 거기서 거리가 얼마나 떨어졌느냐에 따라서 힘이 없는 사람이 돼버려요. 사람이 힘이 있어야 삼성전자에서 나온 제품을 살 수 있어요.
그러니 이런 누메니우스, 에우도로스 이야기하면 옛날 구닥다리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는데 이들은 그러한 힘이 있다는 그것을 그러니까 사람이 힘을 찾잖아요. 힘을 어디까지 모아야 만족합니까? 삼성 이건희 형의 아들 CJ 회장은 도대체 돈을 얼마나 벌어야 만족하겠어요. 페이퍼컴퍼니 만들고. 그것은 본인도 몰라요. 자기 자리를 자기가 만들기 때문에 계속 만들고 돈으로 채우고 정복욕이지요. 무조건 채우고야마는 거예요.
낙산 해수욕장에 콘도 하나 있어도 천하를 얻은 것 같은 중소기업 사장이 그리스나 이태리, 프랑스 지중해 연안으로 여행 다녀오고 난 뒤에는 낙산에 콘도 하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고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이 괴로워하면서도 삶의 활력소를 얻겠습니까. 언젠가 요트 하나 마련해야지, 이런 것. 그러니 이런 이야기가 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입니다.
에우도로스 계속 해봅시다. 에우도로스는 ‘삼중적 일자’, 신은 전부 다 하나라는 거예요. 25페이지, [바로 정교한 삼신론의 이론은 알비누스에 이르러서이다. 그는 에우도로스의 삼중적 일체성과 플루타르코스의 중재자론을 종합하여 제1신, 지성, 영혼의 삼신론을 정립했다. 먼저 제1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 부동의 원동자는 남을 움직이게는 하지만 본인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에요.
신이라 게 왜 있느냐 하면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모든 것이 왜 변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실은 자기가 변하기 때문에 변하는 거예요. 이 말 어렵지만 참고 들으세요. 사람이 변화한다는 말은 본인이 변하지 않아야 된다는 어떤 걸 설정해놓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나는 절대로 때려죽여도 안 변해.”라는 것을 설정해놓기 때문에 그러니까 고집스럽게 변하지 않는 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변하는 걸 설명해서 이걸 어디로 가져오느냐 하면, “나는 변해도 변하지 않아.”라는 것을 확답을 받아야 돼요.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꿈속의 내 모습은 항상 30대고 20대라고. 나이 70~80되도 꿈에 나타난 그 모습은 절대로 80노인이 아닙니다. 20대나 30대 그 모습이에요. 고집 같은 게 있어요. 어떤 경우에도 나는 그대로다. 헤겔은 이걸 동질성이라고 하거든요. 인간은 자기 동질성이 있어야 나라는 정체성이 성립됩니다. 이걸 과도하게 고집부리면 정신분열 환자가 되는 거예요. 나는 나폴레옹이다. 나는 비록 남자지만 내 안에 나는 실제로 여자거든. 이것은 여자 되고 싶다가 아니고 여자라고 할 때 정신분열증이에요.
반면에 히스테리는 뭐냐 하면, “나는 아무리해도 여자이고 싶지만 여자가 안 돼.” 하면서 계속해서 여자 되려고 노력할 때 히스테리에요. 히스테리는 쉬운 예로 이런 겁니다. 지하철에 보면 병균이 묻어 있잖아요. 병균 묻었으니까 집에 오면 손을 씻잖아요. 분명히 씻고도 10억 마리 만졌으니까 한 번 씻는데 1억 마리씩 열 번을 씻어. 그래도 뭔가 남아있을 거야. 그리고 또 씻는 것. 참, 주변 사람들 힘들게 만들죠. 분명히 기도했는데 뭔가 미흡해. 한 번 더 해야 돼. 전도하는 사람들 히스테리입니다. 전도 두 명밖에 안 했어. 지금 하나님께서 두 명했다고 나무랄 거야. 세 명 해야 되는데 게을러서 두 명밖에 못 했어. 세 명 하고 나면 네 명 더해야 돼.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지옥 사람이고요. 지옥의 사람들은 정신병자 아닌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중풍병 들렸다고 지붕 뚫는 그런 무리수 두는 게 어디 있어요. 그게 죄에요. 지붕 뚫고 중풍병 낫겠다는 그게 집착이고 나는 중풍병 걸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스토아학파나 이런 철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병들어야 돼요. 왜? 사람은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은 변해야 되거든요. 지금 내가 멀쩡해도 간암 걸렸다면 간암 자체가 자연의 일부기 때문에 병들어야 되기 때문에 병 걸린 거예요. 그러면 그건 나으면 안 돼요. 왜? 자연에 대한 모독이에요.
이게 레위기에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제사장이 문둥병 걸린 사람에게 어떤 치료합니까, 안 합니까? 치료 못하지요. 하나님이 저주해서 걸렸는데 자기가 하나님도 아닌데 왜 치료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저주가 풀려서 자연스럽게 치유가 될 때는 하나님의 진 안으로 포섭시키되 그냥 들어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저주가 어떻게 풀렸는지 그 절차를 보여주는데 그 절차에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들어갑니다. 새를 하나는 물에서 잡고, 하나는 공중으로 날려 보낼 때 결국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저주했고 의도적으로 낫게 했고. 저주받는다고 다 낫게 하는 건 아니고 저주받게 한 사람 따로 있고 그 중에 누굴 낫게 할지는 역시 저주케 하신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에 나았고. 따라서 그 와중에서 어린양의 피가 천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생이라고 보여주는 계기로써 인간은 다뤄지는 거죠. 그럴 때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계명과 말씀의 집단이 되는 겁니다.
이걸 철학가들도 비슷하게 이야기하고 있단 말이죠. 병 걸린 것이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에 병 낫는 것도 자연에 맡겨야 되는 거예요. 이런 논리에 의하면 병원에 가지 말고 암 걸리면 지리산에 가서 자연인 돼야 돼요. 개량한복 입고. 인간시대나 나오고. 수염 기르고. 심봤다 하든지. 안 그러면 옴~ 하든지. 채식하면서 자연식 하면서. 인간 중에 가장 무서운 인간이 자연인이라는. 삼성그룹의 회장이 무서운 사람이 아니고 지리산 자연인, 계룡산 자연인이 제일 무서워요. 거긴 절전도 안 합니다. 전기가 있어야 절전하지.
이게 자기가 얻고자 하는 힘이 없을 때는 처음부터 자연이 안 되거든요. 없을 때는 그 빈자리에 자연으로 채운 거예요. 그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모르지만 여기 이런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겁니다. 한 번 따져보세요. 인간은 자연인 맞잖아요. 따라서 자연으로 사는 게 맞잖아요. 그래서 불교가 맞잖아요. 불교가 가장 자연스러운 거예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물 흐르는 대로 산 있는 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죽으면 죽는 대로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이고 탐욕과 세속에 대한 모든 경계를 넘어서서 공즉시색 색즉시공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부처의 삶 아닙니까.
기독교가 그걸 닮아간다니까요. 그런데 그 이유가 대해서 강의 처음에 했지요. 결국 자기가 노리고 있던 힘이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서 자기 마음 다스리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만약에 사업 잘 되면 그 다음부터 드디어 자연식이라 해서 사업 일으켜요. 자연요양 해서 프랜차이즈 사업 벌입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우리 자신이 어느 범위 안에서 뱅뱅이 돌고 있는가를 알아야 되죠.
10분 쉬고 필론과 이어서 하겠습니다.
한윤범(IP:14.♡.134.60)
13-06-22 11:28
20130611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4-삼신론
(강의:이근호 목사)
필론은 25페이지에 보면, [헬라철학과 유대교라는 양대 사상을 연결하려 했다.] 헬라철학과 유대교가 다릅니다. 다르면 다른 데로 둘을 떼어놓으면 되는데 그걸 왜 연결시키려고 했는가? 헬라철학을 유대교에 연결시키는가, 아니면 유대교를 헬라철학에 연결시키는가? 그런 문제가 있는데 필론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헬라철학과 유대교 사상은 동일한 진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예를 들어서 지리산이 있다면, 남원 쪽에서 지리산과 무주에서 본 지리산과 같은 지리산을 보면서도 형체가 다르겠지요. 덩치가 크니까. 인간은 진리에 대해서 다 모르지만 헬라철학도 지리산이고, 유대교도 지리산이고. 그리고 그게 전부가 되니까 이 둘을 합쳐보자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유대교에서 온 것이, ‘신은 인격적이다’ 이것 하나 가져왔고, 유대교에 없는 것을 헬라철학에서 가져온 것이 로고스라는 걸 가져왔어요. 로고스라 하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 변화에 가담한 질서, 원리입니다. 신은 점잖은 분으로 부동자니까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에게서 나온 로고스라는 것이 세상을 관장하게 되면 그 로고스가 자연세계와 신과 연합시키는 중간 지점의 역할을 하게 되지요.
신은 인격적이라는 것은 헬라철학에는 없던 것이죠. 이게 좀 난해한데요. 왜 헬라철학에서는 신이 인격적이지 않을까요? ‘인격적’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적이죠. 인간적이 되면 신은 단일신, 다신교 말고. 다신교는 인격적이죠. 인간이 너무 다양한 거예요. 성질 급한 사람이 있고, 조용한 사람도 있으니까. 그러면 이게 하나로 모아지지 않아요.
하나 되기 위해서는 인격마저 초월하신 높은 분, 인격이란 말도 붙이지 못할 정도로 그걸 넘어서서 계신 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게 인격을 제공할지언정 스스로는 그 인격조차 파악이 안 되는 분으로서 신이 돼야 되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인간이 늘 흔들리는, 아침에 성질났다가 오후에는 풀리는 이런 변화마저 잠재울 수 있는 신이 되려면, 신이 화냈다 웃었다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기분 좋을 때 신에게 바치면 잘 되고 기분 나쁘다면 제사도 안 받고 하면 상당히 난처한 입장이 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인격적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유대교는 인격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결합을 한 겁니다. 그러면 유대교가 왜 신은 인격적이어야 하는가? 왜 인격적이죠? 유대교가 하나님을 사람처럼 어떤 성품이 갖추어진 분으로 했다는 게 어디 나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인데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느냐 하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너무나 인격적이에요. 원망하면 원망했다고 나무라고, 화내면 화냈다고 나무라고, 감사하면 기쁘다고 흔쾌히 제사를 흠향하시고. 헬라신은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이성적이기 때문에.
유대신은 인간과 인간의 정을 나누는 것 같이 다정스럽게 그런 관계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격적일 수밖에 없는 거죠. 이렇게 인격적인 하나님에 로고스를 집어넣으니까 나중에 나온 게 바로 기독교의 신론이 되는 거예요. 이쪽에 없는 걸 넣고 이쪽에 빠진 걸 채워 넣으니까. 이 로고스를 나중에 성자 하나님, 예수그리스도로 전환시키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가까이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필론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예수그리스도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신중심의 기독교가 시작되는 거예요. 신은 기독교다. 거기다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넣으려다보니까 로고스 개념을 도입해서 넣을 수밖에 없는데 필론의 이론을 상당히 많이 참고해서 기독교 신학이 정립이 되어서 헬라사람들도 오고 유대교도 포섭하고 그런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헬라라는 게 도대체 뭘 이야기하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기 이태리가 있고, 그리스, 키프러스, 크레타 섬, 터키 있고, 지중해 있는데 헬라는 현재 그리스 이 동네 사람들 말하는 겁니다. 이태리는 성자중심이에요. 헬라사람들은 성부중심이에요. 이태리는 신자, 불신자를 구분하는 입장에 있다면 헬라교부들, 교부란 초창기 기독교 멘토들, 이 사람들은 온 세상은 다 하나님의 자녀다. 이쪽입니다. 지금도 동방교회가 이 주장하고 있어요. 그들이 몰라서 그렇지 사실은 신의 아들이라고 포섭하는 겁니다. 이쪽에서는 법 중심이고 성자중심이기 때문에 신자, 불신자를 날카롭게 나누고, 이쪽은 전부 신의 아들이라고 포용하고 다만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보다 지적으로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러한 전통들이 초반기부터 성립이 되는 겁니다.
26페이지 봅시다. [그러나 보편적 로고스에 의한 참여 사상에 신론을 통해서 주입이 되어버리면, 스토아주의 만인평등사상은 자연스럽게 모든 인간은 신의 자녀라는 기독교의 인간관과 혼합이 되어 버린다.] 그 밑에 보면, [신인 성부는 완전-부동하시되 성자는 고통과 죽음까지 당했기에 성부와 성자의 일체성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기독교 신학에서 문제점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냥 로고스 같으면 아무 문제없어요. 그냥 로고스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은 아무 문제없는데 여기다가 예수그리스도를 집어넣으니까 예수그리스도는 고통당하고 죽으신 분이잖아요. 여기 낄 자리가 없는 거예요.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교회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납득이 되려면 조화가 돼야 되거든요. 이 주장과 이 주장이 아무런 거리감 없이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되는데 여기는 이 소리하고 저기는 저 소리하고 예수님은 고통 받고 죽었고 주님께서는 선한 분이다. 그 뒤에 보면 또 문제가 있어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어떻게 악이 함께 있느냐 말이죠. 이게 신정론인데 26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즉 신이 전능한 동시에 지선하다면 이 세계에 도무지 악이란 있을 수 없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며, 신의 두 속성이 양립하는 것은 모순이므로 하나를 포기하지 않을 없다.]
그 뒤에 보세요. [신이 전능함에도 악을 허용할 만큼 지선하지 않거나 반대로 지고의 선이기는 하지만 악을 폐기할 만큼의 능력을 지니지 못하는 그야말로 신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도전받는 상황이 상정되지 않을 없었다.] 내가 만약에 억울한 일 당했는데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나한테 해코지한 그쪽을 잘 되게 하고 나는 점점 더 인생 꼬이게 만들었을 때 그게 어떻게 선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부모가 자식한테 그렇게 사랑하는 게 어디 있어요.
문제는 이겁니다. 왜 악이 설치느냐? 여기에 대해서 기독교 신이 답변해보라는 겁니다. 기독교 신은 나중에 나와요. 나중에 신비주의자 베르나르라든지 그보다 더 뒤에 가면 쿠자누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신은 선과 악마저도 초월한다. 신을 선하다, 악하다 할 수 없다. 이 정도까지 나가요. 나중에 나올 겁니다.
어쨌든 간에 초대교회에서 문제가 뭐냐 하면, 악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걸 답변하지 못한다면 그 하나님은 뭔가 엉터리 하나님이 될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 자기가 착하다고 오기 때문에 자기의 한 맺힌 것을 선한 하나님께서 내가 복수하지 못한 것을 선한 하나님이 나서서 내 대신 풀어줄 때 우리는 좋은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고 싶은데 거기에 대한 명백한 답변을 제시해야 됩니다.
그 답변을 제시한다는 게 뭐냐 하면, 26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에 나오죠. 어거스틴은 뭐냐 하면, 어려운 것을 미리 하려고 하니 뭐 하지만 들어보세요. [‘있음 자체’라는 신 개념에 호소한다. 즉 없음이 전혀 없이 있기만 한, 있음이라는 의미에서의 있음 자체인 신은 바로 그 있음 자체라는 본성에 의해 전능하고 동시에 지선하다는 것이다.] 이게 어거스틴의 주장인데 악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선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신데 악은 뭐냐? 악은 악이 아니고 선이 모자란 것, 마이너스 선이 악이라는 거예요. 악은 애초부터 없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어거스틴의 해결점입니다.
그게 뒤에 플로티누스 할 때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세상의 모든 것은 아름답다는 겁니다. 아름다운 것을 악하다고 생각하는 네가 문제 있다는 거예요. 네 돈을 떼먹고 도망간 놈이 나쁘다고 하지만 좀더 깊은 은혜에 들어가고 성령을 받아보면 그것도 다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받아버리면 내 돈 떼어먹고 도망간 놈도 천사일 수 있기 때문에 악이라고 생각한 내가 문제였다. 내가 하나님의 선의 깊이를 잘 몰라서 경솔하게 하나님을 원망만 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도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구나. 이러니까 결국 악이라는 걸 통해서 악이 있음으로 내가 선을 깊이 아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그 악도 어떤 의미에서는 선의 기능을 발휘한 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가룟 유다 같은 경우도 해당되지요. 가룟 유다가 나쁜 인간이라고 할 게 아니라 다만 역할이 나쁜 역할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보다는 못하겠지만 약간은 선한 구석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따져보면 그래도 삼년 동안 따라다녔잖아요. 다른 사람은 안 그런데. 어쨌든 간에 가룟 유다를 변호하려고 애를 쓰지요. 지젝이 그런 식으로 가룟 유다를 해석해요. 나중에 지젝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27페이지 봅시다. [따라서 있음은 선한 것이고 없음은 악한 것인데 악한 것은 결국 없는 것이어서 기껏해야 ‘선의 결여’일 뿐이다. 이것은 마치 빛과 어두움의 관계와도 같아서 선은 빛이요 악은 어두움일진대, 어두움이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빛이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과 악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 밑의 말이 더 중요한데요. [악은 실재성이 없음으로써 형이상학적 지위가 부여되지 않음으로 신의 전능성과 지선성의 공존에 어떤 손상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게 중요한 말인데 뭐냐 하면, 신이 선하다면, 악은 없어야 되는데 왜 악이 있느냐는 그 질문자체가 성립 안 된다는 거죠. 여기 선하다에 악이 낄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왜? 악은 선이 없는 상태기 때문에. 결국은 선함이 많은 상태와 선함이 텅텅 빈 상태의 차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다 합치면 결국 선함이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설명하게 되면 지옥에 있는 인간들도 악한 자가 아니고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함을 많이 혜택을 못 입은 사람이지 근원적으로 악하다는 게 없어요. 그러면 악마는? 악마도 마찬가지에요. 천사들 중에서 혜택을 많이 못 받은 쪽이지 불쌍한 쪽이지 악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어거스틴의 이 말이 복음적으로 맞습니까? 틀렸지요. 왜 틀렸느냐 하면, 이렇게 되면 심판의 의미가 없어요. 방치하면 되지 심판할 필요는 없단 말이죠. “그냥 놔둬. 나중에 언젠가 알게 되겠지.” 적극적으로 깨알같이 이런 못된 놈이라고 심판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심판 자체가 성립 안 돼요. 악하지도 않는데 심판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심판은 악하기 때문에 심판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거스틴이나 이런 신학자들은 심판이란 걸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심판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악마나 나쁜 것을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거든요. 누가 그렇게 존재케 했습니까? 하나님 본인이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창조에 의하면 하나님의 속성이 나오게 돼있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속성이 창조에 담기데 돼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악하기 때문에 악한 마귀가 나왔지. 선에서 어떻게 악이 나옵니까.
악마는 분명히 있고 악마를 만든 것은 하나님이고 만들 때는 하나님의 성품을 담아서 만들었고. 그런데 악마가 악하다는 말은 결국 처음 만들 때부터 하나님 쪽에서 악이 있었다는 말이고 하나님의 악한 부분이 떨어져나가서 악마가 되고 이런 못된 놈이라고 때리면 결국 누가 누굴 때리는 거예요? 하나님 스스로가 스스로를 때린 격이니까 그게 무슨 하나님의 선하심입니까. 하나님은 선과 악 양면을 다 갖고 있는 괴물 되지요.
이렇게 보면 웃고 있어도 뒤돌아서면 악마고. 조크나 지킬과 하이드처럼 그런 양면성을 갖고 있는 하나님을 만약에 신자가 교회 와서 믿는다 할 때 어느 쪽을 믿어야 돼요? 하나님 돌아가고 있으니까 착함 할 때 얼른 잡아야 돼요. 착할 때 잡아야지 악할 때 잡으면 악마 되는 수가 있어요. 그 힘든 짓을 교회 와서 누가 하겠어요. 늘 선한 게 나와야 하나님을 믿지. 잘못 건드려서 악만 받으면 안 되잖아요.
결국 궁극적으로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이 인격적이라는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커지고 국가교회가 돼버리면 인격적인 건 사라지고 배후에 신비 속에 자리 잡으면 여기서 나온 것이 플라톤주의입니다. 결국 플라톤이 이야기한 하나님을 토마스 아퀴나스나 뒤에 신학자들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과 악의 속성문제가 안 풀리니까 더 높은 곳에 모셔놓는 게 편하단 말이죠. 선과 악은 우리 인간들 수준에서 노는 것이고 하나님은 높은 수준이니까 따지지 마라. 이런 식이 편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했지만 문제는 이거에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인간들이 이런 주장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신명기 21장 5절을 누가 읽어볼까요.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
이게 뭐냐 하면, 그 당시 제사장들이 판결할 때 제사장들이 정신 바짝 차려서 판결하면 신의 뜻이고 흐릿하게 술 한 잔 먹고 판결하면 신의 뜻 아니고 그런 겁니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제사장들이 어떤 판결을 했던지 간에 판결을 내렸으면 그것 곧 하나님의 뜻이 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제사장들이 정신 바짝 차리는 것 없어요. 제사장들이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 것 아니에요. 제사장들이 양심에 입각해서 바르게 판단하면? 아니에요. 그런 것 없어요. 제사장들이 마약을 하던 대마초를 피우든 부부싸움을 하던 관계없이 제사장들이 어떤 판정을 내면 그 판정이 곧 하나님의 판결이 되도록 누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제가 이 대목을 철학공부하면서 왜 하느냐 하면, 철학에서는 인간의 이성과 양심과 판단을 끄집어내야 돼요. 이왕이면 제대로 된 양심, 이왕이면 제대로 된 이성, 이왕이면 좀더 뛰어난 지혜로운 자, 이왕이면 좀더 똑똑한 사람이 판결내리면 신의 진리에 가깝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인간들의 철학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그게 아니에요. 바보 같은 제사장이 해도 그가 판정을 내리면 그것이 곧 그 시점에 하나님의 준비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날 판사, 검사가 공부 잘해서 서울대 법대 나오고 이것과 전혀 관계없어요.
이게 바로 중보자적 기능이에요. 철학에서 로고스라 하는 것은 기존에 자연세계에서 공통점을 뽑아내요. 이 나라도 봄여름가을겨울, 저 나라도 봄여름가을겨울, 그러니까 봄여름가을겨울 맞다. 공통점을 뽑아내는 거예요. 이쪽 장미도 빨갛고, 저쪽 장미도 빨갛고, 장미는 빨갛다. 장미는 빨간 것이야. 왜? 로고스가 장미를 빨갛게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의 각각 요소에 있는 것의 공통점을 뽑아서 하는 거예요. 현재 조직신학, 개혁주의신학도 그래요. 인간은 무엇이냐?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 인간은 양심의 거룩이 있고 바르게 산다. 선을 추구한다. 그걸 뽑아내면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이건 철학입니다. 이건 중세철학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중보자적 기능은, 내가 똑바로 살고 바르게 살 때 하나님께서, “너, 어떤 태도야?” “바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뜻이라고 해줄게.” 이게 아니고. 똑바로 바르게 한다는 자체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면 바르겠다, 반듯하겠다는 자체를 날아가고 사라지게 만들어버립니다. 아들이 하는 일이 곧 아버지가 하는 일이에요. 예수님이 바르게 해서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 그 차이 중요한 합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만 아버지의 일이에요. 그리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목사가 똑바로 산다고 주의 영광 아니에요. 하나님 영광은 예수그리스도만 영광이에요. 그래서 예수를 믿을 때 영광이지 바르게 살고 바르게 행동한다고 영광 되는 게 아닙니다. 이 땅에서. 신자가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살고 바른 생각 가지고, 바른, 바른, 바른 이건 불교의 팔정도에 나오는 겁니다.
기독교는 그게 아니고 복음은 그게 아니고 바르게 한다고 영광이 아니고 그냥 예수 믿으면 영광이에요. 이 쉬운 것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안 믿는 경향이 굉장히 많습니다. 옛날에는 십일조 할 때 다리미질하여 정성을 다하여 드렸잖아요. 그게 영광이 아니고 돈을 어떻게 하던 관계없이 예수 믿으면 그게 영광이에요. 거지가 됐던, 창녀가 됐던. 오늘 낮에 손님을 몇 명 받고 어제 저녁에 손님 두 명 받았던 간에 그 창녀가 예수 믿으면 그게 하나님 영광이에요. 제사장이 어떤 판정을 내리던 영광되게 하셔요. 하나님 판결이 되게 하신다니까요. 이게 아주 독특한 점이에요.
그래서 유대교와 헬라철학은 결합이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한쪽은 로고스 기능으로 세상 전부를 보편적으로 중요한 것, 거룩한 것, 착한 것, 고상한 것, 다 뽑아내야 돼요. 고상하지 않는 건 죄고, 고상한 것은 죄 아니고, 이렇게 구분해야 되지만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게 영광이 된다는 중보자적 기능 앞에서는 서로 부합될 요소가 전혀 없는 겁니다.
여기 27페이지에 토마스 아퀴나스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뭘 모르느냐 하면, 요한복음 1장을 몰라요. [마치 빛과 어두움의 관계와도 같아서 선은 빛이요 악은 어두움일진데] 이게 잘못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상은 어두움이고 주님은 빛으로 왔는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한다고 돼있지요. 그렇게 예수님만 빛이기 때문에 예수님 외에는 어두움이어야 한다는 것이 요한복음 1장입니다. 우리는 빛이 비추면 어두움도 환해져야 되잖아요. 그게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만 빛이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 주변은 더욱더 어두워야 된다는 것이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나타나야 섞여야 알지 예수님이 그 속에 들어오셔야 알지 아무리 철학적으로 공통점을 따져도 세상은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요. 세상 자체에 대해서 빛과 어두움으로 구분하려고 해요. 어거스틴처럼. 어거스틴은 큰 엄청난 실수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두움 되면 돼요. 그게 영광이라니까요. 우리가 어두움에서 빛 돼야 영광이 아니고 우리가 빛 앞에서 어두움인 것을 알면 그게 영광이에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자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관계 또는 관계성이라 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따라서 우리가 영광을 받는 거예요. 이게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가 있게 된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의 되게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성이 의 되게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의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데리고 오는 거예요. 관계성입니다.
그런데 철학은 그게 아니고 관계성을 끊어버리고 독자적으로 나는 의인인가? 아니면 나는 죄인인가? 이게 철학적 사고방식입니다. 독자적으로 우리 세계는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 돌립니까? 이러고 있단 말이죠.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연결돼있으면 누구나 의인 됩니다. 이걸 예수 안이라고 하는 거죠. 유대교가 멸망한 이유는 자체적으로 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망한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가 되는 걸 모르고. 어거스틴이나 이런 사람들은 철학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서 결국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영광을 돌릴지 여기에 매진한 겁니다. 자기가 죄인인 걸 모르고 말이죠.
플로티누스 하고자 합니다. 굉장히 많은데 이것 하나면 끝납니다. 동그라미, 원이 있고 여기에 중심이 있고, 반지름, 둘레를 원주라 합니다. 플로티누스는 이 중심을 일자라 합니다. 이걸 신이라 할 수 없는 게 세 개 다 신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반지름을 정신, 원주를 영혼, 이 세 가지 다 신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 신자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데 왜 유명하냐 하면, 27페이지 중간에 쯤 보면 이런 게 있어요. [플로티누스는 삼위일체 개념을 계승하고 있다. 이 삼위일체 개념은 한 마디로 머무르고, 드러내며, 되돌아가는]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고. 로마서 11장 32절, 33절 그 말씀 그대로 보는 것 같지요.
[다시 말해서 궁극적인 실체로서 모든 존재의 원천은, ‘변함없이 머무르면서도 자신의 무한한 원천적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그때마다의 다양함을 선보이며, 동시에 그러한 다양함은 의미 없이 사라져버리지 않고, 다시금 자신에게로 모아들이는 삼위일체적인 구조’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줄 그어놓을 것은,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고. 이게 뭐냐 하면, 플로티누스는 세상은 자체가 아름답다는 거예요. 모든 게 아름답다. 그러니까 악이고 심판이고 구원이고 없습니다. 모든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에요. 거지가 됐던 모든 게 아름다움이에요.
[‘하나’를 그 중심에 두고 ‘정신’을 따라 반경을 그리며, 마침내 ‘영혼’이라는 원주를 통하여 하나의 구를 이루는 전체적인 세계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모든 게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도 쇠퇴하고 소멸할 게 아닌가? 당연히 그런 반발이 나오죠. 그래서 사람을 이야기하지 않고 영혼을 이야기합니다. 영혼은 사람에다 물질이 추가된 거예요. 물질에 영혼이 추가됐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고 영혼에 물질이 추가된 것은 플로티누스의 주장입니다. 나중에 토마스 아퀴나스나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플로티누스 쪽을 해요. 영혼에다 육체가 붙어있는 겁니다.
그 이유가 28페이지에 나옵니다. 위에서 열 번째 줄에, [인간의 육체는 공간적으로 연장선을 지닌 결합체이기에 그 때문에-결합된 유한자로 인간의 육체는 무한히 쪼개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을 전쟁 통에서 팔을 잘랐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온전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팔 잘린 본인 입장에서는 팔 하나 없다고 해서 내가 덜 나인 건 아니죠. 다리 하나 날아갔다고 해서 내가 덜 내가 아니라고 내가 느끼잖아. 따라서 육체는 잘려도 영혼은 잘리지 않으니까.
또 이런 말이 있어요. 귀가 있고 눈이 있고 코가 있다. 코가 느낀 감각의 정보와 귀가 들은 정보와 눈으로 본 정보가 다 달라요. 다 다르지만 사람들이 눈 가리고 게임할 때 ‘호박’하고 맞추잖아요. 눈으로, 코로 받아들인 건 다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