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불 130609
질투의 불 130609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질투의 불(스바냐 3:8)
이근호
13-06-09 15:54
질투의 불
2013년 6월 9일 본문 말씀: 스바냐 3:8
(습 3:8,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며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우리에게 산다는 것은 전부입니다. 사는 것말고 달리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살려고 살지 결코 죽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은 오로지 살기에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열중하고 매진하게 됩니다. 산다는 것은 밥이 있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하고 사랑하는 가족이나 그거라도 없으면 반려동물이라도 있어야 하고, 그리고 건강한 신체로서 버티는 것, 이런 것들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불같은 질투’같은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 것 없이도 잘들 살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할 것 같지도 않는 ‘하나님의 불같은 질투’를 들고 나오십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개인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집단적으로 다루시면서 일하십니다. 개인적인 삶의 소망에 대해서는 거부하시고 거국적인 원칙으로 적용시키십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자기 삶에 정신 팔려 있는 자들에 있어 ‘질투’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 못합니다. 사람들은 질투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그 대신‘ 사랑’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사랑과 질투는 다릅니다. 사랑은 여러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질투는 ‘오직 너만!’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질투를 일반적인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질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질투로 바꾸는 작업을 하시게 됩니다.
이를 위하여 인간들이 보통 어떤 세상관을 갖고 있는지를 충분히 드러내는 사태를 일으키게 됩니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것에 심도있게 신경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로또 당첨기를 보세요. 네 가지 통로를 통해 숫자 적힌 공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서로 한데 엉키고 튕기고 하다가 결국은 매번 우발적 숫자를 토해내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이 애쓰고 힘들게 살아간다고 해서 세상에도 같이 편들어 주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세상은 로또 당첨기 통 속과 같습니다. 서로가 자신들의 현실관을 고구하기 위해서 분투 노력하지만 오히려 그 노력과 노력들이 부딪히고 충돌하면서 예상 못한 엉뚱한 곳으로 튕겨져 나가면서 그 자리를 결국은 긍정하게 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고, 때로는 실망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분에 넘치는 자리라고 감사해보지만 실은 모두 의미없는 부대낌의 결과입니다. 자신의 강한 의지가 선택에 의해서 마련된 자리가 아니라 우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기에 차지하게 된 한 자리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기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의미도 자연적으로 끌어모으는 대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질투는 ‘분류작업’에 해당됩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에게 말하기를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고 묻는 것은 배타적 사랑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은 부모에게 답변하기를 ”다 좋아“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란 어떻게 어느 쪽에서 받든지 내 쪽에서는 축적과 보관이 가능한 성질이라는 겁니다.
아빠 입장에서는 “엄마보다 아빠가 좋아”라고 해주기를 바라고 엄마 입장에서 “아빠보다 엄마가 좋아”라고 해주기를 기대하지만 자식에게는 통하지 않지요. 따라서 사랑을 질투로 바꾸는 작업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시행하기 마련입니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 변화란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가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진심을 자신의 고정성으로 곡해하게 마련입니다. 이 점을 감안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질투를 알려주는 기회를 마련하게 하십니다. 민수기 25:13에 보면,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바알을 섬기는 민족과 맞닥뜨리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동안 광야에서 자신들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충성하고 있노라고 자부했습니다. 결코 그 어떤 유혹이 오더라도 자신의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자세가 하나님의 질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사랑’ 정도로 알고 있었던 결과입니다.
막상 바알브울이라는 신과 그리고 거기에 종사하는 여자들을 대하는 순간, 그들은 감성적으로 잠복되어 있던 자신의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인간은 이성보다 먼저 감성적 존재입니다. 일단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을 접하게 되면 아무리 그 즐거움을 애써 잊으려고 해도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결코 의지력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용기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마저 스스로 절제하거나 조절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무려 24000명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죽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작업에 나선이가 바로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무장한 비느하스입니다. 단순한 사적인 신앙심의 발로가 아닙니다.
속죄원리에 입각한 질투입니다. 즉 질투심이란 하나님의 귀한 속죄의 은혜가 아무나에게 제공될 수 없다는 원칙과 관련된 사태에서는 마구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철저하게 구분짓고 분류하는 작업이 질투심에 입각한데서 발휘됩니다. 하나님의 질투심은 일종의 막장을 사정없이 후벼파는 광산의 드릴같은 것입니다.
옥석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많은 경우를 제공하고 그 와중에서 자기 딴에 이해했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결국에는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음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바로 그러한 대상을 겨냥해서 하나님의 질투심이 발휘될 때 진정 속죄의 의미가 나타나게 됩니다.
두리뭉실 대충 인위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마중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 충돌에서 인간은 사정없이 깨어져야 합니다. 이것도 사랑해서 가지고 거짓도 사랑해서 가지는 것을 하나님은 용인하시지 않습니다. 오로지 한 분에게 주신 그 사랑, 예수님에게 퍼부어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고집하시는 하나님의 질투를 이해되려면 우리 자신의 선택에 있어 무수한 부정이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우리 사랑은 실패하고 하나님의 질투심과 살아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6-11 17:09
9강-습3장8(질투의 불)1306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바냐 3장 8절입니다. 구약성경1308페이지입니다.
스바냐 3: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며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성경을 이렇게 보게 되면 우리는 자꾸 어떤 역사나 시간을 기다리는 버릇이 있어요. 언제 쯤 이렇게 되겠습니까? 목사님, 언제 쯤 이런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는 언제쯤이란 게 없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기다리다가 늙어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변화되는 것은 우리가 변화되는 것이지, 우리가 지금도 고요한 이 세상에 그냥 혼자 늙어가고 있습니다.
언제 쯤 이렇게 되겠습니까? 몇 년 뒤에 되겠습니까? 하는 것은 그건 우리가 뭔가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러한 잘못된 질문들이 나오는 거예요. 우리자신이 이렇게 무너지고 늙어 가게 되면 우리가 정신을 못 차립니다. 정신도 30대, 40대, 점점 가면 갈수록 점점 쇠약해져요. 김광석이라는 사람이 불렀던 노래 ‘서른 즈음에’란 노래가 있거든요. 점점 더 멀어져간다. 뭔가 피크에 왔는데 그 다음부터는 점점 더 멀어져가죠.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자신이 뭔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우리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세상이 내가 파악할 수 있도록 세상이 안 도와주느냐, 핑계를 남 핑계를 대는데, 그것은 현재 우리가 무너지고 붕괴돼 가는 입장에서는 우리가 어떤 질문을 내도 그 질문 자체가 합당한 질문인가도 지금 파악이 될 수가 없죠. 그것은 그 진가가 모호합니다. 우리자신의 질문 자체도 엉터리 질문을 성깔대로 그냥 내뱉고 있으면서, 왜 세상은 내 성깔에 전부 다 호응을 안 해주느냐,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린다면 다시 말해서 그건 막 가는 거죠.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자신이 생각을 바꾸어서 ‘내가 옳다. 내가 정당하고 내가 고른 것은 맞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그런 우리가 평소에 필요한 게 뭐냐 하면 쌀이 필요하고 양식 필요하고 돈 필요하고 의복 필요하고 사는 땅 필요하고 집 필요하고 이러한 것들이 다 필요한 거예요. 산다는 것은 내 필요한 것을 위해서 우리는 거기 매진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장 8절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라 돼 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질투가 내가 사는데 필요합니까? 전혀 필요치 않아요. 우리가 필요한 건 이미 제가 언급했습니다. 쌀 필요하고 부동산 필요하고, 필요하고 필요하다. 하나님의 질투는? 사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나한테 꼭 필요한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투의 불이 필요치 않은 인생을 살면서 왜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느냐고 우기는 것은 이게 우리가 망가져야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전부를 상대하기 때문에 개인의 소망이나 소원을 안 들어준다고 주님하고 닦달 낼 수는 없는 거예요. SBS 토요일 날 하는 로또 당첨하는 거 있어요. 로또 당첨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4가지 구멍이 있는데 번호가 적힌 구슬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그걸 가만히 한번 보세요. 보면 번호가 적힌 구슬이 마구 뒤섞여서 그중에 하나 툭 튀어나오면 번호 적어서 첫 번째 번호, 또 튀어나오면 두 번째 번호, 저는 로또를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어요. 로또 안사는 이유는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인생에 니가 보증서지 마라” 하는 대목이 있어요. 니 인생은 내가 관리하는데 니가 로또 사는 것은 결국은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는 게 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로또를 살 수 없어요. 로또를 만약에 산다면 로또를 사게 된 내 인생 노선을 따로 정립을 하게 되니까 로또 산만큼은 주의 말씀을 차단시켜야 돼요. ‘요거는 내 인생이니까 주여 손대지 마세요.’ 이렇게 되거든요. 주님 앞에 개방이 안 되니까 로또를 안사는 게 편해요. 이건 그냥 내 생각입니다.
어쨌든 로또 추첨할 때 구슬이 움직이거든요. 구슬이 움직이는 걸 보면 뭘 느끼느냐 하면 현실이라 하는 것은 내 현실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 현실, 니 현실, 니 현실, 내 현실, 7번, 36번, 42번, 22번, 이런 각자의 구슬들이 서로 부딪히고 튕기고 부딪히고 튕기고, 튕기고 하면서 튕기다 보니까 내 자리고 튕기다 보니까 니 자리고, 튕기다 보니까 나온 거예요.
지금도 안지랑이에 아들 달라고 벌어진 곳에 가서 기도하는데 거기 딸로 튀어나온다면 그건 기도발이 안 먹혀서 그런 게 아니고 세상 자체가 뭔지 몰라서 그래요. 세상은 로또입니다.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세상은 한방이라. 세상은 한방 이예요. 사람의 각자 자리는 지가 만든 자리가 아닙니다. 튕기다 보니까 굴러 떨어진 자리가 그 자리에요. 딴 거 할 거 없어 그 자리 한 거예요. 소 키우다가 딴 거 할 게 없어서 옷 가게 하고, 니는? 딴 게 할 게 없어 목사 된 거예요.
전부 로또 구슬들이 튀고 뭉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세상은 운이 없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전부 다 운들을 다 타고난 겁니다. 운은 있다, 없다가 아니라 어차피 운이 있다, 없다,를 남하고 비교하지 말고 있는 그 자리가 자신의 운 이예요. 맞죠. 자리 하나 깔까요? 내가. 점 하나 볼까요? ㅎ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죠. 다시 태어나도 현재 아내와 살 수밖에 없다. 이야기 하니까 오 목사님이 무섭다 해요.
인간이 선택할 때 진공가운데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그걸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밀어붙이는 게 있어요. 그래서 제 이야기는 뭐냐, 세상에는 개인이 어떻게 ‘나 이렇게 살았으면, 저렇게 살았으면.’ 그거는 백날 자기 생각이고 아무 소용이 없는, 아무짝도 소용없는 그런 겁니다. 아내가 저녁 찬거리 준비하는 그 시간에 남편은 길거리 교통사고 나서 죽어있는 게 있거든요. 내가 저녁 찬거리 준비했으니까 남편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 된다는 그러한 논리는 이 세상에 성립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부딪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이라 하는 것은 뭐냐, 개인적인 욕심이라든지, 개인적인 바램, 기도, 기대, 이런 것은 아예 성경 보면서 접어야 됩니다. 그럼 이렇게 질문해야 돼요. ‘하나님 나만 아니고 모두를 뒤흔들어놓고 이렇게 부잡스럽게 만드는 그 바깥에 있는 하나님의 원리와 원칙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해야 돼요. 그 질문의 답변은 오늘 본문에 ‘나의 질투‘라고 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
질투란 이 말은 스바냐에 이렇게 나오는데 스바냐에 나오기 전에 신명기나 민수기 출애굽기 이런데 보면 아주 질투를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질투를 그냥 발라놓듯이 해놓으셨죠. 하나님께서는 사랑한다는 말만 하셔도 되는데 그냥 사랑한다는 말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주 강렬하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4장 24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렇게 돼 있어요.
사랑이란 말과 질투라는 말이 어떤 차이가 나느냐 하면 사랑은 이런 겁니다.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사랑할 수가 있어요. 여자 쪽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지만 남자들은 전부 다 이걸 동감하고 동의하는 겁니다. 남자는 여러 여자를 사랑할 수 있어요. 아내도 사랑하고 다른 여자도 사랑하고 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 사랑하는 마음이 드니까. 김 태희도 사랑하고 고 현정이도 사랑하고 딸도 사랑하고 아내도 사랑하고 전부 다 사랑할 수 있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내가 베푸는 입장이라 하면 사랑이 성립되는데, 질투라는 것은 어떤 뜻을 갖고 있느냐, 질투와 사랑의 차이점은 질투란 너만 사랑했다는 겁니다. 너만! only you! 오직 너만 사랑했다. 모든 민족 가운데서 너만 사랑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만 사랑하는데 질투하는 하나님이 하신 이야기예요. 제 이야기가 아니고 너만 사랑하는데 착하지도 않고 의롭지도 않다는 이야깁니다. 착하지도 않고 의롭지도 않고 완악하고 목이 곧은 백성인데, 내가 너를 질투하듯이 사랑한다는 겁니다.
왜 그냥 사랑한다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질투한다 하는 것도 아니고 왜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고 완악한 백성이고 교만한 자고 너는 악한 자인데 나는 너를 질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앞에 운을 붙이느냐 하면, 하나님이 사랑을 했을 때 인간은 그 사랑 받은 사랑을 사랑이라고 진정으로 질투하는 사랑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사랑으로 받아요. 애들한테 물어보세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할 때 애들은 아빠가 너를 사랑해, 엄마가 너를 사랑해, 하는 걸 질투하는 사랑으로 보지 않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랑으로 보기 때문에, 나는 아빠한테도 사랑을 얻을 수 있고, 엄마한테도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어린애의 마음인 동시에 우리의 마음 이예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 우리는 ‘아이고, 고맙습니다.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해 주다니.’ 그걸로 끝 이예요. 거기에 하나님의 질투가 섞이지를 않습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할 뿐 이예요. 예를 들어서 백화점에 어떤 여자 직원이 있는데 아침 10시 반에 문 열면 늘 상 하는 소리가 있잖아요. 은행이나 백화점에 가면 ‘오늘도 고객님을 사랑합니다.’ 하거든요. 그럼 고객님을 사랑하면 결혼하지 못한 총각들이 매장에 가서 아무나 결혼하면 되겠네. 방금 사랑했다면서요?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이유가 결혼관계에서의 한 신랑이 한 신부가 안 된다는 거예요. 둘이 용납이 안 된다는 거예요. 신랑이 하나같으면 신부도 하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질투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이렇게 구분 짓는 하나님, 분류시키는 사랑. 우리는 그냥 받기만 하고 받아서 여기 보관하고 내 것 만들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집어넣으면 그만인데, 주님께서의 사랑은 뭐냐 하면 너만 사랑했기 때문에 조건이 붙어요.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인간에게는 성취되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받아 챙기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이것도 사랑하고 저것도 사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도 사랑하고 바알도 사랑했기 때문에 그 나라는 하나님이 질투하는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하나님 쪽에서는 그게 아니에요. 이 질투하는 하나님을 이해 못해서 너는 다른 진짜 질투하는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스라엘로 바뀔 필요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이방인들을 채웁니다. 백부장이라든지 수로보니게 여인이라든지 창기, 이런 사람들을 채워서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면 거기 어린양의 보좌 주변에 24장로가 있는데 그 장로들이 면류관을 반납하면서 ‘제가 쓰는 것이 합당하지 않고 주님이 쓰시는 것이 합당합니다.’하고 면류관을 반납해서 다시 회수시키는 장면이 나와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라 할 때 질투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셔야 돼요.
그런 질투하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분류하는 작업을 하는데 이 분류작업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태백시에, 저도 한번 애들 교육 때문에 가봤는데 제가 갔을 때는 광산이 문 닫았어요. 옛날 태백시에 다큐멘터리 뉴우스(대한뉴스)에 보면 그냥 벽인데 파니까 석탄이 나와요. 그러니까 이건 그냥 놔두면 석탄과 흙이 섞여 있는데 석탄이 좀 더 분량이 많은 곳에다 드릴을 박아서 계속 파고 들어가니까 표면이 벗겨지고 그 안에 석탄 덩어리가 나오니까 밖으로 실어내거든요.
주님께서는 마치 손에 뭘 갖고 있느냐 하면 드릴을 갖고 있어요. 갖고 있어서 계속 한 초점을 향하여 주님의 질투하는 사랑으로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두루뭉술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가 입에 붙었는데 정작 꽂히기는 두루뭉술해서 질투하는 사랑으로 꽂히지를 않고 있는 거예요.
제 이야기 아니고 지금부터 할 이야깁니다. 민수기 25장 13절 이야깁니다. 우선 성경 말씀 읽고 그 대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민수기 25장 13절에 보면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이렇게 돼 있거든요.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런 이야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동안 하나님만 알았던 시절에 국한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만 알았기 때문에 다른 신이 얼마나 좋다는 걸,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또 있는 걸 미처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만 사랑한다는 말의 멘트가 나올 수가 있는 거예요.
목사 가정에서 태어나서 학교를 갔는데 학교 친구들이 ‘니가 남진 좋아하나? 나훈아 좋아하나?’ 막 싸운다는 거예요. 그런데 목사 가정에서는 라디오 일체 다 끊어버리고 일체 속된 것, 드라마 그런 거 일체 못 보게 한 목사 가정에서 살아왔습니다. 물론 그 사모님은 드라마에 빠져있지만. 그때는 목사 가정이라. 목사 가정은 주의 종의 가정입니다. 주의 종의 가정이 말씀대로 살면 그 효과가 말씀대로 안사는 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교인들이 은혜를 받는 전달될 수 있는 전달 체 역할로서의 목사가 일을 한다는 거예요. 그 당시 목사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뭐냐, 내 일을 구약에 나오는 제사장을 그대로 자기한테 적용시켰습니다.
참, 이 성경을 본 게 문제라. 성경을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는데, 레위기 21장에 보면 제사장이라는 게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절대로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돼요. 그런데 서울 새문안 교회 당회장 목사는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서 그때 교회에서 말썽이 많았어요. 그 여자 변호사 황 산성 변호사가 이혼했는데 이혼한 여자가 당회장 목사와 결혼해서 온 교회가 뒤집어졌습니다. 왜 레위기에는 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 했는데 창기나 처녀 아닌 자나 이혼한 자와 결혼을 하지 말라 했는데 왜 했느냐는 거죠.
목사가 제사장입니까? 목사가 제사장 같으면 십일조 다 주고 난 뒤에 이야기 하자.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이 시대는 다시 죄를 씻을 제사는 더 이상 없습니다. 제사가 없다는 말은 제사장도 없다는 말이고 십일조도 없다는 말이고 성전도 없다는 말이고 제단 같은 게 없어요. 그냥 모든 자리가 예수님께서 마련해 준 로또처럼 튕겨 나와서 마련된 주님이 마련해 준 로또의 자리에요. 36번, 22번, 전부 로또처럼 있는. 그래서 우리는 행운인 거예요. 그게 튕겨 나올 때 질투심에 의해서 튕겨 나온 겁니다.
지금 민수기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느냐 하면 그들은 여호와를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5장에 딱 들어가면 상당히 중요한 이야긴데요. 그들이 바알브올이라는 신을 접하게 되었어요. 바알 신을 섬기게 됐습니다. 여호와만 알고 있을 때 그야말로 유행가도 모르고 그냥 말씀만 볼 때는 이게 좋다고 억지로 했는데, 막상 남진 나훈아 나오고 동방신기 나오고 이렇게 나오니까 ‘야, 이거 성경 보는 시간이 아까워. 재밌어도 너무 재밌어. 성경 보는 시간이 아까워요.’ 성경 후다닥 봐버리고 빨리 이거 해야 돼.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재미나게 사는 걸 몰랐던 겁니다. 광야에서 그냥 여호와 하니까 달리 다른 선택할 여지가 없으니까 우리 가정은 무조건 예수님 믿는 가정이다. 했는데 그 가정에서 막상 사회 나와 보니까 예수 믿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을. 그렇게 좋은 게 많은 걸. 그래서 그들은 바알브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보고 나무라지 마세요. 어떻게 여호와 믿으면서 바알브올을 믿느냐? 이렇게 나무라면 안 돼요. 왜냐 하면 그들은,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감성적인 존재입니다. 이성은 머리에만 멈출 뿐이죠. 땡기는데, 좋다는데 억지로 참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좋은 건 좋다고 이야기해야지, 안 좋은 척 한다고 해서 언제까지 그걸 감출 겁니까? 언젠가는 그게 누적됐다가 폭발합니다. 청소년들이 음란 동영상 안 본다고 10번 하다가 나중에 보게 되면 10번 더 안 본 거 다 보게 돼 있어요. 인간이 참는다는 말 자체가 이건 말이 안 돼요. 안 참으나, 참으나 인간의 본성은 한결같이 똑같아요.
하나님께서 바알브올을 의도적으로 깔아두고 그들로 하여금 거기에 빠진 사람이 24000명이 거기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24000명이 전부 다 한결 같이 좋아한 거예요. ‘세상에 이렇게 하나님 신을 섬겨도 되는구나. 신은 다 똑같은데 섬기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신은 다 마찬가지야.‘라고 그들은 태양을 향하여 그리고 바알브올에 속한 여자들과 합세해서 진탕 신나게 그들은 황홀한 가운데서 바알브올 신을 섬겼습니다. 섬길 때 그들은 분명히 제안이 있었죠. 우리가 섬겨도 봐라 우리나라가 강하고 잘 믿고 잘 살잖아. 너희가 여호와 섬겨도 별 볼일 없잖아. 사람이라 하는 것은 즐거움이 있으면 어떤 것도 포기하고 즐거움을 반드시 기어이 차지하고 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게 나쁘다. 그게 옳지 않다. 그 이야기는 그냥 구색에 불과하고 진짜 즐겁고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어떤 핑계를 대서 기어이 그것을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저와 여러분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런 사건을 일으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생이 괴롭고 불행한 것은 사건을 장악하려고 하기 때문인데, 바람이나 사건은 손에 잡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한번 좋은 일도 계속 누리려고 하면 문제가 생겨요. 왔다가 나가는 것이 좋은 일이고, 슬픈 것도 왔다가 시간 되면 잊혀 지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뭐든지 장악하려 하지만 장악하고 소유하면 이게 나중에 눈물의 씨앗이 돼요. 눈물 흘리게 만듭니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해보세요. 울기는 혼자 울거든요. 그냥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또 썰물이 밀려오고 저녁 되면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다음날 눈 뜨면 또 썰물이 오게 되고, 그런 거 하나, 하나 잡아서 내 것, 내 역사 만들려고 그렇게 무리한 시도 하지 마세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바르게 산다. 신앙대로 산다. 그건 전부 다 밀물, 썰물 같아서 바르게 산다고 이렇게 마음먹으면 그게 오히려 자기를 괴롭게 만들고 위선자로 만들어 버려요.
그럼 주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느냐, 바로 드릴, 질투 하는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마음껏 그들의 선택의 폭을 넓히는 겁니다. 교회 다니다가 골프 배우고 난 뒤에는 꿈속에도 옛날에는 주님 얼굴이 보였는데 지금은 골프가 보이고 당구 배우고 난 뒤에는 당구공이 보이고 바둑하고 난 뒤에는 바둑돌이 보이고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니가 나를 사랑한다? 거짓말 하지 마라. 사실은 이걸 더 사랑하잖아.’ 거기에 빠집니다. 빠지면서 주께서 드릴을 가지고 드르륵 뚫어버리죠.
‘나를 니가 사랑하는 건 사랑이 아니야.’ 질투한다. 분류작업.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분류하는 분류작업에 드릴로 뚫어버리면 나중에 지 좋다는 화투, 지 좋다는 바둑, 좋다는 골프, 좋다는 낚시, 어느 순간에 예수님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인생 끝입니까? 그건 하나의 밀물이고, 썰물이고, 또 그렇게 생각하다가 또 그 다음날 되니까 딴 즐거움에, 등산 가는 즐거움에 빠져서 온갖 산에 가고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간다고 돈 모으고 다 빠졌다가 그것도 어느 날이 되면 시들해지고 주께서 이처럼 밀리고 오고 밀리고 오고, 우리 어떤 분은 자식 좋아하다가 자식도 나중에 실망스럽고 귀찮다 해요.
모든 것이 주님께서 질투하는, 나는 너만을 노리는데 너는 왜 딴 짓을 하느냐, 이 바보야, 왜 자꾸 니가 질투하는 사랑하는 주님은 안 보이고 딴 걸 자꾸 보느냐.‘ 그 말은 말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딴 짓을 하도록 허용하시면서 그 가운데서 질투하는 하나님이 진짜 나만 찾으시는구나. 고맙습니다.’라고 진정으로 복음에 대한 응답이 나오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그런 하루하루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좋은 게 좋다는데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주님의 속죄가 질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십자가가 질투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증거라는 사실을 저희들이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