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요한계시록 해석법 130606강의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해석법 130606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한윤범(IP:14.♡.134.60)

13-06-12 16:49

20130606 봄특강a - 요한계시록 해석법
(강의 : 이근호 목사)

요한계시록 들어가기 전에 신명기 9장부터 보겠습니다. 거기에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여기 이스라엘 속에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유일하게 내통을 해요. 유일하게 내통을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역할, 이스라엘을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신명기 9장을 요한계시록 하기 전에 왜 거론하느냐 하면, 여기 이스라엘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으면 안 돼요. 어디 있다면 찾아올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이 말도 어려운 것이 이스라엘에 가보면 이스라엘만 있지 이스라엘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고 돼있다고. 하나님이 분명히 나 여기 있다는 식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기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뭔가 움직이고 있다. 움직일 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이 움직이는 흔적을 통해서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가 되는 겁니다.

정리해보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할 때 정답은 여기에는 아니 계시다고 언급해줘야 되는 거예요. 이런 데는 하나님이 아니 계십니다. 그러면 어디에는 아니 계신다고 할 때 이 어디는 어디냐 하면, 인간의 자리에는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적인 상식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모든 것을 식물과 동물과 바다에 있는 고기마저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니까 하나님이 바다 밑에도 계실 것이 맞는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진짜 하나님의 뜻은 물고기 움직이는 걸 아무리 연구한다고 나타나지 않아요. 하나님 뜻이 나타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아니 계신 곳을 추려내는 방식으로. 추리고 추려 나온 방식은 바로 모세가 있는 자리, 곧 이스라엘 자리에만 하나님이 나타나는 겁니다. 나타나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걸 하나님이 계신 것과 같은 것으로 쳐줄 수 있느냐는 그 문제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한다고 식으로 처리가 돼요.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실시되는 게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실시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언약의 상대자가 되니까 이스라엘은 ‘을’이 되는 거죠. ‘갑’은 어디 있습니까? 갑은 없는 거죠. 갑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데 갑의 지시를 받고 을이 움직이니까 이스라엘만 있을 뿐이죠.

요한계시록을 하면서 이스라엘을 언급하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할 때는 먼저 요한계시록이 나올 수 있는 자리가 옛날 언약의 자리와 똑같은 원칙으로 이스라엘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야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심으로 하지 않는 다른 곳에서는 요한계시록을 백독, 만독 해도 요한계시록을 모른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면 옛날에 이스라엘이 있었는데 거기에 모세가 있었던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스라엘을 어디 있느냐, 어디서 만나느냐?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구약에는 특정 지점이 있어요. 가나안 땅이라는. 신약에는 어디 있느냐는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때그때마다 이스라엘 되게 만들어내기 때문에 어디 있느냐가 성립이 안 돼요.

예를 들어서 광복절 밤에 여의도에서 불꽃놀이를 했다. 그러면 8월 16일에 가면 불꽃놀이 합니까? 안 하죠. 이미 끝났잖아요. 그런데 분명히 불꽃놀이 있었거든요. 어디 있느냐? 이미 끝났어. 이미 사건 종결됐어. 이러면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겁니다. 신약에서 이스라엘, 교회라는 것은 항상 사건으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어디에 교회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어디 있느냐로 설명할 수 없고, 교회가 어떻게 등장하고 나타나느냐? 그런 식으로만 교회란 말을 쓸 수 있지 교회가 어디 있고, 몇 명이냐는 것은 신약에는 쓸 수 없는 용어에요. 교회와 만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그 교회가 어디 있느냐?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어디 있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될 정도로 피로 사신 거예요.

우발성인데요. 이런 신약에 교회가 우발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구약 때 이스라엘이 이미 한계를 보였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동행하면서 구약에는 여기 있다가 되거든요. 이젠 여기 있다는 것을 해체시켜서 하나님의 언약을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마지막 때 신약 시대입니다. 구약에는 여기 있다. 어떻게 움직인다. 신약에 오면 여기 있다, 움직인다는 게 성립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이스라엘 되게 할 때에만 이스라엘 되고, 교회되게 할 때만 교회되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그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이렇게 정리가 되지요.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습니까? 구약에는 이스라엘 빼놓고 잘라내는 작업을 해서 이스라엘만 있다는 그 시절이 있었다. 특정 공간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런데 신약에 보면 그 누구라도 요한계시록을 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남아있는 건 뭐냐? 그냥 요한계시록만 영원히 남아있을 뿐이죠. 말씀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디 있느냐? 요한계시록이 실현되는 그 순간, 사건에 요한계시록이 적용되면서 거기서 교회가 발생되게 돼있죠.

만약에 구약적 인식이라면, 구약적 인식은 신약에 통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서 구약적 인식이 이라면, 여기 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한다. 그러면 누가 갑이냐 하면, 교회가 갑이 되고, 요한계시록이 을이 되죠. 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주셨다고 되는 겁니다. 이러한 실험은 구약에서 이미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나님께 모세가 있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제가 요한계시록 하면서 신명기를 자꾸 언급하는 이유가,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위해서 홍해에서 건져냈다. 이러한 인식이 결국은 신약 시대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나 악마의 사주 역할,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바로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모른다. 어디 있다고 말하지 마라. 똑같은 질문입니다. 악마가 어디 있느냐? 모른다. 똑같은 거예요. 악마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네 아비는 마귀다. 악마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악마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한 그들이 악마였어요. 그게 안 되면 요한계시록의 짐승 개념이 전혀 풀리지 않습니다.

이미 실패로 끝난 거예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여기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한다는 시도는 그 자체가 단순히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고 실패이면서도 실패 아닌 양 여기면서 오히려 실패로 규정하는 쪽을 공격하는 식으로 자기의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하면서 구약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다시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의 뜻을 보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접하고 다른 민족은 하나님의 뜻이 없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느냐? 하나님의 뜻이 함께 있었지만 언약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여긴 본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본성과 속성을 발휘하면서 자기 나라와 함께 망해버렸다. 그렇다면 구약 사람들의 잘못은 뭐냐? 자기가 갑이고, 하나님은 을이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교회답게 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주신 것이라는 그 사고방식이 옛날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반복할 뿐이고 실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실패를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교회라는 것이 짐승의 앞잡이라는 것이 폭로되면서 진짜 요한계시록이 요한계시록답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략은 차질이 없는 거예요.

여기 교재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교재 초반에 읽어보시면 이 단어가 하나 나올 거예요. ‘도판’이란 말. 도판이란 말은 그림으로 된 판때기란 뜻이잖아요. 여기서 짜깁기로 표현했는데 이 표현도 맞지만 더 진실에 가까운 표현은 지구의 지각이 쭈그러들어서 맨틀에서 올라오는 마그마에 의해서 부유하는 하는 이동하는, 연못의 꽃이 피었는데 바람 부는 데로 이동하듯이 지각들이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서로 어울리면서 충돌하면서 지진이 발생하거든요.

뜯어낸 지각들이 하나의 도판이라면 전혀 논리적으로 안 맞는 도판들이 옆에 있으면서 뭔가를 보여주게 돼요. 구약에 그 도판들의 특징이 뭐냐? 전부다 구약 역사의 쪼가리들입니다. 신명기를 언급하는 이유가 구약부터 제대로 이해하자 이 말입니다. 구약부터 만들어낸 역사를 요한계시록은 잘라요. 맞지도 않는 그림들을 바로 옆에 놔둬버립니다. 이것은 구약적인 안목, 역사적 안목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자체를 주께서 차단시키는 겁니다. 모자이크가 맞지를 않아요.

요한계시록 그림이 있다면 A는 B와 만나고, B는 C와 만나야 되는데 이것이 갈가리 찢어져서 A 옆에 C가 있고, Z가 Y에 붙어 있고, 이렇게 돼있단 말이죠. 구약 역사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돼있는데 A에서 B, B에서 C, 시간 따라 흘러가는데 B는 따로 쪼개서 나오고, C는 따로 쪼개져 나와서 C는 A와 만나고, A는 X와 만나고 Y와 만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의 모든 문장들이. 그걸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맞습니까? 문법 자체가 역사적 토대 위에서 돼있는데. 안 맞지요.

지금 제가 언급하는 것은 왜 그렇게 하느냐? 왜 짜깁기하듯이 안 맞는 도판으로 요한계시록에 깔아놓는 이유가 뭐냐? 그걸 지금부터 설명하고자 합니다. 신명기 9장을 봅시다. 이스라엘 나오고, 2절에 보면, “그 백성은 네가 아는 바 장대한 아낙 자손이라” 가나안 땅에 아낙 자손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힘이 센 거인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거기를 차지해서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미리 40일 동안 정탐을 하고는 그들은 낙담을 합니다. 힘으로 못 이깁니다. 힘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다음에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제 이야기 아니죠. 신명기 9장 2절에 나오는 분명한 이야기지요. 그 다음에 4절에 보게 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여기 첫 번째 ‘힘’이 나오고, 두 번째 ‘의’가 나오죠. 힘과 의를 대비를 시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우리가 해석할 때 힘을 얻기 위해서 해석해야 됩니까? 의를 알기 위해서 해석해야 됩니까? 어느 쪽입니까? 천국은 힘쓰면 들어갈 수 있습니까? 못 들어가지요. 그러면 평소에 이 세상에서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한다는 자체가 터무니없는 짓이죠.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은 약속의 땅, 천국이 힘을 원치 않는 세계라는 것을 누가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상에서는 힘없이는 못 살거든요.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그만큼 살 힘이 축적돼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천국에는 남아도는 힘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그런데 천국은 힘을 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낙 자손은 천국에 못 가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국에 못 가는 아낙 자손을 그렇게 겁내고 있고 부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격해야 될 이스라엘이나 공격당할 아낙 자손이나 둘 다 똑같은 질이에요. 천국과는 상관없는 족속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익히 아시고 일부러 아낙 자손을 가나안 땅에 배치해놓은 거예요. 천국 가는 이스라엘이 정작 천국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들춰내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천국 가고, 구원받고, 복을 받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들은풍월로 많이 들었는데 정작 하나님과 함께 사는 세상은 이룰 수 없는 그런 조건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 이스라엘입니다. 그것을 주께서는 들춰내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명기가 그 당시 이스라엘을 들춰낸다면 요한계시록은 오늘날 우리를 들춰내는 거예요. 이 땅에 우리가 산다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 살 힘이 있기 때문에 살 힘 덕분으로 살아간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영생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은 오래 산다. 영원히 죽지 않는 걸 영생이라고 보는데 성경, 특히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어떤 인물입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잠자고 있으면 영생 얻으면 오랫동안 살 것이다.” 할 때 영생은 조금도 낯설지 않은 개념인데 영생이란 이름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영생이 그 사람 자체라는 인식은 우리한테는 상당히 낯선 인식이 되죠. 그런데 성경에는 여러분 알다시피 영생이 이 땅에 오셔서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그분이 영생이에요. 영생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아저씨가 영생이에요. 이게 납득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목숨이 계속 이어지는 걸 영생이라고 생각하는데 목숨이 힘이거든요. 어떤 아저씨가 나, 영생. 내가 생명이고 길이고 진리야. 생명이 돌아다닐 때 오래 살고 싶은 내가 그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쪽에서는 없는 거예요. 따라서 없다는 말은 우리는 영생과 상관없는 존재에요. 영생을 얻을 수도 없지요. 그 사람은 잡아서 먹는다고 해서 안 되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약을 올리듯이 내 살을 먹으라고 하니까 잘라서 따로 굽고 지지고 이렇게 먹는다고 영생이 아니다.

영생 자체가 현재 있는 내 목숨은 부지한 채 오래 간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영생과 연관되지 않는 영생이라고 따로 돌아다닐 때는 그동안 우리가 영생을 찾았다는 자체가 부질없는 종교적인 욕구에 지나지 않는구나. 일종의 환상이죠. 태어날 때부터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데 죽기 전에 뭔가 너무 한이 맺혀서 영생이란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교회 세우고 사람 끌어 모으고 했을 뿐이지 하여튼 우리는 영생은 아니에요. 다른 분이 영생입니다.

생명나무가 나무로 돼있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겁니까. 생명나무가 나무로 돼있기 때문에 나무만 치우면 영생은 못 얻게 돼있어요. 치워버렸는데 없잖아요. 옛날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할머니가 지혜롭게 제사 드릴 때마다 문어와 중요하고 비싼 것은 일년이 뭡니까, 삼년 씩 계속 다락에 감춰놓고 작년에 한 것을 또 내놓고. 감추니까 더 먹고 싶은 것 있죠. 만약에 문어가 영생이라면 우리는 맛도 못 봤어요. 그걸 치워놓으니까 아무리 살고 싶어도 영생 자체가 이미 절단된 상태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그 절단된 상태를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세상은 힘의 세계, 힘의 세상입니다. 힘의 세상에서 요한계시록을 본다는 것은, 현재 힘을 더 얻기 위한 힘의 세상이라고 요한계시록에서 규정했잖아요. 규정했기 때문에 힘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나나 여러분들이 요한계시록으로 영생 얻겠다는 것은 힘으로 영생 얻겠다는 짓거리밖에 안 되는 거예요.

천국에 갈 수도 없는 것들이 천국 가겠다고 시도한다는 자체가 힘의 세계의 범주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기능을 할 뿐이에요. 그래서 “너는 이 세상이야.”라고 확인시켜 주는 작업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의 위력이란 말이죠. 이 세상을 힘의 세계로 만드는 요한계시록 하기 위해서 밑에 도판을 까는데 그 도판이 신명기 도판이란 말이죠. 이제 제가 도판이야기를 끄집어낸 이유를 아시겠지요.

신명기 9장에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배치하기를 아낙 자손을 가나안 땅에 배치함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낙담케 하는 겁니다. 낙담한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없다는 것이고, 평소에 이스라엘이 힘을 원했다는 것이고, 결국 이스라엘이 원하는 천국이라는 것은 힘 센 하나님을 평소에 원했다는 것이고 이 두 가지가 합쳐서 요한계시록에 들어오면 모두 다 악마에 소속돼있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과 고백을 한다 이 말입니다.

어느 교단이든 어느 단체든 요한계시록 해석하면서 “여러분, 우리 힘 뺍시다.” 이런 쪽으로 해석하는 게 없어요. 어떻게 하면 지금 갖고 있는 힘을 유지하면서 천국까지 들어가느냐? 그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요한계시록 해석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 있잖아요. 일곱 교회 해석할 때 보세요. 일곱 교회가 이렇게 책망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 바짝 차려서 이러한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하게 되면 우리 교회는 나름대로 존속하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모아놓은 힘은 누수 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고 커질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렇게 해석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 요한계시록 본래의 취지라는 겁니다. 그래야 교회가 짐승의 앞잡이라는 게 들통 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신명기를 몰라서 그래요.

신명기 9장에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아낙 자손을 배치한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 가는 것이다. 의가 힘으로 전환되는 것을 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신명기 9장에 보면, 너희들은 원래 목이 곧은 백성이다.

5절에 보면,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그 다음에 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목이 곧은 백성이니까 죄라는 뜻이고 죄라는 것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고 죄기 때문에 반드시 힘을 얻고자 힘을 탐내게 되고 힘을 그리워하게 돼있는 속성을 감출 길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의를 줄까?” “아닙니다. 헌금을 주시옵소서. 교인들 주시옵소서.” 구조가 이렇게 돼있단 말이죠. 더러운 구조가.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더러운 죄성을 주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로 아름답게 수놓아서 오려서 요한계시록을 장식하는데 밑에 도판으로 까는 거예요.

제가 신발을 샀는데 급하게 사느라고 컸어요. 그래서 한두 달 동안 마음고생을 했지요. 신발을 신을 때마다 신발이 미워지는 겁니다. 신발 수선하는데 갔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한 달 동안 입원해서 한 달 더 기다렸어요. 그래서 어제 드디어 그 사람이 일 시작해서 가죽을 대충 오려서 앞부분에 집어넣으니까 딱 맞아요. 그래서 삼천 원 받았어요.

밑에 도판을 까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이라는 도판이 깔렸다는 걸 모르고 현대 21세기 관점에서 힘을 얻고자 하는 그런 본성을 감추지 않는 채 요한계시록에 덤벼들어서 천국 가는데 힘 달라고 요한계시록을 보고 있단 말이죠. 처음부터 신명기에서는 너희가 목이 곧은 백성이고 의롭지 않다고 이미 판정 났잖아요.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된다니까 의를 양으로 끌어 모으려고 또 죄의 본성을 발휘하는 겁니다. “너, 의를 얼마치 모았어? 난 이만큼 모았어.”

만나라는 것이 많이 저축하라고 준 만나가 아닙니다. 광야에서. 만나라는 것은 저축할 필요가 없는 하늘에서 온 음식이에요. 하늘나라에는 저축 왕이 없다 이 말입니다. 은행도 없고 보관금고도 필요 없다는 거예요. 하늘나라에 도둑놈이 없는 이유가 뭘 보관할 게 있어야 도둑놈이 있지. 자기 게 없는데. 자기 것이 없는 천국에 가려면 이 땅에서부터 자기 것이 없어야 된다는 걸 훈련을 해야 되는데 이 땅에서는 훈련이 안 돼요. 왜냐하면 내 것으로 내가 살기 때문에 내 것이라는 게 있어야 된다고. 내 의, 내 믿음, 내 소망 등 전부 앞에다 내 것을 붙이기 때문에 내 것 빼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요한계시록에서 일괄적으로 마음껏 갖고 있으라고 해놓고 시커먼 콜타르를 부어버려요. 모든 게 죄가 되도록. 마음껏 가져. 얼마나 가지든지 상관없이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산다고 자랑질하지 마세요. 그것도 죄에요. 물론 잘 사는 것도 죄고. 적당하게 사는 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신명기에 나타나는 언약의 본성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의는 오직 언약에서 나오기 때문에 언약 빼놓고 의라고 간주 안 할 작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심을 했어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구원하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그런 죄 많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다녀야 역사 배후에 있는 이름 모를 세력자가 나오잖아요. 그걸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짐승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이게 이 세상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재 5페이지에 보면, 교재가 있으면 참 강의하기 편해요. 그냥 읽기만 하면 되니까. [네 생물이 어디 있는가? 누가 본 사람이 있는가? “저 꽃병은 무엇인가?”라는 말은 성립이 되는데 이는 역사상에 있다고 느껴지는 질의자와 꽃병은 같은 역사적 존재로 눈에 띄기에 당연한 질의다. 하지만 네 생물은 어디 있는가? 없다! 따라서 질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일곱 머리에 열 뿔의 짐승이 이 세상 어느 수풀에, 어느 동물원에 있는 짐승인가? 어느 열대 우림 지역에 있는 짐승인가? 본 사람이 있는가? 없지 아니한가. 왜 없는 짐승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가? 따라서 그 질의도 성립될 수 없다.]

꽃병과 질문하는 사람이 같은 역사에 존재해 있잖아요. 같이 있잖아요. 눈에 띠잖아요. 네 생물은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없는 걸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안 되지요. 있어야 묻지. 여기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이 이 세상 어느 수풀에, 어느 동물원에 있는 짐승입니까? 이 동물원 가봤어요? 없지요. 어느 열대우림에 있는 짐승입니까? 본 사람 있습니까? 본 사람이 없는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자체가 말도 안 되죠. 왜 없는 짐승에 대해서 왈가왈부합니까? 따라서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악마를 짐승이라고 표현한 것은, 짐승은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요. 반려동물은 이름을 붙이는데 그것은 가깝기 때문에 그렇지, 지리산에서 곰 만나면, “영식이 아니냐?” 이럴 수는 없단 말이죠. 이름은 인간에게만 붙일 자격이 있고 짐승은 붙일 자격이 없다는 그 인간이 짐승을 짐승이라 부르기 때문에 짐승 이름이 없는 거예요.

왜 그렇게 이름이 없느냐 하면, 이름이 없는 분이 척결해야 되지 이름이 있는 인간은 이름 없는 존재에 대해서 대항할 수 없습니다. 천로역정 글 읽어보셨지요. 거기서 크리스천이 칼로 짐승 찔러 죽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에요. 그건 지가 천사보다 더 세다는. 천사도 짐승에 대해서 갈지도 못했습니다. 지가 뭔데 칼 들고 찌릅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님도 짐승을 이기지 못했어요. 이 세상에 계실 때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왜 그러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을 때부터 인간은 짐승의 하수인으로 돼있기 때문에 갑은 짐승이고 을이 인간이거든요. 어떻게 을이 갑을 이깁니까.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도판으로 까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막상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똑같은 인간을 상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잔득 풀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저 적들은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가 이스라엘의 고민거리인데 하나님은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해요. 저 적을 두려워하지 마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지 너희에게 속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자꾸 해버려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분명히 같이 봤어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본 게 뭐예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눈이 네 개입니까. 똑같이 눈이 두 개에요. 시력이 5.6입니까? 1.5 됐는지 모르겠어요. 똑같이 봤어요. 똑같이 그들은 우리보다 힘세고 우리는 메뚜기 같고.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낙담하고 울고불고 통곡하고 난리 났어요. 왜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갑시다. 승리합니다.” 왜 그런 망발을 했어요? 그들은 뭘 봤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을 배치해놨다는 입장에서 언약을 생각하니까 그들이 힘센 자를 배치해놓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배치해놓은 것에 대해서 극복할 하나님이 함께 하는 믿음이 있느냐하는 여부를 보겠다는 것으로 본 거예요.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나머지 열 명은 하나님, 하나님 말은 하지만 전혀 하나님의 존재를 안 믿어요. 그냥 강호동 같은 큰 덩치, 그러니까 씨름하면 마땅히 지지요. 패배하기 마련이지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힘으로 밀어붙이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패배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전쟁은 적들과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와 전쟁하는 중이다. 진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언약으로 전쟁하는 중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갈렙과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갔을 때에 전쟁을 하면서도 사실은 이방민족과의 전쟁이 아니고 그것은 바로 지금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둘 사이의 전쟁입니다. 그저 뭐든지 힘으로 이기려고 하는 이 본성, 지울 길이 없어. 돈 힘, 명예 힘, 권력 힘. 뭐든지 힘으로만 해석이 가능한, 힘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되는. 뭐든지 힘으로만 생각, 계산, 줄 세우려 하는 이런 사고방식은 지금도 주님의 말씀과 우리와 끊임없이 전쟁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위로 잘라서 그냥 밑에 깔아놨습니다. 깔아놓으니까 말씀이 그냥 깔리기만 하겠어요? 거기서 말씀 자체의 위력이 막 나오거든요. 구약에 이스라엘이 실패하기 전의 이스라엘이라면 신약 요한계시록에는 모든 인류가 이스라엘이고, 그것도 다 패역한 이스라엘로 이미 확장되고 말았어요. 이스라엘 멸망하면서 각 나라로 흩어졌잖아요. 따라서 언약이 따라 가서 이스라엘을 따라 갔으니까 언약적으로 적용되는 겁니다. 이것은 선지서에 예언돼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중앙과 사방. 역사적으로 보면 중앙은 역사에 포함이 돼있습니다. 동서남북 가운데가 중앙이 되죠. 이건 구약이거든요. 신약 때에는 중앙이 뜹니다. 떠서 중앙이 보이지 않습니다. 중앙은 어린양 하늘나라 보좌가 중앙으로 자리 잡습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의 그림은 이 하나로 끝났어요. 사방 동서남북은 스가랴에 나오는 겁니다. 스가랴에 보면 이 네 모퉁이마다 네 천사를 동원해서 동서남북을 쥐고 있어요.

어릴 때 이불 호청 빨 때 보면 완전히 공사에요. 보통 작업이 아닙니다. 날 받아서 특히 6월 6일 공휴일은 이불 호청 빠는 날이에요. 남자든 여자든 다 동원해서 풀 먹여서 양쪽에서 잡아 당겨야 돼요. 특히 열 세 식구 되면 이불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빳빳하게 다린다고 여자가 갑이 되고 남자가 을이 되어서 당기죠. 사방을 동서남북을 천사가 당겨주는 거예요.

구약 역사에선 중앙이 있어요. 항상 영웅이란 역사에서 중앙지점을 차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중앙지점에 법궤가 있지요. 요단 강 건너갈 때 제사장들이 법궤를 호위했잖아요. 그리고 가나안 땅 전쟁에서도 항상 법궤가 중앙이 되어서 갔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가 전차나 기갑부대인 줄 알고 들고 갔다가, 그러니까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힘으로 해석한 거예요. 이런 역사가 얼마나 고마운 역사입니까.

교회가 땅 사놓으면 무조건 땅값 올라야 돼요? 교회가 하는 일은 무조건 야외예배 하면 비가 안 와야 됩니까? 대구 어느 교회는 권사님들 놀러 갔다가 차가 뒤집어져서 여섯 분 돌아가셨어요. 갈 때 차에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했겠어요. 목사부터 기도하고 갑니다. 처음부터 기도할 때 여섯 명만 죽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적 없잖아요.

힘으로 생각했는데 주께서 그 힘을 빼앗아버렸어요. 이것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중앙이 아니고 중앙은 너희를 비껴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속 중앙지점을 차지했는데 나중에 기원전 586년에 망합니다. 망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흩어졌던 모든 세계가 이스라엘이 우상 섬겨서 하나님을 대적한 것처럼 이스라엘만 우상 섬긴 게 아니라 모든 나머지 민족들도 우상 섬기는 것으로 마땅히 중앙지로부터 벌 받아 될 것을 확정짓기 위해서 천사가 여기 오지요.

그 네 천사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사람 모습, 독수리 모습, 황소 모습, 사자 모습, 사면을 차지하고 있고 중앙에 인자 같은 이가 계셔요. 이게 일종의 전차에요. 이것이 중앙지점에 있으면서 지상에 모이거든요. 그렇다면 사람, 독수리, 황소, 사자, 이것이 요한계시록 4장 7절에 보면,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사자 같고, 송아지 같고, 황소 같고, 독수리 같고, 이렇게 요한계시록 4장에 있잖아요. 그러면 이 도판은 에스겔 1장에서 자른 것이죠. 자를 때 그냥 자르면 안 되고 에스겔 1장에서 뿜어내는 하나님의 뜻이 담기도록 뿜어줘야 돼요. 에스겔에서 차용했구나 하고 넘어가면 안 되고 에스겔 자체에서 이러한 천사의 모습은 어떤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했던가? 그걸 그대로 가져와서 요한계시록에 깔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 밑에서 에스겔 취지가 뿜어 나오죠.

그러면 사람, 독수리, 황소, 사자는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이 범주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못 벗어나요. 심판이라 하는 것은, 힘으로 버티려는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은 중앙에서 원하는 것은 의를 원하죠. 의는 하나도 없고 전부다 힘으로 버티니까 이 땅은 마땅히 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에스겔에 보면, 분명히 사라져야 되는데 이 세상은 멸망돼야 된다고 외치는 자가 있어요. 그게 에스겔, 인자에요. 인자가 외치잖아요. “사라져야 돼!” 인자가 나중에 중앙이 되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성소, 새로운 이스라엘이 만들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이 중앙에서 내려온 성령이나 인자가 임하면 그것이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에스겔이 그 취지거든요. 그 취지를 21세기 밑에다 박아놓으면 세상에서 움직이는 모든 의식은 누가 힘세냐? 힘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힘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신명기에 의해서 의가 없는 힘으로 버티는 사람은 멸망한다고 외치는 그 당사자가 하나님의 교회, 이스라엘에 소속된 144,000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풀리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짐승은? 여기에서는 짐승이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다니엘 도판이 들어가는데 다니엘에 짐승이 나와요. 짐승이 여기서 중앙을 차지해요. 이스라엘 멸망할 때 중앙은 하늘로 떠버렸지요. 떠버리고 그냥 차지하는 게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두 증인을 살해함으로써 중앙을 차지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 십자가 죽으신 곳이고, 그게 소돔이고, 애굽으로 돼있어요. 이게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잖아요.

주님이 중앙으로 떠버렸는데 그 빈자리를 적그리스도, 짐승이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차지할 때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어린양의 모습으로 차지하면서 사람들은 여기서 옛날 이스라엘을 반복하고 이스라엘을 그대로 모방하는 그러한 형태의 종교국가가 이 세상 전부를 차지하게 되는 그러한 모습이 되겠지요. 그게 바로 악마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양의 탈을 쓰고 세상을 차지하고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있고 모든 사람은 이로써 우리는 이 땅에 천국을 이뤘다고 자부하는 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그런 과정을 주님께서는 구약에 있는 도판들을 동원해서 밑에 깔아놓는 겁니다.

쉬고 하겠습니다.

한윤범(IP:14.♡.134.60)

13-06-12 16:49

20130606 봄특강b - 요한계시록 해석법
(강의 : 이근호 목사)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관심사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를 잊을 수가 없지요.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있지 않고 없는 분으로 계시는 분으로. 지금 예수님은 사람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계시는 분.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사느냐? 성도 아닌 자가 성도로 사는 자, 이게 바로 성도지요. 예수님은 있지 않고 없는 분으로 계시니까 여기 있다와 이 땅에서 성도는 이렇게 살아야 돼. 하는 성도다움 이 두 개를 모으면 이게 바로 짐승의 나라에 해당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답게 산다는 것은 곧 짐승에 속해서 사는 것이다. 왜냐? 예수님께서 짐승의 나라에 이런 식으로 사셨기 때문에. 짐승의 나라를 인간은 몰라요. 짐승의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 것은 계산하지도 않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있지 않고 없는 분으로 사신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 그 미지의 존재는 그 무엇, 그 어두운 실체가 드러난다면 이 땅에서 성도로써 산다는 것은 여기다 그대로 대입하면 성도로 살지 않고 성도로 사는 자 성도가 된다. 이런 논리가 되거든요.

그러면 성도로 산다는 것은 교회에 헌금한다는 말이고, 성도로 안 산다는 것은 너, 성도 아닌 것 같아, 라는 평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진정한 성도가 되는 거예요. 한평생 살면서 전혀 성도답게 살지 않은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성도 아닌 것 같아. 그렇게 살아야 유일하게 성도로 사는데 성공한 사람이에요.

만약에 성도로 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묻게 돼요. “성도 같아?” 옆에서 궁시렁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하나의 집단화되어서 그들끼리 예수님은 있지 않고 없는 분이 아니고 그들 조직에 포섭된 예수가 돼버립니다. 그 예수는 가짜 예수기 때문에 거기서 주께서는 빠져나왔기 때문에 성도라는 집단에서 포섭되지 않고 빠져나올 때 그 사람이 진정한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그 흔적이 뭐냐? 세상은 예수님 때문에 짐승의 존재가 파악된 것처럼, 윤곽이 드러난 것처럼 성도도 성도가 성도답지 않게 살아가는 자체가 성도가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도답게 살았다고 발목 잡는 그 세력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다니고 말씀으로 살았다고 생각해보세요. 나중에 돌아가실 때가 되서 진정 내가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구원받는지, 아니면 내가 이것과 상관없이 구원받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동안 성도답게 살려고 한 그 헛된 짓이 얼마나 후회스럽겠습니까? 부질없는 짓을 한 거예요. 쓸데없는 짓을 한 겁니다. 주님은 그렇게 살지 않았는데 주님방식이 아니고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을 내가 부응하고 충족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가식적으로 몸부림 쳐왔던가.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성도라는 개념 자체가 세상에는 성도라는 개념이 이미 구축돼있단 말이죠. 거기에 메이지 않는 자로 살려면 성도답게 사는 구축된 용어들 주변에 무엇이 깔리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사람 있고, 또 사람 있습니다. 이게 전부지요. 사실은.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짐승이 나와요. 없는 존재에요. 태양을 머리에 짊어진 여인? 파마했습니까? 뜨거워서 어떻게 해를 져요? 태양의 중량이 얼마나 되는데 몸무게 60 짜리 여자가 어떻게 짊어집니까? 없는 존재에요.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 개? 어느 동물에도 없지요. 짐승, 아까 뿔, 이것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없는 것들로 배치해놨어요. 완전히 세상을 뒤덮어놨어요. 그것은 이 세상에 있다고 여기는 예수님은 사실은 없는 분이고, 없는 식으로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들 보기에 짐승? 없어. 해를 짊어진 여인? 그런 것 없어. 뿔? 그런 것도 없어.

없다고 사람들이 확정지어놓은 그 환경을 주님께서는 계시를 통해서 도입해버립니다. 너희들이 있다고 한 것보다 너희들 보기에 없다고 한 그 바닥 위에 너희들은 살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없다고 전부다 무시하고 다 제거해버리고 달랑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우리는 무엇이냐? 우리는 죽어서 어디 가느냐? 이런 걸 논한다면 이런 행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냐고 이야기할 때는 없다고 간주할 것들을 옆에 붙여놓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해석이 난감하게 되죠. 없는 걸 어떻게 해석하란 말인가? 무저갱? 바닥이 없는 우물? 그런 우물이 어디 있어요. 도대체 바닥없음이 과연 성립이 될까요? 바닥없음은 이런 뜻이구나. 한국에서 우물을 파면 아르헨티나나 남쪽이 나와요. 그런데 팔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중력 때문에. 파봐야 스톱돼요. 지구 자체가 위아래가 없거든요. 중력이 있는 곳이 아래고 나머지는 위가 되는 겁니다. 중력이 없어야 위아래가 되는데 구멍이 없는 우물은 지구상에서는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무저갱에서 귀신이 아니고 마귀가 나오잖아요. 무저갱이 있어야 나오든지 말든지 할 텐데 이 자체가 없기 때문에 마귀와 귀신은 성경에는 나왔는데 만날 수가 없지요. 있으면 사진 한 장 찍겠는데 그럴 입장이 못 돼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은, 빠져나올 수 없다. 빠져나올 수 없다는 말은, 빠져나와야 될 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아예 성립 자체가 안 됩니다. 얘들에게 하는 말이, “너 인간이 되어라. 공부 잘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요새 어린 여자 가수에게 “네가 노래 잘 한다마는 가수가 되기 전에 인간이 돼야 된다.” 걔가 인간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니까요. 자기가 인간의 전부인데 여기서 또 뭔가 다른 내가 있다는 말인가? 상상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요한계시록 자체가,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해석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빠져나온다든지 구원이라는 개념도 안 나오죠. 안 나올 때는 이렇게 됩니다. 지금 인간들이 있는 이 세상을 힘든 세상으로 보는 거예요. 사람들이 상상을 합니다. 힘든 세상에서 천국을 상상해서 임의로 만들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의 내용은 지금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요소들 중에서 괜찮은 것들만 골라서 채워 넣게 돼요. 이 천국은 이 세상의 연장, 확대에 불과하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건너가면 되는 겁니다. 이런 천국은 빠져나온다는 것이 의미가 없고 여기서 살다가 죽으면 천국 간다. 우주선 도킹하는 것처럼 우주정거장에서 우주정거장으로 이동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전혀 있지도 않는 겁니다. 짐승이라는 게 왜 나오는지 그런 것은 전혀 없지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문제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인간들끼리 뭉쳐있는 이게 문제가 되지요. 그러면 우리들끼리 있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 문제라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집단밖에 없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멸망한 이유가 우상을 섬겨서 멸망했거든요.

우상이란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게 우상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누굴 섬겼느냐 하면, 여호와를 섬겼거든요. 그런데 에스겔이나 보면 여호와를 섬겼는데 여호와로부터 이스라엘이 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상이란 여호와도 우상에 포함돼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도 가짜 예수에 포함이 된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것이 조작이 가능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어떻게 드러냈느냐? 여러분들이 아는 이야기합시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통해서 여호와의 뜻을 다 이야기해줬단 말이죠. 그러면 새 언약을 통해서 이야기할 때 새 언약을 오기 전까지는 그들은 자기는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새 언약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이 들이닥치니까 여호와를 섬긴 것이 아니고 마귀를 섬긴 것으로 예수님한테 고발당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없다고 봅시다. 그들이 여호와 섬기는 것이 가짜 여호와라는 것을 알 길이 없지요. 예수님이 없다고 여기고 사라지고 안 계시다고 여기고 자체적으로 여호와를 섬길 때 이것이 우상이 된다면, 하나님 자체가 우상이 되고, 말씀을 지키는 게 우상이 된다면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대표적인 집단으로 부름을 받은 게 돼요. 이게 신명기 마지막 대목에 나옵니다.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이스라엘 너희들은 필히 다른 신을 섬기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학자들은 그 대목을 뺍니다. 이것은 자기들이 멸망하고 난 뒤에 첨가해서 조작한 구절이지 모세가 그런 이야기할 적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스라엘을 도와준다면 애초부터 초를 치지는 않을 것이다.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지 절망적인 예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레위기 2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들은 아무리 해도 결국은 여호와를 배반하게 돼있는 그런 코스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여호수아 마지막 대목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하니까 너희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어. 필히 너희들은 망하게 돼있다.

반드시 망하게 돼있는 그 이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위로 보지 말고 옆으로 봅시다.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밑바닥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력을 깔아놓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세력을 불러내기 위해서 여자라고 했고, 그 다음에 아까 이야기한 무저갱, 그 다음에 유황불, 그 다음에 생명나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용어들, 지팡이, 전부 다지요. 그리고 보좌, 천사. 이스라엘 역사를 뚫고 이런 것들을 밑에 깔아놓으면 이스라엘이 이것을 뚫고 오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쪽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바라보게 되면 옛날 자기가 겪었던 모든 역사, 부정적인 역사, 벌 받은 역사를 보게 되면 여기서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한테 멸망당해야 되는지가 부각이 돼요. 들통 나요. 드러나게 돼있어요.

그렇다면 무저갱이라든지 아들 개념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창세기부터 나왔잖아요.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런 단어들이 쪼개집니다. 난도질당하지요. 이스라엘 자체를 쪼개면서 지진이 일어나는 틈 사이에서 올라오는 세력들이 나옵니다. 세력들이 모아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본래의 세력들이 집결되게 돼있어요.

그런데 사람들 눈에는 이건 안 보이고 쪼개진 이스라엘 역사, 이런 것만 보이는 겁니다. 신약에 오면 이스라엘 속에 일곱 교회도 포함됩니다. 일곱 교회도 쪼갭니다. 에베소교회는 이게 문제야. 라오디게아교회는 이게 문제야. 서머나교회는 이게 문제야. 빌라디아교회 이것도 문제야. 전부 다 문제 있다고 지적하는 이 틈 사이에 나오는 이것을 봉합하는 거예요. 이걸 다시 뭉쳐서 있음을 자꾸 만들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새 언약,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세력이 현재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세계를 들어가게 되면 말씀으로 이스라엘이 그 동안 부정적으로 겪었던 모든 용어들이 추가적으로 들어오게 되면 여기에 대해서 반발 세력으로 하나로 뭉치고 집결하려고 애를 씁니다. 집결된 것을 짐승, 바벨론 또는 음녀라고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돼있어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의 진행과정이 뭐냐 하면, 1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이야기, 그 다음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우기는 교회들의 등장과 책망 받는 교회와 그 다음부터 천사들이 와서 낱낱이 쪼갭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쪼개면 마지막 요한계시록 16~18장에 가면 이것들이 쪼개면 쪼갤수록 집결해서 오직 하나의 노선, 음녀, 큰성 바벨론으로 집결해서 대항하게 됩니다. 여기에 맞서서 집결하지 않더라도 이미 하나로 확정된 한 신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위에서 신부의 자격으로 내려오면서 혼인잔치가 이뤄지죠. 진행과정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빨리 지나갔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왔던 모든 용어들이 현재 눈에 보이는 것으로 단합된 결집된 모든 조직들을 쪼개는 역할을 하고 쪼갠 그 사이에서 “왜 쪼개는데? 네가 뭔데 쪼개는데? 우리가 여기 모여서 하겠다는데 네가 왜?” 하고 쪼개는 틈새를 메우면서 반발하는 세력이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세력으로 나온단 말이죠.

말씀으로 쪼갠다는 것은 주님 쪽에 속한 증인들이고 그러니까 144,000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고. 거기에 반발하면서 서서히 통째로 하나의 성깔로 집결하는 하나로 움직이는 움직임을 쪼갤 때마다 강력한 힘으로 결합이 돼요. 그럴 때 그게 뭐냐 하면, 다니엘이 말하는 짐승의 나라의 모습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은 어디 있습니까? 짐승은 이게 짐승이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짐승의 세계라고요.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기 있다는 것은 사실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이다. 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그게 주님에 대한 반발이죠. 그동안 이 땅에서 살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지금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죽은 자로 사는 것이라는 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그동안 살아보려고 애썼던 것을 무용지물로 만드니까 얼마나 기분 나쁘게 들리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단결해서 살자. 단결해서 살면 그게 바로 바벨론이고 음녀가 되고 짐승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교재 5페이지 봅시다.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요한계시록 5장에서 1절에 3절 말씀 나와 있지요.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가 여기 있음을 감안해서 보게 되면 진짜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왜냐하면 책을 왜 봉합니까? 서점에서 책 사는 입장에서 제일 기분 나쁜 게 비닐로 덮어놓은 게 있잖아요. 칼로 찢고 싶어요. 뭐 신비주의 전략도 아니고 뭐 중요한 게 들어있다고. 주로 내용 안 좋은 만화책에 많이 있거든요. 얘들 보지 말라고.

여기 비닐봉지가 일곱 번이나 감아놨어요. 보라는 거예요? 보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책을 봉해놨으면 봉해놨다고 하면 될 건데 천사가 하는 말이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누가 책을 펴서 인 떼기에 합당하냐?” 묻기는 왜 묻는데. 출판사가 책을 일곱 번 봉해놓고, “너희 중에 이 비닐 뗄 사람 없지롱?” 그러면 책의 존재의 목적이 뭐고 이유가 뭡니까? 결국은 약 올리는 거죠. “너는 책 읽을 자격도 없어.” 이런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실 때 예수님은 여전히 이 세상에 없는 존재입니다. 안 보고 말지 뭐. 예수님, 요한계시록입니다. 난 안 봐. 끝난 문제에요. 여러분 창세기 있습니다. 성경 있습니다. “난 안 보고 이대로 살 거야.” 그러면 그만이지 뭐 어떻게 하는데. “요한계시록 이걸 봐야 진리를 안다고?” 이러면 이 사람은 예수님한테 걸려든 사람이에요. 성도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책을 비닐봉지로 일곱 번 감아놨거든요.

그러니까 사도요한이 울지요. 예수님이 얼마나 짓궂습니까? 괜히 놀고 있는 얘에게 이 책 보라. 비닐봉지로 쌌어요. 울어라, 울어라. 울리지 못해서 안달 난 것 같아요. 일부러 울려요. 사도요한이 웁니다. 아무도 이 책 펴기를 합당한 사람이 없다.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울기는. 안 보고 말지. 뭐 답답해서 뭐 궁금한 게 있다고. 신기한 것도 귀찮아. 천기누설도 다 귀찮아. 난 이대로 밥 먹고 살래.” 그러면 그만이지 보기는 왜 보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하여 여기에 뭘 담아내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5장 1절 다시 보게 되면,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다고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오른손으로 일하시는 낯선 하나님과 너희들이 전에 죽였던 예수그리스도와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뭐고, 어떻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전부다 구라고 거짓말인 이유가, 오른손과 관련 있는 예수그리스도와 관련성을 맺지 못하면 너희들은 그동안 너희들이 상상한 엉터리 우상적인 하나님을 섬겨온 것이란 겁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이걸 보고 우니까 천사가 말하기를 어린양만이 이 책을 편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5장부터 예수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아니다. 왜? 오른손과 관련된 분인데 오른손에 관련된 기능과 내용의 책을 펼 사람이 아담부터 해서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없으니까 결국 인간들은 예수를 만나면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런 팔자고 그런 기능을 해야 돼요. 따라서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그동안 아무 탈 없이 온순하게 살고 있는 겁니다. 아무 이상 없음. 별 탈 없음. 우리는 죽으면 좋은 나라 감. 이런 식으로 우리가 만든 종교에 따라서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하면, 책을 펴기 전까지는 교요한 세상이에요. 방금 제가 지어낸 거예요. 정말 고요한 세상, 좋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책을 펴게 되면 번잡스러워. 번잡스러워도 너무 번잡스러워. 너무 요란스러워. 반대로 요란한 세상. 요한계시록은 요란해도 너무 요란스러워요. 그런데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너무 조용해요. 가끔 북한의 김정은이 핵미사일 그것뿐이지. 그 외에는 아주 조용합니다. 성폭행범 설쳐대도 아무나 찾아오는 게 아니고 밤거리에 술 먹고 돌아다녀야 그런 일이 있는 거고 집에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는 해당도 안 되고.

어쨌든 우리는 아무 문제없어. 정말 아무 문제없는 세상에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괜치 분란을 일으킬 이유가 하등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자신을 내가 하나님이라고 드러내는 사람한테는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은 인생이 요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당탕탕. 요란스러워요. 그렇다면 고요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밉상 받는 계기가 될 뿐이에요. 하지만 사도요한에게는 이것은 세계에서 최고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웁니다. 내가 이걸 모르고 인생 산다는 것은 이 자체로 나는 인간도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책을 드디어 펼쳤습니다. 펼쳐도 한꺼번에 펼치면 좋겠는데 사람 감질나게 만드네. 한 번 벗기니까 우당탕탕 하더니만 또 다시 사면은 고요해지고. 그 다음에 제2막 벗기니까 잠시 우당탕탕 하다가 다시 고요해지고. 일곱 번을 벗겨서 다 됐을 줄 알았는데 일곱 나팔까지 부네. 그게 다 인줄 알았는데 다음에 일곱 대접을 쏟아 붓네. 아무리 지금 봐도 세상은 너무 치안이 잘 돼있어요. 특히 한국경찰은 4대악 제거한다고 설쳐서 너무 조용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혼자 굉장히 요란스럽단 말이죠.

이걸 어떻게 접근해 나갈 것인가? 사실은 약간 힌트를 드렸어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동원할 때는 현재 인간을 쪼갠다고 했습니다. 쪼갤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언약을 들을 때 그들이 오해를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생각할 필요 없지요. 그냥 밥 먹고 살면 되니까. 그런데 말씀이 오니까 말씀에 순종한답시고 순종을 해요. 그런데 순종하겠다는 그걸 기화로 자신의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분명히 자신들은 죄인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때 그들은 거부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거부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느냐 하면, 인간이 신을 믿는다는 것은 항상 자기가 갖고 있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고 신을 도입시키거든요. 과거까지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고 미래는 자기가 안 살아본 인생이기 때문에 여기다 신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신이 자기에게 해줄 것은 과거에 미흡한 것, 과거에 상처 받은 것, 손해 본 것, 손실당하는 것, 이런 것을 넉넉하게 원상회복시켜달라고 신을 믿게 돼있습니다.

신을 믿게 되면 행운을 가져오게 되면 그 증거를 어디서 찾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주변의 막대한 나라에서 찾아요. 주변의 나라가 잘 사는 나라잖아요. 자기도 잘 살아요. 잘 산다는 말은,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는데 저들은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겼더니만 우리보다 더 잘 살거든요. 그래서 산다는 것은 플러스알파란 말이죠. 분명히 똑같이 노력해도 복을 받아 사니까 사는 만큼은 그들이 믿던 신에 의해서 행운으로 주어진 복이라고 보는 겁니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껍데기에다 그들이 복을 얻는 방식을 집어넣으면 되겠지요.

이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의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42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2,617 자유게시판 대전20130528b-마13장36절(비유)40강-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3-06-07
12,616 자유게시판 43강-에스겔16장 1-5(예루살렘의 근본)130605-이 근호목사 에스겔 최고관리자 13-06-07
열람 ➜ 강의 요한계시록 해석법 130606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13-06-06
12,614 성경 2013년 6월 6일 봄 특강 - 요한계시록 해석법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13-06-06
12,613 우리교회 예루살렘의 근본 130605 에레미야 최고관리자 13-06-05
12,612 강의 천로역정에 대해서 - 최고관리자 13-06-05
12,611 우리교회 [일반] 천로역정에 대해서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3-06-05
12,610 자유게시판 천로역정에 대해서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3-06-05
12,609 자유게시판 36강-롬6장 19-23(사망과 영생)130602-이 근호 목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13-06-05
12,608 자유게시판 길 안내 안내 최고관리자 13-06-05
12,607 자유게시판 8강-습3장1-5(지도자들의 타락)130602-이 근호 목사 스바냐 최고관리자 13-06-05
12,606 우리교회 지도자들의 타락 130602 스바냐 최고관리자 13-06-02
12,605 자유게시판 가락교회-70이레 논문(이름과 존재와 기능)130523-20강a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3-06-02
12,604 묻고답하기 율법과의 혼인관계 로마서 최고관리자 13-06-02
12,603 우리교회 [공지] 특강 안내-요한계시록 해석법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13-06-02
12,602 우리교회 기드온 130602 - 최고관리자 13-06-02
12,601 설교 사망과 영생(로마서 6:19-23) 로마서 최고관리자 13-06-02
12,600 우리교회 사망과 영생 130602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3-06-02
12,599 강의 [13 대구강의 9] - [피 95] - 존재의 근원 [피] 최고관리자 13-06-02
12,598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3. 5. 24) 1강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3-05-31
12,597 자유게시판 42강-에스겔15장 1-8(포도나무의 가치)130529-이 근호목사 에스겔 최고관리자 13-05-30
12,596 우리교회 포도나무의 가치 130529 에스겔 최고관리자 13-05-29
12,595 자유게시판 감사합니다. 느헤미야 최고관리자 13-05-29
12,594 강의 사도행전49강 마태복음 40강 (지정된 백성, 비유) 130528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3-05-28
12,593 자유게시판 35강-롬6장 15-18(죄에서 해방된 죄인)130526-이 근호 목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13-05-28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