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6일 봄 특강 - 요한계시록 해석법
2013년 6월 6일 봄 특강 - 요한계시록 해석법
이름 : 관리자(IP:203.90.42.222)
봄 특강 - 요한계시록 해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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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계시록 해석법
“악마는 응시하면서 나타나고 그 응시를 마중하면서 자아가 느껴진다.”
Ⅰ 서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역할은 예수님의 공로를 가로채는 일이다. 요한계시록이 존재하는 이유도 이런 짐승적인 해석을 도출하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을 접하면서 세상은 여지없이 ‘예수님의 공로’를 갈취하는 식으로 해석을 하게 마련이다. 그래야만 ‘짐승의 노예’다운 면면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야지만 새삼스럽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대로 움직인다는 사실만 노출시킬 뿐이다. 즉 인간이 요한계시록을 해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늘 추궁당할 처지에 놓여 있다는 점을 새삼 자백할 뿐이다. 이것도 성령 받은 성도에게만 해당되는 인식이다.
사람이 요한계시록을 대한다는 것은 곧 ‘언어’를 대하는 일이다. 이 특별한 언어를 마주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소속을 극명하게 드러내게 되는데 아무리 숨기려 하여도 소용없는 이유는 말씀이 인간을 상대로 말씀다운 주도권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건방지게 자신이 말씀을 해석하려 든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짐승적 속성이 노출되는데 바로 그 노출의 환경이 요한계시록이 밝혀 놓은 그 세상이다.
Ⅱ 본론
1. 언어 해석
단어의 의미는 늘 근사치를 나타낸다. 작은 차이만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더 광활한 의미와 연결될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게 바로 그 뜻이다.”고 단정 짓게 되면 이는 더 많이 연결된 미지의 의미들을 곧장 부정하는 것이다.
“이게 그것이다.”고 단정 짓는 바로 그 자체를 부정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항상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시는데 그 의미가 바로 말씀을 이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취지다. 마술사가 손에 공을 넣고 “방금 제가 손에 넣은 것이 무엇입니까?” 물을 때, 답변하는 답변에 따라서 제각기 다른 물건을 내놓는 것과 같다. 바로 그렇게 해서 인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하신다.
사람들이 “맞다”고 우기는 것은 본인이 ‘궁금해 하는 기대치’일 뿐이다. 바로 이 의식을 요한계시록에서 십자가 죽음에 근거한 성령의 복음으로 조사에 나서게 된다. 요한계시록을 비롯해서 성경의 단어는 고유적인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다른 근본적 의미에 봉사하게 되어 있다. 즉 그 자체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설명하는 설명의 양식이 된다.
특히 요한계시록에는 ‘도판 옮기기’가 성행하는데 이는 마치 옷 수선 집에서 행하는 짜깁기 양상과 같다. 구약의 역사적 표현들을 그대로 옮겨놓고 그것을 하나로 이어지게 하는 바는 그 도판 밑에서 작용하는 십자가의 힘이다. 곧 ‘어린 양의 죽음에서 나온 능력’이다.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는 이 죽음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 언어를 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게 된다. 문제의식→성경→역사(현실) 재구성→주체성
성경학자이든 원어학자이든 일반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이 원칙을 따른다. 바로 이러한 절차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이 제시하는 모든 궁금증이나 문제의식은 결국 자기 주체성 정립을 위한 것이다. 즉 자기 동일성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시도하는 자기 존재감 발산에 해당된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 빼놓고 다 사이비라고 보면 된다. 사도 요한 같은 경우는 성령에 충만함을 입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과 다르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
이 말은 아무리 대단한 권위를 발휘한다 할지라도 성령 없이 계시의 본 내용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고, 이 성령 감동은 곧 그동안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동질성을 유지하게끔 했던 모든 역사적 인식이 부정당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7에 나오는 말씀(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을 증명해줄 그 어떤 이전의 경험은 그 누구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 재림에 대해서 아무도 과거에 체험한 적이 없고, 체험한 적이 없다는 말은 인간이 그 사실을 기억에 담아 둘 수가 없고, 기억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곧 허구요 거짓말이며, 누구에게나 증명할 길이 없는 법이다. 기껏 증거는 하지만 상대방이 그 말을 곧이들을 그 어떤 바탕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인간들이 역사 속에서 내놓는 의미는 세 가지의 반복에 의해서 구축된다.
첫째 반복: 습관(강도가 굳어짐).
둘째 반복: 기억.
이 두 가지 반복으로 동일성 취득, 곧 자기와 남의 차이를 느낀다. 이것은 인식될 수 있고 포착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째 반복은 인식론적이 아니라 창조적이다. 차이를 따질 수 없다. 주체가 나서서 인식할 수 없다. 계속해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데 이로서 첫째, 둘째와는 달리 역사적인 인식과 묵시적인 창조성에서 차이가 난다. 같은 것의 반복에서 반복 없는 차이로 추상화된다(확정적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 세 번째에는 인간들이 미지의 것을 희망하는 종교적 품성이 발휘된다. 미지의 X를 무작정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이 미지의 X에 대한 온갖 성경에 나오는 묵시적 단어들을 대입해도 그것은 그저 인간들의 비-성경적 본성에서 나온 것이기에 여전히 육적이다.
이렇게 해서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모든 말씀은 인간들의 성경해석을 반대하거나 저항하거나 전치(轉置)하거나 수정하려는 시도에 의해서 실시된다. 자체적으로 딜레마와 스캔들(거침성)을 품고 나타낸다.
이러한 세상 환경은 예수님이 묵시적 신분으로 오셨다는 점에서 이미 확정되었다. 묵시적 존재이신 주님이 이 세상에 참여하므로 이 세상적인 인간의 영역은 묵시(짐승)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오직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지탱되는 세상이, 나타난 묵시적 신분자로 말미암아 새로운 지적을 당하게 된다. 이는 곧 죄의 영역이 인간이 생각한 역사적 범주 밖으로 튀어나가 확장되었다는 의미다.
이 확장으로 인하여 인간들은 진정한 진리적 의미를 놓친다. 따라잡을 수가 없다. 역사적 언어해석이 묵시적 언어를 탐사할 수가 없다. 이 확장작업은 줄곧 구약에서부터 해 오시는 방식이다. 즉 구약에서 ‘주의 오른손’이 하시는 기능의 연장이다. 출애굽기 15:6-7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나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라고 되어 있다.
‘오른 손’이란 하나님 보좌를 세상에서 감추는 방식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때는 오로지 ‘오른 손’의 기능으로만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이 일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 ‘오른 손의 역할’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원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주의 자리’란 ‘하나님의 원수’와 짝을 이루어 그 내막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시110:1-2).”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 이외 그 누구도 ‘주’가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를 색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원수’와 한통속이 되어 세상을 그대로 꾸려나갔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요한계시록과 여타의 성경을 해석해 왔고, 그 신학에서 짐승의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의 몸통이 하나님이 아니라 짐승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검토해 봐야 한다.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짐승이 시킨 일이라는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 실제로 신앙 유무를 결정하는 증거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언약의 주체로 보는 성향으로 인해 십자가 피와 대결구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악령이 인간을 장악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봐야 한다. 사람 손에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만이 인간과 관계하시는 진짜 하나님이다. 그렇지 않는 하나님은 다 엉터리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말씀은 낚시 바늘이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걸려들게 마련이다. 말씀은 계속해서 세상을 들추어내고 또 들추어낸다. 그런데 인간은 말씀으로 자기 가면을 만들고 그 가면을 활용하고 또 활용한다. 주체는 계속 뒤에 숨겨두는데 언제까지 갈 것인지는 본인도 모르다. 하지만 말씀의 계속적인 추적으로 인하여 인간이 끝까지 숨기는 그곳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사주한 묵시적 악령이 함께 있다.
이때까지 주님이 벌이시는 말씀 작업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자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뇌성이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않을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출9:29).”
2. 천지 일보가 질의한 것 다섯 가지
1) 계시록에 등장하는 네 생물은 무엇인가?
2) 계시록 11장에 등장하는 ‘두 증인’은 누구를 말하는가?
3) 계시록 12장에 ‘해를 입은 여자’는 누구를 말하는가?
4) 계시록 17장에 등장하는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은 무엇인가?
5) 계시록 18장에 만국을 무너뜨릴 ‘음행의 포도주’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상의 다섯 가지를 주식회사 천지일보가 질의해 왔다.
이 질문에서 ‘무엇인가?’ 혹은 ‘누구인가?’라는 형식은 말씀의 권위를 안다면 사용하지 말아야 될 형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이 질의하기 이전부터 줄곧 그대로 실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문 형식을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지금 네 생물은 어떤 식으로 일하고 있는가?” “지금 두 증인은 어떤 식으로 활동하는가?” “지금 해(태양)를 입은(뒤집어 쓴) 여인은 어떤 식으로 일하고 계신가?” “지금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지금 음행의 포도주는 어떤 식으로 역사하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만약에 ‘무엇인가?’ ‘누군가?’라고 질의한다면 이는 역사 속에 있는 대상이나 사물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질의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나 개념은 역사적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묵시적으로 포착되기에 역사적으로 일치성을 갖는 그런 대상은 ‘없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다. 그 이유는 그렇게 질의하는 인간 당사자는 본인을 분명히 “있다, 존재 한다”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의자가 속해있는 역사적 환경 속에는 질의 대상이 되는 대상은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의자가 그런 식으로 질의한다는 것은 자신이 속해있는 그 역사적 환경 속에 대상이 되는 물체나 사물이 같이 들어있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네 생물이 어디 있는가? 누가 본 사람이 있는가? “저 꽃병은 무엇인가?”라는 말은 성립이 되는데 이는 역사상에 있다고 느껴지는 질의자와 꽃병은 같은 역사적 존재로 눈에 띄기에 당연한 질의다. 하지만 네 생물은 어디 있는가? 없다! 따라서 질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일곱 머리에 열 뿔의 짐승이 이 세상 어느 수풀에, 어느 동물원에 있는 짐승인가? 어느 열대 우림 지역에 있는 짐승인가? 본 사람이 있는가? 없지 아니한가. 왜 없는 짐승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가? 따라서 그 질의도 성립될 수 없다.
이 세상 어느 거리에서 뜨거운 태양을 짊어지고 다니는 여인을 본 적이 있는가? 없다. 따라서 그 질의도 성립되지 아니한다.
세계 200개국의 나라 모든 사람들을 취하게 만드는 그런 포도주가 있는가? 없다. 따라서 질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죽는 장소가 소돔도 되고 혹은 예수님이 죽으신 골고다 언덕도 되는 그런 죽음을 죽은 두 증인이 있을 수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질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있지도 않은 대상을 향하여 ‘무엇인가, 누군가’라고 묻는 것은 그렇게 묻는 본인은 분명이 ‘존재하는 것이 맞고’ 따라서 그런 질의를 하는 것이 정당한 의미를 지닌다고 일방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발생된 일이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면서 어떻게 자기 외의 대상에 대해서 ‘무엇이냐, 누구냐’를 묻는가?
차라리 이렇게 질의해야 한다. “십자가 달리신 주님이여, 제가 ‘음행의 포도주’에 대해 묻는 것이 왜 잘못이며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게 만든 죄악입니까?”라고 해야 한다. 달리 말해서 “십자가 달리신 주님, 왜 저의 존재는 존재 자체가 악한 겁니까?”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질의 형식으로 자신이 알고 싶은 숨어있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것으로 역사적이면서도 묵시를 향한 열망으로 분열되어 있는 주체를 해소하려 한다. 그리고 답변을 듣고도 만족하는 법이 없다. 그 답변을 통해서 또 다시 갈라진 주체에서 쏟아져 나온 질의를 마구 내뱉으면서 끊임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요한계시록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다.
위의 다섯 가지 질문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근원적 의미를 말해주기 위해 보조적으로 봉사하는 의미에 따른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계5:1-3).”
오른 손이 하시는 기능, 바로 이것이 근원적 의미다. 이 의미는 ‘주의 원수’의 등장과 더불어 주의 주되심으로 같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은 ‘주님과 주님의 원수’간의 사태를 말해주는 보조적 의미들이 다양하게 파생되어 만들어진 십자가 사건의 더미요 뭉치다. 모든 것은 결국 십자가 복음으로 집결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17:2).”
(1) 네 생물이 지금도 벌이는 일
에스겔 당시의 보좌(성전) 의미로 되돌아가야 한다. 네 생물은 에스겔 1:10에 나오는 도판(圖板)이다. 보좌에서는 창세기 3:15에 근거해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전쟁하는 모토와 이념과 거기에 합당한 능력들이 쏟아진다. 과거에 있던 그림을 다른 그림과 엮어 계시를 완료시키는 힘은 모두 십자가 죽으심의 능력이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03:19-21).”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시74:7).”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시74:10).”
따라서 십자가를 야기 시킨 그 원수를 색출하고 벌하기 위해 네 생물은 ‘주의 이름’을 모시고 곳곳에서 복음과 비-복음의 대결구조로 몰아세우기 위해 이미 천하를 장악하고 있다. ‘생물’을 ‘천사’라고 표기하는 것은 원래 ‘생물’이라고 표기한 것에 대해 의식되지 못한 여분의 의미연결을 임의로 삭제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살려두어야 한다.
(2) 계시록 11장에 등장하는 ‘두 증인’은 지금도 어떻게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가?
스가랴 4장에 나오는 두 감람나무의 기능을 하게 된다. 두 감람나무의 기능이란 이 세상 모든 장소를 예수님이 억울하게 죽어 피 흘린 자리와 이 세상에 10가지 재앙이 떨어진 공간으로 만드는 기능을 하게 된다. 즉 역사적으로 알고 있던 공간을 묵시적 신분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므로서 묵시적 공간으로 전환되었음을 통보하는 일을 하게 된다.
(3) 해를 입은 여자는 지금도 무슨 일을 하는가?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구성(창조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뱀에 의해서 더럽혀진 음녀와 대비되는 시원적 의미를 품고 있다. ‘해를 입었다’는 것은 모든 창조물에 대한 창조의 능력이 본래의 근원적 의미가 그리스도를 낳는 여인의 모습에 집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능력과 권한이 다 그리스도를 위한 창조요 이스라엘을 위한 창조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방침을 훼방하는 것들과의 싸움판이 이루어지게 한다. 이처럼 영적 전쟁과 투쟁이란 시원적 의미를 품고 싸우는 싸움이다.
(4)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은 무슨 역할을 이 시대에 하게 되는가?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슥1:18-19).”
예수님의 증인을 모두 순교자로 만들기 위해,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현실임을 말하기 위해서 모든 국가는 제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구약에 예언된 바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가담되기 위한 구체적 제국이 다니엘 7장에 나온다. 로마다.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7-8절).”
이 짐승은 다니엘 7:9부터 나오는 영원한 보좌와 대비되는 지상의 짐승 제국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따라서 바벨론으로부터 시작된 짐승의 실체가 인자(人子)되는 다니엘을 건드림으로 그 실체는 참된 인자로 오신 메시아와 궁극적인 대결구조를 보여주는 것으로 마감이 된다. 역사란 이 묵시적 내용을 세상 끝날까지 반복하고 되풀이하는 성질을 담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최종적으로 바벨론 제국을 대표해서 로마가 관여하므로 세상 만국은 십자가 죽으심 앞에서 그 성격이 확정되었다. 따라서 앞으로의 모든 만국은 제 2의, 제 3의 로마 역할을 하게 된다. 반면에 예수님의 죽으심만을 증거하는 성령 받은 자들은 계속 나타나면서 순교자로 묵시적 임무를 다하면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뿔이란 구약에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위한 기능을 발휘하는 지도자, 곧 왕이다. 일곱 머리란 로마의 일곱 언덕을 말하고 열 뿔이란 초대 교회 성도들을 핍박한 대표자 10왕을 의미한다.
이처럼 로마는 바벨론 나라의 역할과 연계하면서 지나온 세월을 설명하는 최종 해석자로서의 모델이 된다. 하지만 이 나라를 ‘로마’로 표기해서는 아니 되는 이유는 짐승은 짐승으로 되돌아가야 비로소 복음적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세상 대중들은 자꾸만 복음보다는 힘을 얻고자 하기에 새로운 지도자를 찾지만 그들 간의 어떠한 경쟁에서도 악마의 종으로서 성도를 핍박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인간은 국가와 왕으로서 신과 그 나라에 대한 욕망이 이상적인 국가에 대한 집착을 대체한다. 짐승이란 일종의 병마개 같은 것이다. 지극히 차분하고 정돈된 장벽. 그 자체로서 치밀한 통일성 있는 체제를 인수받는다. 사회적인 규약과 규율을 드러낸다.
거기에 비해 그리스도는 산만하고 비-체제적이다. 즉 짐승의 체제를 닮지 않는다. 세상이 전반적으로 짐승에 의해 접수되므로 성도의 구성은 일체의 세상적인 요소로 엮여지지 않는다. 모든 게 우연적이고 돌발적이다. 즉 머리와 뿔이 없다.
(5) 계시록 18장에 만국을 무너뜨린 음행의 포도주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분노의 술잔에 담긴 것이 저주를 부어주는 포도주이다. 분노란 이미 전쟁 중이라는 뜻이다. 분노 없는 전쟁은 없다. 분노와 분노의 마주침은 곧 심판 진행을 뜻한다. 이 세상은 이미 주님이 주인으로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음녀란 주인의 것으로부터 이탈된 이방나라를 뜻한다.
남자와 여자로 인하여 성립되는 육적인 생육의 방식이 묵시적으로는 묵시 세계의 얼룩으로 장식 된다. 혼란스러운 영적 전쟁이 표면에는 얼룩으로 드러나는데 곧 성의 타락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처벌은 범죄에 의해 초래된 손상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징벌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의 기괴한 반복이다.
Ⅲ. 결론
역사의 재구성은 자신을 필히 구원받은 자로 규정할 때나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필히 구원받은 자라는 사실이 보편적인 성경 해석으로 뒷받침이 가능한가?
경험을 표현하는 언어로서 경험을 만들어내는 비-경험적 실체를 표현할 때, 인간의 모든 의미는 거부당해야만 하는 의미에 해당된다. 십자가 사건은 그런 식으로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체를 생각하는 순간이 짐승으로부터 진압되는 순간이다. 따라서 모든 해석은 표현된 단어 형식을 깨거나 분석대상으로 삼지 못하고 도리어 인간 세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단어 이해도가 부정적으로 평가받도록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한다.
요한복음 18:38에 보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진리가 무엇이냐?”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없다. 예수님은 사전에 답변을 내놓았다. 요한복음 18:37에서 “나는 곧 진리에 대해서 증거하러 왔노라.” 이렇게 미리 답변을 제시하므로서 그 답변에 맞는 질의에서 인간은 이미 배제시켜버렸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질의해야 될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언해놓으시고 벌이신 일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마치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라는 질의를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사람들이 자꾸만 질의하는 것은 자체적인 평화를 구축해서 자신의 신상을 좋게 하려는 생존 본능에서 나온 구원욕구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주되심, 곧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금지조치가 이 땅에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마태복음 10:34-39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되어 있다.
이미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기 세상을 구축해오고 있다. 하지만 정작 부활하신 주님이 등장할 때, 인간은 그 주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사도행전 9:4-5에 보면,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단어나 구절에 대해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질의하는 것 자체가 주님에 대한 핍박이요 모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은 인간이 처리할 수 없고 인간들이 벗어날 수 없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여된 또 다른 실체에 의해서 진행된 사태에 인간들이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을 ‘언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인간들의 사회에서 사용하는 공통된 인식과 소통의 장으로 표현될 때 사람들의 본연의 패역함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모든 인간들이 관여되었음을 하늘나라에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기어이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태도가 하늘나라에 대해서 공격하는 하나님의 원수와 같은 패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계시록뿐 아니라 모든 성경 한 단어 한 단어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원수임을 유발시키는 계기를 조성한다.
질의할 자격도 없으면서 계속해서 질의하게 만든다. 그래야 우리가 전적으로 저주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이 공식화되기 때문이다. 즉 구원받고자 하는 자제할 수 없는 본능이 하나님의 모든 금지 조치에 대항하는 악마의 본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곧 두 증인이 알려주는 사항이다.
자신의 주체성을 고집하고, 십자가 죽음 사건을 애써 외면하고 그것을 우회하여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바탕을 자꾸만 종교본능으로 생산해 내는 자들, 바로 이것이 저주받아야 될 인간이다.
십자가 대체용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자아성에 대한 끈질긴 집념이다. “내가 알았습니다. 내가 행했습니다. 내가 믿었습니다. 내가 사랑했습니다. 내가 소망했습니다. 그러니 나를 천국에 넣어주세요.”라는 집념 말이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전면적인 차단을 감행한다. 이것이 새언약의 위력이요 효과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4-15).”
상징? 신화? 아니다! 일상적인 용어들이기에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도로 인간들에게 살해당했음을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일상의 생활 말고 요한계시록에 맞는 특별한 행위를 따로 구상할 하등의 필요가 없다.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을 접하는 순간 인간들은 상상을 하게 되는데 뭘 상상하던 그것 모두는 인간들의 곡해와 오류의 결과물일 뿐이다. 따라잡을 생각을 말아야 한다. 그 어떤 개선된 종교 단체나 개혁에 개혁을 반복해도 교회라는 이름의 조직체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제 2, 제 3의 자기를 신봉하기 위한 우상체이며 십자가 사건을 대체하는 대체용으로 등장할 더러운 자랑질에 불과하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가능하다. 그것만이 구원의 능력이요 성령의 능력이다.
‘신기함’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하나님은 결코 신기한 일을 행하시지 않는다. 단지 우리들이 신기한 일이 일어나기를 학수고대 하는데, 그 이유는 평범한 일은 자신이 행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한 일은 일상 깊숙이 박혀있는 사소한 성냄이나 분노, 미움 같은 것들조차 우리 인간이 이겨내지 못하고 있음을 통해서 밝혀진다. 즉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은 우리들이 전혀 하나님 말씀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성경 말씀을 놓고 인간과 성령이 경쟁하신다. 성령께서는 이미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들의 입술에서 얼마나 더러운 해석들이 나오는지를 지켜보고 계신다. 인간은 역사적 의미를 차리면서 우회로를 통해서 자작극을 만든다.
-교회마다 자작극으로 넘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관리자(IP:203.♡.42.222)
13-06-13 08:27
20130606 봄특강a - 요한계시록 해석법
(강의 : 이근호 목사)
요한계시록 들어가기 전에 신명기 9장부터 보겠습니다. 거기에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여기 이스라엘 속에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유일하게 내통을 해요. 유일하게 내통을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역할, 이스라엘을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신명기 9장을 요한계시록 하기 전에 왜 거론하느냐 하면, 여기 이스라엘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으면 안 돼요. 어디 있다면 찾아올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이 말도 어려운 것이 이스라엘에 가보면 이스라엘만 있지 이스라엘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고 돼있다고. 하나님이 분명히 나 여기 있다는 식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기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이 뭔가 움직이고 있다. 움직일 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이 움직이는 흔적을 통해서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가 되는 겁니다.
정리해보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할 때 정답은 여기에는 아니 계시다고 언급해줘야 되는 거예요. 이런 데는 하나님이 아니 계십니다. 그러면 어디에는 아니 계신다고 할 때 이 어디는 어디냐 하면, 인간의 자리에는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적인 상식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모든 것을 식물과 동물과 바다에 있는 고기마저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니까 하나님이 바다 밑에도 계실 것이 맞는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진짜 하나님의 뜻은 물고기 움직이는 걸 아무리 연구한다고 나타나지 않아요. 하나님 뜻이 나타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아니 계신 곳을 추려내는 방식으로. 추리고 추려 나온 방식은 바로 모세가 있는 자리, 곧 이스라엘 자리에만 하나님이 나타나는 겁니다. 나타나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걸 하나님이 계신 것과 같은 것으로 쳐줄 수 있느냐는 그 문제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한다고 식으로 처리가 돼요.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실시되는 게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실시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언약의 상대자가 되니까 이스라엘은 ‘을’이 되는 거죠. ‘갑’은 어디 있습니까? 갑은 없는 거죠. 갑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데 갑의 지시를 받고 을이 움직이니까 이스라엘만 있을 뿐이죠.
요한계시록을 하면서 이스라엘을 언급하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할 때는 먼저 요한계시록이 나올 수 있는 자리가 옛날 언약의 자리와 똑같은 원칙으로 이스라엘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야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심으로 하지 않는 다른 곳에서는 요한계시록을 백독, 만독 해도 요한계시록을 모른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면 옛날에 이스라엘이 있었는데 거기에 모세가 있었던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스라엘을 어디 있느냐, 어디서 만나느냐?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구약에는 특정 지점이 있어요. 가나안 땅이라는. 신약에는 어디 있느냐는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때그때마다 이스라엘 되게 만들어내기 때문에 어디 있느냐가 성립이 안 돼요.
예를 들어서 광복절 밤에 여의도에서 불꽃놀이를 했다. 그러면 8월 16일에 가면 불꽃놀이 합니까? 안 하죠. 이미 끝났잖아요. 그런데 분명히 불꽃놀이 있었거든요. 어디 있느냐? 이미 끝났어. 이미 사건 종결됐어. 이러면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겁니다. 신약에서 이스라엘, 교회라는 것은 항상 사건으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어디에 교회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어디 있느냐로 설명할 수 없고, 교회가 어떻게 등장하고 나타나느냐? 그런 식으로만 교회란 말을 쓸 수 있지 교회가 어디 있고, 몇 명이냐는 것은 신약에는 쓸 수 없는 용어에요. 교회와 만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그 교회가 어디 있느냐?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어디 있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될 정도로 피로 사신 거예요.
우발성인데요. 이런 신약에 교회가 우발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구약 때 이스라엘이 이미 한계를 보였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동행하면서 구약에는 여기 있다가 되거든요. 이젠 여기 있다는 것을 해체시켜서 하나님의 언약을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마지막 때 신약 시대입니다. 구약에는 여기 있다. 어떻게 움직인다. 신약에 오면 여기 있다, 움직인다는 게 성립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이스라엘 되게 할 때에만 이스라엘 되고, 교회되게 할 때만 교회되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그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이렇게 정리가 되지요.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습니까? 구약에는 이스라엘 빼놓고 잘라내는 작업을 해서 이스라엘만 있다는 그 시절이 있었다. 특정 공간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런데 신약에 보면 그 누구라도 요한계시록을 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남아있는 건 뭐냐? 그냥 요한계시록만 영원히 남아있을 뿐이죠. 말씀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디 있느냐? 요한계시록이 실현되는 그 순간, 사건에 요한계시록이 적용되면서 거기서 교회가 발생되게 돼있죠.
만약에 구약적 인식이라면, 구약적 인식은 신약에 통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서 구약적 인식이 이라면, 여기 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한다. 그러면 누가 갑이냐 하면, 교회가 갑이 되고, 요한계시록이 을이 되죠. 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주셨다고 되는 겁니다. 이러한 실험은 구약에서 이미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나님께 모세가 있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제가 요한계시록 하면서 신명기를 자꾸 언급하는 이유가,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위해서 홍해에서 건져냈다. 이러한 인식이 결국은 신약 시대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나 악마의 사주 역할,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바로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모른다. 어디 있다고 말하지 마라. 똑같은 질문입니다. 악마가 어디 있느냐? 모른다. 똑같은 거예요. 악마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네 아비는 마귀다. 악마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악마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한 그들이 악마였어요. 그게 안 되면 요한계시록의 짐승 개념이 전혀 풀리지 않습니다.
이미 실패로 끝난 거예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여기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한다는 시도는 그 자체가 단순히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고 실패이면서도 실패 아닌 양 여기면서 오히려 실패로 규정하는 쪽을 공격하는 식으로 자기의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하면서 구약이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다시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의 뜻을 보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접하고 다른 민족은 하나님의 뜻이 없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느냐? 하나님의 뜻이 함께 있었지만 언약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여긴 본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본성과 속성을 발휘하면서 자기 나라와 함께 망해버렸다. 그렇다면 구약 사람들의 잘못은 뭐냐? 자기가 갑이고, 하나님은 을이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교회답게 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주신 것이라는 그 사고방식이 옛날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반복할 뿐이고 실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실패를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교회라는 것이 짐승의 앞잡이라는 것이 폭로되면서 진짜 요한계시록이 요한계시록답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략은 차질이 없는 거예요.
여기 교재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교재 초반에 읽어보시면 이 단어가 하나 나올 거예요. ‘도판’이란 말. 도판이란 말은 그림으로 된 판때기란 뜻이잖아요. 여기서 짜깁기로 표현했는데 이 표현도 맞지만 더 진실에 가까운 표현은 지구의 지각이 쭈그러들어서 맨틀에서 올라오는 마그마에 의해서 부유하는 하는 이동하는, 연못의 꽃이 피었는데 바람 부는 데로 이동하듯이 지각들이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서로 어울리면서 충돌하면서 지진이 발생하거든요.
뜯어낸 지각들이 하나의 도판이라면 전혀 논리적으로 안 맞는 도판들이 옆에 있으면서 뭔가를 보여주게 돼요. 구약에 그 도판들의 특징이 뭐냐? 전부다 구약 역사의 쪼가리들입니다. 신명기를 언급하는 이유가 구약부터 제대로 이해하자 이 말입니다. 구약부터 만들어낸 역사를 요한계시록은 잘라요. 맞지도 않는 그림들을 바로 옆에 놔둬버립니다. 이것은 구약적인 안목, 역사적 안목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자체를 주께서 차단시키는 겁니다. 모자이크가 맞지를 않아요.
요한계시록 그림이 있다면 A는 B와 만나고, B는 C와 만나야 되는데 이것이 갈가리 찢어져서 A 옆에 C가 있고, Z가 Y에 붙어 있고, 이렇게 돼있단 말이죠. 구약 역사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돼있는데 A에서 B, B에서 C, 시간 따라 흘러가는데 B는 따로 쪼개서 나오고, C는 따로 쪼개져 나와서 C는 A와 만나고, A는 X와 만나고 Y와 만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의 모든 문장들이. 그걸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맞습니까? 문법 자체가 역사적 토대 위에서 돼있는데. 안 맞지요.
지금 제가 언급하는 것은 왜 그렇게 하느냐? 왜 짜깁기하듯이 안 맞는 도판으로 요한계시록에 깔아놓는 이유가 뭐냐? 그걸 지금부터 설명하고자 합니다. 신명기 9장을 봅시다. 이스라엘 나오고, 2절에 보면, “그 백성은 네가 아는 바 장대한 아낙 자손이라” 가나안 땅에 아낙 자손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힘이 센 거인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거기를 차지해서 들어가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미리 40일 동안 정탐을 하고는 그들은 낙담을 합니다. 힘으로 못 이깁니다. 힘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다음에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제 이야기 아니죠. 신명기 9장 2절에 나오는 분명한 이야기지요. 그 다음에 4절에 보게 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여기 첫 번째 ‘힘’이 나오고, 두 번째 ‘의’가 나오죠. 힘과 의를 대비를 시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우리가 해석할 때 힘을 얻기 위해서 해석해야 됩니까? 의를 알기 위해서 해석해야 됩니까? 어느 쪽입니까? 천국은 힘쓰면 들어갈 수 있습니까? 못 들어가지요. 그러면 평소에 이 세상에서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한다는 자체가 터무니없는 짓이죠.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 말은 약속의 땅, 천국이 힘을 원치 않는 세계라는 것을 누가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상에서는 힘없이는 못 살거든요.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그만큼 살 힘이 축적돼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천국에는 남아도는 힘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그런데 천국은 힘을 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낙 자손은 천국에 못 가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국에 못 가는 아낙 자손을 그렇게 겁내고 있고 부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공격해야 될 이스라엘이나 공격당할 아낙 자손이나 둘 다 똑같은 질이에요. 천국과는 상관없는 족속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익히 아시고 일부러 아낙 자손을 가나안 땅에 배치해놓은 거예요. 천국 가는 이스라엘이 정작 천국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들춰내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천국 가고, 구원받고, 복을 받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들은풍월로 많이 들었는데 정작 하나님과 함께 사는 세상은 이룰 수 없는 그런 조건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 이스라엘입니다. 그것을 주께서는 들춰내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명기가 그 당시 이스라엘을 들춰낸다면 요한계시록은 오늘날 우리를 들춰내는 거예요. 이 땅에 우리가 산다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 살 힘이 있기 때문에 살 힘 덕분으로 살아간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영생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은 오래 산다. 영원히 죽지 않는 걸 영생이라고 보는데 성경, 특히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어떤 인물입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잠자고 있으면 영생 얻으면 오랫동안 살 것이다.” 할 때 영생은 조금도 낯설지 않은 개념인데 영생이란 이름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영생이 그 사람 자체라는 인식은 우리한테는 상당히 낯선 인식이 되죠. 그런데 성경에는 여러분 알다시피 영생이 이 땅에 오셔서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그분이 영생이에요. 영생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아저씨가 영생이에요. 이게 납득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목숨이 계속 이어지는 걸 영생이라고 생각하는데 목숨이 힘이거든요. 어떤 아저씨가 나, 영생. 내가 생명이고 길이고 진리야. 생명이 돌아다닐 때 오래 살고 싶은 내가 그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쪽에서는 없는 거예요. 따라서 없다는 말은 우리는 영생과 상관없는 존재에요. 영생을 얻을 수도 없지요. 그 사람은 잡아서 먹는다고 해서 안 되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약을 올리듯이 내 살을 먹으라고 하니까 잘라서 따로 굽고 지지고 이렇게 먹는다고 영생이 아니다.
영생 자체가 현재 있는 내 목숨은 부지한 채 오래 간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영생과 연관되지 않는 영생이라고 따로 돌아다닐 때는 그동안 우리가 영생을 찾았다는 자체가 부질없는 종교적인 욕구에 지나지 않는구나. 일종의 환상이죠. 태어날 때부터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데 죽기 전에 뭔가 너무 한이 맺혀서 영생이란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교회 세우고 사람 끌어 모으고 했을 뿐이지 하여튼 우리는 영생은 아니에요. 다른 분이 영생입니다.
생명나무가 나무로 돼있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겁니까. 생명나무가 나무로 돼있기 때문에 나무만 치우면 영생은 못 얻게 돼있어요. 치워버렸는데 없잖아요. 옛날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할머니가 지혜롭게 제사 드릴 때마다 문어와 중요하고 비싼 것은 일년이 뭡니까, 삼년 씩 계속 다락에 감춰놓고 작년에 한 것을 또 내놓고. 감추니까 더 먹고 싶은 것 있죠. 만약에 문어가 영생이라면 우리는 맛도 못 봤어요. 그걸 치워놓으니까 아무리 살고 싶어도 영생 자체가 이미 절단된 상태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그 절단된 상태를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세상은 힘의 세계, 힘의 세상입니다. 힘의 세상에서 요한계시록을 본다는 것은, 현재 힘을 더 얻기 위한 힘의 세상이라고 요한계시록에서 규정했잖아요. 규정했기 때문에 힘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나나 여러분들이 요한계시록으로 영생 얻겠다는 것은 힘으로 영생 얻겠다는 짓거리밖에 안 되는 거예요.
천국에 갈 수도 없는 것들이 천국 가겠다고 시도한다는 자체가 힘의 세계의 범주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기능을 할 뿐이에요. 그래서 “너는 이 세상이야.”라고 확인시켜 주는 작업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의 위력이란 말이죠. 이 세상을 힘의 세계로 만드는 요한계시록 하기 위해서 밑에 도판을 까는데 그 도판이 신명기 도판이란 말이죠. 이제 제가 도판이야기를 끄집어낸 이유를 아시겠지요.
신명기 9장에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배치하기를 아낙 자손을 가나안 땅에 배치함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낙담케 하는 겁니다. 낙담한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없다는 것이고, 평소에 이스라엘이 힘을 원했다는 것이고, 결국 이스라엘이 원하는 천국이라는 것은 힘 센 하나님을 평소에 원했다는 것이고 이 두 가지가 합쳐서 요한계시록에 들어오면 모두 다 악마에 소속돼있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과 고백을 한다 이 말입니다.
어느 교단이든 어느 단체든 요한계시록 해석하면서 “여러분, 우리 힘 뺍시다.” 이런 쪽으로 해석하는 게 없어요. 어떻게 하면 지금 갖고 있는 힘을 유지하면서 천국까지 들어가느냐? 그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요한계시록 해석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 있잖아요. 일곱 교회 해석할 때 보세요. 일곱 교회가 이렇게 책망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 바짝 차려서 이러한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하게 되면 우리 교회는 나름대로 존속하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모아놓은 힘은 누수 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고 커질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렇게 해석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 요한계시록 본래의 취지라는 겁니다. 그래야 교회가 짐승의 앞잡이라는 게 들통 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신명기를 몰라서 그래요.
신명기 9장에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아낙 자손을 배치한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 가는 것이다. 의가 힘으로 전환되는 것을 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신명기 9장에 보면, 너희들은 원래 목이 곧은 백성이다.
5절에 보면,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그 다음에 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목이 곧은 백성이니까 죄라는 뜻이고 죄라는 것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고 죄기 때문에 반드시 힘을 얻고자 힘을 탐내게 되고 힘을 그리워하게 돼있는 속성을 감출 길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의를 줄까?” “아닙니다. 헌금을 주시옵소서. 교인들 주시옵소서.” 구조가 이렇게 돼있단 말이죠. 더러운 구조가.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더러운 죄성을 주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로 아름답게 수놓아서 오려서 요한계시록을 장식하는데 밑에 도판으로 까는 거예요.
제가 신발을 샀는데 급하게 사느라고 컸어요. 그래서 한두 달 동안 마음고생을 했지요. 신발을 신을 때마다 신발이 미워지는 겁니다. 신발 수선하는데 갔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한 달 동안 입원해서 한 달 더 기다렸어요. 그래서 어제 드디어 그 사람이 일 시작해서 가죽을 대충 오려서 앞부분에 집어넣으니까 딱 맞아요. 그래서 삼천 원 받았어요.
밑에 도판을 까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이라는 도판이 깔렸다는 걸 모르고 현대 21세기 관점에서 힘을 얻고자 하는 그런 본성을 감추지 않는 채 요한계시록에 덤벼들어서 천국 가는데 힘 달라고 요한계시록을 보고 있단 말이죠. 처음부터 신명기에서는 너희가 목이 곧은 백성이고 의롭지 않다고 이미 판정 났잖아요.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된다니까 의를 양으로 끌어 모으려고 또 죄의 본성을 발휘하는 겁니다. “너, 의를 얼마치 모았어? 난 이만큼 모았어.”
만나라는 것이 많이 저축하라고 준 만나가 아닙니다. 광야에서. 만나라는 것은 저축할 필요가 없는 하늘에서 온 음식이에요. 하늘나라에는 저축 왕이 없다 이 말입니다. 은행도 없고 보관금고도 필요 없다는 거예요. 하늘나라에 도둑놈이 없는 이유가 뭘 보관할 게 있어야 도둑놈이 있지. 자기 게 없는데. 자기 것이 없는 천국에 가려면 이 땅에서부터 자기 것이 없어야 된다는 걸 훈련을 해야 되는데 이 땅에서는 훈련이 안 돼요. 왜냐하면 내 것으로 내가 살기 때문에 내 것이라는 게 있어야 된다고. 내 의, 내 믿음, 내 소망 등 전부 앞에다 내 것을 붙이기 때문에 내 것 빼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요한계시록에서 일괄적으로 마음껏 갖고 있으라고 해놓고 시커먼 콜타르를 부어버려요. 모든 게 죄가 되도록. 마음껏 가져. 얼마나 가지든지 상관없이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산다고 자랑질하지 마세요. 그것도 죄에요. 물론 잘 사는 것도 죄고. 적당하게 사는 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신명기에 나타나는 언약의 본성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의는 오직 언약에서 나오기 때문에 언약 빼놓고 의라고 간주 안 할 작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심을 했어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구원하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그런 죄 많은 이스라엘을 가지고 다녀야 역사 배후에 있는 이름 모를 세력자가 나오잖아요. 그걸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짐승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이게 이 세상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재 5페이지에 보면, 교재가 있으면 참 강의하기 편해요. 그냥 읽기만 하면 되니까. [네 생물이 어디 있는가? 누가 본 사람이 있는가? “저 꽃병은 무엇인가?”라는 말은 성립이 되는데 이는 역사상에 있다고 느껴지는 질의자와 꽃병은 같은 역사적 존재로 눈에 띄기에 당연한 질의다. 하지만 네 생물은 어디 있는가? 없다! 따라서 질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일곱 머리에 열 뿔의 짐승이 이 세상 어느 수풀에, 어느 동물원에 있는 짐승인가? 어느 열대 우림 지역에 있는 짐승인가? 본 사람이 있는가? 없지 아니한가. 왜 없는 짐승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가? 따라서 그 질의도 성립될 수 없다.]
꽃병과 질문하는 사람이 같은 역사에 존재해 있잖아요. 같이 있잖아요. 눈에 띠잖아요. 네 생물은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없는 걸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안 되지요. 있어야 묻지. 여기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이 이 세상 어느 수풀에, 어느 동물원에 있는 짐승입니까? 이 동물원 가봤어요? 없지요. 어느 열대우림에 있는 짐승입니까? 본 사람 있습니까? 본 사람이 없는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자체가 말도 안 되죠. 왜 없는 짐승에 대해서 왈가왈부합니까? 따라서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악마를 짐승이라고 표현한 것은, 짐승은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요. 반려동물은 이름을 붙이는데 그것은 가깝기 때문에 그렇지, 지리산에서 곰 만나면, “영식이 아니냐?” 이럴 수는 없단 말이죠. 이름은 인간에게만 붙일 자격이 있고 짐승은 붙일 자격이 없다는 그 인간이 짐승을 짐승이라 부르기 때문에 짐승 이름이 없는 거예요.
왜 그렇게 이름이 없느냐 하면, 이름이 없는 분이 척결해야 되지 이름이 있는 인간은 이름 없는 존재에 대해서 대항할 수 없습니다. 천로역정 글 읽어보셨지요. 거기서 크리스천이 칼로 짐승 찔러 죽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에요. 그건 지가 천사보다 더 세다는. 천사도 짐승에 대해서 갈지도 못했습니다. 지가 뭔데 칼 들고 찌릅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님도 짐승을 이기지 못했어요. 이 세상에 계실 때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왜 그러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을 때부터 인간은 짐승의 하수인으로 돼있기 때문에 갑은 짐승이고 을이 인간이거든요. 어떻게 을이 갑을 이깁니까.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도판으로 까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막상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똑같은 인간을 상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잔득 풀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저 적들은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가 이스라엘의 고민거리인데 하나님은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해요. 저 적을 두려워하지 마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지 너희에게 속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자꾸 해버려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분명히 같이 봤어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본 게 뭐예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눈이 네 개입니까. 똑같이 눈이 두 개에요. 시력이 5.6입니까? 1.5 됐는지 모르겠어요. 똑같이 봤어요. 똑같이 그들은 우리보다 힘세고 우리는 메뚜기 같고.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낙담하고 울고불고 통곡하고 난리 났어요. 왜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갑시다. 승리합니다.” 왜 그런 망발을 했어요? 그들은 뭘 봤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