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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망과 영생 130602우리교회히브리서

사망과 영생 130602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사망과 영생(로마서 6:19-23)

이근호

13-06-02 13:30

사망과 영생

2013년 6월 2일 본문 말씀: 로마서 6:19-23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6: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사망이란 말씀에 위배했을 때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말씀이 성취했을 때 주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망이나 영생이나 모두 ‘주어진다’는 방식으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자신을 죽이는 것이 사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곧 인간이 스스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이 결코 영생얻는 방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어진다’는 것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내린 조치에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망과 영생을 결정하는 시스템이나 체제에 인간이 함부로 관여하거나 수정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망이나 영생에 있어 이미 정해진 코스가 확정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정해진 코스에서 인간은 ‘육신의 연약’이라는 모습으로 관여되게 됩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인간들 끼리 다양성을 자랑합니다. 나는 너와 다르고, 너는 나와 다른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다름에서 오는 개성으로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겁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사회에서의 인간의 존재의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 있어, 복음 앞에서는 인간 앞에 붙는 그 어떤 형용사도 소용없습니다. 즉 ‘재빠른 나’ 혹은 ‘인품좋은 나’ 혹은 ‘성실한 나’,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나’ 같은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남녀노서나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냥 ‘육신’으로 불리워집니다. 그냥 육신이 아닙니다. ‘연약한 육신’입니다.

육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사람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원래 육신이 약하면 살만큼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육신은 그냥 육신 자체의 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 )에 약하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2:14-15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악마에 약한 겁니다. 이는 아무리 애쓰고 몸부림쳐도 악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겁니다. 악마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이 육신은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됩니다. “살려주세요. 살고 싶어도. 기어이 살아남고야 말리라!”라고 말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인간들이 결정하거나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리게 됩니다.

말씀과 무관하게, 진짜 하나님의 의와는 무관하게 나름대로 연약한 육신이 빚어내는 체제 안에서 일방적으로 죽음과 삶을 결정짓게 됩니다. 그러니 이런 모습 자체가 악마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새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살고 싶은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육신과 영생 사이에 인위적으로 것으로 연결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 시도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문화와 문명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인류는 죽은 자, 곧 죽은 조상과 살아있는 자신의 육신과 연결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무당입니다. 무당은 언어를 만든 전문가집단입니다. 이들은 신의 계시를 새겨서 그것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므로서 영적 세계까지 언어에 묶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죽은 조상과 산 사람과의 소통은 자기네들 선에서 성사된다고 주장합니다. 죽은 조상신을 뒤집어씌쓰게 되면 죽은 사람의 의지와 뜻을 산 사람에게 전달하고, 산 사람들이 바치는 값진 예물과 제물과 성의는 죽은 세계로 전달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들이 만들어낸 신도 포획하는 언어는 그 후에 정치적 왕이나 귀족들이 국가 체제를 형성하면서 이 무당의 집무를 그들이 맡게 됩니다.

이로서 무당의 언어는 왕의 신의 아들, 천자의 아들로 간주하는 법으로 전환합니다. 즉 왕을 옹호하기 위해 만든 그 법에 백성들이 준수하게 되면 그 나라는 신으로부터 계속해서 축복을 받는 나라가 되어 번영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피해서 영생쪽으로 자아를 이동하시는 방식은 ‘보관’의 방식을 동원합니다. 보관이란 자신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작물이나 기타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 보관할 것 속에서 ‘정신’도 담겨 있게 됩니다. 쉽게 깨어지는 그릇에 물고기나 작물이나 사냥 고기 같은 것은 그릇과 더불어 쉽게 해체됩니다.

따라서 정신적으로 인간들은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알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보다 딱딱한 그릇이나 단단한 그릇이 발달되면서 정신마저 오래 보관이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즉 정신은 법의 정신으로 보관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는 법령과 관습의 후대로의 전달은 곧 정신의 전달과 같은 겁니다.

이것이 국가의 발달성입니다. 왕을 구심점으로 하는 국가의 성립은 그 안에서 왕으로 정점이 보아지는 세밀하고 치밀한 법체제로 인하여 사람들은 죽음을 잠시 잊고 삶의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마치 지금의 영생의 세계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도 바로 이런 류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십계명을 중심으로 그들은 나라가 세웠습니다. 그리고 왕 위주의 체제 속에서 신으로부터 뜻과 계시를 왕으로부터 부여받으면서 나랏 살림을 꾸려나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친절한 함정’에 빠진 겁니다.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은 그들이 필히 망해야만 하는 이유를 미리 주신 것입니다.

말씀성취는 결코 그들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생을 갖고 오실 메시아는 그들의 율법 준수 정신으로 말미암아 살해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의로부터의 자유란’ 진짜 의로부터 끊어진 상태에서 그들은 의가 뭔지를 전혀 모른다는 말입니다.

의를 모르게 되니 정작 참된 의가 나타나셔도 그들은 그분은 귀신들인 악인이라고 여기고 사형으로서 뒤처리했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참 메시아가 오실 때만 고대했습니다. 열차가 오지 않는 대합실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움집해있어도 몽땅 소용없는 짓입니다. 말씀을 성취하기에 필히 영생을 일방적으로 제공해주실 메시아는 도리어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따라서 영생은 오직 영생받기도 작정한 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호명받으므로 얻게 됩니다. 이 때 언약완성으로 나타난 영생은 성도의 육신에다 ‘사망에서 영생’이라는 작업을 구현하시면서 바느질하듯이 말씀으로 꿰매게 됩니다. 즉 보관이 아니라 피묻은 바느질을 당하는 자가 곧 의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잘남을 보관한 모든 것이 십자가의 피로 누벼져서 모든 것이 말씀이 바늘자국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6-05 12:40

36강-롬6장 19-23(사망과 영생)1306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6장 19절에서 23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7페이지입니다.

로마서 6:19-23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사망이라 하는 것은 말씀에 위배되었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 사망입니다. 말씀에 위배될 때 주어진 것이 사망이라면 영생은 말씀이 성취될 때 주어지는 것이 영생입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면 사망은 자살이 아니지요. 사망은 주어지는 겁니다. 사망은 살고 싶다고 해서 안 오는 것이 아니고 죽고 싶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사망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대형마트의 계산대를 통과해야 되는 것과 같아요. 물건 사서 카트에 싣고 막 샛길로 계산도 안하고 주차장으로 가면 안 되잖아요. 인생을 살았으면 반드시 계산대를 통과해야 됩니다.

계산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카운터의 여직원이 하지요.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 사망이라는 말씀에 위배되었을 때 처리하는 것은 우리 담당이 아니고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사망이라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해서 내가 죽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사망입니다. 안 죽고 싶어도 죽어야 돼요. 죽는 것이 분명히 맞기는 맞는데 그것보다 더 확실한 현실은 누가 날 죽인다는 그것이 더 확실한 현실입니다. 살다보면 죽겠지, 이것은 맞는 말인데요. 내가 스스로 늙어서 무너져 죽는 것이 아니고요 누가 노리듯이 죽인다는 겁니다.

사망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에 위배한 것에 대해서 죄의 값은 사망이니까 그 값을 물어서 반드시 죽이는 것이라면 영생이라 하는 것도 내가 영생 얻어야지, 하지 마세요. 영생이란 것도 살다보면 주어지는 겁니다. 그냥 살아가시면 살아가는 그것이 영생으로 가는 그 자갈길 위를 그냥 가시는 것이 돼요. 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영생으로, 영생으로 주께서 이끄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영생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방법, 인간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죄 값은 사망이라는 것을 치러내면서 영생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그냥 영생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래, 죄 값은 사망이야. 말씀에 위배된 것이 죄야.” 이것을 늘 상 느끼면서 영생으로 가게 되는 겁니다. 옛날 이스라엘 나라라는 것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말씀이 이스라엘 나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기에 그냥 21세기의 현장으로 곧장 들어가면 안 되고 이 성경말씀을 구약의 이스라엘로 비춰봐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뭔가를 밝혀내야 됩니다.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함정을 파 놓습니다. 함정을 파놓은 그것이 요단강이라 하는데 그것이 사실 친절한 함정입니다. 마치 교회가 친절한 함정인 것처럼.

사람들은 그곳에 가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그게 함정인 줄도 모르고 거기가면 구원 있는 줄 알고 억지로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사실은 그게 내시경 하는 장소고 X-선 촬영하는 장소에요. 걸려들었어, 그렇게 되지요. 걸려든 거예요. 요단강에 의사가 있어요. 구약에는 하나님의 이름, 신약에는 주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기다렸다가 다 발가벗기고 X-선을 찍어내는 거예요. 구원받겠다는 것, 구원 한 번 받아보겠다는 것, 그것이 잘못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저 구원해주세요.” 이것은 무엇을 묵살하는 자기욕망이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그 값을 치러서 죽는다.”하는 하나님의 엄명을 도외시하고 완전히 모독하는 겁니다.

“에이, 한때 실수한 것을 가지고 쫀쫀하게 구시기는. 이제 잊으시고 새로 시작합시다. 하나님, 절 살려주세요. 하나님이 하나님다워야지 부처만 못하네. 대승적으로 나와야지 과거에 선악과 따먹은 그 실수한 번 한 것을 가지고 닦달을 내십니까? 지금이라도 자비로 구원하시면 안 됩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막무가내로 과거에 있었던 일을 묵살하고 그냥 구원해달라고 요청하는데 하나님에 있어서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판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냥 건져내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만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아요.

우리를 죽여서 예수님의 형상을 받아서 예수님의 형상 때문에 천국에 집합하도록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방금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쉬운 이야기로 하게 되면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는 언약의 백성이오.” 언약이 없었으면 너희는 있지도 않았다, 그런 뜻입니다. 언약 봐서 너희를 살렸다, 그런 뜻입니다. “네 속에 언약 있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사망이라 하는 것은 말씀에 위배될 때 사망입니다. 그렇다면 영생은 말씀이 완성되면 영생이에요.

말씀이 완성되면 영생인데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 말씀이 완성이 안 되도 나에게만 따로 살짝 나에게만 영생 주세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지요. 말씀, 언약이 완성되어야 영생이 주어지는 겁니다. 나에게만 따로 영생 달라, 그럴 수는 없는 거예요. 사람들은 상당히 오해를 하는데 십자가마을에 누가 전에 했던 공격을 또다시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목사님은 성도입니까?” 질문이 그거예요. 뭘 노리는 답변이겠어요? “나는 성도 맞습니다.” 그 답변을 노리는 거예요. 그래서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내가 성도라고 한다면 나와 다르면 다 성도 아니라는 심판관이 되는 겁니다. 성도냐 아니냐 하는 것은 구원을 관장하시는 예수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예수님에 속한 자가 성도입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성도라는 개념에다 누가 성도인가 아닌가의 인간적인 것을 집어넣으면 그 해석자체가 안됩니다.” 십일조를 지켰다고 할 때 ‘우리교회에 십일조를 꼬박꼬박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행하는 것이 십일조’라고 인간의 행함을 십일조개념에 집어넣으면 안돼요. 우리교회는 다 십일조 한다, 이런 것을 집어넣으면 안 된다고요. 십일조는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가 십일조에요. 그것을 믿을 때 그것이 영생입니다. 벌써 지금 네 번째 이야기를 하는데 영생은, 말씀이 완성될 때 그것이 영생이에요.

십일조를 하는 나에게만 살짜기, 이런 것은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유도한 친절한 함정에 빠진 겁니다. 함정에 빠질 때 “살려주세요.” “누구 말인가?” “저를요.” 저를 살려 달라고 하게 되면 이것은 오늘 본문 19절의 말씀과 일치됩니다. 제 말뜻은 그것이 잘못이라는 뜻이에요. 날 살려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육신이 왜 연약해요? 아령도 하고 운동해서 강해지면 되잖아요. 연약하면 연약한대로 그대로 살면 되는데 그래서 뭐 아쉬운 거 있습니까?

내 몸이 연약하다, 그러면 그대로 살면 그만이지 육신 강해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요? 육신가지고 차를 타지 않고 끌고 온 건가요, 뭘 어떻게 할 건데요? 메달 딸 일이 있습니까? 여기에 갑자기 육신이 연약하다는 말이 왜 들어갔느냐, 육신이 연약하다는 말 앞에 뭔가 빠져 있어요. 너희 몸은 (악마에 연약함으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다른 사람한테는, 인간들한테는 다 강해요. 안강해도 강한 척을 해요. 만약에 정 졌다 싶으면 졌다, 하고 양보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너한테는 안 된다. 질게.’라고 하지요. 제가 어느 장소에 차를 타고 가는데 사람들이 차에 아기가 타고 있어요, 초보운전, 이런 것을 붙여놓았어요. 그런데 이런 말을 붙여놓은 차는 처음 봤어요. “까칠한 아내가 타고 있어요.” 저거다! 까칠한 아내, 그러니 얼마나 운전 똑바로 하라고 잔소리를 해댔겠어요? 아, 육신 약하대! 그 남자는 아주 약해요. 육신의 연약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보고 육신이 연약하다고 하는 것은 구약성경 전체를 다 거론하는 겁니다. 구약전체를 통해서 인간은 굉장히 약해요. 약함을 알고서 신약시대에 예수님은 약한 육신으로서 기어이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너희 차례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고 그 다음열매는 이제 너희들이 열매를 맺힐 때라는 겁니다. 육신에 ~에 약하다, 이것이 신약이거든요. 히브리서 2장에 보면 너희들은 악마에 약하다는 말을 했다고요. 그런데 육신이 약하다고 할 때 악마라는 말을 여기서 안 쓴 이유가 있어요. 인간은 자기를 육신으로 보지 않고 그냥 사람으로 보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사람으로 보지 말고 육신으로 바꾸라는 겁니다. 사람으로 봐버리면 앞에 형용사가 붙습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 똑똑한 사람, 인품 있는 사람, 침착한 사람, 바른 사람, 든든한 사람, 하체가 빠른 사람, 이렇게 뭐가 붙어요.

그런데 육신이라 하면 앞에 아무것도 안 붙고 뒤에만 붙어요. 육신은 악마에 약한 육신, 남녀 고하 직위를 막론하고 사도바울이 오직 하나님의 영생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한 개념은 인간의 사회적인 차등이나 다양성, 대통령이든 국무총리든 관계없이 다 빼버려요. 그냥 육신이에요, 육신. 사람이 아니고 그냥 육신이라니까요. 육신이라 할 때는 뒤에 붙는 것이 있습니다. 약한 육신, 마귀에게 이겨내지 못한 약한 육신을 갖고 있어요. 마귀한테 이겨내지 못하고 약하다는 증거가 뭐냐, 그게 “살려주세요(HELP ME).”에요.

예수를 믿든지 부처를 믿든 그저 보이는 대로 심지어 같은 사람인 목사를 보고서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기독교 방송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답니다. 어떤 사람이 작심기도를 했는데 천 번을 했답니다. 그걸 보고 제가 토를 달기를 ‘아, 독하다.’ 천번을 같은 제목으로 기도해서 기어이 응답을 따냈답니다. 독하지 아니합니까, 정말 독합니다. 999번도 아니고 천 번 아닙니까? 종이학을 천 번 접으면 이게 학이 돼요. 종이라고 천 번을 학으로 접으면 학이 된다고요. 얼마나 독해요. 마귀가 독해요. 그래서 응답받으면 육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나지요. 왜 못 벗어나느냐, 이제부터 약간 어렵습니다.

인간의 육이 약한데 약하니까 살고 싶다, 살아남고야 말겠다, 이런 것이 등장하는데 살기위해서 인간이 어떻게 하는가? 노력을 하겠지요. 영원히 죽지 않는 것, 살고 싶다는 것은 죽음을 늘 염두에 두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면 갑자기 이러다가 죽는 것이 아닌가, 돈 없으면 또 그것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닌가, 사업하다가 십억 손해 보면 또 그것으로 인해서 죽는 것이 아닌가, 이것 때문에 결혼생활이 파탄 나는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이 걱정거리가 되는 겁니다. 이 살아야 된다는 것 때문에. 그러면 옛날에는 어떻게 했는가, 이렇게 했어요.

무당을 불렀어요. 점쟁이나 무당을 불렀는데 왜 그런 사람들을 부르느냐, 죽음의 세계와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우리세계와 소통을 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무당이나 점쟁이로 본 겁니다. 무당이 죽은 자와 어떻게 접속하는가? 무당이 뭘 알겠습니까? 그래서 죽은 조상을 거론 합니다. 자기 조상 말고 그 집안 조상이나 유명한 영웅, 이순신 장군이나 강감찬 장군이나 단군 등의 귀신의 내림을 받아서 죽은 자들과 소통이 되니까 묻고 싶은 것을 물으면 죽은 귀신이 내 입을 통해서 장차 안 죽고 좀 더 잘 살 수 있는 비법을 알려 주는 그것이 무당의 역할이었어요.

옛날 모든 글자가 무당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중국 갑골문은 무당들의 활동을 표현한 거예요. 언어가 뭐냐, 무당들이 만들어낸 것이 언어에요. 사람은 말만 하면 되지 글자나 문자는 필요 없어요. 하지만 무당들은 그 언어를 새겨야 신비로운 효과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걸 거북이 등 뒤에 칼로 새겨서 그 글자의 조립에 의해서 이미 그것은 귀신에게서 받은 것이기에 귀신도 그 글자에 대해서는 맥을 못 추고 귀신을 붙잡아서 조종을 할 수 있는 힘이 무당에게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무당이 언어를 만들었고 그 언어를 가지고 무당이 하는 일을 법으로 만들어서 한 것이 왕과 귀족이고 정치꾼들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물건을 흙 그릇에 담았는데 쉽게 부서집니다. 그래서 인간은 허무하고 죽으면 혼은 신에게 가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청동기 그릇이 나오고 그보다 더 단단한 철기가 나오니까 생산물을 그 그릇에 담음으로서 인간의 정신도 단단하게 고정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서 무당은 필요 없다, 해서 정치꾼들이 무당을 대신해서 법을 만들었고 그 법과 함께 등장한 것이 국가라는 겁니다. 제 이야기가 아주 거창하지요, 국가까지 나오고 있지요. 제 말은 다른 거창하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살고 싶을 때는 법이 있어야 되고 그 법을 관장하는 국가, 임금이 무당을 대신해서 그 임금으로 말미암아 모든 백성이 신의 혜택을 입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왕들은 신의 아들입니다. 아들이라는 말은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신과 같은 혈족이라는 것, 이것은 이집트고대역사에 보면 다 나와요. 이집트의 바로왕은 신의 아들이고 남자이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뭐냐, 신의 아들이 되면 모든 좋은 것은 공유하고 있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의 아들을 통해서 정기적으로 왕이 제사장이 되어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게 법의 가장 기본적인 거예요. 요새 말로 하면 헌법 1조가 그거예요. 신에게 복을 받아야 되니까. 그 법 밑에 있는 법률들은 뭐냐 하면, 우리를 신과 중매해주는 그 왕에게 철저하게 복종하는 파생된 법들이 죽 이어져서 국가의 법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뭐냐, 신이 살려주시는 축복을 딱딱하고 단단한 그릇에 보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고 본 거예요. 소유개념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연약한 육신이 마귀에게 이기지를 못해서 어떻게든 살기는 살아야 되니 죽은 조상이 살아 있다고 가정해서 이미 죽었지만 지금 살아서 우리를 지켜보는 그 조상과 연결만 된다면 우리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고 신이 된다는 종교적인 아이디어를 연결시킬 수 있는 무당을 원했고 그 무당의 일을 나중에 왕이 했고 그것은 법으로 모든 것을 안정되게 하고 그 왕을 중심으로 한 종교가 마련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언어나 법칙에는 이런 의미가 담기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뭐냐, 제가 아직 이스라엘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신명기 4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희가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게 되면 너희는 반드시 요단강건너 약속의 땅에서 망할 것이고 너희 날이 길지 못할 것이고 남은 자가 별로 없을 것이고 완전히 흩어진다.” 이렇게 하면서 30절에 보면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 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제가 함정이라는 말을 했지요.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길 때 너무 불안정하다 보니 하나님을 확정되게 담을 수 있는 것을 원했고 하나님은 거기에 맞춰서 그들이 담을 수 있는 돌 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니 그들이 그 돌 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했고 그 지키겠다고 한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은 멸망당하고 그 멸망한 그들은 흩어지고 마지막 끝 날에 다시 자신을 멸망시킨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되는 현상이 마지막에 일어난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이에요. 문제가 뭐냐, 육신이 약한데 그 약한데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고 그 약한 것을 가지고 어떻게든 영생을 나름대로 얻어 보고자 하는 시도를 계속해서 해 왔다는 거지요.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뭘 집어넣었느냐 하면 법을 집어넣는 거예요. 법을 집어넣으니 인간은 옳다구나, 법 지키면 영생 얻겠다고 해서 그냥 법을 수용한 겁니다. 인간이 법을 원한다는 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도 이미 다 해 왔던 거예요. 제가 무당 이야기, 왕 이야기, 죽은 귀신들과의 소통 이야기 등의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해왔고 지금도 우리나라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지금도 일반 가정에서 조상제사 다 드리잖아요. 그것이 가정의 전통이 되고 관습이 되고 그 가정의 가풍이 되지요.

사람이 법을 지킨다는 것은 아직 나는 견딜 만하고 쓸 만하다, 하는 자기 인정입니다. 헤겔이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사람이 사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산다. 이것은 두고두고 봐도 맞는 이야기에요. 남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 아직 나 안 죽었어, 이런 것. 인정받는데 그 인정받는 근거가 뭐냐, 헤겔에 따르면 국가가 법을 만들어서 그 법을 위반하지 않으면 그것은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공동체 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납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인간의 육신이라 하는 것은 주변에 의해서 뭔가 자꾸 쏟아지고 있는 발판처럼 다루어지고 있어요. 참 불쌍해요. 법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자기도 남에게 인정받고 나도 인간답다 할 때 그 사람이 교회 오게 되면 거기는 교회법이 기다리고 있어요. 교회는 성경이라는 법을 가지고 이것 지키면 복 받습니다, 그러면 쉽지요. 그 법대로 지키면 복이 주어지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지키면 같은 교인에게 인정받고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그러면 나는 천국가게 되고. 그런데 이스라엘 입장, 하나님의 언약입장에서 보면 무엇이 문제인가?

청동기나 철기시대로 접어들면 단단한 그릇이 뭔가 담을 수 있는 정신이 된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법을 지켰다는 그 의로움과 잘난 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 이것이 문제에요. 자꾸 뭔가 담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담겠다는 거예요. “목사님, 오늘도 뭘 지키면 될까요? 제가 지킬게요.” 그러면 담고 또 다음주에 “또 뭘 지킬까요?” 자꾸 뭔가 장바구니에 담는 것처럼 담게 되고 담은 그 양만큼 내가 점점 더 거룩해진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로마서 6장 오늘 본문 보세요.

“옛날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서 죄를 지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종이 되었기에 이제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다.” 만약 이런 관점같으면 간단하겠지요.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착한 일 한 것을 모아서 담으면,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브랜드 붙여서 담아놓으면 그 분량만큼 나는 점점 더 거룩에 이르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마지막은 영생으로 간다, 이것이 얼마나 납득하기 쉽습니까? 다들 그렇게 해석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20절을 빼놓고 있어요.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의에 대해서 자유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그들은 모릅니다. 의에 대해서 자유함이라는 것이 마련되지 아니하면 죄로부터의 자유도 없어요. 그것은 한 번도 죄에 대해서 자유한 적이 없는 인간입니다. 의로부터의 자유를 만끽하지 못한 인간 같으면 죄로부터의 자유를 언급하는 것이 반칙이에요. 의로부터의 자유에 대해서 언급한 책을 지금껏 본 적이 없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죄로부터의 자유에 관한 책은 보는 책마다 다 튀어나와요. 죄로부터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사망으로부터의 자유,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는 설교시간마다 나오고 주석 책 마다 차고 넘쳐요.

그런데 의로부터의 자유가 뭐라고 언급한 책은 제가 못 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들어본 적은 있습니까? 의로부터의 자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기차역 대합실에 손님은 가득 찼는데 기차는 오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천국 가려고 손님은 잔뜩 모였는데 기차가 안 오네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준 게 그거에요. 너희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래서 율법을 지키고 우리에게는 선지자 있고, 이렇게 이스라엘나라라는 온갖 체계를 만들어서 단단한 그릇에 다 담아놓았는데 메시아가 오지를 않네요.

지금도 유대인들은 대합실에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미 왔다 갔는데. “하나님이여, 우리는 기다립니다. 기름 준비해서 기다립니다.” 백날 준비하고 백날 기다려도 오지를 않아요. 그것은 우리가 의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의로부터 자유라는 말은 좋은 의미가 아니고 의로부터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로 끊어졌는가, 의가와도 못 알아 볼 정도로 완전히 사고방식이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다는 것은 황당한 거예요. 우리는 오지도 않는 역에서 메시아를 상상하면서 기다렸던 거예요. 그런데 뒤쪽에서 명단 부른 거예요. “백 성록, 김 종석, 빨리 영생 받아가!” 오지도 않을 기차 엉뚱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호명해서 받아가는 거예요.

우리는 이쪽에서 오기를 기다렸지요. 보자기에 거룩의 열매를 한껏 담아서 성화시합, 기도시합, 작심기도시합, 나는 천 번 작심기도해서 응답 받았다, 이러고 있는데 뒤에서 와버린 거예요. 의에서 끊어졌기에 영생이 주어지는 방법도 끊어지는 방법으로만 주어집니다. 그것 때문에 의로부터 끊어졌다는 말을 사도바울이 언급한 겁니다. “너는 의로부터 끊어졌다. 그래서 의가 뭐라고 이야기해줘도 모를 그 정도로 너는 의에서 끊어져 있다.” 그런 뜻이거든요. 왜 인간들이 의를 모르는가, 인간들이 연약한 육신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죄를 생각해서 그래요.

죄라는 것은 의가 등장할 때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 죄인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자기가 죄를 안다는 겁니다. 죄를 알기에 죄는 될 수 있는 대로 멀리하고 바르게 살겠다는 거예요. 예수님에게 찾아왔던 그 부자청년하고 똑같은 거예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다. 어릴 때부터 거짓말 안하고 부모공경 잘하고 간음 안하고 살인 안했다는 것인데 그들은 살인하고 간음하는 이것을 죄라고 여긴 거예요. 연약한 육신 주제에, 악마가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나름대로 죄라고 규정해놓고 그것을 피하면 그것이 의의 열매가 되는 줄로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끼리 모여서 무당 모셔놓고 그렇게 했고 또 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만들어놓고 그렇게 했고 거기에 이스라엘도 합류해서 그러고 있는데 뒤에서 왔다니까요, 뒤에서. 죄도 모르는데 무슨 죄를 짓습니까? 죄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는 것이 죄에요. 왜냐, 예수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이 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가, “나는 길이요”라고 했거든요. 이 말은 뭐냐, 너희는 길이 끊어졌다는 겁니다. 너희는 길이 아닌데 길도 아닌 것을 길이라고 우기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줄 자, 잡아 당겼다가 놓으면 도로 죽 들어가는 줄자 가지고 오신 거예요. 예수님 꽁무니 뒤에 줄자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 계신 곳만 길이 있는 거예요. 그 전에는 길도 아니지요. 기찻길이 끊어졌는데 기차가 올 리가 있습니까? 그냥 참새만 짹짹거리다가 갈 뿐이지요. 오지도 않을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대합실에 수천 수십만이 모여서 “할렐루야, 주여!” 삼창 해가면서 그렇고 있습니다. 구원은 호명에 의해서, 호명에 의해서 구원받습니다. 호명할 때 십자가로 호명합니다. “너희의 죄를 다 치렀다.”라는 소식으로 호명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먼저 보냅니다. 그러면 율법을 통해서 엉뚱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종교성을 다 끄집어내놓고 그 다음에 율법 지킨다는 그들을 통해서 메시아가 살해당하도록 조치를 해 놓아요. 그러니 이스라엘에게 율법은 아주 친절한 함정입니다. 함정에 빠져봐야 ‘내가 스스로 마귀가 쳐놓은 함정에 처음부터 빠져 살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건질 수도 없고 건진다는 것은 말이 안돼.’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달음박질이나 부르짖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너를 일방적으로 건진다.”하는 겁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피 흘려 가면서 한 걸음 두 걸음 담벼락으로 기어 올라가려고 해 봤자 다 참기름 발라놓아서 한 20미터 올라가면 도로 다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지금껏 신앙생활 한다는 인간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어요. 목사 말대로 한다고 기어이 올라가려고 ‘마음속으로도 난 간음하지 않는다. 어떤 여자라도 난 간음하지 않는다.’ 하고 있는데 김 태희 나타나 버리니 그냥 죽 미끄러져 내려가죠. ‘난 이제 남자를 안다. 이제 남자한테 눈 돌리면 난 여자도 아니고 나쁜 여자야.’ 하는데 장 동건이 와서 “안녕하십니까?” 하면 또 …….

지금까지 바람 안 폈다고 했는데 80넘어서 바람한 번 피우니 다 헛방이죠. 화장 짙게 한 다방 마담하고 좋아지니 다 소용 없네요. 그게 육신이 약해서 그래요. 마귀는 우리를 우습게 봐요. 예수님께서 마귀를 일부러 붙였습니다. “사람은 떡으로 산다, 사람은 자기 존재를 확인받기 위해서 산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갖고 싶어 산다, 예수 당신이 이 세 가지를 이길 수 있어?” 일부러 성령께서 마귀한테 그런 시험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뭘 기다립니까, 대체. 그래서 주님께서 언약을 어떻게 하는가?

언약은 모으는 것이 아니고 바느질을 하는 거예요. 바느질을 하게 되면 특징이 뭐냐, 뭘 하다 덧대고 바늘이 위로 갔다가 다시 밑으로 내리고 그랬다가 다시 위로 올리고 하잖아요. 바느질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돼요. 손만 찔리지 소용없어요. 바늘이 관통해서 밑으로 내려가면 안 보입니다. 맨 날 우리는 육신에 속했다가 영으로 튀어나오고 육신에 속했다가 영으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다만 덧대는 것이 뭐냐, 들어갈 때 그 바늘에 붙은 실에 피가 붙어서 언약을 경유해서 같이 튀어나와요. ‘이정도 육신 같으면 내가 마귀 이긴다.’ 하고 까불다가 어떤 사태가 터지니까 다시 ‘나는 지옥가야 돼. 나 같은 놈은 다시없다.’ 하고 있는데 다시 끄집어내니까 “오직 예수의 피로만 건져내는군요.”

주께서는 우리를 아예 누비이불처럼 재봉틀로 박아버려요. 그럴 때 우리에게 결국 남는 것은 말씀의 박음질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우리 몸 전체가 주의 말씀대로 된 신체, 그리스도의 지체에 해당되는 겁니다. 구약의 사사기, 말할 것도 없지요. 하나님이 도와주니 감사한다고 하다가 다시 버리고 다시 주께서 힘들게 하니 또 부르짖고 그러다 숨통이 트일 때 다시 헤헤거리면서 산당 찾아가고, 사사기가 결국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서의 주의 이름은 그들을 가지고 계속 바느질을 한 거예요. 뽑아내고 또 올리고 또 뽑아내고 또 올리고, 나이가 80이 되든 90이 되든 마찬가지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네가 끊어지지 않는다, 피 묻은 실이 이빨로도 안 끊어져요. 어떤 환난과 핍박에서도 너는 영생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겁니다. 무엇을 통해서? 네 육신이 얼마나 약해빠졌나 하는 것을 통해서, 세상 유혹에 얼마나 약해 빠졌나 하는 것을 철저하게 지독하게 느끼게 하시면서 “역시 언약 최고! 하나님의 말씀 성취가 영생이군요.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군요.” 다시 한 번 십자가 용서라는 그것을 다시 한 번 느끼면서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 할 때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의의 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는 의의 종으로 살아가니 그 열매는 오직 주께서 주신 열매, 겸손과 온유와 화평, 자기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것이고 자기는 그저 그 앞에서 쪼다니 그저 나오는 것은 주께 감사하는 것 외에 나올 수가 없지요. 바로 이런 작전, 이러한 전략이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질 때 이스라엘에게 한 번 거쳤던 그 방식 그대로 오늘날 새로운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시켜서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바느질 당해도 감사하게 하여주옵소서. 엉뚱한 대합실에서 오지도 않는 기차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미 호명해주니까, 십자가로 불러주니까 이미 우리가 주의 손에 있고 의의 종이 되어버린 것을 우리는 왜 진즉에 몰랐는지. 의의 종 되려고 하지 말고 이미 되었음을, 주님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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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4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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