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3. 5. 24) 1강
광주 강의(2013. 5. 24) 1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36)
광주 강의(2013. 5. 24) 42-1
에스겔 37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여기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은 ‘무덤을 열고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디로 들어가라는 말입니까? 무덤 속에 들어가 있으면 나오게 하신답니다. 이것은 마치 범죄자들이 동생에게 “금고 안에 잠간 숨어 있어. 나중에 경찰이 가고나면 금고 문 열어줄게.”라고 해서 금고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안 꺼내주면 어떻게 됩니까? 금고 안에서 죽겠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산 사람에게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수양을 해라!” 이러면 쉬운데, 그것이 아니고 “죽으라. 그러면 무덤을 열고 나오게 할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살아 있는 나를 계속 살려 주세요.’ 이것입니다.
나는 그냥 ‘나’가 아니고 ‘살아 있는 나’인데, 계속 살아 있으려고 하니까 굉장히 힘들어요. 그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살아 있는 나를 계속 살게 해주세요.”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되지요. 그런데 에스겔 37장 13절에 보니까 살아 있는 나에게 여호와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무덤에 들어가면 살려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인간이 그냥 살아있는 체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그 버릇을 포기를 못합니다. 마르다, 마리아는 오빠가 죽은 후에 비로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어요. 오빠가 죽기 전에는 예수님이 오빠를 죽지 않도록 해 주셨으면 하고 바랐는데 예수님의 그들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달라고 요청했습니까, 곱게 죽었습니까? 곱게 죽었지요. “네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렇다면 여호와가 하시는 일을 생각할 때 우리의 범주를 넓혀 봅시다. 살아있는 나를 편하고 힘들지 않게 살게 하신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살아 있는 나’를 ‘죽어도 괜찮은 나’로 바꾸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교회 가서 철야 기도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나를 하나님께 부탁해서 더욱 더 활발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지 말고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도 실패한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하다가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니 실패지요. 긍정적인 요소가 전혀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실패해도 버리지 않습니다. “네가 실패했구나. 난 너와 함께할 수 없어.” 이러지 않아요.
실패를 강조하는 의도가 뭡니까? “너는 죄인이야. 항상 죄밖에 나오는 것이 없어.” “예, 내가 죄인인줄 압니다.” 그래도 계속 “너는 죄인이야!” 라고 다그칩니다. 이렇게 계속 몰아넣을 때에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죽음이 아니라 주님이 마련해 주신 자리에 갑니다.
계속 우리를 몰아세우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냥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마련해 주신 죽음의 자리(하나님에 의한 심판), 이것이 바로 언약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약의 자리에 갈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과 협상해서 산 채로 천당 가려고 생각합니다.
언약의 자리에 가 있어야 천국에 가는데 우리는 자꾸 언약의 자리가 아닌 현재 자기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구원 받겠다는 거예요. 이런 잘못된 예가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데, 부자 청년이 주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하면서 자기의 장점을 내세우지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이 말씀에 부자 청년은 근심하고 돌아갔어요. 결국 이것은 뭔가 하면, 예수님이 생각하는 천국은 원래의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에 예수님과 합류될 때 천국에 가는데, 우리는 그 자리로 갈 생각은 않고 현재 있는 내 자리에서 하나님을 상대하려고 해요.
에스겔 37장 13절에서의 무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는 무덤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으신 무덤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보다 나중에 오셨으니까 나중에 죽는다고 생각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시간 순서를 인정하지 않고 최우선 순서가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지요. 이게 말이 됩니까? ‘첫’은 시간상 제일 앞선 것을 말하는데,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라는 말은 우리가 아는 시간적인 순서를 따르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 자체를 뒤로 미를 수 있는 첫 번째. 그래서 이번에 발행 된 책 [에스라, 느헤미야 속으로] 끝에 보면 “초석은 나중에 놓인다.”는 말이 있어요. 초석은 맨 처음 놓이는 돌인데, 이것은 머릿돌입니다. 집을 지을 때 머릿돌부터 먼저 놓고 그 위에 건축을 합니다. 그런데 ‘초석은 나중에 놓인다’고 했어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했는가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머릿돌이 먼저지만 우리의 시간관으로 주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항상 우리가 우선이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관으로 주님께 대입하면서 억지를 부리기 때문에 초석은 나중에 놓이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할 때, 모세와 엘리야는 벌써 구원 받았잖아요.
구원 받았는데 왜 이야기합니까? 이미 구원은 챙겼는데. 우리의 시간관으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보다 앞서기에 이미 그들은 구원 받아서 천국 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은 구원의 초석이 놓이지 않았기에 주님과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하다가 보고 기뻐했지요. 그러면 됐잖아요.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받쳐서 구원 받았습니까? 아들 100번 받쳐도 구원 못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름 바뀌었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양과 소가 많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구원은 초석이 놓여야 됩니다. 그 초석은 그야말로 초석(머릿돌)인데, 엘리야와 모세,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나중에 놓이는 거예요.
왜 제가 이런 표현을 섰는가 하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평소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 있기 때문에 자꾸 오해를 하고 있어요. 무덤에서 나온다고 하니까 누가 봐도 이 무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던 그 무덤이잖아요. 하지만 무덤이라는 개념이 그냥 인간 본인이 죽는 무덤은 언약적 무덤이 아닙니다.
그 무덤에 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에요. 언약적 무덤에 합류되어 있어야 구원 받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알지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그리고 로마서 6장 8절에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 무덤은 내가 죽어서 묻히는 무덤이 아닌 주님의 죽으신 무덤입니다.
모든 성경 개념이 다 예수님의 손맛이 배어 있어요. 구원은 주님의 손맛입니다. 언약적 무덤에 합류해야 구원 받습니다. 그러면 언약적 무덤은 어떻게 되는가? 제가 수학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수학에서 현실을 나타낼 때는 N으로 표현합니다. X1에서 N까지.
N은 임의의 무한한 수, 또는 임의의 수. 그런데 N이 무한대가 되면 임의의 극한이 되겠죠. 그러면 이 세상에는 많은 차원이 있고,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지” 그 모든 것을 포괄해서 표현한다면 그냥 N으로 할 수 있단 말이지요.
세상에 중심체가 없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세상이 N차원이라면 중심체는 N-1차원이에요. 그러면 N에서 N-1을 하면 남는 것은 1인데, 이 1이 뭔가 하면 잉여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언약적 개념이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이 세상을 다스리지요.
비타 500 뚜껑을 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분명히 제 힘으로 뚜껑을 열었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적으로 보면 주께서 주신 힘으로 연거에요. 그 주께서 주신 힘이 뭐냐 하면, 잉여의 힘이에요. 말은 그렇게 하는데 실생활에서는 내가 한 것으로 여깁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떻게 살지? 그렇지 주께서 인도하실 거야.” 생각은 하는데 체험화 되지는 않아요.
모든 일을 주께서 개입하셔서 잉여의 힘으로 하는데, 그것을 생각 못하지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의 값을, 주님이 빠져 있는 N-1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빼버리죠. 그러면 우리는 ‘망했구나’하는 순간, 망했는데 우리가 왜 살까요? 그 여분의 것은 누가 살게 하십니까? 주께서 살게 하십니다.
프로 야구에서 한화가 17대 1로 졌단 말이지요. 그러면 한화 팬들은 돈 내고 입장권 끊을 때 적어다 4대 3으로 이긴다든지, 2대 1로 이기든지 승리할 것을 기대하고 갔는데 넥슨에게 17대 1로 지는 과정을 자기 돈 내고 전부 다 봤을 때 얼마나 속이 쓰리겠습니까? 그러면 그 중에 성령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어떤 것을 느끼겠습니까?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께 달렸다.”
그런데 이기면 자기가 응원 열심히 해서 그렇고, 지면 선수들이 잘 못해서 그렇고. 즉 잘 되면 내 탓, 잘못되면 남(혹은 하나님) 탓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손대고 만든 모든 부분을 삽으로 떠서 몽땅 빼내는 그 틈, “아 오늘도 내 뜻대로 안 되네.”하면서 짜증부리는 그 뜸에서 잘해도 살리고 못해도 용서하는 그 꾸준한 하나님 언약의 일관된 사랑과 은혜가 엿보이는 겁니다.
이런 식이 아니면 인간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의 구원이 아니면 인간은 천국 가도서 제자랑 할 겁니다. 천국은 자기 자랑할 수 없는 세계이기에 그 조치를 주께서 미리 지상에서 실행하시는 거예요. 이 공식을 잊지 마세요. N에서 N-1. 하나님께서 평소에 개입하시는 거예요.
N은 무한이기에 우리는 손 못 대는데 N-1은 무한 빼고 눈에 보이는 것은 내 것이야 하는 이 부분을 삽으로 떠내면 남는 것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하면, 고린도후서 6장 9절에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이것은 N차원, 하나님 언약 차원이고, 우리 차원은 N-1 차원은 뭐냐 하면, ‘지금은 내가 별로 유명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신문에 이름이 날 거야.’
이런 것을 우리가 노린다는 것은 주께서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언약의 삽으로 파내 버립니다. 파내서 어떻게 바뀝니까? “내가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존재지만 언젠가는 이름을 떨칠 거야. 아버지, 어머니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시면 제가 자랑스러운 자식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주께서 언약의 삽으로 떠냅니다.
유명해 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은 시험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사용하는 방법인데 우리는 그것에 젖어 삽니다. 이것은 N-1차원이에요.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퍽 떠내는 순간 우리는 “지금은 시시하게 보이지만 언젠가는 유명해 질 거야.”라고 할 때, 그게 언약적 죽음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를 날마다 죽이기 위해서 계속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으로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은 별 볼일 없지만 언젠가는 내가 보란 듯이 성공할거야.’라는 생각을 유지해야 할까요, 이런 생각을 접어야 할까요? 유지해야 되지요.
“내가 지금은 피곤에 지쳐서 볼 품 없지만 미장원에 가서 머리 예쁘며 하면 오드리 햅번같이 될 거야.”하고 미장원에 갔는데, 연습생이 와서 머리를 잘라서 끝났다고 해서 거울을 봤는데 이상한 여자가 보인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주께서 언약의 삽으로 퍼낸 거예요. 이 때 비로소, 머리 못 나와도 구원 받는다는 주님의 언약의 자리, 우리의 무덤의 자리, 주와 함께 있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6장 9절을 봅시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효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은 인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이 지금부터 시작해서 영원토록 울려 퍼져야 될 고백입니다.
구원은 주께서 “너 죄인이지.”라고 몰아넣는 그 능력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이뤄집니다. 구원 받으려고 설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너 유명 인사 되려고 했지? 남에게 기 안 죽으려고 했지?” 계속 말씀으로 찔러 주실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자며, 무명한 자며, 슬퍼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런 인간을 뜯어내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이미 영생 얻었다는 기쁨과 희열이 쏟아져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그 길을 계속 간 것은 기쁨 때문입니다. “내가 환란 중에 기뻐한다.” N-1차원에서 N차원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 우리가 이 땅에서 발견해야 될 것은, 우리가 왜 죽어야 되는가? 우리 죽음의 자리를 찾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 자리를 사도 바울은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너는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가?”를 물어보세요. 그러면 즉시 답변을 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생각하게 될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려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아닌데.” 분명히 자기 삶에 회의를 느끼기 마련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아요.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무엇을 잃어버린 건지 모르겠어요.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아이도, 방금 결혼한 새댁도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이것도 해보다가 저것도 해보다가 온갖 것을 다 해보는데, 특히 졸부의 아들은 이것 해서 망하고 저것 해서 망하고 그래요.
돈을 잃어버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돈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화책에는 나옵니다. 동화의 끝은 어떻게 끝납니까? 결혼으로 끝이 납니다.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 결혼만 하면 영원히 행복할 것이기에 잃어버린 짝을 찾으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결혼해 본 사람은 다 알지만 결혼했다고 행복합니까? 결혼한 후에는 조금씩 후회가 밀려오지요? 손자가 태어나면 귀엽다고 하지만 그 손자가 말썽 안 부려는 손자라면 귀엽지만 사고치고 말썽부리면 안 귀여워요. 그래서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어요. 사고 없는 평범이라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집안도 사고 없고 고민 없는 집안은 없어요. 따라서 평범을 원하지만 대부분 가정이 문제 한 두 개 정도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니 누구한테 물어봅니까? 똑같은 입장인데. 모두 잃어버리고 사는데.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잉여. 주님의 덕으로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강렬해서 이것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주님의 잉여를 달리 표현하면 은혜입니다. 또는 용서, 사랑이지요. 이것을 가장 구체화 시킨 것이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본향’이라고 합니다. 본향이니까 이 땅에 사는 것은 본향을 찾아가기 위한 삶이지요.
이제 38장으로 넘어갑시다. 38장 들어가기 전에 서론이 왜 이렇게 길었는가 하면, 37장에서 38장으로 넘어가면서 엄청나게 어려워요. 37장에서는 “네가 죽음에 가도 살려준다. 이것이 여호와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38장, 39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잡혀 갔다가 언젠가는 돌아옵니다. 돌아오는데,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카수스 지방에 있는 곡(또는 마곡)이라는(곡은 4개 나라의 연합국이다) 나라에서--
지도를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이탈리아 반도,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그 다음에 터키, 이쪽은 시리아, 이쪽은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이라크, 이란이 있는데 이쪽에 흑해가 있어요. 흑해 쪽으로 강이 흘러가는 것이 있는데 다뉴브 강입니다. 흑해 옆에는 카스피해가 있어요. 이 사이에 있는 나라가 곡(또는 마곡)입니다.
이 나라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 안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쳐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38장 이야기고, 39장은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마곡과 연합군들을 하나님께서 진노로 심판을 내린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뭐가 어렵다는 말인가? 37장에서는 ‘무덤에 있더라도 내가 건져주겠다’고 했지요.
우리 의식에 시간을 직선으로 흘러가니까, ‘지금은 이스라엘이 망한다. 언젠가는 죽는다. 하지만 무덤에 있는 자들을 주께서 건진다.’ 이 무덤이란 개념은 주님의 언약적 잉여가 담겨 있는 개념이기에 이 무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덤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죽었던 무덤이지요. 십자가에 함께 죽은 자에게만 영생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무덤이란 의미가 복잡하고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래서 죄로 죽어야 마땅한 인간이 용서받고 의롭게 되는 그 변압기 역할이 이 죽음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이것을 저는 언약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죽은 자는 약속에 의해서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제가 어제 가락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질문을 했는데 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유월절에 문설주에 피를 바를 때 세 번 발랐습니까, 한 번 발랐습니까, 몇 번 발라야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 것입니까? 몇 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피에 시선을 모아야 합니다. 피 바른 집안 식구도 피에만 신경 써야 되고, 심판의 사자도 피만 봅니다. 그래서 피 안에서 두 시선이 만날 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안다’고 했는데, 목자와 양의 시선이 어디에 모입니까? 목자가 난데없이 우리 때문에 죽었다는 거기에 대해서 목자만 관심 쏟는 것이 아니고 양도 거기에 관심 기울여야 구원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것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관심사는 피이기에 설교자는 말씀으로 우리가 죄인이란 것을 들춰낼 필요가 있어요. 왜? 피가 무덤이라는 잉여의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그들은 곧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무덤에서 다시 나온다.’ 이 개념은 시간 순서로 되어 있는데, 38, 39장에서는 갑자기 위쪽에서 온다는 거예요. 주부가 선반에서 그릇을 낼 때 컵은 어디 있고, 밥그릇은 어디 있는지 다 알아요. 이것은 고정된 공간이에요. 늘 설거지 하면 그 자리에 두니까.
동화책에는 이런 것이 있어요. 주인 아줌마가 설거지 한 후에 그릇들이 서로 대화를 해요. “얘야, 오늘은 네가 주인님의 맛있는 국을 담았구나. 너는 어떻게 주인에게 사랑을 받아서 주인의 국을 담게 되었니? 나는 그런 주인이 너무 싫어! 내 접시에는 주인이 먹다 버리는 갈치 가시만 담겼어.” 이런 대화를 하다가 “주인이 들어온다.”하면서 잠잠해 지지요.
그릇은 시간이 흘러가도 고정된 그 자리에 있습니다. 제가 질문합니다. 우리 인생을 37장으로 봐야 됩니까, 38장으로 봐야 됩니까? 뭔가 동적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봐야 합니까, 아니면 고정된 자리에 있는 것입니까? 고정된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37장에 있는 이스라엘은 없는 백성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만들어 냅니다. 이 37장의 경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우리는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이니까 언젠가는 주께서 구원하실 거야.”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천국 자손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천국 자손이 아니라는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방인이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해요.
이방인이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언약적으로 쫓겨날 만해서 그 빈자리에 들어갈 자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원래의 주인이 쫓겨나지 않으면 이방인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입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면 여러분 대신 유대인 누군가가 쫓겨났다고 보면 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의 지정된 자리가 있어요. 누가 나가야 들어올 수 있어요. 그러니까 시간적 흐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이방인이기에 고정된 자리에 있는 겁니다. 송재원 씨가 질문을 했는데, “죽은 김00 목사가 구원 받았습니까?” 라고. 이방인들은 구원을 논할 입장이 못됩니다. 언약을 알아야 돼요.
우리가 구원 받고 싶다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적으로 명단이 있어야 돼요. 명단에 없는 사람은 구원하지 않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이 결합이 안 되는데, 결합되는 대목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7~8절을 봅시다.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이것이 우리가 보고자 하는 에스겔 38장의 이야기입니다. 성경 해석 참 난해하지요? 에스겔 38장에서는 사단이 없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사단이 옥에서 나와서 곡과 마곡을 모아 싸움을 붙입니다. 에스겔 38장 2절에는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하간 곡이라는 나라가 등장해서, 5절에 보면 “그들과 함께 한바 방패와 투구를 갖춘 바사와 구스와 붓과 고멜과 그 모든 떼와 극한 북방의 도갈마 족속과 그 모든 떼 곧 많은 백성의 무리를 너와 함께 끌어 내리리라.” 이들을 소집해서 방향을 줘요. 이스라엘을 총 공격하기 위해서 동서남북을 다 동원했어요. 이것은 결국 세계 전쟁입니다.
사방의 모든 나라를 다 동원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움직일 때는 블랙홀처럼 뭔가 중심축이 있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연탄불 위에 국자 올려놓고 거기에 각설탕과 소다를 넣으면 부풀어 올라요. 그냥 두면 안 되고 저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어떤 문양을 찍어서 그 모양대로 자르면 상품을 주고 하는 것이 있었어요.
이처럼 하나님이 이런 일을 시킵니다. 국자, 소다, 설탕 다 배치를 해서 이스라엘을 총 공격하게 만들어요. 왜냐? 그래야 언약이 성취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약이 성립 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가 방금 요한계시록 20장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요한계시록 20장과 에스겔 사이에 누가 계시지요? 예수님이 계십니다. 방금 에스겔 38장 마곡 이야기 나왔지요. 방금 십자가 이야기했지요. 마지막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마곡이 등장하잖아요.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는 ‘에스겔이 처음이고, 그 다음이 십자가고, 마지막이 마곡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고정적으로 공간을 만들어 버리면 십자가가 올라서 버리고 앞뒤 양쪽은 십자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같이 돌아가는 셈이 됩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서 마곡 이야기를 왜 했는가 하면, 에스겔에 있던 역사적 현실이 지금 이 때도 똑같이 일어나는데, 에스겔이 BC 500년 경이라면 지금은 AD 2013년이잖아요. 2015이 되든 2300년이 되든 관계없이 십자가 안에서는 같은 현상이 반복해서 회전하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다른 점은 뭔가? 그쪽에서는 그냥 마곡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단이 나오지요. 그러면 십자가 이후에 이 세상은 누구 손에 움직인다? 사단이 움직이고, 사단은 누가 움직인다? 에스겔 38장에서 여호와께서 마곡을 움직이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사단을 조종해서 사단이 마곡같은 그러한 현상이 현재 십자가와 함께 오늘날 성도를 중심으로 뺑뺑 돌고 있다는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2013. 5. 31. 10:0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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