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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죄에서 해방된 죄인 130526우리교회로마서

죄에서 해방된 죄인 130526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죄에서 해방된 죄인(로마서 6:15-18)

이근호

13-05-26 13:34

죄에서 해방된 죄인

2013년 5월 26일 본문 말씀: 로마서 6:15-18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6: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은 천국을 포착하는 단어들입니다. 거미줄을 보고서 사람들은 이 근처 거미가 있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거미를 거미줄을 통해서 포착해내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이나 예수님이나 하나님도 그런 식으로 포착해낼 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증거들을 조작해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병들어 기도했더니만 병이 나았다든지, 혹은 헌금을 많이 했더니만 집안의 우환이 사라지더라 하는 식의 발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하나님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그런 주장은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자기 존재 확인에 불과합니다.

참된 천국이란 개인의 가치를 높이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만 높이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그 천국이 확실히 있음을 보여주는 바는 평소에 인간들이 각자의 가치를 확인하는 단어들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법 아래서’와 ‘은혜 아래서’입니다. 단어들이 지상에 남기는 것은 오직 하나 ‘죽음’입니다.

죽음에는 조작이 되지도 않고 장식도 되지도 않습니다. 죽은 고인의 무덤을 아무리 장식해도 죽은 자가 살아나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모든 인류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들이닥치는 필연적 현실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좋아하는 이 없습니다만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 곧 죽음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열심히 나름대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실은 죽음의 얼룩을 지워보고자 하는 노력들입니다. 이것이 조작과 위선적 행위로 나타납니다. 율법 아래서 살면서 율법 앞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달성해서 그 행함으로 의로운 세계의 입성을 노리게 됩니다. 율법은 이점을 폭격합니다.

즉 “법의 요구를 위반했을 때만 죄인이 아니라 율법 안에는 네가 애초부터 법에 대한 위반 성향이 담고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죄가 없을 때에는 죽음은 인류에게 보편적이었습니다. 이점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설명하면서 법의 투입은 이 현상의 내막을 차후적으로 소개하기 위함이랍니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죄대로 드러나게 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인간을 통해서 출몰하는 겁니다. 그 중간매체 역할 하는 인간이 이 죄의 설침을 저지하지 못하고 결국은 죽음으로서 그 현실적 결말의 희생자가 됩니다. 죄의 징벌로서 가해지는 죽음의 힘이 인간보다 다 셉니다.

이렇게 해서 율법 아래서는 인간의 실체를 밝혀줍니다. 이 밝힘은 단순히 인간의 징벌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은혜 아래’의 내용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순서상 인간에게는 율법 아래서가 먼저이고 은혜 아래서는 나중입니다. 요한복음 1:17에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 이전에 율법이 먼저 주어집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실체가 의미있게 펼쳐집니다. 인간은 먼저 죄인이다는 것이 규정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어린양으로서의 예수님의 취지가 그 사람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서에 대해서 반대로 대처하는 것이 곧 인간의 죄성입니다. 인간은 기어이 자기 가치를 포기하지 않으려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의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바꾸어서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법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자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그 차이는 이러합니다. 죄 아래에 있을 때는 죄를 지었지만 은혜 아래에 있기에 더 이상 죄 지어서는 아니된다 는 식으로 말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죄를 더 짓는 사람이 아니라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미 계속 죄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법 아래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계속 인간을 죄라는 구석으로 몰아세우고 있고 몰아붙이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계속 자기 자신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안 짓고 의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지?”라고 말입니다. 이러다보니 심지어 예수님 믿는 것도 법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법 지키듯이 예수님을 믿는 법을 지켜서 유지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모두 여전히 자기 자신은 죽을 죄인일 수 없다는 팽팽한 맞섬에서 나온 죄악된 성질입니다.

즉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이상, 그 어떤 고상한 신앙행태도 모두 죄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은혜 아래서는 이 ‘나를 지켜야 돼’가 이미 죄인으로 살아야 될 인간에게는 해당될 수 없는 비-현실적 사고 방식임을 통보해줍니다. 이미 죽은 존재가 어찌하여 자꾸만 자신에 미련을 두고 살리려 하느냐고 몰아붙이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5:18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에게는 더 이상 자기를 자기가 지킨다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은혜 안에서는 말은 달리 말해서 ‘영에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영에 속했다’는 말은 성령을 소유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반대로 성령에 소속이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은혜 아래서’라는 것을 천국을 포착하는데 그 존재를 활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9:2-6에 보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풍병자에 대한 예수님 빼놓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는 병이 낫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의 증표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요구를 빗나가게 하십니다. 그것은 죄라는 것을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이 죄가 제대로 끄집어 낼 경우에만 오늘 본문대로 설명이 됩니다.

결국 의의 종이란 예수님만을 증거하기 위해 죄인인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활용당하는 처지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됨을 위함이 아니라 죄와 의를 드러내어서 천국이란 결코 죄는 들어오지 못하고 의만 충만한 세계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에 자신의 가치를 소유하기 보다 차라리 모든 일이 주님의 일임을 알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5-28 22:38

35강-롬6장 15-18(죄에서 해방된 죄인)1305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6장 15절에서 1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7페이지입니다.

로마서 6:15-18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성경말씀에 나오는 용어들, ‘법아래 있다’ 하든지 ‘은혜아래 있다’ 하는 이 용어들이 무슨 용도로서 투입이 되는 겁니까? 우리가 그것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성경에서 이런 용어들은 21세기의 사람들이 생활하는데, 혹은 방송 같은데 전혀 나오지 않는 용어잖아요. 그런데 이런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존재를 보이고자 하는 거예요. 이런 용어를 쓰지 않으면 포착이 안 되는 그 무엇, 이런 용어를 반드시 써야 포착이 되는 그 무엇, 숨겨진 그 X, 그것은 이런 용어가 아니면 절대로 포착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집에 거미줄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바보가 아니라면 그 집에 거미가 있다는 것을 포착해주잖아요. 그러면 천국이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 무엇으로 포착하느냐 하는 겁니다. 천국은 안보이고 세상만 보이니까. 그런데 성령 받은 성도들은 천국이 있다고 하거든요. 사람들은 “천국이 있으면, 하나님이 있다면 내 눈앞에 보여 봐라. 내가 믿지 말라고 해도 보여주마.” 하지요. 자꾸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자꾸 믿으라, 믿으라, 하는데 평소에 우리들의 일상은 보고 들리는 것에 대해서나 믿게 되어 있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안 되거든요.

천국이 있다는 말을 쓰려면 증거로서 뭘 제시해야 되는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믿으라, 믿으라, 한다면 그것은 억지에 불과하다는 말이지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 천국이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 를 포착하는 그 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합니다. “너희들이 내놓으라고 하는 그 증거는 이 세상 것을 판정할 때는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천국을 이야기할 때는 적합지가 않”습니다. 왜 그런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조작이 가능합니다. 임의로 뜯어고치는 것이 가능해요.

예수님이 있다, 하는 증거를 대보라 하니 어떤 사람은 “내가 예수를 안 믿었는데 기도하니 암이 낫더라. 그러니 예수님이 있지.”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또 암 걸려보지요. 그랬을 때 또 기도하면 또 낫는가? 제가 어릴 때 유명한 곽 규석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나중에 목사까지 되었지요. 암 걸렸는데 나았다가 온 동네 교회 다 돌아다니면서 간증했거든요. 그 사람은 결국 암으로 죽었어요. 기도해서 암 나았다면 왜 그 다음에 또 기도해서 암이 안 낫지요? 기도하니 무슨 효과가 있더라, 전도하니 우리 집안이 잘 풀리더라, 이런 것 가지고는 천국이 있다든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포착이 안 됩니다.

독을 마셔도 건재하더라, 라고 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저는 다시 또 독을 마셔보라고 해요. 두 번째도 통하는지를 보자는 말이죠. 십일조 하니 복 받더라, 첫 번째는 십일조 5만원 했는데 갑자기 50만원이 생길수가 있어요. 그 다음에는 50만원 십일조 해보라지요. 5만원에 50만원이라면 50만원 하면 500만원 생기는데 기업 활동은 왜 합니까? 요새 공장은 운영하기 싫어서 은행에서 저리로 빚내서 그것으로 다른데서 돈놀이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공장 운영은 하지도 않았어요. 감사 나올 때만 눈가림으로 대충 때우고 돈 놀이나 하는 것이 남는 장사거든요.

성경이 왜 있느냐 하면, 분명히 있는 천국을 포착하는 방식은 성경의 용어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용어는 개개인이 갖고 있던 체험을 인정하지 않아요. 이것은 어떤 체험이건 간에 누구나 다 해당되는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지 특수한 사람에 해당되는 체험을 가지고 ‘나는 천국 간다.’ 고 해 버리면 ‘너는 가는데 나는 왜 안 되나.’ 라고 돼버리면 문제가 크거든요. 모든 사람에게 공히 다 적용되면서도 천국이 있음을 포착해내는 증거, 그 개념이 뭐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법아래, 은혜 아래.’ 라는 용어입니다.

사람들이여기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자기 나름대로의 천국이 있음을 확신하는 증거를 따로 챙겼기 때문에 그래요. 저도 신학교 나왔습니다만 신학생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하나님의 뜻대로 신학교에 갔는데 등록금이 없어서 자퇴하려할 그 즈음에 이름 없는 어떤 권사님이 등록금하라고 돈 줘서 등록했다는 이야기들, 제발 그런 것 좀 그만 써 먹으라고 하고 싶어요. 대체 그런 권사를 몇 명이나 관리해야 신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권사가 신학교 등록금하라고 대 줬을 때 거기서 기껏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라는 것이 뭐냐, ‘나는 주의 종 맞다.’ 이것 하나 달랑 나와요.

그런데 내가 주의 종 맞다, 이것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근거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가 되겠어요? 아닙니다. 나 잘났다, 를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에요. 누가 뭐래도 나는 잘났고 나는 성도가 맞다, 그것을 폼 내기 위해서 그런 발언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권사가 등록금 줘서 졸업했다는 이야기가 로마서에 안 나고 물론 성경 다른 곳에도 안 나옵니다. 요한복음에 안 나오고 사도행전에 안 나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계시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똑 같이 적용될 때 하나님의 계시에요.

특수한 본인에게 해당되는 것은 계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느 교주치고 어느 인간치고 어느 사이비무당치고 자기만 특수한 존재라고 주장하지 않는 인간이 누가 있습니까? 그게 밑천이 되어서 교회가 장사가 되는 겁니다. 개인에게 주어진 특수한 경험을 보편화시키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을 전체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계시로 간주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주기철목사의 순교가 어떻고 한 경직 목사가 무슨 사업을 했다는 등의 이야기들, 대광고등학교가 야구나 잘하지 다른 것 뭐가 있는데요? 대체 뭘 잘하는데요?

왜 그런 것을 미끼로 사람들을 교회로 꾀이느냐 그 말입니다. 사이비스럽게. 사도바울이 죄 아래서, 은혜아래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집에 거미가 있으면 거미줄이 있는 것처럼 천국이 있으면 이 땅에 뭔가가 있는데 뭐가 있는가? ‘죄 아래서’와 ‘은혜 아래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죄 아래서, 혹은 은혜 아래서, 이것이 이론이고 그냥 말뿐인가? 실제로 죄 아래, 가 있고 은혜아래, 가 있다면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것은 뭐냐, 보편적으로 들이닥치는 것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가지고 “이것이 계시다.”라고 합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천국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계시에요. 죽음이외에 천국을 포착할 수 있는 완벽한 계시가 없습니다. 인간은 죽는다는 겁니다. 인간은 죽는데 인간들이 얼마나 얍삽한지 죽는 것까지라도 포장을 하고 장식을 해요. 전몰장병들 비석 앞에 현충일에 꽃을 가져다 놓잖아요. 서울에도 있고 대전에도 국립현충원이 있지요. 그 전몰장병들 앞에 있는 그 조화, 그 조화와 무덤 안에 있는 죽음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계도 없어요.

무덤 앞에 꽃을 바친다고 해서, 현충일에 나팔 분다고 해서 죽은 자가 살아납니까? 6.25때 전쟁터에 가서 죽은 자기남편이 돌아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돌아온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를 믿으면! 꽃 바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 기념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적으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예수 죽은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예수를 들먹입니까? 이 순신 장군이 언제 죽었습니까? 이 순신 장군 죽었는데 아직까지 이 순신, 이 순신, 하면 사람들 식상하고 지겹습니다. 산 사람이나 생각해야지 언제까지 죽은 조상을 생각합니까?

그런데 아직도 예수라니 예수가 뭘 해줬는데 예수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찾고 예수를 부르고 그러면 안돼요. 왜 안 되는가, 그것이 나의 믿음을 조작하는 행위가 포함이 되어버립니다. 주여, 주여, 부르는데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척 과시하는 행동들이 그런 행동들이라니까요. 교회 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이것도 조작행위에요. 믿음도 없으면서 교회 나오면 목사가 믿음 있다고 칭찬해주니까 믿음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교회와도 죽잖아요. 교회와도 죽는다니까. 정작 중요한 것은 왔다 갔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교회 올 때 또는 나갈 때 지금 내 안에서 천국이 있음을 증거 하는 거미줄, 그러니까 내가 죽음을 담고 있는 거예요.

말을 똑바로 하면 죽음이 나를 사용하고 죽음이 나를 활용하고 있는 겁니다. 죽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계속 살려주고 있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은 더 살고 싶어 하지만 정말 인생을 오래살고 인생을 아는 사람 같으면 죽고 싶어요. 내가 죽고 싶은데도 내 맘대로 못 죽을 때 비로소 죽음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나의 주인인 죽음이 시키는 대로 못 죽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요. 젊은 사람들은 못살아서 난리지만. 이게 죽어도 안 죽어. 아까 김 재성 집사님이 선인장을 보면서 “야, 생명이 이렇게 끈질기다!” 하는데 생명이 끈질긴 것이 아니고 죽음이 끈질겨요.

죽고 싶어도 못 죽어요. 죽고 싶어도 죽지는 않고 차만 홀라당 태웠잖아요. 죽는다는 사람은 바깥으로 뛰쳐나오고. 하나님께서 천국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아무리 조작해도 그 조작했다는 사실 자체를 전부 폭로시키는 그것만이 계시가 되는 겁니다. 죽어야 될 것이 살려고 하니 얼마나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조작으로 장식을 해 줘야 되겠습니까? 세례 받고 성만찬하고, 이 모든 짓거리를 한다고 해서 자기가 부활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부활된다는 것은 자기에게 곧 죽음이 우리의 숙명이고 운명임을, 우리가 천국을 따내는 것이 아니고 천국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죽여주시는 그 손길에 의해서 우리는 부활되는 거예요.

그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순서적으로 뭘 앞장세우고 뭘 뒤에 세웠는데 뭘 앞장세우는가, 하나님께서 법을 앞장세웠습니다. 법을 앞장세워서 모든 인간은 법 앞에 죄인이고 그 죄 값은 사망임을 분명히 이야기하셨어요. 우선 법이 먼저 들어가는 겁니다. 십계명, 율법, 안식일, 이렇게 먼저 법이 성경에 먼저 들어와요. 들어오고 난 뒤에 인간에게 돌아올 것은 저주와 심판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뭐냐, 은혜가 뒤차로 주어지는 거예요. 앞 차로 법이 오는 거예요. 택지조성 할 때 가만 보세요. 도시계획 공고만 해놓고 공사가 늦어지면 그 노는 땅에서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농사를 지어요.

그 노는 땅에 상추나 파 같은 것 키웁니다. 돌멩이로 어설프게 경계 만들어놓고 농사짓거든요. 어떤 사람은 자기 것도 아니면서 지나가다 상추 뜯어가는 사람도 더러 있지요. 그분이 누구라고 제가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택지조성 할 때는 상추나 파 심어놓는 데다 덤프트럭이 와서 흙으로 확 부어버립니다. 소박한 낭만, 꿈, 꽃 같은 18세 여고생, 다 필요 없어요. 고추 키우고 상추 키우는 것은 자기생명의 끈질김을 보여줄지는 모르지만 그 생명의 끝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게 생명이라고 보이지? 사실은 죽음이야.” 아직 못 죽어서 지금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덜 죽어서 나름대로 어떻게 죽음을 감춰 보려고 ‘난 안 죽어. 난 영원히 젊음이야.’ 이렇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조작하면서 더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이 모든 것이 정작 하나님의 법이 올 때는, 그 법 앞에서는 “네가 이 십계명 지켰어? 못 지키면 저주야!” 죽음 정도가 아니에요. 심판이고 저주에요. 못 지켰으면 완전히 택지조성 할 때처럼 덤프트럭 동원해서 완전히 흙을 다 덮어버립니다. 노인들 데모해도 소용없어요. 시에서 도시계획하고 택지조성하고 있는데 누가 뭐라 할 수가 있습니까?

그 다음에는 뭐가 오느냐, 바로 은혜가 옵니다. 이게 앞에 온 것을 ‘법아래서’, 두 번째 오는 것을 가지고 ‘은혜 아래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6절에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제가 읽으면 들었던 기억은 나지요. 그런데 들은 기억은 나지만 여기에 예수 앞에 뭐가 전제가 되어야 하는가 하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라고 해서 율법이 모세를 통해서 오신 취지를 모르게 되면 그 뒤에 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취지도 캄캄하게 모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율법이라는 경로를 제쳐두고 예수, 예수, 부른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니에요. 율법을 주신 것은,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십일조와 안식일계명을 주신 것은 어떤 인간도 그 법을 지킬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겁니다. 법을 못 지키니 새삼스럽게 죄를 짓고 법을 못 지켜서 죄의 벌로서 죽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죄인이고 애초부터 죽어야 할 존재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거예요. 모르기에 법을 줘서, 새삼스럽게 어기라는 말이 아니고 새삼스럽게 법을 어겨서 죄를 지으라는 말이 아니고 처음부터 너는 어길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 이 땅에 그 사명으로 태어난 거예요.

태어난 것 자체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법을 못 지키는 존재임을 분명히 확인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갈 곳은 죽음이고. 모세를 통해서 법을 줬고 법아래 있는 모습과 은혜아래 있는 모습, 이 양쪽을 다 보여주시는 사건이 무슨 사건, 바로 십자가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아니고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한테 버림받아요. 아버지, 숨어 있는 하나님, 예수님만 아는 아버지,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은 조작된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만 아시는 그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을 때 그것이 사실은 우리의 최후의 모습이에요. 우리는 기껏 잘난 체를 해도 우리가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을 모르기에 그동안 잘난 체 했지만 우리가 미처 모르는 것을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다 언급을 해 줬어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죄가 아니에요. 우리의 죄를 대신 가져갔음에도 불구하고 대신해서 그렇게 버림받은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버림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주제에 무슨 교회를 다니고 십일조를 하고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는데 지금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기도하니까 암이 나았다고요? 암 나은 그것이 부활입니까? 마리아 마르다 오빠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았는데 그랬어도 또 죽었어요. 여러분, 겨울이 되면 봄이 그리워지지만 봄은 후딱 지나가고 어느새 여름이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돌리는 다람쥐 체 바퀴처럼 갇혀 있어요. 이거다, 싶으면 어느새 달라지고 또 이거다 싶으면 또 달라져요. 산다는 게 어지럽고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어요. 뭔가 우리를 정신없이 돌리는 그 원리, 그 원리는 바로 은혜와 율법, 율법과 은혜 사이에서 돌려버리는 겁니다. 잘난 체를 하고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하면 율법 들이대 버리면 ‘어, 나는 죄인이구나. 나는 절망이다. 지옥가야 해.’ 하는데 ‘어, 이것은 은혜구나.’ 죄와 은혜사이에서 계속 돌리는 거예요.

계속 돌리게 되면 그 틈 사이에서 뭐가 나오느냐하면 바로 숨어 있는 천국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를 통해서, 아까 기도하신 장로님의 기도 내용대로 정말 같잖지도 않는 이 쓸모 짝이 없는 것을 재료로 사용해서 고귀한 천국은 이런 자들의 것임을 그런 조치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발현되도록, 향기가 나오도록 우리를 꾸준히 사용하십니다. 어떤 분이 질문을 했는데 제가 이렇게 답변을 했지요. 고린도전서 2장에 영에 속했다, 하는 말이 나오거든요. 영에 속했다는 말을 하게 되면 제가 그렇게 오해 안하는 사람을 별로 본적이 없어요.

영에 속했다고 하니까 듣는 사람들이 다 어떻게 오해를 하느냐하면, “내가 성령을 가지면 구원받습니까?”라는 식으로 오해를 해요. 저는 영에 속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가지면 됩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의 문법, 우리의 언어가 자꾸 소유해야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대로 우리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 우리가 소유당해야 그게 영에 속한 사람이에요.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왜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 하면, 버릇이 뭔가 자꾸 가지고 싶은 거예요. 오늘 본문 15절을 잠시 어렵게 해 보겠습니다.

‘잠시만’입니다. 제가 이렇게 언급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요. 15절에,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말을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은혜아래 있지 아니하고 법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라고 이해해요. 제가 어렵다고 했지요? 분명히 위치를 바꿨어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라는 말을 사람들이 못 알아듣고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우리가 은혜 아래 있지 아니하고 법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제가 바로 해석을 해 드리겠습니다. 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을 때는 법아래서 죄를 지었는데 이제는 성령을 받아서 은혜를 받고 알았으니 이제는 은혜를 안 사람으로서 더 이상은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라는 식으로 사람들이 이해하더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이해하는 것을 듣고 제가 로마서 6장 15절을 보니까 방금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이 사도바울의 말을 거꾸로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우리가 은혜 아래 있지 아니하고 법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이제는 우리가 제대로 법을 완수할 수 있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성령을 우리에게 줬다, 라고 이해를 하는 거예요.

이것을 ‘개혁주의성화론’이라고 합니다. ‘개혁주의성화론’은 따지고 보면 2천년 기독교역사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전에는 죄 아래 있기에 마음 놓고 죄를 지었지만 이제는 은혜 아래 있기 마음 놓고 죄 짓지 말고 죄 안 짓는 사람으로 살아야 거룩한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순종해야만 의의 종으로서 의에 순종하게 된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마귀생각입니다. 왜 그것이 악마적 생각이냐 하면, 법아래 있을 때 법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죄를 지었구나.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이렇게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이러나저러나 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겁니다.

“목사님, 그게 어디 나옵니까?” 그것이 로마서 5장에 나오거든요. 율법이 있기 전에도 우리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어요. 그 죽는 이유를 율법을 줌으로써 차후에 확인시키는 겁니다. “아, 잇몸이 왜 이렇게 흔들리지? 잇몸이 왜 이렇게 아프지?” 그런데 나중에 약을 주니까 잡아주는 이 느낌, 인사돌, 이렇게 하니까 약의 효과 안에는 처음부터 우리 이빨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그 원인이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율법을 준다는 것은 율법 지키라, 그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였음, 이것을 그 율법에 포함시켜서 준 거예요. 캡슐처럼.

법이라 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에 따라 지킬 수 있는 법 같으면 안 줬거든요. 이 법을 못 지키는 것은 우리 의지의 권한 밖에서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싸움과 관련되어 있는 사실이에요. 사람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워요. 속에서 나오는 것은 자기 관리 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나오는데 탐내지 말라, 가 들어왔으면 탐내지 말라는 것이 탐내지 말라, 이것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고 탐내는 것이 네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네 안에 들어 있는 괴물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속에 있는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이제부터 너는 율법을 들었으니까, 이제부터 너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니 이제부터 너는 법을 지키면 돼. 탐내지 말라는 법을 들었으니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할 수 있는 존재야.’ 이렇게 스스로 자기긍정에 나서는 겁니다. 그럴 것 같으면 산상설교만 이야기하고 율법만 이야기하면 되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 율법을 많이 지킨 사람들, 토익시험으로 치면 900점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겁니까? 그런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에요.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강도와 세리와 창녀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중풍병자가 왔잖아요. 중풍병자가 친구들에 의해서 병 고침 받기 위해서 왔을 때 누구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중풍병자 같은 사람들을 낫게 할 수 있다.’고 한 겁니다. 주님 생각을 전혀 몰라요. 내 몸만 낫게 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가지고 뭘 뽑아내느냐하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병 낫고 안 낫고는 천국이 있음을 포착해 낼 수 있는 개념이 못됩니다. 죄 아래서, 의아래서, 다른 말로 하면 법아래서, 율법 아래서, 이것으로 천국이 있음을 포착해내거든요.

예수님께서 중풍 병 나으러 온 사람을 가지고 그것은 네 생각이고 주님께서는 거기서 죄 사함을 끄집어내 버립니다. 네 속에 죄 있는데 그 죄를 내가 용서해줬다는 겁니다. 중풍병자는 생각하기를 내가 중풍 병 걸렸다고 할 때 무슨 생각하느냐 하면……, 여러분이 좀 덥더라도 잘 들어주세요. 중풍 병이 안 걸렸을 때와 걸렸을 때의 전 후를 비교해요. 예수님을 통해서 중풍 병이 안 걸린 시점으로 돌아가면 만족하겠다는 거예요. 그것을 위해서 예수 찾고 교회 찾고 금요철야 하고 새벽기도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네 생각이죠, 네 생각. 그것은 인간들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포착하는 증거는 될지 모르지만 천국이 저기 있다는 것을 포착하는 증거는 될 수 없거든요. 주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줌으로 말미암아 네가 죄를 몰랐을 경우, 중풍병자라는 것은 하나의 계기니까 중풍병자든 뭐든 어떤 경우든 간에 중풍병자 속에 죄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했다는 그 사실, 죄인 되었던 그 전과 예수님 때문에 이제는 의인이 된 그 후가 이젠 내가 병자냐 아니냐를 떠나서 천국이 저기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포착하는 증거로서 주님에게 활용당할 때 그게 주께서 오신 뜻이 되겠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 보고 우리 자신을 향하여 계속 추궁하는 거예요. 드라마에 이런 장면이 있잖아요. 남자친구가 여자 친구를 괜히 전봇대 뒤 후미진 골목으로 데리고 가죠. 뽀뽀하고 싶어서 그러죠. 아버지 잘 계시나, 어머니 잘 계시나, 이렇게 그냥 거리 좀 떼고 이야기해도 되는데 코앞에 얼굴을 막 들이 대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자 친구가 부담이 되니까 “떨어져서 이야기하자.” 합니다. 그런데 또 바짝 다가서면서 “요새 회사는 잘 다니나?” “잘 다니는데 좀 떨어져서 이야기하자니까.” 나중에는 여자 친구가 담벼락에 등이 딱 붙어서 어디로 갈 데가 없어요. 그때 뽀뽀가 탁 이뤄지거든요.

지금 뽀뽀 이야기까지 끄집어내야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주께서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신앙생활 잘 하고 있어? 어디 몸 아픈 데는 없고?” 그러면 우리는 “주님, 주일마다 교회 가니까 그 때 또 이야기하고 좀 떨어집시다.” 그게 아니고 계속해서 “애 공부는 잘 하고? 사업은?” 가정이고 사업체고 농장이고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있게 되는 그 밀어붙이는 방식, 그것이 세례요한이 했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지금까지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줬지만 예수님이 온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따라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세상 죄를 보여주는 견본으로서 우리가 채택이 된 겁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교회를 다녀봐야 우리가 얼마나 위선자고 날마다 교회 예배드리면서 자기를 품위 있는 존재, 고상한 존재로 장식하는 인물로서 교회에서 믿음 좋은 척 하고 다닌다는 것, 주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용한 거예요. 어떤 분이 60대 중반쯤 되었는데 교회에서 전도를 많이 한다는 거예요. 나이 60대에 퇴직해서 자식들 출가 다 시키고 나이 많은 권사님들이 밖에 나가서 노방전도 하는 거예요. 그거 주의 일 아닙니다. 교회 부역하는 거예요. 낼 돈은 없고 믿음 없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 전도로 하늘나라 확장, 확짱!, 하늘나라 확장하는데 보탬이 된다는 거죠. 따라서 나의 하는 일을 거부하는 것은 사탄의 짓이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겁니다. 지금 그 짓하는 거예요.

선교도 마찬가지에요. 선교하는 것이 하늘나라 있다는 것을 포착해내는 증거물이 될 수 없습니다. 선교를 하지 말까요? 선교하게 하신 것은 선교하면서 내가 얼마나 나를 위장하는 위선자일 뿐임을 토해내도록 주께서 사용하신 거예요. 주님께서 법을 줬다 하는 것은 너 거기 있다는 거예요. 그냥 거기 있는 것이 아니고 너를 위장하면서 거기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법 아래 있을 때는 사람은 죄인이면서도 죄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너무 빨리 지나갔으니 다시 천천히 해보겠습니다.

주께서는 이미 죄인으로 지목했기에 율법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을 가지고 죄인, 덜 죄인, 안 죄인, 율법에서 벗어나려는 또 다른 죄를 계속해서 풍성히 짓고 있는 그런 죄인으로 보이는 겁니다. 위선자에요, 위선자. 목사 되었다고 더 착하다고 거룩하다고 교인들 앞에 위장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가르친다고 마치 다 지킨 것처럼 각인시키는 쇠뇌작업. 따라서 법이 있는 곳에는 뭐가 있는가, 법은 네가 거기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 법을 주는 거예요. 죄인의 모습으로 거기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은혜가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은혜가 오게 되면 “나 거기 있어.”가 뭐로 바뀌는가 하면 “주님이 여기 있습니다.”로 바뀌어요. 주님이 여기 있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주께서 시키는 일, 그게 비록 죄의 모습이라도 주께서 시키는 일이 되기에 은혜 아래서는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죄를 짓고자 해도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 일서 5장 18절에 보면 사도요한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사도요한 자기혼자 아는 것 같아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범죄를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범죄가 성립이 안 되니까. 범죄라 하는 것은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모든 짓거리가 율법 앞에서 범죄로 드러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 천국 가겠다고 예수 믿는 것, 그것이 범죄에요. 예수 믿는 것이 범죄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왜 범죄인가, 예수 믿는 그것이 행함이 되기에 범죄에요. 그래서 은혜 아래 주어지게 되면 율법아래 있는 자에게 추가적으로 은혜아래 있기에 은혜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아래 있는 모든 나가 결국 은혜 아래서는 죽은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결국 죽은 자가 되는데 죽은 자게 되게 하시는 그 분, 나를 죽은 자로 지적하는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거예요.

그 살아 있는 것이 뭐냐, 그게 은혜 아래 있는 겁니다. 제가 아까 성령에 속한 자라 했지요. 그런데 성령을 내가 쥐는 이것은 범죄입니다. 믿음이 아니고 행함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우리를 지배할 때 그 관계가 믿음관계고 그것이 은혜의 관계에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갈 2:20)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내 중심에서 일어나는 범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마음껏 드러내는 작용이 은혜고 그 작용을 하시는 분이 천국에 계신 분이라서 우리에기 일어나는 모든 일, 죄를 들추는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모든 주인공을 주님의 공로와 은혜에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의 의의 쫄다구이기에 그걸 의의 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의의 종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왜, 주께서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나게 하시기 때문에. 죄를 드러나게 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의고 나의 공로라는 소리를 입에서 발설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모든 것이 범사에 감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이제 이해가 될 겁니다. 물론 이해 될 사람만 이해되겠지만.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죄라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을 때나 죄가 되는데 내가 죽은 마당에 죄를 짓든 의를 짓든 이것은 내 소관이 아닌 겁니다. 내 소관이 아닌데 내가 죄를 지었다, 이것도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아, 진짜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미치겠어, 정말! 내게 일어난 상황이 내가 일으킨 상황이 아닌데 왜 내가 죄를 지었다고 자기 자신을 왜 책망하고 벌을 줍니까? 이미 용서받은 상태인데 왜 내가 나를 용서 못해요. 이것은 문제가 있잖아요. 문방구직원이 문방구의 장래에 대해서 자기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주인이 따로 있잖아요.

우리는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은혜가 주인이고 천국에 계신 분이 주인 같으면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에 있다는 뜻이고 사랑에 있다면 1년 된 애인이 죽더라도 자기가 따라서 자살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니 저는 죽을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자기가 왜 자진해서 자살하려고 합니까? 이것은 어떤 연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습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도 못 죽어서 그렇지 성질 같아서는 죽고 싶어도 자식 때문에 못 죽는다, 들인 밑천 때문에 못 죽는다, 인생이 아까워서 못 죽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죽었어요. 이미 죽은 인간이 새삼스럽게 죽겠다는 말, 더워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범사에 그냥 감사하세요. 배부르거든 배부른 것도 감사하고 배불러서 소화불량 된 것도 감사하고, 우리는 모두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따로 내가 의를 행하면 안 됩니다. 따로 내가 의를 행한다는 그 자체가 그게 죄짓는 거예요.

선악적인 사고, 죄냐 의냐, 그런 사고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율법은 우리를 지적하는데 우리는 이미 지적당했어요. 우리는 죽은 놈입니다. 죽은 놈이 새삼스레 무슨 일을 벌입니까? 죽게 하시는 주의 일만 있을 뿐이에요. ‘주여, 오늘도 이런 일을 통해서 나를 죽게 하시는구요.’ 피자집에 가서 피자 한 조각 먹으면서 ‘맛있다. 오늘도 이 맛있는 것을 먹게 하시면서 저를 죽이시는군요. 진짜 맛 죽인다. 정말!’ 인생 살면서 전도서에 나오는 것처럼 즐겁게 사세요. 전도서에 있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내 말이 아닙니다. 즐겁게 사세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 뜻이 아니고 모든 것이 천국을 보여주는 하나의 거미들로 거미줄 치면서 가야 되기에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하여, 주신 은혜를 위하여 우리가 즐겁게 살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해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구원하려고 삼위일체 믿고 예수 믿고 성령 믿는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인데, 교회에서 잘 보이려고 선교비 내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예배참석하고 성경공부 참석하는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인데 그저 주께서 쓰시는 대로 주의 은혜만, 용서해주심만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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