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3. 4. 19) 2강
광주 강의(2013. 4. 19) 2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36)
광주 강의(2013. 4. 19) 41-2
다윗과 왕을 연결시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언약이 투입된다고 했지요. 이것을 동그라미를 쳐 봅시다. 제가 동그라미를 치는 이유는 이곳이 하나님의 모든 일에 중심지가 되고, 나머지 세상일은 중심지(블렉홀)에 휘말려 가는 양상으로 세상은 돌아갑니다.
그런데 다윗이 언약대로 왕이 된다는 것은 언약이 주어지지 않은 다른 민족들은 이것을 모르지요. 모르니까 다른 민족한테는 중심지가 없는 상태에서 그냥 막무가내로 하루 일과를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왜 태어났지? 내가 왜 살지? 왜 죽지? 몰라. 골치 아파. 그냥 살자.” 중심이 없고, 의미도 없어요.
정신분석학자에 따르면, 사람이 미신이 없으면 정신병에 걸린다고 합니다. 뭔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정신병이 걸리기에 정신병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뭔가를 의지하고 믿게 되는데, 언약이 없는 상태에서 무조건 믿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언약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언약의 자리에 왕으로 채워집니다.
인간들이 최고의 자리, 왕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왕은 블렉홀입니까, 산 정상입니까? 우뚝 선 산봉우리가 됩니다.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왕이 비인격적이고, 망나니고, 폭력적이라 왕의 자질이 없다면 그 왕을 교체해야 됩니까, 그냥 두어야 합니까? 왕은 자질과 상관없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임금의 자리는 신의 자리지 인간의 자리가 아닙니다. 이게 사무엘상, 왕 제도에서 나오잖아요. 그 왕 제도가 무엇인가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자리. 그것이 왕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왕의 자리가 있음으로써 나라가 안정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미흡함을 채우는 목표나 목적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데 그 목표와 목적이 뭔가 하면 미지의 X입니다. 모른단 말이지요.
라캉이란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욕망에 따라 살지만 그 욕망의 끝은 어딘지를 모른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입니다. 골프 선수가 골프의 끝이 어디입니까? 신지애입니까, 박인비입니까? 소랜스탐? 아닙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듯이 계속 넘어야 합니다. 어디까지 넘는가? 본인도 몰라요. 그냥 계속 가보는 거예요. [강남스타일] 노래 가사처럼 “갈 때가지 가보자.”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음악, 예술, 스포츠는 목적 없는 곳으로 계속 치닫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무작정 끊임없이 달려가는 거예요. 이 자리를 미리 왔다는 사람들이 한 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까뮈라는 사람인데, 알제리 사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의 책[이방인]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했어요. “사람은 아무 이유도 목적도 없다. 마치 시지프스처럼 바위를 들고 산 정상에 올라가서 놓으면 굴러서 내려간다.”
바위를 굴려 산으로 올라 갈 때는 할 일이 있어요. 그래서 힘을 쓰고 계속 위로 위로 올라갑니다. 정상이 이를 때까지. 그런데 정점에 이르면 평평하지 않습니다. 뾰쪽해요. 그곳에 이르는 순간 다시 바위는 아래로 굴러갑니다. 돌이 아래로 굴러 갔을 때 인간이 할 일은 뭡니까? 돌을 다시 산 정상으로 올리는 일이지요.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인생이란 허무하고 의미 없다고 했는데, 까뮈는 그렇게 보지 않고 ‘허무하다고 여기지 말고 허무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이미 우리는 완성에 도달했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바로 ‘부조리한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섬긴다고 하는데 그것도 다 거짓이고 윤리, 도덕도 거짓이고 그러기에 처음부터 인간은 부조리한 존재라고 하면 소설 이방인의 내용처럼 엄마가 죽는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해변에서 아랍인을 총으로 죽였는데, 판사가 왜 죽였는지 물으니까 “햇볕이 따가워서 죽였습니다.”라고 해요. “그렇다면 당신은 사형!” 그런데 반응은 ‘사형당한들, 사형 안 당한들 멋하겠나?’ 이런 식입니다. 까뮈의 소설에 보면, ‘사형시키면 사형 당하면 되지.’ 하고 창가의 별을 보면서, 저 별이나 인간이나 다 부조리한 것이다. 별이 왜 있는지 별은 몰라요. 그냥 떠 있는 거예요. 만약 별에게 “별아, 네가 왜 거기 떠 있니?”라고 물으면 별은 뭐라고 하겠어요? “왜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니?” 하면서 오히려 질문하는 자를 이상하게 보겠지요. 이처럼 “왜 질문할 필요도 없는 것을 질문하면서 스스로 고민에 빠져 있나? 이 바보들아!”라는 것이 까뮈가 소설 [이방인]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 까뮈처럼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어? 사람들이 자살 안하는 이유가 뭡니까?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 목표가 뭐냐 하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 이것을 향해 시선을 모를 때 개별자가 주체로 바뀌는 겁니다. “아빠, 날 무시하지 마! 내가 목표하는 자리는 바로 저것이야.” 하면 --
사법고시 합격 안 돼도 그것을 바라본다는 것과 바라보고 있으니까 사법고시 합격자의 모습과 내 모습이 연결되어 있을 때 나는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나는 단순한 개별자가 아니고 장차 훌륭한 판사가 되어 있는 그 주체를 미리 앞당겨서 나의 주체로 삼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판사에게 물어보세요. 제가 아는 판사가 있는데 지금은 변호사를 하고 있어요. 돈 벌이가 시원찮아요. 판사 할 때는 사람들이 알아주고 목에 힘을 주고 다녔는데 변호사 개업하고 난 뒤에는 동창회 가도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요. 변호사는 많이 있거든요. 키 작은 판사와 어떤 여자가 결혼한 후에 판사와 결혼했다는 자부심은 순간이고 키가 좀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늘 있어요.
그래서 인간에게는 왕이 있어야 되는데, 왕은 신의 구현체입니다. 신이 있기에 왕은 있어야 됩니다. “여왕이여 영원하소서!” 영국 국가이지요. 나의 주체를 적립하기 위해서는 왕이 꼭 필요한 거예요.
왕이 있다는 것은 신이 있다는 것이고, 신의 아들이 왕이니까요.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의 나라’라고 합니다. 일곱 머리 열 뿔이 나옵니다. 다니엘에 보면 뿔을 왕이라고 했어요. 사람들이 왜 왕을 구하는가 하면 왕에게는 권력(강함)이 있어요.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강한 자에게 의지해요.
‘스파르타’(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도시 국가)에서는 아이를 키울 때 아이는 공공의 재산이기 때문에 엄마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키웁니다. 언덕에서 떨어트리고 죽으면 버리고 산 아이만 키웁니다. 아주 강하게 키우는 것이지요. 즉 어릴 때부터 국가에 필요한 전사로 양육을 합니다. 이 스파르타는 노예가 90%입니다. 그러니까 10%가 90%를 지배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배하는 자가 강해야겠지요.
이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일은 노예들에게 시키고) 군사 훈련만 합니다. 그리고 힘이 강하고 일 잘하는 노예들은 모아서 죽입니다. 왜냐? 이들은 나중에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이 강하게 키웁니다. 왜냐하면, 여성이 없으면 아들을 못 낳고 그러면 전투할 군인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마부터 굉장히 강합니다. 아이들은 일곱 살부터 공공의 재산이 되어 훈련을 받는데, 선배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먹을 것은 안 줘요. 그러면 일곱 살 아이들이 먹을 것을 훔쳐야 됩니다. 훔치다 들키면 죽입니다. 왜냐? 도적질 했다고 죽이는 것이 아니고 들켰다고 죽입니다. 즉 그렇게 재치가 없는 무능한 자는 이 나라에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존재의 이유가, 국가 공동체를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국가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만 공동 소유가 아니고 여자도 공동 소유입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가 부실한 남자와 관계를 하면 용서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강한 남자와 동침해서 강한 아들을 낳아야 해!” 이런 식입니다.
스파르타의 300명이 100만 적군을 이겼다고 하지요. 사실은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25,000명 정도를 이겼습니다. 그래도 대단한 일이잖아요. 300명이 25,000명을 이겼으니. 이 정도로 스파르타의 훈련은 강합니다. 사람을 전쟁 기계로 만드는 교육입니다. 이런 교육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사사로운 정은 다 끊어버리고 이성적 인간으로 만듭니다. 왜 그런가 하면, 조직이 우선이기 때문이에요. 조직이 우선이란 말을 바꿔 표현하면 ‘모든 인간은 왕의 소유’라는 말입니다. 왕의 소유가 될 때 사람들은 기꺼이 왕의 이름을 위해 영화롭게 죽습니다.
스파르타에서도 300명의 전사로 뽑히려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300명에 뽑히면 가문의 영광이고 그 동네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그 300명의 전사들에게 주는 상이 뭔가 하면 2인분 식사를 줍니다. 그러면 그 식사를 자신이 먹지 않고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제공합니다. “당신이 이 음식을 먹고 나보다 더 강하고 힘 쌘 남자와 동침해서 이 나라에 훌륭한 인재를 생산해 다오.” 이런 마음으로.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간통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실한 아이를 낳는 여자는 사람취급을 못 받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나라에 안 태어난 것이 천만 다행이지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우뚝 솟은 산이 있고, 그 산은 왕이란 이름으로 보이지 않는 짐승이 되는데, 짐승은 모든 세상을 강자 중심으로 질서를 만듭니다. 그런데 언약이 오게 되면 우뚝 선 산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구멍이 뻥 뚫립니다. 죽입니다. 스파르타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요. 이 나라에서는 죽은 자를 보면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살아있을 때 뭘 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데 언약의 주님은 사는 하나님입니까, 죽는 하나님입니까? 죽는 하나님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모습은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겁니다. 저항이나 반항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조용히 끌려가서 죽습니다.
조용히 죽는 그것이 짐승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강자만을 쳐다보고 있는데 몰래 빠져나온 거예요. 어떻게? 약한 자로 빠져나온 겁니다. 함께 빠져나오면 살고 강한 자를 쳐다보고 있으면 언약을 잊은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축구 경기는 관중석이 텅 비어있어요. 그러나 유럽의 축구 경기장은 빈자리가 없어요. 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의 축구장은 로마의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이 경기에서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짐승들의 혈투를 지금은 공 1개 놓고 싸우는 것이 축구 경기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무식해요. 공을 차가 상대 골대에 넣으면 돼요. 골 잘 넣는 선수에게 연봉 200억, 300억 줍니다. 개인 소득이 중소기업을 능가합니다.
이런 세상이 정상적인 것입니까? 승리가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한테는 승리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김이 없어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13:4).”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지만 만약 안 살려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성령이 아니면 사람들이 언약 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냥 들어오는 척할 뿐이지요. 그냥 난자만 구경할 뿐 정자가 직접 난자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허락 받은 사람에 한해서입니다. 그냥 못 들어가고 말씀에 싸여서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자신이 약하냐, 강하냐가 의미 없습니다. 환란, 핍박, 위험, 적신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봄이 되에 벚꽃 잎이 떨어져 얼굴을 치는데, “어디 감히 내 얼굴을 떼려!”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가을이 되어 시원한 바람이 불면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머플러를 날리면서 해변에 앉아서 첫사랑을 추억하지요.
소위 세월을 탄다. 언약의 세월, 종말에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사랑을 만끽하는 사람은 이미 말씀의 바람이 분 사람입니다. 언약이란 우리가 언약을 쥐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만들어낸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이미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 언약에 의해서 내가 끌려가고 있구나!”
그러면 언약에 끌려간다는 증거가 뭔가 하면, 세상 사람들이 찾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이 다 어리석게 여기는 십자가 피가 성도에게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인데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때 사도바울은 얼마나 환희와 감격과 기쁨에 충만해서 이런 소리를 했겠어요? 다른 사람은 안 기쁜데 바울 혼자 기뻐하고 있어요. 만약 사람들이 바울의 기쁨에 함께 했다면 그를 당회장으로 모셨을 거예요. 아무도 동조하지 않아서 혼자 기뻐했어요. 혼자 기뻐도 괜찮아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십자가라는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이 세상에 구멍을 뚫듯이 우리 마음에도 구멍을 뚫어서 더 이상 내 개인의 존재와 목적은 의미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살면 예수님 때문에 오늘 하루도 산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우리는 죽습니다. 죽으면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지옥으로는 가지 못하고 예수님의 주 되심을 증거하는 자리에 합류하게 됩니다. 피조물의 역할이 주님을 위하여 만들어졌기에 그 역할에 부합되도록 우리는 그렇게 조치를 당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다윗이 왕이 될 때 중간에 언약이 들어가게 되면 다윗은 무엇을 경유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냥 왕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다윗이 그냥 왕이 되나, 다윗이 아들이 되어 왕이 되나 다윗 개인의 입장에서 차이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왜 다윗은 아들이란 소리를 듣고 왕이 되는가 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기 때문에 다윗이 미리 그 역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다윗의 기능을 오늘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이런 쪽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나는 구원 받고 싶어요. 나는 여기 있고, 구원 받으면 그는 천국 사람이지요. “나는 구원 받고 싶어요.” 그냥 갑니까? 아닙니다. 뭘 거쳐야 돼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칠 때 예수님 때문에 아들 되어서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구원 받습니다.
이걸 만약 빼버리면 말이 안 됩니다. “나, 예수 믿고 싶어요.” 왜? “구원 받고 싶어서.” 이건 자기 구원에 욕심이 있지 전혀 예수님은 중요하지 않아요. 예수님을 경유해서 예수님 안에서 용서 받고, 예수 안에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경유는 성령께서 하시지 우리 힘으로는 못합니다. “나는 구원 받았다.” 이것만 좋아하는데, “누구를 위해서?”라고 물으면, “주님을 위하여 구원 받았다.”고 해야지,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구원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의 구원으로부터 구원받을 때 비로소 구원 된 것이다.’
‘내가 구원 받고 싶어요.’하는 것은 아직 구원이 안 된 것입니다. ‘나는 구원을 위해서 구원 되었다.’고 하는 사람만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자기 구원론에 아직도 매여 있다면 그것은 자기 주체를 걱정하는 것이고, 총알을 아직 안 맞아서 그래요. 총에 맞아 구멍이 나야 돼요. 내 인생에 목적과 의미를 두었던 것이 뻥 구멍이 뚫려서, 다른 사람이 어떤 소리를 해도 바람이 술술 나와서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이 없어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구멍을 메우려고 해요.
25절을 봅시다.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유대인들이 이 말에 깜빡 속았어요. 왜 속았는가 하면, 여기 ‘땅’이 나오는데, 이 땅은 어디입니까? 옛날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살던 그 땅을 그 자손이 차지하게 되는데, 그 때 다윗이 왕이 되어 약속의 땅에 살게 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이런 식으로 해석을 했어요.
유대인들이 로마에 포로 잡힐 때 언젠가는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1948년에 영국에게 뇌물을 주어서 기어이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영국은 원래 그 땅은 팔레스타인들에게 준다고 약속했어요. 지금 터키와 싸우고 있는데, 터키를 이기려면, 터키는 1차 대전 때 저쪽 독일편에 속했기 때문에 터키를 이겨야 터키가 지배한 오스만제국의 그 땅을 연합군이 다 먹을 수가 있어요.
먹게 될 때 그 터키의 지배를 받던 그 당시의 이슬람 족속들에게 약속을 했어요. “우리 영국 편에 서게 되면 당신의 잃어버린 그 땅을 다시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스라엘이 개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참으로 억울하겠지요? 그런데 억울할 것도 없어요. 성경의 언약으로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누구를 믿어야 됩니까? 주 여호와를 믿어야 하는데 연합군과 영국을 믿었어요. 영국을 왜 믿습니까? 그 때는 그들이 강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의 일곱 머리 열 뿔의 비밀을 알고 싶습니까? 사람들은 계속해서 강자를 찾습니다. 가수 현미씨가 자신이 치매에 걸린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기 위해 어떤 병원을 찾아갔어요. 의사가 질문을 합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이름을 지금부터 역순으로 이야기해 보세요.” “박근혜, 이명박, 김대중” “한 사람이 빠졌지요?” “아, 노무현 빠졌구나.”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은 빼게 되어 있습니다.
5천만 인구 중, 박근혜, 이명박, 노무현, 김대중 이런 사람이 중요합니까? 이들은 약자가 아니고 강자입니다. 만약 십자가마을 사람들 외우라고 하면 약자들을 거론해야겠지요. 별 볼일 없는 사람. 여기 다 모였네요.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소자는 이름도 없어요.
이 짐승의 세계와 얼마나 다른지 몰라요. 차별화 시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그 쪽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언약입니다.
여기서 질문합니다. 유대인들이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 이후 율법은 준수한다고 해놓고는 짐승의 나라가 되었지요. 이것을 [중간기]라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고 유대 민족을 지키기 위해 했던 일이 뭡니까? 약자의 편에 섰던가요? 아니지요. 강자에게 돈을 줘서 권력을 사고 그들의 힘을 의지했지요.
강자 의존 성향이 결국 유대나라를 짐승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어떻게 와야 돼요? 그들이 원하는 것이 뭡니까? 강자의 모습을 띤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나귀를 타셨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식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때 그냥 생뚱맞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배경과 조화를 이뤄 말씀하십니다.
죄인들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찾아오신 거예요. 예를 들어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시며, 오직 내 몸 받쳐 복음만 전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주께서 물으시죠. “그렇게 복음 전하면 내가 뭘 해줄까? 딸 시집 잘 가고, 부자도 되고, 교회도 부흥하는 것을 기대하지?” 이렇게 나오십니다.
우리들 말에 주님은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근사하게 포장해도 우리 마음속은 돌이 떡이 되고, 인기 얻고 -- 이런 것들입니다.
이러해도 구원 받는 것은 우리 마음가짐이 아니고 하나님의 피 언약에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로 하여금 기도에 실패하고, 노림수에 실패하고, 매사를 그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우리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강자를 의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 곁에는 믿음 좋은 것을 의지해서 행운을 얻겠다는 사람이 몰리게 되어 있어요.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남편이 교회는 나오는데 나 때문에 억지로 온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욕심이 많군요.”라고 했어요. 교회 안 따라오는 남편도 많은데 억지로라도 따라와 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신앙을 가진 내가 남에게 기죽지 않는 모델이 되고 싶은 거예요.
신앙생활을 내가 하면 안 되는데 내가 신앙생활을 하니까 내가 개별자가 아닌 주체가 됩니다. 총알구멍이 벌써 메워졌어요. 큰 구멍이 생기질 않았어요. 바람이 안 통해요. 그래서 주님은 구멍을 뚫어 주십니다. 남편이 내 마음대로 안 되도록. 만약 억지로 교회 나오던 남편이 어느 날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성경공부에 참석한다고 하면 누구 말립니까? 아내가 말려요.
“당신이 너무 심하게 나간다. 나는 이런 것을 원하지는 않았는데 너무 무리하면 안 돼!”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우리는 늘 내가 원하는 하나님 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부합하는 하나님이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조작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그렇게 하나님을 섬김으로 내가 나를 조작하는 그런 짓을 하게 되는 거예요. 학생은 공부만 하면 돼요. ‘이것을 하면 무엇을 얻고, 이것을 하면 누가 알아주고’ 이런 기대를 하면 안 됩니다. 미리 앞당겨서 성급하게 어떤 결과를 내다본다는 것은 총알을 맞아 구멍이 뚫려야 됩니다.
아직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이 그 땅이 아니다.’ 왜? 지금 유대인들은 세상 힘을 의존하니까 이것은 아닌 거예요. 그러면 메시아는 어디 있느냐? 힘 없는 곳에? 힘 없는 곳에 있지도 않아요. 그러면 힘 있는 곳에 있나? 힘 있는 곳에 있지도 않아요. 힘 있는 곳에서 힘 없음을 새롭게 구성합니다.
만약 여기가 힘이 있는 곳이라면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곳은 어디입니까? 힘이 있는 곳 외에 저쪽이 힘이 없는 곳이지요. 그러면 힘 없는 곳이 진짜 힘 없는 곳이고 진짜 소자입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들도 힘이 생기면 힘 자랑 할 사람들입니다. 힘 있는 곳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힘이 모인 곳에서 그 힘이 얼마나 악한 힘인가를 폭로하면서 몸소 십자가에서 죽어버립니다.
죽으면 여기서 구멍이 뚫리면서 힘 있는 자들의 횡포만 남기고 사라져 버리죠. 여기서 사흘 만에 부활합니다. 그러면 힘 있고, 없고 이 전체가 죄악 된 세상으로 규정이 됩니다. 그러면 이 땅은 다윗 왕이 오실 땅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땅을 새롭게 만들어야지요.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든다는 말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버림 받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버림받았기 때문에 그 땅을 찾아가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기 위해 강림합니다. ‘강림’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가지고 제가 의존교회에서 강의를 했어요. ‘강림’은 오시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와 함께 있음을 커튼을 벗겨 줌으로 드러나게 하는 거예요.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다.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했지요. 이 소자는 소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영이 찾아가게 되면 십자가 구멍 뚫림이 그 사람 내부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개인의 주체는 깨어지고 그 개별자는 예수님이라는 주체를 위한 개별자로 새롭게 소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이 와서 구멍이 뚫려서 내 주체는 없어지고 주님이 주시는 개별자가 되어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라고 하지요. 그러면 누가 삽니다. 그리스도가 삽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한 주체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이름은 그리스도인의 이름이지 내 이름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갑니까? 습관, 기억, 발산. 인간의 시간의식은 습관에 의해서 굳어져 버렸습니다. 1분도 시간이고, 2분도 시간이고, 3분도 시간입니다. 시간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3개로 나눠집니다. 과거의 습관에서 와서 굳어진 것을 현재라고 합니다. 현재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누적된 것이 현재입니다.
지금 나는 온 몸이 습관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제가 개고기를 못 먹는 이유가 옛날부터 못 먹었기에 지금도 못 먹는 거예요. 과거의 습관이 현재로 굳어졌습니다. 곱창도 못 먹고, 순대도 못 먹고 하여간 못 먹는 것이 많아요.
기억이란 것은 현재 굳어져 버렸는데 왜 허락도 없이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이 몸이 현재에 있으면 현재로 끝나야 되는데 왜 우리의 머리는 과거를 생각합니까? 시간은 3종류로 나눠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에 왔으면 과거는 없는 것인데, 없는데 과거는 여전히 살아있어요. 기억 속에.
세 번째가 ‘발산’인데, 이것은 현재도 없고 과거도 없는, 내 기억에 저장되지 않고 남아 그것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있어요. 이것이 미래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아파트 13층으로 올라오면서 우연히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내려가는데 또 그 얼굴이 보입니다. 상대가 먼저 “너, 근호 아니야?” “그래. 네 이름은 뭐냐?” “대성초등학교 20회 ---” “아! 알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분명히 내가 경험은 했는데 내 기억에 들어오지 못하고 남겨진 체험이 저쪽에서 내 허락도 없이 불쑥 동창생을 만나 새로운 일을 만들 때 새 창조가 되는 겁니다.
이 ‘새 창조’는 없는 것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전에 경험한 것 중에 새 창조지요. 갑자기 박근혜 대통령이 날 만나러 온다. 나는 박 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찾아와서 악수를 했다. 이것이 미래입니까? 나의 과거 속에는 없지만, 박 대통령은 ‘대구에 가서 누구를 만나야지.’ 그 생각이 있잖아요. 그 박근혜 생각과 내 생각 다 합쳐서 그것을 ‘순수과거’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나만 사는 것이 아니어서 누가 무슨 이유로 미래의 나를 찾아올지 누가 알겠어요? 그래서 인간의 미래는 내 기억 속에 없기 때문에 ‘새롭다’고 합니다. 아들 장가보낼 때 며느리가 새롭지 않던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미래는 내가 개척한 것도 아니고 내가 주관하는 것도 아니고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세계가 된다. 이것이 철학에서 말하는 세 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시대에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한다.”는 것은 이 시간에 해당되겠습니까? 해당이 안 됩니다. 묵시적으로 오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성을 피해가서 예측도 못한 그 세계가 우리에게 덮치니까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몸 밖인지 안인지?” 또 “말로 다 형용 못하겠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상상한 그 이상의 곳이 천국입니다. 계시록에 각종 보석이 나옵니다. 보석은 이미 우리 기억 속에 있어요. 본 적이 있으니까. 그것 이상의 영광이 우리의 기억과 상관없이 새롭게 주님의 경험에서 주의 영광으로 우리에게 덮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고, 그분이 바로 우리의 새로운 목자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모릅니다. 아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셔서 ‘이것이 너희를 위해 흘리는 피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고, 약속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 눈에서 사라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때 예상 밖의 놀라운 천국이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할 때, 세상 살면서 겪는 일들에 대해 마음 조이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5. 22. 18:11 녹취 마침)
첨부파일 : 41-2.hwp (54.0K), Dow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