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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05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3-신학과 도덕철학자유게시판[철학]

201305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3-신학과 도덕철학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5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3-신학과 도덕철학

(강의:이근호 목사)

교재 12페이지 중간에 보면 고르기아스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간에 [형이상학은 우주론과 존재론의 한계를 넘어 신론으로 향하게 되었고, 이제 신론은 근원이 삼라만상에 대하여 지니는 주재적인 원리로서의 지위를 다루는 방식으로 전개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존재론이란 말을 할 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철학이라 보시면 되고, 우리한테 종교적으로 중요한 것은 존재론이 아니고 가치론 그리고 어떻게 아느냐 하는 인식론이 중요하게 됩니다.

신론의 문제가 그 당시 회의주의 때문에 사회질서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서는 선을 찾아야 되는데 선을 찾기 위한 방법이 법이 있어야 되고 그 법을 위해서 플라톤은 국가라는 것은 이렇게 해야 된다고 이야기했지요. 사유재산 금지와 아까 빠졌는데 남녀평등, 처자공유, 철인통치 네 가지 원칙으로 해야 된다고 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좋은 사회가 되느냐고 했을 때 국가뿐만 아니고 개인도 중요하다고 본 겁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개인적인 가치가 어떻게 되는가?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플라톤은 식물이나 동물보다도 인간 존재를 따졌는데 인간에서 감각과 지성이란 두 가지로 따져서 세상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지성이란 이데아고, 에이도스 형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플라톤이 인간의 절대적인 선을 위하여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할 때 삼분설이 나와요. 기독교에서 성경에도 나오지만 영과 혼과 육이죠.

삼분설이란 혼은 육이 아니고 육은 영이 아니고 영은 혼이 아니라는 것이 먼저 전제가 되어야 맞지요. 몸이 만약에 영이고 몸이 만약에 혼이라면 삼분설은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따로 분류가 되고 난 뒤에 분류된 것에서 따로 원리가 유지될 때만 삼분설이 되는데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정의와 절제와 경건과 용기. 소크라테스는 개인적으로 도덕을 이루기 위해서는 절제해야 되고 경건해야 되고 용기가 있어야 된다. 여기다가 정의, 정의가 곧 법이기 때문에 정의를 보태면 이게 로마의 통치이념입니다. 헬레니즘이란 것은 로마 비록 사상은 헬레니즘이지만 실제 나라는 헬라가 아니고 로마지요. 로마인데 남의 나라 사상, 헬라 사상을 로마가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근본 성향은 정의와 절제와 경건과 용기. 로마인은 이래야 된다는.

이것을 주장한 로마의 황제가 있었는데 4현제라는 4명의 현명한 황제가 있었는데 이들은 스토아 사상이라고 합니다. 아우렐리우스, 유명한 사람이죠. 정의와 절제와 경건과 용기, 네 가지가 다 돼야 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항상 제자는 스승의 틈새를 파고 들어가서 비판을 해야 자기가 또 올라가잖아요. 이미 죽었으니까.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절제와 경건과 용기는 하나에서 나온다고 본 반면에 플라톤은 세 가지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뭐냐? 바로 이성과 격정과 욕구, 영과 혼과 육이에요. 그래서 삼분설이라 한 겁니다.

육이라 하는 것은 욕구, 혼이란 격정, 격분, 어떤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 그 다음에 이성이란 격분과 욕구를 분위기에 맞게 자제시키는 것, 영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덕이란 하나에서 다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담당분야가 있다는 거예요. 이성은 절제시키는 게 있고, 격정은 일종의 용기고, 욕구는 경건함을 보여주는 바탕이 되고. 이런 식으로 각각 맡은 역할이 있다고 한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이 서서히 도덕주의 철학으로 바뀌게 되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이 도덕을 현실에, 국가에 반영하기 위해서 종합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에요. 본격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중요한 게 나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무엇이 옳은가와 무엇이 그른가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오게 되면 그게 바뀌게 됩니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른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옳다는 것은 공동체가 어느 것이 이익이냐는 쪽으로 인간은 움직이게 돼있기 때문에 옳다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느냐 결국 그 문제이다. 플라톤이 옳다는 건 맞는데 가치 있다는 게 뭐냐 하면, 내가 행복해야 가치 있지 자기가 불행하면서까지 선을 행할 사람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남을 선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불행해도 좋다.” 그런 건 없어요. “당신이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해.” 그건 있지만, 그건 용기 아닙니까.

따라서 가치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떤 경우에 행복한가? 다시 존재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가치 있을 때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말이 맞는 것 같은데 막상 뒤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들어보니까 상당히 실제적이고 실용성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성경에도 있잖아요. 네가 말로써 배부르라고 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꿀빵이라도 하나 줘야지. 실제로 준다는 것이 말이 아니고 인간의 행복이란 것은 마음에 있다고 하지만 마음이 전부가 아니고 실제로 있어야 뭘 주든지 할 게 아니냐. 다시 존재의 문제로 돌아가는 겁니다. 인간은 뭘 할 수 있느냐? 이럴 때 인간에게는 어떤 목적이 있어야 된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중세 신학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했다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 신학이 결부가 됐느냐 하면, 실체와 속성이라고 구분했습니다. 실체라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걸 실체라 하고, 속성이란 것은 믿는 실체에 의존적인 것을 속성이라 하거든요.

그러면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개별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강직한 성품이다. 이럴 때 소크라테스는 실체가 되고 강직한 성품을 가졌다고 했으니까 속성이 되는 겁니다. 왜?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에 한 사람밖에 없고 독자적으로 있는 반면에 강직한 성품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강직한 성품은 소크라테스 당사자에 의존돼있지요. 소크라테스는 강직한 성품이라 할 때 속성이란 성질로 봤습니다.

그 다음에 소크라테스의 키가 180이다. 180이란 것은 소크라테스는 단 하나밖에 없지만 180이란 키와 나왔으니까 속성, 양이 되겠지요. 그 다음에 소크라테스가 현재 광장에 있다. 이건 장소가 되겠습니다. 개별자란 실체는 독자적으로 있더라도 각가지 속성이 나오죠. 성질이 나오고 관계가 나오고 장소가 나오고 시간이 나오고 상태가 나오고 소유가 나오고 능동이 나오고 수동이 나온다. 이렇게 존재를 주어와 술어로 완전히 논리적으로 아리스토테레스가 규명했습니다. 존재=실체+속성.

이게 중세철학해서 왜 그렇게 환영을 받았을까요? 실체는 성부 하나님이라면 속성은 예수 그리스도. 딱 맞잖아요. 또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인성이 나오고 신성도 나온다. 이게 속성이잖아요. 그러니까 뭘 설명할 수 있습니까? 철학으로 철학은 인간의 이성이니까 인간의 이성으로 신을 설명을 해줄 수 있어요. 설명을 할 수 있으면 어떤 이익이 있느냐 하면, 그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더라도 같은 신을 같이 논리적으로 분석이 된다면, 우리는 한 형제가 되고 오늘밤에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포섭이 가능하죠.

그러면 전도할 때 뭘 하면 됩니까? 철학 강의하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계십니다. 그 다음에 조직신학에서 속성이 나오죠. 하나님은 계시다. 실체지요. 속성이 있는 걸 봐서 실체가 있으니까. 속성이 뭡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다. 하나님은 용서를 해주신다.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그러면 천국가려면 뭘 하면 돼요? 나는 신의 심판을 믿습니다. 나는 신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나는 신의 자비하심을 믿습니다. 이러면 그 사람은 뭐가 됩니까? 속성을 더듬으면 실체에 합치가 되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고 판정을 내릴 수 있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그럼 너는 하나님이 자비하시다, 선하시다는 걸 어떻게 알아?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형상 속에 하나님의 속성이 담겨있기 때문에 내 마음에 어린애가 우물에 빠졌을 때 “불쌍하구나. 내가 건져줘야지.” 이건 어떤 상태에 대해서 선한 마음을 가진 거잖아요. 그럼 선한 마음을 가졌으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은 신이 주신 속성이고, 신이 주신 속성이 있으니까 신의 실체에 관련돼있다는 뜻이고. 그러니까 내가 누굴 불쌍히 여기면 불쌍히 여기는 그것으로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 확인받을 수 있다. 이런 논리가 되죠. 전도가 굉장히 쉽지요.

그런데 이것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스승과 다른 거예요. 플라톤은 인간이 모방된 세상 것으로 형상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인간의 속성으로 본래 형상, 본래 실체, 본질을 알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중세 신학자들은 플라톤보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더 좋아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신비적인 것은 플라톤이 책임지면 돼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형상이 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계시가 주어진다. 계시가 주어지게 되면 계시는 상기설이라 해요. 상기설이란 기시감이라 하죠. 뭔가 본 듯한 얼굴인데 어디서 많이 봤는데.

사람은 신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신을 언젠가는 기억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로마서 1장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아니하죠. 이게 중세 신학자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이미 신의 자녀다. 우리가 해야 될 것은 교육만 하면 되죠. 범사에 감사하고 모든 일이 하나님 은혜라고 여기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 말이죠. 이건 플라톤에서 나온 거예요. 상기설. 상기란 기억난다는 게 상기거든요. 이제 기억 나. 이럴 때가 상기설이에요.

그걸 어거스틴은 성령의 조명론으로 바꿔요. 성령을 새로운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고 “이미 너는 알고 있잖아. 기억나지. 성령의 역사야.” 목사들이 교인들 교육시킬 때 철학만 있으면 얼마나 쉬운 줄 몰라요. 착한 일 한 번만 해도 신의 자녀라니까. 신의 자녀가 되는 거죠. 아무리 술 먹고 허리 한 번 툭 쳐도 “주님의 용서를 알면 구원받습니다.” 하면 그것은 개독교인가 되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 신학은 중세 신학으로 이어져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교회 밑에 지배당하게 하는 하나의 이론으로 이데올로기로서 통치이념으로 훌륭하게 자리 잡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를 모르죠. 복음을 모르죠.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4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철학을 잘라내고 털어내고 골라내야 될 번잡스러운 작업을 동반하게 돼요. 참 이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광이 아니고 전부다 도덕철학이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드디어 로마국가가 성립되면서 헬레니즘 국가 윤리가 본격적으로 도입이 되는데 종교를 대신해서 두 가지 윤리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스토아윤리고, 하나는 에피쿠로스윤리. 스토아는 사도행전에도 나오는 신학입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헬레니즘이 사상이 뭐냐고 묻거든 이것만 이야기하면 돼요. 스토아와 에피쿠로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게 전반기고 후반기는 중세 신학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헬레니즘 사상을 헬라철학과 히브리 사상의 결합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내가 보기에는 아니에요. 히브리 사상 근처도 안 갔어요. 그냥 전부다 헬라사상이라 보면 돼요. 그러나 그건 맞아요. 헬레니즘의 시작은 스토아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시작이다.

그러면 헬레니즘의 특징은 뭐냐? 세계시민주의. 그 다음에 개인을 강조하는 것, 세 번째는 실천주의. 소크라테스는 무엇이 옳은가? 플라톤은 무엇이 덕스러운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은 뭐냐? 곧 행복이라고 했어요. 소크라테스는 무엇이 옳은가? 두 번째 플라톤은 무엇이 선한가? 무엇이 도덕인가, 무엇이 도덕적인 사회인가? 세 번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덕이 뭐냐? 덕은 행복이다. 사람은 행복할 때만 살맛이 나기 때문에.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중용사상입니다. 그것이 나중에 뭐로 발전되느냐 하면, 스토아와 에피쿠로스학파로 바뀝니다. 스토아란 옛날 신전에 기둥만 서 있는 복도가 나와요. 그걸 회랑이라 하는데 그걸 스토아라 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설립자 이름이에요.

스토아학파의 주장은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불교입니다. 뭐든지 제가 강의할 때는 차이를 이야기해요. 차이를 이야기하게 되면 둘 다 알 수 있다 했지요.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둘 다 불교적인 요소가 강한데 불교가 들어오진 않았지만 서양의 불교라 할 수 있어요.

스토아학파는 소극적으로 세상에 대해서 현실에 대처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술이 해롭다. 그러면 술을 멀리하자. 이게 스토아학파고. 에피쿠로스학파는 술을 먹으면서 정신 차리면 될 게 아니냐. 어느 게 마음에 듭니까? 둘 다 노리는 것은 행복이에요. 행복이 최고니까. 스토아학파는 어느 정도까지 나가느냐 하면, 행복마저도 잊어버리면 된다. 그게 행복이 되는 거예요. 완전히 불교에요. 행복한가, 안 한가 생각도 하지 않는 게 행복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즐겁게 사는 것이 행복이다. 뭔가 같으면서도 달라 보이죠.

심도 있게 나가 보겠습니다. 스토아학파는 화엄경 같아요. 스토아학파의 모토가 모든 것 속에 모든 게 담겨있다. 예를 들면, 포도주 한 방울 속에 바다가 다 들어있다.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연관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종의 나비효과. 나비효과 아시죠. 북경에서 나비가 팔락거리면 필리핀에 태풍 분다고. 초기의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모든 것은 인연이 아닌 게 없는 거예요. 다 연관돼있단 말이죠. 그래서 누구 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누구 탓을 해서 그 사람을 족치면 다 걸리는 사람이 있어요. 윤○○을 임명하는 자가 박○○고 박○○한테 대통령되라고 시킨 사람은 국민이고 박○○ 당선되는데 적극적으로 박○○ 죽이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문○○한테 표 던진 사람도 약간의 책임은 있고. 교통사고에서 100% 과실은 없고 80:20 이런 경우. 모든 게 연관돼있어서 자꾸 누구 탓을 하면 스스로 행복을 잃는다는 거예요. 오늘 은혜 받는다.

“넌 왜 공부를 못해. 왜 엄마를 속 썩이고 그래.” 그러다 가만 따져보니까 “얘가 재벌 집에 태어났으면 이렇지 않을 텐데. 얼마나 답답하겠어. 오죽 공부할 분위기가 안 됐으면 공부를 못 하겠나. 다 에미, 아비 부족한 탓이다. 내 탓이오.” 스토아입니다. 어떤 변화에도 요동하지 마라. 그걸 무정념, 부동심이라 해요. 그래서 상당히 소극적이에요.

거기에 비해서 에피쿠로스학파는 굉장히 적극적입니다. 에피쿠로스가 연구를 해보니까 인간에게 가장 문제되는 것이 뭐냐? 죽음이었다는 거죠. 우리가 죽음이 있다는 걸 알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으니까 당겨서 죽음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죽게 마련이니까 죽을 때 생각해도 안 늦다는 거예요. 왜 그런 문제를 당겨서 생각하느냐 말이에요. 그러니까 생각 안 하니까 현재는 죽음과 관련이 없다.

두 번째, 만약에 죽었다고 치자. 죽음이 아프냐? 죽음이 괴로우냐? 할 수 있는 존재 자체가 없어지죠. 그렇게 생각할 본부가, 중심센터가 없어지잖아요. 중심센터가 없어졌는데 죽음이 있으나마나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 말이죠. 이래도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고 저래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죽음이 우리 마음에 번민과 고통을 줄 이유가 없다. 에피쿠로스학파에서 죽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상당히 불교적이죠. 들어보면 말 되죠.

지렁이를 밟을 때 아프다고 하겠지만 일단 죽고 난 뒤에 지렁이는 아픈 걸 모르죠. 지렁이 자체가 없어졌으니까. 완전히 가루가 됐으니까. 우리가 해골이 됐는데 해골이 무슨 생각을 합니까? 두뇌 세포가 없어졌는데. 그러니까 죽고 난 뒤에 아픈 줄도 모르고 있는데 괜히 산 사람이 죽은 사람 걱정할 이유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 말대로 모든 것은 생각, 생각, 생각,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인간의 행복이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뭐냐? 행복이란 즐기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관계가 돼있기 때문에 내가 구태여 어디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모든 걸 초월해서 오는 행복이죠. 뭔가 좀 달라요. 남양우유와 서울우유와의 차이? 같은 우유인데 맛이 좀 달라. 그런 차이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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