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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05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3-신학과 도덕철학자유게시판[철학]

201305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3-신학과 도덕철학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5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3-신학과 도덕철학

(강의:이근호 목사)

이 시간에 강의할 것은 어떻게 일반 자연종교에서 신학이 나왔느냐? 자연에서 정신 단계로. 정신을 극대화시키면 거기서 신이 나옵니다. 자연에서 정신 단계로 들어가는 이 대목에서 세상의 모든 과학과 철학이 시작되는 거예요. 자연은 그냥 놔두면 혼돈이고 무질서잖아요.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은 이것은 보이지 않는 신들이 여러 가지 장난 친 것이다. 인간은 거기에서 왜소하게 당하기만 한다.

그렇게 하다가 따져보자는 식으로 나오지요. 그냥 막연하게 신이 만들었다고 하지 말고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있으니까 계속 원인을 추적해보면 진짜로 뭔가 근원적인 것이 있을 것 아니냐? 그래서 탈레스란 사람은 축축한 것이 있다고 이야기했고, 탈레스는 교재에 보면 나옵니다. 기원전 600년경에.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한 사람이 의견 제시하면 그 다음부터 의견들이 쏟아지거든요. 축축한 것이 아니고 뭔가 한정된 것, 정해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 거기에 대해서 아낙시메네스란 사람은 한정됐다는 것은 너무 모호하니까 구체적으로 근원적이 뭔가 있을 것이라 해서 수축과 팽창이라 해서 줄어들고 늘어나고. 그래서 이 사람은 공기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파르메니데스란 중요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자연에서 정신으로 넘어갈 때 처음으로 정신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입니다. 파르메니데스가 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디서부터 왔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물이다, 공기다, 불이다, 흙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보다도 이미 있는데 이게 어떠한 성질로 있느냐를 파악하면 된다는 거예요. 이게 나중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어떤 성질로 있느냐고 따지게 되면, 옛날부터 그냥 있다고 한다면 신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것이 어떤 성질로 있느냐고 따지면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이용해먹을 것이냐로 바뀌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학이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에요. 어디서 왔는지 그것은 우리가 신경 쓸 것 없고 그냥 여기 있는데 어떻게 있느냐? 그것만 생각하면 된다.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 물이 흐른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저 떨어지는 것을 낙차를 이용해서 구리코일에 자석으로 회전을 시키면 거기서 전기가 나오겠지요. 회전하는 힘으로 물을 덥힌다든지, 또 수증기가 나오고 그것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 시대에 파르메니데스에 대해서 5페이지에 나오는데 왜 자연에서 정신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느냐 하면, 딱 이거에요. 옛날에 자연을 생각할 때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가 어떻게 써먹을 것이냐 할 때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고 자연을 다룰 수 있는 갑에 입장에 거예요. 자연히 자연은 을이고. 그 다음부터는 인간이 의도하는 데로 자연을 조작해나가면 그것이 얼마든지 우리한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게 되면, 여기 꿀빵이 있는데 꿀빵이 반짝거린다, 깨가 묻혀있다는 것은 의미 없어요. 구경할 관람용이 아니니까. 꿀빵 안에 단팥이 있고 밖의 껍데기와 조화를 이루는데 한 개에 800원짜리를 먹으려고 구입하거든요. 여기서 나오는 게 무엇이 중요하느냐 하면, 사람은 무엇이냐 하는 거예요. 사람이 인격이 있다? 인격이 무슨 소용이 있는데. 저 인간에게서 무슨 재주를 끄집어낼 수 있을까? 저 사람한테는 뭘 이용하면 될까? 남녀가 결혼할 때 저 남자한테 뽑아낼 게 뭘까? 저 여자 만나서 나한테 어떤 점이 유리할까?

인간이 자연을 보기만 하면 그걸로 된 걸로 알았는데 자연을 봄과 동시에 옆에 있는 같은 인간을 자연을 다루는 사고방식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옆에 있는 동료나 인간을 또는 자식이나 부모나 가족을 이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발달될 때 그게 뭐냐? 정신에 숨어있는 음흉함이 되겠지요. 겉으로는 굉장히 좋아요. 자연이란 우리는 정신이 있으니까 정신을 활용해서 동물은 정신이 없으니까 마음껏 활용해보세. 말은 굉장히 좋은데 인간에게서 자연보다 정신이 위가 되는 거예요. 파르메니데스부터 시작해서.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도 그걸 알지 못했어요. 미처 생각을 못한 거예요. 그냥 순수하게 생각했는데 정신이 갑이 되고 자연이 을이 됐을 때 자기는 보편적인 정신을 사용했겠지요. 그런데 인간이 보편적이라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누구 중심으로 살아갑니까? 자기, 개별자 중심이잖아요. 개별자 중심으로 갔을 때 내 정신과 저 사람의 정신이 다를 때는 양보 없는 경쟁과 전투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때 뒷감당을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런 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죽고 난 뒤(기원전 322년)부터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475년)를 헬레니즘 시대라고 해요. 우리말로 하면 헬라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 사상이란 뜻이거든요. 그런데 내막에 보면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의 지역에 국한되는 사상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이게 참 신기한 게 통영사람은 우리 통영에서는 이렇게 해요. 거제도 가면 거제도 사람은 이렇게 살아갑니다. 대구는 이렇게 살아가고, 울산은 이렇게 살아갑니다. 각 지역마다 독특한 문화와 관습이 있어서 그것은 그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전통이라고 인정해줬는데 헬레니즘 시대가 되면 특정 지역의 사상이 전 세계시민의 의식이에요. 그때부터 세계시민이에요. 북아프리카부터 해서 지금 튀니지지요. 이탈리아, 스페인. 로마시대입니다. 로마시대 점령이 북아일랜드 밑과 독일 쪽, 옛날 이란 쪽은 로마에 다 넘어갔고. 전체적인 사고방식이 동일한 사상으로 되는 시대입니다.

헬레니즘이란 것은 특정지역이 아니라 유행을 타는 거예요. 이제는 세계 패션이 유행되듯이 독특한 헬레니즘 시대가 있는데 그 시대가 성경에 예언돼있습니다. 그 시대 사고방식을 다니엘에서는 네 번째 짐승이라고 돼있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맞추면 헬라이후의 풍습이기 때문에 로마가 되겠죠. 일곱 머리, 열 뿔. 일곱 머리는 로마 시내에 일곱 언덕이 있어요. 열 뿔이라는 것은 다니엘에 보면 왕을 뿔이라 합니다. 스가랴에서는 들이박는 성질을 뿔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냥 박는 게 아니고 의도와 목적을 갖고 박는 걸 뿔이라 합니다.

그 의도와 목적이 뭐냐? 스가랴에 보면 이스라엘, 시온을, 성전을 박아야 돼요. 그러니까 스가랴에 나오는 네 모퉁이를 쥐고 있는 천사들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뭐냐 하면,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은 모형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견본. 모델하우스, 견본집이죠. 구약 자체가 마지막 때 종말이나 마지막은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마지막입니다.

여러분들은 목사들이니까 다 알지요. 마지막은 묵시적 마지막과 역사적 마지막이 있는데 성경에서 항상 묵시적 마지막을 마지막이라 합니다. 역사적 마지막은 시간의 끝을 마지막이라 하고, 묵시적 마지막이란 뜻은 모든 의미가 완료된 시점을 마지막이라 해요. 이스라엘, 성전, 땅, 율법, 복음, 천국, 지옥 이 모든 이유가 마감이 됐어요. 더 이상 추가될 내용이 없을 때를 마지막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땅의 마지막 개념은 뭡니까? 하늘, 천국이 땅이에요. 구약에서 견본에서는 약속의 땅이라 하잖아요. 그것은 아직까지 신약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마감이 안 되고 의미에 변화가 일어나요.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영원한 약속의 땅은 하늘에 있다. 하늘에 있다는 것을 골로새서에서는 이 지상에는 없다. 더 강력하게 표현하지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바라게 돼있지요. 그러니까 이미 신약은 마지막 때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마지막 때에는 모든 의미가 완성이 돼버려요. 완성이 되니까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찾던 땅은 위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결국은 그들은 갔잖아요. 구약처럼 우리 성도들도 나그네요 객이지만 뭐가 준비돼있습니까? 영원한 예루살렘 성이죠. 보세요. 구약에서는 예루살렘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는데 신약에 오면 예루살렘이 위에 있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교인들에게 세상에 땅의 축복을 의미한다는 것은 뭡니까? 근본적으로 이단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절이에요.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란 거예요. 얼마나 강력하게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요. 여러분이 보이는 소망으로 교회에 오셨어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잘못 찾아오신 거예요. 보이는 소망 없어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잖아요. 십자가 지기까지는 모든 기적의 개념은 미완성이죠.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뭐가 기적입니까? 네가 죽어도 살겠고.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죽어도 살겠고.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아플 때 예수님이 낫게 해줬습니까? 일부러 방치했지요. 그러니까 오늘날 목사들은 얘들 아프면 좀 놔두세요. 기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기도를 하시되 “주여, 얘가 아플 때 주님의 아프게 하신 아픔을 믿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지. 주께서 아프게 하신 그 아픔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아파서 눈에 뵈는 게 없는데 그런 신학까지 계산해서 하는 기도가 어디 있어요.

파르메니데스는 그동안 자연에 주눅 들어서 자연이 갑이고 인간은 을이었는데, 갑과 을이란 용어가 계약서에 나오는 거거든요. 원래 법에서는 갑과 을이 동등하게 돼있는데 이상하게 갑이 주도권을 쥐고 있잖아요. 자연이 갑이고 을이었는데 파르메니데스에 와서 인간이 갑이고 자연은 을이 된 거예요. 인간이 갑이 될 때 내세운 게 정신이에요.

이 갑이란 정신의 특징이 뭐냐? 시작도 없고 끝이 없습니다. 영원한 겁니다. 따라서 이제는 신은 저 위에 신이 있는 게 아니고 신은 인간 정신 속에서 신을 만들어낼 만반의 자료가 준비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을 다루는 제일철학을 최초로 신학이라 이야기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 유럽에 기독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사백 년 전에 벌써 신학이 등장한 거예요. 그래서 신학자들 속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집어넣지 않을 수 없어요.

그것은 기독교 신학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더 뒤에 나오는 중세의 모든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철학을 베꼈어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을 정리한 후대 사람이 형이상학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안드레니코스란 사람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형이상학을 다른 말로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신학이 되는 겁니다. 플라톤은 신학이란 말을 하지 않았어요.

파르메니데스가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하면, 있음에서 있음으로 해명해야 된다. 신은 없잖아요. 없는 것으로 하면 말장난밖에 안 되니까 없는 것으로 하지 말자. 없는 것으로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해봤자 어떤 사람은 물이다, 어떤 사람은 공기다, 어떤 사람은 불이다. 중구난방으로 자기 마음대로 하니까 다 귀찮으니까 있는 것으로 하자.

대법원 판사들이 판결할 때 어떻게 합니까? 파르메니데스 아닙니까.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을 이야기하죠. 그러면 중세에 주교와 신부들이 농노들을 심판할 때 뭐라고 심판했겠어요? 없는 걸로 있는 걸 심판했지요. 중세는 전체가 신자니까. 없다는 게 하나님이죠. 하나님으로 현재 있는 것, 인간을 심판한 겁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캘빈이 교회 심판할 때 없는 걸 통해서 있는 걸 심판했지요. 이제 오늘날 대법원 판사와의 차이점을 아시겠지요. 그럼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파르메니데스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있는 것에서부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을 진리를 규정하는 시대지요.

그런데 이 시대에 판사가 만약에 “당신 왜 그랬어요?” “주의 뜻입니다.” 이러면 안 먹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집안이 재주 없기 때문에 굿한다고 3억을 갈취했어요. 판사가 징역 5년인가 때렸어요. 어디 없는 게 있는 걸 판단해. 굿한 사람은 뭘 도입합니까? 없는 데서 있는 걸 판결하지요. 그러면 중세 때는 상당히 신앙적이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방금 없는 것이라 했는데 없는 걸 따져보면 없는 게 아니에요. 국가는 이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신해서 보이는 국가가 하나님을 대신했고 그 국가 아래에 종교가 있는 겁니다. 최 정점에는 왕이 있고. 다른 말로 하면 교황이 있고. 둘 다 로마에서 싸웠으니까.

제가 아까 구약 다니엘 이야기하면서 열 뿔에서 뿔은 왕이라 했지요. 성경에서 뿔은 들이박는 특징이 있는데 그냥 들이박는 게 아니고 스가랴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언약체제를 들이박아요. 그러면 중세 때 뿔은 누굽니까? 바로 교황이죠. 보이지 않는 신의 나라를 대신해서 자기들이 신의 나라를 만들었잖아요. 성경말씀과 신학을 통해서. 그것이 무슨 역할을 한다? 짐승의 본 모습 역할을 해서 진짜 그 시대에 성령 받은 사람들을 순교시키고 들이박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응용문제입니다. 그럼 21세기 이 시대에는 교회가 조찬기도회,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적이에요. 조찬기도회 기도제목이 뭐예요? 그 나라와 그 의가 아닙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견본으로 해서 그걸 모델로 해서 그와 유사한 기독교 나라 되게 하는데 있어서 국가가 협조해달라고 대통령이 협조해달라고 그게 중세 때 했던 적그리스도 행세를 되풀이 하는 거예요.

그리고 교목이 있는 학교, 원목이 있는 병원, 군에 있는 군목이 하는 짓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적인 짓을 하는 거예요. 거기다가 교회에 있는 회목? 당회장. 이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교회로 대체해서 우리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무조건 우리 교회에 와서 구원받고, 우리 교회는 부흥돼야 되고, 우리 교회 건드리면 사탄의 짓이고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늘나라 확장하는데 여러분 돈과 마음 다 바치세요. 이게 바로 중세 때 한 행동의 되풀이에요. 그리고 그 정점에 왕 짓을 하는 목사, 때로는 원로목사.

말씀은 보이지 않은 살아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사람들 눈에 보이고 움직이고 꿀빵 먹고 하는 특정 개별자로 바꿔주기를 원하고 있고 사람들은 원하고 있고 사람들이 원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가 최고의 상징적 자리에 나서서 그들을 포섭하려는 겁니다. 그런 교주 같은 사고방식이 이미 고대로부터 나왔을 때 그게 자연으로부터 해방이 구원이에요. 벌써 철학이란 게. 더 이상 자연에 구애 받지 말자. 우리가 자연을 다루자고 나오는 거예요.

이 정신세계가 되면서 그 다음에 플라톤에 오면 국가관이 나오는 겁니다. 플라톤의 국가관은 진짜 이상적인 국가. 플라톤이 이런 예를 들었어요. 화가가 꽃을 그릴 때 그 화가 앞의 꽃과 진짜 꽃 중에 어느 것이 진짜 꽃이냐? 그거야 진짜 꽃이 꽃이지요. 그러면 그림 그리지 말까? 그림 보고 꽃을 상상하니까 아름다움을 주잖아요. 그렇지. 국가는 완전하지 않아? 그렇다고 국가에 대한 이론을 내지 말까? 그럴 필요는 없지. 그렇지. 플라톤은 굉장히 겸손한 분이죠. 내가 생각한 국가관이 완벽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견본은 머릿속에 있어요.

플라톤과 파르메니데스의 차이점을 말씀드릴게요. 형상과 사물의 차이점인데 먼저 파르메니데스부터 이야기할게요. 파르메니데스는 완전한 건 따로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플라톤보다 앞선 사람입니다. 파르메니데스 그 다음에 프로타고라스, 그 다음에 소크라테스, 그리고 고르기아스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고. 그 다음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과 차이점을 말씀드릴게요.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먼저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플라톤이 예를 든 건데, 어떤 목수가 침대를 만들면 우리 속에 있는 침대와 목수의 침대와 어느 것이 완벽한 침대냐고 물어요. 목수가 침대라고 하면 안 되지요. 완벽한 것은 하나가 돼야 되는데 침대는 목수마다, 만들 때마다 다 달라. 다르다는 말은 다른 것 중에 하나를 잡아서 원형으로 삼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형상은 만들어진 것에는 형상이 없다는 거예요.

창세기 1장에 보면,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지요. 물론 플라톤은 창세기를 몰라요. 기독교가 안 들어왔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중세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설명하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다 동원하거든요. 그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플라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형상은 있다. 있는데 현재 눈에 보이는 것들은 너무 많다는 거예요. 인간의 형상은 하나인데.

개란 형상은 머릿속에 하나밖에 없는 삽살개도 있고, 촐랑이도 있고, 불독도 있고 많은 거예요. 그걸 통합해서 개라고 하거든요. 침대를 만들었다. 침대를 만들었으니까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침대를 모방할 뿐이죠. 형상이 아니고 형상화한 거죠. 그러니까 모방이죠. 모방이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방일 뿐이라고 본 거예요. 형상은 따로 있다. 그 다음에 그 침대를 화가가 그렸다. 화가가 그린 침대가 더 침대 같아요? 목수가 만든 침대가 진짜 침대 같아요? 둘 중에 어느 것이 갑이고, 을이에요? 목수가 만든 게 갑이지요. 그러니까 예술이라 하는 것은 인간을 현혹시키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별로 중요치 않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의 형상론과 비교해보면 둘 사이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요. 항상 공부를 할 때 차이를 이야기하면 양쪽 다 의견을 들을 수 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방금 제가 플라톤 이야기할 때 여러분이 이해했다고 하는 그 정도로 이야기했어요. 그래 견본은 따로 있고 우리는 모방일 뿐이다. 플라톤은 그것보다 더 깊게 나갑니다. 목수가 만든 침대를 통해서 형상을 찾아갈 수 있느냐? 플라톤은 없다고 이야기해요. 그럴 수는 없다. 여기에 대해서 처음에 초대교회 신학자들이 굉장히 좋아했어요.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신을 찾아가는 것은 기독교가 구태여 필요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이미 신의 세계잖아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더듬어서 찾아가서 신이라 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신자 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무슨 가치가 개입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의 계시라는 성경이 구태여 필요 없잖아요. 왜? 컵을 보면 컵을 만드신 하나님을 찾아갈 것 같으면, 여기 컵이 있네. 컵을 만드신 하나님 계시지. 이러면 성경이 왜 필요합니까. 필요 없으면 교회 오지도 않을 건데.

그래서 초대교회 신학자들은 플라톤을 이용했어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아무리 해봐야 모방에서 모방으로 제자리 뱅뱅할 뿐이지 진짜 우리를 하나님한테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바로 성경말씀을 믿어야지. 초대교회 신학자입니다. 나중에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으니까 권세가 이뤄지니까 국가가 완전히 기독교화 될 때 그 다음부터 더 많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 플라톤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으로 바뀌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론과 플라톤의 형상론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뭐냐 하면,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형상을 찾아갈 수 없다는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형상을 찾아갈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고 눈에 보이는 거기에 바로 형상이 있다는 거예요. 형상, 영원한 세계는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인간들이 보는 그 속에 이미 형상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없으면 하나님의 형상도 없는 거예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의하면.

옛날에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이었던 김용기가 총신신학생들 수련회에서 “여러분,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여러분 거울을 보세요. 여러분 얼굴이 하나님 형상입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게 파르메니데스에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적어도 플라톤 정도 되면 그걸 부인하는 거예요. 그것은 니 꼬라지지 하나님 꼴은 아니라는 거예요. 김용기 장로 같은 설이 중세 때 유행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중세 때 북쪽에 있는 프랑코 족이라든지 그 사람들을 전부다 기독교화 시키기 위해서는 인간 속에 내재돼있는 것을 그대로 접촉을 시켜서 물에 빠뜨려 세례 받고 다 신자 만드니까.

이러한 정신세계가 드디어 어디까지 이어졌느냐 하면, 자연을 다루다가 그 다음에 소크라테스에 오게 되면 인간은 자연을 다루는 데서 벗어나서 인간 자체 정신이 정신을 다뤄야 된다는 주장한 게 소크라테스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소크라테스 선배가 프로타고라스거든요.

파르메니데스는 세상에 모든 것은 같은 게 변화되기 때문에 결국은 모든 것은 동일하다고 본 거예요. 있음이 있을 뿐이라고 본 거예요. 그것에 반대해서 헤라클레이토스란 유명한 사람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는 파도가 칠 때 파도가 백날 쳐도 잔잔해지면 다시 바다가 되지요. 파도 칠 때 재질은 물 아닙니까. 물이 뛰고 물이 움직이고 해도 있음은 결국 물만 있다는 거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물이란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늘 파도가 쳤다가 잔잔했다가 수증기 됐다가 얼음 됐다가 하니까 결국 이 세상은 변하는 것뿐이라고 본 거예요. 헤라클레이토스는 운동이라는 거고 파르메니데스는 운동은 잠시 있을 뿐이지 다시 본 존재로 돌아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를 신학에 접목시키면 어떻게 세상의 모든 것은 전도서 그대로 아닙니까. 사랑할 때가 있고 돌 던질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날 때가 있고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하다. 파르메니데스.

우리가 지금 신학공부를 하고 말씀을 보는 사람이 신학자를 보는 이유는, 우리 육 자체가 어떤 생각을 품고 성경을 보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성경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이 성립 안 되는 이유가, 객관적으로 볼 수 없어요. 내 주체가 개입되면서 성경을 보게 돼있습니다. 나중에 해석이 에벨링부터 해서 라캉, 리꾀르, 가다머 전부다 그 뒤에 나오는 신학자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특히 지젝이란 사람은 그걸 상세하게 제대로 표현하고 있어요.

아까 이야기한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것이 존재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운동이다. 그런 시대에 프로타고라스는 생각해보니까 결국 이 세상에 따지고 보니 정답이라는 게 없잖아. 하고 상대주의가 나와요. 아직까지 소크라테스 나오기 전입니다. 상대주의가 되니까 세상이란 이건 뭐, 정답 없네. 그래서 프로타고라스의 유명한 말이 있지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척도란 룰, 자. 내가 자에요.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하는 게 진리에요.

프로타고라스는 참 탁월한 사람이라.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 했지만 그 시대 분위기가 회의주의라 합니다. 그 회의주의에 격분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무엇이 있다, 없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가 중요하다. 소크라테스는 묻습니다. 경건이 뭐냐고 물어요. 지금 이 이야기는 소크라테스 이후부터 회의주의가 너무 팽배하니까 아까 했지요. 인간이 자연이 벗어났다가 자연에 대해서 갑이 됐다가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자연을 다루는 식으로 인간을 다루겠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하니까 그때부터 질서가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큰 문제로 딜레마에 빠진 거예요.

그래서 너무나 젊은이들이 무질서하니까 소크라테스가 옳고, 그름을 찾아야 된다. 있고 없고가 아니고.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른가? 무엇이 나쁜가 무엇이 선한가? 나중에 제자 플라톤도 그런 이야기해요. 경건이 무엇이냐고 물어요. 경건이란 부모를 공경하는 겁니다. 경건한 것은 신을 경배하는 겁니다. 경건이란 이웃을 도와주는 겁니다. 그것은 경건의 사례들이고 경건 자체가 뭐냐? 모르겠습니다. 몰라? 나도 몰라. 이게 소크라테스의 진리입니다. 네 자신을 알라. 이걸 무지의 지라 해요. 인간의 지혜라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때만 지혜롭습니다.

통영 올 때까지 꿀빵이 얼마나 맛있는 줄 몰랐지요.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다는 걸 아는 것, 이게 지혜라. 나중에 4대 성인 중에 포함이 됩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악, 범죄라 하는 것은 자기가 얼마나 모르고 있다는 걸 모르고 데서 모르면서 아는 척해서 발생된 게 악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모르면서 알아 버리면 자기가 안다고 여기면, 인간의 정신은 자연을 다루듯이 타인도 자기 유리한 쪽으로 다루니까 결국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겁니다.

이걸 성경에서 인용해봅시다. 선한 사마리아. 사마리아인들이 악하다고 하는데 악한 자보다 더 악한 자가 누구라고 주께서 고발하십니까? 사마리아인보다 악하다고 고발한 제사장과 레위인이 더 악하다고 드러내죠. 그러면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이 악하다고 이야기하는 그 악함은 어느 룰에 의해서 어느 기준에 의해서 한 거예요? 악한 자가 자기 악한 것도 모르면서 지는 안다고 여기면서 악하다고 이야기할 때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악하다는 사마리아인을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자비를 베푼 자로 바꾸겠다는 거예요.

결국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자진해서 소위 선하고 의롭다고 하나님의 의를 갖고 있다는 사람한테 예수님은 사탄 들린 자, 악한 자, 귀신 들린 자로 자부하겠다는 이 말 아닙니까. 그러면 처음에 강의할 때 그 환경이 모든 의미가 신약 때 마감된다 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의 비유지요. 모형 아닙니까. 실체는 아니고.

그러면 모형들만 있는 속에서 예수님께서 그런 발언을 했다면 오늘날 신자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결국 성도에게 성령이 임한 동시에 저쪽은 개뿔도 모르는 게 아는 척하는 데서 머무는 게 아니고 그렇게 모르는데 아는 척하는 그것이 성령 받은 성도와 안에 계시는 성령을 욕되게 하는 식으로 세상은 어두움으로 짜여져 있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역할,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성도의 임무입니다.

말은 길지만 들어보면 팍 오지요.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되지. 이것을 주님께선 용납을 안 해요. 예수님께서 당했던 걸 그대로 당하게 하십니다. 어디 가든지 간에. 개코도 모르면서 안다는 것 때문에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을 상처를 주는 그런 세상에 우리를 빼도 박도 못하게 박아놓았어요.

제가 이번 주일에 설교하면서 남자, 여자 이야기했거든요. 여자란 성경에 보면 남자한테 지배를 받는 것 같으나 진짜 여자의 역할은 남자로부터 마음껏 지배하게 하고 지배당하면서 받은 상처를 그대로 복사해서 “너, 나 무시했지.” 그걸 되레 남자를 지배하는 역할, 그게 여자의 역할이에요. 약한 자가 결국 강해요. 왜? 강한 자가 준 상처가 복사 다 돼있어요. 성도는 이 땅에서 핍박을 받아야 하늘나라 영광을 받습니다. 핍박받는다고 머리 디밀고 핍박하라는 게 아니라 가만있어도 핍박받는데 그걸 근거로 해서 이 세상을 심판하게 돼있어요.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래서 고린도후서 13장에 나오잖아요. 예수님도 약해서 십자가에 죽은 것처럼 너희도 이 땅에서 약하게 제발 좀 약해 줘. 제발 강자 되지 말고 갑 되지 말고 을이 돼줘. 세상에서 뿌리는 더러운 것들을 온 몸으로 받아서 상처가 되서 상처로 살아가다오.

아까 어디까지 이야기했습니까? 소크라테스가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른가? 이야기했거든요. 진짜 진리는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진리란 진짜 신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옳은 게 있다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여기 있다, 내가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무엇이 옳은 게 있어야 진짜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나, 여기 있어. 부자가 돈을 함부로 쓰니까 팁을 막 백만 원 주니까 “돈을 왜 그렇게 써요?” “내 돈 내가 쓰는데 네가 왜?” 이건 존재론적 차원이죠. “그렇게 쓰는 것은 나쁜 겁니까?” 이것은 존재론이 아니고 가치론이죠. 소크라테스는 진리는 존재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인간인가, 남한테 도움 되는 인간인가? 그것으로 봐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에서 벗어난 정신은 소크라테스에서 무엇까지 규제합니까? 신이 있다, 없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참된 신은, 선한 분이 진짜 신이라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법은? 여기서 어려운 게 나오죠. 법이 왜 필요한가? 지금 소크라테스는 어떤 딜레마를 갖고 있죠. 분명히 자기 말은 옳잖아요.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악법도 법이라고 했지요. 그걸 제자 플라톤이 봤거든요. 선을 이루기 위해서 개인이 옳은 소리한다고 선이 아니다. 왜? 선이란 공동체에 두루 도움이 돼야 되는데 그 당시 소크라테스에게 죽으라고, 네가 계속 그런 소리하려거든 죽어 버려라. 자살하라고 한 게 배심원들입니다. 그걸 소크라테스는 중우정치라 했어요. 중우정치란 어리석은 대중, 그래서 민주주의란 어리석은 자들의 다수결로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문○○ 찍은 사람들이 화를 내는 거예요. 어리석은 대중들의 박○○가 어떤 사람인 줄 모르고 박○○ 찍었다고.

그래서 플라톤은 민주주의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자기 스승이 그렇게 죽었으니까. 법을 만들 때 진짜 도덕적이고 똑똑한 사람이 정치하는 그걸 철인정치라 합니다. 철학을 제대로 아는 사람, 소크라테스 같은 그런 분들, 똑똑한 사람이 통치하는 그런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어서 거기서 법을 만들면 그 법은 공동체에 유익이 될 때만 그걸 법이라 하자고 해서 국가론이 시작되는 겁니다.

첫째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아요. 사유재산이 있으면 욕심이 생겨서 남의 훔쳐가기 때문에 안 돼. 그리고 처와 자식도 공유를 해야 돼. 지도자급은 철인이고, 중간계급은 군사들, 나라를 지켜야 되니까. 세 번째는 일반 노동자들. 그렇게 피라미드처럼 돼야 나라꼴이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 필요한 그 법은 진실된 법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들어보면 말도 안 되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시대에 이 백여 나라가 있는데 모든 나라의 지도와 국가는 플라톤에서 나왔습니다.

지금은 민주주의라서 억지로 국회에 묻지만 막상 대통령이 되면, “국회 다 해산해야 돼. 내가 정치해야 되는데 지가 뭔데.” 자기가 하기 때문에 무조건 똑똑하고 바르고 가치 있는 거예요. 대법원 필요 없어요. 헌법재판소도 필요 없어. 왕, 자기가 법이어야 돼요. 한 가정에서 가장이 가장 가장다울 때가 언제입니까? 철인정치 할 때. 법이 뭐 필요해요. “어이 딸, 열 시까지 다 들어와.” 그러고 싶어요. 그러니까 플라톤이 이야기한 이상국가란 결국은 인간 누구나 갖고 있던 내가 곧 신이라는 걸 그대로 철학화시킨 겁니다.

쉽시다.

첨부파일 : 20130514a 부산강의.hwp (49.5K), Down: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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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4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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