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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30510a-히2장12절(형제와 소자) -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히브리서

안양20130510a-히2장12절(형제와 소자)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250)

안양20130510a-히2장12절(형제와 소자)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2장 차례입니다. 2장 11절, 12절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는 것이 예수님 고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 내용이잖아요. 그런데 그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효과가 누구한테 미쳤다는 겁니다. 도달된다는 겁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11절 끝에 보면, 형제라 부르시기에 형제라 되어있습니다. 이 내용이 난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자기가 하는 행동이 남한테는 효과가 없어요. 같은 침대에 잠을 자도 한 쪽 꿈꾼 것이 다른 쪽에 효과가 없습니다. 상상은 할 수 있을지 몰라요. 어제 밤에 당신 꿈꾼 거 오늘 이어서 연속 꿨다, 이러면 되는데 자기가 직접 꿈꾼다는 것은 이것은 없는 거지요.

방금 한 예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볼까요. 두 사람이 잠을 잤는데, 한 사람이 꿈을 그 다음날 이어서 연속극처럼 바톤이어서 꿈을 꿀 수가 없지요. 없다는 이유가 이렇습니다. A, B라는 두 세계가 있다면, A라는 인간이 만든 세계는 여기서 파생되어 나왔거든요. B라는 세계에서 인간은 자기 상상에서 계속 나온 거지요. 그래서 이것을 A에서 B로 갈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을 철학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개별자’라고 합니다.

‘개별자’ 의미는 뭐냐 하면, 내가 한 것을 저 쪽에 전달이 안 된다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머리를 감았잖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머리 안 감아도 머리가 말끔하게 감겨져 있습니까? 안 되지요. 왜? 몸이 따로 이기 때문에 안 되잖아요. 한 쪽이 아내가 구원 받았다. 그러면 남편이 구원 받습니까? 안 되지요. 전염은 바이러스가 이동하는 겁니다. 전염병 걸렸다는 것은 걸린 것이지, 내가 전염병을 만든 것은 아니거든요.

전염병이라 하는 것은 그 주체는 바이러스에요. 이쪽에 감기 걸렸다가 이동해서 저쪽에 에취! 해서 감기 걸리잖아요. 그러니까 이 쪽 사람들은 감기 걸렸다는 결과만 갖고 저쪽에서도 감기 걸렸다는 결과만 되지요. 그러면 방금 A에 의하면 두 사람이 같은 감기에 걸리려면 양쪽 다 똑같은 효력을 발생시키는 바이러스가 있어야 되지요.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제삼자, 제삼자가 작용을 해줘야 동일하게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12장에 보면, 모두 다 한 성령을 마심으로서 교회가 되지요. 그럴 때 그 성령 마신사람 자신이 원인입니까? 결과입니까? 결과지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은 건 아니지요. 왜냐 하면 결과이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아이고, 나는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데, 당신은 왜 안 되지?” “그러게, 나는 믿음이 없어.” “나는 믿어지는데 왜 안 되지?” 이걸 누구보고 닦달 낼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제삼자가 있고 그 분의 작용에 의해서 결과물이잖아요. 그러면 저 사람이 나 말고 저 사람이 예수 믿으려면 내가 닦달 낸다고 믿어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나한테 찾아온 것처럼 똑같이 찾아와서 믿게 해줘야 구원받는 겁니다.

만약에 둘 다 똑같이 그렇게 예수님 찾아와서 구원받았다면 내가 당신보고 믿게 했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전도란 사기다. 전도는 사기지요. 주체가 내가 전도했다는 게 사기입니다. 교회가 만들어낸 사기지요. 교인들을 영업사원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실적가지고 그리고 실적 많이 하면 하늘나라 상급을 보너스로 받는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는 겁니다.

개별자 세계는 만들어낸 세계지요. B라는 세계는 B라는 세계가 만든 세계지요. 그러면 말씀의 세계는 누가 만들었는가, 제 삼의 인물 예수님께서 만들어낸 세계지요. 그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말씀의 세계’입니다. 말씀의 세계는 원인자와 결과 자가 동일하게 예수님한테 해당되는 겁니다. 빛이 있으라, 할 때 결과가 빛이 생겼어요. 그런데 빛이 소급해서 “하나님, 나보고 빛이 있으라 했지요?” 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 자기는 결과기 때문에. 아빠! 엄마! 왜? 어버이 날인데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어? 자식이 부모보고 나를 왜 이렇게 쌍꺼풀 없는 눈으로 만들었냐고 다구 칠 수가 없어요. 왜, 이미 존재하기 이전에 있었던 그 과정에 대해서 존재한 결과가 차후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명령하는 명령은 어느 세계냐 하면, 제삼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가 주로부터 말미암아 주로 마감 짓는 그 세계에 속한 논리원칙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라고 하게 되면 그 말씀에 의해서 부름을 수단으로 쓰여질 사람들이 채용이 돼요. 채택이 되면서 그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전도하라고 하면 A와 B가 양쪽 다 귀가 있으니까 듣습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제삼의 인물이 했던 명령이 A와B로 각각 들어오게 돼요. 들어오게 되면 A는 뭐가 기다리는가 하면, A라는 사람이 상상해서 만든 자기 주체가 된, 자기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뭐냐 하면,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주인공에게 전도하라고 들어오게 되면 ‘이거 내가 할 거야.’ 라는 반응을 나타내고 B라는 세계에 들어오면 전도하라, 하면 “나도 너 못지않게 나도 할 거야.” “누가 많이 하는지 시합해보자.”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이 말씀의 원래 주인공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순간 이쪽세계에서는 오해가 발생되는 겁니다. 내가 그 말씀을 이루는 주체라고 행세해 나가려고 얼른 마중을 나가요. 양쪽 다 마중을 나오면서, 마중 안 나오는 인간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체적으로 마중 나갈 만반의 준비가 돼있습니다. 마중을 나오면서 전도를 나름대로 한답시고 해봐요. 하면서 거기서 뭐냐, 그 사이에 전도하라는 명령을 손수 일으키시는 예수님과의 마주치면서 충돌이 일어나요.

내가 이 말씀을 지켰다고 지켰는데, 막상 해보니까 이게 나의 의가 나오고 모든 공로를 내게로 돌리고 그러면서도 자기를 부인하라, 해서 전도하면서 전도한 자체를 부인하고 애쓰는 그 부인하는 자체가 내가 대견스러워지고 ‘아, 그래 이것은 주님의 공로야, 주님의 은혜야, 성령의 역사로 한 건데 이건 내 공로가 아니야‘ 라고 말을 내뱉으면서 내 뱉는 그 이미지, 그 자태를 보며 자기를 흐뭇해하고 깔끔하게 마무리 정리가 안돼요. 자기를 부인하는 그것마저는 부인할 수 없다는 거예요. 불교에서 말하는 무한대행이죠.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는데 부인하는 그게 부인했을까, 안 했을까, 판정하는 나를 또 설정해야 되고. 그게 바로 인간이 안고 있는 딜레마인 거예요. 이 딜레마를 보면서 주님의 진짜 전도하라는 명령 뒤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전에 화투장을 예로 들었지요. 화투에 단풍, 난초 죽 있지만, 그 앞면은 똑같은 칙칙한 벽돌색이지요. 인간이 자기 딴에는 화려하게 하는데 그 뒤에는 칙칙한 모든 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는 아담에 붙은 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전도하라 명령한 것은 우리가 감추고 있었던, 우리가 미쳐 빼돌렸던 내가 뒤에 안 들키고 싶어서 빼돌렸던 나의 근본적인 나만을 위한 내 자신의 존재성과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서 설치는 이것을 전도하라는 명령의 말씀을 들어서 들통 내면서 ‘주여, 나는 전도하면서 내 의만 챙기고 이래가지고는 내가 도저히 주의 말씀을 지킨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할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겨냥해서 십자가 피로 다가서지요.

전도하라 하는 것은 죄인을 더욱더 죄인 되게 함으로서 전도하라는 명령에 담겨있는 배후에 담겨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음의 능력을 나한테 덮치기 위한 사전의 작업이었지요. 그렇게 되면 사도바울처럼 뭐라 하느냐 하면, 실컷 일해 놓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뭘 하면서? 말씀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순종하면서 순종하는 가운데서 지가 미처 몰랐던 바닥이 다 들추어내는 하나님의 놀라운 묘책에 걸려든 겁니다.

그래서 모든 공로는 면류관도 주 앞에 반납하고 모든 영광은 누구만 받아야 돼요? 그리스도만 받아야 됩니다. 요거 3초갑니다. 요거 3초 지나고 다시 돌아서면 그렇게 고백했던 그것이 어디로 장착됩니까? A라는 세계의 장기로 또 훈장처럼 자랑하면서 교회에서 떠벌리고 있고 목사는 또 좋다고 자랑하고 있고 강대상에서 난리하지요. 이것은 인간의 시간에 종속된 인간들은 늘 이렇습니다. 롤러코스터예요. 자기를 부인했다고 해놓고 돌아서면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 기억에 의하면 남이 부인한 것이 아니고 내가 부인했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을 거라는 다시 자기 것으로 자기의 구원의 바탕으로 다시 그걸 잡아당기는 그런 또 죄악된 솜씨를 또 부려요.

또 까불락 거리다가 또 주님께서 말씀을 줘가지고 이번에는 전도하라고 하는 게 아니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고 그 소리를 들이대면 또 망가지고 이것은 성경구절이 이것 들어갔다고 지키고 저것 들어갔다가 몇 달 전에 들어간 게 또 들어가면 성경말씀가지고 가시처럼 쑤셔버리면 도대체 우리는 말씀 앞에서 감당이 돼요? 안 돼요? 이것 지켰는데 이것 못 지키고, 저것 지켰는데 이것 못 지키고, 기도해서 응답받았다고 하는데 처자식을 미워하라했는데 이것도 안 되고 좋다고 웃으니까 우는 자여, 니가 화있도다 해가지고 울어라하고 또 우니까 운다고 회개냐고 하고 즐거워하라하고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얼마나 자기 정당성을 하는지 지킬만한 것은 소꿔내 뽑지요. 아줌마들 집안에서 콩나물 키워놓고 컸다 싶으면 키 큰 것만 뽑아서 콩나물국에 두부 넣어서 짖어야지 하고 뽑아내는 것처럼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기 정당화해서 필요한 것만 요건 내가 지키고 지켰다고 호응해서 다른 옆 사람하고 옆에 집사님하고 니가 맞을까 내가 맞을까 싸우고.

그래서 지금 A, B라는 세계에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별자’라 했지요. 개별자는 A바탕에서 B바탕으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그건 알고 제가 문제를 던지지요. 만약에 이 B가 옆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이라면, 이 A라는 사람이 자기 세계를 구축하거든요. 인간의 두뇌는 피질에서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자꾸 세계를 만들어내요. 하이데거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그렇게 만들어내는 것을 모으는 것을 대상하는 것을 그 중심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체’라고 한 거예요.

인간은 살아온 모든 경험을 가지고 경험의 저장고에 가만히 두지를 않고 항상 거기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산시킵니다. 이미지라는 것은 인간의 현실을 만들어내요. 똑같은 바닷가인데, 똑같은 등산을 가도 다음에 그 좋아하는 등산을 가도 재미없어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거기에 5년 전에 갔던 나하고 5년 뒤에 갔던 내가 달라졌어요. 단순히 늙어서 달라진 게 아니고 5년 전에 구상했던 그 때하고 5년 후에 구상했던 그 구상이 다르다니까요. 처참한 예를 들자면, 5년 전에는 남편하고 손잡고 갔는데, 5년 후에는 남편하고 이혼하고 갔다면 똑같은 나무요, 똑같은 산이고 똑같은 정상이고, 똑같은 해지만, 한 쪽은 웃으면서 올라갔고, 5년 후에는 울면서 올라가서 바위에서 뛰어내릴까,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이 자기를 조작한다니까요.

인간은 자기는 변화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 다르게 늘 변화고 심지어 구름 한 끼도 변해요. 흐린 날은 왠지 무엇인가 그리워지지요. 맑은 날은 놀러가고 싶지요. 흐린 날은 왠지 이문세 노래 틀어놓고 조용히 창가에 가서 다리 꼬고 앉아서 커피 마셔가면서 테라스에 가서 안 입던 바바리 입고 폼 잡고 생각나는 거예요. 그러다가 새로운 사건이 투입되면 후닥닥 그 꿈에서 다 깨져버리고. 전기세 갚으세요, 하면 꿈이고 뭐고 현실로 돌아와서 다 깨지고.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만든 세계인데, 문제는 이 세계에서 예수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들어갑니다. 왜? 인간은 벽을 밀어도 벽이 밀릴 뿐이지, 벽을 넘어갈 수는 없어요. 이게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라 하는 겁니다. 내가 머리 깎는데 니가 머리 깎을 수는 없고, 내가 목욕할 때 니 몸은 깨끗하지 않고. 내가 꿈을 꿔도 내 꿈이지, 니 꿈이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은 남하고 타협하고 단합한다고 하는데 전부 다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두 사람이 각각 갑, 을 계약할 때 의미가 달라요. 우리는 합의했습니다. 합의 같은 소리하네. 니는 나한테 이용당했어, 저 쪽도 니는 나한테 이용당했어, 서로 이용당했다는 거예요. 남양분유 갑을이 계약할 때 갑을이 계약서에 나오는 용어 아닙니까? 심지어 같이 손잡고 가락지 끼우는 결혼식장에서도 신부의 노림수와 신랑의 노림수가 다른데요. 주례할 때 봐요. 둘의 노림수를 본다니까요. 남편은 감격스러워서 울고요, 남편은 좋아서 울고 있는데, 신부는 뭐하고 있느냐 하면, 가만 있어보자, 신혼여행 계약이 제대로 됐나, 아마 그 여자 살림 잘하고 살 거예요. 남자는 분위기에 취해있는데 여자는 실용적인 거 생각한다니까요. 주례하면서도 다 보여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만든 예수를 내가 벽에다 그림 그려놓고 그 그림을 보고 내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내가 했기 때문에 그냥 믿어주는 거예요. 그것은 백설 공주와 똑같은 거예요. 지가 보고 있는 거울보고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지가 지보고 못났다고 누가 하겠어요. 못 났다하면 깨어버릴 텐데. 거울 안 깨지려면 똑바로 이야기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매일같이 기만하면서 살잖아요.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기만하고. 응답된 적도 없는데 주께서 응답할거라고 자꾸 그렇게 반복적으로 하는데 이 반복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심리학에서는 ‘학습효과’라 하는 거예요.

모든 교육은 교회든 성당이든 학습효과에 대한 이미지에 불과한 겁니다. 계속해서 반복하면 뭐라도 믿어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실제와 믿음 관계없어요. 계속해서 반복하면 주기도문 천 번만 해 보세요. 훌라라 튀어나오고 방언 튀어나오지요. 기도 못하는 사람들, 기도 못해요. 교육을 받아보세요. 잘하지요. 우리교회 저녁에 기도 안하잖아요. 다 기도 잘했던 분들이에요. 대중기도 10분씩 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교회 와서 기도하라니까 그 다음부터 못한다고 다 빼버려요. 만날 나만 기도하고.

진리는 고통 속에서만 외침으로 나와요. 그런데 고통이라 하는 것은 어떤 고통인가 하면 아프다, 이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 세계관의 무너짐, 그동안 나를 포근히 감쌌던 나의 궁전이 화재, 부도, 사고, 또는 배우자의 사별, 자식의 교통사고 하여튼 어떤 일도 좋아요, 그게 와르르 무너질 때, 비로소 거기서 진리가 고통 속에서 나옵니다.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질문형식으로. 영어로 하면 Why, 왜? 하필이면 왜 접니까? 신이시여, 하필이면 왜 접니까? 사울이 뭐라 했습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다른 말로 하면, 왜 하필이면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주님말씀은 더욱 가관입니다. “니가 나를 핍박했잖아.” 세상에! 좋은 관계로 화목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항상 그거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핍박의 대표자, 누구보다도 핍박했기에 구원에 적절하다 이 말이에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이는데 적절하다 이 말이지요. 정말 적합한 존재지요. 집사님은 “저는 핍박한 적 없는데요.” 이리 이야기할 거예요. 매일 같이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관계되면 ‘아하, 눈만 뜨면 핍박하고 있구나!’ 아실 거예요.

사도바울보고 하는 게 “네가 나에게 핍박하는 자다.” 결국 질문형식으로 말미암아 진리는 그 사람에게 타고 들어오는 겁니다. 꿀통 밑바닥을 쑤셔버리면 꿀이 와르르 쏟아져가지고 그 쑤신 젓가락에 다 타고 들어오지요. 주님께서 뭔가 내가 주 예수를 믿는다는 자체를 완전히 밑 둥지부터 터트려 버려야 돼요. 터트리면 폭발하지요. 폭발하면서 우르륵 쏟아지는 그 무엇,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주께서 나를 믿게 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는 사실, 내가 주님을 찾아간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찾아오는 능력, 그 능력이 나를 윗 층에서 나에게 물을 확 부어버리면 나는 어~푹! 하지요. 물을 온 천지에 뒤집어 씌듯이 주의 능력이 피의 능력이 뒤집어씌우게 되면 그것이 거룩입니다.

이제는 거룩을 뒤집어썼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질문입니다. “나는 왜 죄인입니까?” “나는 어떻게 해서 죄인 되었습니까? 라는 것. 언젠가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한 게 있잖아요. 이렇게 질문하면 잘한 겁니까? 잘못된 겁니까? 질문 왔을 때 제가 답변하기를 잘못이고 잘했다는 그것이 상관없는 근거를 가져보세요. ‘내가 이건 참 잘했어.’ ‘이건 참 못했어.’ ‘이건 죄야.’ ‘이건 의야’ 라고 그런 구분조차 필요치 않는 어떤 다른 근거를 제시해 보라고 했습니다. 나쁜 일 했기 때문에 벌주고 착한 일했기 때문에 복주는 그런 근거 말고 선악 근거 말고 착하던 안 착하던 관계없이 계속 은혜주시고 복주는 그 근거가 있어야 돼요.

사실 우리 인간이 사는 게 바르게 살아서 사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주님 앞에 한 것보다도 더 많은 은혜를 지금 누리고 있어요. 나쁜 짓해도 오늘 은혜 받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꼭 나쁜 짓 적게 하고 착한 일했기 때문에 보너스로 하루치 인생을 마치 부여받은 것처럼 생각하기를 좋아해요. 우리가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해야 자기 위신도 살고.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주고받는 게 있어야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라. 우리가 주님 앞에 해준 거 없어도 너무나 많고 크게 우리의 행동, 생각 보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주시는 은혜로 우리는 매일같이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서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 ‘더 살 이유 없다.’ 내가 더 살 이유가 없어요. 그러면 그 말은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살 이유를 내 쪽에서 찾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살려내시는 쪽에서 이유를 찾아내야지 내가 더 살아야 돼! 무슨 이유 때문에? 자식 때문에. 5월 달에 상견례 하는데 부모 없으면 안 되니까 더 살아야 돼! 그건 말이 안돼요. 더 살 이유 없습니다. 그냥 주님이 자기 계획 잡으려고 우리를 억지로 살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의 특징이 뭐냐 하면, 말씀 해석의 능력이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떼어 내게 하는 눈이 있어야 돼요. 모든 목사들의 성경해석은 뭐냐 하면, “자, 우리 손 털고 그만 떠납시다!” 하는 그런 붕붕 뜨는 느낌을 제공해야 돼요. 저는 그걸 물결 또는 파도라고 하는데 성경의 설교 말씀을 들으면 우리가 자꾸 시동 거는 것처럼 부릉! 부릉!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돼요. 이 세상 자체에서. “아이고, 일이 안 되도 할 수 없지 뭐.” 이런 식으로. 나를 억매고 귀신이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이 말씀 들으면 그 붙잡는 힘이 맥이 없어지면서 툭툭 떨어지는 것 같은 마치 먼지 털 듯이 “됐어! 됐어! 그만 붙들어!” 하는 식으로 떨어져 나가야 됩니다. 그게 말씀해석이에요. 그래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에게만 은혜 되는 말씀, 그게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죄 많은 세계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떨어져나가게 하는 겁니다. 애굽이거든요. 출애굽. 애굽 같은 이 세상에서 떨어져나가게 하는 떼놓는 그런 능력, 그런 능력이 있을 때 우리가 그동안 절망이고 고민거리고 걱정근심거리가 그게 근심 걱정됐던 이유가 우리가 거기에 목 달고 거기서 어떤 결정을 지으려고 내가 짐 싸들고 거기에 쳐들어갔기 때문에 오히려 말려든 거예요. 마귀 장난에 말려든 거예요. 떨어지면 되는데 인생에 같이 말려든 겁니다.

젊은 사람들의 슬픔이란 게 그거에요. 자기가 선택한 일에 칡넝쿨처럼 자기가 꽁꽁 묶어져 버렸어요. 내가 선택했고 내가 결정해서 막상 들어가 보니까 그 쪽에서 나를 식물인데 동물처럼 곤충들을 감아쥐는 삼키는 그런 것처럼 내가 저 회사 취직은 내가 결정했어. 내가 주인공이야, 내가 하나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행동할 거야, 했는데 들어가 보니까 그 회사에 자기가 빼도 박도 못 하게 말려들어가지고 이제는 나는 이런 짓하면 회사 그만 둘 거야, 사표 낼 거라고 다짐하고 회사 들어갔는데 막상 어느새 5년 지나면 자기가 자발적으로 그 일에 무섭게 매달리고 뿐만 아니라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한테 그걸 오히려 독려하고 “회사 다 그런 거야.” “눈 감아, 그런 거 모른 척해! 이것저것 따지면 세상 못살아. 여기에서 나가면 이런 월급 어디서 주는데?” 스스로 자기를 기만하면서 존재의 의미, 인생의 의미도 없으면서 돈, 돈, 돈만 보고 말려들어 살아가는 거예요. 모든 인생이 다 그렇습니다.

슈바이처처럼 의사하겠다고 떡 개업해 놓고는 나중에 뒷돈으로 제약회사에서 돈 받아먹은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 사회가 내가 결정한 그것이 나는 주도권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까 이미 저쪽에서 주도권을 쥐고 나를 마음껏 부리고 있는 거예요. 그 세계가. 그 세계를 누가 아시느냐, 우리 주님께서는 아시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길게 이야기했지만 아직 무슨 이야기를 안했느냐, 형제란 말을 아직 안 꺼냈습니다. 너무 난해한 말이라서.

분명히 형제라는 말은 원래 개별자는 서로가 소통될 수가 없어요. 따로 노는 거예요. 그런데 11절 끝에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형제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말이에요. 예수님을 부르면 형제 되는 겁니까? 아니지요. 형제간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겁니까? 여기 형제 앞에 뭐가 전제 되는가 하면, 하나라고 되어 있지요. 하나에서 낳기 때문에 형제라는 말이지요. 방향을 잘 봐야 돼요. 하나이기 때문에 형제지, 형제라고 해서 하나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은 바로 형제에서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 구약성경이기도 해요. 이삭에서 아들 몇 명 태어났지요? 둘이지요. 그것도 쌍둥이로 동시에 태어났지요. 누가 봐도 뭡니까? 누가 봐도 하나지요. 쌍둥이로 태어나게 해놓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누가 봐도 하나에서 태어났는데 그게 결과적으로 도저히 맞지 않는 완전히 갈라서야 될 둘로 만들어서 둘이 하나 될 수 있는 방법은 애시 당초 없었더라 하는 것을 알려 줍니다.

에서하고 야곱하고 손잡고 우리 하나 하자,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너희 둘이 화합했나? 그러면 내가 하나로 쳐줄게.” 이런 거 없습니다. 하나에서 나지 않으면 하나 될 수 없습니다. 둘이 됐다는 말은 그 둘은 하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둘에서 나온 거예요. 둘에서 나왔는데 창세기26장에 보면 분명히 원천은 이삭과 리브가 하나로 돼 있는데, 그러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한 형제인줄 알았는데 한 형제가 아니었다 말이지요. 한 번 적어보지요.

둘로 가봅시다. 하나라고 여겼는데 하나는 이삭이거든요. 부인이름은 리브가고요. 이삭이 하나인데 둘되었으니까 하나에서 둘은 되긴 되었는데, 둘에서 하나로 가는 길은 끊어졌어요. 나오는 길은 됐는데, 돌아가는 길은 없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이삭이 뭐로 갈라져요? 이삭이 둘로 갈라져야 되겠지요. 이삭 하나 있고, 이삭을 이삭 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삭의 자리가 있어야 하지요. 이것은 에서와 야곱 낳기 전에 이미 보여줬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보고 아들을 죽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럼 처음에 죽어야 될 자가 누굽니까? 이삭입니까? 이삭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이삭이죠. 그런데 막상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진짜 죽긴 누가 죽어요? 이삭이 죽지 않고 수풀에 있던 수양이 죽지요. 어? 양이 등장해요. 그러면 수양이 갑입니까? 이삭이 갑입니까? 수양이 갑이고, 이삭이 을이 돼 버린 거예요. 이삭은 누구 때문에 살았어요? 하나님은 수양을 잡고 이삭을 대신 살려준 셈이 된 거죠. 여기서 벌써 부활의 의미가 생깁니다. 이게 로마서 4장에서는 수양이 예수님입니다. 이삭은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 이렇게 되잖아요. 왜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이니까 살아야 되거든요. 맹세에 의해서.

그러면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삭은 죽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죽어야 되는데 어떤 분 때문에 살았다 이리 되는 거죠. 그러면 처음부터 이삭은 살아야 될 가치가 있다? 없다? 없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삭에서 나온 야곱과 에서도 둘 다 죽어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 이삭도 죽어야 되고 이삭 계통에서 나온 에서와 야곱도 죽어야 되고, 이 죽어야 되는 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육’이라고 하며, 육의 죽어야 될 원인을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죄라는 것을, 죄라는 개념을 말하기 위해서 인류를, 역사를 계속해서 추진시켜 왔고 이끌어 온 거예요. “신체 육질로 돼 있습니까?” “그럼, 죽어야 되겠네요.” 그럼 우리 생각은 “죽어야 될 걸 왜 만들어놨어?” 이리 나온다고요. “죽으려면 애초부터 태어나지 말지 왜 만들었습니까?” 라는 그 주제, 그 주제가 욥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이여, 이유 없는 고난이 올 바에야 차라리 거기서 죽었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왜 저를 살려줘서 어른 돼서 이런 수모를 당하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욥이 하나님에게 원망 투로 질문을 하지요. 제가 아까 강의할 때 뭐라 했습니까? 진리는 어디서 나온다? 고통에서 나오고 고통이라 하는 것은 질문형식을 통해서 해답이 주어지지요.

결국 인간은 아무리 기도안하고 입 다물어도 하나남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는 오직 기도를 인정하는 방식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게 하시는 기도만 인정받기 때문에 뒤에다가 뭘 붙이라고 합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라하시는 겁니다. 그럼 문제가 풀리는 겁니다.

왜 우리 기도는 우리가 했는데 왜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 없고 질문할 생각도 없었지요. 왜, 하나의 남녀호랑개교 같은 주문 같으니까. 예수이름으로 해야, 아멘하고 빨리 끝낼 텐데 그거 안하고 있으면 계속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가, 일종의 주문 됐어요. 그거 빠지면 응답 안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말씀과 진리하고 아무 상관없는 자기세계, 아까 자기 개별자의 세계의 자기 한 맺힘을 푸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주께서 기도하게 하시는 거, 로마서 8장에서는 성령께서는 탄식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기도하게 하실 때 그 사람의 응답은 뭔 줄 알아요? 응답은 기도하는 당사자 그 자체가 응답이에요. 기도하라, 에 말씀에 해당되는 응답을 주께서는 기도하게 하셔서 이루어내시는 거예요. 기도해서 응답받자, 하잖아요. 응답 받는 거, 그거 응답받는 거 아니에요. 지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해요. 왜? 기도해놓고 뭔가 얻어야 기도한 보람이 나니까. 사실은 그게 응답이 아니고 기도하게 된, 기도하는 여기에 내가 말려든 자체를 자기가 믿는 거, 그게 기도응답입니다. 왜냐, 그때부터 주의 말씀에 쓰여 지기 때문에.

전에는 주의 말씀을 가져다가 내가 잘되기 위해서 이용해 먹을 생각을 했는데, 어떤 고통 가운데 있어보니까 내 사적인 모든 것은 허물어지고 주의 말씀의 용도에 맞추어서 주께서 강제로 우리를 거기다가 동원시키더라 말이지요.

예를 들면, 야고보서4장 마지막에 보면, 인생은 무엇이냐, 인생은 안개지요. 안개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체험해야 되지요? 말씀을 체험하라 하는데. 무슨 수로 안개를 체험할까요? 어떻게 해야 내 인생이 안개를 알까요? 안 되지요. 자기를 높여서 토막 내면 안 되지요. 안 되면 말씀은 응답되지 못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바로 인생은 안개라는 게 내 식으로 실천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그것이 바로, 고 모습이 바로, 안개의 모습인 거예요. 주께서는 성공한 거예요.

우리는 그 말씀에 실패하고, 옛날에 학교 때 읽었던 단편소설에 호손이란 사람이 지었던 ‘큰 바위 얼굴’ 있지요. 큰 바위 얼굴이 있는데, 마을사람들에게 희망을 제공하는 거예요. 언젠가는 저 얼굴을 닮은 사람이 와서 이 마을을 살릴 것이다. 그런데 진짜 온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마지막 노을빛에 마을 사람을 돌본 사람은 누구냐, 바로 큰 바위 얼굴 같은 사람이 올 것이라고 믿고 기다렸던 본인이었지요. 다른 사람들이 그걸 인정해 주었잖아요.

성경말씀이라 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걸 지키려고 해요. 왜, 지켜야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 기쁘게 하는 것이 인간의 피조물의 합당한 존재의 의미라고 우리는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거든요. 조직신학에 나온다고요. 인간은 뭐냐,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케 하기 때문에 그 감사하는 방법은 뭐냐, 말씀을 지키면 된다. 우리는 다 배운 거예요. 마치 바리새인들이 배우듯이, 바리새인들이 유대교에서 배웠듯이, 유대교방식이고 바리새인방식이라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이야기해준 사람이 없어요. 왜, 인간은 누구나 그러고 싶으니까. 그게 잘못됐다는 건 자체가 쉐마, 쉐마, 들어라, 들어라 해가지고 묻고, 듣고, 지키면 영혼 된다고 다들 그렇게 하는 거예요. 왜냐, 교회는 양육하고 양육해야 지도자가 지도자 값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수요일날 설교시간에 뭐라 했던가요? 마태복음 23장 이야기했지요. 마태복음 23장에서 지도자가 누구냐, 아비가, 지도자가 누구라 했던가요? 중요한 말 했어요. ‘하나’라 했지요. 하나라 했다 말이에요. 만약에 메시아가 지도자라 하면 쥐나 개나 다 등장할 거예요. ‘하나’라는 말은 다양성은 좀 나가줘! 이 말이에요. 다양성은 나가줘!

오직 지도자와 아비는 ‘하나’에서 나온다. 그 하나에요. 말씀을 지킨다는 것, 오늘 본문과 같이 형제가 된다는 것, 이것은 형제가 된다고 할 때는 우리는 이 말씀 듣고 가만히 있을 우리가 아닙니다. 형제 될 수 있는 모든 종교적인 방법과 신앙적인 방법 등 다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요. 다~ 끄집어냅니다. 다 끄집어내놓고 그 끄집어낸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라는 것을 추궁 받는 식으로 형제가 되는 겁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여기 예수님은 몇 분입니까? 한 분이죠.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굽니까? 예를 들어서 ‘나’라고 합시다. 그러면 여기에서 몇 개의 하나가 나왔어요? 예수님 한 분 계시고, 또 하나는 남이 믿으면 안 되잖아요. 내가 믿어야 구원받잖아요. 개별자니까. 저 사람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믿을 때 내가 구원받는다. 그럼 내가 믿으니까 나도 하나로 쳐주어야지요. ½입니까? 말이 안돼요. ⅓입니까? 아니거든요. 하나가 하나니까 하나가 갑자기 둘이 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철학에서는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주체는 그 수로에 종속되는 겁니다. 종속된다, 그런 투로 말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은 반드시 뭘 할 때, 예를 들면, 병이 있는데요. 내가 이 병을 들었다. 맞았어요? 틀렸어요? 내가 병을 들었다. “당신이 들었지 내가 들었어?“ 맞는 이야기잖아요. 이게 틀렸다는 거예요. 뭐가 틀렸는가 하면, 병이 들리 건 맞지만, 거기 ‘나’라는 것은 병과 나는 이렇게 같이 연결될 수 없는 거예요. 어떤 손이 와서 들었다. 이것은 되는데 ”내가 들었다.”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거죠.

예를 들면, 꿈속에서 내가 맥주병을 들었다. 그러면 실제로 들은 거예요? 안 들은 거예요? 꿈속에서는 내가 분명히 들은 걸로 돼 있어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병을 든 적이 없지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모든 것에 꼭 자기를 집어넣어서 하는데, 니체는 그걸 ‘무법적인 습관’이라 잘못된 거라 이 말입니다. 하나의 습관에 불과한 것이지, 가장 쉬운 예는 ‘배가 고프다.’ 하면 누가? 내가 배가 고프다.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냥 배고픈 상태가 있을 뿐이지 내가 배가 고프지는 않는다, 이리 보는 거예요. 배고픈 상태에서 내가 말려든 거다, 이리 보는 거예요. 말 참 어렵지요.

왜냐 하면, 모두 다 하나인데, 사람들은 이 하나를 거부하고 나만의 하나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배고프다, 하면 너도 배고프고, 나도 배고프고, 배고픈 상태는 하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내가 배고프다, 하면 마치 나만 배고픈걸 아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뭡니까? 너 따로, 내 따로 이리 되는 거예요. 너 따로, 내 따로 이리 돼버리면 상대방은 나의 배고픔에 니의 배고픔은 무조건 내 앞에 무시당하는 겁니다.

“나, 예수 믿는다.” 이 말은 뭔 뜻이에요? “니가 믿는 것은 예수 믿는 거 아니다.“ ”어디서? 엉터리 믿으면서 감히 나 믿는 것처럼 어디 같이 맞먹으려고?“ 제가 말을 노골적으로 했지만, 사실은 다들 그래요. 다들.

그러니까 전체주의, 히틀러가 생긴 거예요. 전부 나한테 꿇어! 내가 대변인이다. 술이 한 잔 들어갔다. 그래서 인턴 대학생 엉덩이 움켜줬다. 그게 뭐가 문제인데? 그게 뭔데 사퇴해야 돼! 엉덩이 만질 걸로 왜 사퇴해야 되는 건데? 그게 뭐냐 하면, 어떤 아가씨도 어떤 손이 와서 움켜줬다. 10초 줬다. 10초 후에는 떨어졌잖아요. 떨어졌으면 과거일 아닙니까? 그런데 경찰에 신고를 왜 하는데? 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기억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기억은 누굴 위해 봉사하는 거예요? 누굴 섬기기 위해서 기억하는 거예요? 자기. 세상의 돌아가는 모든 것이 내가 박근혜인데, 박근혜 정권에 니 같은 개망나니가 술 먹고 그런 짓하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나? 대번에 사표 내!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나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니체는 말하기를 모두 가 뭐가 들어갔어요? 주체가 들어갔어요. 그 주체는 누구라 했습니까?

왜 세상은 니 중심으로 돌아가야 되는가, 이유를 대봐라, 세상이 니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유를 대봐라, 그래서 형제라고 할 때, 우리의 오해는 뭐냐 하면, 다 누구를 좋아라고 형제라고 부릅니까? “예수님으로 우리는 형제입니다.” 누구 좋아라고? 나 좋아라고. 이걸 제거해야 됩니다.

나에게서 출발하게 되면 에서꼴 돼요. 자기는 하나님 잘 믿고 동생 때문에 손해 봤지만, 그래도 하나님한테 응답받고. 이스마엘 같은 경우는 하나님께 응답받았잖아요. 그러니까 날 구원하실 거라, 구원하기는커녕 저주 받아요. 그러면서도 자기는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본 겁니다.

우리가 만약에 가룟유다라면 우리가 이스마엘이고 우리가 에서가 아니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룟유다 아니라는 보장을 증거 대 보세요.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전부 다 주님의 말씀에 오해를 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제거하는 해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10분 쉬고 봅시다.

첨부파일 : 안양20130510a-히2장12절(형제와 소자) - 이 근호 목사.hwp (37.0K), Down: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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