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십자가마을(베드로전후서) - 재정리
06십자가마을(베드로전후서) - 재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200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_ cross060109(1강)
* 베드로전후서 - 주께 맡겨라 !!
강의, 이근호 녹취, 한윤범
다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번 기간을 통해서 베드로전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취지와 뜻과 마음이 어떤 것인지 저희들이 감히 알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 지혜의 영이 오셔서 저희를 주장하여,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감추어진 창세 전의 비밀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성령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라는 것이 정말일까?
여기 우리가 성경 속에서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라고 이야기할 때, 역사적으로 이렇게 머리를 굴리고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사기다. 그건 거짓말이다. 기독교가 사기를 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주장해 왔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는고 하면,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 라는 말이 있는데, 이 "살인하지 말라" 라는 글자를 아무리 분석해도, 여기서 "아하, 그래서 살인해서는 안 되는구나" 라고 하는 취지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이걸 분석하면, 즉 죽음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인간이 무엇인지 연구하고, 그것을 전부 종합한다고 해서, 여기서 "그래서 살인해서는 안 되는구나" 라는, 과연 그런 뜻이 나오느냐는 겁니다.
그런 뜻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나오지를 않아요. 그러면 이 "살인하지 말라" 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우리 마음속에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있는데, 이 "살인하지 말라" 라는 문자가 그런 뜻을 대행해 주는 것이지요.
이 동네에 눈이 많이 왔는데, "눈이 오다" 라는 문장은 눈이 무엇이며, 그 화학방정식이 어떻게 되며, 그런 것을 일일이 연구하고 연구하면 눈이 옵니까? 이걸 연구하면 바깥에 갑자기 눈이 쏟아집니까? 아니지요. 눈이 온다는 것은, 눈이 오게 되면 "눈이 오는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자기 마음에 있는 뜻을 이 글자가, 이 문장이 대행해주는 것이지요.
그러니 "살인하지 말라" 라는 것은, 물론 그런 취지가 있더라도, "살인하지 말라" 라는 것 속에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살인하지 말라는 뜻이 딴 곳에 있어요. 그렇게 다른 곳에 있는데, 물론 그게 자기 마음일 수도 있고 말이죠.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살인해서는 안 돼. 살인하는 것은 나쁜 짓이야" 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바깥에 있는 "살인하지 말라. 눈이 온다. 비가 온다" 라는 것으로 대체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 "살인하지 말라" 라는 명령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자기 마음속에 "살인해서는 안 돼. 살인하면 그건 나쁜 짓이야" 라는 것을, 그냥 다른 쪽에서 대신해서 표현해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경 속에 말씀이 있다" 라는 말은 완벽한 사기지요. 완벽한 사기입니다. 왜 그게 사기냐 하면, 성경에 있는 어떤 뜻의 취지라고 해도, 그것이 자기 마음속에 없다고 하면, 그것을 성경이 대신해줘도, "그건 아니야" 라고 하는 거예요.
◈ 지금 눈이 옵니다 ??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눈이 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바깥을 쳐다보니 눈이 안 와요. 그렇게 눈이 안 오면, "지금 눈이 옵니다" 라고 아무리 글자를 써 봐도, 자기 마음에서 눈이 안 온다고 판정을 내린 이상 그렇게 눈이 온다는 것은 그냥 헛소리지요. 그것을 전혀 믿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눈이 온다" 라는 말이 헛소리가 안 되려면, "이 문자를 보고 믿습니다" 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고, 지금 이런 글자 이전에 눈이 오게 되면, 눈이 오는 것을 내가 장님이 아니라서 눈뜨고 보고 손으로 만져서 "이게 눈이구나. 이것이 도넛 빵이 아니고, 돌멩이가 아니고, 눈이구나" 라는 것을 이미 자기 쪽에서 결정을 내린 다음에, 어떤 사람이 "지금 눈이 온다" 라고 하면, "아멘, 할렐루야!"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이미 결정은 누가 하는 겁니까? 자기 자신이 내린 거예요. 그렇게 자기가 내려놓고 자기 마음속에 이런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는 차원에서, "지금 눈이 온다" 라고 하면, "동의합니다!" 라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 이미 자기 마음속에 나름대로 하나님 뜻이 !!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는 것입니까? 성경이라는 책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성경책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성경에 있다고 우기는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이미 자기 마음속에 나름대로의 "하나님 뜻은 이러 이런 것일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자기가 두꺼운 성경책을 통해서, 자기 취향에 맞고 자기가 동의하고 싶은 것을 줄을 그어가면서, 그것을 그냥 발췌하는 식이지요.
그렇다면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그것은 명백한 사기지요. 이 말에 동의를 전혀 하지 않는 분위기인데, 그게 명백한 사기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구미에 맞는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골라 가지고 주의 뜻이라고 하고, 그 나머지는 모르겠다고 해버리면, 그것은 아직까지는 자기한테는 유보된 하나님의 뜻, 즉 아직까지는 자기가 동의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죠.
◈ 그건 교회의 술책이 아닌가?
그래서 교회사 쪽으로 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소위 진짜 똑똑한 사람은 "성경책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반발하면서, 그것은 교회가 성경을 이야기하면서, 그 성경을 이야기하는 교회라는 주체가 카리스마와 권위를 챙겨서, 그 권위를 가지고 성경 외에 다른 방면에서도 강력하게 권위를 작용시키려는, 그런 하나의 정치적 술책에 불과하다고 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성경을 풀이하니까 다른 것도 나한테 지배를 받아라. 너의 영혼을 나한테 받치란 말이야. 재산까지 받치란 말이야" 라는 하나의 수법이란 겁니다. 그렇게 사람의 영혼을 장악하려는 하나의 수법으로서, 그 시발점으로 "성경을 권위 있게 해석한다" 라는 것을 먼저 넌지시 미끼처럼 던지는 하나의 교묘한 교회의 정치적 수작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렇게 반발하는 사람들이 나왔는데, 그런데 그 이후에 보면 그 정도는 반발도 아니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머리를 아주 잘 쓰는 사람, 똑똑한 사람에게는 이런 것이 있어요. 이 대목에서 은혜를 받으면 곤란한데 말이죠(ㅋㅋ).
◈ 모든 것이 다 없어지는데 !!
무엇이 또 문제냐 하면, 사람이 "나는 믿습니다" 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누가 믿어요? 자기가 믿어요. 그러면 "당신이 믿습니다" 라고 하는 믿음이 나중에 세월이 가고 늙으면 이것이 사라지지요. 그러면 "믿습니다" 라는 감정도 사라지지만, 그렇게 "믿습니다" 라고 우기는 자기도 늙어 죽어서 사라집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에 있는 어떤 명찰, 즉 여기 형광등이 있다고 해도 수명이 다하면 없어지지요. 없어지면 이것은 지워지는 겁니다.
여기에 '나' 라는 것이, 즉 자기가 백 살을 살다가, 제가 너무 욕심을 냈습니까? 한 오십 년을 살다가 죽으면 자기도 없어지는 것, 즉 지워지는 거예요. 모든 것이 말이죠. 지금 저도 머리카락이 빠지는데, 그러니 "머리카락이 있다" 라고 하지만, 그렇게 있다고 여기는 것은 다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예수를 믿는다고 여기는 것도 없어지는 거예요. 오동잎이 가을에 떨어지면, 오동잎이 없어지는 거예요. 오동잎 하나에다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쓰더라도, 이 잎 떨어지면 여기 문자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그렇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모든 믿는 것은 전부 사라지기 위해서 예비가 되었다는 겁니다. 모두가 없어지는 거예요. 여기 시장에 가서 "나는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뛰어다녀도 누구 하나 안 알아줍니다. "나는 믿습니다" 라고 해도 "저 양반은 저러다가 아마 나중에 또 부처를 믿을 걸"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는고 하면, 무엇이든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조만 간에 없어지기 때문이에요. "구름이 있다" 라고 해도 없어지지요. "해가 있다" 라고 해도 없어지는 겁니다. 모든 것은 없어지는 거예요. 어디로 없어지던 간에 다 없어지는 거예요. 무엇이든지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어디로 없어지는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초반부터 목이 쉬면 곤란한데 말이죠.
◈ 천국과 지옥도, 역시 없는 것이 아닌가?
어떤 사람은 "죽으면 천국에 간다" 라고 하고, 또한 어떤 사람은 "죽으면 지옥에 간다" 라고 하지만, 더 똑똑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저 앞에 있다" 라고 하면, 그것이 있는 것인데, 그런데 그 있는 것은 어떻게 된다고 있습니까? 역시 없어지는 거예요.
◈ 파르메니데스 - '모든 것은, 무(無)로 돌아간다' !!
심지어 과학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지구도 나중에 블랙홀이 되면 없어진다"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있다고 하는 것은 전부다 없어지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어디로 없어지는고 하니, 없음으로 없어진다는 겁니다. 없음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 라는 철학자는 모든 것이 다 어디로 없어지냐 하면, '무(無)', 즉 없음으로 없어진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없음으로 없어지니까, 이 없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왔다" 라고 '존재론'을 주장했다는 말입니다. BC 400년경에 헬라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놀랍지요?
예를 들어서, 집에 혼자 화장실에 앉아 가지고 상상을 하는 겁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그래 믿지. 내가 예수를 믿는데, 예수 믿고 있는 내가 없어지면 예수도 없어질까? 예수도 없어지고 나도 없어지면, 그러면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그 것도 없어지잖아. 그렇게 없어지면 나는 어디로 가있는 것이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 혼자만의 게임놀이 !!
한 3살, 4살이 된 애들은, 엄마가 간식을 주려고 방문을 열어보면 혼자서 떠들어요. 여자애들은 모르겠지만, 남자애들은 "피융, 피융" 하는 겁니다. "우따따따따, 으악!" 하고 말이죠, 3살 먹은 애가 자기 혼자서 말로 하는데, "빨리 항복하란 말이야. 항복하지 않으면 죽일 거야" 라고, 그것은 엄마가 와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비행기가 정말로 있습니까? 비행기가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렇게 없는데, 혼자 있다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창출하느냐 하면, 공중전을 창출해요. 적군 비행기와 아군 비행기가 서로 공중전을 벌인다는 말이죠. 그런데 엄마가 문틈으로 보니까 비행기가 없어요. 그냥 아이 혼자서 논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혹시 예수를 믿는 것도 혼자 노는 게임이 아닙니까?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면, "저 사람이 뭐하지? 없어질 것을 가지고 저렇게 놀면, 그것이 재미가 있는가?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재미가 있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파르메니데스에게 있어서 정확한 것은 뭐냐 하면은, 정확한 것은 예수도 공자도 제우스신도 정확한 것이 아니고, 그것도 다 지워져서 없어지는 거예요. 정말 정확한 것은 "모든 것이 사라진다" 라는 것만이 정확하다는 겁니다. 물론 그가 예수나 공자는 몰랐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사라진 것만이 정확한 것이 아니고, "그 사라질 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라는 겁니다.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사라지려는 것들이 없을 '무(無)', 즉 없음으로 사라진다면, 현재 있는 것들은 없음에서 나온 것들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없음에서 시작해서 없음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진리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모든 것은 사라진다 !!
혼자 노는 게임, 그것을 시체놀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소위 '믿습니다' 라든지, 뭐 교회가 어떠니, 천국이 어떠니, 율법이 어떠니 하는 것, 베드로전후서가 어떠니, 구속사가 어떠니, 언약이 어떠니, 그렇게 아무리 떠들어도, 결국은 그런 것은 다 없음으로, 즉 무(無)로 다 사라질 것들이란 말이죠.
혼자 재미있게 노는 3살 먹은 아이가, 그렇게 자기 혼자서 '두두두두' 하면서 적군들과 공중전을 벌리다가, 그런데 그만 방에서 나오려고 하다가 문에 받쳐서 죽어버렸다고 하면, 방금 적들과 공중전을 벌리고 혼자말로 싸우면서 놀던 아이가 그만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리란 것은 뭐냐 하면, 이렇게 없어지는 것만큼 정확한 진리가 있으면 나와 보라는 겁니다. 이것만큼 정확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즉 최고의 진리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 라는 거예요. 그렇게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 어느 날, 친구가 다가왔을 때 !!
제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살인하지 말라" 라는 것은, 그런 문장이 있기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 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그러한 문장이 있기 이전에 벌써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아무튼 어딘가에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친구가 그립다고 해서, 자기가 그럴싸한 친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까? 사실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우상인데, 그러니 우상은 없어질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친구라고 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자기가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전혀 아니고, 어느 날 친구가 다가왔을 때 친구가 되지요. 친구가 다가왔을 때 말입니다.
◈ '예수를 믿는다' 라는 마음이 나에게 왜 생기는가?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은, 자꾸 어디서 툭툭 불거져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인해선 안 돼. 살인하는 것은 나쁜 것이야" 라는 마음이 자기에게 왜 있는지 생각해 봐야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했을 때, 그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마음이 '나' 자신에게 왜 생기느냐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살인하지 말라" 라는 것이 '너와 나' 할 것 다 없이 모두 다 생기면 "아, 이렇게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진리구나" 라고 하겠는데, 만약에 자기 혼자 살인하는 것이 나쁘다고 이야기하고, 옆에 있는 친구는 "살인하는 것이 뭐가 나빠? 좋은 것이지" 라고 한다면, 자기에게 생긴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진리가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나만이 갖고 있는 나의 개성일 수가 있고, 하나의 특성일 수가 있다" 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 가지고, 즉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진리다" 라고 우기다간 다른 사람한데 욕먹을 수가 있단 말이지요. 즉 혼자 노는 게임일 수가 있단 말예요.
그 아이의 경우에, "엄마는 이것이 얼마나 재미있지 모르는데, 왜 같이 안 놀아?" 라고 하면, 엄마는 "그게 비행기가 아닌 걸 알거든" 라고 하면 완전히 아이에게 초치는 것이지요. "빨리 밥이나 먹지, 왜 쓸데없는 것을 왜 하느냐? 그만 놀아" 라고 하면서, 엄마는 아이의 공중전에 가담하지 않지요. 그러면 그 아이 혼자만의 개성이지요. 하지만 혼자만의 개성은 보편성이 없지요. 보편성이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정신적 오락은 아닌가?
여기서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예수를 믿는 마음이 왜 하필 나에게 생겨야만 하는가?" 라는 것을 자문해본 적이 있습니까? 혼자 노는 게임일 수도 있잖아요. 재미가 있어서 혼자만 즐기다가 나중에 시시해지면 모든 것이 사라지니까, 이것이 사라져버릴 한 순간의 정신적 오락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진리가 되신 성령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제가 그러한 질문이 나올까봐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성경에 무엇이 있다는 말은,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김건모의 '핑계' 라는 말이죠.
성경에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이미 자기 마음속에 그런 마음이 있는데, 성경책을 펴서 자기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재확인하는, 즉 하나의 후원자 하나 얻는 식으로, 호응해 달라는 식으로 성경책을 펴서 "성경책을 봐라. 내 마음과 똑같네" 라고, 이런 것이 있다고 지목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 헬라철학이 기독교 신학의 근간임을 알아야 !!
헬라 사람들은 자기들을 '헬라' 라고 부르지 않는데, '그리스' 라고 하지요. 그런데 외부에서 헬라라고 하는 겁니다. 이 헬라의 철학적 사고는 놀랍게도, 그 뒤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오늘날 2000년이 넘어서까지, 이 헬라철학이 기독교 신학의 근간을 이루면서 단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그 뿌리도 제대로 모르고, 뿌리를 계속해서 감추면서 껍데기만을 보아왔다는 겁니다. 성경의 내용에 그것이 있다고 해서,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진리다" 라고 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우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그 뿌리는 뭐냐 하면, 방금 이야기한 헬라철학이에요. 존재론에 의한, 즉 "인간은 어디서 생겼느냐? 있는 것은 왜 있는가?" 라고 말이죠. 파르메니데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것밖에 없다" 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없음도 있음에 포함되기 때문에, 없다는 것이 있어줘야 된다는 겁니다. 즉 "현재 달은 왜 있으며, 별은 왜 있으며, 내 마음속에 예수 믿는 것은 왜 있는가?" 라는 것을 추적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는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없는 것은, 있기 위해서 없는 것은 없으니, 있는 것은 없는 것이며, 고로 모든 것은 있다" 라는 말이에요. 즉 전부가 다 있음에서 시작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유대교 히브리사상이 고상하고 성경이 아무리 심오하다 할지라도, 헬라 철학자의 입장에서는 "백 날 놀아봐라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고대 종교가 심오하고, 브라만 종교나 불교가 아무리 깊이가 있어도 말입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제일 밑바닥에, 제 아무리 파고파도 결국은 모든 인간이 거기에 대해서 박수를 칠 수밖에 없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그런 지점에 이미 먼저 도착해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헬라철학입니다.
◈ 사람과 사람을 분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
모든 것이 '있음'에서부터 출발을 한다면, 결국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동일한 마지막 최종점에 모인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류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신이 인간과 인간을 둘로 쪼개서 심판하는 경우는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근거로, 무슨 근거로 심판을 하느냐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데 말이죠.
그러니 심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잘났든 못났든, 마지막에 추궁하고 따지고, 국정원에 가서 물고문을 당해가면서 "당신은 어디서 생겼어요?" 라고 하면, "있음에서 생겼어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있음은 어디서 생겼어요?" 라고 하면, "없음에서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멘, 할렐루야! 당신은 우리편입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인간은, 결국 무식하든 유식하든 따져보면 모든 것은 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온, 동일한 종류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을 따로 분리해서, 한 쪽은 저주하고 다른 하나는 축복을 준다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 스스로 그걸 저주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말이죠. 인간이 볼 때는 말입니다. 그런 것은 없는 거예요.
◈ 구원의 근거는, 인간 내부에 없어 !!
여러분이 이점에 명심을 해주어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여러분이 나중에 천국에 가시거든, 구원을 받은 것은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없는 근거를 하나님이 약속을 통해서 주셨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생산한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 어떤 기적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집어넣어 놓고, 외부에서 침투한 그 기준을 인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지, "내가 사색해서, 연구해서, 탐구해서, 내가 누구인지, 내 믿음이 무엇인지, 그것을 연구해서, 나는 왜 믿게 되었는지, 그런 믿음에 대한 인식론, 내가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라고 하는, 그 과정과 절차에 대해서 분석을 잘 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미 심판 기준조차도, 이러한 헬라 철학적인 근거에서는 우리는 밝혀낼 수 없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나는 왜 예수를 믿을까? 믿는다는 것이 허구가 아닌가? 이것이 혼자 노는 게임이 아닌가? 이 나이에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이죠.
그것이 바로 잠시 사업이 어렵고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뭔가 어디에 기대고 싶어서, 피난처 하나를 마련하는 식으로, "에이 몰라, 올인하자!" 라고 해서, 뭔가 자기 인생을 갖다 맡길 보험 하나를 걸쳐놓는 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자기가 자신에게 스스로 세뇌를 해봤자, 그런 식으로 믿음이 확답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 일단, 털리고 나서 시작해야 !!
그러니까 차라리 털어 버리는 것이 좋지요. 그런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은 털려야 합니다. 강도한테 털려야 되고, 또 복음을 모르는 목사들한테 걸려서 재산을 제대로 몽땅 다 털려야 돼요. 실제로 제가 아는 친척 가운데 하나가 또 누구한테 걸려 가지고 3000만원 몽땅 털렸다는 겁니다. 교회를 옮긴다고 해서 적금으로 넣은 3000만원을 말이죠.
교회가 교인수가 많아서 교회를 옮긴 게 아니고, 큰 예배당이 있는데 너무 시설도 오래되고 썰렁하면 사람들이 안 온다고 하면서 예배당을 새로 짓는다고 해서 돈을 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맞벌이 부부인데, 한 쪽은 계명대학교 연구원이고, 한 쪽은 영어 교사인데, 그 둘이 맞벌이를 해서 아이 둘을 키운다고 하는데, 그만 피 같은 돈 3000만원 날려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대로 털려 봐야 돼요. 털려 봐서, 결국은 "내가 지금 예수란 이름으로 또 신앙 이름으로 놀고 있구나" 라고 말입니다. '두두두두' 혼자 노는 게임에 빠진 거예요. 환각에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성경구절을 택해 가지고 "주여,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자꾸만 자기를 확인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공부하러 왔으니 한번 찾아봅시다. 시편 10편 18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시 10:18)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그런데 문제가 아까도 "살인하지 말라" 라는 문자가 있잖아요. 그런데 세상에 속한 자를 심판하신다는 것이 성경에 분명히 나와있는데, 이것이 지금 우리 감정에 일치되느냐가 문제예요. 일치되지 않는다면, 사실은 그게 정상인데, 일치되지 않아야 해요.
하지만 일치가 안 되는데 억지로 일치되려고 애를 쓰게 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혼자 노는 게임이 빠질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아닌 미신이 되는 것이죠. 무슨 미신이냐 하면, 성경마술을 믿는 미신이 되는 거죠. 즉 여호와를, 예수를 믿는 우상 숭배자가 되는 겁니다.
◈ 일방적 주입과정이, 곧 이스라엘의 1200년 역사 !!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심판을 당해야 하는지, 그것을 우리가 미처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입시켜 버렸어요. 우리가 천국에 가는지, 지옥에 가는지, 그 심판의 기준조차도 일방적으로 주입했다는 겁니다. 그 주입하는 과정이 유대인 이스라엘의 1200년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그 심판의 기준과 함께 시편 10편 18절도 함께 주입이 되어버립니다. 딱 깨놓고 우리에게 성경을 쓰라고 하면, 시편 10편 18절을 우리가 쓸 수가 없어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어내라고 하면, 이런 생각은 전혀 안 되는 겁니다. "나쁜 놈들은 죽여야 돼!" 라는 것은 나오지만, "세상에 속한 자로 하여금 위협지 못하게" 라고 하는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 여러분, 성경을 한번 써보세요 !!
말이 점점 어렵게 되는데, 성경을 전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 믿겠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과제를 내는 겁니다. 즉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써보세요. 성경을 보지 않고 말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하나님이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즉 창조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고, 마지막 심판은 이랬으면 좋겠다는 것을 한번 써보세요"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써놓고 진짜 성경하고 대조를 해보면, 물론 안 맞죠. 맞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맞지 않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이미 성경을 줘도, 안 맞는 걸 억지로 맞추려고 애를 쓸 공산이 크다는 말입니다. 본심이 아닌데, 성경이란 이유 때문에 억지로 믿는 척을 할 가능성이 많지요. 그렇죠? 지금 우리들의 실상이 그대로 폭로됩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을 기다렸는데, 함평을 말이죠.
그래서 이렇게 조작해낸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하루에 성경 3장, 기도는 30분, 예배시간에 앞자리에 등등", 이런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입법자가 되는 거예요. 스스로 말입니다. "살인을 하되 피를 내면 살인이 되고, 찌르는 것은 살인이 아니고" 라고, 우리가 만든 성경책에는 그렇게 쓰지 싶은데, 그런데 막상 성경을 보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맞질 않아요.
◈ 성질이 좋은 사람은 다 지옥에 가라 ??
우리를 보고 성경을 따로 쓰라고 하면 일기장을 쓰듯이 쓰는데, 즉 자기만 구원되고 나머지는 구원이 안 되는, 그런 자기만의 세계관이 나와 버리죠. 보편성이 있는 우주를 통치하고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그 말씀을 창조한 것이 아니고, 말씀의 원리가 거기에 담기도록 창조한, 그런 말씀자체의 내용은 아닌, 자기가 신이 되고 자기가 절대자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스스로 성경책에다 기록하는 거예요.
만약에 까만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 죽으라고 하지 싶은데, 예레미아 7장 16절, "보라색을 좋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고 말이죠, 그리고 성질이 급한 사람이라고 하면, 로마서 1장 16절, "성질이 느린 느림보는 다 죽어라. 지옥에 갈 것이다" 라고, 그렇게 자기한테는 있고 남한테는 없는 것을 말이죠. 그리고 "쌍꺼풀이 없는 사람은 천국에 갈 것이요, 쌍꺼풀 있는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다" 라고, 그렇게 쓸 것이란 말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과격하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이 평소에 성경을 듣지만, 교인들 나름대로 자기만을 옹호하는, 그런 자기만의 계시를 죽을 때까지 편찬해내고 있습니다. 하루의 스케줄은 자기가 편찬해내고, 스스로 자가에게 벌을 세우고, 만약 십일조를 안 하면 벌을 받기 위해서, "주님이 한 달 동안 어떤 매를 때릴까?" 라고 하면서 기다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렇게 마음을 괴롭게 할 정도로 하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30분 늦게 도착하면 "아, 오늘은 30분 늦게 왔으니까, 신께서 어떤 벌을 내릴까? 그 벌의 종류가 어떤 것일까? 갑자기 휴대폰 요금이 많이 나오는 벌일까? 아니면 교통순경한테 걸려서 3만원 벌금을 맞을까?" 라고, 그렇게 스스로 입법자가 되어서, 쉴 새 없이 성경을 자기가 스스로 제조해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 우리 자신이 곧 하나님의 적 !!
따라서 우리의 적이 누구냐 하면, 사실은 우리의 적인 동시에 하나님의 적이지만 말이죠. 그 하나님의 적이 누구냐 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적이라는 겁니다. 로마서 5장의 의하면, 실제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3장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했고 말입니다.
이 말을 겸손하게만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는 말은, "평소에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훈수를 하듯이 대들고 있는가? 어느 정도로 늘 하나님께 대들고 있는가?" 라고 하는, 그 대드는 수법과 정도에 대해서 본인도 모를 정도라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의 얼굴을 할퀴고 있는지, 우리 자신도 그걸 모르고 있을 정도로, 그렇게 죄인이란 말입니다.
◈ 인간은, 스스로는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 !!
제가 거창하게 헬라철학을 논하고 심오한 존재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전기도 안 들어오는데 길게 했다는 겁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로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한번 믿었다고 해서, 있는 믿음을 가지고 우려먹고 재가공을 한다고 해서, 그러한 믿음으로 구원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라는 말씀이 종종 나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행동을 하면, 성경은 말하기를, "그렇게 행동해야만 한다" 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물론 본인은 인정하지 않지만 말이죠.
왜 그렇게 했냐 하면, 모든 것이 성경에 합당하게 되도록 창세 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조치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성경에 응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일상적인 것이 성경이 응하게 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시도는 하나님의 일에 전혀 보탬이 안 되고, 우리 구원에도 보탬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지킨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돼요. 그 대신 "나는 따로 나만의 성경을 제조합니다" 라고 고백해야 돼요.
눈을 감고 아무 곳이나 펴보세요. 예를 들어서, "너희는 거룩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고 떠나라" 라는 것이 이사야 52장에 나오거든요. 그러면 거룩한 것을 떠나지 말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기초로 해서 성경을 제조해요. "부정한 것이 무엇일까? 아, 그것이 나쁜 짓이구나. 그럼 내가 생각한 나쁜 짓은 뭘까?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않는 것이지" 라고, 이렇게 자기가 성경을 제조해 버려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 인간은, 성경을 안 봐도 제조하고, 봐도 제조해 !!
그러니 우리는 성경을 안 봐도 제조하고, 봐도 제조해요. 어떤 경우에도 성경이 합치된 것이 나오는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제조하는고 하니, 그것은 제가 오늘 강의에서 첫 번째로 이야기 한 겁니다. 이미 자기 마음속에 확인한 차원에서 성경을 써요. 그러니 각 사람마다 성경이 다 달라요. 그것을 감추고 우리는 같은 성경을 사용하데, 이렇게 하지만 그것을 풀이하고 해석하는 것은 사람들마다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더 나쁜 것은 뭐냐 하면, 지금 제가 방금 쭉 얘기한 것처럼, 그 어떤 누구도 성경을 응하게 하는 능력은,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있는데,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뭐라고 합니까? 성경이 응하게 하는 것을 자기 쪽에서 노력을 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보다 나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 어떤 성경말씀도 못 지켰는데도, 못 지킨 그 입장에 "이제는 성경을 이만큼 지켰으니까, 더 많이 지켜서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된 생활하자" 라는 쪽으로 될 수가 있고, 그렇게 이해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주님의 얼굴을 할퀴는 셈이 된다는 겁니다. 앞으로 점점 더 말이죠.
◈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성화론의 문제점 !!
그래서 제가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성화론의 문제점'을 교재로서 이렇게 짧게 써놓았다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 강의가 베드로전후서이기 때문에, 로이드 존스 목사와 성화론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성화론에는 뭐가 들어있는고 하면, 모든 개혁주의 신학의 집대성으로서, 그분이 20세기 중반에 공부를 많이 했기에, 그것을 모두 알거든요. 그러니 이분의 성화론은, 20세기 개신교 이후에 나오는 성화론을 집대성한 것인데, 그런데 이게 문제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철학을 그렇게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어 보입니다. 그 양반이 왜 철학을 하지 않는고 하면, 그게 모두 배설물인데 똥인데 굳이 무엇을 하려고 연구하느냐는 말입니다. 어차피 내다버릴 똥오줌을 주워 가지고 주물럭거리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왜 그런 짓거리를 해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안셀무스 이후에, 그것을 스콜라 철학, 혹은 '번쇄 철학' 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그 이후에 어떤 것이 있는고 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거듭난 이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간다" 라고 나오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아니 16세기 이후부터 철학자들에게 그만 된 통으로 얻어맞고, 동시에 교회에 사람들이 안 나오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 칸트 이후에, '이성으로 알아 가는 것이 믿음이다' !!
왜 그러냐 하면, 믿음으로 구원받고 이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야 하는데, 그런데 칸트의 이성에 의해서 도로 믿음이 뭐냐고 따지게 될 때, 그 믿음이 깨지고, 이 자리에 뭐가 차지하느냐 하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이성으로 알아 가는 것이 믿음이다" 라고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천국에 대한 것은 믿음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이성으로 따지면 누구나 납득할 만한 근거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칸트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아닌데, 그도 예수를 믿는데, 그런데 그 예수를 믿는 방법이, 하나님이 특별히 어떤 외부에서 거듭나는 능력을 주셔서 믿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내재돼 있는 것을 '이성' 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순수한 이성이 있어서, 그 이성에 의해서 도덕도 행하고, 그 이성에 의해서 행하는 도덕 중에 하나가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 굴복하고 복종하는, 소위 말씀에 대한 순종과 굴복인데, 그러니 이것도 우리 인간의 이성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성령이 임한 사람만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그들이 훈련과 교육과 계몽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을 못 받는 것이지, 인간이라면 진짜 독한 놈만 빼놓고 설득하고, 그래도 교회에 안 나오면 밀가루라도 주고, 라면도 주고 해서 교회에 나오도록 조치를 해서, 그런 애정과 사랑을 퍼붓게 되면 그 어떤 인간도 예수를 영접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 헤겔이 성육신을 주장한 이유는?
특히 헤겔이라는 사람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 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되려고 했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즉 "하나님이 신이 성육신을 통해서 사람이 됐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인간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겸손함에 의해서, 즉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서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가교 역할을 충분히 낮은 자세에서 허락을 했다는 거예요.
이러한 헤겔의 이야기를 듣고, 그 당시 사람들은 교회에서 목사들이 하는 말을 안 들었습니다. 철학적으로 이미 다 알아버렸는데, 굳이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어봐야 그게 무슨 소용 있겠느냐는 겁니다. 이미 철학적으로 다 알아버렸는데 말입니다.
◈ '거듭나야 구원받는다' 라는 말도 이성으로 납득가능 !!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받는다" 라는 말까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받아들일 만하다는 거예요. 참으로 교묘하지요. 왜냐하면,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라는 입니다. 그게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는 겁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신을 미워하지 않고 신의 사랑이라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 이상, 그 사랑에 의해서 나오는 여러 가지의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는, 그 사랑의 표현이 10대가 됐든 성인이 됐든 그 어떤 것이라도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이상, 그 나머지 연이어 존재하는 절차들, 즉 하나님의 행동도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나쁜 사람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도 그 산타클로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에 있다면 아마 북한의 김정일밖에 없을 겁니다. 아프리카의 그 어떤 미개지를 가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전부 다 좋아하고 영접을 하지요. 왜냐하면, 너무나 사랑이 많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헤겔에 의하면 이미 인간 속에는 뭐가 들어있는고 하면, 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터전이 마련되어있는 이상, 그 터전에다가 성경을 가지고 호소하면, 호소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내용을, 그 메시지를 사랑의 이름으로 쟁반에 담아서 제보하면, 어느 누구도 그 사랑을 거부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이란 기반을 두고 창조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반드시 받게 되어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어떤 사람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미처 기독교의 사랑을 제 때 안 알려 주었기 때문에, 미처 그것을 놓쳐서 그렇다고 보는 겁니다. 19세기말까지는 말이죠.
◈ 칼 라너 - '익명적 그리스도인' !!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라너' 라는 천주교의 유명한 신학자가, 제2 바티칸 회의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준 신학자인데, 그가 무엇이라고 하냐 하면, "우리에게 전해서 비로소 구원을 받는다면, 아예 전해지지 않아도 기독교의 복음과 유사한 사랑의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고 하니, 문화 인류학이 발달해서 미개지역까지 조사를 해보니까, 이미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더라도 속죄양에 의한 의식과 대속의 사랑과, 그렇게 인간의 품위 있는 교양과 신에 대해 흠모하는 종교심, 이런 것이 비록 기독교의 성경책이 없더라도 인간의 기본적인 자질로서 바탕이 된 공통점이 있더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건 뭐냐 하면, '익명적 그리스도인', 즉 꼭 집어서 교회에 안 나와도 이미 잠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즉 구원받은 자들이 많다는 겁니다. 사실 이 익명적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이미 16세기 때 쯔빙글리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 있는 사람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안 다니는 이슬람교나 또는 헬라 철학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입니다.
이미 그렇게 이야기가 되어있었는데,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이미 우리가 매일 성경을 보면서, 보는 순간 나름대로 또 자기만의 성경을 제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왜 우리가 그동안 몰랐느냐는 말이에요. 계몽이 되지 않아서 몰랐어요? 제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몰랐습니까? 과연 그런 겁니까?
자기가 계속해서 성경을 제조하면서, 일단은 그것에 맞춰서 신앙생활을 해보다가, 그것이 실제와 영 맞지 않다고 싶으면 다시 다른 것들로 세계관을, 시스템을 바꿔 가지고 다른 패러다임, 즉 다른 인식구조를 가지고 성경을 보다가, 또 안 맞으면 또 바꾸고 한다는 말입니다.
◈ 결국, '혼자 노는 게임'이 아닌가?
이게 뭐냐 하면, '혼자 노는 게임' 일 수가 있잖아요. 그렇지요? "두두두두, 으아!" 라고 하면서 혼자 노는 게임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바로 이러한 우리의 허점과 한계와 부실함을 미리 알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베드로전후서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전후서는 사실은 굉장히 어려워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베드로전후서보다 사도바울이 약간 더 어렵다고 하는데, 베드로전후서는 사도바울 서신에서 이미 기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베드로전후서는 체계가 없는데, 그것은 이미 체계가 잡혔다고 생각하고 그냥 마구 퍼부어 대는 내용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베드로전후서에서 체계를 잡으려다가 모두 다 실패했어요.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다만 보통 신학책에 이렇게 나옵니다. "1절부터 몇 절까지는 신학적인 사항, 여기저기는 권면적인 것, 이쪽은 생활적인 면", 그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합하면 어떤 흐름인고 하니, "흐름은 없음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과연 그러하냐"? 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지금 피곤해 보이는데, 7분만 쉬고 하겠습니다.
2013,5,2 재정리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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